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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2. 묵상글 (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 악감정이 있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안전함의 강물!.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강론글 : 아직 / 051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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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02 05:03
- 악감정이 있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에
기시감(旣視感)이라는 말이 있지요.
언젠가 본 듯한 느낌이라는 뜻인데
오늘 독서의 장면에서 우리는 바로 그런 것을 느낍니다.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
그러나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담대히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이것은 유다인들이 스테파노를 죽이기 전 그 장면과 거의 같습니다.
그때 바오로 사도도 스테파노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다고
사도행전이 전하는데 이번엔 바오로 사도가 그대로 당하는 셈입니다.
어쨌거나 스테파노 때의 유다인이나 오늘의 유다인은 분노와 시기심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분노나 시기 질투심은 조금만 있어도
우리 안에서 사랑을 몰아내 우리가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 분노나 시기나 질투가 조금 있으면
나머지 공간엔 사랑이 크게 차지하고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조그만 분노가 사랑을 몽땅 밀어내기도 하고,
분노가 조금만 있어도 사랑이 힘쓰지 못합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시기심이 조금 정도가 아니라 가득 차 있었기에
그들 안에 사랑이나 이해 같은 것은 하나도 없었고,
그래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쫓아낼 수밖에 없었고,
죽이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고 할 지경이었습니다.
이런 이들에 비해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스테파노처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박해하며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그 지방에서 내쫓았다.
그들은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나서 이코니온으로 갔다.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성령으로 충만하고,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떠나는 것
이런 모습은 참으로 통쾌하고 우리가 참으로 닮고 싶은 점입니다.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는 것은 우리 안에 악감정이란 악감정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도록 탈탈 털고 훌훌 떠나는 행위입니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이 내쫓았어도 사도들은 쫓겨난 것이 아닌 것이 됩니다.
쫓아내도 쫓겨나지 않는 것 이렇게 되기 어려워서 그렇지
이렇게만 될 수 있다면 이것 참 멋지지 않습니까?
이것은 참으로 인간적 수양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고,
찝찝한 감정이 앙금처럼 조금 남아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면 조금도 남아 있지 않게 되는 것이 오히려 보통입니다.
성령은 악령을 완전히 몰아내고 악감정도 모두 몰아내는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쫓겨난 것 때문에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게도 합니다.
그러니 악감정이 조금이라도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겠습니다.
오소서 성령님!
악감정이 있다고 느껴지는 바로 그 순간에
이 기도를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 강림 사건이 될 것이고,
우리는 승리의 짜릿함(통쾌함)을 느낄 수 있으며 성인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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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안전함의 강물!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믿음이란 하느님 섭리의 사랑이라는 큰 강물에 자신을 온전히 맡길 수 있는 능력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안전함의 강물!
2026년 5월 1일 금요일
리처드 신부는 관상 기도의 길이 우리를 하느님의 사랑의 큰 강물로 인도하여, 그 안에서 모든 두려움을 놓아버릴 수 있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은총과 자비는 우리에게, 우리가 스스로나 서로에게 들려주는 좋고 나쁜 이야기보다 훨씬 더 큰 존재임을 가르쳐 줍니다. 두려움에 근거한 작은 이야기들은 대개 절반도 진실이 아니기에 참된 진리라 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상처와 무의식적 의도에 뿌리를 두어, 사물을 선택적으로 보고 판단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것은 온전한 "당신"이 아니며, 참된 "커다란 당신"도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이 흘러넘치는 큰 강물이 아니기에, 참된 삶이 일어나는 자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흐르는 물"(요한 4,10–14)과 "네 안에서 솟아나는 샘" 혹은 "생명의 강"(묵시 22,1–2)으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란 바로 하느님 섭리의 사랑이라는 큰 강물을 신뢰하는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곧 그 사랑의 눈에 보이는 현현이신 그리스도(성자), 그 흐름이신 성령, 그리고 그 근원이신 창조주(성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바꾸거나 강요하거나 개선할 필요가 없는 신적 과정입니다. 다만 받아들이고 누리면 됩니다. 이는 특히 우리가 상처받을 때 하느님께 대한 큰 신뢰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종종 불안에 휩싸여 서둘러 모든 것을 바로잡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면 현재에 머무는 능력을 잃고 머릿속으로 올라가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마음과 몸으로 진정으로 느끼거나 체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억지로 이루려 하거나, 심지어 우리만의 강을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큰 강물은 이미 우리 안에서 흐르고 있으며, 우리 각자는 그 흐름의 작은 한 부분일 뿐입니다.
