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고
the Beast
곤Gon은 몸에 비해 대가리가 너무 크다. 그래서 천천히 움직이다간 자꾸 균형을 잃고 넘어지려고 하는 것이 곤의 문제였고, 그래서 곤은 그 짧은 다리에도 불구하고 항상 엄청난 속도로 이동함으로써 자신의 불균형의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는 짐승이다. 곤의 이러한 특성은 그 강인한 육신과 더불어 곤을 무시무시한 포식자로 만드는 데 일조했으며(활동 영역이 넓다는 것은 그만큼 세력권이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제국의 박물학자들 중에도 상당수가 곤과 오록스가 싸우면 어느 쪽이 우세할 것인가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한 흥미가 지나치게 유치한 것임을 비웃는 것은 차치해 두더라도 순전히 실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러한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곤은 길들여지는 짐승이었지만 오록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였다. 물론 곤을 길들여 오록스를 사냥하러 나선다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아직 그런 시도가 성공했다는 소식은 제국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록스와 비견될 만한 유일한 야수임에도 불구하고 곤은 여러 가지 제약을 가지고 있었다. 우선 파충류가 숙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기온에 따른 행동의 제약을 곤 역시 가지고 있었고 또한 파충류가 흔히들 그렇듯 곤 역시 새끼를 많이 낳는 동물이 아니어서 영장들의 손으로 번식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멍청하거나(사실 사역동물에게 영리함은 그렇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지만) 반항심이 심한 동물은 아니어서 길들여 두면 이동에도 호신에도 좋은 동물이긴 했지만 문제는...
"아아아아아악! 스타바, 젠장, 그만 달려!"
곤은 그 타고난 질주본능 때문에 널따란 평원에 접어들면 아주 가끔이지만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달리곤 했고, 그로 인해 이렇게 기수를 비명지르게 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가람-친은 9월의 쌀쌀한 바람 속에서도 이 정도의 속력을 내는 자신의 곤 - 물류관리업보다는 유통업이 유망하리라 판단하고는 갖고 있던 임대창고를 팔아치운 이천 냥을 싹 털어넣어 가며 이번에 구입한 재산 목록 1호 - 스타바의 폭주를 실감하며 곤이 추운 날씨에는 움츠러든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개소리인지에 대해 궁금해졌다.
'설마 느려진 게 이 정도라는 건 아니겠지?! 확실히 말보다는 빠른데 말이야...!'
사실 지금 스타바는 말의 전력질주 정도의 속력을 내고 있었고 이 정도는 곤에게는 빠른 속력은 아니었지만 평균적인 임프의 신장을 가진 가람-친은 말을 타 볼 기회가 없었기에 이것마저도 지나치게 빠르게 느껴졌다. 스타바는 주인을 그다지 괴롭힐 생각은 없었는지 한 5리 정도 달리다가 속도를 줄이며 멈춰섰다. 그리고 가람-친에게 그 5리는 십리 절반 오리나무라는 말만큼 짧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나마 목적하던 방향에서 그렇게 많이 비껴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숙련된 고너Goner라면 곤이 발광하는 시점에 미리 목적지의 방향으로 머리를 틀어 놨겠지만 젊은 임프 가람-친은 고너 고용비가 아까워서 새로 훈련된 얼치기 곤을 대충 배워서 타고 장삿길을 떠난 전형적인 젊은 임프 봇짐장수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창고주였지만 - 였기에 그냥 빗나간 방향을 어떻게든 수습해서 다시 길을 떠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창고 판 돈으로 곤 따위를 사다니 미친 짓이라고?! 얼간이들! 인생은 도박이라구! 도박! 안정을 도모한답시고 노새나 나귀 타고 터벅터벅 걷다가 대목을 놓치느니 위험해도 이 녀석 타고 날아다니는 게 바람직한 노름꾼의 자세 아니겠나! 앙?!"
아무도 안 듣는 광야에서 가람-친은 그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었고 파충류인 스타바의 청각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기 때문에 곤은 하우더Howdar에 앉은 임프의 바락거림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고 계속 걸었다. 타고난 도박꾼인 임프다운 말이지만, 동시에 거상이 되는 데 성공한 어떤 임프도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말이기도 했다. 도박은 보다 작은 판에서나 거는 것이다. 세월의 손때가 묻지 않은 젊은 그래서 무모한 나이의 임프들은 시도 때도 없이 도박을 하려고 들고 그래서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임프 장사치들과 도박꾼들이 망해나간다. 가람-친도 이렇게 스스로를 위무하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지금쯤 이 곤을 산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바람이 농장을 가로지르고 스타바는 바람을 가로질렀다. 아마 이 농장만 지나면 우란 평원이 나올 것이었고 그러면 목적지까지는 반나절도 남지 않았다. 덜그럭거리는 하우더 안쪽 벽에 몸을 반쯤 잡아매다시피 한 채 가람-친은 머릿속으로 이번 황 털 판매가 성공리에 끝난 후 얻은 이문으로는 무엇을 사들이는 것이 좋을까 고려하기 시작했다. 그 고려의 끝에 가람-친은 황제령 일대의 여러 교역도시들의 주거래 품목 목록을 머릿속에서 모두 뒤진 끝에 다음 물건을 물꽃 꽃가루로 결정하고는 여행을 좀 즐겨 보려는 심산으로 하우더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 그 동안 고삐 풀린 곤이 어디로 달려가든 생각하지도 않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스타바는 한 방향으로 계속 달리고 있었다 - 그리고 벌써 거지반 도착했다는 사실에 혀를 찼다. 쳇, 여행 좀 즐겨 보려고 했는데!
