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특집
봄의 환
황인찬
돌나물을 뜯다 보면
돌의 근처를 맴도는 것이 있다
희끗하고 푸른 것이
돌나물도 아닌 것이
까득거리다 키득거린다
그걸 그냥 둔다
……애들은 신이 나서
돌 근처에서 부산스럽다
돌나물을 뜯느라 봄을 다 보냈다
그리고 휑하고 훤한 돌이 있다
그걸 주머니에 넣었다
그날은 집에 가지 않았다
사랑 이야기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내 엄마였어
모르는 고양이가 옆에서 자고 있었고
이런 기분은 이미 잘 알고 있지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고
함께 산책도 하고 여행도 했다
사진도 몇 장 찍었고
야외 테이블에 앉아 음료를 기다리며
너무 좋다 그치 우리 또 오자
그렇게 말했는데
엄마는 울면서 말했어
내 아들을 언제 돌려주냐고 너무 무섭다고
(『창작과비평』 2023년 겨울호)
다시 태어난다 말할까
먼 옛날, 아이가 없는 노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서로를 아끼며 선량하게 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를 하러 간 할아버지가 우연히 발견한 샘물에서 목을 축였는데, 그러자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이에 놀란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샘터로 데려가 샘물을 마시게 했고, 둘은 모두 젊은이가 되었다. 그 소문을 들은 옆집에 살던 욕심 많은 노인 또한 샘물에 찾아갔는데, 그는 욕심을 부려 아기가 되고 말았다. 젊어진 부부는 욕심 많은 노인이 보이지 않아 걱정되는 마음에 샘터를 찾아갔고, 거기서 혼자 울고 있는 아기를 발견하였다. 부부는 이를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여겨 그 아이를 키우기로 하였다.
*
위의 이야기는 옛날이야기 「젊어지는 샘물」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정리해 본 것이다. 「젊어지는 샘물」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아무튼 이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옛날이야기 가운데 하나다. 젊음을 되찾는 이야기라는 점도 좋고, 욕심 많은 노인이 아기가 되어버리는 결말도 ‘샘물을 마시면 젊어진다’라는 이야기의 핵심 논리를 그대로 따른 것이라 명쾌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내가 이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저것이 악인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전래 동화를 비롯한 전통적 서사의 특징으로 권선징악을 꼽지 않던가. 「흥부전」에서 욕심 많은 놀부는 재산을 잃고, 「혹부리 영감」 이야기에서도 욕심 많은 노인은 혹을 잔뜩 달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인생은 일종의 파국을 맞이하고야 마는 것이다. 오래된 이야기들은 주로 당대의 도덕을 반영하는 일종의 우화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고, 그 도덕률을 어기는 자는 파국을 맞이하리라는 경고를 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젊어지는 샘물」에서 욕심 많은 노인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욕심 많은 노인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살 기회가 주어진다. 그것도 선량한 부모의 밑에서 자라는 기회가 말이다. 그렇다면 이번의 새로운 인생에서는 욕심 많은 노인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 그것이 내가 이 이야기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까닭이다. 새로운 기회를 준다는 것,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대부분의 옛이야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상상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한동안 웹소설에서 유행하던 ‘회빙환’(웹소설에서 유행하던 이야기 소재인 회귀, 빙의, 환생을 묶어 이르는 말)의 감각에 더 가깝지 않을까.
‘이번 생은 틀렸어’라는 말이 한동안 유행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두 번째 기회에 대한 상상이 쉽지가 않다. 다른 세계에서 더 좋은 조건을 갖고 다른 인물로 태어나는 ‘회빙환’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이번 생은 글렀고, 다음 생을 기약하자는 마음, 그 절망과 조소가 나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깊게 새겨져 있다는 사실 말이다.
내가 「젊어지는 샘물」 이야기를 흥미롭게 느낀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새로운 인생과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는 이야기, 그것도 악인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는 그런 이야기가 내 마음을 끈 것이겠지. 무엇보다 이 이야기가 품고 있는 이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이 마음에 든다. ‘이번 생은 틀렸어.’ 운운하는 이야기가 우리 자신에 대한 실망과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젊어지는 샘물」 쪽에는 그러한 절망의 기미가 없지 않은가. 반성할 마음조차 없던 이에게도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주는 이 자비로움은 뭐랄까, 21세기에는 좀처럼 떠올리기 어려운 발상이라는 느낌이다.
이런 생각이 들기는 한다. 이번에도 잘못했네요.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신다면 더 잘해보겠습니다.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매일을 보내고 있지만, 과연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하는 불안이 뒤통수 어딘가에서 슬그머니 올라오는 것이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어쩌고 하는 인터넷 밈이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또한 사람에 대한 신뢰성 높은 통찰이다. 사람이란 정말 쉽게 바뀌지 않는다. 내가 난데 어쩌란 말입니까, 이런 것이 사람이란 말이다. 과연 아기가 된 욕심 많은 노인(뭐 이런 말이 다 있음)이 심성 고운 부부의 아래에서 자란다면 정말 착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을까? 그에 대해서는 그 어떤 확답도 내릴 수 없겠지. ‘회빙환’의 주인공이 아닌 이상 그러한 경험이 가능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어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게 무엇이 중요한가 하는 생각이다. 설령 회심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욕심 많은 노인으로 다시 늙어버린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과정을 다시 한번 시도해 본다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그 모든 실수와 실패를 그대로 반복한다고 하더라도, 중요한 것은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다는 그 자체라는 생각이다. 단 한 번의 실패로 몰락하지 않고, 우리 삶의 비가역성에 절망하지 않고, 한 번 더 해 보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구원이리라.
때로 이런 질문을 받기도 한다. 다시 태어나도 시인을 하실 건가요? 그러면 언제나 농담을 섞어 이런 대답을 한다. 아뇨, 한 번 해봤으니 다른 것을 해 보고 싶어요.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나는 아마 시를 쓰겠지. 시 쓰기에 매번 절망하고 실망하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도 또 쓰고야 말겠지. 기꺼이, 라고까지는 할 수 없겠지만, 어쩔 수 없고 피할 도리가 없어서 똑같은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그것은 참 끔찍한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눈물 나게 고마운 일이 될 것이다. 이 말에도 약간의 농담이 섞여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