믿음은 강물을 억지로 밀어내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이미 그 강물이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강물은 흐르고 있으며, 우리는 이미 그 안에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섭리"의 가장 깊은 의미일 것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적극적으로 일하시는 하느님께서 성령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주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그것이 정말 중요한가? 영원의 관점에서 그것이 의미가 있을까? 붙잡고 있을 가치가 있는가?" 우리는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두려움인지 물어야 합니다. 은총은 우리를 그러한 두려움과 공허 속으로 이끌며, 우리가 그 빈 공간에 머무르려 한다면 은총만이 그것을 채울 수 있습니다. 너무 서둘러 답을 만들어내서는 안 됩니다. 너무 빨리 안정을 추구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불안을 없애고 먼지를 가라앉히기 위해 답을 만들어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손 안에 머무르고 신뢰한다는 것은, 결국 지나가 버릴 감정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깊은 믿음을 지닌 이들은 모호함을 견디는 힘을 키우며, 늘 확실성과 완벽한 질서를 필요로 하는 것은 작은 자아일 뿐임을 깨닫습니다. 참된 자아는 신비의 강물 안에서 온전히 쉴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가끔씩 어둠이 찾아올 때 저는 그것과 씨름하고, 견디며, 받아들이려 하지만, 종종 그것이 무엇보다도 ‘스승이자 변혁자’라는 사실을 잊곤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보게 됩니다. 마치 어두운 공간에 들어가 눈이 서서히 적응하며 빛을 발견하는 것처럼, 혼란과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제 이러한 사실을 기억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둠 속에서도 온전히 함께하시며, 즉각적인 이해 없이도 평화와 사랑을 열어 주신다는 것을요... 이러한 경계의 시간들은 이제 제게 보물이 되었습니다.
—Jo-Ellen D.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Everything Belongs: The Gift of Contemplative Prayer, rev. ed. (Crossroad Publishing, 2003), 142–144.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o Dayag,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씨앗이 땅에서 돋아나 빛을 향해 펼쳐지듯, 우리도 날마다 주님의 빛 안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보호와 생명의 근원이심을 알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안심하며 자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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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 삶을 움직이는 사랑의 힘이 하느님 말씀과 그 말씀을 전해 주시는 그분의 마음에 있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지를 가장 분명히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과연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습니다."(콜로 1,19)라고 고백합니다.
요한 복음 저자는 아마도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당신의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출애 33,18) 하고 청했던 장면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너는)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 하고 응답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필립보에게 하신 말씀은 더욱 놀랍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볼 수 있었지만, 그분을 통해 아버지를 본다는 것은 단순한 육신의 시각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산 위에서 그분의 변모를 목격했을 때(마르 9장, 마태 17장), 바로 그 신비가 드러났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의 친밀한 일치를 드러내시며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곧 아버지다."라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그분과 아버지 사이에는 본질적인 일치의 관계성과 동시에 구별이 있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인격적 일치란 차이를 지우지 않고, 오히려 차이를 간직한 채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결합입니다. 어떤 성인이 말했듯이, "하느님과 나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다." 머리로는 둘이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라는 이 역설은 말로 설명하기보다 삶으로 증거해야 할 신비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은 믿음과 행위가 함께 어우러진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인간적 전략이나 억지 행동이 아니라, 믿음에서 직접 흘러나오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말했듯이,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6).
말하자면 우리가 주일이나 대축일, 혹은 다양한 기도를 바칠 때 신경을 외면서 하는 고백, 즉 "말로 하는 믿음의 고백"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의 고백"이 진정한 믿음의 고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행동으로, 즉 삶으로 믿음을 고백한다는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진정한 믿음이란 우리 자신의 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힘을 믿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삶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믿음의 고백은 사랑의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에 들어오시어 우리를 통해 사랑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겠지요?!!
우리가 순간순간 이 진리를 깊이 의식하고 받아들이면서 사랑이신 하느님의 현존 안에 있고자 노력(수양)한다면 지금 당장은 아닐지라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우리는 이런 행동하는 믿음을 살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전에 렉시오 디비나(Lectio Divina: 거룩한 성경 독서)를 배울 때 어떤 분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더군요.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온 편지라고 생각하고 읽어야 한다고요. 그렇다면 그 편지를 한 번 읽고 내버려두지 않겠지요? 읽고 또 읽으면서 그 편지의 글자와 문장만이 아니라 글자 사이와 문장 사이에 있는 보낸 이의 마음까지도 읽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어떤 글에서 읽었습니다.
어느 신부님이, 말씀에 깊이 헌신하며 훌륭한 설교자로 살아가고 계셨습니다. 어느 날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신부님, 무엇이 신부님을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열정을 갖게 합니까?"