하지만 곤의 머리에서 사다리를 내려 간신히 땅을 딛고 선 - 한나절 내내 곤의 머리 위에서 이리저리 휘둘리다 땅을 딛는 것이라 가람-친은 잠시 휘청거렸다 - 그 앞에서는 물품 생산자의 절망적이다 못해 황당한 선언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 없네."
"뭐라구요?!"
"나한테 황이 없다고."
가람-친은 스타바에게 '물어!'라고 외치면 눈앞에서 배 째라는 투로 대답하는 노인에게 어느 정도 호소가 될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인간, 그것도 노인이 곤의 큼지막한 아가리에 물리면 즉사할 테지만 그것이 살해위협이 아닌 그냥 호소일 수밖에 없는 것은, 우선 '물어!'라고 외쳐 봤자 청력도 안 좋은 곤이 그 소리를 알아듣기는커녕 들을 수도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고, 다른 이유는 이 노인이 그의 친구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친이 몇 년째 관계를 터 온 늙은 황잡이에게 그런 무례하고 폭력적인 생각까지 떠올리게 된 것은 그가 먼저 그에 상당하는 경우를 당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아니, 세상에...
"외길 인생 삼십 년짜리 황잡이한테 황이 없다는 말을 나더러 믿으란 말요, 갤락?!"
"호두가 들어 있으면 맛이야 있겠지만 없다고 해서 호두과자가 쌀과자가 되는 건 아니네."
"... 말도 안 되는 농담따먹기 하러 여기까지 이 놈 타고 뛰어온 거 아니란 말요! 갤락, 도대체 황잡이가 황 안 길들이고 뭐 한 겁니까! 못 보던 새 팍삭 늙어서 무릎에 물이라도 찼소?! 아님, 어디서 횡재라도 해서 이 장사 아싸리 접은 겁니까?!"
늙은 황잡이 갤락은 나무껍질처럼 얼굴을 뒤덮은 주름을 한껏 찡그리며 퍼헛 웃었고 그 웃음에서 스물 먹은 젊은 임프 친구에 대한 멋적음과 더불어 지난 세월이 할퀴고 지나간 그늘까지 발견한 가람-친은 구매자로서의 독촉을 잠시 보류해 두기로 한다.
입을 다문 채 짧은 팔을 단단하게 꼬고 뾰족턱을 치켜든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빤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가람-친을 보며 갤락 노인은 오두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매자가 원하는 물품을 준비하지 못한 생산자는 친절하기라도 해야겠지. 갤락이 오두막 지하 저장고에서 맥주라도 꺼내 대접할 생각임을 아는 가람-친은 여전히 삐친 팔짱과 턱을 풀지 않은 채 그 뒤를 타박거리며 따라갔다. 갤락은 자신의 작달막한 친구가 그러는 모습이 꽤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입 밖에 그런 말 냈다간 바락 성을 내며 곤을 타고 달아나 버릴 테지만.
* * *
갤락이 올해 예순의 노인이었지만 한창때 이 일대에서는 잘 나가던 사냥꾼이었기에 아직 팍삭 늙을 정도는 아니었고 가람-친도 이 황잡이가 쉰네 살의 장년이던 시절부터 그와 거래를 터 왔기에 그런 그를 잘 알고 있는지라 영감 노인네 혼자 사는 집 치고는 지나치리만치 깔끔한 오두막 안의 분위기에 그렇게 당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적막함에는 당황했다.
소가죽에 솜을 넣어 만든 남령식 안락의자에 가람-친이 푸욱 눌러앉자 갤락은 손수 지하 저장고에서 질 좋은 흑맥주와 소시지를 꺼내 왔다. 그러는 사이 가람-친은 집안을 한 바퀴 휘 둘러볼 수 있었다.
벽에 걸린 산양 머리며 오소리 털가죽도 짬짬이 손질을 잘 해서 그대로였고 들어오면서 본 장작 더미는 충분히 쌓여 있었다. 갤락이 머리에 화승총이라도 맞지 않은 다음에야 자기 쓸 장작을 멀리 장터까지 나가서 사 올 리는 없었고 따라서 그것들은 손수 팬 것이 분명하다. 아직까지 남아서 가죽의자를 푸욱 누르면 코끝을 스치며 피어오르는 상쾌한 생나무 향기의 입자들을 봐도 그렇고. 아직 무릎에 물 차지는 않았군. 이 장사 아싸리 접지도 않았고. 구수하고 짙은 농가의 향이 가득하고 먼지 쌓임을 용인하지 않은 바지런한 주인장의 손길도 느껴지는 아늑한 통나무집이다.
하지만 소리가 없다.
사실 없는 것이라면 한 가지 더 있었다. 가람-친은 그 동작에 약간의 씁쓸함과 거부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려 창가에 놓인 뮤Mew를 바라보았다. 갤락의 말이 사실이었는지 뮤 바닥에는 황 털이라곤 먹고 죽을래도 없을 만치 깨끗했다. 오동나무가 아니면 홰를 치지 않는 황의 특성상 황 용 뮤에는 오동나무 줄기를 꺾어다 횃대로 삼는다. 몇 년을 들르지 않았지만 가람-친은 그 횃대에 앉아 털을 고르고 있는 어리고 고운 황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황의 이름도...
