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색창연
글쓴이 햇빛도령
1.
크리스마스를 앞에 둔 거리는 들떠있었다. 하늘은 눈이라도 올 것처럼 어둡고, 차가운 바람은 회색 건물 사이를 휘몰아친다. 그래도 거리에 울려 퍼지는 캐롤과, 캐롤 사이를 즐겁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은 즐거웠다.
“아으. 날씨 진짜 춥다. 이런 날은...”
... 바깥의 낭만을 여지없이 깨 버리는 사무실의 소동. 사무실에서 저런 일을 하는 건 정말 악취미다. 보기에는 좋지만.
“분재에는 최악이라고! 어이! 서헌씨! 좀 와서 도와줘. 얘들 무겁단 말이야!”
하아. 분재. 분재. 날씨의 변동에 약한 분재. 탁한 공기도 좋지 않아서, 난 피우지 않지만 우리들의 애연가들을 괴롭히는 분재. 또다시 분재가 날 괴롭히려 한다. 어떤 사람은 뛰면서도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긴다는데 난 쉬는 시간에도 커피 한모금의 여유조차 없구나.
“휴우. 땡큐! 자자. 그럼 일들 하자고 일들!”
팀장 정의맥씨는, 가장 늦게 온 주제에 있는 소란은 다 떨면서 돌아다니고 있다. 난 그저 신경을 모두 끄고 분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150년 되었다는 소나무. 그 소나무는, 사진에서밖에 본 적 없는 커다란 소나무를 그 배율로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듯 멋지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었다. 분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하고 탄성을 지를 만큼 아름다운 모습. 이렇게 호들갑을 떨 만도 하다.
사실 우리 팀장은 분재로는 한국에서 일인자는 아니어도 그 밑, 한 삼인자 정도 된다고 한다. 가끔 잡지에도 실리기도 할 정도니까. 대체 더 두루뭉술하고, 굴러다닐 것 같은 몸 어디에서 이런 섬세함이 나오는지 잎을 하나씩 꼼꼼히 닦아주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단지 탄성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하기야 그 정도 정성을 들였으니 저런 멋진 나무도 나오고, 명성도 얻을 수 있었겠지.
“어이. 서헌씨! 일하자고. 일해! 우리에게는 겨울의 낭만 따위 즐길 시간 없는 것 잘 알잖아.”
아아. 그래요. 우리는 ‘국방부 산하 특수 조사대 분과 가상자아폭탄 분담과’였죠. 거기서 난 신입 ‘협상가’ 최수헌이구요. 그러면 뭐합니까. 요즘은 일이 없어 거의 유급휴가나 마찬가지인 생활을 하고 있는데요.
터덜터덜, 자리로 돌아와 앉으면서 분재에 대해 생각했다. 아름다운 자연, 그 자연을 축소해 놓은 듯하지만, 인공의 결정판인 가련한 식물을. 굵은 철사에 칭칭 동여 매여져 성장의 가능성이 한길로만 굳어버린 나무에 대해서. 세기를 넘게 살아오며, 자라지 못한 서리서리 굽은 한마저 푸른 잎에 한껏 펴지 못하는 영혼에 대하여. 자유롭지 못한, 그 한껏 자유로워야 할 고색창연한 푸르름에 대하여.
2.
뭔가 알 수 없는 - 내가 분재가 되어 나무들이 날 칭칭 동여매며 기르는 꿈을 꾸다가 어벙한 상태에서 깨어났다. 경보다. 그것도 특급경보다. 위기상황이다.
사무실은 온통 혼잡했다. 정확하게 2년 전에 있었던 ‘피의 수요일’이후, 처음으로 울리는 경보이다. 그것도 특급경보. 특급경보는 이 특별수사팀이 결성된 역사 이래로 단 한 번도 없었다.
“1km이내 가상자아폭탄 출현인가? 아님 신종이야? 어서 보고해!”
팀장은 여느 때와 달리 극히 냉정하고 차가운 태도로 돌변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저 긴장된 옆모습은, 그리고 그게 그에게 더 어울리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이더 오퍼레이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그것이... 1km이내에 확인되는 자아폭탄과 신형폭탄만...”
“어서 말해!”
“2... 27개... 그리고... 지금 바로 저희 건물 앞에...”
- 딩동, 딩동
“바로 문 앞에...”
팀장을 비롯한 모두가 침묵했다. 방 안은 말 그대로 적막. 그 지독한 고요를 흐르는 소리는, 아까부터 신경을 지독하게 긁는 사이렌 소리와, 뭔가를 끊임없이 출력하는 레이더의 기계음, 그리고 모두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거친 숨소리들. 긴장감은 점점 높아지고,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것 같은 상황이었다.
- 딩동, 딩동
“모두 움직여! 암호해독! 정지어 파악해! 그리고 나랑, 서헌이랑, 자원자 둘 남고 빨리 나머지는 비상계단으로 탈출해!”
사무실 안은 그야말로 폭풍이었다. 모든 금기어를 해독해낸 컴퓨터는 그 오퍼레이터에게 엄청난 양의 출력물을 ‘발사’하고 있었고, ‘탈출’도 막바지에 이르러 이제 사무실에 덩그러니 남겨진 건 나와, 자원자 두 명과, 컴퓨터 오퍼레이터 3명뿐이었다.
“정지어 파악 끝났습니다!”
- 딩동, 딩동
“드... 들어오세요! 문 열렸습니다.”
서서히, 마치 소설 속에서 묘사되는 지옥문이 열리듯 문이 열렸다. 실내 공기가 달궈져 있었기 때문인지 차가운 바깥공기가 들어오자 상쾌했다. 모두들 잔뜩 긴장해서는 문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고, 난 협상가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문으로 다가섰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나서 들어온 것은.
“어. 헬로 키티 인형이네?”
라는 얼빠진 팀장의 말을 배경으로 들어온 것은, 말 그대로 사람이 들어있는 커다란 헬로 키티 인형이었다.
“안녕, 여러분? 내가 키티야. 이수환을 찾으러 왔어.”
키... 키티?
“키... 키티? 그... 그... 초가상자아 키티?”
커다란 키티 인형은 귀엽게 고개를 갸우뚱하며 우리에게 말했다.
“응.”
그리고 한 발짝 들여놓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27개의 폭탄도 함께.”
3.
난 ‘키티’이기에 ‘헬로 키티’인형의 옷을 입고 나온 키티의 센스에 넋이 나가버렸으며, 나를 제외한 모두는 순식간에 총을 빼어들어 키티에게 겨누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대... 대... 대... 대체 여... 여기 온 이유가 뭐... 뭐냐... 요...”
이봐. 우리나라 문법에 그런 말은 존재하지 않아, 같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대체 이 대치 같지도 않은 대치가 언제 끝나버릴지 알 수 없는 기분에 빠져버린 나는, 터덜터덜 걸어가 그런 날 멍하니 바라보는 3명의 시선을 뒤로 한 채 내 자리로 돌아가 털썩, 소리를 내며 앉아버렸다.
“야... 야 임마! 너 뭐하는 거야! 지금이 쉬는 시간이냐?”
무시하며, 난 기계가 뱉어낸 금기어와 정지어를 집어 보았다. 역시나.
“아? 당신 역시 똑똑한 줄 알았어. 이 폭탄 27개는 죄다 정지어가 다른 폭탄의 금기어랑 연동되어있거든. 그리고 폭탄 하나가 터지면 27개가 공진해서 터지도록 되어 있어. 음... 내가 알기로 아직 한국 내에 발동되지 않은 가상자아폭탄들이 꽤 남아있거든? 아마 걔들도 공진되어 터질 거야. 그걸 알고 먼저 살핀 거지?”
