♣복음말씀의 향기♣ No4485
1월30일 [연중 제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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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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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zs6GCVUlyAM
[성 아우구스띠노수도회 조우형 마태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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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승승장구하던 다윗이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
사무엘기 하권은 다윗의 승승장구와 우여곡절, 그리고 처참한 몰락과 심연의 바닥 체험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다윗왕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성왕으로 칭송받습니다. 사실 다윗은 참으로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의 성품은 온화했고 성실했으며, 권위를 인정할 줄 알고 자신의 할 일에 대해서는 언제나 최선을 다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신앙심은 어린 시절부터 출중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님의 성궤를 다윗성에 안치하는 일이었습니다. 계속되는 전투 속에, 펄럭이는 야전 막사 휘장 가운데 모신 주님의 궤가 마음에 걸리자 그는 주님을 위한 성전을 지어 드리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더욱이 다윗은 은혜를 저버리는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라, 은혜를 잊지 않고 보답할 줄 아는 가슴 따뜻한 남자였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 자신을 살려준 친구 요나단의 우정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이자 왕자처럼 살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다윗이었지만 그 역시 평생 씻을 수 없는 두 가지 과오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가 저지른 죄의 심각성을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간음죄와 살인교사죄입니다. 요즘 같으면 아무리 정상 참작을 해준다 해도 징역 20년 감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둘 중 한 가지 죄만 저질러도 사형에 처하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토록 신앙심 깊고 충실하던 다윗이 되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데에는 배경이 있습니다. 10년 이상의 세월 동안 그는 늘 승승장구했습니다. 나가는 전쟁마다 승전보를 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장이 해이해진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다윗은 심란한 전쟁터로 나가지 않고, 후방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영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윗은 너무 높이 올라갔습니다. 백성들이 환호하고 군사들은 충성심을 보이자 잔뜩 기고만장해졌습니다. 주님 두려운 줄 몰랐습니다. 휘하 부하들은 피비린내 나는 전선에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데, 그는 술과 고기, 향락에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정의롭고 공의로우신 주님께서 이런 다윗을 그냥 두실 리 만무합니다. 즉각적인 조치를 취하십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으로 그를 내려보내신 것입니다.
다윗 인생의 부침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리 높이 올라갔다 할지라도, 오늘 우리가 아무리 강한 믿음 안에 경건하게 살아가고 있다 할지라도,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 한방이라고 잠시 자만하는 순간, 순식간에 죄의 깊은 나락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 사건을 통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더욱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주님의 크신 자비는 우리 인간의 죄를 훨씬 능가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죄라 할지라도 주님 자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자세는 다윗이 보여준 ‘솔직하고도 즉각적인 회개’입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 사무 12,13)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기고만장했던 다윗,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심연의 바닥까지 내려갔던 다윗, 주님 자비와 인간의 비참 속에서 오랜 방황을 거듭하던 다윗이 마침내 임종 직전에 도달했는데, 그가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이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인생의 산전수전 다 겪은 그가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다해 남긴 유언은 오늘 우리를 향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을 간다. 너는 사나이답게 힘을 내어라. 주 네 하느님의 명령을 지켜 그분의 길을 걸으며, 또 모세 법에 기록된 대로 하느님의 규정과 계명, 법규와 증언을 지켜라. 그러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성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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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_l88dUE1tc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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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수천 명의 안식처가 됩니다>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농부가 밤낮 자고 일어나는 사이에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 마침내 하늘의 새들이 깃들 수 있는 큰 나무가 됩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 나라를 죽어서 가는 천당으로만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 맛보는 행복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행복한지, 내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자라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그 가장 확실한 증거는 내 곁에 누군가 와서 편안히 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원리를 심리학적으로 꿰뚫어 본 사람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에게 한 우울증 환자가 찾아왔습니다. 환자는 독한 약을 처방해 달라고 했지만, 아들러는 아주 기이한 처방전을 내밀었습니다. "당신이 이 처방을 따른다면 2주 안에 완치될 수 있습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오늘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기쁘게 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실천하십시오." 사실 이 말이 모든 그리스도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우울과 불행의 본질은 자기 몰입(Self-obsession)입니다. 온종일 나, 내 상처, 내 결핍, 내 기분만 생각하면 영혼은 감옥에 갇힙니다. 하지만 남을 위한 쉼터가 되려고 고민하는 순간, 시선이 나에게서 너에게로 옮겨갑니다. 그 순간 자아의 감옥 문이 열리고 해방감, 곧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남을 기쁘게 하는 것은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그 좁은 감옥에서 꺼내기 위한 탈출구입니다.
실제로 마더 데레사 수녀님에게 자살 충동에 시달리던 한 귀부인이 찾아온 적이 있습니다. 수녀님은 그녀에게 설교하는 대신, 죽어가는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돕게 했습니다. 한 달 동안 냄새나는 환자들을 씻기고 먹이면서 그녀의 우울증은 씻은 듯이 사라졌습니다. 나만을 위할 때 세상은 뺏고 뺏기는 정글이지만, 남을 위해 살 때 세상은 사랑이 흐르는 화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의 원리를 본능적으로 보여주는 동물이 있습니다. 바로 남미에 사는 설치류 카피바라입니다. 인터넷에서 카피바라 사진을 보신 적이 있나요? 이 동물 곁에는 항상 다른 동물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쉬고 있습니다. 오리, 거북이, 원숭이, 심지어 천적인 악어조차도 카피바라 옆에서는 입을 다물고 평온하게 쉽니다. 그래서 별명이 동물계의 부처 혹은 친화력 끝판왕입니다.
