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저자 아놀드 피터슨 목사는 1969년부터 73년까지 미국 미조리주에서 목회하다가 지 금부터 22년전인 1973년에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미남침례교회 선교사로 자원한 피터슨 목사는 1974년부터 2년간 한국어를 공무한 후 1975년부터 1981년까지 전라남도 광주에서 가족과 함께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동안 배태선이라는 한국이름을 사용하였다. 광주민 주화 운동을 현장에서 체험한 후 그는 사역지를 대전으로 옮겨 1990년 선교사 생활을 은퇴하고 영주귀국할 때까지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교회역사를 강의하였다. 배태선 목사는 1983년 미국 미조 리주 캔사스 씨티에 있는 Midwestern Baptist Theological 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 학위를 취 득하였다. 현재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목회에 전념하고 있다.
* 저자 서문
나와 우리가족은 1980년 봄에 한국의 광주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광주민주화운동 (Kwangju Incident - 처음에는 광주사태로 불리웠으나 지금은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불린다. 역주) 으로 알려지게 된 사건들 속에 휘말려서 그 사건들을 직접 체험했다.
광주민주화운동이 진행되는 동안과 바로 그 이후에 나는 그 사건들에 대한 나의 회고록을 글 과 테이프에 담는 작업을 했다. 수년동안 난즌 여러 친구들에게 이 사건들에 대해 장시간 이야 기 해왔다. 그러나 나는 1980년 당시와 그 이후 여러해 동안의 정치적 자유의 결여로 인해서 그 이야기를 글로 내고 싶은 나의 바램은 좌절되었다. 그런데 이제 그 이야기를 글로 밝힐 수 있는 때가온 것 같다.
이 책에 서술된 이야기는 그 사건들에 대한 단지 한 사람의 사적인 회고록임을 밝히고자 한다. 나는 이 책에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철저히 보고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그렇 지만 그 비극적인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 나 자신이 했던 경험과 이해를 낱낱이 나누었다고 생각 한다.
한국역사와 정치에 대해 매우 친숙해 있는 독자들에게는 1, 2장이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지 도 모른다. 1, 2장은 광주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이해하는데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정치적 배경을 묘사하고 있다. 물론 단순하고 제한된 범위의 묘사이다.
침례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는 몇몇 부분들은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한국의 침례교인들은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당시에 전국적인 복음전도대회에 참여하고 있었 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나의 이 보고서 내에는 침례교 전도대회에 대한 여러 언급들이 포 함되어 있는에, 그 이유는 전도대회가 그 사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여러 해 동안 내가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집착해 오는 모습을 견뎌낸 우리 가족과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현하고 싶다. 이 책을 쓴다는 것 자체가 내게 있어서는 치유적인 역 할을 했다. 독자들도 이 책을 읽으면서 도움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1990년 2월
- 아놀드 피터슨 (Arnold Peterson)
* 역자 서문
나는 광주시민도 아니고, 전라도 출신도 아니다. 사실 나는 충청도 사람이며 정치적 야심과는 거리가 먼 신학대학 교수이다. 현재 침례신학대학교 기독교 교육학과에서 상담심리학을 강의하고 있다. 이 책이 아직도 마음의 응어리를 안고 살아가는 광주시민들에게 치유적인 위로의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번역에 착수하였음을 밝혀둔다.
나는 1980년 광주사태 또는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났을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홍보전문위 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윌리암 글라이스틴 이었으며 나의 임무중의 하나 는 그가 주요 연설을 할때 그의 말을 한국어로 번역하거나 통역하는 것이었다. 나는 신군부가 정 권을 강탈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무기력하게 방관만 했던 역사의 죄인중의 하나이다. 당시 정부 에서는 광주의 진상을 왜곡하여 국민들을 기만하고 광주시민들을 격노케 하였지만 난는 속수무책 으로 구경만 했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순교한 영혼들에게 속죄하는 심정으로 이 글을 번역했다.
광주시민은 우리나라를 민주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희생과 댓가를 치렀다. 아무 죄 없는 어린이와 학생들, 청년남녀와 노인들이 군인들의 총칼에 무참히 죽어갔다. 그들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광주사태는 민주화 항쟁으로 재정의 되었고 그들은 민주열사로 역사에 기록되게 되었다. 광 주시민, 특히 사망자의 유족들은 5공정권의 가장 큰 피해자이다. 나는 나머지 국민과 함께 5공의 간접적인 피해자이다. 오대영 사건을 일으킨 원파는 5공 정권에 엄청난 양의 정치자금을 바쳐 5 공정권을 도와주었다. 그들이 운영하는 (주) 세모에서는 레이건 대통령 방한당시 경호를 지원하였 고 그 교주는 민정당 모범당원과 월계수회 회원의 자격으로 활동하였다. 나는 그의 비리를 폭로 하는 것으로 인하여 1990년 11월 이래로 명예훼손및 신용훼손으로 피소되어 교도소와 법정을 넘 나들며 재판대에 서고 있다. 그러나 오대양의 실체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죽은 사람은 많 은데 누가 죽였는지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어가야 했는지 아직도 긍금증은 풀리지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광주시민 수백명이 아무 죄없이 죽어간 것은 분명한데, 내가 살상을 명령했다고 살상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사람은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광주시민들의 한결같은 목 소리는 가해자가 나서면 용서라도 하겠는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제에 늦게나마 외국인의 객관적 관점에서 기록된 광주의 민주화 항쟁의 진상을 우리밀로 소개하는 것 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저자는 외국인 선교사로 광주를 경험하였다. 한국에 대한 이분의 순수한 사랑은 이분의 유창한 한국어 구사능력에 잘 반영되고 있다. 또 한국민에 대한 이분의 사랑도 페이지마다 배어 있다. 미남참례회 선교사로서 광주에서 가족과 함께 활동하던 피터슨씨는 1990년 귀국하기까지 수년간 대전에 있는 침례신학대학교로 사역지를 옮겨 한국어로 교회사를 강의하였다. 본인이 서 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는 사건이 발생한지 10년만인 1990년에야 당시의 경험을 문서화할 수 있었다. 그가 역사가의 안목을 가지고 당시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 있다는데 이 책의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1990년 한국을 떠나기전, 이 책의 원본 한권을 나에게 선 물로 주고 영구 귀국하였다. 5.18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진행되는 싯점에 이 책을 소개하게 된 것 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수사하시는 분들은 물론 사건의 진상에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저자는 이글을 쓰는 것 자체가 본인에게 치유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글을 번역하는 일도 나에게 치유적인 경험이었다. 나는 얼마전에도 민주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묘역을 찾았었다. 나는 죽어간 이들과 그 유족들을 생각하며 깊은 상념에 잠겼다.
나는 하나의 상담심리학자로서, 그리고 민주선열들의 가장 많은 은혜를 입고 있는 대한국민 의 한 국민으로서 이 회고록이 광주시민과 민주열사의 유족들에게 치유적 메시지로 전달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비극의 배경
1980년 5월 18일은 일반적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 날로 간주되고있다. 사실 광주 지 역의 시민들은 이 날을 광주 민주화 운동 발생일로 부르고 있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날 이전 칠개월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 약간의 지식을 갖지 않으면 광주 민주화 운 동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1979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가장 가까운 심복 중 하나인 한국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됐다. 암살의 동기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부마(부산-마산) 사태를 정부 차원에서 잘 못 처리한 것에 대해 책임을 져 희생양으로 직위해제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 같다.
부마사태란 그 이전인 1979년 10월에 부산과 마산에세 발생한 학생과 노동자의 일련의 데모 들을 일컫는 말이다. 부산시와 마산시의 첫 글자를 따서 부마사태라고 불리고 있다. 밝혀지지 않 은 많은 수의 학생과 노동자 시위자들이 경찰과(경찰이나) 군인들에 의해 죽거나 손상을 입었다. 이 사태에 대한 설명과 조사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강한 압력들이 있었다.
김재규는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만찬 파티에서 살해했다. 김재규의 부하들 중 일부는 박정희를 경호하는 요원들을 죽였다. 그날 이른 시각에 김재규는 당시 참모총장인 정승화 대장에 게 암살을 계획한 안가 근처에서 자신을 만날 것을 미리 주선해 놓았다. 암살이 있은 바로 후에 김재규와 정승화 대장은 국방부로 가서 총리와 각료를 불러 모았다.
하지만 그는 총리의 성품을 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규하 총리는 일반적으로 약하고 박대통령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전문 관료였다. 그날 밤 국방부에서 최총리는 대통령 의 후계자로서의 자신의 헌법상의 역할을 천명하면서 자신을 대통령 서리로 선언했다. 그래서 계 획되었을지도 모를 (혹은 계획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어떤 쿠데타 시도도 갑작스러운 최규하의 헌법상의 권위 주장에 의해 좌절되었다.
