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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한겨레 21의 경거망동,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
<진짜고대사>
낙랑군은 하북성 북경에 있었다.
글쓴이 : 김 봉 렬/『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한겨레 21>은 지난 6월 21일자 기사에서 국조 단군의 초상화와 민족의 성지인 백두산 사진을 표지에 내세워놓고 ‘사이비역사학의 역습’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리고 편집장 길윤형은 ‘국뽕 3각연대’라는 칼럼을 통해 정치인들과 역사학자는 물론 독립운동가 후손들까지 공개적으로 모독하고, 조롱했다. 최근에는 <진짜 고대사>라는 제목으로 강단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을 역사적 사실인양 기사화 하고 있다. 엊그제 8월 9일자에는 자칭 ‘젊은역사학자 모임 연구자’라는 기경량의 “낙랑군은 평양에 있었다.”는 글을 실었다. 한겨레의 친일․매국행위가 도를 넘고 있다. 기경량의 글을 반박한다.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3995.html 참조 |
사료 몰이해로 엉뚱한 주장을 하는 강단 식민사학자들
올바른 역사 연구를 위해 조선총독부의 식민․노예사관을 벗어나야
기경량과 강단사학계에 묻는다.
1. 낙랑국과 대방국의 위치는 어디인가?
2.『삼국지』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는 어디에 있는가?
3.『진서』는 서진의 평주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 우북평지역’이라고 하였다. 이들 지역의 위치가 하북성인가? 한반도인가?
<지도 1> 필자가 비정한 낙랑군 위치
『삼국지』에 기록된 3세기 무렵의 동아시아 정치체들의 위치. 당시 한반도 북부에는 한민족의 낙랑국과 대방국이 존재하였고, 하북성 북경일대에는 중국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이 존재하였다. 특히 당시 고구려의 강역은 사방 2천리였다. 고구려의 동쪽에 옥저가 있는 것을 감안하면 고구려의 강역이 동서로 2천리가 되려면 고구려의 서쪽 국경은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까지 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중국 군현의 가장 동쪽인 요동군은 하북성 지역을 넘을 수 없다. 이러한 사실은 중국 정사인 『진서』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 식민사학계는 요동군을 요령성 일대로 비정하고 있다. 그렇게 비정하면 요동군의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의 강역은 『삼국지』에 기록된 사방 2천리는 고사하고 사방 800리도 나오지 않는다. 강단 식민사학계는 고구려의 강역을 1/5이하로 왜곡․축소하고 있는 것이다. 지하에 계신 고구려의 선조들이 통곡할 일이다. 김봉렬 제공
1. ‘낙랑군 평양설=식민사학’ 도식은 당연하다.
기경량은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연의 『삼국유사』도 ‘낙랑군 평양설’로 인식했으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학자 다산 정약용 등 수많은 실학자들도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했다. 낙랑군 평양설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자들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든 왜곡의 산물이 아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기록이 존재하며 기나긴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통설로 공인돼왔다. 그렇기 때문에 ‘낙랑군 평양설=식민사학’ 도식은 철저히 허위다.”
강단사학계는 식민사학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기분이 나쁜 모양이다. 그래서 자기들이 주장하는 ‘낙랑군 평양설’이 고려시대부터 오랫동안 통설로 공인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그렇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낙랑군 평양설’로 인식한 것은 사실이나, 여기서 평양은 고려 서경을 가리킨다. 고려 서경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특히 최근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에서 국책사업으로 고구려 평양성을 찾는 연구를 하면서, 고구려 평양성이자 고려의 서경은 현 요령성 요양시 일대라는 수많은 사료를 제시한바 있다.
평양이라는 지명은 여러 곳에 있었다. 그러므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낙랑군 평양설’을 현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낙랑군 한반도 평양설’과 같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또 조선 초의 권람을 시작으로 조선 중.후기의 홍여하, 이익, 신경준, 박지원을 비롯한 수많은 학자들은 ‘낙랑군 재요동설’을 주장해왔다. 그러므로 ‘낙랑군 재평양설’이 ‘기나긴 우리 역사에서 오랫동안 통설로 공인돼왔다’는 기경량의 주장은 거짓이다.