동물학자들은 그 이유를 카피바라 특유의 공격성 없음과 느긋함에서 찾습니다. 카피바라는 먹이를 독점하려 하지 않고, 영역을 지키려고 으르렁대지도 않습니다. 즉, 동물들에게 있는 삼구(욕심과 본능)가 제어된 상태입니다. 그 무해한 평화로움이 주변 동물들의 경계심을 무장 해제시키고 쉼을 주는 것입니다. 만약 내 곁에 사람이 없고 가족들이 나를 피한다면, 내가 너무 날카로운 욕심의 이빨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기적인 정글에서 건져내어 남을 위한 쉼터로 만드시려고 우리 마음에 말씀의 씨앗을 뿌리십니다. 행복의 시스템은 이렇습니다. 먼저 말씀이 떨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자라려면 우리는 삼구(세속, 육신, 마귀)와 싸우는 좋은 땅이 되어야 합니다. 욕심을 버리고, 게으름을 이겨내며, 말씀 하나하나를 실천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삼구는 나의 생존을 생각하는 욕망이고, 말씀은 타인의 기쁨을 먼저 생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만약 말씀을 매일 등경 위에 행동으로 올려놓는다면, 예를 들어 미소 짓기, 참아주기, 나누기 같은 작은 행위들이 밤사이에 하느님의 손길을 거쳐 자라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저절로(automatē) 자란다는 말은 하느님의 자동 시스템입니다. 내가 억지로 크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실천하면 영혼은 자동으로 넓어지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내 영혼이 커지면, 어느새 내 곁에 지친 이웃들이 날아와 둥지를 틉니다. 내가 나무가 되어 그들에게 그늘을 내어줄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가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 쉼터가 되는 길은 꼭 거창한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르멜 수녀원의 소화 데레사는 몸이 약해 거창한 단식이나 고행을 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그녀는 매일 아주 작은 말씀을 붙잡고 실천했습니다. 빨래터에서 옆 수녀가 더러운 물을 튀길 때 화를 내는 대신(삼구와의 싸움) 살짝 미소 지었습니다. 식당에서 가장 맛없는 음식을 불평 없이 먹었습니다. 짜증 나는 수녀님을 만날 때 가장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바닥에 떨어진 핀 하나를 줍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줍겠습니다."
이 사소해 보이는 매일의 실천들이 쌓여, 그녀의 영혼은 거대한 쉼터가 되었습니다. 그녀가 24세에 요절했을 때, 그녀의 영적 일기는 전 세계 수많은 영혼에게 위로와 안식을 주는 가장 큰 겨자 나무가 되었습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 세라핌은 숲속 오두막에서 은수 생활을 했지만, 수많은 사람이 그 먼 숲길을
걸어 그를 찾아왔습니다. 단지 그의 곁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 스스로 내면의 평화를 얻으십시오. 그러면 그대 곁에 있는 수천 명의 사람이 구원(안식)을 얻을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통해 삼구의 욕망과 싸워 이기면 평화를 얻고, 그러면 굳이 전교하려 애쓰지 않아도 사람들은 내 안의 평화 냄새를 맡고 모여듭니다. 카피바라 곁에 동물들이 모이듯 말입니다.
오늘 하루, 내 욕심을 조금 덜어내고 그 자리에 말씀을 채우십시오. 그래서 누군가가 "너랑 있으면 참 편안해"라고 말하며 내 곁에 머문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행복하다는, 내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자라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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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구글에서 일했던 한 강사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몇 번의 변곡점을 지나왔다고 말합니다. 경상도의 작은 마을에서 물장구를 치고 다람쥐를 쫓던 어린 시절, 컴퓨터로 시작된 디지털 시대, 스마트폰이 일상이 된 모바일 시대,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인공지능의 시대입니다. 2016년,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결 이후 구글은 인공지능의 시대를 공식적으로 선언했습니다. 인간의 노동은 점점 기계와 결합하고, 휴머노이드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기술은 분명히 우리 삶을 편리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나 편리함이 곧 행복은 아닙니다. 기술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줄 수 있어도,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답하지 못합니다.
역사는 이미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와 가장 앞선 기술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도로와 수도 시설, 건축 기술은 오늘날까지도 감탄을 자아냅니다. 그러나 그 찬란한 제국의 크기와 기술은 로마 시민들을 근본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습니다. 노예가 일을 대신하자 시민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국가는 빵을 나누어 주며 검투장과 목욕탕을 열어 주었습니다. 굶주림은 해결되었지만, 삶의 의미는 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살아 있었지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는 잊어버렸습니다. 기술과 제도는 인간을 먹여 살릴 수는 있었지만, 인간의 영혼을 살려 내지는 못했습니다. 그 결과 로마는 외부의 적보다 먼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인공지능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도 같은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더 빠르고, 더 정확하고, 더 편리한 삶이 가능해질수록 우리는 더욱 깊이 물어야 합니다. “이 삶은 나를 더 인간답게 만드는가?” 인간은 단순히 소비하고 즐기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다윗 왕의 삶도 이러한 질문과 선택의 연속이었습니다. 막내였던 다윗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아 골리앗을 쓰러뜨렸고, 사울 왕에게 쫓기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이 되었고, 나라를 통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 역시 권력의 정점에서 무너집니다. 바세바를 취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죽게 만든 선택은 하느님의 뜻에서 벗어난 길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선택한 것은 변명이 아니라 회개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제 죄악을 제가 알고 있사오며, 제 잘못이 언제나 제 앞에 있나이다.” 왕이라는 지위도, 나라의 크기도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뜻 안에 머물 때만 인간이 다시 살아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윗의 죄보다 그의 회개를 더 깊이 보셨고, 다시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는 너무 작아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고, 많은 생명이 그 그늘에 깃듭니다. 하느님 나라는 거대한 제국이나 눈부신 기술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원망 대신 감사, 교만 대신 겸손, 시기 대신 온유를 선택하는 작고 조용한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나라의 크기와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인간 행복의 디딤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이며, 오늘 우리가 맞추어 가야 할 하느님 나라의 퍼즐입니다. 비록 길이 멀고 험해 보여도, 겨자씨 같은 선택을 포기하지 않을 때 하느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자라날 것입니다.