그걸 안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그렇다고 해두지.
“그럼. 자자. 다들 총들 치우고, 키티? 키티라고 부르면 될까?”
“좋을 대로 해.”
“그럼 키티, 들어와서 좀 앉아. 얘기는 해봐야 할 것 아냐.”
여전히 어벙한 상태로 테니스를 관전하는 것처럼 우리의 대화에 따라 고개만 이리, 저리 돌리고 있던 팀장 등등 세 명은 점점 더 멍해져서는 이제 아예 생각도 없이 고개만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어떤 감이 있었다고 할까, 딱 처음에 키티 복장을 보자마자 난 그것이 우리를 해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일종의 유희라고 생각했다. 물론 난 키티 자신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까 키티가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유희를 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내 감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협상가로서의 감이었을까. 팽팽한 긴장감을 무의식적으로 읽어내는 그런 것. 꼭 기계가 되어 버리는 것 같아서 싫지만.
그래서 모두들 사무실로 돌아오고, 어쩌고 하면서 일단은 사무실은 안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그때까지도 키티는 그 우스꽝스러운 키티 인형을 벗지 않고 있었는데, 사실 기계 및 서류만으로도 답답한 이 사무실 안에 머리가 몸통만한 인형이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 저기 말이야. 그 인형 너랑 붙어 있는 거 아니면 나가서 좀 벗고 오지 않을래?”
벌떡.
키티가 벌떡 일어나자 억지로 평정을 되찾았던 사무실에는 다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그런 말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말이지, 절대 이 아수라장 개그의 연속인 사무실에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아이고 골치야. 이 화상님들아!”
한쪽에서는 커피를 마시는 척 하며 키티를 흘끔흘끔 쳐다보던 사람이 커피를 뿜어내질 않나, 한쪽에서는 책을 이리 꽂았다, 저리 꽂았다 하며 우리 주변을 왔다갔다하던 여직원 한명이 책을 다른 사람 손등에 꽂아버리질 않나, 손등에 책이 꽂힌 그 사람은 아파서 난리부르스를 추다가 의자채로 넘어가질 않나. 사실 제일 가관이었던 건 팀장 정의맥씨였는데, 신경 굵게 분재를 다듬는 척 하다가 결국 싹둑, 꽤 굵은 가지 하나를 잘라내고 자멸해 버린 것이다.
그 혼란의 틈새에서 키티는 드디어 인형의 머리를 벗었다.
아수라장은 순식간에 진정되었다. 단지 정신 차리지 못한 건 침통해하던 의맥씨였을 뿐.
키티는, 어깨까지 오는 갈색의 긴 생머리를 한, 보라색 커다란 눈이 인상적인, 꽤 아름다운 여자였다.
4.
“흐음.”
“흠.”
“흐으으음.”
벌써 한 시간째. 나와 키티와 안절부절 못하는 의맥씨는 작은 회의실에 ‘감금’되어 있었다. 뭐. 아무것도 잠겨있지 않지만 밖의 사람들에게서 풍겨 나오는 살기는 어떤 자물쇠보다도 확실히 날 이 회의실에 묶어두고 있었으니까.
키티는, 인형을 다 벗어버리고 나서는 평범한 청바지와 깔끔한 흰색 셔츠 차림으로 우리를 쓱 돌아보더니,
“난 이수환을 만나고 싶어. 그를 만나게 해줘. 너희라면 할 수 있지? 아. 그리고 그 폭탄들은 다 신형이라서 아마... 실험해보진 않았지만 사람과 직접 공진해서 펑! 하고 터질 거라고 생각해.”
라고 말하곤, 그때까지도 침통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정의맥 팀장의 분재를 번쩍 들고는 회의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이대로 좀 쉬고 싶었지만 사람들에 의해 억지로 떠밀려 회의실로 들어왔고, 의맥씨는 자신이 꼭 함께 있어야 한다며 억지로 들어왔지만, 분재 때문이라는 게 눈에 훤했다.
“이 나무, 아파하고 있는걸. 대체 왜 이렇게 꽁꽁 묶어 놓은 거야?”
한 시간 만에 입을 뗀 키티가 한 첫마디였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소나무 줄기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순간 꼭 영화에서 본 듯한 장면이 내 눈 앞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키티의 두 손이 전선으로 이루어진 생물체처럼 변하더니 소나무 줄기 속으로 스며들어버린 것이다.
“158년을 산 나무야. 너무 답답하고, 아파해. 제대로 숨 쉰 적이 없었구나. 이 조이고 있는 철사 때문에.”
자신의 분재를 상하게 하는 줄 알고 벌떡 일어나려던 의맥씨도, 그 장면을 좀 더 자세히 지켜보려고 다가서던 나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저, 바라만 봐야 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한 신비로운 빛이 나무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은은한 솔향, 그리고 솔잎 그대로의 녹색이 방안에 가득 퍼지자 꼭 아주 오래된 소나무 숲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진중한 울림이 퍼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키티의 가벼운 콧노래. 둘은 이해할 수 없는 어울림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소나무와 종달새의 어울림, 산과 바람의 어울림, 오래된 하지만 싱그러운 연인의 어울림처럼.
“나무의... 노래야. 어릴 적에 아버지가 나무를 손질하실 때 딱 한번 들어본 적이 있어. 바람이 좋은 날, 자유로운 나무가 따스한 손님을 만나면 내는 소리야.”
의맥씨는 멍하니 넋이 나가서 말했다. 잠시 뒤 나무를 꽁꽁 옭아매고 있던 굵은 철사가 서서히 떨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철사가 나무를 깊이 파고들어 있었기 때문에 나무의 줄기에는 깊은 흔적이 남았다. 그것마저도 천천히, 상처에 새살이 돋는 것처럼 메워지는 모습은 말 그대로 감동적이었다. 변화는 그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까 의맥씨가 실수로 잘라버린 가지에서도 건강한 새 가지가 돋아나기 시작했으며 어쩐지 언제나 어두운 녹색으로 풀죽어 조금은 말라있던 잎들도 모두 어린 새 잎처럼 신선한 녹색에 촉촉한 습기를 가득 머금었다.
“더 크고 싶지는 않아? 묶여있는 동안 못 큰 것 지금이라도 크고 싶다면 클 수 있어.”
“그... 그건...”
우리의 팀장 정의맥씨는 이 감동적인 와중에서도 자기 분재에 대한 욕심이 남아있는지 뭔가 무진장 아쉬워하는 표정으로 키티를 말리려고 했다. 솔직히 이제 와서 말리기는 늦었잖아? 여태껏 그렇게 속박하고 괴롭혔으면 놔줄 때도 된 건데 말이야... 라고 생각해보니 저 나무가 150세의 수명으로 자란다고 한다면...
“그... 그건...”
건물이 무너지고 말거다! 그렇잖아도 이 건물은 약한데 나무가 뚫고 자라난다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이 되고 말거다.
허둥지둥 당황하는 나와 팀장과는 달리 키티는 예의 그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나무만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저 표정을 보니 별 일 일어날 것 같지는 않군. 분명 오늘 처음 보는 것일 텐데도 어딘가 깊숙한 곳에서부터 따뜻함이 느껴진다. 이런 기분, 처음인데. 가족이라는 게 있다면, 그리고 오랜만에 그 가족을 만난다면 이런 느낌일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해 본다.
“그래? 그렇구나... 알았어. 이대로도 좋은 거지?”