‘낙랑군 평양설’을 통설로 대못을 박은 것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였다. 조선총독부는 한반도 식민통치를 쉽게 할 목적으로 실증사학을 빙자하여 점제현신사비, 효문묘동종, 와당, 봉니 등의 유물들을 조작하여 한반도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지역으로 역사왜곡하였다. 그리고 해방 후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친일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하였고,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부역했던 식민사학자 이병도, 신석호 및 그 제자들이 학문권력을 장악하고 ‘낙랑군 평양설’을 확대 재생산 하고 있다.
그들은 학문권력을 이용하여 조선총독부의 식민․노예사관을 국․검정 역사교과서의 교육과정과 집필기준으로 정함으로써 올바른 우리 역사가 밝혀지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도 교육현장에서는 대한민국 국민의 혈세로 일제 식민사학과 중국 동북공정의 동조자를 양산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일보』는 지난 2017년 6월4일자에 기경량, 안정준, 김재원 등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다. 제목은 “도종환 후보자님 ‘위대한 상고사’는 안 됩니다.”라는 것이다. 담당 기자가 “지도 사업에서 논란이 됐던 낙랑군 위치 문제는 어떻게 보나.”라고 물었다.
안정준 : “낙랑군이 평양에 있다는 건 우리뿐 아니라 제대로 된 학자는 모두 동의한다.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김재원 : “100년 전이라 하니까 자꾸 ‘친일 사학’ 소리 듣는다. 하하.”
기경량 : “그러면 200년 전 조선 실학자들이 논증을 끝냈다라고 하자.”
위의 인터뷰에는 강단사학계의 관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낙랑군 평양설’은 100년 전에 이미 논증이 다 끝났다는 것이다. 100년 전이면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들어 설 무렵이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꺽고 식민통치를 쉽게 할 목적으로 실증사학을 빙자하여 점제현신사비, 효문묘동종, 와당, 봉니 등의 유물들을 조작하여 한반도 평양을 한나라 낙랑군지역으로 역사왜곡하여 통설로 확정하였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금 강단사학계에서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는 핵심근거는 조선총독부가 일방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발표한 낙랑 유물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낙랑군 평양설=식민사학’이라는 비판을 하는 것이다. 강단사학계가 이러한 비판을 듣기 싫다면 조선총독부가 왜곡한 낙랑 유물이 아니라 ‘낙랑군 평양설’을 인정할 만한 다른 사료들을 제시하면 될 일이다. ‘낙랑군 평양설=식민사학’ 도식은 당연한 것이다.
2. 낙랑군이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는 1차 사료는 많이 있다.
기경량은 2015년 11월 16일 국회 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동북아특위) 주최로 열린 ‘한국 상고사 대토론회: 한군현 및 패수 위치 비정에 관한 논의’ 학술대회에서 이덕일 소장이 『한서』와 『후한서』의 주석을 1차 사료라고 한 말실수를 가지고 장황한 비판을 늘어놓고 있다. 하지만 ‘낙랑군 하북성설’을 뒷받침하는 1차 사료들은 많다. ‘낙랑군 하북성설’의 1차 사료를 몇 가지만 살펴보자.
1. 『회남자』
“동방의 끝은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고 대인국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해가 뜨는 부목의 땅에 이른다(東方之極, 自碣石山, 過朝鮮, 貫大人之國, 東至日出之次, 榑木之地.).” 『회남자』「시칙훈」
“갈석산은 요서계 바다의 서쪽 해변에 있다. 조선은 낙랑현이다(碣石在遼西界海水西畔, 朝鮮樂浪之縣也).” 『회남자』「시칙훈」(고유 주)
『회남자』는 한 고조 유방의 손자인 회남왕 유안(劉安, ? ~ BC 123)이 편찬한 백과사전의 일종이다. 위만조선이 존재하던 시기에 편찬된 책이므로 『회남자』의 기록은 위만조선에 대한 생생한 1차 기록이다. 위 『회남자』의 글에 동한시대 학자인 고유가 주석을 달았다. 고유 역시 낙랑군이 존재할 때의 학자이다. 『회남자』와 고유의 주석을 통하여 갈석산으로부터 한나라 낙랑군 낙랑현(조선현)을 지나는데, 갈석산이 요서에 있다고 하였으므로 낙랑군 낙랑현(조선현)이 요서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2. 『산해경』
“동해의 안쪽과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으니 조선이라 한다. 조선은 천독天毒이다. 그 사람들은 물가에 살고 사람을 존중하며 사랑한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名曰朝鮮天毒 其人水居 偎人愛之).” 『산해경』권18, 해내경
“곽박이 말하기를 조선은 지금의 낙랑군이다(郭璞云 朝鮮今樂浪郡也).” 『산해경』권18, 해내경(곽박 주)
『산해경』은 선진시대의 지리서로 조선이 존재하던 시기의 1차 사료이다. 조선이 중국 동해의 안쪽에 있다고 하였다. 중국의 동해 안쪽은 현 중국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 절강성 등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조선(낙랑군)은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 있었다.
