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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도의 시사토론 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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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토론 ●자유게시판 저서"5.18의 진상을 밝힌다". 저자:아놀드 피터슨목사 옮긴이: 정동섭
Dr.OB/GYN 추천 0 조회 220 07.10.01 20:26 댓글 4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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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10.01 22:00

    첫댓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믿고 있던 심복에 의해 경호원들과 함께 피살된 초유의 국가비상태때 외국은 어떻게 할까요. 국가안보를 위해 선포한 비상계엄령 해제하라 요구할까요, 권력에 눈먼 김대중, 김영삼 요구대로 4공 문민 최규하정부 무너뜨리고 시민군을 앞세운 군사정권 세우는 것이 옳은가요.

  • 07.10.01 22:32

    피터슨 목사는 사회과학도도 아니고, 5.18측 유언비어에 상당히 물들어 있는 시각에서 글을 썼습니다. 그 시대를 겪으셨던 Dr.OB/GYN님은 그런 그의 오류를 인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1980년 초에 최대통령은 전두환 장군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다"는 중대한 오류입니다.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중앙정보부장이 아니라, 중정 서리입니다. 본래 이희성 대장이 임명받았던 자리입니다. 그리고, 10.26 수사가 종결되고 합수부가 해체된 후였던 4월 중순에야 임명받고 5월 초에 취임하셨는데 광주사태가 일어나자마자 최규하 대통령이 해임하셨으니 실제로 중정 서리로 재직하신 기간은 보름밖에 안됩니다.

  • 07.10.01 22:39

    <김대중은 이제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게 되었으나. 김영 삼은 물러나서 당을 김대중의 지도아래 연합하겠다는 어떤 암시도 보이지 않았다. > 역시 중대 오류입니다. 김대중이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김대중에게는 정당 소속이 없었어요. 3월에 각목들고 김영삼씨 지지자들을 공격해 보았지만 신민당 경선에서 김영삼의 벽을 넘을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대중이 신민당을 여러번 기웃거린 것은 사실이지만 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제로였기 때문에 아예 입당을 하지 않았습니다. 피터슨 목사는 이런 사실 관계조차 모르기 때문에 중대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 07.10.01 22:46

    <그날까지 개헌에 대해 어떤 특정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선거일이 발표되지 않으 면, 가두시위를 벌이겠다고 공포했다.> 이것 역시 그 시대를 겪은 우리가 볼 때는 어이없는 거짓말입니다. 선거일을 발표하려고 노렸했던 쪽은 최규하 대통령이고, 방해한 쪽이 김대중과 김대중이 선동한 시위대였습니다. 선거일을 발표하려면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개헌을 하여야 했는데, 개헌 반대가 당시 시위 구호였습니다. 만약 Dr.OB/GYN님이 광주사태 당시 참으로 시위 현장에 계셨다면 "최돼지 물러가라"는 구호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최돼지"란 최규하 대통령을 말합니다.

  • 07.10.01 22:49

    선거일을 발표하려 애쓰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에게 김대중이 "5월 19일까지 퇴진하라. 만약 5월 19일까지 퇴진하지 않으면 그 후에 일어나는 사태에 대하여는 책임지지 못한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습니다. 피터슨 목사는 그런 기본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에 사실을 거의 정반대로 왜곡하는 서술을 하였습니다.

  • 07.10.01 23:02

    <그들은 계엄령 철폐 유신 헌법 철폐 민주주의 회복과 같은 표어들을 제창했다.> 역시 중대 오류입니다. 계엄령은 해제의 대상이지 철폐의 대상이 아닙니다. 유신헌법 역시 개헌의 대상이지 철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최돼지 물러가라"는 구호가 "민주주의 회복"으로 들렸나 봅니다. "민주주의 회복"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12.12사태 이전으로 복귀하자는 뜻이었던가요? 그런 구호가 있었는가요?

  • 07.10.01 23:10

    <5월 16일에 서울의 학생지도자들은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누구에게 요구했다는 말인가요? 그것이 아니라, 5월 16일 오후 6시에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가 열려 5월 19일부터 전국 대학교 수업을 전폐하고 시위하여 5월 22일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고, 김대중이 새 내각을 임명한다는 내란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대중 홍위병들은 그 내란을 목적으로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참석자 전원이 내란 음모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시위를 자제하자는 의견을 내는 학생도 있었고,

  • 07.10.01 23:23

    김대중 내란 음모 주동자 명단을 치안본부에 건네준 학생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5월 16일에 서울의 학생지도자들은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가 아니라, 5월 19일부터 전국 대학교 수업 전폐하고 전국적으로 크게 시위하자고 선동하는 대자보를 나누어주었습니다. 5월 17일 저녁부터 각 대학교 운동권이 교내 벽보에 야간작업으로 붙이기 시작한 대자보들이 그 증거물입니다. <5월 16일에 서울의 학생지도자들은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는 오류입니다. 누가 학생 지도자들인가요? 김대중에게 용돈 받으며 각 대학교 회장단에 대자본 전달한 홍위병들이 서울의 학생지도자들인가요?