"뭣 하나?"
따스한 하지만 서글픈 느낌이 조금 드는 목소리에 가람-친은 자신이 뮤가 아니라 오소리 가죽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노인은 큼지막한 뿔잔 두 개를 한 손에 하나씩 들고 흰 소세지 두름을 허리에 찬 채 가람-친이 바라보는 뮤 쪽을 보고 있었다. 가람-친은 짧은 팔을 홱 뻗어 노인이 내민 뿔잔을 악질 채무자한테서 보증서 뜯어내듯이 낚아챘다.
"... 진짜로 황 안 키우는 모양인가 보네...! 아니, 무슨 첫사랑 잃은 낭만파 소년도 아니고, 황잡이가 일편단심이라니 그게 무슨 주정뱅이 농담도 아니고 말요! 도대체 황도 없이 뭐 해먹고 사오?!"
"뭐 하긴. 사냥꾼이 짐승 잡아 팔아먹고 사는 것밖에 더 하나."
황 얹은 황잡이는 매 얹은 매잡이와는 완전히 다르다. 황을 부리는 데는 사냥꾼의 대단한 재능과 노력, 그리고 타고난 황과의 교감이 필요하기에 황잡이가 되기 위해서는 숙련된 사냥꾼이 되는 짓은 포기해야 했고 그래서 황 없는 황잡이는 얼치기 사냥꾼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다. 황 털 장사로 주황성에서 창고 한 동을 통째로 살 만한 재산을 모은 가람-친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러고 보니 갤락이 든 뿔잔에도 금이 갔고 노친네 옷차림부터 영 허술하다. 아마 저장고에 같이 내려가자고 하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일 게다. 보여줄 게 없어서겠지. 얼마 남잖은 양식, 나 같은 것도 꼴에 손님이라고 대접하느라 내온 건가, 영감. 임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보쇼, 갤락! 얘기나 좀 들어봅시다...! 대체 왜 이러고 사오?! 영감이 솔롱고를 아낀 건 아는데...! 황 한두 번 키우고 한두 번 떠나보내 보오?! 원래 그런 게 황 아니냐구요?! 왜 이리 지지리 궁상이시오?! 뽀다구 안 나게...!"
갤락은 대답 대신 쇠뿔을 깎아 만든 파이프를 꺼냈다. 노인네, 그래도 담배 살 돈은 있나 보네. 가람-친은 오랫동안 털어놓지 못한 얘기가 자기 앞에 보따리를 끌르게 될 것을 얼추 짐작하고 흑맥주를 한 모금 더 홀짝했다.
"그 아이 이름을 솔롱고라고 짓는 게 아니었네..."
딸아이 말일까, 황 말일까. 홀아비 갤락은 열두 살로 죽은 딸의 이름을 따서 새로 따 온 황란의 이름을 붙이며 키웠고, 깨어난 황은 그 이름의 원 주인이 되돌아온 것마냥 갤락을 잘 따랐다. 노랗고 하늘거리는 날개 밑에서 낭창낭창하게 건들거리는 황의 까맣고 긴 꽁지깃에서 갤락은 죽은 딸의 검은 댕기머리를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사실 까만 꽁지깃을 한 황은 흔한 편이었지만 가람-친은 그렇다고 그 황잡이를 특별히 감상적이라고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봉에게 잃은 딸의 모습을 황에게서 찾는 것은 비난할 만 하다기보다는 슬픈 일이다.
"인명은 재천이요, 영감...! 그러게 떠난 아이처럼 떠날 황한테 뭐 그리 정을 줬소 그래?!"
떠날 아이였기에 그랬겠지.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가람-친은 갤락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친구니까.
황은 봉을 만나면 그를 쫓아갈 수밖에 없는 짐승이다. 봉과 황이 한 종의 암수라는 것은 태미드의 오록스가 소과인지 아닌지, 북령의 곤이 도마뱀과인지 아닌지, 칼레도네아 에스타스의 흰수리가 수리과인지 아닌지와 더불어 제국의 박물학자들을 가장 괴롭히는 분류학적 난제 중 하나였다. 도대체 크기, 색깔, 생태 모두 그렇게 다를 수가 없는 - 우선 황잡이의 팔뚝에 앉을 수 있는 크기인 황과 갤락의 오두막만한 덩치를 한 봉 사이에서는 짝짓기란 것부터가 불가능하고 - 짐승들을 한 종으로 분류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발견된 모든 봉은 수컷이었고 모든 황은 암컷이었다. 그리고 모든 황은 봉을 만나 따라다니다가 어느 날 떨어져나와 홀로 나무에 알을 낳고 죽는다.
봉은 그저 먹이를 구하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뿐 황을 부르기 위해 어떤 구애행위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을 찾아온 황에게 봉이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그저 곁에서 날아다니게 둘 뿐. 하지만 그런 봉의 주변에는 적어도 수십, 많게는 수천에 달하는 황이 날아다닌다. 성격이 난폭한 봉은 오히려 너무 치근덕대거나 달라붙는 황이 있으면 화를 내며 그 황을 쪼거나 날개로 쳐내버리기도 하며 그렇게 맞아 죽는 황 역시 많았다.