3. 『잠부론』
“옛날 주 선왕 때 역시 한후가 있었는데 그 나라는 연나라 가까이 있었다. 『시경』에 이르기를 ‘커다란 저 한성은 연나라 백성들이 쌓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한韓의 서쪽에서도 역시 성을 한韓이라 하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해중海中으로 옮겨가 살았다(昔周宣王亦有韓侯,其國也近燕,故詩云:普彼韓城,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魏滿所伐,遷居海中).” 『잠부론』권제9, 지씨성제35
“(상략)...성수는 또 동남쪽으로 한성의 동쪽을 지난다. 『시경』「한혁장」에 이르기를 “저 커다란 한성은 연나라 백성들이 쌓았네. 왕께서 한후에게 추와 맥을 주시니 북쪽 나라를 모두 맡았네.”라고 하였다. 정현은 말하기를 “주나라가 한후를 봉하니 한성에 거하여 후백이 되었다. 험이의 핍박으로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였다.”고 하였다. 왕숙은 말하기를 “지금 탁군 방성현에 한후성이 있다. 세상에서는 한호성이라 이르는데 옳지 않다.”고 하였다...(중략)...성수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 거마하로 들어가므로 바다에는 이르지 못한다((上略)...聖水又東南逕韓城東, 『詩韓奕章』曰:溥彼韓城, 燕師所完, 王錫韓侯, 其追其貊, 奄受北國. 鄭玄曰:周封韓侯, 居韓城為侯伯, 言為獫夷所逼, 稍稍東遷也. 王肅曰:今涿郡方城縣有韓侯城, 世謂之寒號城, 非也...(中略)...又東南流注于巨馬河而不達于海也).” 『수경주』권12, 성수
『잠부론』은 후한 사람 왕부(王符, 85?~ 162)가 저술한 책이므로 낙랑군이 존재하던 시기의 1차 사료이다. 『잠부론』에서 “그 후에 한韓의 서쪽에서도 역시 성을 한韓이라 하였는데, 위만에게 정벌당하여 해중海中으로 옮겨가 살았다.”는 구절을 통하여 고조선의 왕검성이 한성韓城의 서쪽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는데, 『수경주』등에 의하면 한성韓城은 탁군 방성현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하북성 탁군 방성현의 서쪽에 위치하였다.
이와 같이 낙랑군이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는 1차 사료는 여럿 있다. 그리고 이덕일 소장이 『한서』나 『후한서』에 붙은 주석을 1차 사료라고 한 말은 잘못이지만, 주석들이 1차 사료가 아니라고 중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한서』나 『후한서』를 주석한 당나라 시대의 사람인 안사고나 이현 등은 모두 중국 정사에 정통한 당대의 대학자들로서 중국 군현인 낙랑군의 위치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학자들이었다.
이들보다 500년 후의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이나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또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의 주장보다는 훨씬 비중 있는 사료들이다. 이덕일 소장이 제시하는 사료들이 낙랑군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으며, 어떻게 우리 역사를 올바로 밝히는데 활용할 것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기경량처럼 그것이 1차 사료냐? 2차 사료냐? 하는 말실수를 물고 늘어지는 것은 토론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망각한 것으로 우리 역사를 올바로 밝히는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3. 『삼국지』는 고구려 강역을 사방 2 천리로 기록했다.
기경량은 낙랑군이 존재할 당시 ‘1차 사료’로 진수(233~297년)의 『삼국지』를 제시하면서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한나라 낙랑군은 한반도 평양 일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기경량은 두 가지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있다.
첫째, 낙랑국과 낙랑군은 다르다.