서서히 방안을 채우고 있던 솔향과 녹색 빛이 잦아들었다. 나무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빛이 모두 사라진 후, 한결 건강해 보이는 나무에서 손을 떼어 낸 키티는 다시 원래대로 손을 변화시키면서 의맥씨를 향해 말했다.
“이런 짓 하지 말아. 이렇게 오래 산 나무는 사람들이 뭘 원하는지 정도는 알아 듣는 다구. 이렇게까지 꽁꽁 묶어놓지 않아도 여지껏만큼의 정성만 들이면 지금보다 훨씬 생생하게 자라나 준다고 했으니까. 아참, 그리고 고맙다고 전해달라는걸. 아프기는 했지만.”
의맥씨는 한동안 나무를 쳐다보느라고 말을 못했다.
“고... 고마워요. 사실 요즘 나무가 시름시름 시들어가서 걱정했는데...”
씨익. 키티는 왠지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씩 짓더니만 내 옷깃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그 힘이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하마터면 꼴사납게 넘어질 뻔하고는. 다시 중심을 잡고 물었다.
“어... 어디가요!”
“이수환 만나러. 가자. 너는 알거 아냐. 꼭 만나야 해.”
5.
이수환. 그는 가상자아폭탄이 처음 나타나면서 그에 대한 대비로 만들어진 특수조사대의 초기멤버 중 하나였다. 실제로 특수조사대의 이름으로 가상자아폭탄을 해결하기 시작한 것이 9번째 폭탄부터니까, 그는 사실 가상자아폭탄과 함께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방면에 있어서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이 팀을 떠난 것은 5년 전. 지금은 시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외딴 숲 속에 살고 있다고만 표시되어 있었다.
“거참 먼 곳에도 살고 있네.”
사실 난 그와 마주친 적은 없었다. 내가 이 특수조사대에 협상가로 들어온 것이 4년 전, 452번째 폭탄에 의해 전임 협상가가 폭사되면서였으니 약 1년간의 갭이 그와 나 사이에는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와 같은 대에 근무했던 인물들은 모두가 승진을 했거나, 은퇴했거나, 사고를 당했거나 해서 현역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지금의 특수조사대에서는 그의 이름만이 간간히 전해져 올 뿐,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너는 이수환이라는 인물을 잘 모르는 건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먼발치에서 언뜻 본 적은 있었다. '피의 화요일‘,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대 재난이었던 2년 전 그날이었다. 그 당시 도시에서 공진폭발을 일으킨 폭탄만 1200번 대에서 1300번대 전부, 그리고 이것은 추정 숫자일 뿐이고 폭발의 강도나 위력으로 봤을 때 추정 400개 정도의 폭탄이 도시에서 폭발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건 실제로는 키티의 잘못도, 가상자아폭탄의 잘못도 아니었다. 이미 가상자아폭탄이라는 것은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정을 받고 있는 분위기였고, 500번째 폭탄을 마지막으로 1200번째 폭탄까지는 어떠한 일도 없이 잘 해결되어 왔다. 게다가 어지간한 폭탄들은 정지어를 말해 정지시켜도 폭탄 자체의 생명기능은 멈추지 않았기 때문에 일종의 질병쯤으로 인식되어 오던 것이다.
단지 한 미친 인간의 미친 광기로 인한 사고였을 뿐
나는 순전히 특수조사대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특수조사대에서 빠져나간 탐지기가 문제였다. 그 미친놈은, 탐지기를 들고, 폭탄을 찾아서, 금기어를 말했다. 그리고는 아주 편하게도 자신도 그 첫 폭발에 휘말려서 죽어버렸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이 지내고 있던 폭탄들과 공진, 그리고 폭발. 제일 안 좋은 상황이었던 건, 당시 막 연구되고 있던 폭탄적출을 하던 실험실과 매우 가까웠다는 것이다. 결과는 단순했다. 다섯 자리수의 사상자와 세자리수를 조금 넘어설 거라 추정되는 건물의 붕괴, 그리고 숫자로는 쓰기 어려울 정도의 금전적 피해와, 더 이상은 돌이킬 수 없는 서로간의 불신까지.
그 와중에 이수환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폭발 일보 직전의 폭탄 몇 십 개를 안전하게 정지시키고, 자신은 큰 부상을 입고 어디론가 은거했다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것의 전부였다.
“저는 잘 모르죠. 어쨌든 사는 곳은 알아냈으니까 가자구요.”
여기서 강원도 부근의 숲 속까지 가는 기차는 아무래도 저녁까지나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일단은 역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걷고 있는데,
“지금 어디가. 차타고 가는 게 빠르지 않아?”
“물론 차타고 가는 게 빠르긴 하지만, 특수조사대는 그렇게 부유한 기관이 아니라서 당장 위급할 때 쓸 차 몇 대만 빼 놓고는 개인사용이 불가능하다구요. 나는 당연히 월급쟁이다 보니까 자동차 같은 건 꿈도 못 꾸고요. 그냥 기차타고 가지요. 4시간만 기다리면 될 텐데.”
그러자 그녀는 한심한 눈길로 날 쳐다보았다. 으윽. 투명한 보라색 눈이 아래에서 빤히 올려다본다는 것은 그다지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애매모호한 것이라 나는 주춤할 수 밖에 없었다.
“어떤 차 좋아해? 아니, 그것도 내가 결정할 거야. 따라와. 이수환도 지금 너희들같이 무능하고 재미없으면 찾아갈 필요도 없을 텐데.”
결국 무능하고 재미없는 너희들 틈에 끼어버린 나로서는 별 항변도 하지 못한 채 끌려가는 수밖에 없었다. 꼭 무슨 목줄 매인 강아지처럼. 그런 그녀가 발길을 멈춰선 곳은 내 월급으로는 평생 꿈도 못 꿔볼 아우디의 대리점이었다.
“으아아아... 돈 많아요?”
“그냥 들어오기나 해.”
그러더니 덜컥 최신형 세단을 골라버렸다. 키티는 이래 뵈도 알부자... 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결재까지 마쳐버린 키티는 그대로 차에 올라타 운전석에 앉아버렸다.
“저 손님... 출고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지금 워낙 급해서 그러니까 이거 당장 쓸게요. 돈이 부족한가요?”
하면서 살짝 웃어 보이는 얼굴. 연기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자연스러웠고, 귀티가 넘쳤다. 사실 입고 있는 옷이 셔츠에 청바지라서 조금 어울리지 않는다만, 드레스, 하다못해 정장을 갖춰 입었더라면 정말로 부잣집에 돈 많고 교양 있는 아가씨처럼 보였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그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쏜살같이 강원도로 달려가고 있었다. 좋은 차라 그런지 고속으로 달리는데도 진동도 없는데다가 차 여기저기에 지루하지 않도록 여러 가지 유흥거리들이 많아서, 그렇잖아도 기계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 차만큼 탐나는 것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 이제 와서 묻는 거 이상하지만, 운전면허는 있어요?”
“없지.”
난 여태껏 매지 않았던 안전벨트를 매고 성호를 그었다. 오 주여. 이 불쌍한 어린양, 무면허 운전자가 운전하는 시속 150km에서 당신의 곁으로 가옵니다.
“걱정할 거 없어. 네트워크를 뭘로 아는 거야 넌. 난 그 정보들의 데이터베이스랑 공유되어 있어. 아까 차 산 것도 데이터베이스 이용한 건데 그건 궁금하지 않고 운전만 궁금한걸 보면 당신도 참 관찰력이 없어.”
“에? 그건 어떻게 한 거예요? 생각해 보니까 돈이 있을 리가 없잖아.”
