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작사 남궁억(1863-1939)
작곡 가에타노 도니제티(1797-1848)
지난 여름 생각지도 못했던
북한에 다녀왔다.
4박5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나름대로 곳곳을 보고 왔다는
스스로의 평가이다.
그 중에서도 제일 감명 깊었던 것은
그곳 교회를 찾아가
예배를 드렸다는 사실이다.
방북 첫날 공항을 빠져나와
우선 만경대에 가고
그곳에서 가까운 칠골교회를 방문했는데
그곳은 예전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 여인이 다니던 교회라고 한다.
갓 포장한듯 버스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깔끔한 진입로로 들어가니
향나무 울타리 안쪽에
아담한 교회가 있었다.
평양에 봉수교회와 함께
두개의 교회가 있다고 함은
이미 알려진 바이나
그것이 선전용인지
북한에 진정한 기독교가 있는지의 여부는
한번의 교회방문으로 알길 없지만
아무튼 남쪽에서 간
일행들만의 예배였는데
어쨌든 감격스러웠다.
그때 평양에서의 뜻깊은
예배에서 부른 찬송이
남궁억 선생 작사의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었다.
비록 북측 성도가 없는
반쪽 예배가 되었지만
남북이 함께 한 예배였더라면 참
으로 합당한 찬송가가 되었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특히 그때의 방북이
월드비젼의 감자 씨앗 농장의
준공식에 참석키 위한 것이었으니
더 말할것은 없다.
머지 않은 장래에
남북통일이 되고
황폐한 북한땅을 재건하기 위해
남북의 동포들이 함께
어깨에 삽을 메고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노래하며 행진할 날을 고대한다.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삼천리반도 금수강산 하나님 주신 동산
이 동산에 할일 많아 사방에 일꾼을 부르네
곧 이날에 일가려고 누구가 대답을 할까
일하러 가세 일하러가 삼천리 강산 위해
하나님 명령 받았으니 반도강산에 일하러 가세
이 찬송가는
우리 민족의 수난시기인
36년간의 일제 침략기에
가장 많이 불리우던 애국찬송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삼천리 강산을 위해
일하러 갈것을 강조하는 내용에
일제의 눈에 거슬리지 않았을 리가 없다.
1937년 금지곡이 되었으며
일제 말기에는
이 찬송가를 불렀다는 이유만으로도
투옥될 형편이었다.
그렇다고
이 찬송가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크리스찬의 입에서 입으로
서로의 가슴 가슴으로 퍼져 나갔고
광명을 되찾으면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남궁선생은 이 찬송가를 통해
독립사상과 신앙심을 바탕으로
애국심을 불러 일으켜 주었다.
그는 원래 고종 황제의 영어 통역으로
관계에 발을 딛어
군수를 지낸 분이다.
문화발전과 민중 계몽에 뜻을 두고
1898년 황성신문을 창간하여
필봉을 휘둘러
일제에 수차례 구속당하기도 했으며
1918년 교육에 뜻을 두고
서울을 떠나
고향인 강원도 홍천 모곡으로
낙향 교회와 학교를 세워
신앙과 민족혼을 일깨웠다.
나라꽃 무궁화의 보급에도 앞장섰는데
예전에 부녀자들이 수놓았던
한반도 무궁화 자수는
선생의 아이디어였다고 한다.
선생은 1939년
일제의 가혹한 옥고로 득병
77세의 나이로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이같은 공로를 인정하여
지난 2004년 신문의 날에
대한언론인회가
언론인 명예의 전당에
올릴 헌정자로 선생을 선정했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찬송가는
우리 교계에서 불리우는
찬송가 중에 흔치않은
우리나라 사람이 작사한 찬송이다.
지금은
국내인이 작사 작곡한 찬송가가
더러 있으나
예전에는 남궁 선생의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이 유일했다.
이 찬송가의 곡은
원래 도니제티의 오페라
라머무어의 루치아에 나오는
결혼축하 합창곡을
편곡한 행진곡이다.
때문에
우리민족혼의 찬송가를
서양의 오페라 곡에 맞춰 부르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여겨
지난 1967년 개편찬송가 위원회에서
이동훈 선생의 곡으로 대체했으나
옛 노래에의 향수가 깊어
다시 옛곡으로 돌아왔다.
지금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 중
우리 국내인들의 작사 작곡가들은
이러하다.
작사가 김재순, 김정준, 김활란 ,남궁억,
마경일, 반병섭, 석진영, 임옥인, 전영택,
정용철 ,주요한, 최봉춘, 홍현설,
작곡가 곽상수, 구두회, 김연준, 나인용, 박재훈,
박태준, 이동훈, 이유선
580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남궁억 작사, G. Donizetti 작곡)
통일 찬송가, 183, 371장
이 찬송이 우리 찬송가에
처음 실린 것은
신정 찬송가, 1931, 219장이다.
