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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휘장
출 26:1-14
1 너는 성막을 만들되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 놓은 열 폭의 휘장을 만들지니
2 매 폭의 길이는 스물여덟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고
3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다른 다섯 폭도 서로 연결하고
4 그 휘장을 이을 끝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이어질 다른 끝폭 가에도 그와 같이 하고
5 휘장 끝폭 가에 고 쉰 개를 달며 다른 휘장 끝폭 가에도 고 쉰 개를 달고 그 고들을 서로 마주 보게 하고
6 금 갈고리 쉰 개를 만들고 그 갈고리로 휘장을 연결하여 한 성막을 이룰지며
7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지며
8 각 폭의 길이는 서른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열한 폭의 길이를 같게 하고
9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결하고 그 여섯째 폭 절반은 성막 전면에 접어 드리우고
10 휘장을 이을 끝폭 가에 고 쉰 개를 달며 다른 이을 끝폭 가에도 고 쉰 개를 달고
11 놋 갈고리 쉰 개를 만들고 그 갈고리로 그 고를 꿰어 연결하여 한 막이 되게 하고
12 그 막 곧 휘장의 그 나머지 반 폭은 성막 뒤에 늘어뜨리고
13 막 곧 휘장의 길이의 남은 것은 이쪽에 한 규빗, 저쪽에 한 규빗씩 성막 좌우 양쪽에 덮어 늘어뜨리고
14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지니라
출 26:1-14 / [성막] 너는 열 폭 천으로 내가 살 ㄱ) 성막을 만들어라. 그 천은 가늘게 꼰 베실과 자줏빛 털실과 붉은빛 털실과 진홍빛 털실을 섞어서 그룹 무늬를 수놓아 짠 것이어야 한다. (ㄱ. 히. 미쉬칸. 머물 곳, 장막으로도 읽을 수 있다) 2) 각 천의 길이는 12.6미터, 나비는 1.8미터로 매폭의 치수가 모두 똑같아야 한다. 3) 다섯 폭을 옆으로 나란히 잇고 또 다른 다섯 폭도 옆으로 나란히 이어라. 4) 나란히 이어 붙인 천의 끝 폭 가장자리에 자줏빛 털실로 고리를 만들어 붙이고 마찬가지로 나란히 이어 붙인 다른 천의 끝 폭 가장자리에도 자줏빛 털실로 고리를 만들어 붙여라. 5) 한쪽 폭 가장자리에 고리를 50개 만들어 붙이고 이와 서로 맞닿게 다른 폭 한쪽 가장자리에도 고리를 50개 만들어 붙여라. 6) 그런 다음 금으로 갈고리 50개를 만들어 길게 이어 붙인 천 두 쪽을 서로 맞걸어서 하나의 성막으로 연결하여라. 7) [바깥 덮개] 성막 위를 덮어 씌울 천막은 염소털로 짠 피륙 열한 폭으로 만들어라. 8) 그 한 폭의 길이는 13.5미터, 나비는 1.8미터가 되게 만들어야 하며 열한 폭의 치수가 모두 똑같아야 한다. 9) 우선 다섯 폭을 옆으로 나란히 잇고 그 나머지 여섯 폭도 따로 이어라. 이 여섯째 폭은 절반을 접어 성막 전면에 드리워라. 10) 한쪽 천의 끝 폭 가장자리에 고리를 50개 만들어 달고 다른 한쪽 천의 끝 폭 가장자리에도 고리를 50개 만들어 달아라. 11) 그런 다음 놋쇠로 갈고리 50개를 만들어 두 쪽을 서로 맞걸어 하나의 천막으로 연결하여라. 12) 남아 처지는 반폭은 성막 뒤쪽으로 늘어지게 하여라. 13) 또 천막폭의 길이가 성막 길이보다 남는 부분은 성막의 양 옆으로 45센티미터씩 늘어뜨려 덮어라. 14) 그런 다음 분홍물을 들인 숫양 가죽으로 천막 덮개를 만들어 씌우고 또 그 위에 돌고래 가죽으로 덮개를 만들어 씌워라.
본문은 성막의 휘장을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성막은 여러 겹의 휘장으로 덮여집니다. 제일 안쪽부터 천으로 만든 첫 번째 휘장, 염소 털로 만든 두 번째 휘장,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덮개 두 개를 만듭니다.
첫 번째 휘장(1-6) 첫 번째 휘장은 가장 안쪽에서 성막을 덮는 휘장입니다. 이 휘장은 베실과 청색, 자색, 홍색의 실로 짠 옷감을 사용하여 만듭니다. 거기에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습니다. 이렇게 열 개의 천을 만들어 각각 다섯 개씩 천을 연결하여 두 개의 커다란 천을 만듭니다. 두 장의 커다란 천에 각각 50개씩 청색 고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것을 금 갈고리로 연결하여 완성합니다. 휘장을 연결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이스라엘이 백성들이 설치하거나 철거하기 수월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휘장(7-13) 값비싸고 아름답게 만든 첫 번째 휘장 위에 두 번째 휘장을 덮습니다. 이 휘장은 당시 유목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한 천막 재료였던 염소 털로 만듭니다. 열한 조각을 만들어 다섯 조각과 여섯 조각으로 엮고 다시 하나로 묶어 커다란 천을 만듭니다. 천을 연결하는 갈고리는 첫 번째 휘장처럼 금이 아닌 놋으로 만듭니다. 두 번째 휘장은 첫 번째 휘장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이처럼 첫 번째 휘장보다 비교적 덜 가치 있고 견고한 재료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첫 번째 휘장보다 크게 만들어 입구를 제외한 전체를 덮어 보호합니다.
두 개의 덮개(14) 세 번째 네 번째 휘장은 덮개입니다. 두 덮개의 규격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성막 전체를 덮었을 것입니다. 재료로 사용된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은 사막의 열기와 비로부터 성막을 보호하였습니다. 안쪽의 휘장은 값비싼 재료로 아름답게 만들어졌고 바깥쪽의 휘장은 화려하지 않고 거칠고 볼품없는 검은 가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처럼 예수께서도 겉으로 보기에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라고 기록된 것처럼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사 53:2). 하지만 성전 내부는 아름다웠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아름답고 놀라운 은혜와 생명이 있습니다.
적용: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당신 안에도 아름답고 놀라운 은혜와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은혜와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바란다’는 말은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간절히 기다리며 갈망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도 문제를 만나거나 고난 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이 많습니다. 잠잠히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기왕 십자가를 지려거든 묵묵히 지고 가야 합니다. 투덜거리면 훈련만 더 연장될 뿐입니다. 우리는 남편(아내)과 자식과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너무 말이 많습니다.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고 믿음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잠잠히 혹은 가만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지금 나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 설 교 >
성막의 지붕과 골격과 두 개의 휘장
출 26:1, 15, 31
서 론
출애굽기 26장의 내용은 대단히 복잡합니다. 내용을 정리하면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째는 성막의 지붕에 관한 내용으로 4개의 앙장에 대해 기록되어 있고, 둘째는 성막의 골격에 관한 내용으로 48개의 널판에 대해 기록되어 있으며, 마지막으로 성막에 쓰이는 2개의 휘장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성막을 이렇게 세세한 내용까지 알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6장 역시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성막의 모든 구성요소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땅에 있는 성막이 하늘에 있는 온전한 성막의 그림자이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9장 11~12절에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늘에 ‘더 크고 온전한 장막’이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천국에 가서 그 장막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의 장막은 하늘에 있는 장막의 그림자로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것입니다.
Ⅰ. 4개 앙장의 구성과 그 의미
성막의 지붕은 네 개의 앙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앙장’은 영어로 ‘덮개’를 의미하는 ‘Covering’입니다. 즉, 네 개의 덮개로 성막의 지붕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 내부에서 보이는 것이 제1앙장이 되고, 성막 외부에서 보이는 것이 제4앙장입니다.