불과 몇 시간 후에, 대통령 시해 사건을 목격한 대통령 비서실장 김계원은 정장군에게 김재 규가 암살자임을 알렸다. 정승화는 곧바로 김재규를 체포했고, 그 사실을 최규하 대통령 서리에게 알렸다. 최규하는 계엄령을 발하고 전국을 국가 비상사태 하에 두었다.
몇 날이 채 지나기 전해, 시해사건을 조사하고 연루된 사람들은 재판하기 위해서 계엄 법정 이 구성되었다. 수도방위사령관인 전두환 소장이 조사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정장군이 암살에 연루되었을지도 모른다는 혐의가 나돌기는 했지만, 그는 어떤 잘못에 대하여도 혐의가 없었다.
최규하는 박정희의 6년 임기 중 남은 4년을 채우는 대통령으로 재가를 받았다. 하지만 최규 하는 자신이 과도기를 담당하는 대통령이고 남은 기간 모두를 채울 생각이 없음을 곧 시사했다. 12월 초에 최규하는 정치개혁을 위한 일련의 계획들을 발표했다. 박정희의 독재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유신헌법은 개정되었다. 또한 새로운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을 선출하는 자유민주 선거를 1980년에 치르도록 계획되었다. 국민들은 이 뉴스를 환영했다. 박정희의 18년 통치는 너무 길며, 한국인들은 자유선거를 통해 그들 자신의 대통령을 뽑을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고 그럴 기 회를 가질 자격이 있다는 감정이 국민들 사이에 강하게 새겨져 있었다.
몇 날 후인 1979년 12월 12일에는 전두환 소장에 의해 주도된 일단의 젊은 장군들이 군(軍) 내부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참모총장이면서 계엄군 사령관인 정승화 대장과 그를 지지하는 몇몇 다른 장군들을 체포했다.
전두환 소장은 그 체포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정장군을 박대통령 시해 사건에 의도적으로 연 루시키는 새로운 증거와 기소제목들을 갖고서 최대통령을 찾아갔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전두환 은 최대통령의 허가가 있든 없든 간에 군을 움직여 정장군을 체포하겠다고 한다. 최대통령은 전 두환의 계획을 묵인했다.
어떤 한국 정치가는 최규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가 보다 강한 성품을 소유했다면 자신 을 찾아온 장군들의 요구를 반대했을 것이다. 미국이 그를 지원했을 것이므로, 군인들은 필경 물 러났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심약한 사람이었으므로 군인들을 지지하고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고 말았다 (1979년 12월 24일자 뉴스위크지[Newsweek] 39쪽). 한국에 주재하고 있던 미국 대사는 워싱턴에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정치자유화를 반대하는 박정희 추종자들이 쿠데타를 일으 켰다 (1979년 12월 12월 24일자 뉴스위크지[Newsweek] 38쪽).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쿠데타의 동기가, 민주적 개혁의 속도를 늦추고 박정희에 의해 만들어 진 정치제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전두환과 그의 지지자들은, 최대통령이 이미 선 언하고 공약한 정치개혁과 민주화라는 현실에 직면했다.
전두환은 그이 측근들을 고위 자리에 둠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견고히 하기 시작했다. 전두환 은 장군들 중에서 가장 강하고 영향력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는 보다 영향력 있는 자리들을 친구들과 지지자들에게 맡겼다. 이 당시 많은 수의 고위 장성들이 옷을 벗고 강압적으로 물러났 다. 1980년 초에 최대통령은 전두환 장군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다. 한국 헌법은 군인이 중앙정 보부장이 되는 것을 금했다. 그렇지만 전장군은 자신의 군 계급과 책임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과도기적 임시 기간 동안만 그 직을 맡기로 했다.
반면 최대통령은 자신의 정치개혁 계획을 추진했다. 1980년 봄에 최규하는 야당 정치인이면 서 박정희 시대의 정치적 볼모(정치범)였던 김대중에게 완전사면을 허락했다. 최규하의 사면으로 김대중은 시민권과 정치적 권리를 회복하게 되었다.
비록 정부가 약속한 대통령 선거에 대한 상세한 계획들이나 날짜를 공표하지 않았지만, 이미 세명의 후보자들이 부각되었고 이들은 대통령직을 향해 간접적으로 선거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김종필, 김대중, 김영삼이 그들이었다. 그들은 삼 김 (Three Kims)"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김종필은 고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사람의 조카이다. 그는 총리를 역임한 사람이었 다. 1980년 봄에 그는 국가 입법부의 일원이었으며, 정부 여당인 민주 공화당의 새로이 선출한 대 표였다.
김대중은 1967년과 1971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대항하여 출마했는데, 1971년에는 4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1973년에 그는 일본에서 정치적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한국 중앙정보부에 의해서 납치되었었다. 그는 한국으로 다시 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재판을 받고 여러가지 선거법 위반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에게 적용된 하나의 기소 제목은, 만일 국민 들이 1971년에 박정희의 재선을 막지 못한다면 결코 다시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거짓말을 하고 대통령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의 예견은 올바른 것으로 판명되 었다. 재판 도중에는 그가 공산주의자들과 연루되어 있다는 암시들이 나돌았다. 박정희가 정치적 위협으로 느껴던 사람을 정치무대에서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거짓된 기소제목들이 있었다. 김대 중은 시민적 정치적 권리들이 1980년 봄에 최규하 대통령에 의해 복권될 때까지 한국에서 가택연 금 상태하에 있었다. 권리를 회복하자 마자 그는 약속된 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두면서 정치무대 에 다시 뛰어들었다.
김영삼은 1978년 이후에 야당인 신민당의 총재로 있었다. 당의 모든 회원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김대중은 신민당의 자연스러운 지도자였으나, 그가 정치적 권리를 손실했을 때 당 은 다른 지도자를 선출했다. 김대중은 이제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게 되었으나. 김영 삼은 물러나서 당을 김대중의 지도아래 연합하겠다는 어떤 암시도 보이지 않았다.
세 김씨(Three Kims) 모두는 각자 다가오는 선거를 예기하고 전국을 돌면서 지지를 다지고 자 분주했다. 그 당시는 어떤 사람이 국민의 생각과 마음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 는지를 말하기에는 이른 시기였다. 이런 모습이 1980년 늦은 삼월과 이른 사월의 한국 정치상황 이었다.
5.18 이전의 학생시위
외부에서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저런 시위들에 참여하는 것이 한국대학생들의 통 과의례 중 하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럴지라도 학생시위는 한국의 사회적, 정치적 풍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금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학생들은 정치적으로 적극적이었다. 정치적 변화 요 구가 있을 때면 학생들이 주도적으로 그 변화를 일으켜야 된다는 것이 한국의 일반적인 문화적 기대들 중 하나가 되었다. 1960년 4우러 19일의 학생시위는 이승만 정권을 물러나게 하였다. 박정 희 통지 기간들 중에는 종종 학생들이 정부에 정치적 압력을 가하는 전위부대였다.
학생들이 시위할 때면 정부지도자들은 의례히 학생들은 시위하지 말아야 되며 대신 열심히 공부해서 미래 사회에서의 지도적 역할을 준비해야 된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4월 19일이 되면 정 부측이건 야당측이건 간에 지도자들은 4.19의거시에 죽어 국가영웅으로 안치되어 있는 서울의 수 유리 묘지로 순례 행진을 벌인다. 그래서 사회의 지도자들은 학생들에게 시위하지 말라고 말하지 만 실제로 그들의 행동은 학생들에게 시위가 인정되는 길이요 영웅이 되는 길임을 보여준다. 1980년의 이런 역사적 배경과 정치적 환경들을 생각한다면, 학생들이 그들의 정치적 견해를 피력 하기 위해 시위를 할 것이라는 사실은 필연적이었으며 시민들에 의해서 기대된 일이었다.
1980sus 4월 동안 많은 대학 캠퍼스 (특히 서울에 소재한 대학들)에는 학생 시위집회들이 있 었다. 학생들은 약속된 개헌의 속도가 느린 것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그들은 또한 최규하 정부 가 대통령 선거일을 아직도 발표하지 않는 것에 대해 불만을 나타냈다. 다른 불만적 요소들은 계 엄령의 지속과 정부 냉서의 점증하는 군대의 영향력이었다.