“네트워크에 떠돌아다니는 정보를 죽 찾아보다 보면, 몇 십 년 동안 찾아가지 않는 휴면계좌나 분명히 나쁜 일에 사용되는 출처가 의심되는 돈들이 있잖아? 계좌 추적을 해서 막 써도 더 이상 주인이 없거나, 출처가 떳떳하지 못한 돈들을 모아서 쓰는 것뿐이야. 인터넷이라는 게 괜히 정보의 바다가 아니라고.”
여기까지 들으니, 그 돈의 옳고 그름보다는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럼 가상자아폭탄은...”
“너희들이 그렇게 부르는 폭탄은 사실 인터넷에 있는 정보들을 조금만 모아서 변형시키면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는 것들이야. 그리고 그 폭탄들은 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공장들에서 만들어 낸 것이고. 왜 경제파동 심했을 때 있잖아. 그때 도산해서 지금은 안 쓰이는 생화학 공장 같은 건 지구상에 쌓이고 쌓였으니까.”
그리고는 그녀는 그녀의 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몸도 그런 곳에서 만들어 낸 내 몸이야. 예쁘지? 예쁘지?”
“에...”
그 말이 어쩐지 너무나도 공허하고 아픈 울림을 가지고 있어서, 예쁘다고 말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도무지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렇게 아프게 느끼지 말아. 외로운 건 사실이었지만 뭐. 난 나 나름대로 놀고 있었던 거야. 하필 이상한 녀석이 망쳐놔서, 더 이상 장난도 칠 수 없게 되었지만.”
외로움, 지독히도 짙은 외로운 말. 그녀는 가상생명체였다. 어떻게 생겨났는지도 불명, 의도도, 목적도 불명. 세상 사람들에게는 테러범보다 더한 공포의 대상으로, 우리 특수조사과에게는 골치 덩어리의 근원으로, 인터넷 해커들에게는 도전의 대상으로, 이렇게 다양한 지위를 가진 그녀였지만 어느 누구도 그 외로움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말했듯 네트워크라는 건 무수한 정보의 파편들이 흘러 다니는 곳이었겠지만 그곳은 너무나도 차가운 무기질의 세계이다. 지금도 지구위에서 누군가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편지를 써서 이메일을 보내고 있겠지만, 그것은 받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의 커뮤니케이션이 전제되어 있을 때만 ‘사랑’을 담은 편지일 뿐, 네트워크에서는 단지 0과 1로 이루어진 이진법의 코드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텐데, 그곳에 갇혀 살아온 인격이라니.
갑자기 가족도 없이 고아원에서 살았던 내 과거가 오버랩 되었다. 고아원이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터라 이곳저곳 많은 곳을 돌아다녔던 나는, 세상에 가득 차 있는 사랑과, 정처럼 여러 가지 따뜻한 감정들은 너무나도 그 대상이 좁게 한정되어 있어서 나와는 겉돌고 있는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 어린 나이에 깨달아버렸다. 지금에야 번듯한 직장도, 직위도, 안정된 수입도,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도 가지게 된 나였지만 여전히 외로움은 내 안 깊은 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었다.
“참... 잘 견뎌왔네요.”
“글쎄.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는걸.”
그렇게 차는 강원도를 향해 달려갔다.
6.
“여기가 숲이라고?”
이곳은 숲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민망한, 아니 사막이라는 이름이 더욱더 어울리는 그런 황폐한 곳이 되어 있었다.
“하... 하지만 여기 지도에는 숲이라고...”
“너 서울에서 나와 본 적 없지?”
생각해 보니 그렇다. 여태껏 살면서 서울을 벗어나보질 못했다니. 이건 우물 안 개구리랑 다를 게 없잖아? 그녀는 손을 예의 그 전선과 같은 모습으로 변형시키더니 땅속에 묻었다.
“오래됐네. 이렇게 바싹 말라있어서는 나무고 풀이고 자랄 수도 없겠어. 어쨌든 여기에 서있는 집이라고는 저거 한 채밖에 없으니까 가자.”
이미 엄청난 모래먼지, 흙먼지가 날리고 있는 민둥산 중턱에 웬 집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주변 산에 나무가 있었을 시절이라면, 분명 계곡으로 보이는 저 틈으로도 물이 흘렀을 테고, 그럼 상당히 좋은 집이 되어있었겠지만 지금 이런 상황으로는 단지 을씨년스러운 광경에 지나지 않는다.
이게, 사막화인가보다. 주변 둘러보는 곳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한때는 나무였을 말라비틀어진 기둥들과 바닥에 툭툭 차이는 돌멩이들, 그리고 눈도 뜨기 힘들만큼 불어대는 모래바람이 전부였다. 아무리 저녁시간이 가까워졌다고 해도, 햇빛이 흐려질 만큼이나 모래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니. 이렇게 바람이 불어대는데 서울에 아무 일도 없는 것이 이상했다.
“그야 서울은 일종의 바람막이 같은 게 형성되어 있으니까 내부 공기는 깨끗할 수밖에. 서울이 그렇게 대도시가 되면서 주변은 이렇게 변해 가는 거야.”
그렇게 겨우 도달한 통나무집은, 생각보다는 튼튼한 모양인지 용케도 이런 곳에서 잘 서 있었다. 물론 그 모래바람을 뚫고 여기까지 걸어온 우리 꼴은 먼지 덩어리나 다름없었지만.
“실례합니다! 계세요?”
몇 번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그러자 키티는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이... 이봐요.”
“괜찮아. 이수환!”
안은 모닥불이 벽난로에서 타오르고 있었고, 작은 거실은 푹신한 카페트가 깔려 있었다. 전체적으로 아늑한, 그리고 왠지 그리운 공간이었다. 그리고 거실 안쪽으로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서 여자로 보이는 사람 하나가 걸어 나왔다.
“네! 나가요!”
“엇.”
“어머나.”
키티가 둘? 이라고 생각할 만큼 닮은 외모였다. 단지 키티는 긴 생머리였고, 그쪽의 여자는 짧은 커트머리라는 것이 좀 다를 뿐 외모는 거의 다를 것이 없었다.
“그쪽은... 혹시 키티?”
“역시 날 알아보는구나. 그래. 잘 살고 있었어?”
“언니! 여보! 키티가, 내 언니가 왔어요!”
조사한 바로는 그녀는 가비, 이수환씨의 부인이었다. 분명히 그녀는 가상자아폭탄이지만 불발이었다고 나와 있고, 그녀 역시 특수조사대에서 이수환씨와 같이 일했던 초기 멤버 중 한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닮아있다니.
“왜... 이렇게 닮은거에요?”
“그야 내가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미리 만들어냈던 내 모습이니까 그렇지. 사실 난 가비의 어머니나 다름없지만 그녀는 지금은 날 언니로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알아.”
반가워하는 가비를 진정시키고, 모래로 가득한 몸을 털고, 씻고 하다가 겨우 우리는 이수환씨가 있다는 방으로 안내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백발이 된 노인이 커다란 창을 보며 앉아있었다.
“이수환이지?”
그는 그대로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키티인가. 언젠가는 찾아올 줄 알았는데, 이제야 찾아오다니 정말 대단하군. 그래 오면서 산 구경 좀 했나? 아름답지?”
그는 분명히 예전 산이 있었을 때의 모습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산? 그런 게 어...”
이렇게 말하려는 날 제지하고 키티는 말했다.
“그럼. 무척 아름답더군. 그래, 여기서 인생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한 거야? 물은 정말 맑더라.”