제1앙장은 흰색의 삼베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를 놓았습니다. 삼베는 예부터 무더운 여름날 즐겨 입던 옷감입니다. 그 앙장에 네 가지 색의 실로 수를 놓을 때 그룹천사의 모습도 수놓았습니다. 제사장들이 성소 안에서 일하는 동안에는 제1앙장만 보입니다. 제1앙장이 성막 지붕의 내부에 해당하는 덮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네 가지 색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흰색은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 청색은 그리스도의 신성, 자색은 그리스도의 왕권, 홍색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의미합니다. 이 네 가지 그리스도의 모습은 4복음서에도 그대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청색)을 강조한 복음서가 ‘요한복음’이고, 그리스도의 왕권(자색)을 강조한 복음서가 ‘마태복음’이고, 그리스도의 종 되심(홍색)을 강조한 복음서가 ‘마가복음’이며, 그리스도의 인성(흰색)을 강조한 복음서가 ‘누가복음’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 7절에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보좌 주위의 네 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첫째는 사자, 둘째는 송아지, 셋째는 사람, 넷째는 독수리와 같다고 했는데, 사자는 그리스도의 왕권, 송아지는 그리스도의 종 되심, 사람은 그리스도의 인성, 독수리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왕이시고, 인간이시며, 종이시라는 것입니다. 제1앙장은 네 가지 색으로 그리스도의 네 가지 측면을 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룹천사가 수놓아져 있는 것은 천사들이 그리스도를 수종들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내며, 그리스도는 천사들의 수종을 받으실 만큼 영광스러운 분이시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제1앙장은 총 10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5폭씩 실로 연결하고, 두 개의 5폭짜리 천을 50개의 금고리로 연결하여 하나의 앙장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면 10폭 다 연결하면 되지 왜 번거롭게 5폭씩 나누어 연결했을까요?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이동해야 하기에, 성막의 앙장을 포함해서 모든 기구는 운반에 용이하도록 제조된 것입니다.
제2앙장은 ‘염소 털’로 만듭니다. 염소 털은 흰색입니다. 제1앙장이 10폭인 반면, 제2앙장은 11폭입니다. 제1앙장의 모든 부분을 덮고 땅 끝까지 내려가는 크기입니다. 제조는 제1앙장과 마찬가지로 5폭을 하나로 연결하고, 다음 6폭을 하나로 연결해서 그 둘을 놋갈고리 50개로 연결해 하나의 앙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면 왜 염소 털을 사용한 것일까요? 그것은 염소 털이 보온과 방습에 뛰어난 천막재료였기 때문입니다.
또 염소는 ‘속죄제물’을 의미합니다. 레위기 16장 15절에 “또 백성을 위한 속죄제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장 안에 들어가서 그 수송아지 피로 행함 같이 그 피로 행하여 속죄소 위와 속죄소 앞에 뿌릴지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염소를 잡아 그 피를 가지고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를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면 놋갈고리는 무슨 의미일까요? 왜 제1앙장은 금고리로 되어 있고, 제2앙장은 놋갈고리로 되어 일까요? 성경에서 ‘놋’은 대부분 ‘심판’ 또는 ‘고난’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염소 털을 놋갈고리로 연결한 것은 “속죄제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3앙장은 ‘붉은 물들인 양의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크기에 대한 자세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제2앙장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양이 죽어 붉은 물이 들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피 흘리심으로 택한 백성을 향한 속죄제사를 완성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4앙장은 ‘해달의 가죽’으로 만들었는데, 해달로 번역된 ‘Sea Cow’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한국에 ‘아몬드 나무’가 없어서 ‘살구나무’로 번역한 것처럼, ‘Sea Cow’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글성경에서는 이를 ‘해달’로 번역하였습니다. 아무튼 제4앙장은 그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성막 가장 바깥쪽에 덮는 덮개로 바람이나 비, 모래와 같은 것들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견고한 앙장이었습니다. 이것은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강인하심과 신실하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각각의 앙장은 그 나름의 영적인 의미들이 있습니다. 성막의 네 앙장은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택한 백성을 위해 대속제물이 되어주셨고, 수난을 다 이기시고 그들의 견고한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는 사실을 그림처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겉으로만 보면 해달의 가죽처럼 별로 흠모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학벌이 좋지도 못하고, 재산이 많거나, 지위가 높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지지 못한 자로 사셨습니다. 겉으로 보면 한 없이 누추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안에서 보면 제1앙장이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 그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이 아름답고 화려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밖으로 화려하고 안으로 별 볼일 없는 모습은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밖에서 보면 멸시받을 존재처럼 보일지라도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그 누구보다 영광스럽고 존귀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전건축도 외적으로 화려한 건물을 짓는 것보다 겉은 좀 수수해 보일지라도 내부를 알차고 요긴하게 짓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Ⅱ. 48개 널판의 제조와 그 의미
널판(Board)은 성막의 골격을 형성하는 재료입니다. 널판의 높이는 10규빗이고, 넓이는 1.5규빗입니다. 널판의 높이가 10규빗이라는 것은 성막의 높이가 10규빗임을 가리킵니다. 성막의 길이는 남과 북이 30규빗씩이고, 동과 서는 10규빗씩입니다. 그래서 남북으로 널판이 20개씩 총 40개가 소요되고, 동쪽은 문이기 때문에 널판이 필요치 않고, 서쪽에 8개가 소요됩니다. 그러나 넓이를 1.5규빗으로 계산하면 서쪽에 8개가 사용될 경우 10규빗이 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성막 양 끝 모퉁이가 되는 지점에 널판을 덧대라고 기록되어 있고, 서쪽에 8개의 널판이 소요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막에 소요된 널판의 수는 총 48개가 됩니다.
널판은 싯딤나무(아카시아 나무)로 만들어 금을 입혔습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대로 나무는 그리스도의 인성, 금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널판의 아랫부분에 두 개의 은받침을 두고 널판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은받침은 한 개당 무게가 한 달란트였습니다. 이를 환산하면 34kg이 됩니다. 그러니까 널판 한 개에 두 개의 은받침이 받쳐주니 68kg의 무게가 아랫부분을 지지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널판과 은받침은 촉으로 연결하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플러그와 콘센트를 연상하시면 됩니다. 은받침 한 개당 하나의 구멍(Socket)을 만들고, 널판은 두 개의 구멍에 들어갈 돌출된 부분을 만들어서 고정했던 것입니다.
널판과 널판은 어떻게 연결했을까요? 48개의 널판이 세워지면 널판마다 달려 있는 다섯 개의 금고리에 ‘띠’(Crossbar)를 끼워 연결합니다. 싯딤나무로 만들고 도금을 한 이 띠를 5중으로 연결하기 때문에 널판이 쓰러지거나 밀릴 수가 없습니다. 이로써 아주 견고하고 튼튼한 성막의 골격이 되는 것입니다.
널판과 은받침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많은 설교자들이 은받침은 그리스도의 ‘속전’(Atonement Money)을 의미하고, 널판이 서로 연결된 것은 그리스도의 속전을 중심으로 교회된 성도들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은받침은 그리스도의 속전을 의미하는 것이 맞지만, 널판은 그렇지 않습니다. 널판은 교회나 성도를 상징하기보다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널판에 부착된 금고리가 띠로 연결되는 것은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어 완전한 ‘한 위격’(One Person)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은받침 위에 세워진 널판은 택한 백성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속전이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0장 12~13절에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 무릇 계수 중에 드는 자마다 성소에 세겔대로 반 세겔을 낼지니 한 세겔은 이십 게라라 그 반 세겔을 여호와께 드릴지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년에 한 번씩 은 반 세겔을 내도록 했는데, 이것이 속전입니다. 이를 통해 온역(전염병)이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은’은 속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양성이 연합하여 한 위격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속전이 되어 주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Ⅲ. 2개 휘장의 제조와 그 의미
출애굽기 26장 31~37절에는 성막에 쓰이는 두 개의 휘장(Curtain)과 그 기능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지성소 휘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성막 동편 문에 드리워진 성소 휘장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두 휘장이 구분되지 않고 사용되기도 합니다.