“주님, 기술과 힘이 아니라 당신의 뜻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작은 겨자씨 같은 삶으로 당신 나라를 자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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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수원교구 이철구 요셉 신부님]
땅에 뿌려진 씨앗은 농부가 일할 때도, 잠든 사이에도 조용히, 그러나 멈추지 않고 자라납니다. 콩나물을 키워 본 사람은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날마다 물을 주며 묵묵히 기다리면, 일주일쯤 지나 빛을 가린 검은 천 아래에 어느덧 훌쩍 자란 콩나물을 보게 됩니다. 겉으로는 큰 변화가 없는 듯 보일 수 있지만, 생명은 조용히 자라납니다.
하느님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때로 당장 눈에 보이는 열매가 없다는 이유로 믿음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기도가 부족한 것은 아닌지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콩나물시루에 성실히 물을 주면 콩나물이 자라는 것처럼, 꾸준히 인내하며 성실히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때에 하느님께서 응답을 주실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은]”(마르 4,31)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는 작지만 싹을 틔우고 자라나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4,32)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우리의 노력이 적어 보이더라도 주님의 은총으로 풍성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하는 비유입니다. 우리의 믿음이나 기도가 당장은 보잘것없어 보일지라도, 하느님과 함께한다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조용히, 그러나 성실하게 믿음을 키워 갑시다. 성숙한 신앙은 소란스럽거나 번잡하지 않습니다. 인내와 성실 안에서 우리의 신앙은 성숙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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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4,26-34: 씨앗은 싹이 트고 자라나지만, 사람은 모른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씨 뿌리는 이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려주신다. 씨앗은 땅에 뿌려지면 농부가 자고 일어나는 동안, 즉, 그의 지식이나 능력과 상관없이 스스로 싹이 트고 자라난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28절)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우리의 계산과 기술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달려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선한 의지를 품고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 씨앗이 우리 안에서 자라지만, 그 성장을 우리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믿음은 하느님이 뿌려주신 씨앗이다. 그것이 자라나 열매를 맺게 하는 것도 하느님이다.”(Enchiridion 32)라고 말했다. 인간의 협력은 필요하지만, 그 성장은 은총의 비밀스러운 작용 안에서 이루어진다.
겨자씨의 비유는 더욱 분명하다. 가장 작은 씨앗이지만,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교회에 비유하며, “작은 무리로 시작된 교회가 지금은 온 세상을 뒤덮는 나무가 되었다.”(Hom. in Matth. 46,2)고 설명한다. 실제로 교회는 갈릴래아의 작은 씨앗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모든 민족을 품는 하느님 나라의 표지가 되었다. 교회의 존재 자체가 그 나라의 씨앗이요 시작이다. 씨앗이 자라려면 농부가 뿌려야 하고, 동시에 땅과 햇볕과 비가 필요하듯이, 하느님의 은총과 인간의 응답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희 안에는 어떤 씨앗이 자라고 있느냐?”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였다면, 그 말씀은 이미 우리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 하지만 그 성장을 당장 눈에 보지 못한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다. 씨앗은 땅 속에서 보이지 않게 자라다가 때가 되면 싹을 틔우듯이, 은총은 보이지 않게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
또한 우리는 내 안의 밭을 돌보아야 합니다. 씨앗이 자라도록 가시덤불을 제거하고, 말씀을 가꾸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우리의 손으로 강제로 만들 수는 없지만, 우리가 협력할 수는 있다. 그 협력이 바로 기도, 말씀의 묵상, 사랑의 실천이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작게 시작되지만, 하느님의 손길 안에서 큰 나무가 된다. 그 나무는 곧 교회이며, 우리 신앙인의 삶이다. 오늘 우리는 내 안에 뿌려진 씨앗을 돌보며, 하느님 나라의 성장에 협력해야 한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처럼 “우리가 뿌리고 물을 줄 수는 있으나, 성장하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De catechizandis rudibus 4,8).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은총 안에서 신뢰하며, 씨앗이 자라 열매 맺을 날을 기다리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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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는 사람>
마르코 4,26-34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 비유를 들어 가르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보는 사람>
씨앗에서
열매를
보는 사람
열매를 거두려
씨앗을 뿌리지요
한 걸음에서
먼 길을
보는 사람
먼 길을 떠나려
한 걸음을 내딛지요
사람에게서
세상을
보는 사람
세상을 이루려
사람을 보듬지요
오늘에서
영원을
보는 사람
영원을 품으려
오늘을 가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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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하느님의 일’은 인간의 생각과 이해를 초월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줄기가, 다음에는 이삭이 나오고 그다음에는 이삭에 낟알이 영근다.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확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무슨 비유로 그것을 나타낼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땅에 뿌릴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작다. 그러나 땅에 뿌려지면 자라나서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마르 4,26-34)