4월말에 코리아 타임즈[THE KOREA TIMES]지는 학생지도자들이 5월 14일을 최종일로 정 했다고 보도했다. 그날까지 개헌에 대해 어떤 특정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선거일이 발표되지 않으 면, 가두시위를 벌이겠다고 공포했다. 5월 14일이 되어서도 정부는 대통령 선거일을 여전해 공고 하지 않았다, 정부는 유신헌법 개정을 시작할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자신들이 위협했듯 이 여러도시에서 시위를 확산시켜나갔다, 이전의 시위들은 학내에서 열렸으나 이제는 학생들은 캠퍼스 바깥으로 이동해서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매우 중대한 결정이었다. 전통적으로 학생들은 학외보다는 학내에서 시위 를 하기가 훨씬 더 자유로웠다. 정부가 어떤 종류의 시위도 금했던 때가 있었지만, 정부의 압력이 비교적 적었을 때에는 경찰은 학생들이 시위를 캠퍼스 내에서 하는 한 시위를 허용했다. 그래서 학생들이 캠퍼스를 벗어나 가두로 진출해 시위를 하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정부 와의 대결에서 자신들의 요구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높이고 있음을 의미했다.
한국과 미국의 언론 보도에 따르면 5월 14일에는 가장 큰 시위와 가장 격렬한 시위가 서울에 서 일어났고 한국의 대부분의 주요 도시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광주에서는 시위가 오후 3시쯤에 시작되었다.
많은 학생들이 도청 앞에 집결해서 계엄령 철폐와 같은 몇몇 표어를 제창했다. 시 경찰들은 시위지역에 이르는 모든 거리들을 통제했다. 그들은 교통의 흐름을 다른 곳으로 돌렸으며 주의 깊게 지켜 봤으나 시위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그날 학생들과 경찰들은 도청 앞 광장 도로에 앉아 있었다. 시위가 끝났을 때 학생들은 조용히 귀가했고 내가 아는 한 어떤 체포도 없었다.
5월 15일에는 학생들이 도청 광장에 재집결했다. 이때 시위는 오후 1시쯤 시작되었다. 또 다 시 그들은 계엄령 철폐 유신 헌법 철폐 민주주의 회복과 같은 표어들을 제창했다. 그들은 노래를 불렀고 시위의 전반적 분위기는 마치 축제 같은 것이었다. 이전 날처럼 경찰은 그 지역을 통제했 고, 교통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매우 평화스러운 시위를 자세히 지켜봤다. 참가한 학생들의 수는 계산하기 힘들었으나, 대략 12,000에서 15,000명에 이르는 것 같았다. 이날도 역시 어떤 폭력이나 경찰과의 충돌은 없었다.
그 후에 접한 뉴스 보도는 서울에서 그리고 아마도 다른 도시들에서는 5월 15일 시위를 하는 학생과 경찰 사이에 충돌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서울에서는 최루탄이 경찰에 의해 사용되었고, 시 위자들은 돌과 화염병을 던졌다. 5월 15일은 서울의 경찰들 중 한명이나 그 이상이 한 민간인이 몬 버스에 의해 죽거나 다친 날이기도 하다고 생각한다.
5월 16일 금요일. 나는 5월 18일 주일에 시작될 시 전역에 걸친 한미 복음 전도 대회를 준비 하고 주위 교회들을 방문하기 위해서 시 안팎으로 내왕했다. 다니면서 내가 만난 택시 운전사들 과 다른 사람들에게 시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금요일에 또 하나의 시위가 있을 것 같다고 애기했다. 3시를 전후해서 도청 앞에는 군중이 조금 모여 있었다. 군중이 많지 않아서 시 위가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저녁 7시 30분이 되자 도청 앞에 많은 군중이 모여들었으며 그 들은 횃불을 들고 도청건물에서 약 4Km 떨어진 전남대학교까지 횃불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이 행렬중에 다시 한번 계엄령 철폐! 유신헌법 철폐! 민주주의 회복!과 같은 소리가 외쳐졌다. 그들 의 언어는 강했으나 여전히 시위에는 축제적 분위기가 있었다. 이런 분위기는 기독교 찬송곡인 내게 강같은 평화와 같은 곡조를 딴 노래들 속에 반영되어 있었다.
폭풍전의 평온 5월 16-17일
1980년에 한국 침례교와 플로리다 침례교 협의회는 3년간의 한미 전도 대회 프로그램중 세번 째 해를 맞고 있었다. 이 프로그램의 절정은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시에서 일련의 복음 전 도 대회를 여는 것이었다. 전도 대회는 주일 밤에 시작해서 수요일 밤에 끝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일날에는 지역 교회들의 전도 대회들이 시작되어서 수요일까지 진행되게 되어 있었다. 광주에서는 시 전역 십자군 대회가 5월 18일에서 21일까지로 예정되어 있었고 지역 교회 들의 십자군 대회는 5월 25일에서 28일까지로 예정되어 있었다.
플로리다에서 온 참가자들이 5월 14일 서울에 도착해서 롯데호텔에 여장을 풀고 있었다. 광 주 전도대회 참가자들 중에는 설교자인 드윗 매튜스 목사 (Rev, Dewitt Mattews)와 찬양 지휘자 인 빌리 싸우서 목사(Rev, Billy Souther)아 피아니스트인 에드워드 라이언 박사(Dr, Edward Lyon)와 오르가니스트인 루이 베일리 박사(Dr, Louie Bailey)가 있었다.
네명의 플로리다 출신 전도단원은 5월 16일 금요일 오후에 광주에 도착했다. 이들 네명과 침 례교 순회 선교사인 주디 왓스와 나의 아내 바바라와 나는 금요일 밤에 오리엔테이션과 환영회 참석차 광주지역 침례교 목회자들과 만나고 있었다. 환영연은 전도대회단원이 묵고 있었던 관광 호텔 길 건너편에서 열렸다. 도청앞 광장에서 불과 두 구획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환영연이 시작될쯤에는 거리는 깨끗하고 교통도 정상적이었다. 그 날에 시위가 있는지 없는 지를 보기위해 서성이는 무리들이 여기저기 눈에 띄었다.
식사 중에 시위가 광장에서 시작되었다. 횃불시위 행렬들이 광장을 빠져나가 우리가 모인 음 식점앞 거리를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창가로 가서 행렬을 지켜보았다.
이런 모습이 당시 광주시민들의 분위기와 심리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시위에 대해서는 많은 호감과 관심이 있었으며, 어느정도 시위자들에 대한 동정과 지지가 있었다. 그렇지만 시위자들 수 만큼의 사람은 지켜보는 사람들이었으며, 매우 적은 수의 성인들만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었다. 동 시에 진행중인 시위에 대해 어떤 불만을 표현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5월 16일에 서울의 학생지도자들은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 최규하정부가 그들의 요구 에 응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이삼일 시위를 하면서 계엄령 철폐 및 선거일 공고를 강조했으므 로 정부가 건설적인 반응을 하리라고 믿고 있었다.
서울 학생들의 결정을 따라 광주의 학생들은 5월 17일 토요일에는 어떠한 시위도 열지 않았 다. 그러나 현재 5.18 민주화 항쟁 혹은 광주사태 또는 민주화 운동이라고 알려진 사건들을 초래 하는 다른 행동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토요일 정오에 신순균 목사와 드윗 매튜스와 나는 시 전역에 걸친 복음전도대회를 현지에 알 리기 위해 KBS광주지국에 있었다. 스튜디오에 들어서서 인터뷰 프로그램을 막 방영하기 전에 우 리는 KBS에 방영되고 있는 정오 뉴스를 보았다.
그 뉴스의 대부분은 김종필씨가 막 발표한 담화문에 대한 것이었다. 김종필은 국회에서 정부 여당 대표로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기 직전에 그는 당원들에 의해 그 자리에 선출되었 다. 김종필의 성명서는 자신이 야당인 신민당에 의해 상정된 안건에 찬성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었다. 이 안건은 계엄령을 철폐하고 정부의 전 권력을 최규하 대통령에 의해 주도되는 민간인 정 치인들에게 돌려준다는 것이었다.
야당인 신민당은 여러 주 동안 그런 입법안을 주창하고 있었지만 국회에서 그 안건을 통과시 키기에는 표가 부족했다. 국회가 5월 20일 화요일에 소집되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김종필이 이 안 건을 지지한다는 것은 이 안건이 확실히 곧 통과될 것이라는 것을 뜻했다. 계엄령이 사실상 철폐 되면 막후에서 실제로 국가를 통제하고 있는 군사 지도자들이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과 권위를 잃 게 될 것이다.