지성소 휘장은 재료가 제1앙장의 재료와 같습니다. 청색, 자색, 홍색실과 가늘게 꼰 베실을 사용합니다. 그룹천사의 모양을 수놓은 것도 똑같습니다. 그러면 이 휘장은 어떻게 드리우는 것일까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네 개의 금 기둥을 만들었습니다. 이것 역시 싯딤나무로 만들어 도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금 기둥 밑에는 네 개의 은받침을 만들었고, 그 기둥 위의 금고리에 휘장을 매달아 드리운 것입니다.
지성소 휘장은 세 가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죄인 된 인간이 함부로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경고’(Warning)의 메시지를 줍니다. 이곳을 뚫고 지나가면 너는 반드시 죽는다는 경고입니다. 죄인 된 인간이 함부로 하나님을 대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1년에 단 하루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가는 날은 유대력으로 대속죄일(7월 10일)입니다. 단 한 번만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최소한 네 번은 들어가야 합니다. 첫 번째는 분향단을 가지고 들어가고, 두 번째는 대제사장 스스로의 죄와 가족들의 죄를 씻기 위해 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세 번째는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해 염소의 피를 가지고 들어갑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분향단을 가지고 나오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최소 네 번은 출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대속죄일 하루를 제외한 다른 날에는 지성소 출입이 일절 불가능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언제든 들어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모세 이외의 사람은 함부로 지성소 안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성소 휘장은 죄인이 함부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죽게 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 없이도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예수님 없이도 여호와의 증인이 될 수 있다고도 말을 하지만, 이런 말들은 아주 위험한 소리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 절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습니다. 함부로 나아갔다가는 다 죽습니다.
둘째, 제사장이 성소에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일을 하는 동안 지성소 휘장을 보고 느낄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죄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성소 휘장이 주는 두 번째 중요한 메시지는 ‘증거’(Witness)가 된다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휘장을 보며 자신이 ‘지성소로 들어갈 수 없는 존재’, ‘하나님을 감히 만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항상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나는 원래 의인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법적으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은 것이지 실질적으로 의로운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내 속에 죄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성소 휘장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의 증거입니다.
셋째, 지성소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Way)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죄인 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려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길이외의 다른 길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휘장이 갈라지는 날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휘장이 갈라져야 죄인이 두려움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5장 37~38절에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소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갈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제사장들이 모두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10장 20절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길, 옛 길이 아니라 ‘새롭고 산 길’(New and Living Way)입니다. 휘장은 곧 저의 육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찢어지심으로 지성소 휘장도 찢어지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 앞으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지성소 휘장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항상 상기시켜주고, 죄인이 피 없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경고를 주고 있으며, 휘장이 찢어지는 그 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새롭고 산 길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갖가지 어려움이 많이 있어도 좋은 시대입니다. 왜 좋은 시대일까요? 그것은 죄인 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이 열린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어 새롭고 산 길로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고 종국에 하나님 계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복입니다. 이런 복을 하찮게 여기고 세상의 부를 쌓는 작은 일을 큰 복으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성소 입구에 드리워진 휘장은 지성소 휘장과 재료가 같지만 세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룹천사의 모양이 수놓아져 있지 않다는 것이고, 둘째는 기둥의 숫자가 하나 더 많다는 것이며, 셋째는 받침이 은이 아니라 놋이라는 것입니다. 성소 휘장의 기둥은 놋받침으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놋은 항상 하나님의 심판 또는 무서운 수난을 의미하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심으로 성도의 고난을 이해할 수 있는 분이 되셨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메시아가 되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메시아만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문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결 론
성막에 들어가는 문은 동쪽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메시아는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기독교이외에 다른 종교가 많이 있습니다. 종교인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들의 철학과 학문은 대단히 높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철학과 학문이 아무리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들이 제시하는 길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아닙니다. 그들이 제시하는 길을 가면 공부를 많이 하게 될지는 몰라도 반드시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 길은 속이는 길이고, 멸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타종교인들을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하는 것을 믿어서는 절대로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의 다른 길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되실까요? 다른 길에는 우리의 죗값을 갚아준 속죄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죗값을 갚아준 메시아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성과 인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놋처럼 수난을 당하시고, 염소와 양처럼 피를 흘려주셔야 지성소 휘장이 찢어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길이 새롭고 산 길이라는 것입니다. 죄인 된 인간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목하여 영생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무리 신령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예수 이름 이외에 다른 이름을 전하는 것은 멸망의 길, 넓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시고, 우리를 위해 유일하게 지성소 휘장을 찢어놓으신 우리의 메시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은 협착해서 찾는 사람이 적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는 새롭고 산 길로 행하여 하나님의 복을 누리고, 이 땅을 떠나실 때는 하나님 계신 천국에 들어가 영원토록 왕 노릇하며 영생복락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막공동체
출 26:1-14, 30 / 인명진 목사
성경은 이야기 보물 창고입니다. 다양한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어 홍수 가운데에서 온 인류를 구한 이야기, 불의 선지 엘리야 회리바람 타고 하늘에 올라간 이야기, 예수님이 비유로 들려주시는 하나님 나라 이야기, 마지막 날에 구름타고 다시 오실 재림 이야기, 어쩌면 성경은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야기로 끝나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 왜 이야기 방식을 선택했을까요?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새롭습니다. 다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인데 처음 듣는 이야기처럼 재미있습니다. 전하는 이마다 다른 듯하면서 같은 이야기를 전합니다. 더 신기한 것은 낫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사람부터 대학교수에 이르기까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 이야기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들을 때마다 재미없고, 지루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의미도 잘 모르겠고, 잠만 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족보 이야기와 성막 이야기입니다. 년초가 되어서 모처럼 큰마음 먹고 성경일독을 해야 되겠다고 신약성경을 펼치면 제일 먼저 족보를 만납니다. 발음하기도 힘든 외국어 이름에다, 비슷한 이름이 계속해서 등장합니다. 이름이 끝날 때마다 낳고, 낳고가 반복됩니다. 의미 없이 읽다보니 나중에는 낳고 낳고 잠만 낳습니다. 비록 잠만 낳는 족보이야기이지만 신약성경 첫 권, 첫 장에 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운명처럼 만나집니다.
그러나 성막 이야기는 성경 아주 깊숙한 곳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성도들의 눈에 설교자의 눈에 잘 띠지 않습니다. 아주 중요한 패물과 땅문서를 장롱 깊숙한 곳에 넣어 두듯이 감추어놓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성막은 애써 찾고 두드려야 그 비밀의 문을 열어줍니다. 성막 이야기 역시 생소한 재료의 이름이 나오고, 수치를 나타내는 규빗이 등장하고, 모양과 양식대로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어지간한 인내심을 가지지 않으면 그 의미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성소에 영적인 비밀이 있듯이 성막은 우리를 깊은 신앙의 세계로 인도합니다.