1)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는, “하느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시는데”입니다. 인간의 눈에는 ‘저절로’ 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이 많지만, 이 세상은 ‘삼라만상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주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과 섭리와 상관없이 저절로 되는 일은 없습니다. <‘우연히’ 일어나는 일도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라는 말씀은, 인간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다 알지는 못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전부 다’ 모르는 것은 아니고,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것도 있지만, 인간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믿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되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리라는 가르침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참하고 협력하라는 가르침으로 읽을 수도 있는 비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없이’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창조 사업의 완성은 인간들과 함께하기를 바라십니다. 특히 인간 구원 사업은, 인간들이 능동적으로 동참하고 협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 몸이 자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몸이 언제 어떻게 성장하는지를 모릅니다. 작은 어린이가 조금씩 키가 크고 몸무게가 늘어나고 하면서 어른이 되는데, 그 과정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몸의 성장’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혼의 성장’과 ‘신앙의 성장’도 그렇고, ‘전체 교회의 성장’도 그렇습니다. 그 ‘성장’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 어떤 이들은 사도로, 어떤 이들은 예언자로, 어떤 이들은 복음 선포자로, 어떤 이들은 목자나 교사로 세워주셨습니다. 성도들이 직무를 수행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성장시키는 일을 하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에페 4,11-14ㄱ.15-16)
<신앙인답게 살고,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각 개인의 성장은 곧 교회의 성장이고, 하느님 나라의 성장입니다.>
3)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는 하느님 나라의 ‘성장 과정’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고, ‘겨자씨의 비유’는 ‘결과’에 초점을 맞춘 비유입니다. 우리는 ‘겨자씨의 비유’를 읽을 때 겨자씨가 작다는 것과 겨자나무가 크다는 것만 생각할 때가 많은데, ‘겨자씨의 비유’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한다.”라는 가르침이고,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예로 삼으신 것은,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겨자씨의 비유’에서, 동방박사들의 이야기에 인용되어 있는 예언이 연상됩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마태 2,6) 인간의 눈으로만 보면, 베들레헴은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이지만, 메시아께서 태어나신 곳이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고을’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씨앗만 보지 말고 나무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언젠가 완성될 하느님 나라를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위대한 일’입니다. 짧은 기도 한 번이라도, 작은 선행 한 가지라도, 모두 위대한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주춧돌’만 중요하고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눈에 잘 뜨이지 않는 작은 벽돌 하나, 하나도 모두 중요하고 위대합니다.(에페 2,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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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거짓은 100년이 지나도 거짓>
한 유치원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꽃씨를 나누어 주며 제일 예쁜 꽃을 피워온 사람에게 멋진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이들은 서로 ‘내가 제일 예쁜 꽃을 피워야지!’ 하며 신이 났다. 몇 달 후 아이들은 꽃이 활짝 핀 화분을 들고 왔다. 그런데 그중 한 아이가 빈 화분을 들고 울먹이며 말했다. “저는 게을러서 꽃을 못 피웠어요!” 원장님은 환하게 웃으며 그 아이에게 멋진 선물을 주었다. 나누어준 씨앗은 싹이 나지 않는 가짜였기 때문이다.
정말 싹을 틔워야 할 것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이다. 사실, 씨앗이 생명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기다려도 싹은 트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면서도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의 삶을 살지 않는다면 그 희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먼 훗날을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미래를 희망하며 최선으로 살아야 한다.
씨앗이 땅에 묻혀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여도 씨앗은 은밀하게 싹을 틔우고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행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지금 당장 밝히 드러나지 않아도 그것은 싹을 틔우고 있다. "씨앗은 풍성하게 되기 위해서 순응하고 씨앗으로서의 그 존재성을 잃어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다른 것이 된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는 희망과 완성을 향한 과정에 있다. 하느님 나라는 매일 이루어지고 성령께 대한 순응을 통해서 이루어진다."(프란치스코 교황)
그러므로 기회가 좋든 나쁘든 주님의 말씀을 전하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날마다 순간마다 하느님 나라를 가꾸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수고와 땀, 희생 봉헌이 미약해 보일지라도 결코, 작지 않다. 복음의 ‘저절로 자라나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는‘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비록 작고 보잘것없이 보일지라도, 그 끝은 생각보다 크다.’는 가르침을 준다.
실제로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무리는 작고 초라하게 시작되었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포함하는 교회공동체로 성장하였다. 그러므로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선을 행하고 진리 안에 자유로워야 한다. 겨자씨 한 알이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무한한 가능성이 들어있듯이 우리의 사랑과 희생도 넘치는 가능성을 담고 있다. 그리고 “사람은 하늘이 주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요한3,27).