그는 그제야 몸을 돌리더니 이쪽을 바라보았다. 분명히 나이는 50세, 초로에 들어설 나이는 맞았지만 그의 모습은 곧 죽어도 별로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일만큼 늙고 초췌한 모습이었다. 게다가 양쪽 다리가 모두 무릎 아래에서 사라져있어, 그는 지금 커다란 흔들의자에 파묻혀 있을 뿐 다른 행동은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리 가까이 와보게. 여태껏 그렇게 술래잡기를 하다가 이제야 찾아온 주제에 너무하는구먼.”
키티는 그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손이 참 따뜻하네. 그런데 벌써 이렇게 골골해서 쓰겠어? 난 아직도 더 놀고 싶단 말이야. 그리고 저쪽에 있는 사람은 네 후배야. 그리고 다람이 부탁했던 그 아이이기도 하고.”
그는 갑자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더니 말했다.
“네가... 다람이 부탁했던... 그 아이냐.”
그는, 눈마저 멀어있었던 것이다.
7.
“다... 다람이 누구죠?”
그의 눈이 멀었다는 사실에 잠시 눈치 채지 못했지만, 분명 날 두고 다람이 맡긴 아이라느니 하는 소리를 했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친부모도, 잠시 동안 날 양육했었다는 양부모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난 내 뿌리를 찾는 것을 꿈꾸고 있었다. 이제야, 보이지 않는 눈이지만 내 쪽을 바라보게 된 그가 말했다.
“다람을... 모르는 것이냐. 하긴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다만... 그가 바로 날 은퇴하게 만든 장본인이자 너의 후견인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이수환이라는 인간을 알게 한 계기가 된 폭탄이었고.”
폭탄... 이었던건가.
또 다른 의미로 머릿속이 하얗게 타버렸다. 우연찮은 계기로 찾게 된 날 알고 있는 사람이, 폭탄이라니. 차라리 몰랐으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
그동안 어떤 일이 있어도 참아왔던 눈물인데,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이 너무나도 이질적이라 나 스스로 놀라서 울음을 참을 수 없게 되어버렸다. 키티가 다가와 눈물을 닦아주는 게 더 서러워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펑펑 울었다.
“다람은, 정말로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폭탄이었다. 이제는 그런 구분도 할 필요 없이 모두가 다 같은 생명으로 알게 되었다만, 그 당시만 해도 폭탄은 정말로 사회에 위협적인 존재였지. 그래서 난 아무 죄책감도 없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거다. 그런데... 다람은 달랐다. 그런 그를 내 손으로 정지시킨다는 게, 앞으로 얼마나 더 그런 일을 계속해야 할지 모른다는 게 나를 특수조사과로부터 나오게 한 이유였다.”
그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다시 말해, 난 네 아버지격인 존재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렸다는 말이다. 단지 위협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그런 것만으로 지워버렸다는 거다. 나와 방금 전까지 맥주를 마시던 한 인간을 스스로 ‘정지’시킨다는 기분을 알고 있나? 하긴 요즘은 기술이 좋아져서 정지어를 말해도 그는 그냥 살아갈 수 있다고 하더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이수환, 그는 분명 나에게 있어 살인자나 다름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 지금은, 어떤 적의도, 원한도, 살의도 남아있지 않았다. 단지 지독한 연민이 남아있을 뿐.
“네 진한 회색 눈동자는, 다람을 꼭 닮았더구나.”
그것이, 결정타였다. 정말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온 몸을 쏟아낼 것처럼 울어버렸다. 모두가 날 위로해주고, 다독여주고. 밖에서는 모래바람이 끝도 없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피어오르는 모닥불과 따뜻한 백열등 빛 아래서 살아오면서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가족’을 느꼈다. 그곳에는 아버지를 묻어버린 원수가 있었고, 그 아버지를 만들어낸 제작자와 제작자의 딸인, 그러니까 아버지와 남매관계인 한 폭탄이 하나 있었음에도, 그리고 난 그 폭탄들과 협상을 하는 협상가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 가족이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
한바탕 소동이 지나고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저녁이 준비되었고, 난 키티가 처음으로 한 요리를 맛보는 영광의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
“쳇. 부러워.”
확실히 모든 네트워크의 지식을 종합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내는 키티에게는 어떤 것도 당해낼 수 없었는지, 가비 씨는 식사하는 내내 투덜거렸다. 확실히 요리들은 하나같이 다 맛있었다. 아마 일류 요리사의 요리정보라도 알아내서 요리한 것이겠지.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수환 씨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가 이렇게 순식간에 늙어버린 것은, 피의 화요일 때 자신도 공진에 잠시 동안 휘말리면서 세포의 노화가 가속되었기 때문이란다. 그 후 시력과 양 다리를 잃어버렸고. 그는 이 사막이 숲일 시절일 때부터 이곳에 살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미 사라진 세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전히 창밖으로 숲을 보고 있었다.
“저쪽에 저 큰 나무 보이나? 저 나무가 이 숲의 자랑이라네.”
“나무 종류가 뭐야?”
“척 보면 모르겠나. 소나무지. 주변에는 풀도 자라지 못하는 돌투성이인데도 그곳에 뿌리를 박고 저렇게나 크게 자라다니. 괜히 의지의 상징이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리고 중요한건 저 땅 아래에 송화주를 직접 담가서 묻어놓았다는 거지. 내년쯤이면 맛있게 익어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그때가 되면 다시 놀러오게나.”
하지만 그곳에는, 한때 소나무였다고 생각되는 나무 둥치만이 흉물스럽게 서 있을 뿐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이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만큼 말라비틀어지고 사라져 갔다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소나무가 살아있었을 때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 그런 얘기를 현실처럼 하는 그는 단지 안타까울 뿐이었다.
“그럼 내가 맛있는 안주를 해 올 테니 그때까지 살아나 있어.”
“벌써부터 늙은이 취급하는 건가. 그럼 매우 곤란해. 하하하.”
그런 그에게 아무도 진실을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은, 아마도 그 진실은 그의 남아있는 삶의 희망마저 꺼버릴 수 있기 때문일 거다. 때로 생각해본다. 거짓은 마치 소나무 분재를 강하게 옭아매고 있는 쇠 철사 같은 것이라고. 그것을 끊어내는 것은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그 나무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속박하고 있던 거짓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었지만, 지금 그에게는 거짓을 끊어 냈을 때, 거짓이 가지고 있던 지지력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생명과도 직결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만 변하지 않는 사실은, 그가 바라보고 있는 창밖으로는 엄청나게 짙은 모래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과, 그 사이로 서 있는 것은 그가 생각하는 소나무가 아니라 소나무의 잔해라는 것이겠지.
8.
이미 다시 서울로 돌아가기는 늦은 시각이고, 키티도 돌아갈 생각이 없었던 데다가, 수환 씨와 가비 씨가 모두 하룻밤 묵고 가라고 하시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밤늦은 시각이 되어도, 아니 되었기 때문인지 밖에서 부는 바람 소리가 흉악하게 크게 들리는 바람에 거실에 대충 자리를 펴고 누운 나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키티가 자신이 자고 있던 방에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안자고 뭐해요?”
날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는, 꼭 고양이 눈처럼 밤이 되니까 오히려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았다. 투명한 보랏빛. 이런 사람이 여태껏 가상자아폭탄을 만들어 왔다니, 난 아직도 실감이 가질 않는다.
“이 몸, 피곤하다는 건 알겠는데, 여태껏 잠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서 그런지 잠은 안 오는군. 너도 안자는 것 같기에 그냥 이야기나 할 까 해서 나왔는데, 졸려?”
“사실 나도 졸리진 않으니까요, 이쪽에 앉아요. 바람소리 참 크네요.”