저는 오늘 지루한 이야기, 잠의 세계로 인도하는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이미 성막도 없어졌고, 성전도 무너졌고, 예수 그리스도가 성전인 교회 시대에 성막은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성막을 처음 명령 받았던 광야시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이었고,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에는 똑같은 성막 이야기가 두 번 반복됩니다. 오늘 본문인 26장에 나오고 36장에 또 한번 나옵니다. 26장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막 청사진 내지는 조감도에 해당합니다. 36장은 지혜로운 기술자인 브살렐과 오홀리압이 청사진대로 성막을 건축하는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두 번이나 꼼꼼하게 지시할 정도로 성막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본문에는 성막의 구조와 사용된 재료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로 5m, 세로 10m 정도 되는 좁은 구조물이었지만 성막은 하나님이 우리 함께 계신다는 임재를 상징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을 따라 이동했습니다. 일종의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이뿐 아니라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성막의 또 다른 이름은 회막인데, 영어성경은 meeting tent라 불렀습니다. 성막은 위로는 하나님과 소통하는 장소였고, 아래로는 온 백성들이 함께 나와서 서로를 소통하는 자리였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죄를 씻고 하나님을 만나는 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소통의 의미를 넘어 막힌 담이 무너지고 하나가 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성막은 항상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에 세워졌습니다. 저들이 머무를 때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3지파씩 나누어 성막을 중심으로 진영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이동할 때에는 여섯 지파가 앞서고 그 중앙에 성막이 이동했고, 뒤 이어서 여섯 지파가 따라갔습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이 머물 때든지, 행진할 때든지 항상 공동체 중심에 있었습니다.
성막 안에는 언약궤, 분향단, 탁자, 일곱 촛대, 아론의 싹 난 지팡이, 제사용기, 만나를 담았던 항아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 성막은 광야의 백성들에게 예배의 처소였고, 희생제의가 치러지는 곳이었으며, 열두 지파의 구심점이었고, 하나님의 계시의 전당이었습니다. 성막은 광야에서 그 백성들과 함께 이동하다가 가나안 정착 이후에는 실로에 있는 산당에 모셔졌습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의 타락한 두 아들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법궤를 들고 나갔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망나니 같은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부적처럼 믿었습니다. “법궤만 있으면 우리가 전쟁에서 이긴다.”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 전쟁에서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도 죽고 이스라엘 병사 3만명이 죽고, 법궤도 블레셋에게 빼앗겼습니다. 이가봇, 하나님의 영광도 이스라엘을 떠났습니다.
빼앗긴 법궤가 있는 곳에 좋지 않는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났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신전에 있는 다곤 신상의 목이 부러지고, 법궤가 모셔진 곳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그러자 겁이 난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수레에 실어 이스라엘로 돌려보내었습니다. 돌아온 법궤는 기브온에 있는 성막에 머물렀습니다. 이후 예루살렘 성전이 완공되고 나서 성막은 성전지하 창고에 보관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주전 587년 예루살렘 성전파괴와 함께 그 성막도 파괴되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루해서 잠을 낳는 성막 이야기를 거듭 읽고 묵상하면서, 섬세함, 정교함, 치밀함, 극진함이라는 단어가 차례대로 떠올랐습니다. 나중에 ‘장인정신’이란 말도 덩달아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대강 넘어가도 될 일을 꼬치꼬치 따져 물으면 ‘까다롭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매우 중요한 것을 까다롭게 다루고 꼼꼼하게 살필 때 그것을 일러 섬세하다, 정교하다, 치밀하다, 극진하다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매우 중요하고 소중한 일을 대충 대충하는 것을 정성이 없다고 말합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우 소중한 성물이었고 작은 규모였지만 귀중한 예배의 터전이었습니다. 풀 한 포기 살지 않는 광야 생활을 선도하는 푯대였고, 희망과 안식의 전당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막을 짓고, 이 성막을 따라 사는데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이 성막 속에는 섬세함, 극진함이 녹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성막을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는 자세가 무엇입니까? 이 성막을 만들 때 요구하셨던 섬세함, 정교함, 치밀함, 극진함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 성도들은 이 정신을 잃어버렸습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하나님 앞에 정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앞에 베스트를 드리지 않습니다. 사람 편의 중심으로 예배도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예배가 인간 편의위주로 바뀌면서 예배의 거룩함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 임재가 초점이 되어야 하는 성전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쪽으로 타락해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뒷전이 되었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 “주시옵소서”만 예배당에 가득합니다.
제가 2001년 2월 1일에 문경 폐광촌으로 첫 담임목회를 나갔습니다. 이곳은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인데 이사 한지 3일째 되던 날, 밤새 눈이 내려 대지를 하얗게 덮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나가기 위해 사택 문을 열고 나서는데 예배당까지 걸어가는 50M 길을 누군가가 깨끗하게 쓸어놓았습니다. 새 길을 밟고 가는 그 기분은 말할 수가 없을 정도로 황홀했습니다. 당시 칠순이 넘으신 권사님 한분이 새벽 3시에 나와 예배당에서 사택까지 눈길을 쓸어놓았습니다. 그날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처음 담임목회를 하는 제게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짧은 거리지만 쓸어놓은 눈길을 걷는 제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섬세함, 정교함, 치밀함, 극진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눈길을 걸으며 “나도 정성을 다해 섬겨야지!” 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겼습니다. 이분은 신학교에서 목회학을 가르치는 교수님보다 더 뛰어난 선생님이셨습니다. 이 권사님은 한 사람의 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섬김과 정성이 무엇이라는 것을 몸으로 가르쳐주신 선생님이었습니다.
또 한번은 농사일을 할 때였습니다. 5천평 땅을 기증받아 감나무 천주를 심는 과수원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책상머리에 앉아서 공부만 하던 제가 고단한 농사일을 하자 몸살이 났습니다. 다음날 새벽기도를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은퇴하신 원로장로님이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50Km 떨어진 예천의 유명한 한의사를 깨워 한약을 지어오셨습니다. 감사기도 드리고 그 약 먹는데 몸으로 느끼는 감사가 제 핏줄에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약 먹지 않아도 몸은 다 낫은 것 같았습니다.
이런 대접 받을 자격이 없는데 하나님 보고 이렇게 정성을 다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 속에만 있던 주의 종이라는 단어가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이분들은 저에게 목회 선생님이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자세가 흩트러졌을 때에 정성을 다하셨던 이분들이 떠올라 허리띠를 다시 한번 졸라메기도 합니다. 지난날 한국교회가 세워질 때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정성을 다했던 분들, 섬세함, 정교함, 치밀함, 극진함으로 섬겼던 분들, 오늘 우리가 이분들의 정신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성막을 세웠던 이스라엘 공동체의 정성이었습니다. 이것은 비단 종교적인 부분에서만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접하고 있는 문물과 세계관은 정확성, 정밀함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반도체칩의 구조는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합니까? 소위 명품이라 불리는 시계와 만년필은 얼마나 섬세하고 정밀한 손길로 만들어졌습니까? 우주선도 설계할 때 생기는 아주 작은 오차와 오류를 무시하면 그 우주선은 다시 돌아오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자신에게 대해 섬세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현재를 속속들이 꿰뚫어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움직임과 자신의 정직한 모습을 볼 때 매일매일 새롭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웃을 향해 섬세해야 합니다. 그러면 인격적인 소통으로 막힌 담을 허물 수 있습니다. 그곳에 공동체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평화가 임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징조를 향해 섬세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사는 이 사회와 국가를 향해 날카로운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의 의무와 책임이 무엇인지 자각하여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섬세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을 달라고 간구하지 않더라도 먼저 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할 것입니다.
성막의 구조와 그 성격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떠오르는 또 다른 단어가 있습니다. “서로 연결하며, 서로 마주 보게 하고”연결이라는 단어입니다. 성막은 수많은 부품들을 조립해서 만든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56개의 받침대 위로 28개의 석가래가 엮여져 있고, 겹으로 짜인 두 장막은 50개의 빗장으로 고정시키는 구조였습니다. 여러 겹으로 포장된 이 성막은 해체와 조립하기에 수월하게 만들어졌습니다. 그것은 운반하고 이동하기에 편리한 구조였습니다. 본문에 ‘...연하여’ ‘연락하여’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이는 성막의 모든 부품들이 한 구조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아울러, 서로 연결된 구조는 12지파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 연합하고 연대하고 있음 보여줍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연합을 의미했습니다.