숲에 놀러 갔다가 봉에게 쪼여 죽은 갤락의 외동딸 솔롱고는 봉이 그렇게 난폭한 동물인 줄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딴 황 역시 그렇게 어느 날 먼 하늘에 나타나 숲 깊숙한 곳에 잠시 머문 봉을 따라갔다.
"솔롱고, 무지개라는 뜻이라고 했었소?! 예쁜 이름이네! 이름 짓는 솜씨로 봐선 무뚝뚝한 노인네가 지은 건 아닐 테고?!"
"아내가 지었다네."
아는 사실을 묻는 것은 화제를 덜 우울한 쪽으로 돌리기 위함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가람-친의 패착이었다. 젠장, 하필 산후조리 잘못해서 죽은 여편네가 지었을 줄이야.
팔자 기구한 영감탱이 같으니. 임프는 인상을 찌푸리며 흰 소시지를 한 입 베어물고 흑맥주를 머금었다. 할 말이 없어서였다. 흠, 아무래도 아까 이름 잘못 지었다고 후회한 건 황의 이름을 딸 이름 따서 지은 것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마땅히 시선 두기가 뭐해서 탁자 대용으로 쓰는 반쪽짜리 참나무통 위에 놓인 잡동사니들을 대충 훑어보던 가람-친은 그 사이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어, 이거 시치미네...?! 황잡이 일 아예 접을 생각은 안 했나 보군?!"
먹던 소시지 조각을 튀겨가며 반가운 듯이 외치던 가람-친은 짐짓 유쾌한 미소를 띠며 갤락을 싱글싱글 쳐다보았다. 시치미, 길들여진 매나 황의 날갯죽지에 다는 일종의 이름표다. 비뚤비뚤한 글씨로 '갤락' 이라고만 쓰여 있는.
황잡이는 한 번에 한 마리의 황만 길들일 수 있고 - 황과 황잡이의 관계는 단순한 사육이 아닌 강한 정신적 결속이기 때문이다 - 봉이 나타나면 황잡이는 황을 불러들여 시치미를 떼고 날려보내 준 다음 달포나 지난 후 숲으로 가 봉을 만난 황들이 뿌린 황란을 거둬들여 새로 부화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안 버렸다니 다행이군. 사실 가람-친에게는 알고 지낸 다른 황잡이들도 많았고 곤 역시 남령 곳곳에 산재해 있는 황잡이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 털을 공수해 오는 데 필요했기 때문에 구입한 짐승이었다. 그래서 노인네 남은 여생 놀고 먹으며 적당히 살겠다면 굳이 '어여 황 잡아서 털 내놓으쇼!'를 외치며 일을 강요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늙은 황잡이가 다시 일을 시작하는 꼴이 보고 싶었다. 첫사랑 못 잊으며 평생 혼자 살겠다고 억지를 쓰는 청년 같은 꼴은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기에.
어쩌겠는가. 안 죽고 남은 놈은 살아야지.
"시치미는 뗐지만..."
갤락이 허허로운 미소를 지었다.
"단장고는 아직 하나 남았다네."
"단장고?! 그게 뭐였더라...! 아! 그 반짝반짝하는 거!"
"그래, 꽁지깃에 장식으로 달아 주는 거. 자네 저번에 와서 그거 치렁치렁거리는 거 무겁지 않냐고 물었었지? 난 그래서 이것 백 개보다 털 한 뭉치가 더 무거울 거라고 대답해 줬고."
황의 털은 그만큼 무겁다. 새의 깃털이 몸을 띄우기 위해 양력을 얻는 수단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불가사의한 일이었지만 황은 어떤 새보다도 빠르고 날렵하게 날아다닌다. 게다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깃털로 몸을 뒤덮고 있는 황의 무게는 도저히 사람 어깨에 얹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닐 터였지만 황을 어깨에 얹은 황잡이들은 그만큼 가벼운 것도 세상에 또 없다고들 말한다. 그런 신비한 특성 때문에 여러 가지의 요술 물품 재료로 사용되는 것이기도 했지만.
알록달록한 단장고, 매의 경우에는 색실로 엮어 만든 노리개를 달지만 무거운 것들을 달아도 무방한 황에게는 황잡이의 취향에 따라 다양한 모양을 꾸며서 준다. 갤락은 잡동사니를 뒤적여 자신이 손수 만든 단장고들을 꺼내 보였다. 근처 개울에서 가끔 나오는 색돌을 추려 구멍을 뚫어 꿴 것들이다. 빨간 것, 노란 것, 푸르스름한 것.
"제일 예쁜 것 한 개는 차마 떼 주지 못했지. 녀석이 봉 냄새를 맡더니 뮤에 갇힌 채 하도 나가려고 난리를 쳐서 대충 떼어 내 주다 보니... 아냐, 이것도 다 핑계일 게야. 아마 시치미도 떼면서 그것까지 떼어 버리고 나면 녀석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테니까..."
감상적인 노친네 같으니. 가람-친은 두름에서 풀어 놓은 소시지가 다 떨어졌음을 깨달았지만 갤락더러 허리춤에서 소시지 하나 더 풀어 내놓으라는 말을 할 수 없는 시점이라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떠난 지 얼마나 됐소?"