불신이 가득한 이 세상에 빈 화분을 들고 눈물을 지을 수 있는 진실함으로 하늘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사랑과 진실함이 있으면,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나라요, 불신과 거짓으로 서로를 경계하면 그곳이 지옥이다. 거짓은 100년이 지나도 진실이 될 수 없다. 우리 마음 안에 하느님의 나라가 쑥쑥 자라길 희망한다. “주님,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은총으로 저희가 언제나 기뻐하게 하소서.” 아멘.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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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겨자씨와 하느님 나라>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것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 땅에 심을 때에는 세상의 어떤 씨앗보다도 더욱 작은 것이지만 심어 놓으면 어떤 푸성귀보다도 더 크게 자라고 큰 가지가 뻗어서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된다.”(마르4,30-32)
스승 예수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당신의 비유 말씀은 너무나 아리송해서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과 같다니 도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는 하느님 나라를 가야 할 곳, 이승에서의 삶을 끝 낸 후 저승에서 누릴 수 있는 어떤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하느님 나라는 어떤 곳 혹은 사후의 어떤 세상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나라 즉 하느님께서 대자대비하신 왕권을 행사하시는 현실입니다. 하느님의 대자대비하심이 드러나는 현실이 바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엄청나고 화려하고 대단한 것을 통해서 대자대비 하심을 드러내시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통해서 당신의 대자대비 하심을 드러내십니다.
하느님의 대자대비 하심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옳은 사람과 옳지 못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비와 햇빛을 내려(마태5,45) 생명을 이어가게 하고, 아버지를 배반하고 집 떠났던 아들도 용서하고 품어주어 새 생명을 누리게 하고(루가15,11), 길 잃은 한 마리 양 같은 세리와 창녀와 병자들을 용서하고 품어주고 치유하여 새 삶을 누리게 합니다.
하느님의 대자대비 하신 손길로 새 생명이 태어나고, 싹이 트고,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고, 밤낮과 계절이 바뀝니다. 여기에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후 세상도 아니요 어떤 장소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의 현실입니다.
겨자씨는 너무나 작아서 땅에 떨어지면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 이 겨자씨는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있는 것’을 ‘없다’ 할 수 없습니다.
겨자씨 안에는 ‘생명’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겨자씨 속에는 뿌리가 있고 잎이 있고 가지가 있고 꽃이 있고 열매가 있습니다.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겨자씨 속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대자대비하심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 한 알처럼 감추어진 신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 귀의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고 사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대자대비하심을 누리면서 삽니다.
예수님, 오늘 하루도 하늘나라를 누리는 하루가 되도록 축복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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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두 독서 말씀은 그 분위기가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희망적으로 드러내는 반면, 제1독서는 하느님이 아끼시는 이의 엄청난 죄악을 여과 없이 밝히고 있습니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마르 4,28)
예수님은 먼저 하느님 나라를 저절로 자라는 씨앗에 비유하십니다. 사람이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김을 매어 주기는 하지만 그건 씨앗이 자랄 환경을 조성하는 것일 뿐, 사람은 씨앗이 열매가 되는 본질적 힘이 아닙니다.
"사람은 어떻게 그리 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그래서 예수님은 모른다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인간의 사고와 경험을 뛰어넘습니다. 인간은 하느님 나라가 형성되는 원동력에 대해 무지하지만 그것이 하느님 나라가 열매 맺는데 장애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예수님은 두 번째 비유로 겨자씨를 드시면서, 씨앗의 미소한 크기와 성장한 후의 풍성함을 대비하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지상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는 세상 변두리에서 초라하고 보잘것없이 시작되었지만, 온 세상을 품게 되리라는 전망이 담겨 있습니다.
제1독서는 다윗 임금의 치명적인 죄악을 다룹니다.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다윗은 요압과 자기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을 내보냈다. ... 그때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2사무 11,1) 이 배경 설명은 다윗의 일탈을 복선처럼 준비합니다. 임금들이 전쟁에 출전하는 때에 굳이 다른 이들을 내보내고 임금이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는 자체가 납득하기 어려운 불안감을 일으킵니다.
"집으로 내려가지 않았다."(2사무 11,9.13)
밧 세바의 남편인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잘 드러나는 말씀입니다. 그는 충직하고 절제력 있고 전우들에 대한 의리도 출중한 의인이었기에 다윗의 잔꾀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야가 이런 훌륭한 성정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니 이 얼마나 불합리한 비극인지요!
"히타이트 사람 우리야도 죽었다."(2사무 11,17)
결국 다윗이 뜻을 이룬 것처럼 보입니다. 이대로라면 세간의 눈에 다윗은 남편 있는 여인을 유린한 간통 범죄자가 아니라, 유복자를 임신한 과부를 맞아들인 성군이 될 테니까요.
성경 저자가 각색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폭로하는 역사를 읽다 보면 인생사 참 모를 일이다 싶습니다. 하느님의 총애를 받은 다윗이 간음에 살인교사까지 저지르면서 제 욕망을 채우는 모습이 낯설기도 합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인간에 대한 사랑이 통합되지 못하고 오히려 극악무도한 폭력으로 변질된 전형으로 남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이런 인간의 악행에도 하느님 나라의 형성이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다윗이 악행으로 취한 밧 세바를 통해 이스라엘 왕조가 그 전성기를 맞게 될 것을 압니다. 마태 복음서 저자도 예수님의 족보에서 솔로몬의 어머니를 굳이 "우리야의 아내"(마태 1,6)라 밝히는 걸 보면, 인간의 역사가 죄악과 은총의 공존 속에 흘러가고 있음이 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솔직히 "모른다"고 해야 옳습니다. 씨앗이 열매가 되고, 미소한 것이 거대하게 되는 자연의 이치를 모르는 것 이상으로, 하느님 나라의 형성에 대해서도 우리는 모릅니다. 우리의 이기적이고 편협한 이해 범주 안에서 논리와 계산대로 되어간다면 그건 하느님 나라가 아닙니다.