우리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셉의 후손으로만 구성된 줄로 압니다. 하지만 출애굽 공동체는 요셉의 후손들과 중다한 잡족들이 썩여 있었습니다. 이 잡족들이 하나님의 성막 앞에서 서로 연결되어 하나 되어 갔습니다. 또한 성막 앞에서 남의 나라 종살이 하던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는 민주주의도 배웠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목적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막 중심으로 민족 개념이 생겨났습니다. 관계없는 사람이 관계있는 사람으로 서로 연결되어 갔습니다. 잡족들이 하나님의 성민이 되어 갔습니다. 이것이 성막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이것이 거룩함입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익히 알고 있던 바울은 에베소서의 교회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교회만큼 공통점이 없는 모임이 어디에 있습니까? 남자와 여자, 유대인과 헬라인, 어린아이와 어른,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배우지 못한 자, 주인과 종업원 그야말로 오합지졸입니다. 구약성서의 표현대로 한다면 중다한 잡족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갑니다. 교회는 섬세하게 연결되고, 정밀하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공동체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교회의 약점이 무엇입니까?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습니다. 모래알과 같이 제각각입니다. 개인화 되어 있고, 내면화 되어 있습니다. 서로를 도우면서 자라나야 하는데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자라남이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교회의 기본 원리인 서로 연결되어 하나 되는 공동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성막의 원리는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연결되는 차원을 넘어서 서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연약한 성도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습니다. 가난해서 밥을 먹지 못하면 넉넉한 성도들은 기꺼이 함께 나누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가 있으면 함께 즐거워했습니다. 우는 자가 있으면 함께 울었습니다. 저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로마서 말씀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넉 자로 줄여보았습니다. 함즐함울 우리 갈릴리교회는 함즐함울공동체입니다. 갈릴리교회는 광야같은 이 세상에서 서로 연결되어 함께 즐거워하고, 서로 결합하여 슬픔을 나누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성막의 구조와 그 성격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떠오르는 또 다른 단어는 “움직임과 자라남”입니다. 하나님의 성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동했다는 점입니다. 구름이 성막 위에 있으면 머물고, 구름이 이동하면 구름 따라 행진했습니다. 성막 공동체, 이스라엘 백성,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움직이는 공동체입니다. 결코 자신의 뜻에 고정되거나 세상 가치관에 묶여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동해야 합니다. 움직임을 통해 공동체와 교회는 자라납니다. 죽은 공동체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자라나지도 않습니다. 정해 놓은 교리에 갇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자라남도 잃어버리고 경직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이처럼 성막은 하나님의 뜻을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하나님을 향해 자라나는 역동적인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21세기를 유목의 시대라고 합니다. 과거 어느 시대보다 종횡무진 세상을 가로질러 다닙니다. 초목이 무성한 들판에서 유목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동차를 타고 온 나라를 누비고 다닙니다. 비행기를 타고 전 세계를 다닙니다. 이뿐 아니라 인터넷 접속을 통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온 세계를 눈 앞에서 봅니다. 집과 사무실은 벽으로 막혀 있지만 눈과 머리는 세계를 유랑합니다. 요즘은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과 태블릿으로 길거리에서도 세계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관이 넓어진 만큼 삶의 자리가 불안합니다. 사람이 따라가지 못할 속도로 세상은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경영학자인 피터 드러커는 Next Society라는 책에서 미래사회에서 국가나 기업은 5년 이상의 장기 계획을 세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막의 모래 폭풍이 불어 지형이 한순간에 변하는 것처럼 삶의 터전이 흔들리고 있고, 불안합니다. 이 메마르고 황량한 유목 환경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유랑했던 광야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고단한 유목의 여정 가운데 성막을 통해 임재하시는 하나님이 없을 때 우리는 얼마나 무기력하고, 희망 없으며, 대책 없이 헤매겠습니까?
우리가 광야의 하나님을 향해 민첩하게 이동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방황하며 다니겠습니까? 성막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해 우리의 마음가짐과 신앙이 섬세하고 정교하고 극진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이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변화무쌍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떻게 사명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과 극진한 사랑으로 우리를 보호하는 것처럼 우리의 응답 또한 섬세하고 극진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뒤엎으셨던 예루살렘 성전은 정성을 잃어버렸고, 연결됨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동함을 잃어버렸습니다. 성전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성전세를 받아 로마에 갖다 바치고, 제사장과 상인들이 결탁하여 제물의 가격을 마음대로 정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제사장은 애지중지 길러온 제물을 대부분 불합격 처리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제물은 제사장이 정해주는 성전 앞 가게에 가서 싸게 내다팔고, 새 짐승을 사서 희생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제물의 가격은 당시 시세보다 두 배 혹은 세 배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둘러엎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둘러엎으신 예루살렘 성전은 광야에 세워진 성막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정성을 잃어버렸고, 사람이 주인 되어 민중을 착취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고정되어 자라남을 잃어버렸습니다.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습니다. 이 성전은 망해야 하고 무너져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운 성전이 세워집니다.
성막은 우리 갈릴리교회가 추구하는 공동체의 모델입니다. 그것은 길 위의 성전, 길 위의 교회를 지향합니다. 공고한 지상의 성채를 짓기보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푯대를 향해 순례하는 성막공동체입니다. 섬세하고 정밀하게 연합하는 공동체, 친밀하게 소통하는 공동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세상을 가로질러 전진하는 공동체, 정성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나눔의 공동체, 모두가 주인이 되어 민주적 리더십을 세워나가는 공동체, 우리가 이런 공동체를 바라며 꿈꾸고 또 이를 위해 헌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이런 공동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도 이런 공동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가 물질문명을 이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막 공동체입니다.
사랑하는 갈릴리 가족 여러분!
우리는 성막처럼 섬세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극진함으로 주를 찬미하는 예배공동체를 만들어나가야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성막의 한 부품처럼 서로 연결되고 결합하여 함께 지어져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예민하게 반응하여 자라나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경험하고, 막힌 담이 무너지는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갈릴리 성막공동체를 세워가기를 힘쓰는 성도들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 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막의 4개 덮개
출 26:1-14 / 이상호 목사
겉과 속의 차이가 많아 우리를 실망시키는 그런 경우들이 많습니다. 사람을 보아도 인물이 훤하고 옷맵시도 아주 세련되었는데 속사람이 부실하여 우리들을 실망시키곤 합니다. 겉과 속이 다 좋으면 금상첨화이겠지만 둘 중에 하나만 좋으라면 당연히 속이 좋아야 할 것입니다.
요즘 우리 농산물들을 수송하는 방법들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종이상자에 채소나 과일들을 담아서 출하하곤 하는데, 겉에 표기된 중량과 실제로 잰 중량의 차이가 많이 난다고 최근 한 소비단체에서 조사된 결과를 발표하여 우리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성막의 덮개를 만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4가지의 덮개를 만들라고 하셨는데 가장 안쪽의 덮개는 청색(생명이신 그리스도), 자색(왕되신 그리스도), 홍색(고난 당하신 그리스도), 백색(부활하신 그리스도 모습)의 총천연색으로 천사들을 수놓은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 다음에는 염소털로 짠 세마포로, 세 번째는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 양이나 염소는 가장 많이 쓰여지는 제물, 그러므로 버림받은 그리스도를 의미, 우리는 그리스도의 희생 덕분에 고귀하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해달(돌고래, 물개)의 가죽으로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성막에 덮개를 다 덮어놓으면 마지막 해달의 가죽만 보이게 됩니다. 초라함(이사야 53:2-3). 그러나 그 속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의 상징인 법궤와 성소가 있어 그 존귀함은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성막 안에는 휘황찬란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값진 생명과 권세와 능력이 있습니다.