난 이불 한쪽으로 비켜 앉아 그녀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다. 생각해 보니 어째 두근두근하다. 바람이 무척 세게 부는 밤에, 통나무집에서, 늦은 시간까지 잠 못 든 남녀가,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한다. 꼭 무슨 순정만화에나 나올 법한 수학여행 같아서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왜 웃어?”
“아, 그냥 우스운 생각이 들어서요.”
그리고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사실 키티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줄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너무나 복잡해서, 어떤 말을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오늘 하루 동안에 몇 가지의 일이나 일어난 걸까. 아침부터 소란에, 키티를 직접 실제로 만나고, 같이 여행하고, 전설적 인물 이수환씨를 만나고, 그리고 내 아버지를 알게 되고... 하루 동안에 겪기에는 너무 스케일이 방대했기에 실감도 나질 않는다.
“내가 왜 이수환을 찾아왔는지는 묻지 않나?”
“맞다. 하필 왜 처음 몸을 가지게 되었으면서 수환 씨를 찾아오게 된 거에요?”
“그냥.”
휘이이잉.
바람이 한번 거창하게 창밖을 휩쓸고 지나갔다.
“정말로 그냥 보고 싶었다. 굳이 이유라고 할 거창한 것도 없었고, 네 아버지 같았던 다람이 정지하고 나서부터 무척 보고 싶었던 사람이었으니까.”
“에... 그것만으로 이런 식으로 나오기까지 했단 말이에요? 상당히 위험하지 않은가요 그거. 실제로 가상자아폭탄의 실패도 상당했으니까... 뭔가 본격적인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갑자기 그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순간 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낮에 생기가 가득했던 그 눈동자는, 지금은 언젠가 봤었던 시체의 눈동자처럼 공허했다. 분명히 방향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은 어느 곳도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나와 그녀 사이의 어딘가, 혹은 나와 벽 사이의 어딘가, 그것도 아니라면 현실과 비현실 사이의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는 듯 한 눈빛.
협상가로 꽤 오랫동안 활동했고, 이전부터 심리학을 배워 와서 어지간한 감정을 읽는데 익숙한 나로써도 이 눈을 읽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뿌리 깊은 어두움, 그리고 텅 빈 느낌. 언제나 정보가 흘러들어오는 그녀는 상식적으로 소설에나 나올 법한 현자처럼 깊고 진지한 눈을 하고 있어야 어울릴 듯한데, 이런 눈빛이라니.
“내 정체성을 찾아줬거든. 이수환은.”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의 나, 그러니까 이수환과 다람이 알게 되기 전까지는 사실 지성체라고 할 수도 없는 정도였어. 단지 커다란 정보의 흐름에 지나지 않았지. 그랬기 때문에 난 ‘나’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고, 그 전까지 만들어 보냈던 가상자아폭탄은 나도 인간에 가까운 존재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호기심에서 시작된 거였어. 폭탄? 폭탄은 순전히 내 치기였지. 똑같은 존재 따위는 만들고 싶지 않다는, 그런 생각에서.”
들은 적이 있다. 폭탄은 진화를 거듭해 왔다고. 지금이야 인간과 별 차이조차 없지만 초기에는 서서히 진화를 하는 수준의 폭탄들이었다고.
“지금 안에서 자고 있는 가비는 내가 내 모습을 상상하면서 만든, 첫 성공작이다. 이상하게 가비 이후로는 또다시 실패의 연속이었어. 그러다 서서히 자리가 잡힌 것이 다람 부근이었지. 그런데 다람은 달랐어. 분명히 내가 만들었는데도 그것, 아니 그 사람은 나보다 더 깊이를 가졌었어. 이미 자신이 폭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막 살지 않고 얼마 안 되는 동안이나마 사람들과 인연을 맺고, 공부도 하고, 이해도 했지. 그리고 그 맺게 된 인연의 산물이 지금 살아있는 너잖아.”
“그... 그런가요.”
“어쨌든 이때 이수환이 ‘나’라는걸 결정해줬어. 아니, 꼭 이수환만이 한 일은 아닐 꺼야. 다람도 나를 이해하고 있었거든. 지금도 물론 마찬가지지만, 난 그냥 장난을 치고 싶은 어린아이일 뿐이야. 아이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모르기 때문에 천진난만하게 웃으면서 잠자리를 토막 내고는 하잖아. 그렇다고 그 아이들이 잔인하다고, 못됐다고 혼내고 심하게 벌주는 어른들은 없어. 뭔지 모르기 때문이지. 단지 아이들은 그게 재미있기 때문에 하는 것뿐이니까 선악을 판단할 수 없는 문제야. 그렇지? 그런데 나에게 있어... 그 장난의 대상은 인간이었어. 인간은 인간을 공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냉혹해. 그것이 자연의 섭리일지라도 악이라고 몰아붙이곤 하지. 그렇기 때문에 난 악일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이수환씨와 아버지...가 일종의 정체성을 찾아주신 거라는 말이죠?”
“그래. 그런데 이해할 수 있겠어? 단지 ‘아기’와 같은 정체성을 얻었을 뿐이야. 한 개체로서의 무언가가 아니라, 미숙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되었을 뿐이잖아. 이상하게 그게 날 깨웠어. 뭐랄까. 난 잘 모르지만 가려운 부분을 정확하게 긁어준 것 같은 기분이었을 거야. 그제야 나라는 존재가 일정 영역 만들어졌어. 더 이상 정보의 흐름이 아닌, 어떤 영역을 가지고 그 안은 개별된 영역으로 만들기 시작한 거였고, 지금의 내가 된 거지.”
그제야 그녀의 눈이 생기를 되찾았다. 장난꾸러기의 눈빛, 그것을 만든 것이 이수환씨와 아버지란다.
아련한 일이다. 난 사실 아버지와 있었다는 그 잠시가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그가 나에게 관심을 쏟았다는 그 기간의 난, 전해 듣기로 일종의 자폐증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후로 입양이 되고, 다시 고아원으로 돌아오고, 이런 과정을 거치며 내가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기억이라고는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부터의 기억뿐이다.
그래도 흔적이라는 것은 남아있어서, 그는 적어도 셋, 두 인간과 한 가상자아를 변화시켰다. 지금 난 그 변화의 중심에 서 있음을 느낀다. 그런 내 표정이 알 수 없었는지 키티가 말을 걸었다.
“오늘 있었던 일이 많이 혼란스럽니?”
“글쎄요... 예. 일단은 제가 생각하는 범위의 사건들을 훌쩍 넘어섰어요. 아버지를 알게 된 것도 그렇고, 수환 씨를 만난 거나, 키티 당신을 만난 것이나, 모두 지금 나에게는 놀라운 일인 것 같아요.”
키티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피곤하겠구나. 어서 들어가서 자. 아마 내일은 더 놀랄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푹 자둬야지.”
그 말을 듣자마자 최면에라도 걸린 것처럼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기절하듯 잠에 빠져들며 마지막으로 본 키티는 모래바람 부는 창밖을 보라색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아까 본 큰 소나무 둥치가 보이는 듯이.
9.
“최수헌! 일어나!”
아련하게 들리는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떠보니 사방이 번쩍번쩍했다. 콰쾅! 수초에 한 번씩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에 이 집이 들썩거릴 정도였으니 꽤 심각한 상황임에는 틀림없었다. 난 이런 상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단 말이야? 나도 엄청 신경이 굵은 놈이었군.