바로 그 오후에 광주에 살고 있는 장로교 선교사인 헌트리씨 부부가 광주에서 대전으로 가는 기차로 여행을 하고 있었다. 그 열차는 대전으로 가는 군인들로 거의 매워져 있었다. 당시에는 그 렇게 많은 수의 군인들이 똑같은 열차를 타고 가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며, 혹시 특별한 이 유가 있지나 않은가 생각했다.
그 후의 사건들에 비추어 보고, 그 후에 알게 된 이런 저런 정보들을 짜맞춰볼때, 이것은 군 인들을 자신들의 고향에서 다른 곳으로 대량 이전시키는 일환이라고 나는 결론지었다. 광주출신 의 군인들은 대전으로 부산출신의 군인들은 광주로 이전되었다. 명백히 유사한 이전들이 한국이 주요 다른 도시에서도 이루어졌음이 분명했다. 이것은 전두환 장국과 그의 동료들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던 계엄령 확대의 준비과정에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이런 군대 이동의 목적은 民-軍충 돌이 일어날 때 있을 수 있는 가족들과 친구들과의 직접적인 대결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이루어진 것 같다. 물론 이런 군사적 행동들과 계획들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 은 다음날인 1980년 5월 18일에 일어날 사건들에 대해서도 거의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우리는 토요일 밤에 다음날 저녁에 있을 우리 도시 전역에 걸친 복음전도대회 시작을 그려보 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우리는 시위가 전도대회의 성공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염려하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학생들의 시위가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에 일어났음을 인지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시위가 평화적이었으므로 도시의 정상적인 삶의 형태에 어떤 눈에 띄 는 위협을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더욱이 토요일에는 시위가 전혀 없었으므로 우리는 시위 가 최소한 당분간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토요일인 5월 17일 한밤중에 전두환 소장의 지휘아래 있는 계엄사가 현재의 계엄령을 나라 전역으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 조치는 현재 작동중인 최규하 대통령의 민간정부 기능 을 효과적으로 와해시켰다. 계엄령은 또한 모든 대학들을 폐쇄시켰으며 모든 공공 집회들을 금 지시켰다.
토요일 저녁 - 곧 계엄령 확대조치 발표 몇시간 전에 오후 6시경을 기점으로 하여 계엄 당 국자들은 알 수 없는 정도의 많은 수의 학생지도자들을 체포했다. 연금상태에 놓이게 된 정치지 도자들 가운데는 그날 오전에 계엄령 철폐에 찬성투표를 하겠다고 선언한 김종필과 자유로운 대 통령 선거에서 마지막 야당후보자였던 김대중, 그리고 많은 정부와 야당의 유력 정치가들이 포 함되어 있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 있다. 5월 18일
주일아침 우리는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서 계엄령이 확대되었고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체포되 었음을 알게 되었다. 교회 예배활동은 금지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계획을 추진해 나 갔다. 우리가 여러 교회들을 방문하면서 볼 때는 어떤 소요도 거리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았다. 그 렇지만 도시 전역에 걸쳐서 특히 전도대회 본부가 있었던 관광호텔 주위 도심에서는 매우 많은 수의 전투경찰과 군인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아침 예배를 드리기 위해 광주의 여러 교회들로 손님을 데리고 갔다. 드윗 매튜스와 나는 서산(지금의 북광주)침례교회에 갔다. 루이스 베일리와 주디왓스와 내 아들 덕은 제일 침례 교회에 갔다. 성림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동안 바바라는 거리에서 외치는 듯한 굉음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김영수 목사에게 무슨 소리인지를 물었다. 그는 그저 데모하는 소리일 거 라고 말했다. 우리는 나중에 이때부터 경찰이 학생들에게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음을 알게 되었다. 목격자가 내게 전해준 바에 따르면, 공수부대원들이 오전 11시부터 학생들에게 폭력을 사용했다 고 한다. 어떤 사람은 친구가 11시께 맞아 머리가 심하게 찢어졌다고 했다. 또다른 사람은 군인들 이 대학구내에 들어가서 학생들을 모두 밖으로 쫓아냈다고 했다. 모든 교회에서의 예배는 아무 사고없이 진행되었다. 그런데 교회에서 호텔로 오는 길에 우리는 시위가 거세어지고 있음을 감지 했다. 경찰지프차가 그들 앞 코너 길쪽에 나타나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운집해 있는 군중들을 향 해 최루탄을 쏘아댔다.
점심시간 후에 우리는 학생들이 시위했던 곳으로 가 보았는데 이미 그들은 그곳을 빠져나가 고 없었다. 다음 이틀동안 학생들은 그런 식으로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찻집, 가게, 골목길에 모 여 있다가 갑자기 거리로 몰려 나왔다. 그들은 경찰을 불시에 몰아내기도 하고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시위행렬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전경들과 맞닥뜨리면 그들은 보통 옆 거리와 상가로 흩 어져 숨었다. 우리가 오후 2시께 호텔로 돌아왔을때는 도로는 폐쇄되어 있었다. 우리는 전경이 두 줄로 정렬해 있는 곳을 통과해야 한다. 주요 거리들은 군인과 전경에 의해서 차단되어 있었다. 우 리는 소수의 학생들이 여기저기에서 큰 도로로 진입하려다가 전경들이나 군인에 의해서 막히고 마는 것을 보았다. 이 무렵(약 오후 2시 30분)에 우리는 학생들과 시위 진압자들 사이에 어떤 격 돌도 일어나고 있지 않음을 보았다. 학생들은 막히게 되면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도 다른 곳에서 큰 도로로 진입하고자 시도했다.
군인들은 구성, 훈련, 행동면에서 전경과는 매우 달랐다. 5.18일 주일과 5월 19일 월요일에 광 주에 나타난 군인들은 부산지역에서 5월 17일 토요일에 광주로 이동된 검은 베레모를 착용한 공 수부대원들이었다. 그들의 목적은 계엄확대가 토요일 한밤중에 발효되었을때 그 후에 있을지도 모를 시위들을 막는 것이었다.
그들의 부대는 베트남전에도 참여한적이 있었다. 그들은 [죽이고 없애라]는 식의 특수훈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공수부대원들 각각 대검을 꽂은 소총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전투복을 입고 있 었다. 그들은 즉시 젊은 사람의 어깨, 갈비뼈, 등을 곤봉으로 치기 시작하더니 무릎을 꿇도록 했 다. 그들은 그가 시위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면서 조사했던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저 집 에 가는 길이라고 했지만 그의 말은 전혀먹혀들지 않았다. 그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으므로 떠나도록 해줄 것을 빌었다. 그들은 계속 그를 때렸으며 허벅지 다리 윗 부분을 차고는 대검을 그의 목에서 불과 몇 센티 앞으로 갖다 댔다. 우리가 거기 서 있을 때 많은 군중들은 이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몇몇 사람들은 공수부대에게 돌을 던졌다. 공수부대원중 두 명이 군중 들을 쫓아냈으며, 다른 한 명은 계속해서 그 젊은이를 때렸다.
호텔 정문에서 두 구획정도 떨어진 곳을 걷는 도중에 나는 다른 세 사건을 목격했다. 매번 두명 이상의 공수부대원들은 머리를 약간 기른 젊은이를 공격해서는 그들을 곤봉으로 쳤다. 각각 의 경우에 공격받는 사람들이 어떤 도발 행위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5월 19일
오후 1시 30분경에 호텔로 돌아왔을때, 팀원들은 나에게 자신들이 목격한 사건에 대해 이야 기 해 주었다. 공수부대원들이 많은 젊은이들을 8-10줄로 나란히 세워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팀원중 한사람은 그 모습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수백명의 학생들이 곤봉으로 맞고 차 이고 총 개머리판으로 맞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옷을 다 벗기고 속옷만 입힌채로 벨트로 손 이 묶인 상태로 맞았습니다. 그들은 트럭에 실려 갔습니다. 전경들은 군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을 지켜만 보았습니다.
월요일 정오쯤에는 상황이 급속히 악화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신뢰할만한 여러 자료들을 종 합해 볼 때 많은 다른 사건들이 월요일에 발생했음을 알게 되었다. 월요일 오후에는 일단의 젊은 여성들이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감금되어서 속옷만 입힌 채로 곤봉으로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또 한 조선대에서는 일단의 군인들이 구내에 들어가서 학생 시위자들을 색출해 내면서 건물 대부분 의 유리창을 깨뜨렸음을 알게 되었다.