* 물개는 바닷물에서 살기 때문에 방수 - 성막을 보호했습니다.
ex) 강문호 목사가 캐나다에서 부흥회인도, 1마리 70만원씩 303마리 2억(900명 2달 인건비) 들여서 가져 옴, 세관거치는 진풍경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 당시 사람들은 송아지를 숭상하여 금송아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개가죽 신을 신었고 광야에서 신발 만들려고 물개가죽을 가지고 나왔는데 성막 덮개를 만들기 위해 물개가죽을 모을 때 모두가 하나님께 바치니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셔서 광야 40년 동안 옷과 신발이 헤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덮개를 만들어 성막을 덮도록 하신 주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덮개가 주는 깊은 의미를 이 시간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첫 번째 덮개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이 덮개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덮개는 천연색 실로 짠 것으로 천사의 모양을 수놓은 것입니다.
청색실은 생명이신 주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자색실은 왕으로 오신 주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색은 분명한 신분을 의미합니다. 카톨릭이라면 교황과 대주교만 입을 수 있는 색이고, 감리교회는 감독님만 입을 수 있는 색깔입니다.
홍색실은 왕되신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세상에 오셔서 피흘리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색실은 부활의 주님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4가지의 색으로 만들어진 첫 번째 덮개는 모두가 생명으로 이 땅에 오시고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으나 부활하심으로 모든 이 땅의 사람들에게 소망을 허락하신 주님의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덮개가 주는 의미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합니까? 실상 요즘의 교회들의 모습은 너무나 화려합니다. 지은 지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교인들이 많아졌다는 이유만으로 그 아까운 건물들을 무참히도 헐어버립니다. 얼마나 돈들이 많아서 그런지 모르지만 그것은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기에 충분한 행위입니다. 교회의 모습에 우리는 실망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자기들의 교회를 치장하는 일에는 수없이 많은 돈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참된 모습은 외면에 있지 않습니다. 교회의 참된 모습은 내적인 데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교회의 모습은 힘없는 단체처럼 보입니다. 교회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보면 병든 사람들이 많아요. 힘없는 노인들과 어린이들이 많습니다. 억울하고 배경이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교회를 겉모양만 보고 무시하곤 합니다. 마치 아둘람 동굴에 피난해 있던 다윗에게 환란당한 자들, 억울한 자들, 빚진 자들이 모여들어 다윗을 더욱 힘들게 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윗은 그들을 먹여 살리느라 더욱 힘이 들었습니다. 자기 한 몸 피난살이하기도 힘겨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다윗이 거기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꾸역꾸역 모여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을 헤브론에서 남왕국의 왕이 되게 하시고, 예루살렘에서 통일왕국의 왕이 되게 하셨을 때, 그 다윗의 아둘람 공동체는 통일왕국을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훈련된 공동체로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교회는 정말 힘이 없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만 모여 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단체같이 보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 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교회의 중심이 되시는 줄로 믿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곳에 계셔서 우리와 만나고 우리와 동행하시는 곳이 바로 교회인 줄로 믿습니다. 환란과 핍박을 당했으나 그것을 넉넉히 견디고 승리한 성도들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생명을 걸고 세상을 이긴 자들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에 의해서 세계를 뜨겁게 품에 안는 기도가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겉모양을 보고 평가할 수 없습니다.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로 교회를 정의할 때 보이지 않는 교회, 곧 예수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성도들 그 내면을 보고 평가해야 합니다. 살아있는 성도들, 살아있는 교회의 모습은 바로 거기에서 특징되어질 수 있습니다.
광야에 살던 사람들이 주님이 가르쳐 주신 식양대로 성막을 완성해 놓았을 때 평당 그 건축비가 약 20억 원이 들어간다고 합니다. 성도들의 눈물과 헌신이 성막을 짓는데 얼마나 들어갔는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막은 해달의 가죽으로 덮어놓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볼품이 없어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성막 안에는 우리 하나님께서 좌정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용서가 선포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세 번째 덮개가 주는 의미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성도들의 모습을 평가해 볼 때에 연약한 모습으로 세상은 바라봅니다. 왼뺨 치면 오른뺨 돌려 대라고 그럽니다.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겉옷 빨려면 속옷도 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약한 집단이 어디 있어요? 그래서 레닌이나 마르크스는 기독교를 가리켜 약자의 윤리를 가진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 약하기 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까? 여러분이 약하기 때문에 사랑을 하고, 약하기 때문에 구제를 하고, 약하기 때문에 봉사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교회에서 섬기는 단체에 전달한다고 헌옷 모아달라고 광고하면 입던 것 막 가지고 오면 안됩니다. 입던 것이라도 깨끗이 세탁을 한 뒤 정성껏 다림질하여 최선의 정성을 담아서 전달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일상생활에서부터 성도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더구나 다른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는 그러한 영향력은 전혀 발휘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주의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본향이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세상 것을 가지고 연연하지 않는 소망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것 가지고 아옹다옹하지 않아야 합니다. 물질 가지고 왜 나누지 못하고 삽니까? 넉 달에 한번은 하자는 사랑의 나눔 헌금도 못하고 넘어간다면 없어서 못하는 것보다는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나눌 여유가 없는 거 아닐까요?
오늘 주님은 성막의 덮개를 통해서 성도의 모습을 보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과 우리의 생명을 바꿀 만큼 우리의 존재가 귀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사가 부러워할 만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 소망의 성도들의 모습, 성령이 함께 계시는 거룩한 전이기도 한 이 성도들의 모습,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8절 이하에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약한 자 같으나 강한 자요,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다시 사는 자들"이라고 성도들을 정의하고 있습니다.
생동하는 이 성도의 모습이 다시금 회복하기를 주님은 간절히 소원하십니다. 겹겹이 싸여진 성막의 덮개를 생각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게 하시고, 성도들의 그 올바른 모습을 통해서 영광 받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이 시대의 성도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과연 기뻐하실까? 오늘날 교회의 모습을 우리 주님께서 정말 기뻐하실까?
성막과 4개의 덮개는 그러므로 과거의 일이 아닌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평안의 공동체가 외형적으로만 성장한 모습이 아닌, 내면도 변화의 능력을 소유한 참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 속에 살지만 예수의 사람으로 세상에 살면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나 한 사람이라고 작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나 한 사람이라고 소홀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그 작은 불빛이 연합되어 전체를 밝히는 것처럼, 오늘 우리 세광 공동체를 통해서 땅끝까지 그 불빛을 밝혀야 합니다. 예수의 생명을 소유한 사람들, 그러기에 희생도, 봉사도, 모든 수고도 결코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본향을 소유한 그 넉넉함과 당당한 모습으로 이 땅에서 주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온전한 성도들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막의 덮개
출 26:1-14 / 임덕순 목사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요 언약입니다. 우리는 출애굽기의 성소와 그 기구들이 그리스도의 어떤 면을 보여주는지 관찰하면서 하나님께서 오늘의 우리들에게 주시는 계시를 듣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성소에 들어가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떡 상과 등대에 관하여 배웠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생명의 떡이며,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시면서 사람들이 날마다 그의 말씀을 생명의 양식으로 삼고, 그의 빛 아래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구원을 받아 그의 백성이 된 성도와 교회도 세상에 이 빛을 전해주는 작은 빛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성경에 기록된 순서를 따라서 성막의 겉모습을 이루고 있는 천에 대하여 배우겠습니다. 성막은 텐트로 되어있어서 거룩한 천막이라는 뜻으로 성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텐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햇빛과 비를 막아주는 지붕과 벽을 이루는 천입니다. 하나님은 이 성막의 천은 무엇으로 만들라고 하셨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을까요?
이 덮개는 한 겹이 아니라 네 겹으로 되어있습니다. 아주 특별하지요?
그러니까 천막의 벽과 지붕은 네 겹짜리 텐트입니다. 우리는 이 네 겹의 덮개를 다 살펴볼 것입니다. 이 네 개의 덮개 소재 중에서 안쪽, 즉 실내에서 보이는 것부터 차례차례 살펴보겠습니다.
1. 첫째 덮개 -가는 베실로 짜고 홍색 청색 자색실로 수놓은 열 폭의 휘장.