“3월, 우두주에 이르러 태백산에 제사를 지냈다. 낙랑과 대방 두 나라가 항복해왔다(三月, 至牛頭州, 望祭太白山. 樂浪․帶方兩國歸服).”『삼국사기』‘신라본기’
“14년(313) 겨울 10월에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았다(十四年 冬十月 侵樂浪郡 虜獲男女二千餘口).” 『삼국사기』‘고구려본기’
“15년(314) 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세웠다. 가을 9월에 남쪽으로 대방군을 침략하였다(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삼국사기』‘고구려본기’
위와 같이『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록에 의하면 기림 이사금 3년인 서기 300년 “3월에 낙랑국과 대방국이 신라에 항복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서는 고구려가 서기 313년에 낙랑군을 침략하고, 314년에 대방군을 침략하는 기사가 나온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한반도에는 낙랑국과 대방국이 있었으며, 중국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은 따로 있었다. 기경량은 낙랑국과 낙랑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한반도의 낙랑국과 대방국을 중국 군현인 낙랑군과 대방군으로 보는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하고 있다.
둘째, 『삼국지』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를 누락시켰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과, 동쪽은 옥저와, 북쪽은 부여와 경계를 접하고 있다. 환도의 아래에 도읍 하였는데 면적은 사방 2천리가 되고 호수는 3만이다(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 戶三萬).” 『삼국지』위서30, 동이전, 고구려
기경량은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가장 중요한 고구려 강역의 크기를 고의로 누락시켰다. 역사왜곡의 전형이다. 『삼국지』에 의하면 고구려의 강역은 사방 2천리인데, 기경량의 주장대로 요동군의 위치를 요령성 일대로 보면 고구려 강역은 사방 800리도 나오기 어렵다. 『삼국지』의 기록보다 고구려 강역이 1/5이하로 줄어드는 것이다.
『삼국지』의 기록대로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를 찾아보자. 고구려의 동쪽에 옥저가 있었으므로, 고구려의 동쪽 국경선을 대략 백두산 일대로 보더라도 백두산에서 서쪽으로 2천여 리를 가면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까지이다. 그러므로 『삼국지』에 기록된 고구려 강역은 한반도 북부와 중국 요령성 지역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고구려 강역과는 사뭇 다르다. 혹시 『삼국지』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가 잘못된 기록일까? (위의 <그림 1> 참조)
그렇지 않다. 수많은 중국의 정사 기록을 통하여 교차검증 된다. 『후한서』‧『삼국지』‧『양서』‧『남사』에는 고구려 강역이 사방 2천리, 『북위서』‧『주서』‧『북사』‧『수서』에는 동서 2천리와 남북 1천리, 『구당서』에는 동서 3,100리와 남북 2천리, 『통전』에는 고구려 강역이 동서 6천리로 나온다. 특히 『통전』은 아래와 같이 시대별 고구려 강역의 변화를 일목요연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땅은 후한 시 사방 2천리였다. 위나라 때 남북이 점점 좁아져서 겨우 1천여 리였으며, 수나라 때 점점 커져서 동서가 6천리가 되었다(基地後漢時方二千里 至魏南北漸狹, 纔千餘里 至隋漸大東西六千里).” 『통전』권 제185, 변방1, 동이 하, 고구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구려 강역은 신라, 백제와의 관계에 따라 남북은 1천여 리에서 2천여 리까지 변하지만, 동서의 길이는 2천여 리 보다 좁아진 적이 없었다. 즉 고구려의 서쪽 국경선은 현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경계인 칠로도산보다 줄어든 적은 없었다. 그리고 고구려 전성기에는 강역이 동서 6천리로 현 중국 산서성 지역을 넘어 섬서성 지역까지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사학계가 주장하는 고구려 강역은 어떤가? 광개토태왕 이전의 강역은 요령성의 천산산맥을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구려 강역이 사방 1천리도 되지 않는다. 그리고 고구려 전성기 때도 현 중국 요령성 요하를 넘지 못하였다고 한다. 강단사학계는 중국의 수많은 정사기록들과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강단사학계가 고구려 강역을 『삼국지』의 기록보다 1/5이상 좁게 보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고대 요동의 위치를 잘못 비정했기 때문이다. 고대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며, 요동이라는 지명이 요령성으로 이동한 것은 중국 요나라(916 ~ 1125) 시대 이후이다.(필자의 저서 『고조선으로 가는 길』89~109쪽 참조)