신부님은 잠시 생각하시고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제가 성경 공부를 시작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격려의 편지를 얼마나 소중히 간직했는지요! 그 편지의 내용을 이미 마음으로 다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저는 자주 그 편지를 꺼내 읽으며 특별한 감동을 받곤 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은 덧붙이셨습니다. "저는 이 큰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보내는 이를 사랑하게 되면, 그가 보낸 편지 또한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보내주신 하느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는 성경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하느님 말씀에는 힘이 있습니다. 사랑의 힘 말입니다! 우리 삶을 움직이는 사랑의 힘이 하느님 말씀과 그 말씀을 전해 주시는 마음에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그분의 말씀과 그 사랑의 마음을 마음에 새기고 또 새기고자 한다면 우리 삶은 변모될 것입니다. 그분 사랑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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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준 다음,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요한 13,33)라고 말씀하신데 대한, 제자들의 세 번째 반응입니다. 곧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요한 13,36)라는 베드로의 반응과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는 토마스의 반응에 이어,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14,8)라는 필립보의 반응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 14,9-10)
예수님께서는 먼저 ‘보는 것’의 한계를 일깨워주십니다. 곧 필립보에게 그가 오랜 동안 당신을 보았음에도 당신을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사실, 필립보의 간청은 마치 서울에 와 서울을 보고 있으면서도 서울이 어디냐고 묻는 꼴과 같습니다. ‘보고’ 있으면서도 모르고, ‘알고’ 있으면서도 믿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속을 헤엄쳐 다니면서도 자신이 헤엄쳐 다닐 수 있음이 물이 있음임을 모르고, 새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도 자신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하늘이 있기 때문임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숨을 쉬면서도 숨 쉬는 줄을 모르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일까요!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 달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고 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 ‘이해심을 가지고 보았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예수님께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의 눈길’(신앙의 눈길)로 보는 일, 이를 우리는 ‘관상’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724항). 이는 ‘믿음’에서 참된 앎이 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이 진정한 앎의 길임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빠의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결국, ‘믿음으로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것’은 곧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당신의 말씀과 행적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하신 말씀과 일이 ‘참이라는 인식’을 내포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그러니 먼저 ‘믿는 사람’이어야 하고, 다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
결국, ‘믿음’이 전능을 가져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믿고 청하면, 그 ‘믿음’ 안에서 당신이 일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으로 예수님을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주겠다.”(요한 14,14)
주님!
제가 여전히 이루지 못함은 여전히 죽지 못한 까닭입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제 뜻을 이루려 한 까닭입니다.
사랑으로 죽게 하시어, 저의 믿음이 아니라 당신의 믿음을 이루소서!
사실, 제가 이 자리에 아직 남아 있음은
당신께 대한 저의 믿음이 아니라 저에 대한 당신의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도 늘 저보다 더 믿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찬미하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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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의 일입니다.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다가 다투게 되었습니다. 덩치가 큰 친구는 제 목을 잡았고, 체구가 작았던 저는 친구의 급소를 잡았습니다. 서로 놓으라고 울면서 버티다가 결국 힘이 빠져 손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웃으며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습니다. 어렸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서로 붙잡고 있으면 고통이 계속되고, 손을 놓으면 평화가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른이 된 우리는 여전히 서로의 목을 붙잡고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이란을 공격했습니다. 이란의 핵 시설을 공격한다고 했습니다. 이란의 정권을 교체한다고 했습니다. 이란의 미사일 공격 능력을 없앤다고 했습니다. 작년과 달리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격에 즉각적으로 반격했습니다. 미국이 이란의 군사시설을 공격하면, 이란은 미국의 군사 기지를 공격합니다. 미국이 이란의 에너지 시설을 공격하면, 이란은 주변국의 에너지 시설을 공격합니다.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 시설을 공격하면 이란은 이스라엘의 핵 시설을 공격합니다.
어린 시절 저와 친구는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금세 평화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란은 어찌 그런 이치를 모르고 서로서로 파국으로 몰아가는 행위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는 단순히 미국과 이스라엘 그리고 이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의 에너지인 석유 공급이 무너지면 세계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역사의 시계를 돌려보면 지금의 갈등이 얼마나 아이러니한지 알 수 있습니다. 이란과 미국의 관계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이란은 미국과 매우 가까운 나라였습니다. 팔레비 왕조 시절, 이란의 산업과 정유 시설은 미국과 서방의 도움으로 발전했습니다. 또한 2015년에는 핵 협상이 이루어지면서 갈등을 넘어 새로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도 열렸습니다. 그러나 정치적 이해와 불신이 쌓이면서 그 관계는 다시 긴장과 대립으로 돌아섰습니다.
