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에 대한 예화 모음 희생(요3:16) 호주에서는 양을 많이 기른다고 한다. 한 번은 양떼를 지키는 목자가 언덕위에서 내려다보니 독수리 한마리가 손살 같이 내려와 양 새끼를 채가려다가 어미 양과 싸우다 그냥 날아가는 것을 보고 달려가 보았다. 어미양의 두 눈이 독수리에게 쪼여서 눈이 먼 채로 피를 흘리며 서 있는데 새끼양은 어미의 네 발 사이에 들어가 있어 안전했다고 한다. 어미는 도망가면 살 수 있었으나 자신이 도망가면 새끼양이 독수리의 밥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도망가지 않고 자기 새끼를 지키기 위해 두 눈을 잃고 만 것이다. 이와 같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며 죽으시므로 우리가 살게 된 것이다. 피 묻은 십자가의 사건 헬라의 어느 왕국에 아주 행복스런 공주가 있었는데 그 공주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강대한 적국의 왕이 그 공주가 첫눈에 반할만한 미남이고 검을 잘 쓰는 스파이를 잠입시켰는데, 그 스파이는 공주의 경호원으로 채용되었습니다. 스파이는 공주를 항상 유혹했습니다. 공주의 결혼이 결정되자 결혼하기 전날 밤에 그 스파이는 공주에게 자기 아이를 심었습니다. 공주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지만 그 아이는 원수의 자식이었고, 결국 그 왕국은 원수의 자식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인간에게 생긴 것입니다. 인류 가운데 최대의 인물은 아담과 예수님입니다. 이를 제1아담과 제2아담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아담과 예수님은 생물학적인 대표와 법적인 대표로서 인류 전체의운명이 이 두 인물에 의해서 결정되었기 때문입니다. 제1아담을 통해서 죄와 사망이 들어왔는데 이것은 사단의 승리로 사단의 왕국이 건설된 것입니다. 또한 제2아담인 예수님을 통해서 생명이 들어왔습니다. 이전의 왕국이 깨어지기 시작했고 생명의 성령이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사단의 지배권은 박살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전 인류는 이 두 개의 왕국, 두 개의 인력권에 소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서 한 사람, 한 범죄, 한 행동 등의 말을 13번이나 기록하고 있습니다. 범죄는 죄악과 죽음이 들어오는 단 한 사람의 단 일회적인 창구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사건은 단 한 사람의 생명과 성령이 전 인류에게 들어올 수 있게 한 일회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역사적으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이루어진 시공사건입니다. 또 이것은 역사적 현실이고 인간의 도덕적 현실인 것입니다. 종교의 현실인 것입니다. 이 현실은 하나의 전설이나 신화의 기초위에 엮어져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은 피 묻은 절대적인 사건입니다. 역사적 사건입니다. 그 사건 때문에 우리의 죄가 대속함을 받았습니다. 죽음이 생명으로 바뀝니다.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로, 아담 족이 예수님 족으로, 사단 족이 하나님 족으로 바뀌어 집니다. 죽음의 권세에서 생명의 권세로, 생명의 지배로 옮겨집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이고 절대 사건인 것입니다. 이 두 사건에서 우리는 중성적이고 중립적 입장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크리스천이 아닌 사람은 전부 사단의 지배권에 다. 또한 잠재적인 무신론자입니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또 이 선물은 범죄 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에 이름이라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함이니라(롬 5:12-21)
피로 그린 자화상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용서와 의의 옷을 입은 새로운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 죄인 된 우리는 영적으로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그 러나 예수님의 보혈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아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서 있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요한계시록3:18)고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몸 찢기시고 피 흘려주심으로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무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의로운 두루마기를 받아 입었으나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죄를 짓지 않고 살 수 없기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두루 마기가 자주 더러워집니다. 따라서 매일같이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더러워진 두루마기를 빨아 입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권세를 얻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피로 그린 자화상은 벌거벗은 몸에 새 두루마기를 얻어 입은 모습이어야 합니다.