“후. 생각보다 너무 빨리 와버렸는걸. 폭풍이다. 그것도 아주 심한 모래폭풍이야. 이대로 있다가는 이 집채로 모래에 묻혀버리거나, 어쨌든 오래 버티지는 못 할 거야.”
“그... 그러면 어서 빨리 빠져나가야죠. 수환 씨랑 가비 씨는 모두 어디에 있어요? 네? 얼른 도망쳐야죠.”
키티는 한심스럽다는 눈으로 날 쳐다보며 말했다.
“이 모래폭풍을 뚫고 어딜 나가겠다는 겁니까 수헌씨. 이미 차는 어디 있는지 알 수조차 없는걸요. 차가 있다고 해도 거기까지 걸어 나가다간 벼락 맞아 죽거나 모래 잔뜩 먹고 질식해 죽을걸. 그리고 그렇게 호들갑 떨지 마. 이수환이랑 가비좀 본받아.”
그제야 난 수환 씨의 방을 보게 되었다. 수환 씨는 예의 그 흔들의자에 파묻혀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비씨 역시 수환 씨의 옆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그들이 가진 안정된 평화로움이 그 방을 가득 메우고 있어서, 점점 바람소리와 천둥소리는 심해지고 있고, 그들이 보고 있는 창밖에는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모래폭풍이 일고 있었는데도 전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 수헌군 일어나셨군. 오늘 유난히 바람이 심한 날이야. 나무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나? 이곳은 보통은 날씨가 좋기 때문에 이런 소리를 듣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잘 들어봐. 나무들이 부르는 소리가 날거다. 비가 와서 좋다고, 나와서 맞으라고 하는 소리가.”
“그... 그게...”
물론 그가 바라보고 있는 곳은 과거의 숲일 것이고, 그들의 방 안 분위기 역시 단지 비오는 숲을 구경하는 것처럼 평화롭긴 했다. 하지만 실제적인 위협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그 증거로 바람이 점점 강하게 불어 유리창은 지금이라도 떨어져 나갈 것처럼 덜컹거리고 있었고, 모래는 시시각각 높이 쌓여가고 있었다. 모래바람이 부는 한 가운데에 돌출되어 있는 이 집은 모래가 쌓이기에 좋은 위치였다.
도망쳐 나갈 수도, 그렇다고 계속 이 안에서 죽음을 기다릴 수도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이었다. 뭔가를 해보기에는 자연재앙의 위력은 굉장히 거대했다. 기껏해야 안전한 건물 안에서 폭풍우가 몰아치는 것을 구경해본것이 전부인 나에게 있어서는 이 상황은 오히려 절박했기에 비현실적이었다. 그 비현실감에는 방안에 가득한 묘한 평화가 한몫하고 있었다. 마치 정말로 저 밖의 바람이 봄날을 맞이하는 산뜻한 바람인 것처럼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넋을 놓고 있던 사이에 키티는 어느새 나갈 준비를 모두 마친 모양새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이런데 어딜 나가려고요!”
그녀는 내 말에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미소였다. 기쁨도, 슬픔도 찾아볼 수 없는 그저 편안한 미소. 굳이 감정을 억지로 찾아 붙일 수 있다면 그건 안도감이었다.
“최수헌. 참 좋은 사람이구나. 아직 세상물정을 좀 모르는걸 빼고는 말이야.”
그녀는 앞쪽의 수환 씨와 가비 씨를 바라보았다.
“이수환. 드디어 빚을 갚을 때가 왔다. 아니, 보답을 할 때가 왔다고 하는 게 맞는 거겠지.”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어딘가 먼 곳으로 가려는 사람처럼 의자에 앉아있는 수환 씨를 뒤에서 살짝 포옹하고, 그의 눈을 어루만졌다. 따스한 빛이 그녀의 손에서 흘러나와 그의 눈을 감쌌다.
“아... 아...”
“지금 보고 있는 건 사실이 아니야. 다만 잠시 네 눈이 적응을 못하게 된 것 뿐이니까. 걱정은 하지 말아.”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다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으리라.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참상은 어떤 느낌일까. 소나무를 지지하던 철사가, 아무런 지지대도 존재하지 않은 채로 잘려나간 것과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키티는 그런 것은 고려하지 않는 듯, 가비 씨와도 포옹을 나눈 다음, 내게로 걸어와 내 앞에 섰다.
“...!”
그녀다운, 지극히 그녀다운 장난스런 입맞춤이었다. 약간 촉촉하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던 그녀의 작은 입술은 다가왔고, 짧게 머물렀으며, 떠나갔다. 맑은 여운을 남기고 떠나간 그 입술은 작은 소리로 작별을 고했다.
“고마워, 그리고 좋아하게 된 걸지도.”
온몸이 굳어버린 난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는 없었다.
10.
키티는 모래바람속을 아무렇지도 않게 뚫고 들어가 점점 그 커다란 나무둥치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둥치 앞에 도착한 그녀는 둥치 앞에 앉아 나무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제 분재를 변화시켰듯 서서히 그녀의 온몸을 나무에 동화시키기 시작했다.
찬란한 녹색이 그녀와 나무를 휘어감은 후, 서서히 나무는 말 그대로 싹을 틔웠다. 천천히, 그러나 눈에 띄일 만큼 확실하게 나무는 다시 예전의 싱그럽던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뿌리가 생기를 되찾아 땅속 깊이 자리를 잡았다. 말라버렸던 줄기는 생기를 빨아올려 다시 건강한 습기를 머금었다. 점점 자라나 원래 예상했던 만큼 커진 소나무는 눈부시도록 맑은 녹색 잎을 틔워내기 시작했다. 정말로 나무였다. 도시에서 자유를 속박당한 나무가 아닌, 진정한 야생의 나무였다.
그리고 그 기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키티가 동화된 소나무가 점점 커지는 동안, 키티의 몸에서 뻗어 나온 전선 같은 것과 소나무의 뿌리가 뒤엉켜 주변에서도 여러 가지 종류의 나무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사이보그일까, 식물과 기계가 반쯤 융합된 듯한 식물들이 점점 그 세를 넓혀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야자나무가 자라났으며, 벚나무는 금속광택의 벚꽃을 피워냈다. 새하얀 동백이 피어났으며, 다이오드와 흡사해 보이는 이끼들이 반짝거리며 뿌리를 덮어갔다. 은행나무, 후박나무, 단풍나무처럼 내가 알아볼 수 있는 나무뿐만 아니라 마치 세계의 식물 전시장처럼 종류와 지역을 가리지 않는 나무들이 동심원을 그리듯 그 넓이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사이 어느새 모래바람이 그쳤다. 수환 씨의 집은 그 수림의 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제는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그 숲은 지금도 계속 넓어지고 있을 것이고, 미리 만들어진 숲은 정말로 밀림처럼 새로운 생태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온갖 나무가 꽃을 피우고, 그 꽃은 열매를 맺었으며, 그 열매를 먹는 새가 생겨났고, 그 새를 잡아먹는 뱀이, 그 뱀을 잡아먹는 여우가, 여우를 잡아먹는 사자가 생겨났으며 사자가 죽으면 사자를 분해하는 곤충들이 생겨났다. 무척이나 무질서해 보이는 숲이었지만, 그곳은 인류에게 있어 잃어버린 낙원과 다름없었다. 아니, 이곳은 키티가 수환 씨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이었을 것이다. 온갖 정보와 생명이 모이는 곳, 태고의 신비와 미래의 기술이 공존하는 숲. 키티의 숲.