고대 요동이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라는 것은 중국 서진시대의 정사인 『진서』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 후한 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을 칭했다. 그의 아들 공손강과 강의 아들 공손문의가 모두 멋대로 요동에 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사服事하였다. 위나라는 동이교위를 설치하여 양평에 거하였으며, 요동‧창려‧현토‧대방‧낙랑의 5군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 후에 도로 유주로 합하였다. 공손문의가 멸망한 후에 호동이교위를 두고 양평에 거하였다. 함녕 2년(AD 276) 10월, 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했다. 26개현을 다스리고, 18,100호이다(平州. 案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康子文懿並擅據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昌黎、玄菟、帶方、樂浪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護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昌黎、遼東、玄菟、帶方、樂浪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진서』권14, 지제4, 지리상, 평주
위의 『진서』‘평주조’ 기록은 우리 고대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 강단사학계와 중국 동북공정에서는 한나라 낙랑군이 기원전 108년 한반도 평양에 설치되어 후한과 삼국시대를 거쳐 서진시대에 이르기까지 420여 년 동안 한반도 북부를 지배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위의 『진서』기록은 전혀 다르다. 『진서』는 한나라와 삼국시대 그리고 서진에 이르기까지 중국 군현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넘지 못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삼국지』의 기록과 마찬가지로 현 요령성지역과 한반도 북부는 모두 고구려의 영토였다.
『진서』의 기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공손씨 정권이 차지하였던 요동지역은 위나라가 서기 238년 공손연을 멸하고 요동‧창려‧현토‧대방‧낙랑의 5군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하였으며, 서진 또한 위나라를 멸하고 함녕 2년(AD 276) 10월에 창려‧요동‧현토‧대방‧낙랑 등 5군국을 나누어 평주를 설치하였다. 서진의 평주가 고대의 요동지역이며, 한나라 낙랑군․대방군과 요동군 등이 설치된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서진의 평주 위치는 어디인가?
위에서 보았듯이 『진서』는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平州. 案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고 하였다. 서진의 평주는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 우북평지역’이었다. 이들 지역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넘지 못하는 지역이다. 고대의 요동과 서진의 평주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을 넘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 강단사학계와 중국 동북공정에서는 서진의 평주를 현 중국 요령성과 한반도 북부 일대로 보고 있다. 이는 중국 정사인 『진서』의 기록과는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이다. 아울러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후한서』‧『삼국지』‧『양서』‧『남사』‧『북위서』‧『주서』‧『북사』‧『수서』‧『구당서』‧『통전』등에 기록된 고구려 강역과도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이다.
기경량과 강단사학계에 묻는다.
1. 낙랑국과 대방국의 위치는 어디인가?
2. 『삼국지』의 고구려 강역 사방 2천리는 어디에 있는가?
3. 『진서』는 서진의 평주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 우북평지역’이라고 하였다. 이들 지역의 위치가 하북성인가? 한반도인가?
4. 낙랑군은 하북성지역에서 하북성지역으로 교치되었다.
기경량은 중국사서에서 낙랑군이 요동이나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기록을 서기 313년 한반도 평양의 낙랑군이 교치된 기록이라고 주장하였다. 낙랑군이 수차례 이동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앞에서 『진서』의 기록에서 보았듯이 낙랑군, 창려군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서기 313년 장통이 낙랑․대방에 의거하다가 1천여 가를 이끌고 창려에 위치한 모용외에게 귀부하였는데, 낙랑․대방과 창려는 모두 고대 요동인 하북성 지역에 위치하였으므로 낙랑군이 하북성 지역에서 하북성 지역으로 교치된 것을 알 수 있다.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에서 창려지역으로 교치되었다는 주장은 『진서』의 기록과 맞지 않다.
『자치통감』의 관련 기록을 살펴보자.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에 의거하여 고구려왕 을불리와 더불어 서로 공격하여 수 년 동안 풀리지 않았다. 낙랑의 왕준이 장통을 설득하여 그 백성 천여 가를 거느리고 모용외에게 귀부하니, 외가 낙랑군을 설치하고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로 삼았다(遼東張統據樂浪ㆍ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遵參軍事).” 『자치통감』313년
위의 기록에서 ‘요동의 장통’이라는 표현은 ‘요동사람 장통’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요동지역의 장통’이라는 뜻이다. 즉 “요동의 장통이 낙랑과 대방 2군에 의거했다.”는 것은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동지역에 있었다는 뜻이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요동에 있었다는 중국측 기록은 많이 있다. 앞에서 『진서』의 기록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낙랑군과 대방군은 요동지역에 있었으며, 고대의 요동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었다.
