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0일이었다. 늘 가던 대로 아내와 화종이 형과 부인, 기환이 부인, 진선이, 철우형, 명수, 형효와 북한산을 갔다. 이번은 다른 길로 가 본다고 지하철 3호선 독바위역에서 만나 올라갔다. 전날까지도 그렇게 춥더니 날씨도 좋고 바람도 안 불고 산을 오르기에는 정말 좋았다. 가파른 길을 지나자마자 막걸리 한두 잔씩 걸쳤다. 화종이 형, 형수가 싸온 피래미 졸임은 정말 감칠 맛이고 꿀맛이었다.
능선을 타고 한참 올라가니 족두리봉이 보인다. 화종이 형과 형수는 몇번 가 봤다고 기다린다 해서 몇몇만 올라갔다. 다시 능선을 따라 갔다. 거기서부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거치적거렸다. 이 세상 사람들 전부 산에만 오는 거 같았다.
향로봉 앞에 왔다. 길을 잘 아는 화종이 형이 향로봉은 위험하다고 돌아가자고 한다. 나는 한 번도 안 가 봐서 가 보고 싶었다. 진선이도 명수도 향로봉을 올라가자고 했다. 화종이 형과 부인, 기환이 부인만 돌아가는 길을 택했고 나머지는 향로봉 쪽으로 가자고 결정했다.
그 길은 우리만 가는 건 아니었다. 아이들도 가기 때문에 그렇게 위험한 길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중간에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었는데 나는 앞서가는 어떤 젊은이들을 무조건 따라갔다. 어, 그런데 길이 점점 험해진다. 아이고, 그 길은 등산길이 아니었다. 내 뒤로는 우리 일행이 멋도 모르고 나를 따라왔다. 뒤에서 누가 소리지른다. "야, 여기 등산로 맞아?" 그래도 처음에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았다.
그런데 앞서가는 젊은이들이 못 올라가고 꾸물꾸물댔다. 왜 그런가 했더니 완전히 암벽 타는 곳처럼 험했다. 가만 보니 그 사람들도 길을 잘 못 든 것이다. 어쨌거나 이제는 뒤로 돌아갈 길이 없다. 무조건 앞으로 올라가야 할 판이다. 은근히 걱정이 됐다. 아내는 걱정도 안 하고 내 앞으로 가더니 다람쥐처럼 잘도 간다.
바위틈바구니에서 사람들이 못 올라가고 있다. 한 사람씩 올라가고 한참 있다 내 차례가 되어 가 보니 장난이 아니다. 발 디딜 틈도 없고 손 잡을 만한 곳도 없다. 이상하다 여기를 어떻게 올라갔을까? 으라차 하고 바위틈에서 몸을 빼내면서 기다시피 올라갔다. 바위틈에 옷이 쓸리는 것 같다. 비싼 등산복 다 버리겠다. 조금 더 올라가니 경사면이 80도 정도는 되는 것 같다. 점점 어려워지네. 풀 한포기, 아주 절묘한 곳에 잔디 같은 가냘픈 풀 한포기가 있었다. 그 풀 한 포기가 없었다면 거기는 올라갈 수가 없는 곳이었다. 발을 디딜 데도 없고 기댈 데도 없다. 훌쩍 뛰면서 풀 한 포기를 잡았다. 이 풀 한포기가 뿌리라도 빠진다면?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서늘하고 아찔해진다. 아내는 여기를 어떻게 올라갔을까. 어쨌든 내 뒤로 올라오는 사람들은 잡아 주어야겠다. 우리 일행을 손을 잡고 올려 주니까 그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은 좀 멀리 떨어져 있다. 아마 금방은 못 올라올 것 같다. 올라와서 보니 아찔하다. 한 발만 실수하면 헬리콥터 불러야 할 판이다.