탄생이었다. 그곳에는 진화론과 창조론이 동시에 존재했다. 흙에서는 동물이 생겨났고, 그 동물은 숲에 법칙에 맞추어 스스로의 몸을 변화시켜 나갔다. 동물들 역시 기계와 같은 부분을 지닌 채 만들어졌다. 그리고 모든 숲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생각되었을 즈음, 드디어 눈 시리게 맑은 하늘이 보였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문을 열었을 때 쏟아져 내린 공기는 서울에서 탁한 공기로 숨 쉬고 살아오던 나에게는 너무나 맑아서 무심코 숨을 깊이 들이쉰 나는 깊은 기침을 뱉어냈다. 그리고 새소리, 작은 물소리, 바람소리 같은, 도시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꿈만 같은 일이었다.
키티가 처음 만들어낸 소나무는 정말로 숲의 왕인 것처럼 숲의 한 가운데, 가장 높게 치솟아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그 아래 상대적으로 한결 작아져보이는 키티가 나무에 기댄 채 하늘을 보고 있었다. 엄청난 일을 해낸 것 치고는 퍽 여유로운 표정으로, 하지만 분명히 지쳐 보이는 표정으로 그녀는 그 자리에 있었다.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씩 웃더니 옆에 있던 단지를 앞으로 내놓았다.
“송화주야. 아주 맛있게 익은 거 같은데 한잔 하자.”
안에 있던 수환 씨와 가비씨도 모두 나와 정말로 맛있게 익은 송화주를 한잔씩 하고, 여기저기 널려있던 송이버섯을 구워 그 자리에서 호화스런 안주를 만들고, 새와 바람이 만드는 즉흥곡을 들으며 이것이 정말로 행복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다람은 맥주를 참 좋아했지. 그가 맥주를 좋아한 이유는 맥주가 낭비가 없고 효용적이라는 우스운 것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맥주가 아니었어도 좋았던 것 같구나. 좋은 사람이 정말로 취할 수 있는 대상이지, 술은 그것을 이어줄 수 있는 매개체 밖에는 되지 않는 거야.”
송화주는 오래된 녹색을 띄고 있었다. 그 녹색을 보니 정의맥씨의 분재 소나무가 생각이 났다. 그 소나무를 통해 지금 살아난 이 숲과, 키티가 생각났다. 모든 것이 2일 만에 일어난, 그러면서도 아주 오래된 이야기였다.
“자. 최수헌, 이제는 돌아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야만 했다. 이제 더 이상 가상자아폭탄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므로 나는 굳이 말하자면 일종의 실업자가 된 셈이다. 그래도 돌아가야만 했다. 이 숲은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 나는 이곳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니까.
“돌아가는 길은 저쪽이야. 자동차는 너에게 줄게, 이제는 돌아가.”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수환 씨와 가비 씨는 가볍게 목례를 해주었고, 여전히 일어나지 않는 키티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보고싶을거에요. 그리고 나도... 당신이 좋아요. 이제는 볼 수 없을 테지만.”
그리고 난 그녀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당신과는 만날 수 없게 될 테니까 입술은 아껴둘래요. 아마... 이 숲에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겠죠? 고마워요. 이런 축복을 경험하게 해 줘서. 영원히 잊지 않을게요. 영원히.”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돌아서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향해 한발, 한발 천천히 떼어놓았다. 내가 걸어가는 곳으로는 스스로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키티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 앞에 우리가 타고 왔던 자동차가 보인다. 모래바람에 시달렸을 텐데도 키티가 손을 본 것인지 멀쩡해 보였다. 이제 저 자동차도 내 것이 되는구나. 자동차세가 많이 나오겠는걸, 같은 생각을 하며 나는 피식 웃어버렸다.
“최수헌!”
키티가 날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키티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아련한 인사 속에서 그녀의 눈동자는 소나무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에필로그
“좋아!”
14번째의 협상을 멋지게 끝마친 나는 한숨을 쉬며 땀을 닦았다. 이번 협상은 유난히 상대방에서 내건 협상 조건이 까다로웠기 때문에 여러모로 골치를 썩였지만, 그래도 결국은 우리 쪽의 이익으로 끝마칠 수 있었다. 우리의 해외 진출을 돕는다는 조건으로 내어 준 것은 현재 이 회사의 주력 상품인 ‘탐지기’의 핵심기술이었다. 이 회사는 현재 다른 상품 군으로 이전을 거의 마친 상태이기 때문에 적당한 교환 조건이었던 것이다.
키티가 숲을 만든지도 약 2년이 지났다. 숲은 점점 그 예전의 빛깔을 되찾아, 주변의 죽어가던 다른 숲까지도 모두 살려냈다. 그 현상은 얼마간 엄청난 이슈가 되었다. 더군다나 그 숲이 키티가 만들어낸 숲이라는 것 (키티는 그 와중에도 장난을 쳐서 전 세계 언론사를 마비시키고 그 사실을 알렸던 것 같다.) 모든 사람을 거부하는 숲이라는 점 (그 숲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보통 지구 반대편의 알 수 없는 도시에 내던져지거나, 악의를 가지고 들어갔던 사람들은 심하면 행방불명이 되어버리고는 했다.)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 몇 번이고 사람들은 조사단을 파견했지만 어느 누구도 숲의 초입에서 10미터 이상 접근하지 못했다.
키티는 더 이상 가상자아폭탄을 보내지 않았고, 때문에 가상자아폭탄 분담과는 숲이 생기고 2주일 만에 해체되어버리고 말았다. 정의맥씨는 그 참에 분재 전문가로 나서서 지금은 꽤 큰 강좌를 열만큼 뛰어난 전문가가 되었다고 한다. 우습게도 그가 만들어낸 구호는 ‘나무의 본능에 충실해’라고 한다. 그 외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신의 적성에 맞는 다른 직업을 찾아 지금은 꽤 중요한 자리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나 역시 협상가로서의 자질을 살려 프리랜서 협상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중이다.
오늘의 성과를 축하하기 위한 피로연을 여러 가지 이유를 대고 빠져나왔다. 키티가 처음 찾아왔던 그날처럼, 거리는 온통 성탄절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즐거움으로 넘쳐났다. 그동안 너무 많이 바빠서 계절이 지나가는 것조차 제대로 느끼지 못한 나는 언제나 겨울 속에 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근처의 카페로 들어가 커피 한잔을 마시며 인터넷을 했다. 메일함에는 온갖 광고메일과 스팸메일이 가득했기에 나는 대충 훑어보며 모조리 삭제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하나의 메일이 내 온 신경을 잡아끌었다. 제목 없음 - 보낸 이 kitty, 물론 키티라는 닉네임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누구나 다 사용한다지만 왠지 특별한 느낌이 드는 메일이었다. 나는 두근거리며 메일을 클릭했다.
“꺄하하하하하~”
갑자기 카페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카페 안의 모든 모니터에 작은 키티의 얼굴이 다닥다닥 나타나 모니터를 순식간에 메워버렸다. 그리고 내 모니터에만 어떤 글이 씌어지기 시작했다.
- 일상에 지친 당신을 키티의 숲으로 초대합니다.
나는 당장에 뛰쳐나와 자동차로 달려갔다. 급히 자동차문을 열고 타려는 순간 무언가 보드라운 것이 내 입술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기분 좋은 느낌에 하늘을 보니 새하얀 눈송이들이 하나 둘씩 춤추듯 내려오고 있었다.
“하하하!”
난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크게 웃어버렸다. 정말로, 정말로 온몸이 울릴 만큼 크게 웃어버렸다.
오랫만의 소설입니다.
으으.. 차라리 보지 마셔요 orz
제대로된 후기는 내일 올리겠습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말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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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감회가 새롭네요. (웃음)
약하다. 아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