하나님은 모세에게 가르쳐 주시기를, 장은 28규빗(12미터 반), 광은 4규빗(1.8미터)의 세마포 천을 열 폭(18미터)을 만들어서 천정의 맨 안쪽을 덮개를 삼도록 하셨습니다.
그 열 폭의 천을 우선 다섯 폭씩 연결해서 하나의 큰 천으로 만들고, 그렇게 다섯 폭을 연결한 두 개의 큰 천의 가장자리 폭에 청색 고 50개를 만들어 달고, 금고리 50개로 양폭의 고를 꿰어 이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천의 길이를 따라 약 56센티마다 청색 고 한 개가 달려있어서 두 폭을 잇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두 폭을 이으면 길이는 12미터 반이되고, 너비는 약 18미터나 되는 커다란 천이 됩니다. 이동과 조립에 편리하도록 두 쪽으로 만들게 하시면서 그것을 이어 연결하는 방법까지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모양보다 중요한 각 천의 소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장 안쪽에 위치한 이 수놓은 천은 가늘게 꼰 베실로 짜야했습니다. 요즘 옷감은 70수, 100수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1그램의 양털로 몇 미터의 실을 만들 수 있느냐를 나타내는 수치입니다. 70수라면 1그램의 양털로 실70미터를 뽑아냈다는 것이고, 100수라고 하면 1그램의 양털로 실100미터를 뽑았으니 그만큼 더 가늘다는 뜻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가는 실로 짠 옷일수록 고급이었습니다. 성막의 지붕을 덮는 소재는 아주 가는 베실로 짠 하얀 천인데, 거기에 청색, 홍색, 자색의 실로 정교하게 천사의 모습을 수놓아서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도 매우 중요한 계시들이 들어 있습니다. 성막은 전체나 부분을 막론하고 영원하고 참된 성전 되시는 그리스도를 자세히 계시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① 가늘게 꼰 하얀 베로 만든 천은 완전히 무죄하신 주님의 성결,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의미합니다. 그는 죄인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시지만 죄와 상관없는 분이셨으며, 죄인을 위해서 죽어야 하는 인류의 사죄제물은 그분에게는 죄가 없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막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사죄를 위하여 흠 없는 제물을 준비해 두셨다는 것을 알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② 청색은 하늘색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데, 예수님은 비록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지만 그는 땅에 속한 분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분이시고, 지극히 높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리려는 것입니다. 이후에 선지자들은 그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③ 홍색은 피의 색깔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희생을 의미하는데, 주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능력자이신데도, 날마다 죄만 짓고 자신과 사회를 망가뜨리며 살다가 영원히 망하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인간이 가진 것과 똑 같은 몸을 갖고 오셔서 그 피를 흘리시며 처참한 고난을 당하시고 못박혀 죽으실 것을 예고하기 위해서 홍색 실을 사용하여 천사를 수놓으라 하신 것입니다.
④ 자색은 왕의 색깔입니다. 당시의 왕이나 높은 귀족은 자색 옷을 입었습니다. 사도행전16장에 자주장수 루디아가 등장하는데, 귀족들과 안면을 트고 그들이 필요한 최고급물품을 공급하는 장사꾼이라는 말입니다. 자색은 주님의 존귀하심을 드러내는 색깔로서, 그는 비록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시지만 그분은 본래 존귀하신 왕 중의 왕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에스겔이나 요한계시록 4장에도 보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천사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네 가지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사람 같고, 어떻게 보면 사자 같고, 어떻게 보면 소 같고, 어떻게 보면 독수리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① 사람 모양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인성을 의미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몸은 없이 환상이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기만 했지 실제로 만질 수 는 없었다고 하는 이단들이 들끓었습니다. 그래서 요한1서 4장에는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갖고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라 사단의 사람이니 속지 말라는 경고의 편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시기에 성막의 모양을 통해서 미리 알려주시기를, 그는 실제로 육체를 입고 오시되, 배고프고 피곤하고 졸리는 몸을 입고 오셔서 실제로 가죽 채찍에 죽도록 맞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신다는 것을 계시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실제로 몸을 갖고 온 것이 아니라 환상뿐이었다면, 우리의 속죄는 이루어지지 못했고 환상속의 종교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② 사자 모양은 그리스도의 능력과 주권을 의미합니다. 사자는 백수의 왕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계시합니다. 따라서 그는 누구에게 붙잡혀 할 수없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실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③ 소는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은 그리스도가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어떻게 자기를 희생하셨는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그는 제단에서 사람들을 위해서 죽어주는 송아지 제물처럼 우리 무리의 죄를 당신의 죄인 것처럼 책임을 지고 십자가를 지고 죽어주셨습니다.
④ 독수리는 그리스도의 초월성, 전지성을 말합니다. 독수리는 하늘에 가장 높이 올라가고 가장 먼 데를 볼 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몸을 입기는 하였으나 땅에 속한 분이 아니라 존귀하신 하나님이시며, 인류의 역사를 낱낱이 아시는 전지하신 심판 주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러하신 분께서 우리 대신에 심판을 당해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전 천정을 덮고 있는 하얀 천과 다양한 색깔로 수놓은 정교한 천사의 모습은 성막 밖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다만 안에 들어와야만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의미 깊은 사실입니다. 누구라도 이 아름답고 의미 깊은 모습을 보기 위해서는 성전에 들어와야만 하는데, 성전에 들어오려면 먼저 제단에서 제물을 드리고, 물두멍에서 손을 씻고, 그 다음에는 떡 상을 거쳐야만 되고, 황금등잔 불빛아래에 서야만 비로소 천정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구원의 혜택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의 피로 자기 죄를 씻기 원하여 세례를 받고, 말씀의 양식을 먹으며 계시의 빛 아래 서지 않고서는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그의 은혜와 그분의 영광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같이 별로 잘난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 비밀을 알게 하셨다는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둘째 덮개 - 염소 털로 만든 휘장(7절)
맨 밑의 흰 천으로 짠 휘장은 길이가 28규빗인데 이 염소 털로 짠 휘장은 30 규빗으로 90센티 정도가 길고, 너비는 흰 천으로 짠 것이 4 규빗짜리 열 폭인데 이것은 열 한 폭을 만들라고 한 것으로 보면, 가는 베로 만든 내부의 수놓은 휘장보다는 길이는 90센티 길고, 한 폭이 더 넓은 사이즈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해 주셨는지를 알게 하는 대목입니다. 사람은 아주 잘 한다고 한 일도 언제나 오류가 있고, 항상 수정이 필요합니다. 저자가 책을 한권 내려고 해도, 아무리 오류 없이 쓴다고 하고도 몇 번이나 다시 살펴서 수정하여 출판사에 넘기면, 그 다음에는 교정을 보는 사람이 또 다시 오류를 찾아 고치는데,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씩 하고 출판을 한답니다. 그런데도 출판된 책을 독자가 볼 때에는 또 오류가 나타납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성막을 지으라 하시면서 너무나 완벽하게 설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수정이나 설계변경이 전혀 필요가 없었고, 이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인간구원의 계획은 수정이나 변경이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나 지금이나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뿐입니다.