정상에 올랐다. 서울 시내가 다 보인다. 북쪽으로는 일산까지 남쪽으로는 남산 타워도 보인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가니 철조망이 쳐 있다. 나가지 말라고 쳐 놓은 게 아니라 이곳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철조망이다. 우리는 올라가지 말라고 하는 곳을 거꾸로 올라온 것이다. 철우 형은 심각한 얼굴로 "야, 산은 아무리 힘들게 많이 걸어도 상관 없지만 이렇게 위험한 곳으로 오면 안 돼. 한 발만 실수해 봐. 끝이잖아." 본래 겁이 많은 철우 형이라 웃고 말았지만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뭘 하나 다음에 또 올라올 걸.
다른 길로 돌아온 화종이 형 일행과 만나 정상에서 밥을 먹었다. 신문지를 펴고 따뜻한 밥을 꺼내 놓고 종이컵에다 퍼 담고, 미역국에다 된장국에다 청양고추에다 온갖 반찬을 펴 놓고 게걸스럽게 먹었다. 명수는 56도짜리 중국 술 빼갈을 가져왔다. 한 잔 따라 홀짝 입에다 넣으니 카하하! 코에서 메쿰한 냄새가 난다. 야, 죽인다. 더 없냐? 세 병을 비웠다. 막걸리도 남았냐? 그것도 먹자. 이제 위험한 데 없는데 까짓거. 밥을 먹고 커피 한잔 씩 먹고 나니 으슬으슬 추웠다. 우리는 정리를 하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진관사로 내려가자. 그래 좋다. 올라오는 사람들도 없다. 그늘 길이라 길이 미끄러웠다. 나뭇잎 밑이 전부 얼음이다. 야, 조심해. 서로서로 충고하면서 껑충껑충 내려왔다. 계곡에 맑은 물이 보인다. 야 ! 저기서 발에 물 좀 담그고 가자. 좋다. 우리는 가끔 얼음물에 발을 담근다. 그러면 아팠던 다리와 온몸의 피로가 싹 풀린다.
"어어어!"
그때였다. 나는 웅덩이 근처로 가려고 발을 내 디뎠는데 비스듬한 바위에 얼음이 얼어 있었다. 쭉 미끌어지기 시작했다. 여지없이 발부터 엉덩이까지 풍덩 빠지기 직전, 왼쪽 바위에 발 디딜 만한 곳, 딱 한 군데에 얼음이 없는 곳이 보였다. 훌쩍 뛰었다. 하지만 몸은 웅덩이 쪽으로 45도가 기울은 상태, 도저히 바로 설 수 없고,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웅덩이 모양 따라 빙 둘러선 바위를 따라 다시 오른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전부 얼음이었다. 몸이 웅덩이 쪽으로 기운 채로 원심력을 이용해 다시 왼발을 바꿨고 다시 오른발로 디뎠다. 겨우 그 웅덩이는 벗어났는데 몸은 이번엔 까마득한 낭떠러지 쪽으로 쏠렸지만 아슬아슬하게 넘어지지는 않았다.
화종이 형이 거기 서 있다가 내가 떨어지는 줄 알고 "야야야야"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나를 꽉 잡았다. "야, 어떻게 그렇게 안 넘어지냐?" "절묘하다 절묘해" "운동 신경 끝내 준다. 완전히 빠지는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감탄하고 웃고 한참이나 떠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도 그렇게 안 넘어진 건 신기했다. 운동신경도 있었겠지만 운이 좋았다. 어쨌든 한숨을 쉬면서 신발을 벗고 얼음물에 발을 한참 담그면서 여유를 피웠다.
그리고 다시 내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힘도 펄펄 넘쳤고 아까 안 넘어진 데 대한 들뜬 기분이 남아 있어 길 옆 바위길로 토끼처럼 요리조리 팔짝팔짝 뛰면서 내려갔다. 아내는 앞서 내려가면서 "길로 내려가!" 하고 큰소리쳤다. 나는 계속 옆길로 갔다. "어 길이 없네" 아내는 내 오른쪽에 있는 길로 가면서 "에구 이쪽으로 와! 왜 그…" 하는데 갑자기 내 왼쪽 발이 바깥 쪽으로 쭉 미끌어졌다. 무릎이 왼쪽으로 꺾이면서 아내가 가던 오른쪽 길 쪽으로 떨어졌다. 한 길이나 되는 높이였다.