오후 4시30분쯤부터 나는 차에 사람들을 가득 태워서 그들의 집이 있는 여러 곳까지 세번 왕 복 운행했다. 이렇게 이동하는 사이에 나는 공수부대원들이 있는 거리는 피하고자 했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모든 주요 교차로에 공수부대원들이( 경찰들앞에서) 모든 교통을 감독하고 통 제하고 있었다. 이런 사이에 나는 공수부대원들이 시민들을 공격하는 것을 여러번 (20번도 넘게) 목격했다. 한 사건은 특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한 교차로에서 나는 매력있게 생긴 여성 한 사람만을 태운 택시 옆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통을 지휘하던 경찰은 그 택시를 교차로 너머로 지나도록 신호를 보내고자 했다. 그러나 한 공수부대원은 그 거리로 걸어와서는 즉시 그 택시 앞에 멈춰 섰다. 그는 차덮개에 곤봉을 내려놓고 그 젊은 여성이 나오도록 요구했다. 우리는 교통의 정중앙에 있었기 때문에 경찰은 우리가 앞으로 나갈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건을 끝까지는 볼수 없었다. 공수부대원의 행동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는 분명 그 젊은 여성을 심문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경찰의 행동은 그 여성을 승객으로 간주 해서 택시를 보내고자 한 것임에 틀림없다.
5월 20일
5월 20일 화요일은 중대한 날이었다. 주일과 월요일에는 공수부대원들에 의한 육체적 학대행 위와 살상과 많은 가혹행위가 저질러졌기 때문에 시민들은 극도로 동요하고 있었다. 만일 화요일 에 정부가 공수부대원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고 공수부대원들을 철수시켰다면 아마도 더 이 상의 피흘림 없이 문제가 해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다. 오전 10시 에는 전도대회팀과 목사들은 한 곳에 모였다. 기도를 한 후에 우리는 전도대회를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토론했다. 우리는 목사들 각자가 현 상황에서 해야 되는지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밝힐 것 에 요구했다.
한 목사는 자신이 월요일 오후 예배 후에 집으로 가는 길에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관광호 텔 근처의 길옆 가게에 갇혀 있었다로 했다. 그 때 그는 그 가게 창문을 통해서 한 군인이 자신 의 대검으로 어떤 젊은이의 목을 베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 젊은이는 그 군인의 신경을 자극 할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고 했다. 우리는 그 목사에게 좀더 자세히 물어 보았다. 그 는 자신이 실제로 이 사건을 목격했으며, 그 사건이 피난했던 그 가게에서 불과 3∼4m내에서 일 어났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학생들이 도심을 빠져 나가는 것을 돕기로 했다. 나는 계림동에 있는 그 교회에 가서 세명의 학생들과 두 명의 성인을 차에 태웠다. 우리는 광주 북쪽 끝에 위치한 송정리 마을까지 갔다. 가는 도중에는 합승한 사람들의 요구에 따라 어떤 군인들도 피해가고자 했다. 한 가족은 친 척이 있는 상무동에서 내렸다. 다른 가족은 시골에 있는 친척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송 정리에 있는 시외버스 터미널로 갔다. 가는 도중에는 어떤 문제나 방해선건도 일어나지 않았다. 광주 시내로 돌아오면서 나는 또 시위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 시위의 목적이 주일과 월요일에 공수부대원들이 저지른 행위를 항의하는 것이라고 들었다. 시위는 광주의 택시 운전자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위험에 처한 적도 있었으며, 어떤 이들 은 선량한 사람들이 감금되는 것을 막으려고 애쓰다가 다치기도 했던 사람들이었다. 화요일 낮 동안에는 사람들이 주일과 월요일에 있었던 육체적 학대와 죽음에 대한 분노를 장시간 표출하고 있었다. 시민들의 마음에는 (나 역시 이 의견에 동의한다)화요일부터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이 주 일과 월요일에 공수부대원들이 저지른 학대행위의 결과로 간주되고 있다. 정부는 사건의 발단 전 개를 흐리게 하고자 했으며 주된 원인이 학생시위였다는 인상을 주고자 했다. 그 민주화운동의 주된 원인은 군인들이 저지른 잔혹행위였다. 오후 8시 30분쯤에 우리는 도시 중앙에서 매우 큰 불이 발생해서 불꽃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았다. 우리는 다음날 그 불이 가톨릭문화센타에서 두 구획쯤 떨어진 문화방송 (MBC)건물에서 일어났음을 알게 되었다. 그 건물은 시위대에 의해 불이 나서 완전히 타 버렸다. 시위는 밤까지 지속되어서 사실 밤새 계속되었다. 오후 9시 통금은 시민 들에 의해 사실상 무시되고 있었다.
우리가 이겼다. 5월 21일
수요일에 우리는 거리에서 나는 종소리와 빵빵거리는 소리와 군중들의 소리를 듣고 깨어났 다. 소리가 도심지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위의 모든 곳에서 나는 것 같았다. 우선 느끼 기에는 시위대가 우리 지역으로 들어와서 군인들이 쫓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바바라에게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을 깨워서 5-10분내에 내가 돌아오면 곧장 도시를 떠날 준비를 하도록 했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거리로 내려가 보았다. 나는 그 소리들이 내가 생각했 던 성질의 소리와는 판이한 다른 것을 발견했다.
성난 반정부 시위가 아니라, 그 시위는 기쁨과 승리를 마음껏 분출시키는 축제적인 것임을 목격했다. 많은 시내버스와 트레일러와 트럭과 지프차들이 학생들과 다른 시민들을 이리저리로 이동시키고 있었다. 그들은 막대기와 파이프를 흔들고 플랫카드와 깃발을 날리고, 소리치고 기뻐 하면서 전날밤 시위의 결과를 누리고 있었다. 그들이 내세운 표어는 계엄령을 철폐하라! 전두환을 몰아내자! 살인마 전두환을 죽이자! 그리고 김대중을 석방하라!와 같은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물어보았다. 나는 전날 밤에 군인들이 도청을 방위하는 일부 군인들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철수했다는 말을 들었다. 이제 시민들과 군인들 사이 의 싸움이 도청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도시의 나머지 부분에 있었던 군인들은 외각으로 물러났다. 거리에 있는 시민들은 우리가 이겼다! 라고 외쳤다. 시민들의 분위기는 거의 축제적인 것이었다. 몇 분 정도 지켜보고 여러 구경꾼과 말해본 후에 나는 우리의 안전에 즉각적인 위협이 없다고 결 론짓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올쯤에는 우리의 가족, 광주 전도대회팀, 단기선교사 주디 왓 스가 짐을 싸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본 일들을 나눈 후에 우리는 그 때에는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다. 우리가 기다리기로 결정한 한 이유는, 화요일 오후에 서울측과 대화한 전화내용에 근거한 것이었다. 우리는 서울 전도대회 사무실로부터 그들이 수요일에 광주에 보내 팀원들을 대전까지 에스코트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최종 결론을 내리기 전에 그의 도착을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오전 9시경에 김목사가 전화를 했다. 그의 교회에 다니는 두명의 청년이 시내를 떠나 시골에 있는 고향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광주시내와 광주외곽으로 가는 버스들이 모두 운행 을 중단하고 있었다. 김목사는 내가 도울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그들을 차에 태워 광주의 서 남쪽 끝에 있는 남평 마을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플로리다 팀원들 중 세명이 나와 동행했다. 우리가 학생들을 태우기 위해 갈때 나는 무심결 에 거리 옆의 가게에서 튀어나온 양철문을 치면서 운전했다. 양철문 위로 차가 달릴때 생기는 소 리가 마치 폭발물이 터지는 소리와 같아서 우리는 잠시 공격을 받지 않았나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두 학생을 태우고 도시 남쪽 지역으로 갔다. 우리는 남평 마을로 가는 길에 건너야 하는 철로가 있는 큰 교차로에 이르렀다. 교차로에는 거대한 군중이 운집해 있었다. 자동차 타이 어 더미가 거리 가운데에서 불타고 있었다. 그 옆에는 창문이 완전히 부서져 있는 시내버스가 한 대 있었다. 이것들이 길 주위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 차단막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이 군중들 앞으로 운전해 갈 때 나는 차창밖 으로 몸을 내밀어서 우리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줄 수 있겠느냐고 부탁했다. 30대 남자 가 내게 다가왔다. 일분도 채 못되어 우리 차는 완전히 군중들에 의해 둘러싸였다. 많은 사람들은 분명 화가 난 듯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내가 광주에 살고 있는 선교사이며, 차에는 군인들을 피 해 광주를 떠나 시골집으로 가기 원하는 두 학생이 있다고 설명했다. 내가 이 사실을 한국말로 그에게 거의 이해시킬쯤에 군중들이 차를 툭툭 치기 시작하면서 위협적인 몸짓을 보이고 있었다. 한 젊은이는 손에 쇠지렛대를 들고 차 앞으로 다가와서는 창문을 깨뜨리겠다고 위협했다.