이 찬송은 왜놈들이 금지곡으로 선정해
찬송가에서 먹칠을 하기도 하고,
아예 찢어버리기도 했지만,
우리 선열들은 이 가사를 달달 외어서,
부르지 말라니까
더 열심히 불러
애국찬송이란 영예를 얻은 찬송이다.
가사 내용은 아주 단순하다.
이 땅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땅이다!
왜놈들 물럿거라!
이 땅에 할 일이 많다.
동포들아 일어나라!
이 나라 다시 세우자!
이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자.
이게 하나님의 명령이다!
신정 찬송가, 1931, 219장
곡명은 옛날 전쟁 때 신호로 쓰는
신호 나팔 클라리온(CLARION)이다.
조선 백성들아
하나님이 명하신다.
전투명령(CLARION) 떨어졌다.
하나님이 주신
우리 이 강산에 일하러 가자!
이 강산을 지키러 가자!
언더우드 선교사의 한영 찬송가, 1990, 371장
미국 면려회 찬송가
'The Endeavor Hymnal, 1901'
편집 위원회가
도니제티(Gaetano Donizetti,
1797-1848) 작곡의 오페라
루치아 디 람메르모어
'Lucia di Lammermore, 1835
제2막에 나오는
이 합창곡을
찬송가 곡조로 편곡하여
125장에 처음 실렸던 것이다.
작곡자 도니제티
미국 면려회 찬송가
The Endeavor Hymnal, 1901, 215장
가사는 나팔 소리 들려온다
Hark! 'Tis the Clarion이라는
조셉 브라운 모건
(Joseph Brown Morgan)의
3절 가사를
이 곡조에 맞춰 실렸다.
Endeavor Hymnal은 신
정 찬송가, 1931, 편찬 때
참고자료로 사용되었고,
편찬에 관계했던
남궁억(南宮億, 1863-1939) 장로는
이 곡조에 맞춰
애국 찬송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작사하여
219장에 실렸던 것이다.
힘찬 그리스도교 행군찬송을
애국찬송으로 개작한 것이다.
남국억 기념관
작사자 남궁 억 장로
작사자 남궁 억 장로는
서울 왜송골(현 정동)에서
남궁 영(南宮 泳) 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양반집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불행하게도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덕수 이씨인 홀어머니의
슬하에서 고생스럽게 자라났다.
용모가 준수하고
재질이 뛰어났던
그는 어깨너머로 공부를 시작하여
사서삼경을 통달하였고,
21세가 되던 1883년에
문중(門中)의 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관립 영어학원에 입학하였다.
이때 학생은 그와 송달현, 주우남,
단 셋뿐이었는데,
모두 도포를 입고
통량 갓을 쓰고 앉아 공부하였고,
이듬해 그는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그가 벼슬살이를 시작한 것은
1886년이었다.
내부주사로 피임되어
어전 통역을 맡았고,
1887년에는
조민희가 이끄는
외국사절단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통역과 서기관으로 일하였다.
1889년에는
궁내부 별군직에 임명되어
4년 동안 일하였고,
1893년에
경상도 칠곡의 부사로 취임하여
갑오년의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을 임지에서 겪었다.
1895년 칠곡부사를 사임하고
내부 토목국장으로 들어온 그는,
종로통과 정동의 거리를 확장하게 하였으며
파고다공원도 건설하였다.
1896년 단발령에 반발하여
의병들이 일어나자
정부는 이들을 무마하기 위해
그를 선유사(宣諭使)로 파견하였고
그는 어렵사리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그 무렵 그에게 일대 전환기가 다가왔다.
일본과 청국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독립협회라는 단체가 생겨난 것이다.
이에 그는 벼슬을 떠나
1896년 독립협회에 들어가
수석 총무로 취임,
애국사상 고취에 헌신하였고,
1898년 나수연, 장지연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
초대 사장이 되었으며,
친러파의 숙청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 공박.
러일협정의 부당성 지적 등으로
세 번의 옥고를 치르다가
1903년 부득이 사임하였다.
1905년
성주목사로 임명받은 남궁억은
을사보호조약을 맞아
큰 충격을 받고
이제 나라를 구할 길은
인재를 기르는 데 있다고 생각,
교육에 뜻을 두었다.
