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우 교수 “허균은 경고했다, 백성이 호랑이보다 무섭다고”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 허균·서경덕 평전 동시 출간
유석재 기자
입력 2022.03.17 03:00
“조선왕조 500년은 전기(前期)와 후기(後期)로만 이뤄진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에 이르는 중기(中期)에 주목할 필요가 있죠. 중년에 접어든 왕조의 대들보가 무너지려 하고 사회의 변혁을 꿈꾸는 사람들이 출현한 시기였습니다.”
만 84세인 역사학계의 원로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가 연구서 두 권을 동시에 냈다. ‘서경덕과 화담학파’(지식산업사)와 ‘허균 평전’(민속원)이다. 출판사에 원고를 넘긴 ‘유희경과 침류대학사’까지 조선 중기의 인물 평전 세 권을 잇달아 썼다. 세 책의 키워드는 화담 서경덕(1489~1546)의 학맥이라는 것이다.
‘허균 평전’을 쓴 원로 역사학자 한영우(왼쪽) 교수와 권오창 화백이 2014년 그린 허균의 표준영정. /김연정 객원기자·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
왜 화담일까. 한 교수는 “화담은 성리학 일변도였던 조선 학계에서 과학에 가까운 자연철학을 논의했던 사람으로, 실학의 비조(鼻祖·어떤 학문을 연 사람)라 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친다. 허균의 아버지 허엽(1517~1580)은 화담의 수제자였고, 화담의 경험적이고 실용적인 학풍이 아들 허균(1569~1618)으로 계승됐다는 것이다.
한 교수의 ‘허균 평전’은 그동안 ‘홍길동전’의 저자로서 국문학계에서 주로 논의됐던 허균을 역사학계에서 본격적으로 다룬 책이다. “그는 혁명가이자 실학자였습니다.” 조선 중기 위로부터 나라를 개혁하려 했던 사람이 율곡 이이였다면, 아래로부터 ‘혁명’을 꿈꿨던 인물이 정여립과 허균이었다는 것이다.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지만, 허균은 기업형 농업 경영을 주장하는 ‘치농’과 전국의 식문화를 집약한 ‘도문대작’을 썼다. 실학적인 생각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광해군 때 집권 세력인 북인의 일원으로서 중앙 정치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허균에게는 ‘두 얼굴’이 있었다. 본인도 인정했듯 재승박덕(才勝薄德)했다는 것. 재주는 뛰어났으나 성격과 행동이 거칠어 사람들의 미움을 받았다. 실록에 보이는 그의 행적은 지금 눈으로 보면 비리 공무원의 전형 같다. 고을 수령을 하면서 가까운 사람들을 데려다 먹이고, 친구를 과거 시험에 부당하게 합격시키는가 하면, 중국에 사신으로 가면서 공금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 때문에 파직을 숱하게 겪었다. 그러나 한 교수는 “자신을 위한 축재가 아니라, 서얼 지식인과 승려·기생·화공 같은 소외 계층을 도왔던 것”이라고 해석했다.
허균이 광해군 때 왜 역적으로 몰려 죽었는지, 그 진상이 명확히 드러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교수는 “실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진짜로 모반, 즉 혁명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당시 유구국(오키나와) 군사를 끌어들였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홍길동전’ 결말에서 주인공이 임금이 되는 곳이 바로 유구국이라는 걸 생각하면 흥미로운 부분이다.
한 교수는 “허균은 좋은 선비들을 배척하는 당쟁, 입만 살아 떠들면서 실무를 모르는 지식인, 전쟁의 참화와 농민의 가난을 외면하는 권력자들을 혐오했다”고 말했다. “백성이 호랑이나 표범보다 더 무섭다고 경고하기도 했죠. ‘홍길동전’의 홍길동은 바로 허균 자신이었습니다. 허균의 가장 큰 죄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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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민을 꿈꾼 자유인 허균 |
제 명 수 재단법인 성균관 전 부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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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1569~1618 50세)은 선조대에서 광해군 대에 걸쳐 활약한 문장가, 사상가, 개혁가였다.