나는 나와 대화한 사람에게 가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나는 우리가 군인들에게 똑같이 분노하 고 있는 친구들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군인들로부터 피해가는 두 학생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말했 다. 매우 긴 시간처럼 여겨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 그 사람은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군 중들에게 이 사람들은 우리의 친구이므로 가게 합시다. 그들은 두 학생이 피해가는 것을 돕고 있 습니다. 라고 말했다. 군중들운 약간 뒤로 물러섰고 차 앞에 길이 열려서 우리는 지나갈 수 있었 다. 우리는 불이 타는 타이어와 시내버스를 지나 도시를 빠져나갔다.
우리가 남평마을을 향해 짧은 거리를 지나면서 우리는 표어와 막대기를 쥐고 있는 사람들을 나르는 여러대의 버스 트럭 이런저런 차량들을 보았다.그들은 싸움에 가담하기 위해 광주로 가고 있었다. 우리는 두 학생을 남평 마을에 있는 버스 역에 내려준 후 광주로 돌아왔다. 우리가 광주 로 다시 들어설때 나는 군중들이 있었던 교차로를 피했다. 다른 길을 택했기 때문에 우리는 도시 의 중앙지역 근처로 왔다. 전남대학병원 근처에 있는 교차로에는 군중들이 불에 탄 지프차 옆에 모여 있었다. 우리는 멈춰서 차에서 나왔다. 우리는 서서 지켜보다가 사람들과 잠시 애기해 보았 다. 우리가 지켜보는 사이에 환희에 차 축제 분위기를 보이는 학생투사들을 실은 많은 버스들이 옆으로 지나갔다. 그들은 막대기와 파이프로만 무장하고 있었다. 우리는 군중속에 있는 사람들로 붙 아직도 두 구획쯤 떨어진 곳에 있는 도청에서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는 애기를 들었다. 우리는 그 방향에서 총소리가 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매우 화가 난 한 아주머니가 피가 묻은 신호등 과 보도 쪽으로 나를 데려갔다. 그녀는 내가 이 지역을 사진 찍기를 간청하면서 이곳이 바로 학 생들이 전날 군인들에 의해 살상된 곳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다니는 동안 우리는 두세곳의 다른 거리에 혈흔이 남아 있는 것을 보았다.
몇 분 지난후에 우리는 그 지역을 떠나 도심지억 옆에 있는 광주강변으로 차를 몰고 갔다. 도심지역으로 가는 모든 길이 막혀 있었다. 이 때쯤에 나는 처음으로 내 차가 싸움에 가담해 있 는 시민들에 의해 점령되어 있지 않은 길에는 거의 유일하게 있는 차량임을 깨달았다. 나는 집에 돌아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고 차를 시민들에 의해 압수되지 않도록 차고에 넣어 두기로 결 정했다.
내가 마음속으로 그 결정을 내린 바로 뒤에 우리는 픽업트럭에 의해서 길 옆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나는 급히 차에서 나와 두 학생을 남평 마을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가기 위해 우회도로 를 타고 있는 중이라고 애기했다. 나는 간신히 픽업트러에 있는 젊은이들을 설득해서 곧장 집으 로 올 수 있었다.
우리가 집에 돌아온 후에 우리 중 몇 사람은 도시 전체를 살펴보기 위해서 근처에 있는 장로 교 신학교 옥상으로 갔다. 세무소 건물은 불타고 있었다. 우리가 건물에 서 있을때 곧 오후 2시쯤 에 헬리콥터 한대가 도시 전역을 날아다니면서 전단을 뿌리고 있었다. 그 전단은 계엄사령부가 시민들에게 전하는 공고문이었다. 그것은 시민들이 거리를 떠나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엄청난 결 과가 빚어질지도 모른다는 공고문 혹은 경고문이었다. 되돌아보면 이것은 우리가 당시에는 완전 히 이해할 수 없었던 불길한 결고문이었다. 그 전단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떠나도록 명령은 했지 만 실제로는 다가올 잔혹행위에 대해서는 완전히 경고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전단은 다음과 같 은 것이었다.
#공고
1. 광주지역에서 지난 18일에 발생한 혼란들은 치안을 극도로 어렵게 만들었다. 계엄군의 엄 격한 행동이 나라의 치안을 흩뜨렸다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그런 행동들에 대한 수정이 가능 하도록 질서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2. 광주지역의 현 상황을 볼 때 우리는 법을 어기고 혼란을 야기하고 있는 소유자들이 불과 소수에 지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다수의 시민들은 정직하고 애국적인 한국인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여러분 정직한 시민들은 가능한 한 혼란을 조장하고 있는 평화파괴자 들 때문에 헛된 손실을 입어서는 안되며,거리에 나가서는 안되며, 집안에서 조용히 남아 있기를 당부한다.
3. 또한 여러분 모두에게 매우 많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이 어려움이 더이상 여러분의 사업과 가정에 재앙을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여러분이 자제와 자기방어를 행사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단호히 평화 교란자들을 색출해 낼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계엄군이 치안을 회복하는데 완전히 협력해 줄 것을 당부 한다.
- 계엄사령부 육군보병대장 이희성-
오후 2시경에는 시민들 중 일부가 광주 바로 밑 남쪽에 있는 화순 마을에서 무기를 포획했 다. 그 때로부터 시민 투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총을 갖고 다녔다. 이후에 장목사와 나눈 대화를 통해서 나는 장목사가 총을 탈취한 사람들은 학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강조하는 것 을 들었다. 대신에 그들은 젊은 실직자들과 노동자들이었다.
그 날이 지나감에 따라 싸움은 거세졌다. 정오가 막 지난 후에 우리는 헌트리씨 부부로부터 민간인 사상자들이 기독병원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있다는 애기를 들었다. 빌리 사우써와 나는 장 로교 신학교를 떠나서 병원까지 걸어갔다. 그 곳의 장면은 매우 혼동스러웠다. 첫번째 민간인 희 생자는 낮 12시쯤에 도착했다. 그는 학생 나이의 행방불명 자녀들을 찾다가 등에 대검을 맞은 중 년 남성이었다.
오후 3시 15분쯤에는 광주 영공에 몇 대의 전투 헬리콥터가 나타났다. 그들은 거리에 있는 군중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사상자들은 병원에 매우 급작스럽게 몰려들어오기 시작했다. 병원에 접수된 첫 사망자는 오후 3시 30분쯤에 들어온 중학교 여학생이었다. 헬리콥터들은 계속 해서 도시 영공을 날아다니면서 오후 내내 총을 쐈다.
우리가 오후 4시 30분에 병원을 떠날때 광주 기독병원은 50명 이상의 사상자와 9명의 사망자 를 접수했다. 우리가 보았던 사망자와 사상자 중에는 팔다리에 총을 맞은 작은 소녀와 위에 피를 흘리고 있는 두 사람과 머리에 총을 맞은 소년과 포화속에서 얼굴이 뭉그러진 한 남자가 있었다. 목요일 밤이 되자 광주기독병원에만 사상자 수는 100명이 넘어섰으며, 14명의 사망자가 있었다.
1988년 8월 13일자 코리아 타임즈지는 광주민주화 운동에 대한 국회 조사때에 주어진 증언에 대해 보고하였다. 그 보고서에 따르면 군인들은 1980년 5월 21일 오후 1시 30분에 처음으로 광주 시위자들을 향해 발포했다. ...... 계엄군들은 무장한 시위자들이 화염병을 던지면서 그들에게 달려 오자 그 때에 (공포탄으로) 발포했다. 계엄군 지휘관은 그날 오후 7시 30분에 군대가 그날 오후 7 시 30분에 중무장 시위한 사람들로부터 '자기방어'를 하기 위해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보고서는 내가 경험한 진상과는 매우 다르다. 발포는 이 보고서가 주장하는 5월 21일이 아니라 5월 20일 오후부터 빈번하게 일어났다. 나는 5월 21일 아침에 도청에서 두 구획 떨어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서 나는 총소리를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게다가 시민투사들은 5 월 21일 오후 1시 30분에는 총으로 무장하고 있지 않았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을때 나는 집 지붕에 있는 발코니로 갔다. 그 위치에서 나는 도시 영 공을 날아다니면서 거리의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헬리콥터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10일간에 발생한 모든 사건들 중에서 군중들을 향해 헬리콥터에서 군인들이 발 포하는 모습이 내게는 가장 잔인해 보였다.
