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통은 멧돼지, 주둥이는 개미핥기 닮아… 하루 대부분을 물속에서 보내요
테이퍼
▲ 말레이 테이퍼(Malayan tapir). /브리태니커
얼마 전 싱가포르 도심에 있는 공원에서 멸종 위기종 포유동물 테이퍼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는 모습이 드러나 화제예요. 과학자들은 이 테이퍼가 말레이시아 숲에서 건너왔다고 봐요.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사이 조호르 해협은 폭이 1.2㎞에 불과한 곳도 있어 충분히 헤엄쳐 건널 수 있다는 거죠.
테이퍼는 지구상 여러 동물의 생김새를 조금씩 떼어다 합친 것 같은 희한한 외모로 유명한 동물이에요. 몸통은 멧돼지나 소처럼 육중한데 삐쭉 튀어나온 주둥이만 보면 코끼리나 개미핥기가 떠오르죠. 그래서 '조물주가 다른 동물을 다 만들고 남은 부분으로 빚은 게 테이퍼'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예요.
테이퍼의 또 다른 이름은 '맥'입니다. '貘(짐승 이름 맥)'은 상상 속 짐승을 일컫는 한자예요. 소나 돼지와 비슷한 몸집을 가졌지만, 사실은 말이나 코뿔소에 더 가까운 무리랍니다. 말·코뿔소·테이퍼의 공통점은 발굽이 발달했고, 최소한 뒷발의 발가락 숫자만큼은 홀수라는 점이에요. 이런 동물 무리를 기제류(奇蹄類)라고 부른답니다.
테이퍼는 기제류 중에서도 가장 원시적인 무리로 수백만 년 동안 변함없는 모습으로 살아왔어요. 테이퍼는 하루 대부분을 물속에서 보낸답니다. 물풀을 뜯어 먹을 수 있는 데다, 몸에 기생충이 달라붙는 것도 막을 수 있거든요. 기다란 윗입술과 콧구멍이 함께 붙어 있는 주둥이는 물을 좋아하는 생활 습성에 아주 적합해요. 적이 다가오면 물속에 들어가서 꼼짝하지 않고 있는데 이때 주둥이만 물 바깥으로 내놓고 숨을 쉬거든요. 물 밖에서는 주둥이를 코끼리 코처럼 움직여 과일이나 나뭇잎 등을 따 먹을 수 있죠.
테이퍼의 몸뚱이는 원통 모양이고 털은 짧고 빳빳해요. 이런 몸 구조는 나무가 빽빽한 숲속을 다니는 데 적합해요. 얼핏 둔해 보이지만, 몸동작은 아주 날쌔답니다. 가파른 강둑 언덕도 재빠르게 올라가고, 수영 실력도 출중하죠.
테이퍼는 숲속 생태계를 유지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에요. 다양한 풀과 열매를 먹으면서 배설물을 통해 씨앗을 곳곳에 퍼뜨려주거든요. 과학자들이 테이퍼 한 마리의 똥을 검사해보니 서로 다른 씨앗이 무려 122종류 발견된 적도 있었대요.
테이퍼는 특이하게도 아주 멀리 떨어진 두 지역인 중남미와 동남아시아에 걸쳐 살고 있답니다. 중남미 지역에 사는 테이퍼는 검거나 짙은 회색이고 상대적으로 몸집이 작아요. 반면 말레이반도를 포함해 동남아시아 지역에 사는 테이퍼는 등과 배는 흰색, 머리와 다리는 검은색이에요. 몸집도 머리-몸통 길이는 최장 2.5m, 어깨 높이는 최고 1.2m로 아주 우람하답니다. 대개 초식동물은 수컷 몸집이 암컷보다 크지만, 테이퍼는 오히려 수컷이 조금 왜소해요.
테이퍼 새끼는 멧돼지 새끼랑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주 비슷해요. 멧돼지처럼 새끼 때는 온몸에 알록달록한 무늬가 있다가 자라면서 점점 없어지거든요. 하지만 한배에서 여러 마리를 낳는 멧돼지와 달리 테이퍼는 한 번에 오직 한 마리만 낳는답니다.
정지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