이란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더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서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란의 전신인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는 바빌론으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해 주었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성전을 재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키루스를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라고까지 부르고 있습니다. 또한 에스더는 페르시아의 왕비가 되어 자기 민족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 냈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은 에스더의 청을 받아들여 유다인을 살리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처럼 성서 안에서 페르시아, 곧 오늘의 이란은 이스라엘을 살린 나라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지금은 서로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그 이유를 인간의 마음 안에서 찾으십니다. 교황님은 사제들과 신앙인들이 빠질 수 있는 세 가지 유혹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영적 세속성’입니다. 십자가 없는 영광을 추구하는 유혹입니다. 희생 없이 승리만을 원할 때 우리는 진리를 보지 못합니다. 둘째는 ‘숫자에 의존하는 실용주의’입니다. 사람을 숫자로 환산하는 유혹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아니라 전체의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더 낫다”라는 가야파의 논리가 오늘도 반복됩니다. 셋째는 ‘기능주의’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 효율과 계획을 앞세우는 유혹입니다. 기도보다 전략이 앞서고, 믿음보다 계산이 앞설 때 우리는 결국 하느님을 놓치게 됩니다. 이 유혹에 대해 본회퍼 목사님도 깊이 경고했습니다. 목사님은 ‘값싼 은혜’를 이야기하며, 십자가 없는 은혜, 회개 없는 용서,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신앙은 참된 은혜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마저도 자기 편의대로 바꾸려는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이 모든 유혹의 결과는 하나입니다. 진리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느님의 아들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혹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진리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오늘 우리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 생각과 자기 기준에 갇혀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진리이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 답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안의 유혹 때문입니다. 이제 신앙 안에서 다시 배워야 합니다. 욕심을 놓고, 미움을 놓고, 자기 확신을 내려놓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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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참된 신앙 여정이란 지속적인 깨달음의 길!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 제자로 간택하신 필립보 사도, 열심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그가 오늘은 정말이지 전혀 엉뚱한 말을 해서 예수님 속을 긁어놓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안타깝게도 필립보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오랫동안 예수님과 동고동락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신원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오랜 공을 들여 제자들에게 특별 과외까지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엉뚱한 소리를 해대는 필립보의 모습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비애나 상심은 무척이나 컸던가 봅니다. 필립보를 향한 예수님 책망의 강도가 아주 큽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우리네 인생이란, 그리고 우리 신앙 여정이란 지속적인 깨달음의 길입니다. 너무나 크신 하느님이시기에 우리 인간의 짧은 머리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하느님, 때로 알쏭달쏭한 하느님, 인간의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하느님이시기에 납득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간절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진리를 볼 수 있는 맑은 눈이 필요합니다. 깨어있기 위한 부단한 자기 단련이 필요합니다.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하느님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깨닫는 순간 우리의 신앙은 보다 본격적인 도약을 시작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참된 영적 예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평생 죽을 고생을 다했지만, 죽기 일보 직전까지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그 인생처럼 불행한 인생도 다시 없을 것입니다.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인생은 참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삶은 동물적인 삶, 돌덩어리나 나무토막과도 같은 삶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획득해야 할 깨달음을 과연 어떤 깨달음입니까? 예수님께서 간단하게 그리고 명명백백하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가 계신다는 것. 하느님 아버지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것.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는 하나라는 것. 예수님은 곧 그리스도, 메시아, 더 나아가 하느님 아버지 자체라는 것.”
더불어 우리가 획득해야 할 깨달음이 몇 가지 더 있습니다. “하느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하느님은 우리 인간의 죄와 비참으로 얼룩진 이 세상 한가운데, 고통받는 우리 동료들 안에 현존하신다는 진리에 대한 깨달음...
죽음은 생의 끝맺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을 시작하기 위해 묶은 껍질을 벗어버리는 과정임을 깨달음, 마지막 날은 우리네 인생 곡선 안에서 가장 하한선을 긋는 절망의 순간이 아니라 절정의 순간임을 깨달음, 하느님은 똑똑하고 잘난 내가 아니라 부족하고 죄인인 나를 사랑하신다는 깨달음, 나란 존재의 부족함을 아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깨달음, 고통스러운 매일의 현실이 사실은 꽃봉오리처럼 소중한 것임을 깨달음, 부족해 보이는 이웃들이 눈물겹도록 고마운 대상임을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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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4,7–14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그분을 알고 또 그분을 보았다.”
그러자 필립보가 청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단지 하느님에 대해 설명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를 드러내시는 분이심을 보여 줍니다.
