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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려병자로 숨진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
문갑식 사회부기자 당시 중국민항기 김해공항 추락-삼풍백화점 참사-씨랜드 화재-대구지하철화재 등 대형사건의 현장을 누볐다. 이라크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을 취재했으며 동일본 대지진때 한국기자로선 처음 현장에서 들어가기도 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문갑식의 세상읽기’ ‘문갑식이 간다’같은 고정코너를 맡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 미타(三田)캠퍼스 초빙교수, 미국 하와이대학 마노아 캠퍼스 미래학과정(삼성언론재단)에 이어 영국 옥스포드대학 울프슨칼리지 방문교수로 연수중이다. 공교롭게도 섬나라에서만 수학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지난 17일 김건(金建) 전 한국은행 총재가 별세했습니다. 향년 86세. 짧은 부음(訃音)의 뒷부분이 이다….” 역사의 시계추를 67년전으로 되돌려 봅니다.
1948년 12월10일 밤 8시30분, 신원미상의 여성이 서울의 한 병원에서 홀로 사망했습니다. 지금의 이태원이 아닌 옛 용산구청 근처의 자제원(慈濟院)이었습니다. 그 초라한 행려병자는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 나혜석이었습니다. 나혜석은 김우영과 결혼해 3남1녀를 낳았습니다. 김우영은 얼마전 사망한 김건 전 한국은행 총재의 아버지로, 나혜석과의 사이에 맏딸 김나열을 비롯해 김선(12살 때 병사)-김진(전 서울법대교수)-김건(한은 총재) 등 3남1녀를 낳습니다.
나혜석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앞서 경기도 수원을 다녀왔습니다. 나혜석은 그곳이 고향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팔달구 수원행궁(行宮) 화령전(華寧殿) 앞 신풍초등학교 후문 근처로, 집터에 기념비가 서 있었습니다. 나혜석의 선친 나기정은 용인군수를 지냈습니다. 고관 출신 답게 집터가 왕궁 바로 옆의 좋은 위치였으며 부근의 동네 도서관에서는 마침 ‘나, 나혜석’이라는 전시를 하고 있었습니다. 수원에는 이밖에도 나혜석과 관련된 장소가 여럿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나혜석 거리’지요. 길이가 약 400m쯤 되는 거리에는 나혜석 좌상(坐像)과 입상(立像)이 있고 그의 연보를 새긴 돌 조각이 놓여 있습니다. 주변은 온통 먹자골목이어서 대체 왜 이곳을 ‘나혜석 거리’로 정했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어렸을 적부터 총명했다고 합니다. 학창시절부터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진명여고보를 졸업한 뒤 조선인으론 처음 동경여자미술학교로 유학갔는데 서양화를 택한건 오빠 나경석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운명의 장난인지 이때부터 나혜석은 불같은 사랑을 합니다. 첫 상대가 오빠의 친구 최승구였습니다. 최승구는 1916년 폐결핵으로 고향 전남 고흥에서 요절했습니다. 나혜석이 문병 다녀간 다음날이었다지요. 둘의 사랑은 비극적이었습니다. 최승구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숙부 밑에서 자랐으며 집안에서 맺어준 본처가 있었지요. 최승구는 동경유학생 중에도 ‘천재’로 불리며 잡지 ‘학지광(學之光)’ 편집에 간여했지만 나경석은 그의 불우한 환경을 꺼려 교제를 반대했다고 합니다. 당시 동경에서 약혼까지했던 최승구의 사망 소식을 뒤늦게 접한 나혜석은 한동안 신경쇠약증세를 앓기도 했습니다. 소설가 염상섭은 훗날 “나혜석이 겪은 비운(悲運)이 다 최승구와의 슬픈 사랑 때문에 비롯됐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두번째 상대 김우영(金雨英·1886~1958)은 부산 출신으로 교토(京都)제대 법학부를 졸업했습니다. 그 역시 1916년 첫 부인과 사별(死別)했다고 합니다. 그가 나혜석을 만난 것은 1917년입니다. 나중에 김우영은 일본 외무성 관리가 됩니다. 김우영이 조선 땅으로 돌아온 것은 1918년인데 처음에는 반일(反日) 변호사처럼 3·1운동으로 투옥된 독립운동가들의 변론을 맡았습니다. 3·1운동에 참가한 혐의로 붙잡혀간 연인 나혜석을 변호하기 위해 달려올 정도였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자치론(自治論)에 경도(傾倒)됩니다. 자치론이란 일본의 식민지이되 자치권을 가지면 만족한다는 일종의 타협 노선인데 그와 비슷한 논리를 편 이들이 설산 장덕수와 훗날 연적(戀敵)이 되는 최린입니다. <中편에계속>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 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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