오후 늦은 시간에 우리는 여행 담당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서울 전도대회 사무실에서 플로리다팀원들을 대전에 데려다 주도록 보낸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광주로 올 수 없었다. 그 는 송정리 기차역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 지역은 광주역 전화 시스템의 일부에 속했지만 그 곳은 군인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그는 광주로 들어올수 없어서 그날 서울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팀원들을 광주에서 빠져나가도록 할 방법을 찾아볼 것을 요구했다.
유럽과 미국의 TV, 라디오, 신문사 직원들이 그 날 오후 광주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오후 5 시쯤에는 그들 중 일부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그들과 우리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서로 물어보았다.
우리가 그들을 방문했을때 우리는 도시가 군대에 둘러싸여 있는데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 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차에 외국 언론 이라는 표시를 하고 도로 차단벽을 지나면서 뇌물을 주고 들어올 수 있었다고 했다.
우리는 유사한 방법을 써서 플로리다 팀원들이 광주를 빠져나가도록 해보자고 결정했다. 우 리는 장로교 선교사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에게 자기 차를 몰도록 부탁햇다. 그래서 두 대의 차를 몰고 나가기로 했다. 또한 우리는 크레용과 매직펜을 사용해서 차에 표시를 했다. 외국 언론인 차 라고 썼다. 우리는 두 개의 미국 국기를 찾아내서 그것을 차에다 붙였다. 우리는 아침 일찍 두대의 차를 타고 도시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단기 선교사요 교사인 주디 왓스는 그녀의 봉사 사역을 마치고 열흘쯤 후에 한국을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는 미래가 불확실하므로 그녀도 지금 떠나는게 좋겠다고 결정했다. 그녀는 서들 러 짐을 싸고 떠날 준비를 했다.
우리와 벳츠 헌트리가는 대전에 있는 외국인학교(한국 크리스찬 아카데미) 기숙사에 살고 있 는 자녀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 대해 걱정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2학기말 시험이 다음주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가 그들과 함께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 다. 우리는 또한 광주에 머물고 있는 선교사 자녀들의 안전에 대해 염려했다.
그래서 우리는 바바라가 플로리다팀과 함께 가기로 결정했다. 그녀는 자녀들을 대전으로 데 리고 갈 예정이었다. 우리는 이번 이동이 어떻게 도리지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가 팀원들이 대전으로 가는데 통역관과 안내원이 또한 될 수 있겠다고 결정했다. 어듬이 몰려올쯤에는 우리는 다음날 아침에 있을 탈출을 다 준비하였다.
그날 저녁에는 군인들이 가택수색을 한다는 소문이 다시 나돌았다. 또 다른 소문에 의하면 서울에서 광주로 오던 학생들이 담양 읍에서 대량살상 되었다는 것이다.
싸움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어둠이 내리자 대부분의 도시 집들은 어둠에 싸였다. 공식적인 등 화관제가 없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처럼 빛이 켜져 있으면 포격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 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날 저녁을 어둠 속에서 보냈다. 우리는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면서 내일을 기다렸다. 포격이 우리 주위 모든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럴수가 있는가? 5월 22일
우리는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서 손님들과 자녀들을 도시에서 탈출시키는 계획을 실행하기 시 작햇다. 우리는 우리의 차들이 시민들이나 군인들에 의해 피격될지도 모른다고 매우 염려했다. 우 리는 떠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전을 주시고 도시에 평화를 주시기를 잠시 기도했다.
오전 7시 30분경에 우리는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양림동을 빠져나갔다. 일년동안 광주에서 사역하고 있던 장로교 선교지원자인 데이브 더드리가 합승했다. 우리는 9명의 승객 - 주디왓스,마 이크헌트리,루이스베일리,바바 우리의 어린 두 아들 브렌트와 크리스-을 차에 태웠다
우리가 첫번째로 거리에 들어섰을때 다음에 일어날지도 모를 일에 매우 염려했다. 거리에 서 이썬 시민들이 미국 국기를 날리면서 외국인의 차 라고 쓴 차를 보았을때 그들은 우리에게 박수 를 보냈다. 우리의 염려는 우선 안도감으로 바뀌어 곧 기쁨으로 변했다.
송정리로 가는 길은 큰 전봇대와 버스들과 트럭들로 차단되어 있었으며, 약 500명의 시민들 이 농성동 교차로에 모여 있었다. 교차로에 들어서자, 그들이 우리 차들을 둘러샀다. 우리는 우리 의 미국인 손님들을 송정리에 있는 기차역게 데려가고 있는 중이라고 설명했다. 50구경 기관총과 다섯명을 태운 지프차가 우리를 향해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또 다른 중무장 차량이 우리 뒤를 따 라왔다. 그들은 우리를 도시 끝 지점까지 에스코트해서 뒷 길까지 데려갔다.
거기에서 우리는 겨리아 마을을 빠져나가 송정리까지 갈 수 있었다. 그 길을 탐으로써 우리 는 군인들을 우회해서 갈 수 있었다. 송정리의 기차역은 시민들의 통제하에 있었다. 그 광경은 마 치 그 탈취가 방금 전에 일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다니는 열차가 없어서 우리는 그곳을 떠나 비 아 마을을 거쳐 고속도로까지 가서 북쪽으로 갔다. 신흥마을에서 3Km쯤 북쪽으로 갔을때 우리는 군인들의 차단벽을 보고 뒤로 되돌아왔다. 우리는 신흥마을로 되돌아 와서 기차를 타기 위해 아 침 9시 30분쯤 기차역에 갔다. 우리는 신흥을 오전 10시13분에 떠나기로 되어있는 완행 (지금은 비둘기호로 불림)열차에 일행을 태우기 위해 열차표를 살 수 있었다.
일행들을 열차에 태운후 존 언더우드와 데이브 더들리와 나는 광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많은 학생들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광주로 가는 것을 보았다. 광주까지 가는 도중에 우리는 단지 한 대의 차 곧 CBS 기자를 싣고 가는 차와 두세대의 트럭만을 보았다.
우리는 떠날때 이용했던 그 길을 통해 광주에 가고자 했으나, 이미 그 길은 막 베어낸 나무 들로 차단되어 있었다. 군인 일개 소대가 그 길을 지키고 있었다. 총을 겨누어 우리를 멈춘후에, 우리가 도시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존과 나는 그들에게 우리의 명함을 보여 주면서 우리가 광주에 살고 있고 가족들이 거기에 있기때문에 광주에 다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햇다. 우리는 막 손님들을 대전행 열차에 실어주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마침내 그들은 우리가 들어가도록 했지만 광주가 곧 공격받을지 모른다고 주의를 주었다.
도시의 거리에 되돌아오자마자 우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세명의 시민을 만났으며, 그들 은 우리를 에스코트했다. 그들중 한명은 소총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백운동 로터리까지 인도했으며 거기에서 우리는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 때는 오전 11시 15분이었다.
내가 플로리다 팀원들과 가족을 대전까지 가도록 데려가는 중에 광주에는 매우 엄청난 사건 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여러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건에 대한 보고를 들었다. 내가 직접 다음 의 사건들을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다음의 보고가 기본적으로 정확하리라고 확신한다.
5월 22일인 목요일 아침에 일단의 복음주의적인 목사들이 전화로 서로 연락해서 문제를 논의 하기 위해 중앙장로교회에 모이기로 결정했다. 세개의 다른 장로교파들에서 세명의 목사가 한명 의 감리교 목사가, 한명의 성결교 목사가, 세명의 침례교 목사가 같이 모였다. 세명의 침례교 목 사는 박영복 신순균 장세균이었다.
그들은 10시 30분에 모여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도리 조치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를 논의했 다. 그들의 공통된 느낌은 한 마디로 요약되어졌다. 곧 이럴수는 없다 라는 것이었다. 광주 시민 이 주도면밀한 계획이나 지도력은 없지만 봉기해서 정부를 전복시킬 것이라는 말은 들려오지 않 았다. 그렇지만 무슨 조치라도 취해서 상황을 정상적으로 회복시켜야만 하는 때였다.
도청을 지금 장악하고 있는 학생들에게 누군가가 가서 계엄사령부와 협상을 벌이도록 설득해 야 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그들은 시민들이 무장한 한국군인들과 군사적으로 싸워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기대는 협상을 통한 것이었 다. 그렇다면 누가 학생들에게 가서 협상하도록 설득할 것인가? 세명의 침례교 목사들이 가기로 결정했다. 장목사와 박목사와 신목사는 중앙 장로교회에서 네 구획쯤 떨어진 곳에 있는 도청으로 걸어가서, 학생들이 협상을 하도록 설득했다. 박목사는 나중에 그 걸음이 자신의 생애에서 가장 떨리는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은 무장하지 않은 채로 중무장한 화난 학생들에게로 걸어 들어 갓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질 지 알 길이 없었다.