  • 07.10.01 23:32

    <서울 학생들의 결정을 따라 광주의 학생들은 5월 17일 토요일에는 어떠한 시위도 열지 않았다> 이것 역시 오류입니다. 김대중 홍위병들은 5월 17일 고려대로 장소를 옮겨 속회를 하였는데, 전남대는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어요. 전남대학교 운동권은 스폰서 윤상원을 통해 김대중으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고 있었기에 따로 지령문 수령하러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에 참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5월 17일 "민주화 성회"라는 명칭의 시위가 광주에서 있었지요? 그 시위 도중에 서울의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 07.10.01 23:42

    <야당인 신민당은 여러 주 동안 그런 입법안을 주창하고 있었지만 국회에서 그 안건을 통과시 키기에는 표가 부족했다>는 무식의 극치입니다. 당시 신민당은 의회정치가 아니라, 거리 정치를 하였습니다. 민주주의 정치는 의회정치라는 것을 모르는 정치꾼들이 거리에서 돌맹이 던지는 것 선동하는 거리 정치를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표가 부족하다니 무슨 표가 부족했다는 말입니까? 님도 기억하시다시피 3김씨 중 아무도 여당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여당 의원은 한 명도 없고 전체가 야당 의원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표가 부족했다는 말인가요? 이 역시 1980년 봄의 시국을 전혀 모르는 이의 중대 오류입니다.

  • 07.10.01 23:55

    <광주출신 의 군인들은 대전으로 부산출신의 군인들은 광주로 이전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님도 군 복무를 하셨다면 그것은 대한민국 군대에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만약 모르시겠거든 군 과거사위에 가셔서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 문의를 해 보세요. 피터슨 목사는 한국 사회에 대하여 무지하실 뿐만 아니라, 군 복무 경험조차 없으신 듯합니다. 더구나 한국처럼 춣생지와 고향이 다르고 사람들이 이 도시 저 도시로 자주 이사다니는 나라에서 누가 광주 출신이고 누가 부산 출신인지를 단 몇시간 내에 가려내는 것이 가능한가요?

  • 07.10.02 00:06

    <5월 17일 한밤중에 전두환 소장의 지휘아래 있는 계엄사가> 이 또한 이희성 대장이 중장 시절 직속 상관으로 모시며 군 복무를 했던 저희들이 보기에는 어이없는 오류입니다. 1979년 초까지 전두환 소장은 이희성 중장 부하였습니다. 이희성 중장이 군단장이었고, 전두환 당시 소장은 사단장이었습니다. 전방에서 군단장과 사단장의 상하 관계는 매우 엄격합니다. 그런데, 그 상하 관계가 단 몇개월만에 뒤바뀌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전두환에게 이희성은 어른이며, 그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쉬고 깍듯이 어른으로 받드는 관계입니다. 어떻게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전두환 소장 지휘를 받는 것이 가능한가요?

  • 07.10.02 00:12

    <계엄령은 또한 모든 대학들을 폐쇄시켰으며> 이것은 중대 오류입니다. 계엄령과 휴교령은 아무 관계가 없어요. 공교롭게도 문교부의 휴교령과 최규하 대통령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선포 시점이 일치하였던 것뿐입니다. 만약 계엄령이 모든 대학들을 폐쇄시켰다면 10.26비상계엄 선포 때 폐쇄되었어야지요. 계엄은 그때 선포되었던 것이니까요. 5월 16일 오후 6시에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가 5월 19일부터 전국대학교 수업을 전폐하고 시위하여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기로 하였다고 하니깐 문교부에서 휴교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 07.10.02 00:16

    <계엄령 확대조치 발표 몇시간 전에 오후 6시경을 기점으로 하여 계엄 당국자들은 알 수 없는 정도의 많은 수의 학생지도자들을 체포했다. > 이 또한 사건 내용과 날자에 대한 중대 오류입니다. 5월 17일에 오후 6시경에는 그런 일이 없었고, 5월 16일 6시경에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여러 명이 검거되었는데, 그 이유는 김대중 내란 음모가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 현장에서 적발되었기 때문입니다.