"이 년이 조금 못 된 것 같으이..."
에라, 꼴 보니 이 노친네 여생에 황란 또 따 오기는 그른 거 같다. 아무래도 적당히 말벗이나 해 주고 하룻밤 묵어가며 쉰 다음 내일 아침에 곤 타고 딴 동네 알아봐야 할 듯하다고 가람-친은 생각했다. 갤락은 파이프를 다 피웠는지 재를 떨었다. 임프는 그닥 넓지는 않은 오두막 안에 담배연기가 자욱한 것을 보고 가죽의자 뒤편에 달린 들창을 조금 열었다.
9월, 가을 오후의 먼지는 그렇게 둘의 위로 쌓이고 있었다.
* * *
갤락은 근처 농장에서 하루갈이 밭뙈기를 헐값에 얻어 채마밭을 일구고 사는 모양이었다. 벽에 걸린 화승총이 손질이 잘 돼 있길래 가람-친은 그것이 아직 쓰는 것인 줄 알았는데 사실 마지막으로 어깨에 메고 나간 지도 한 해가 넘었다고 했다. 화승총도 오소리 가죽도 산양 머리도 모두 지난 추억을 박제해 잘 손질한 후 벽에 걸어놓은 것일 뿐 생기라곤 없었다. 빈 뮤 안에 비스듬이 세워진 말라서 약간 비틀어진 오동 횃대처럼.
밤의 오두막 안에서 나는 소리라곤 예순 먹은 갤락의 밭은기침 뿐이다. 쿨럭, 쿨럭. 바깥에서는 사슬로 매어 둔 스타바가 갤락이 농장에서 얻어와 내 준 염소를 뼈째 우적우적 씹어먹는 소리가 들린다. 우드득, 와드득. 가끔 그르륵 하고 트림 비슷한 소리까지 낸다. 요란하지는 않지만, 끊임없다. 너럭바위로 된 돌산 말고는 근처 사방이 온통 평원과 삼나무 숲뿐인지라 바람은 사방에서 불었다. 그 바람 소리는 자꾸만 도시 생활에 익숙한 가람-친의 숙면을 방해했고 그는 자꾸만 뒤척거렸다. 손님에게 침대를 내주고 자기는 가죽의자에 모포 덮고 자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노인네 덕에 잠자리는 편안했지만 단칸 오두막 맞은편에서 들리는 잔기침 소리, 창 밖에서 와드득거리며 염소를 씹어먹는 곤의 그르륵거리는 소리, 오두막 전체를 징처럼 흐느끼게 하는 바람의 울림 같은 것은 그에게 지나치게 생경했다.
툭, 투툭. 하고 유리창 밖에서 돌멩이가 창유리를 툭툭 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맙소사, 잔돌까지 날아다니는 건가. 대단한 바람이군. 투툭, 툭. 웅웅. 쿨럭, 쿨럭. 그르르르륵. 크지는 않지만 자잘하고 끊임없는 소음들은 노파의 웅얼거림처럼 가람-친의 신경을 건드렸다. 사실 여느 때라면 그런 소리들은 온종일 곤을 달려 온 초보 고너에게는 오히려 자장가처럼 작용했을 테지만 그냥 잠들기엔 이 밤을 구슬피 우는 도로록 하는 울음소리는 너무도 아름다웠다... 뭐?
벌떡! 하는 소리는 터져나오지 않았다. 그런 소리는 없으니까. 하지만 오두막의 양 맞은편에서 각각 침대와 가죽의자에 누워 자고 있던 임프와 인간은 서로에게서 그런 소음을 들은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며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상대방을 바라보며 자신이 들은 소리가 잘못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갖게 된다. "자네도 들었나?"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이런 식의 확인이 필요하다. "거기 창 밖이요!" 곧바로 갤락은 가죽의자에서 몸을 젖혀 등받이 뒤켠의 창문에 얼굴을 바싹 붙였고 곧이어 후다닥 달려온 가람-친이 그 옆에 얼굴을 붙였다. 바로 홱 열어젖히지 않은 것은 우란 평원에서의 오랜 독신 생활을 통해 체득된 조심성에서였을 테지만, 노인의 손은 금방이라도 창문을 열고 싶다는 듯 창턱을 바스러져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둘은 먼지가 가득 낀 창문 너머, 그들의 얼굴 바로 앞에서 흐린 달빛 아래 길게 늘어진 풍성하고 길다란 깃털 가닥들의 실루엣이 하늘거리고 있음을 확인했다. 톡, 토톡 하는 소리는 거기 매달린 딱딱한 무언가가 바람에 흔들리면서 창유리를 건드려 내는 소리였고 그들의 머리 조금 위에서 아까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도로록... 도록, 도로로로록... 이런 울음소리를 내는 새는 한 가지 뿐이다.
"갤락...?!"
갤락은 대답하지 않고 바로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그리고 가람-친이 창문 안쪽에서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창틀 위쪽에 몸을 얹은 채 축 늘어진 황을 안고 들어왔다. 스스로 몸을 추스리지 않을 때 황의 몸은 엄청나게 무겁다. 죽은 황의 무게는 장사 소리를 듣는 낭인도 두 마리를 들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갤락은 늘어진 황의 몸을 어깨에 얹은 채 문을 거의 박차다시피 하면서 오두막 안으로 뛰어들어와 바닥에 황을 내려놓았다. 가람-친은 순발력 좋은 임프답게 잡동사니를 뒤져 램프를 꺼내어 촛불로 불을 붙였다.