'아이고! 내 다리…' 나는 무진장 아팠지만 고개를 숙이고 다리가 꺾인 채 가만히 있었다. 가슴이 써늘해지고 식은땀이 나고 토할 것 같았다. 이 느낌은 다쳤을 때 오는 느낌이었다. 아프다는 소리도 못 하고 한참을 그대로 있다가 왼발을 가만히 세우면서 일어났다. 무릎이 안 펴졌다. 아내는 "거봐! 길로 가라고 했잖아" 하고 잔소리했다. 혹 많이 다친 건 아닐까. 심한 거는 아닐 거야. 속으로 스스로 달래면서 옆 계곡으로 갔다. 동료들이 뒤따라오면서 걱정을 한다. 형효보고 얼음 좀 깨오라고 해서 얼음을 무릎에다 댔다. 생살에다 얼음을 대면 잠깐도 못 참는 법인데 한참을 대고 있어도 차갑지가 않다. 분명 인대가 나간 거 같다. 재수 없이 이게 뭐람. 아내한테는 미안해서 금방 괜찮을 거라고 하고 웃었다.
한 10분 동안 얼음 찜질을 하니까 조금 낫다. 지팡이 삼아 나무 막대기 하나를 주워 천천히 내려왔다. 몇 발자국 내려가니까 진관사 절이 나온다. 다 내려와서 다치냐. 자꾸만 후회가 됐다. 진관사를 지나니 음식점이 있다. 막걸리를 시켜 먹으면 큰길 버스 다니는 데 까지 태워준단다. 그래 여기서 아픈 다리로 찻길까지 걸어가려면 20분은 걸린다. 막걸리나 먹고 차 타고 가자. 우리는 막걸리를 먹었다.
집에 와서 있는데 점점 더 아팠다. 밤새 앓았다. 다음날은 오후반이라 오전에 병원을 갔다. 병원에 가서 치료 받고 일을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병명이 '1. 좌슬내장 2. 좌측 내측 측부 인대 파열(의증)'이란다. 3주 동안 꼼짝 말란다. 나는 한숨이 나왔다. 아내는 자기 말 안 듣고 까불대다가 다쳤다고 고소해한다.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이번 달은 완전히 공쳤다. 우리 버스 회사는 이렇게 다쳐서 쉬면 아무 것도 없다. 일 못한 만큼 월급 한 150만원 날라갔고, 월차휴가 깨졌지 연차 휴가 두 개 빠지지, 상여금에서도 까지지, 게다가 병원비에 약값 날라갔지. 완전 거덜이 났다. 다음 달 지리산을 가려고 계획을 세웠는데 거기도 못 가게 생겼다.
더 속터지는 건 지금 당장 빨리 걷지 못하는 거다. 볼일이 있어서 가끔 절룩거리면서 돌아다녔는데, 세상에 그거 좀 아파서 절룩거린다고 정류장에서 버스들이 나를 안 태우고 도망간다. "야 이 나쁜 버스 기사 놈들아" 하고 욕을 해 봐야 나도 버스 기사니 누워서 침 뱉기다. 횡단보도 신호는 왜 그렇게 짧으냐. 건너기 시작하자마자 삐리리릭 소리가 들리고 중간쯤 가면 끊어진다. 내가 운전 할때는 횡단보도 신호가 무진장 길던데. 무릎이 안 꺾여 층계를 올라가지 못해 에스컬레이터 없는 지하철 역은 엄두도 안 난다. 그러니 장애인은 어떻게 다니나. 휠체어 탄 사람들은 어떨까.