재야사학자들이 낙랑군의 위치를 고대 요동지역인 하북성 지역으로 비정하는 것은 기경량의 주장처럼 재야사학자들이 중국의 역사 전개나 교치 개념의 이해가 전무한 탓에 생긴 ‘무지의 소산’이 아니다. 중국 정사들의 기록이 낙랑군은 처음부터 하북성 지역에 설치되었고, 하북성 지역 내에서 수차례 이동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경량은 이렇게 결론짓고 있다.
“사이비역사가들은 스스로의 무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며, 오류를 교정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올바른 역사 연구에는 자료의 성격을 정확히 판단하려는 전문적 훈련·지식과 연구 대상에 대한 겸손하고 객관적인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학문으로서 ‘역사학’과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이비역사’ 사이에 놓인 결정적 간극이다.”
기경량에게 충고한다. 스스로 ‘젊은역사학자모임 연구자’라고 하였으니 아직 젊은 나이인 모양이다.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이라는 우물에 갇혀 꽃다운 청춘을 허비하지 말기를 바란다. 조선총독부가 ‘낙랑군 평양설’의 근거로 삼은 점제현신사비, 효문묘동종, 와당, 봉니 등의 유물들은 모두 이동․교류․왜곡이 가능한 것들로 역사지리를 확정하는 근거로 삼을 수 없는 것들이다. 더구나 조선총독부가 한반도 식민통치를 쉽게 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한국사를 연구했다는 것은 천하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조선총독부가 일방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발표한 유물들을 핵심근거로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하는 것은 자료의 기본 성격도 판단하지 못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고조선의 중심지와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를 알려면 최우선적으로 고조선의 산과 강 그리고 해안선 등 자연지형을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역사지리의 상식이다. 중국의 여러 사서들에 의하면 고조선의 중심부에는 갈석산이 우뚝 솟아 있었고, 습수․열수․산수․패수라는 강물이 흘렀다. 이들 고조선의 강산을 연구해보면 한나라 낙랑군의 위치가 현 중국 하북성 북경 일대에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끝>
첫댓글 수고많으십니다.
우리에게서 잊혀져 가는 우리역사입니다.
그러나 북미패권전이 종결이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 상.고대사는
진실한 모습으로 우리곁에 돌아올 것입니다.
지금은 왜도 중국도 유럽도 다 한통속으로 우리역사를
말살합니다.
패권전에서 반드시 윗동네가 이겨야할 당위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걸레, 박노자 이런 더러운 것들이
양의 탈을 쓰고 암약하고 있으니
반드시 역사가 바로 서는 날 함께
처단해야할 것이다
중국 사서에 기록되어있는 고대 고구려의 땅도 몰라보는 사람이 아직도 사학계에 많이 있는가 봅니다.
노무현 시절에도 강단 사학계도 낙랑에 대해서 평양과 요동설 등을 어느 정도 균형있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강단 사학자들이 낙랑 평양설이 맞다고 확신하게 만든 것은
2007년에 알려진 북이 평양에서 발굴했다는 낙랑목간이죠.
북한역사학계의 공식 입장이던 요서 평양설을 일거에 부정해버린
90년대 상반기의 실존 단군릉 발견과 속성 복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북이 고대역사를 황급히 날조했는지는 그 당시
북미대전쟁의 전략상황을 살펴봐야 이해가 됩니다.
보수 강단사학자들은 북의 발표에 근거하고, 재야는 그걸 비판하지만
북에는 별다른 비판이 없습니다.
균형된 이성과는 거리가 멀죠.
낙랑목간 중 "낙랑군초원4년현'별'호구다소,,,"
'별'은 한에서 쓰는 표기방식이 아니라 일본에서 19~20 세기에
사용하던 한자표기방식으로 밝혀집니다.
낙랑목간은 가짜라는 말이겠지요.