머리 한쪽과 왼쪽 날개죽지가 반쯤 함몰된 채 바닥에 쓰러져 헐떡거리는 황의, 피투성이의 노란 깃털이 그들 앞에 드러났다. 가람-친은 헛바람을 삼키며 송곳니를 맞부딪쳤고 갤락은 무릎에 힘이 빠져나가는 듯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 왼쪽 무릎 앞에 맥없이 하늘거리던 꽁지깃 한 가닥이 길게 드리워졌고 그 끝에 달린 둥그스름한 비취 단장고를 확인하는 순간 갤락은 비명을 질렀다.
"솔롱고!"
가람-친이 애써 아니라고, 아닐 거라고 속으로 외치던 것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갤락은 바닥에 늘어진 솔롱고를 끌어안고 울부짖고 싶은 듯했지만 그러기에 솔롱고의 상처는 너무 컸다. 어느 새 한쪽으로 쪼르르 달려간 가람-친은 방구석에 놓인 화덕 위에 양철 대야를 얹고 그 위에 물을 붓더니 고개도 안 돌리고 갤락에게 외쳤다.
"영감! 수건, 수건 어딨어?! 멍하니 섰지 말고 빨리 적당한 천조각이라도 하나 가져와요! 거기 멍하니 서 있으면 숨 넘어가는 애가 도로 살아나기라도 합니까?!"
갤락은 멍한 상태로 술통 탁자 구석에서 마른 걸레 비슷한 천조각을 가져다 주었고 가람-친은 그것을 홱 나꿔채 더운 물에 담갔다. 곧이어 성마른 임프의 신경질적인 고함이 이어졌다.
"고약! 이 빌어먹을 놈의 집구석에는 고약 같은 것도 하나 없나?! 아, 잠깐만, 불 보고 있어요! 내 짐에 약초 있으니까 가져올게요!"
가람-친은 스타바의 등에 지운 짐을 뒤지러 후다닥 뛰쳐나갔다.
그렇게 황은 쓰러져 헐떡거렸고 임프는 법석을 떨었고 인간은 충격으로 멍해진 채로 가을밤의 남은 부분을 보냈다. 박살난 부위의 깃털을 뜯어내고 맨살의 피고름과 먼지를 뜨거운 물로 닦아낸 후 약초 가루를 졸여서 만든 임시변통의 연고를 바르는 등 가람-친이 행한 갖은 응급처치와 그 곁에서 반쯤 주저앉은 채 갤락이 내뱉던 넋나간 신음과 한숨, 뜻 모를 웅얼거림과 바닥에서 더 이상 울음소리도 못 내면서 눈을 가로로 감고 부리만 뻐끔거리는 솔롱고의 주억거림이 계속되던 밤이 지나고 별 의미 없는 새벽이 다가올 무렵, 솔롱고가 눈을 번쩍 뜨고 고개를 바로 들었다. 갤락의 눈도 덩달아 번쩍 떠졌다. 회복의 기미라고 생각한 모양이었지만 지난 밤 내내 솔롱고의 상태를 봐 온 가람-친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이건 회광반조야. 차마 갤락 앞에서는 꺼낼 수 없는 말이었지만 가람-친의 추측은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몸은 여전히 바닥에 널부러진 채 찌그러진 머리를 간신히 들어 고개만 조금 갸웃하면서 솔롱고는 부리를 열었다.
"도로로로로로..."
가람-친의 예상이 옳았다. 황의 고개가 홱 제껴지고 눈에 흰자가 드러났다. 마지막 울음을 남기고 황은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 * *
어지간한 맹수는 황을 해칠 수 없다. 네발짐승은 황의 빠른 비행을 애당초 따라잡을 수조차 없었을 뿐더러 토끼의 등뼈를 부러뜨리는 급강하와 날카롭고 억센 발톱을 가진 독수리조차도 황에게는 별 위협이 되지 못했는데, 황의 육중한 몸에 급강하 정도로는 충격을 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 신체적 능력 때문이다. 황의 부리는 육지거북의 등딱지를 깨고 그 속살을 파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억세고 튼튼하며 그 발가락의 힘 역시 사냥한 노루를 쥐고 이럭저럭 날아오를 수 있을 만큼 강하다. 자연 상태에서 황의 천적은 없었다.
봉만 제외하면.
타박, 타박. 더 이상 황잡이가 아닌 늙은 사냥꾼이 새벽의 삼나무 숲을 걷는다.
솔롱고를 묻고 나서 하루가 지났다. 황의 털을 사러 온 가람-친이었지만 차마 솔롱고의 털을 어찌하자고 말을 꺼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갤락에게 대충 뭔가 어울리지도 않는 위로의 말을 몇 마디 건네려다 여의치 않자 그냥 곤을 타고 떠나 버렸다. 녀석은 정이 많아서 글렀어.
나도 별 나을 건 없군. 갤락은 헛웃음을 지으며 어깨에 멘 화승총을 추스렸다.