  • 07.10.02 00:21

    <부산지역에서 5월 17일 토요일에 광주로 이동된 검은 베레모를 착용한 공수부대원들이었다.> 이 또한 중대 오류입니다. 7공수여단은 전북 금마에 소재한 부대로서 부산에서 광주로 이동한 사실이 없습니다. 전라도 부대요, 지휘관도 호남 사람이었습니다.

  • 07.10.02 00:26

    <그들의 부대는 베트남전에도 참여한적이 있었다> 이 또한 오류입니다. 특전사는 월남전 참전 이후 창설되었습니다.

  • 07.10.02 00:33

    <공수부대원들 각각 대검을 꽂은 소총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이 또한 중대 오류입니다. 착검설을 주장하는 이들 편에서도 착검이 5월 19일 오전 10시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고 확인하여 줍니다. 18일에 동원된 7공수여단은 전라북도 금마 병력으로서 명확하게 광주 사람 정웅 소장 통제 하에 있었습니다. 19일 동원된 11공수와 20일 동원된 3공수에 대하여는 정웅 소장이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했다고 변명하더라도 18일 동원된 병력에 대하여는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호남 춣신 장성 휘하의 전라도 병력이었습니다.

  • 07.10.02 00:56

    <시민투사들은 5 월 21일 오후 1시 30분에는 총으로 무장하고 있지 않았다. > 이 또한 중대 오류입니다. 폭도들은 5월 19일부터 나주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사실은 푸른 눈의 목격자로 알려진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의 5월 20일자 사진들이 명확하게 입증합니다.

  • 07.10.02 01:03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헬리콥터>는 비전문가가 사실을 거꾸로 본 예입니다.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를 아래 인용하여 드립니다:

  • 07.10.02 01:04

    < 14시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 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對空 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다. 15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放送을 하던 같은 機種의 61 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戰敎司로 복귀한 61연대장은 戰敎司에 병력 교체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보고했다. >

  • 07.10.02 01:14

    <대광침례교회에 다니는 한 고등학 생이 싸우는 가운데 죽었다는 것이다.> 군인이 없는데 누구와 싸웁니까? 그것이 아니라 시민군에 징집되어 사격 훈련을 받다가 죽은 것입니다. 시민군 사격 훈련 중 오발 사고로 죽은 고등학생이 열 명이 넘었습니다.

  • 07.10.02 01:21

    <전두환 장군과 그의 동료들은 박총리에게 왜곡된 상황보고를 했으며> 과연 이런 주장은 피터슨 목사가 목사의 양심으로 할 수 있는 말일까요? 님에게는 이런 주장은 5.18유언비어 물들고 찌든 주장이라는 것이 안보이나요?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인 것을 아는 이들이 피터슨 목사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을 옹호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려면 사실에서 출발하시고 이런 무확인 유언비어들을 거두워내셔야 합니다.

  • 07.10.02 01:41

    <침례교와 관련된 사람은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도청 근처의 군 중 사이에 있다가 5월 21일인 수요일에 난사된 총탄에 맞아 죽은 고등학교 학생이었다>도 명백한 오류입니다. 침례교 신자였던 그 고등학생은 시민군 총탄에 죽었음을 목격한 당시 18세의 시민군 김수영(당시 전남고 2학년)의 증언을 아래 인용하여 드립니다:

  • 07.10.02 01:47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 http://study21.org/518/doc/518movie05.htm

  • 07.10.02 16:53

    그래 오발사고로 시민들이 200명명이 집단으로 죽었는지 묵도 싶소이다,군인들의 오인사격으로 총 몇명이 죽은줄 아시요

  • 07.10.02 16:53

    자꾸 사건을 은폐시키고,화제를 딴데로 돌릴려구 하지는 마소.

  • 07.10.02 19:00

    늑대자슥/ 시민군끼리의 총격전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가 생겼으며, 두번째로 큰 사망 원인은 6차례에 걸친 시민군의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이었습니다.