증거를 보인 사랑 주님께서는 인간을 죄지은 그대로 못난 그대로 빈손 든 그대로 초청하셔서 주님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를 짊어지심으로 사랑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끝없는 기대를 가지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다 고해서 당장 천사처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 에도 우리는 거듭해서 넘어져 죄를 회개하고 또 죄를 짓고 또 반역 하고 또 회개를 하고 돌아오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인간에 대한 끝없는 기대를 버리지 아니 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 성령을 통해 사랑의 손길로 우리들을 돌보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줄은 위대하고 강합니다. 그 사랑의 줄을 끊을 힘은 하늘에도 없고 땅에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씀만 하신 사랑이 아니라 실천으로 증명된 사랑입니다. 그 증명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만 바라본다면 영국의 유명한 설교가, 스펄젼 목사님에게 젊은 신학생 한 명이 찾아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도 낙망하신 일이 있습니까?”그러자 그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놀라운 답변을 했습니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은 낙망해 본 적이 없네. 나는 그동안 하나의 중요한 원리를 내 삶에 적용하고 있었지. 그 원리란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네. 나는 하루에 15분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간 일이 없네. 그때 이래로 나는 낙망을 모르고 살아왔어.” 크신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며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내 주위의 사람들이 어떠한 비판을 가하여도, 조롱하며 비웃어도 우리는 크게 외칠 수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늘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처럼 핍박과 반대와 조롱을 당하신 분이 어디 있습니까? 그분은 그러한 문제들을 끌어안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아버지께 기도하셨습니다. 그분이 가셔야만 했던 십자가 그 길을 향해서 뚜벅뚜벅 걸어가실 뿐 모든 비웃음과 고난을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그 래서 그분은 십자가상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다 이루었다.”
인류를 구원할 보혈 수년 전에 시카고에서 대종교회의가 열렸는데 그 곳에는 사실상 알려진 모든 종교의 대표자들이 참석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 토론 과정에서 보스톤의 죠셉 쿡(Joseph Cook) 박사가 갑자기 일어서서 말했다. "여러분, 제가 깊은 비애에 빠진 한 여인을 소개 하겠습니다. 그녀의 손에 생긴 핏자국을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질 않습니다.그래서 그녀는 실의에 빠져 좌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의 어떤 종교가 그녀의 죄를 씻고 평안을 찾아 주겠습니까?" 침묵만이 흐를 뿐 누구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쿡 박사는 하늘을 쳐다보며 외쳤다. "또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요한, 당신은 이 여인의 무서운 죄를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을 말해 줄 수 있나요?" 그 훌륭한 설교자는 마치 대답을 듣는 것처럼 잠시 기다리더니, 갑자기 외쳤다. "들어보시오. 요한이 말하고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자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오." 누구도 그 침묵을 깨지 않았고 동양의 종교와 서양 종교의 대표들은 벙어리가 된 채로 앉아 있었다. 인간의 욕구에는 희망의 메시지가 없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인류의 죄는 갈보리 십자가의 보혈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후 4:5).
