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양들 " ...
가시채가 무엇인가요? 막대기 끝에 붙여놓은 뾰족한 쇠붙이를 가시채라고
합니다. 왜 목자에게 가시채가 필요한가요? 목자가 양들을 인도할 때 길에서
벗어나는 양들이 있으면 가시채로 엉덩이를 찔러 돌이키게 합니다.
양들은 목자를 따라가다가 보기에 보암직하고 먹음직한 풀들이 있으면
그것들이 독초인 줄도 모르고 분별력이 없어 그걸 먹으려고 길에서 벗어
납니다. 또한 목마르면 썩은 물인지도 모르고 무조건 마시려고 이탈합니다.
대개는 지팡이를 꺼꾸로 잡아 다리를 끌어당기면
따라오는데 반해 어떤
양들은 자기 뜻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고집을 부립니다. 그때 할 수 없이
가시채로 찌르면, 어떤 양들은 오히려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뒷발질로 자기
고집을 꺾으려는 가시채를 걷어찹니다. 이런 양들은 고집이 세고 자아가
강하거나 또는 독초나 썩은 물에 깊이 미혹된 양들입니다.
성경에 이런 가시채를 계속 걷어찼던 어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로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주님을 만나 회개하고 돌이킨 사건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 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행26:14)
혹자는 “나도 바울처럼 그렇게 주님이 만나주시는 경험을 한다면 주님께
굴복하고 전심전력으로 헌신하겠다”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울의
상황과 심정이 어떠했기에 주님께서 만나주셨는지를 상고해 보고 싶습니다.
주님이 사울에게 “네가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게
고생” 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여러 차례 사울을 가시채로 찔렀을 때
그가 뒷발질로 계속 저항
했다는 말씀입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을까요?
대표적인 것들 중하나는
스데반의 순교현장일 것입니다. 바울은 당시 유대교회에서 촉망 받는
유능하고 충성된 청년으로서 출신 성분이나 학식이나 나무랄 데가 없었고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바리새인 이었습니다.빌3:5
사울은,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을 향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행 7:60) 라고 용서와 관용을
베풀며 기쁨으로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치는 것을
유심히 보았습니다.
그날밤 사울은 깊은 번뇌에 빠져 이런 저런 생각들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순절 사건만 해도 그렇고, 베드로가 외칠 때 3000여 명이
회개하는 것도 그렇고 또 제자들이 병자들을 치료하는 기적 등을 볼 때
이런 일들은 분명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뚜렷한 증거들이라는 것을
부인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또 베드로가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는 외침도 귀에 맴돌았습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던 사울은 잠 못 이루는 밤마다 자신이 그 동안 핍박
하고 죽였던 사람들이 보여준 평안과 자유함을 자신은 한번도 경험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절감하며 그들을 박해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하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사울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사역에 대해 스승인
가말리엘의 제의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맡기고 좀 더 두고 보아야 하지 않나
하는 의견을 존경하는 유대교 관원들에게 슬며시
호소했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리라는 것을 인정
하면 자신들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나고 지금까지 걸어온 과정과
노력이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유대교의 올바른 전통과
역사를 거스르는 자들은 이단들이기 때문에 강력히 진압해야 한다” 고
사울의 가혹한 사역을 칭찬하고 부추겼습니다.
사울이 자신의 깊은 고민을 묻어두고 제사장들과 관원들의 주장을
수긍한 것은 자신이 받은 교육과 스승들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이미
자신의 입지가 보장된 사회적인 인기와 평판 등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교만에서 비롯된 은근한 야망이 양심의 소리보다 더 컸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는 주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모습으로
위세를 부리며 전통신앙을 옹호하는 열심 있는 유능한 젊은이로 인정받기
위해 주님의 가르침을 적대시하는 그릇된 길로 달려갔습니다.
바울은 겉으로는 유대교회에서 신실하고 성공적인 바리새인으로 보였지만
그럼에도 밤마다 그의 마음 깊은 데서 밀려오는 불안과 고뇌에 휩싸였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얼굴에서 나타난 광휘와 거룩한 평안함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비롯해 가르치시는 것들이 서기관들과는 달리
권세있는 자의 위엄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그 분의 거룩
하고 순결한 생애를 생각하며 마음 속에 심한 갈등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런 끊임없는 사울의 고뇌는 바로 성령이 수 차례 가시채(호소)로 사울의
양심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사울의 하나님께 대한 무지한 충성과 오랜 세월 동안 고뇌에
휩싸여 괴로워하는 모습을 지켜보시고 사울을 회개시키기 위해 나타나신
것입니다. 사울은 하늘에서 비치는 강렬한 빛으로 인해 눈이 멀었습니다.