이천 년 전 십자가에 달려 죽어간, 실패한 가난뱅이 몽상가에게서 오늘날 세상을 품는 자비와 사랑의 연대를 관상할 수 있었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요!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무지를 틈타 그렇게 자라서 열매 맺고 확장되어 온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약함과 죄악에 질식되지 않고 지금도 자라고 있습니다. 바벨탑처럼 쌓여가는 인간의 오만하고 불의한 폭력도 하느님 나라를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세상 곳곳에서 진실한 믿음과 소박한 사랑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비록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되어가는지 무지하더라도, 이미 하느님 나라의 일부입니다. 우리가 모여 하느님 나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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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가시적으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외부에서부터 이루어지는 변화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을 듣고 받아들여 안으로부터 오는 나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느님 나라가 우리 안에서 어떻게 건설되는 것일까?
오늘 복음인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는 이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6-27)
그렇습니다. 분명 ‘씨앗’은 자신 안에 싹을 틔우고 잎으로 자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의 권능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 교종은 말합니다.
“성경(말씀, 하늘나라)은 읽는 이(응답하는 이) 안에서 자란다."(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랍고 신비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씨가 우리 안에 뿌려지면, 그것이 어떻게 우리를 변화시키고 또 어떻게 성장시키는지를 우리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매 순간 하느님의 힘이 작용하여 ‘하느님 나라’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햇살을 받은 나뭇잎이 광합성을 못 알아들으면서도 그것을 채워가고 푸르러가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나날이 그 신비를 마시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겨자씨’는 비록 작은 씨앗이지만,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늘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됩니다.
마치 십자나무처럼 모든 인류를 끌어안은 큰 나무가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십자나무에 인간이 거처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셨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비록 작은 ‘겨자씨’지만,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썩기만 하면, 바로 이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와서 깃들일 수 있는 큰 나무로 자랄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싹이 트고 자라나는 이 놀라운 신비에 순응하게 하소서.
저의 힘이 아니라 당신의 권능으로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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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 · 샘 기도>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마르 4,31)
주님!
당신은 겨자씨처럼 작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사랑하는 이 위에 군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낮추어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방법이고 사랑의 길인 까닭입니다.
오늘 제가 형제들 앞에서 작아지게 하소서!
십자나무에 인류의 거처를 마련하듯, 제가 형제들의 거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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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어떤 풀보다도 커지고 큰 가지들을 뻗어>
성경의 이야기는 때로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힘든 대목이 있습니다. 권력을 가진 왕의 횡포라고 할까요? 암몬을 무찌르고 라빠를 포위하는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다윗은 예루살렘에서 지냅니다. 그러다가 다윗이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 것을 내려다 보고 맙니다. 다윗은 그녀를 궁중으로 불러 들여 정을 통하고 맙니다. 그런데 그녀의 밧세바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여자였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다윗의 충직한 부하 우리야였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그만 임신하고 맙니다. 다윗은 그녀의 임신을 은폐하기 위해 남편을 전장에서 불러들입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쉬도록 합니다. 그러나 우리야는 전쟁터의 동료들을 생각해서 군인들과 어울러 궁중 문간에서 자고 집으로 가지는 않는 것입니다. 다윗은 다시 우리야를 불러 술상을 차려 함께 하며 몹시 취하게 만들지만 우리야는 역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군인들과 어울려 자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 편에 사령관 요압에게 편지를 들려 보냅니다. 그 내용은 전투가 가장 심한 곳으로 보내서 그를 죽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우리야는 군인의 충직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결국 죽음을 맞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다윗처럼 성왕이었던 그도 유혹에 넘어가서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밧 세바의 남편 우리야를 죽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씨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립니다. 며칠 사이로 씨에서 싹이 나고 커다란 결실을 맺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이 어떻게 자라나서 곡식을 영그는지를 모릅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 나라도 사람들이 모르는 사이에 각 사람들에게서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다시 하느님 나라를 작은 씨에 비유하며 설명하십니다. 주님께서 작은 씨가 커지고 큰 가지를 뻗어 하늘의 새도 깃들일 수 있게 커진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느님 나라도 지금은 작은 것 같아도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고 제자들에게는 따로 설명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진실과 거짓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살게 됩니다. 때로 본의 아니게 거짓말도 하고 때로는 부끄러운 일을 감추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는 진실 속에서 자라납니다.
오늘의 나의 진실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큰 커지는 것입니다. 오늘의 나의 선행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작은 씨앗이 큰 나무를 이루듯 그렇게 커지는 것입니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 세바의 임신을 위장하려고 하듯 때로는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감추려 합니다. 나탄은 이 모든 것을 밝히고 다윗을 하느님 뜻으로 야단을 칩니다. 다윗은 왕의 힘과 권위가 아니라 스스로 내려와 진심을 고백하고 하느님께 회개의 마음을 가집니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의 죄가 크지만 그의 작아 보이는 회개를 크게 보십니다.