  • 07.10.02 22:08

    역사학도님 잘못 설명하신것 같습니다 (1)시민군끼리 총격전으로 누가 사망자가 생겼다는 의견이지요? (2)또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으로 누가 사망했나요? 두가지 답변 정확히 적어주세요

  • 07.10.02 01:46

    이 증언은 1988년 발간된 것이고, 피터슨 목사의 윗글은 1990년에 쓴 것이니 시민군 증언이라도 좀 읽어보고 쓰셨다면 선교사가 저런 거짓말을 글로 남기는 오류를 조금이나마 면할 수 있었을 것을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 07.10.02 16:55

    당신보다는 저 선교사가 더 진실된다고 생각이 되어지는데요

  • 07.10.02 20:24

    늑대자슥/ 피터슨 목사가 광주사태에 대하여서 무지하면서 광주사태에 대한 저서를 낸 것은 그리 진실된 행동이 되지 못합니다. 무식하면 자료라도 보아아죠. 5월 21일 사망한 고등학생은 시민군 총탄에 의한 사망이라는 시민군 증언이 1988년에 발간되었는데, 그것조차 안 읽어보고 마치 군인들이 총을 난사하였던 것처럼 픽션 소설을 써서 사람들을 속여온 것은 사기행각입니다. 우리가 용납해서는 아니되는 사기행각입니다.

  • 07.10.02 22:12

    아직은 공수군인의 만행이 너무 악랄했다는것은 이미 여러 증언에 밝혀진 사실입니다.최초사망자가 시민이고 군인은 아니잖아요?

  • 07.10.02 22:14

    총기도 처음부터 시민들이 들고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사격을 하지 않았으면 시민들이 촟기를 들지않았을것으로 생각합니다.

  • 07.10.02 22:49

    일곱색깔무지개 님.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의 비디오로 증명되었다시피 5월 19일 나주경찰서를 습격하여 광주시민군은 무장해 있었고 후일 그것으로 군과 교전했습니다. 5.18관련자들의 영상물 중 헬리콥터 나오고 군이 많은 무기를 들고나오는 장면은 시민군으로 부터 회수해 온 것을 이동시키는 장면입니다. 광주 시민군은 군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로 교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 07.10.02 23:22

    일곱색깔무지개 님. 5.18관련 홈페이지에 가서 그쪽 얘기를 살펴본 바에 의하면, <5.18 전야제 노동시위>가 있었고, 계획된 바대로 5.18이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묶임당한채 폭도 혹은 시민군에게 맞아 죽임당한 이는 광주경찰서의 경찰들이었고, 5월 19일 광주천변에서 광주인들에게 돌로 찍혀 죽임당한 공수부대원 있었고, 8월 21일 권용문 상사의 머리가 짓이겨져 죽임당했습니다. 5월21일 13시경까지 공수부대원 3명, 경찰 4명 학살당했지만, 광주시민은 시민군 오발에 의한 시민군 1 명 사망자 있었습니다.

  • 07.10.02 18:55

    늑대자슥/ 그러나 그 고등학생은 시민군 총탄에 죽은 것이라고 시민군들이 증언합니다. 전남대 518연구소 사이트에 있는 시민군 증언록 말입니다. 여기 인용해 드립니다. 당시 18세의 시민군 김수영(당시 전남고 2학년)은 5월 21일 시민군 오발 사고로 시민군이 죽어간 사건을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

  • 07.10.02 22:10

    오발 사고로 200명 이상이 죽고 수천명이 부상을 입었는지요?제발 확실한 답 해주세요.

  • 07.10.02 22:55

    일곱색깔무지개 님. 광주시민군은 광주교도소 해방을 위해 총 6차례 습격하였고 저지하려는 군과의 교전으로 50여명 사망자가 있었습니다. 만약 님이 주장하시는 것처럼 훈련받은 군이 완전무장한 무기로 죽이기로 작정하고 수만~수십만 웅집해 있던 시위대에 집중 난사하였다면 수분내 수천~수만명이 사망했을 겁니다.

  • 07.10.03 08:16

    일곱색깔무지개님, 총기 오발 사고로 10명 이상, 시민군 사격 훈련 중 총기 조작 오발로 10명 이상 사망한 외에도 시민군끼리 벌인 시가전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 중 발생한 17명의 시민군 사망자 외에는 시민군 총탄에 의해 대부분 사망하였던 이유입니다.

  • 작성자 07.10.05 10:50

    역사학도님은 사실에 근거한 자료를 가지고 댓글을 올리시길 바랍니다.님의 글을 보면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럴싸한 분위기로 글을 쓰더군요.

  • 07.10.05 14:54

    Dr.OB/GYN님, 혹시 님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점이 있는지요. 그럴 때는 서로 같이 근거 자료를 제시하도록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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