그는 주님의 질책을 직접 듣자 공포에 사로잡혔고 꿇어 엎드려 자신의
무지와 과오를 회상하며 자기가 얼마나 참람된 일을 저지르고 있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는 삼일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죄과가 너무도 두려워 당장 죽을 것 같은 사경을 헤매며
회개의 기도를 하느라 사실 음식을 삼킬 수도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의 능력에 완전히 굴복한 3일은 어쩌면 그에게 3년
이상의 오랜 시간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자기가 부패한 죄인 중에 괴수 라는자책감과 자신이 추구하던
세상 소욕들이 다 부질없는 배설물이었음을
철저히 깨닫고 통회하며 진심으로 회개하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주님께 용서를 간구하고 또 간구했습니다. 그 후 아나니아 라는 성령의
사람이 다가와 그에게 안수하매 눈이 열리고 성령을 받아 거듭났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는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딤전 1:16) 바울 당시의 유대교회처럼 오늘날 많은
교단들이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진리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한 목회자들은 신학교에서 배운 교단의 교리와 전통 또는 스승들에
대한 존경심 그리고 지금 누리는 인기와 평판 때문에 진리를 외면하며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양들을 방치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날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많은 양들이 바른 진리를 따르라는 주님의
가시채를 거절하며 발로 걷어차고 있습니다. 많은 양들이 진리 보다는
목회자나 가족들, 친구나 직업 또는 나에 대한 평판과 명예 때문에 진리를
따르라는 성령의 호소(가시채)를 거절하고 적당히 타협한 교회생활을고집
하고 있습니다. 교리와 예수님의 말씀 사이에서 흔들리며 진리를 붙잡지
못하고 범람하는 조류에 목회자와 양들이 함께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교단과 교리를 떠나 바른 진리를 따라야 할 때입니다. 진리인 성경
말씀만이 나를 구원해 주는 생명줄 입니다. 아직도 대다수의 교단과 교인들이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는 교리에 갇혀 죄에 대한 고민도 없이 주님의
말씀과 계명에 순종해야 한다는 가시채를 걷어차고 있습니다, 간혹 말씀에
순종하는대신 양심의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 교회에 충성 봉사하는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대변하며 하나님께 충성한 것으로 착각하기도 합니다.
만일 “저를(예수)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
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요일 2:4) 라는 말씀을 어린
아이같이 정직하게 진리로 받아들인다면, “예정설, 한번 구원은 영원하다,
계명을지키지 않아도 구원은 잃지 않는다” 등의 거짓 진리들이 모두
무너질것이며, 아울러 기독교회의 기득권을 주장하는 많은 교단들이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크게 흔들리며 무너질 것입니다.(마 7:26-27)
성경은 마지막 때 바벨론 교회들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계 18:2)
오늘날 바벨론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 중 극소수가 성령이 호소하는 진리의
가시채에 찔려 사울처럼 양심이 아파 괴로워하며 진리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주님은 그런 성도들을 만나주시고자
예의주시하고 계십니다.
오늘날 구원에는 진실한 회개와 거듭남을 통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좁은
길을 걸으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는 말씀에 “그 말은
어렵도다. 그런즉 누가 천국에 들어가겠는가” 라며 등을 돌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예수를 따른다고 하면서 예수=진리=말씀을
외면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좁은 문을 들어가기를 힘써도 못 하는 자가
많으며, 또한 말세에 믿는 자들을 보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바른 진리는
항상 인기가 없습니다. 만일 진리를 따르기가 쉽고 편안하다면 진리를
따르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 23편)
주님이 나를 안위하시며 초장으로 인도하실 때 지팡이와 막대기(가시채)로
외부의 적도 막아주시지만 또한 그 막대기로 우리를 연단하시며 인도
하신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혹 거듭남을 간절히 원하는 데도
변화가 없다면 우리들은 주님의 가시채를 뒷발질 하는 고집 센 양들이
아니라 내 양심을 더 깊게 찔러달라고 간구하는 양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의 가시채에 내 양심이 찔려 내 신앙에 대해 고민하고
고뇌하는 절실한 심정을 받아 진리에 온전히 굴복하여 진리(성령, 말씀)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글쓴이 / 송전서 (2019.8.19)

첫댓글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자비와 긍휼을 베풀고 계시는 이 황금같은 마지막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교단과 교리를 떠나 바른 진리(예수, 성경말씀, 성령)를 따라야 할 때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는 생명줄은 오직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의 피공로뿐입니다.
바른 진리말씀을 따르라는 주님의 사랑의 가시채를 신학교에서 배운 교단의 교리와 전통 때문에, 인기와 평판 때문에 진리를 외면하며 거절하여 뒷발질로 걷어차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