이 세상에서 진실하게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리 속으로 양떼를 보내듯 걱정하시는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면 우리는 두려워할 것도 없습니다. 비록 지금은 손해 보는 것 같은 진실, 때로는 손을 내밀기 부끄러운 미소하고 작은 선행과 사랑을 우리 주님께서 기억하시고 부족한 나를 용서하시고 하느님 나라의 풍성한 결실로 이어주십니다. 우리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슬픔과 악습에서 벗어나 가슴을 펴고 일어나야 합니다. 작은 진실 작은 선행과 나눔도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하루도 감사하며 주님 사랑으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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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마르코. 4,27)
일상의 말이나 행동, 그리고 태도를 통하여 우리는 많은 씨를 뿌리고 삽니다. 그리고 우리가 뿌린 그 씨들은 이 세상 어디에선가 자라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어디에선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 씨들이 싹이 터서 자란 것들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볼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우리가 죽고 나서도 어디선가 자라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뿌린 씨들이 다 자란 것을 언젠가는 주님 앞에서 대낮처럼 환하게 보게 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는 하늘나라를 꾸미기 위한 씨를 뿌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뿌린 대로 언젠가 그 열매를 주님께서는 거두십니다. 우리가 뿌린 씨들은 주님께서 비추시는 햇빛과 신선한 바람과 공기와 물을 먹고 자랍니다. 선과 악의 씨를 구별하지 않고 골고루 비추십니다.
주님의 자녀는 선의 씨를 뿌리지만, 악의 자녀는 악의 씨를 뿌립니다. 우리는 선의 씨를 뿌리기도 하지만 악의 씨를 뿌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랑의 씨를 뿌리지만, 미움과 질투와 시기의 씨도 뿌립니다. 희망의 씨를 뿌리기도 하지만 절망의 씨도 뿌립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사랑과 선, 정의와 평화, 진실과 희망이라는 하늘나라의 씨를 뿌려야 합니다. 뿌린 씨들이 자란 것을 우리가 사는 동안 볼 수 없더라도 꾸준히 씨를 뿌려야 합니다. 씨들이 자란 것을 언젠가는 주님 앞에서 다 보게 되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뿌리는 씨는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방식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다정한 우리의 말씨 한마디에서 자랍니다. 우리가 이웃과 세상과 맺는 관계을 통해 심는 작은 사랑의 씨 하나는, 하늘나라를 이루는 머릿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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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뿌리기만 하면 된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이 말씀이 오늘 저에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그러니 다른 생각이나 걱정하지 말고 너는 그저 씨나 뿌려라!
그런데 씨만 뿌리면 나머지는 저절로 된다고 하는데도 우리가 씨뿌리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태평 농법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씨만 뿌리고 태평하게 내버려 두는 농법이지요. 힘들게 땅 갈아엎기나 비료나 농약 주기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이렇게 해도 된다면 농사짓는 것 너무 쉽지요. 그런데 실제로 그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거의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애써야만 수확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느님 나라 농법에 대한 믿음 문제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씨만 뿌리면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다 해 주신다고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작은 씨여도 문제없습니다. 우리 사랑이 겨자씨만큼 작아도 문제없습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는 하느님께는 겨자씨처럼 작은 사랑으로 백배 열매를 맺게 하시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사랑이기만 하면 되고, 뿌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믿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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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씨앗은 뿌려야지>
오늘은 독서와 복음을 조금씩 묵상하고 나누는 것으로 나눔을 대신하겠습니다. 오늘 독서은 다윗이 간음하고 살인죄까지 저지르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다른 얘기는 눈에 안 들어오고 다음 구절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해가 바뀌어 임금들이 출전하는 때가 되자,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그 여인을 데려왔다. 그런데 그 여인이 임신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부하들은 전쟁에 나가 싸우고 죽고 하는데 왕이라는 자는 마음 편히 있고 간음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제게는 이렇게 아프게 다가옵니다. 제 주변에 많은 분이 참으로 아프고 고통스러운데 저는 아프지도 않고 행복하고 더 나아가 천역덕스럽게 먹고 즐기는지. 그러면서 기도 조금 해주는 것으로 할 바 다했다고 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인간은 결국 이런 것인지. 인간의 사랑이라는 것도 고작 이 정도인지. 이러고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다음으로 복음을 묵상했는데 복음도 다른 구절은 안 들어오고 다음 구절만 눈에 들어왔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으면,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
이 말씀 중에서도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리면'이라는 말과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되고,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시작부터 되지 않는 것인데 어떤 사람이 씨를 뿌리고 어떤 사람이 뿌리지 않을까요?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 '나는 씨를 뿌리는 사람인가?‘ 씨를 뿌리긴 하는데 그것이 하느님 나라의 씨인가 다른 나라의 씨인가? 그리고 하느님 나라의 씨앗과 다른 나라의 씨앗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 씨앗에는 선과 사랑의 씨앗과 악과 미움의 씨앗이 있는데 하느님 나라의 씨앗이란 말할 것도 없이 사랑과 선의 씨앗이며 우리가 뿌려야 할 씨앗은 선과 사랑의 씨앗입니다.
다음으로 제가 묵상한 것은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앞의 말과 연결하면 내가 비록 사랑의 결실을 거둘 자신도 없고, 어떻게 거두는지 모를지라도 사랑의 의도만 가지고 씨를 뿌려도 된다는 뜻입니다. 참 위안이 되는 말씀이고 그래서 우리는 사랑의 용기를 내고 씨를 뿌려도 됩니다.
그렇지만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선과 사랑의 씨앗을 뿌린다고 하는데 밀밭에 가라지가 자라듯 우리는 의도하지 않게 다른 씨를 뿌리곤 하는 점입니다.