염소 털로 만든 휘장은 더위와 추위를 막아주는 방한 방서용입니다. 그들이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이 염소털이나 양털인데, 그들은 염소 털을 지금처럼 가늘게 쪼개서 70수, 100수로 실을 만드는 기술이 없기 때문에 당시에 염소 털로 짠 천은 투박하고 두꺼웠습니다. 이 두꺼운 천으로 성막의 지붕과 벽을 뒤덮었기 때문에 성막 안에는 빛이 한 줄도 들어올 수 없었지만 한편 언제나 같은 온도가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열대 사막 한 낮의 온도가 50도가 올라가도 이 두꺼운 염소 털로 짠 휘장 때문에 성소 안은 시원했고, 밤에 10이하로 온도가 내려가도 성소 안에는 따듯했습니다. 이 염소 털로 짠 휘장은 성막 안의 온도를 지켜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염소 털 휘장은 가는 세마포로 짠 아름다운 휘장을 덮어서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바닷물처럼 요동치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날마다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만나고 두려움과 불안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살면서 조금만 좋은 일이 있으면 분수 모르고 교만해지고, 조금 어려운 일이 생기면 지옥에 내려간 듯 절망하면서 그렇게 심리적 안정을 얻지 못한 채 사막기후처럼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환난과 핍박 중에도 희망을 가지고 참아낼 수 있고, 성공과 승리한 가운데서도 겸손하게 주님께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가 죽음 앞에 다다랐을 때에, 우리의 평생에 지은 죄가 불러올 하나님의 심판이 두렵고 떨리지만, 우리를 위해서 대신 형벌을 받아 주신 예수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우리는 절망을 이기고 주님이 준비하신 천국을 바라보고 찬송하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두꺼워서 온도의 변화를 막고 있는 염소 털 휘장이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덮개 -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14)
둘째 덮개인 양의 털이 추위와 더위를 막아서 온도 변화를 조절해 주는데 비하여, 수양의 가죽은 비와 태양을 막는 역할을 합니다. 썩지 않을 것 같은 비닐도 햇빛에 항상 노출되면 얼마 못가서 썩어버립니다. 쇠도 습기에 젖으면 녹이 슬어 부식되고, 유리도 햇빛에 오래 노출되면 삭아버립니다.
사막의 무섭게 내리쬐는 태양과 새벽마다 대지를 뒤덮는 이슬은, 노출되어 있는 모든 것들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성막 안의 기구와 아름다운 가장 안에 있는 휘장은 수양의 가죽으로 보호받고 있어서 아주 안전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마포 휘장과 온도조절용 염소털 휘장을 보호하기 위하여, 태양과 비를 막아내도록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세 번째 덮개를 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사는 우리는 어려운 일들은 수도 없이 당합니다. 질병도 있고 사고도 있고 죽음도 있고 사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무서운 재앙은 우리가 저지른 죄로 인하여 우리가 당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마지막 심판 날에 사람들이 산과 절벽과 바위에게 사정하기를 제발 나에게 무너져주어서 하나님의 두려운 얼굴을 제발 가려달라고 애원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에게 닥쳐올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은 우리가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우리에게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와 모든 형벌을 대신 담당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안에서 평안히 보호를 받게 된다는 것을 쏟아지는 태양 볕을 직접 받는 수양의 가죽으로 계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수양의 가죽은 색깔이 붉은 색이어야 했습니다. 자연 상태의 가죽은 붉은 색깔이 아니므로 붉은 색 물감을 일부러 들였어야 했을 것입니다. 붉은 색도 하나님이 지정하셨는데, 그것은 피의 색깔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그 가죽은 수많은 양들이 죽은 증거입니다. 염소 털은 해마다 자라기 때문에 털을 깎으면 되지만, 수양에게서 가죽을 얻으려면 양이 죽어야만 합니다. 가죽을 얻는 방법은 그 짐승이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아담이 범죄 했을 때, 가죽이 아닌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그들의 부끄러움과 위험을 막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짐승을 죽여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이 우리가 당할 형벌과 수치를 가려줄 희생자를 준비해 주신다는 암시를 이미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되어 인간대신에 형벌을 받아 죽으시고, 그 대가로 우리에게 쏟아질 하나님의 진노를 덮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데, 그 길 밖에는 인류구원의 길이 없다고 성경은 여러 모양으로 계시하셨고 오늘 본문에서는 붉은 물들인 수양이 가죽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막을 덮고 있는 붉은색의 수양의 가죽은, 그 밑에 제사하려고 들어온 죄인들을 덮어주는 그리스도가 만드신 의에 옷의 상징입니다. 히9:22에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도 없느니라.” 이는 변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먼저입니까?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구원의 길을 만들어 달라고 애원해서 그리스도가 오셨습니까? 아닙니다. 죄인들이 하나님을 알지도 못할 때, 그리스도가 먼저 당신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감사하며 헌신의 삶을 사는 것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결과라고 성경은 사랑의 순서까지 밝혀주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도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닥쳐오는 모든 고난과 시험을 가로막고, 온갖 사단의 방해와 재난을 가로막아 주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보호를 받고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께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길을 열어달라고 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자신이 죄인인줄도 알지 못하고 있을 때, 주님이 우리대신 이미 고난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롬5:6,8,10). 털 깎는 자 앞에 서있는 잠잠한 양처럼 우리위해 묵묵히 희생을 당하신 주님의 고난의 대가로,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그리스도의 축복과 구원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가 장래에 누릴 천국의 영광은, 그가 이미 당하신 십자가의 공로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감사해야 합니다.
4. 넷째 덮개 - 해달의 가죽 (14)
해달은 족제비 과의 물짐승으로 길이는 1m 정도이고 부드러운 털을 가진 물짐승입니다. 우리가 새로 갖게 된 새 번역 성경에는 돌고래의 가죽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주석을 달아 놓았습니다. 해달은 좌우간 물짐승 가죽입니다.
여러분이 물개를 보셔서 아시지만 그것은 우중충하고 불그스레한 가죽을 갖고 있는 동물입니다. 보기에 과히 좋지 않은 색깔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것으로 성막의 맨 위 덮개를 덮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 같으면 남들이 보는 겉면을 멋지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 페인트도 사용하고 그림도 그릴 터인데, 하나님은 아무도 볼 수 없는 맨 밑의 텐트에는 정교한 수를 놓으라고 하시고는, 사람들이 다보는 겉은 우중충하게 물개가죽으로 덮으라고 하신 것이 이상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해달의 가죽 때문에 밖에서 이 성막을 볼 때 시시한 건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해달의 가죽은 강한 폭풍우와 모든 것을 구워버릴 것 같은 강렬한 태양빛과 바람과 서리를 담당하며 안에 있는 보배들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보기에 전혀 흠모할 만한 것이 없었던 예수님의 육체를 계시합니다. 주님의 몸은 피곤에 절은 몸이었습니다. 주님은 자주 밤새워 기도하셨으며, 자주 금식하셨으며, 온갖 시기와 증오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자주 위협을 당하셨고 항상 피곤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갈 때, 파도가 몰아쳐 모두가 죽게 되었어도 쿨쿨 주무시기만 하실 만큼 그렇게 피곤하셨습니다. 그런 육체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누가 알아보았겠습니까? 사람들은 그에게 침을 뱉었으며, 꼬챙이를 매단 가죽채찍을 그의 등을 휘갈겼고, 그 고귀하신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씌웠고, 손과 발에는 대못을 사정없이 박았습니다. 그 초라한 모습에 지나가는 행인들마저도 머리를 흔들며 비웃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를 구원할 유일한 구주였고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역사의 심판 주였습니다. 이사야는 “우리 보기에 아무 흠모할만한 것이 없었으나, 그는 태초부터 계신 분이요 전능하신 하나님이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성막 안에는 황금등대가 있고, 먹음직한 떡이 있으며, 황금으로 만든 언약궤도 있건만, 밖에 보이는 모습은 우중충한 모습뿐이어서 그 안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짐작할 수도 없었습니다. 화려하고 웅장하고 멋진 것만 찾는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의 교회가 시시하고 진리가 이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누구에게는 진리를 알게 하시고 누구에게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도록 감추셨다고 말했습니다.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토록 그리스도께 매료되어 사는지 이해를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을 압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네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를 알고 믿는 사람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특권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알 뿐 아니라 그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그분 때문에 죽음 후에도 부활과 천국의 영생을 보장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바쳐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한 것은, 그가 먼저 우리를 이토록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생명 바쳐 그분을 사랑하는 성도가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