푹 눌러쓴 너구리 털가죽 모자며 허리춤에 찬 남날개가 잘랑거린다. 집구석에서 굴러다니던 탄환 몇 개를 찾아냈다. 많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마 두 번째 총알은 장전할 시간도 없겠지. 가을이라 화약이 말라 있는 것이 다행이다. 얼마 전까지 손질했기에 아직은 쓸만한 화승총도.
한 발에 끝내야 한다.
사실은, 못 끝내도 별 상관은 없었다. 두 솔롱고가 뒤뜰에 묻혀 있는 집에서 더 이상 살 여력도, 그 집을 떠나서 다시 어딘가로 흘러다니며 여생을 유지할 마음도 없었다. 이 한 발에 미련이고 슬픔이고 모두 담아 적에게 쏘아붙이고 끝낼 생각이었다.
용서할 수 없는 솔롱고의 짝에게.
"돌보지도 않을 것을 꼬셔 사라지기만 하는 못된 것들."
몇 달째 삼나무 숲의 숲지기는 숲의 특정 장소에 친 금줄을 풀지 않았다. 봉이 꽤 오래 눌러앉은 모양이었다. 사실 봉이 살고 있는 숲이라면 이미 산짐승들은 슬금슬금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지도 꽤 되었을 터였고, 거기까지 들어갈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터였다. 그러니까 16년 전의 갤락의 어린 딸, 솔롱고 같은 녀석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터였다.
갤락은 다시금 급습한 옛 추억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제법 쌀쌀해진 9월 말의 새벽 공기는 한숨에 입김을 달아 설움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 준다. 설움 가득한 생을 그만 정리하러 가는 자살자의 발걸음으로 갤락은 금줄을 걷어넘기고 안으로 들어갔다.
놈이 있을 곳은 뻔했다. 집채만한 봉과 수백 마리의 황이 모여 있을 수 있는 공터. 이 근방에서 한평생을 살아 온 토박이 갤락이 그런 장소를 짐작치 못할 리가 없다. 만한 계곡의 밑바닥. 역시 예상대로였다. 거대한 거북의 등딱지가 어스름 속에 번들거리는 것이 보인다. 언덕 꼭대기에 엎드려 허리춤에서 남날개를 끌러 늘어놓는다. 화약과 탄환을 담는 그릇 두 개. 다리를 비스듬히 벌리고 두 손으로는 총을 끌어안는다. 아내와 딸과 황을 끌어안을 때처럼 따스한 손길이다. 불쏘시개를 모으고 부시를 부딪쳐 불씨를 만들어 피워 두며 조심스럽게 죽음을 준비한다. 하지만 등딱지에서 나오지도 않은 봉을 쏠 수는 없다. 봉의 등껍질이라면 총탄이 아니라 이 높이에서 굴려 떨어뜨린 바위를 맞는다 해도 멀쩡할 것이다.
기다리자. 황 없는 황잡이라 얼치기 사냥꾼이지만 기다리는 데는 도가 터 있었다.
그렇게 불씨를 살려 가며 기다린 반 시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어느 새 떠오른 햇살이 계곡 위를 비추기 시작한 것을 발견한 황들이 아침 맞은 수탉처럼 요란하게 도로록거리며 울어젖혔다. 봉은 이 소리에 잠을 깨곤 한다. 도로록, 도로로로록. 어젯밤에 죽어 버린 솔롱고의 울음이 생각나 자꾸 부질없는 눈물이 속눈썹에 맺힌 이슬에 섞여든다.
등딱지가 크게 꿈틀하면서 시커먼 것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이 봉의 대가리임을 확인하자 그 눈물은 몇 번 깜짝임에 사라졌다. 겨냥에 방해가 되니까. 화승을 불씨에 가져다댄다. 스팍. 지지지직.
봉은 고개를 내밀고 눈을 몇 번 꿈벅이더니 천천히 등딱지 밑에서 날개를 꺼내어 폈다. 이제 홰를 치러 날아오를 것이다. 그 전에 맞추어야 한다. 머리를. 화승이 타들어간다. 방아쇠를 젖힌다. 끼릭.
타앙.
맞긴 맞은 모양이었지만 갤락의 바람대로 미간을 맞추어 봉이 즉사하지는 않았다. 대신 봉은 미친 듯이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봉의 날개짓에 애꿎은 황 몇이 치어 후드득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갤락의 마음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이 놈이 이렇게 늦게 올라올 줄 알았더라면 한 발 더 장전할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을 뿐. 곧 봉의 성난 눈이 갤락의 눈과 마주쳤다. 갤락은 그 눈이 자신의 것만큼 불타고 있다고 생각했다.
봉이 크게 홰를 치면서 펄럭 하고 떠올랐다. 저 덩치가 떠오르다니. 봉의 깃털이 황의 것처럼 무겁다면 저 덩치에 달려 있을 깃털의 무게는 상상하기도 힘들 정도일 것이다. 그 무시무시한 발에 짓밟힌 채 부리로 머리를 쪼여 목이 거의 몸에서 분리되어 나가다시피 했던 자신의 딸 솔롱고를 떠올리자 치밀어오른 오랜 분노에 두려움 같은 것은 들지도 않았다. 그래, 와라! 갤락은 가슴을 펴고 외치고 싶었다. "아르르르륵!" 격노한 봉의 고함이 계곡을 울렸다. 봉은 그대로 계곡을 기어올라오다시피 하며 언덕배기를 타고 갤락에게로 덮쳐들었다. 갤락은 피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봉의 거대한 몸이 옆으로 격렬하게 처박혔다. 쿠우웅!