그리고 점제현 신사비 또한 왜가 갈석산에서 채석해 평안도 온천으로
옮겨와 역사를 날조하기도 합니다.
더하여 봉니도 엄청 발견이 되었지요.
왜구가 만든 가짜봉니지요.
그런데 일본의 역사날조를 모를리가 없겠지요.
단군조선은 3조선 체제라 막내 마조선의 강역이 압록 이남임을
감안하면 평양에 마조선 지배자의 단군왕릉은 좀 이해가 됩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북미대전에 올인해야하는 윗동네는
역사분쟁을 피해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태허루 굴복시킨 후 충분히 역사를 정립할 기회가 있으니 말입니다.
작금에 역사논쟁은 적국만 늘여 북미대전에 집중하기가 어렵겠지요.
그니 패권자만 꿇게하면 역사정립은 식은 죽먹기로 판단됩니다.
"왜 북이 고대역사를 황급히 날조했는지는 그 당시 북미대전쟁의 전략상황을 살펴봐야 이해가 됩니다."
그 당시 북미상황이 북의 고대사인식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요?
@뿌리깊은나무 중국내전과 한국전쟁 시기부터 동북접경지역에는 북중 간에는 영토역사문제가 얽혀 있습니다.
소련이 요녕길림을 북에 넘겨라고 하얼빈, 모스크바 중러 회담에서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93.6월 괌과 하와이에 발사하고 북미대결이 격화되는데
미국은 중국에 무역최혜국대우 지속과 위안화 50% 절하라는 선물을 안기며 친미화시킵니다.
봉쇄에 나선 중국을 연화시키기 위해서
93.10월에 단군인골 발견하고 그 다음해에 1년만에 평양에 단군릉을 거대하게 완성하고,
남쪽 민족인사들이 방북하면 참배하도록 김일성 주석이 직접 교시하고
한민족의 역사영역이 한반도 안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한 것입니다.
@뿌리깊은나무 2007년 상황에서 평양 낙랑목간의 발견 및 발표는
중국의 동북공정논리를 강화 지원하기 위한 유인책입니다.
그 결과로 남쪽 강단사학자들이 45억의 뇌물을 먹고 매국적인 동북아 고지도를 완성했고
중국은 그걸 바탕으로 북한을 분할하는 전쟁지도를 기안하여 이명박 정부에 제안하고
미국도 합의합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북중접경협약을 체결하는데 급변시에 상호 군대가 사전 통고없이
진주할 수 있는 군사접경협정입니다.
결국 2010~11년에 김정일 위원장이 느닷없이 중국을 방문하고 러시아 갔다오면서 중국을 걸쳐서 온 것은
이러한 사전협약을 역으로 이용한 것이죠.
@분석관 글쎄요, 역사문제에 있어서는 분석관님의 말씀에 동의하기가 어렵군요.
단군릉 발굴은 북측에서 주장하는 '대동강문화권(세계4대문명에 필적할만한 문명권. 그 근거로 bc 3~4천년의 것인 고인돌 별자리, bc3200여년의 것인 단군부부인골 등을 듬)'의 근거가 되는 유적으로 알고있을 뿐인데 님의 말씀은 의아합니다.
낙랑목간은 2006년에 북한학자 손영종이 발표합니다. 손영종은 낙랑목간을 공개하면서 “목간의 호구 통계가 얼핏 서북한에 낙랑군이 있던 것처럼 보이나 자세히 검토하면 요동반도 천산산맥 일대에 위치했다는 확고한 증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남쪽 식민사학자들이 자기들 멋대로 날조하여 낙랑목간이
@뿌리깊은나무 낙랑군 재평양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한 것입니다. 사실 낙랑목간 자체가 가짜유물이라는 것이 거의 밝혀졌지만 말씀입니다. 손영종씨는 진품인줄알고 발표했겠지요.
리지린의 연구(난하유역이 고조선도읍지)도 있음에도 북측에서 동북공정에 적극대응하지않는 것은 의아합니다. 통일이되면 어찌된 셈판인지 알 수가 있겠지요.
@뿌리깊은나무 낙랑목간은 발굴위치나 내용이 평양낙랑설을 의미하는데
북은 요동의 평양에서 낙랑관리가 가져온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서 요동평양설은 형식적으로 유지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평양낙랑설에 대한 강력한 근거를 제공한 셈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