참 답답하다. 나는 어디 다닐 때 정신 없이 뛰어다니는 놈인데 이러고 다닐라니 복창이 터져 죽겠다. 나는 터지는 속을 꾹꾹 삼키면서 집에서 방정리 하고 원고 정리하고 할 일이 없을 때는 빈둥대면서 텔레비전만 봤다. 홈쇼핑에서 등산화 선전을 한다. 저거다, 맞아. 그 때 넘어진 건 내 실수가 아니라 신발 때문이었어. 저 등산화면 그때 안 미끌어졌을 거야. 좀 비쌌지만 나는 그날로 그걸 신청했다.
까불지만 않았으면 다치지 않았을 텐데 등산화 핑계댄다고 아내는 또 면박을 준다. 알아. 내가 왜 모를까. 산에서는 늘 겸손해야 되는데 까분 탓이었어. 앞으로는 조심해야지. 그나저나 이 다리가 완전하게 나아 다시 산이나 올라갈 수 있을까? 2004년 2월 5일 안건모
첫댓글아이고, 글 초반부터 뭔 일이 나지 싶어 조마조마했는데 고만 그렇게 다쳐부렀네. 나는 산에 가서 내 키만한 바위가 있어도 돌아감다. 서울에 갔을 때 북한산 언저리에 한번 올라갔는데 우와 장난 아니더만! 나는 바위 있는 산에는 그 뒤로 안 올라감다. 우리 동네 뒷산이 딱 맞지. 흙먼지 풀풀 날려도 걍 맨 길로 다녀요.
내 동생은 바위타기 연습한다고 어데 그런 수업 하는데 다닌다며 자랑하던데 나는 그랬지 얌마, 나무 있고 물있으면 다 좋은데 뭐한다고 목숨걸고 바우를 타냐. 돌아갈 길이 없잖여? 그럼 그런 산은 걍 멀리서 바라보고 말어. "염려대왕 엄마한테는 암 소리 말어. 니 바우 탄다면 잠 못 자." 건모씨. 요즘은 이제 좀 괜찮ㅇ
첫댓글 아이고, 글 초반부터 뭔 일이 나지 싶어 조마조마했는데 고만 그렇게 다쳐부렀네. 나는 산에 가서 내 키만한 바위가 있어도 돌아감다. 서울에 갔을 때 북한산 언저리에 한번 올라갔는데 우와 장난 아니더만! 나는 바위 있는 산에는 그 뒤로 안 올라감다. 우리 동네 뒷산이 딱 맞지. 흙먼지 풀풀 날려도 걍 맨 길로 다녀요.
내 동생은 바위타기 연습한다고 어데 그런 수업 하는데 다닌다며 자랑하던데 나는 그랬지 얌마, 나무 있고 물있으면 다 좋은데 뭐한다고 목숨걸고 바우를 타냐. 돌아갈 길이 없잖여? 그럼 그런 산은 걍 멀리서 바라보고 말어. "염려대왕 엄마한테는 암 소리 말어. 니 바우 탄다면 잠 못 자." 건모씨. 요즘은 이제 좀 괜찮ㅇ
괜찮은겨여? 우리 부산 사람들은 얼음길 눈길은 상상도 못해여. 담부터 지발 길로 큰길로 안전한 길로다가 골라 잘 댕기셔. 하갸 바우 타고 길 아닌 길 가는 재미도 쏠쏠하다더마는. 글고 다쳐봐서 어려운 줄 알았응게 그것도 다 생활이 갈차준 귀한 말씀. 잘 겨시오.
이상석 선생님, 그래도 나는 바위를 탈랍니다. 얼매나 재미있는데요. 까불거리다가 다친 거 뉘우치고 있으니까요 이제는 산에서 더 겸손해져야지요. 고맙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제 생전에 꼭 함 뵙고 싶은 분인데 뵈올랑가 모르겠습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