갤락은 어안이 벙벙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그의 눈앞으로 쇄도하던 봉은 마치 거인의 망치에 맞아 땅에 못박힌 듯 충격을 받아 일어나지도 못한 채 버둥거리고 있었고 그 목은 거의 구겨진 것에 가까운 각도로 땅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그 목에 거인이 박은 못처럼 매달려 악착같이 발버둥치고 있는 것은...
"곤?"
어디선가 달려온 곤이 그 무지막지한 힘으로 봉의 목을 물고 땅에 메다꽂은 것이라는 사실을 갤락이 채 다 깨닫기도 전에 바로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감, 총은 이럴 때 쏴야지!"
갤락은 옆을 돌아보았다. 그의 키보다 머리 두 개 낮은 곳에서 가람-친의 씩 웃는 얼굴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갤락은 잠깐 고개를 절레절레하고는, 이내 굳은 표정을 지으며 곤에게 물려 꼼짝못하고 있는 봉의 머리를 향해 화승총을 겨누고 총탄을 장전했다.
타앙.
사방을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수백 마리 황의 날개짓 속에 봉이 거꾸러졌다.
* * *
"그 후로 그 일대에서는 황란이 열리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이 할애비 얘기는 여기까지다...!"
가람-친은 코담배를 콧구멍에 틀어넣고는 우엣취 하는 재채기를 했다. 그의 손자들은 임프답게 찌그러진 눈망울을 반짝거리며 그의 무릎팍에서 할아버지의 옛날 이야기를 듣는 데 여념이 없었다. 옆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은근슬쩍 이야기를 경청하던 며느리가 물었다.
"그럼 그 이후 갤락 씨는 어떻게 되었나요?!"
"글쎄다...! 언젠가 죽었다는 말을 듣기는 했는데, 그 때쯤 일이 바빠서 장례식엔 못 가봤더랬지! 쩝, 그 날 황 몇 마리 더 잡아서 털 팔아먹었으면 대박 낼 수 있었을 텐데, 그 생각을 못 했단 말이다!"
시아비의 투덜거림을 귓등으로 흘리며 며느리는 웃었다. 봉을 잡은 사냥꾼으로 유명해진 가람-친은 죽은 봉을 주황성 요술사 협회에 팔아 큰 돈을 벌 수 있었고 그야말로 봉 잡은 격이 된 가람-친은 이후 고너들을 대규모로 고용해 회사를 차려 유통업계의 전설적인 거상이 되었다. 갤락은 가람-친이 사례 겸 해서 내민 거액을 마다하고 얼마간의 생계비만을 얻어내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때의 갤락만큼 늙은 가람-친이 기침을 쿨럭거리며 얘기를 맺었다.
"그러니까, 이 놈의 자식들아! 좋은 일을 하면 이 할애비처럼 복을 받는다 이거야! 알겠냐?! 에, 이게 오늘의 교훈이야! 알아먹었지?! 앙?"
며느리와 손자들은 그저 웃었다. 가람-친은 그대로 잠이나 자겠다는 듯 안락의자에 몸을 누이려다 뭔가 생각났다는 듯 품을 뒤졌다. 거기서 비취로 만든 노리개를 꺼낸 늙은 임프는 손자들에게 그것을 보여 주었다. 눈치빠른 손자녀석 하나가 환성을 질렀다.
"와! 그게 얘기하신 그 단장고에요?! 예쁘게 생겼네?! 어떻게 받아왔어요?!"
"글쎄다...! 노인네 이젠 필요없다며 나한테 주더군! 거 이젠 유품이 됐지만...! 얘, 아가! 이것 좀 찬장에 넣어 두고 오거라!"
며느리는 시아비에게서 비취 옥돌 노리개를 받아들어 찬장에 넣었다. 사실, 그 찬장 한가운데 장식처럼 내걸린 낡은 화승총의 사연에 대해서도 며느리는 알고 있었다. 벌써 몇 번을 들은 이야기이니까. 가람-친은 자신이 일곱 번째 이 이야기를 했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코담배곽을 만지작거리며 잠에 빠질 뿐이었다.
음, 몇 가지 단어설명이 필요할 것도 같네요.
단장고 : 사냥매의 몸에 달아 주는 장식용 매듭입니다. 단장하는 고(매듭)를 말합니다.
남날개 : 사냥꾼이 총알과 화약을 담는 그릇입니다.
뮤Mew : 사냥매가 털갈이를 할 때 넣어주는 매장입니다.
솔롱고 : 몽골어로 '무지개'라는 뜻입니다. 사족이지만 몽골에서는 우리 나라를 '솔롱고스'라고 부릅니다.
스타바 : 김상현 님의 <탐그루>에 나오던 수르카의 뮤 이름입니다;;;
곤Gon : 제가 좋아하는 만화 주인공 공룡입니다;;;;;;
갤락 : 마계마인전 로도스의 성기사 편인가에 잠깐 등장하던 용병 이름입니다. 닉네임 '푸르게 흐르는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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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B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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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 참 따뜻한 이야기네요. 봉과 황의 관계가 인상깊습니다.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