며칠 전에 동장님과 동사무소 직원들을 콩나물 밥집에 초대하여 저희가 하고 있는 사업을 소개도 하고 어떻게 하면 지역 사회의 어려운 분들을 도울까 의논을 하였는데 그분들이 어려움에 대해 얘기할 때 또 제 특기인 교만한 말을 훈수 두듯이 하였습니다.
일을 하는 과정에 내가 겪는 어려움이 그분들이 처한 어려움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그분들의 어려움보다 나의 어려움을 더 생각하기에 주저하게 되지요. 그래서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사랑 실천을 멈추지 말자고 한 말이지만 뼛속까지 배어있는 교만이 또 튀어나온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무서워 아무 씨도 뿌리지 않는 것이 아니라 씨앗은 뿌려야겠지요. 구더기 무서워서 장 담그기를 포기해서는 안 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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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들에게 언제 즐거운지 적어보라고 했습니다. 과연 어떤 내용을 적었을까요?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치킨 먹을 때, 애들도 남편도 다 잘 때, 봉사활동으로 벽화 그릴 때, 오랜만에 입는 옷에서 돈이 나올 때, 한밤중 늦게 집에 갔는데 주차할 자리가 있을 때, 내 새끼들 깔깔 웃을 때, 공공의 적 뒷담화할 때, 콘서트 볼 때, 7개월 된 아이와 산책할 때, 좋아하는 책 다시 읽을 때, 늦잠 자고 일어나서 빨래할 때, 커피 한 잔 내려서 진한 향 맡으며 마실 때, 퇴근했을 때, 우리 강아지가 뽀뽀해 줄 때, 새벽 조용할 때….’
어떻습니까? 특별한 내용도 있지만, 대부분 그리 대단하지 않은 것에서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런 작은 것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든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즐거움이 아닌 자기 욕심과 이기심 채우는 데 집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100% 채울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항상 부족할 수밖에 없어서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즐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것에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이시기에 그 즐거움 안에서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릴 수 있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아서 즐겁지 않을까요?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뜻밖의 상황을 오히려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 사소한 것도 중요함을 예수님 말씀으로 깨닫게 됩니다. 즉, 사소함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찾아야 하고, 주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저절로 자라는 씨앗과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깨닫게 됩니다.
먼저 농부가 땅에 씨를 뿌려 놓고 기다리면 어느 순간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한다고 하십니다. 농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씨를 뿌리는 것까지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일상을 살아갑니다. 게으르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성장은 이렇게 이해와 분석을 넘어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하거나 선행을 하고 나서 즉각적인 결과를 기대합니다. 변화가 보이지 않으면 실망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밤에 자는 동안에도 씨앗은 자라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을 신뢰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유다인의 표현에서 ‘겨자씨’는 지극히 작은 것의 대명사였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시작은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보면 초라하고 미약해 보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실패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는 것을 이야기하십니다.
이 두 비유를 통해, 사소함 안의 주님을 찾습니다. 과정을 주관하시는 주님께 집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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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밤에 자고 낮에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 복음(마르 4,26-34)은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이처럼 많은 비유로 말씀하셨다. 비유를 들지 않고는 그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마르 4,33-34)
'비유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그와 비슷한 다른 사물이나 현상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여러 비유, 곧 듣는 이들이 이해하기 쉽게 일상의 소재들을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그 본질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실현되는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 곧 두 비유인 '저절로 자라나는 비유와 겨자씨의 비유'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모든 것의 중심에 절대자이신 하느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께서 계시고,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느님의 역사하심'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결정적으로 하느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면 이룰 수 없다'는 메시지입니다.
어머니이신 땅에 씨를 뿌려놓으면, 우리 눈에는 그것이 저절로 자라나는 것 같지만, 하느님께서 비를 내려주시고, 햇빛을 주시고, 바람을 주시기 때문에 자라날 수 있습니다. 아주 작은 씨앗이 썩고 자라나 큰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수돗물과 하늘 물은 정말 다릅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3-34)
오늘도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 모든 힘의 원천이시요 근본이신 하느님 손 잡고 화이팅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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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씨는 싹이 터서 자라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마르 4,27)
믿음은
하느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을
기꺼이 맡겨
드리는 일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설명할 수 없어도
하느님 나라는 오늘도
우리 안에서
조용히 자라고
있습니다.
조급해질수록
성장은 멀어지고,
하느님께 맡길수록
생명은
제 길을 찾습니다.
믿음은
더 잘 아는
것이 아니라,
조급해지지 않는
용기입니다.
이 모든 시간은
실패가 아니라
은총이 일하는
방식입니다.
씨를 위한다는 이유로
씨를 괴롭히지 않는 것,
그것이
참된 사랑입니다.
씨는
은혜를 입어 자라고,
사람은
사랑을 따라
성숙합니다.
씨가 흙속에서
자랄 때
아무 변화도 없는
것처럼 보이듯,
영혼의 성숙 또한
보이지 않는 차원에서
먼저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그리되는지
모른다”는 이 고백은
믿음이 약하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신비를
존중한다는 뜻입니다.
씨가 자라는 시간은
인간이 개입하지 않는
하느님의 시간입니다.
서두르지 않는 믿음,
때를 침범하지
않는 경외,
그것이
신앙의 성숙입니다.
보이지 않아도 자라고,
이해되지 않아도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 앞에서
믿음이란
결과를 붙잡는
것이 아니라
때를 신뢰하며
오늘을 충실히
사는 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우리가 이해하기
시작할 때가 아니라,
내려놓기 시작할 때
자라납니다.
그 하느님 나라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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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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