하느님은 멀리 있는 관념이 아니라
예수님의 얼굴과 말씀, 행동과 사랑 안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떤 종교 지식을 더 많이 얻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느님의 마음을 배우는 일입니다.
성 암브로시오는
그리스도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충만함이
인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따로 떨어진 분이 아니라
아버지 안에 머무시고
아버지의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바라보면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점점 더 분명히 알게 됩니다.
자비로우신 분,
생명을 살리시는 분,
두려움보다 신뢰를 주시는 분,
멀리서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가까이 오셔서 함께하시는 분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사랑에 대한 깊은 진실도 보여 줍니다.
사랑은
“하느님을 보여 달라”는 인간의 갈망에 대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감추지 않으시고
마침내 얼굴을 내어 주시는 사건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은 추상적 존재가 아니라
만날 수 있는 분,
들을 수 있는 분,
따를 수 있는 분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기쁨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기쁨은
모든 질문이 다 사라져서 오는 만족이 아니라
하느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예수님 안에서 나에게 가까이 오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피어납니다.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는 필립보의 말처럼
인간의 깊은 목마름은
마침내 하느님의 얼굴 앞에서 쉬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십니다.
“나를 믿는 이는 내가 하는 일들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들도 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은 놀랍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수동적인 구경꾼으로 남겨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일을 이어 가는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곧 하느님을 본 사람은
이제 그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안에 드러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도 바로 이 자리에서 새로워집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청한다는 것은
내 욕망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일이 아니라
그분의 마음과 일치하여
세상 안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일입니다.
사랑/기쁨 주간에
이 말씀은 더욱 밝게 다가옵니다.
사랑은 하느님의 얼굴을 닮아 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본 사람이
이웃을 함부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주님 안에서 아버지를 본 사람이
타인의 존엄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기쁨은
내가 혼자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느님의 사랑이 내게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에서 깊어집니다.
오늘 토요일 이웃종교/생태의 날에
이 말씀은 더 넓어집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본 사람은
세상 안의 수많은 얼굴도 함부로 지나치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말없이 신음하는 피조물 안에서도
하느님의 숨결을 더 조심히 대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본다는 것은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되는 일입니다.
주님,
당신 안에서 아버지를 보게 하시고
그 얼굴을 잊지 않게 하소서.
제가 하느님을 말로만 찾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사랑을 닮아
이웃과 세상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하소서.
사랑 안에서 당신을 따르고
기쁨 안에서 당신 일을 이어 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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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9:20 추가.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 필립보가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나 스스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내 안에 머무르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7-14)>
1)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맏이이십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콜로 1,15-16ㄱ).”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을 만물의 상속자로 삼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통하여 온 세상을 만들기까지 하셨습니다.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으로서, 만물을 당신의 강력한 말씀으로 지탱하십니다.
그분께서 죄를 깨끗이 없애신 다음, 하늘 높은 곳에 계신 존엄하신 분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히브 1,2ㄴ-3).”
‘예수님은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은,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라는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 4,12.16ㄴㄷ).”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 가운데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과 같고, 예수님을 보는 것은 곧 하느님을 뵙는 것이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이 말들은 결국 “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다.”가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뵙고 싶으면 예수님을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초상화나 사진 같은 것을 보고 하느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과 말씀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외모는 중요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말씀이 중요합니다.>
2) “하느님이신 분이 왜 사람이 되셨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분께서는 분명 천사들을 보살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께서는 모든 점에서 형제들과 같아지셔야 했습니다.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섬기는 일에 충실한 대사제가 되시어, 백성의 죄를 속죄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6-18).”
인간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구원할 능력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인간들을 데리고 가려고 인간들 속으로 들어오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서, ‘사랑이란, 내려가 주는 것’임을 배우게 됩니다.
3)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는, “내가 승천하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너희가 일해야 한다.
너희는 내가 갔던 곳보다 더 먼 곳까지 가서, 내가 만났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입니다.
여기서 ‘더 큰 일’이라는 말은, ‘더 위대한 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더 먼 곳까지 가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이신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약속입니다.
또는 ‘하느님이신 분’이기 때문에 하시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버지께 기도하기도 하고, ‘예수님께’ 기도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기 때문에(요한 10,30), 아버지께 기도하는 것과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은 ‘같은 일’입니다.
또 아버지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과 예수님께서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도 ‘같은 일’입니다.
기도문의 내용에 따라 아버지와 예수님을 구분할 때가 있긴 하지만, 본질적인 차이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시도록 하겠다.”는, “앞으로 너희가 하게 될 일은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너희의 기도를 들어 주겠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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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2.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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