1906년 양양군수로 부임하여
현산학원을 설립하였고,
1907년
반일단체 대한협회장에 취임했으며,
1908년에는
순 한글로 된 교육월보를 창간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군수직에서 물러난
그는 그 해 배화학당 교사로 들어가
기독교 여성교육에 몸담았고
여성교육에 관한
책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그는 역사교육과
진보적 여성교육에
중점을 두었는데,
영어를 가르치다가도
틈만 나면 한국역사를 가르쳤으며,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무궁화 꽃으로
삼천리 금수강산을 수놓는
지도를 수본(繡本)으로 만들어
수를 놓게 했으며,
태극기도 그렇게 수놓게 하였다.
또한 야간에는
상동청년학원에서
영어와 영문법을 가르쳤으며,
한때 상동청년학원
야간부 원장까지 맡기도 하였다.
무궁화 꽃으로
삼천리 금수강산을 수놓는
지도수본(繡本)
1922년,
봄 돌아와 밭 갈 때가 곧 온다는
조국광복의 찬가를 만들어
온 교회에 새로운 소망을
불러일으켰으니,
이 찬송이 바로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다.
일제가 애국성이 농후하다 하여
부르지 못하도록 금한
제1호 찬송가였다.
1923년에는
춘천 주재 남감리교 선교사
스톡스 목사의 도움을 받아
모곡학교 교실과 기숙사를 건축,
원근 젊은이들을 모아 애국교육을 시켰다.
남궁억 장로가 세운 모곡학교
모곡 예배당 내부.
남반, 아반 사이에 휘장이 있다.
1924년에는
단군 조선부터 3.1운동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동사략(東史略)이라는
역사책 4권을 저술하였고,
1929년에는
동화 체로 사화를 기록한
조선이야기(전5권)를 저술했는데,
이는 선인들의 모화사상을 일깨워
자주정신을 길러주기 위한 책이다.
이 외에도 조선어보충,
조선어문법등을 저술하였다.
한편 그는 학교 실습지에
학생들과 같이
무궁화 묘목 밭을 만들고 가꾸면서,
학교 운영비를 마련한다는 구실로,
해마다 수십만 주의 묘목을
전국 기독교학교와 교회,
기독교단체, 가정 등에 분배하였다.
이른바 무궁화 동산 꾸미기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또한 무궁화 동산 노래를 지어,
학생들의 가슴에
우리 민족의 강함과
나라의 소중함을 일깨웠다.
남궁어 작사 무궁화 동산 노래
남궁억 장로는 1933년 11월 4일
홍천경찰서에 제포되었고,
8만주가 넘는 무궁화 묘목이 소각되었으며,
각급 학교에 비밀리에 심어졌던
무궁화는 물론,
마을 가정집에 있는 무궁화 나무까지
모두 뽑아 버렸다.
그러나 왜놈이 망하고
나라가 독립하여
무궁화를 국화로 하고
각 지방 바치단체들이 뜻을 모아
아름다운 고장에 무궁화 동산을 조성하여
전국에 수십 개가
무궁화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다.
왜놈들의 국화는 벚꽃인데
빳도 사이데 빳또 지루
(パットさいでパットちる),
확 피었다가 확 진다는 것을 자랑하여,
기세가 등등해지면
전쟁을 일으켰다가
폭삭 망하는
지상 최악의 민족이 왜국이다.
그러나 왜국도 우리는 못 당한다.
우리 무궁화는
피고 지고 또 피어 무궁화라네 라는
노랫말처럼 봄부터 가을까지
끈기있게 계속 피어나는
끈질긴 우리 민족성과 같다.
밟아도 밟아도 계속 자라
꽃을 피우는 질경이 같은 민족.
이제 통일만 되면
아시아의 주인이 될 것이다.
남궁억 장로는 1934년 7월 1일
갖은 고문으로 얻은 병으로 보석되었지만,
병약한 노구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교회 일만에 힘쓰다가
1939년 4월 5일,
77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유언하였다.
"내가 죽거든 무덤을 만들지 말고
과목이나 무궁화나무 밑에
묻어 거름이 되게 하라."
애국의 길을 가는 동안
수많은 고난과 옥고를 치르면서도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선생의 유해는,
새벽마다 올라가
조국을 위해 기도하던
모곡학교 뒤편 유리봉에 묻혔다.
그 자리에 그의 기도상과
무궁화 동산 노래비가 건립되었다.
1977년 독립유공자
추가 보상자로 선정되었다.
남궁억 장로가 새벽마다 올라가
기도하시던 산 언덕에 세워진
나라와 민족 위해 기도하시는 동상.
원 곡조 원 가사 일어 찬송
일본 The Hymnal :
Sol-Fa Edition, 1903, 451장
우리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의
원 가사를 일어로 번역한 찬송이다.
영어 원어를 번역하여 악보를 그렸다.
내가 지휘하는 호산나찬양대에서
부를 예정인데,
우선 여기 올린다.
금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