한국에서는 수많은 인물이 역사적 무대에 장식하며 명멸해 갔지만 허균 선생님처럼 극적인 삶을 살면서 그 빛과 그늘을 선명하게 남긴 인물도 흔하지는 않다.
당시의 조선사회에서 허균의 사상은 불온한 것으로 취급되었고 파격적이고 직선적이며 자유분방한 그의 기질, 행동가적인 성황은 끝내 처형으로 그의 삶을 마감하게 했다.
양천 허 씨 우리나라에서 명문대가의 지식인으로써 강력한 외교력을 겸비한 뛰어난 자질로 장래가 탄탄하게 보장된 허균이 당대의 사회에서 이처럼 튀는 성향을 보였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끝내 누명을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것을 그의 삶과 사상, 정치활동을 통하여 서서히 추적해 보기로 한다.
허균은 1569년 경상도 관찰사 허엽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외가인 강릉에서 태어났다.
허균이 태어난 곳은 조그마한 야산이 이무기가 기어가듯 꾸불꾸불한 모양을 이루고 있다고 해서 예로부터 교산<蛟山>이라 불려왔다.
허균이 자신의 호를 교산이라 한 것은 고향에 대한 향수에서 나온 것이었으나 자신의 이상을 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을 대변해 주는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 허엽은 당시 국내에서 저명한 화담 서경덕의 문인으로 동인과 서인이 분당되었을 당시에는 동인의 영수로 지목될 만큼 저명도 높았다.
맏형 허성과 중형 허봉은 부친과 더불어 조정의 명신으로 활약했으며 성리의 학문과 문장으로써 외교활동으로 그 이름이 높아졌다.
또한 허균에게는 조선시대 여류시인으로 평가 받게 되는 5세 위의 누이 허난설헌이 있었다.
명문가의 혈통을 이은 허균은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자라면서 허난설헌과 함께 중형 허봉의 벗인 이달<李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달은 최경창, 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꼽힐 만큼 시제가 뛰어났지만 서자라는 신분 상의 제약 때문에 자신의 높은 뜻을 펼치지 못하고 있었다.
허균은 스승의 문하에서 글재주가 뛰어나도 세상에 쓰이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하였으며 장생전에서는 내가 젊은 시절에 협사<俠士>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술회하였다.
허균은 학문과 사상에서 주목되는 것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부교, 도교, 서학에 두루 관심이 깊었다는 것이다.
허균이 당시 성리학의 이론 논쟁에 빠져들지 않고 다양한 사상에 접하게 된 것은 모순된 사회 현실을 극복하는 방안으로써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허균에 관한 기록에는 거짓된 글짓기를 좋아하여 스스로 산수도참의 설부터 도교, 불교 따위의 인단의 이야기들을 모두 지었다는 평가라든가(광해군 일기) 허균이 고서를 전송<傳誦>하는 것을 들었는데 유불도 3가지의 책을 시원하게 외워 내니 아무도 그를 당할 수 없었다는 기록(어우야담)이 있는 만큼 그가 유불도 3교에 두루 능통했음은 분명하다.
또한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유럽의 지도와 천주교의 기십상을 얻어왔다는 기록이 어우야담이나 성호사설에 전해 진다.
허균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천주교 서적을 가져 온 것으로 추측되는데 당시 명나라도 막 천주교가 도입되는 시점이었음을 고려하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그의 관심이 유별났음을 알 수 있다.
혀균의 학문과 사상에서 나타나는 박학<博學>과 개방성은 서경덕 학파의 학풍과 유사하며 학맥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도 흥미를 끈다.
서경덕 학풍의 특징은 신분에 대한 개방성과 함께 도가시상 등 다양한 사상의 수용으로 정리되는데 화담의 수제자로 손꼽히는 두 명의 인물인 허엽과 박순의 학맥이 허균에게도 이어진다.
허균의 스승인 이달은 박순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이달이 당대시인으로 허균에게도 이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