의인이 됨 루터에 관한 전설이 하나 있다. 루터가 심한 병에 걸렸을 때 악마하나가 그의 병상으로 들어왔다. 그 악마는 루터를 자신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악마는 자신의 손에 긴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그 두루마리에는 루터 자신이 그동안 지어왔던 모든 죄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루터의 가슴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그때 갑자기 루터의 마음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서 그는 큰소리로 『네가 잊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신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악마는 그 말을 듣고 사라져버렸고 루터는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유월절의 피 유월절입니다. 애굽의 장자를 멸하실 때 이스라엘의 장자를 보호하시던 그 날입니다. 이스라엘의 장자가 죽지 않은 이유는 어린양을 장자를 대신해 죽여 그 피를 문지방에 발라 표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유월절입니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죽으셨습니다. 나를 멸망에서 구하시기 위해 그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 사람은 그냥 넘어가라고 죽음에게 주님의 피가 말씀하십니다. 바르소서. 바르소서. 나의 문지방에 주님의 피로 바르소서. 사망이 나를 그냥 넘어갈 수 있게 나의 문지방에 주님의 피 바르소서. 예수님은 유월절에 말씀하셨습니다. 내 피를 마시라. 주님의 피가 세상 모든 염려와 두려움에서 죄의 유혹과 사망의 외침에서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그냥 넘어가라고 그 피로 양을 먹을 집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출12:7) 유월절에는 어린양의 피가 있어야 하듯 누룩 없는 무교병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유월절에 예수님의 피와 우리 죄 없는 몸과 마음을 무교병으로 드려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는 쓴 나물이 있습니다. 고난과 잘 넘어지지 않는 아픔입니다. 우리에게는 항상 웃음보다 눈물이 더 많고 힘들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 유월절을 잘 지킵시다. 매년 돌아오는 유월절(명절)이 아니라 우리의 생의 유월절을 잘 지켜야 모든 수고가 끝나고 천국의 잔치에서 주님과 즐기는 그 멋진 날을 기대 하십니다.
예수의 피 길을 지나다 보면 약장수들이 웅담이라는 곰의 쓸개를 조금씩 잘라서 접시에 놓고 먹을 갈아다가 먹물에 넣어 돌리면 먹물이 흡수가 되어 말갛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시한 일이지만 신기하여 들여다봅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하고 사람의 죄를 없이 하는 묘약은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라는 작품 속에 맥베드가 왕을 죽이고 자기가 왕이 되었는데 아무리 손을 씻고 증거를 인멸해도 마음속의 살인죄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이 의사가 짐작을 하고 이 병은 자신이 고칠 병이 아니니 스스로 마음에서 고치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오! 아라비아 향수를 다 가지고도 이 손 하나 말끔히 할 수 없는가? 이것을 파내 버릴 망각 제는 세상에 없는 것일까?' 하고 탄식을 합니다. 셰익스피어는 맥베드의 입을 통해서 '죄를 씻을 것은 지구상에는 없다. 자기 마음으로도 안 되고 무엇으로도 안 된다.'고 표현합니다. 이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셰익스피어는 마음속으로 그리스도의 피를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하십니다. 양심의 가책이 예수님의 피로 사함을 받고 씻음을 받을 때 우리는 양심의 평안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틴 루터가 체험한 예수님의 피로 죄 사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한때 악마가 나타나서 루터의 죄목을 썼습니다. 두루마리에 써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피 묻은 손이 나타나서 그것을 지웠습니다. 루터는 잉크병을 던지면서 '예수의 피, 예수의 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 찌라도 양털같이 되리라(사 1:18)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어떤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인가 1. 세상의 십자가를 지고 따름 - (마10: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2. 가정의 십자가를 지고 따름 - (마10:35-36)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그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름 - (마10:37-39)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약속의 십자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저주의 옛 질서에서 벗어나 은총의 새 질서로 진입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 을 믿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옛 질서를 철폐시키셨습니다. 이러므로 십자가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용서를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던 담을 허물어뜨리시고 화평과 기쁨의 자원을 마련하셨습니다. 또한 인간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심으로 치료의 자원도 마련하셨으며 친히 죽으셨다 부활하심으로 천국 영생의 자원을 마련하셨습니다. 이러므로 성도는 새 질서, 하늘나라의 세계를 바라보며 가치 있고 복된 생활을 합니다. 십자가는 바로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한 삶의 터전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은총은 영원한 은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인간의 약속은 위배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영영히 변치 않습니다. 성도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저 하늘이 무너지고 이 땅이 꺼져도, 눈에는 아무 증거 안보이고 손에는 잡히는 것 없고 앞길이 칠흑처럼 어두워도 이 약속이 십자가에 있다는 것을 믿고 힘차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새 질서에 들어온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지 감각으로 살지 않습니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갖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물질과 명예와 권력을 삶의 자원으로 삼고 전전긍긍하지만 새 질서에 들어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십자가 대속의 은총을 삶의 자원으로 삼고 찬송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