목회자들의 역할에 대해 박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시민들이 무엇을 해야 할 지 를 말하고자 하지 않았다.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의 계명을 쫓아 사람들 사이에 평화를 가져오고 피흘림을 막고자 했다 학생들은 협상을 하기로 동의했다. 협상이 시작된 후에는 다른 많은 사람 들이 그 과정에 참여했다. 그렇지만 이들 세 침례교 목사들은 협상의 중대한 초기 단계에서 중심 인물들이었다.
협상위원회가 형성되었다. 그것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시민수습위원회 라고 명명되었다. 중앙 장로교회에 처음 모인 여덟명의 목사와 두명의 변호사와 한명의 사제와 한명의 학생대표와 한명 의 시민 투사와 두명의 시민 지지자와 한명의 교수로 구성되었다. 이 위원회는 계엄사령관에게 보일 일련의 요구사항들을 작성했다.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다
계엄군인들이 도시에 다시 들어오지 않는다
투옥된 모든 학생들을 석방시킨다.
민주화 운동의 원인은 계엄 군인들이 저지른 과다한 탄압임을 인정한다.
민주화 운동이 끝난후에는 어떤 차별적 행동도 없다
사상자와 사망자 가족에게 보상을 한다.
민주화 운동에 대해 정확한 언론보도를 보장한다.
사태가 수습되면 도시의 치안 통제를 경찰에게만 위임한다.
세명의 침례교 목사들을 포함하여 몇 명의 사람들이 요구서를 계엄사령관에게 건네주도록 선 별되었다. 이 요구서는 도시 외각의 전선에 넘겨져서 지휘관에게 제시되었다. 잠시 후에 계엄사령 관이 다음과 같은 응답을 했다.
군인들이 도시에 진입하는 것을 지연시키는 데에 동의한다.
다루어져야 할 어떤 과다행위가 있었음을 인정한다.
사상자를 치료하고 사망자에게 조치를 위할 것을 약속한다.
투옥된 사람들을 석방하는데 동의한다.
사건에 대한 정확한 보고를 하도록 하는데 동의한다.
시민들은 다른 모든 합의 사항의 전제조건으로 모든 무기를 버려야만 한다.
사망자 가족에 유감을 표시한다. 이런 응답서신이 위원회에게 전달되었다. 거대한 대중집회가 도청앞 광장에서 열리고 있었으 며 그 협상과정이 군중들에게 보고되었다. 약 10만명의 사람들이 그 집회에 참석했다. 그 후에 계 엄사령부에서 전달된 성명서가 인쇄되어 배포되었으며 라디오와 TV를 통해 도시에 방영되었다.
집회의 결과로 시민들은 무기류를 넘겨주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총을 든 급진 젊은이들과 화 해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이 무기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목요일에서 토요일가지 그들은 함께 일 했으며 토요일 아침쯤에 대부분의 무기들이 거두어졌다.
정오뉴스에서 우리는 새로 임명된 박충훈 총리가 시위 지도자들과 대화하기 위해 광주로 오 는 길이라는 소식을 들엇다. 그는 군인들이 철수하기를 원한다고 보도되었다. 이 보고는 도시가 공격 받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던 바리케이트 친 병사의 애기와는 일치되지 않는 것 같았다.
오후 12시 30분에 나는 최창섭 목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대광침례교회에 다니는 한 고등학 생이 싸우는 가운데 죽었다는 것이다. 학생의 시체는 기독병원에 있었다. 최목사는 부모들이 시체 를 확인하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다. 병원에서 나는 부모들이 와서 시체를 확인해야 된 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12시 50분쯤에 최목사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래서 그는 부모와 함께 와서 시체를 확인하기로 했다.
나는 또한 최목사로부터 몇 명의 공산당 스파이들이 시민들에 의해 붙잡혔다는 애기를 들었 다. 그들은 불을 지르도록 선동했으며 시민들의 주민등록카드를 복사한 것을 가지고 다녔다고 한 다. 그들을 시 끝 지점까지 데려가서 군인들에게 넘겨주었다고 한다.
내가 들은 또 다른 보고에 따르면,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목요일 아침에 도시를 빠져나갔다 고 했다. 대사관이 광주에 없었기 때문에 그 보고는 정확한 보고일리가 없었다.
광주에는 공사대표만이 거주하고 있었다. 또한 그 공사는 화요일에 송정리에 있는 미군기지 에 피신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 소문은 우리 선교사 가족들이 플로리다팀원들과 자녀들을 대전행 기차에 실어주기 위해 나갔을때 보인 '탈출'에 대한 것임이 거의 틀림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 차 에 미국 국기를 달고 있었으므로 소문이 그렇게 퍼진 것이다.
오후 5시에 송정리에 있는 미공군기지에서 일하고 있는 공군하사인 데이브 힐(Dave Hill)이 라는 친구가 전화를 했다. 그는 미공군이 무력으로 광주에 들어와서 양림동에 있는 미국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계획을 신중히 고려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 다. 그런 '구원' 계획은 도시를 떠나 공군기지로 간 광주 거주 미국 공사인 데이빗 밀러가 전한 보고에 의해 조장된 헛된 두려움의 결과였다.
TV와 라디오는 저녁 뉴스에서 네가지 잘못되고오도된 이야기를 전했다. 첫째로 군인들이 피흘리는 대결을 피하기 위해 수요일 밤에 도청지역에서 철수했다는 보도이다. 사실은 이미 피흘 리는 대결이 있었다. 기독병원은 시체 13구를 전남대 병원은 시체 27구를 안치하고 있었다. 나는 적십자 병원이나 조선대 병원에서는 보고를 들은 것이 없다. 다 합친다면 최소한 80에서 100여명 의 사람들이 21일에 죽은 것이다. 이 사실은 피흘리는 대결을 피하겠다는 우려가 거의 없었음을 시사해 준다.
둘째로, 무법상태가 도시에 만연되어 있다는 뉴스이다. 사실은 내가 직접 관찰했던 시민들의 행동은 매우 적절했으며 어떤 혼란과 무법적 상태의 조짐이 없었다. 거리에는 사실 어떤 전투경 찰이나 군인들도 없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행동은 절제되어 있었으며 혼란스럽지 않았다.
세째로, 재산손실에 초점을 맞춘 보도들은 도시 곳곳이 손실되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정부소 유와 정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재산이 손실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민간인이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거이 전적으로 피해를 입지않았다.
네째로, 박충훈 총리가 광주까지 와서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었다는 보도이다. 실제로는 그는 헬리콥터를 타고 도시영공을 날아 다녔다. 군중들은 그를 만나기 위해 도청에 모였다. 그렇지만 박총리는 도시가 무정부상태에 있으므로 착륙할 수 없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의 연설은 TV와 라디오로 방송되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의 방문이 화해에 대한 희망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박총리가 연설한 것에 트게 실망했다. 전두환 장군과 그의 동료들은 박총리에게 왜곡된 상황보고를 했으며, 그로써 그가 광주시민들은 만나지 못하게 했으며 또한 박총리와 국민들을 그 들의 목적에 맞춰 조정했다.
오후 10시에 우리는 다른 두개의 비확인 보도를 들었다. 한 보도에 따르면 군인들이 상무동 을 통해 도시를 침공하고 있으며, 탱크가 월산동에 있는 돌고개까지 진입했다고 했다. 다른 보도 에 따르면 많은 수의 시체가 전남대학교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목요일밤 11시에서 12시 30분 사이에 나는 월산동과 방림동과 문화동 지점에서 총소리가 나 는 것을 들었다. 화순마을로가는 길 방향에서는 총소리가 집중적으로 들였는데 그 소리는 다음날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포위된 도시 5월 23일
잠에서 깨어났을때 나는 밤새 예기되었던 군인들의 도시침공이 분명없어짐을 알게 되었다. 며칠만에 나는 처음으로 어떤 총성도 듣지 못했다.
9시 30분부터 정오까지 나는 도심지역을 걸어다니면서 살펴보았다. 시민들은 이미 며칠간의 싸움에서 생긴 쓰레기들을 거리에서 치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분 명 조용하고 고요한 느낌이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고 있는것 같다.
협상 결과로 타협안이 생겨서 모든 일이 정상상태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에 대해 사람들은 이야기 하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의 대화는 어떤 희망적인 낙관주의가 깃들어 있었다. 집에 돌 아왔을때 나는 김영수 목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나에게 협상을 시작하는데서 장목사와 신 목사가 한 역할에 대해 말해주었다. 나중에 나는 금요일 아침에 장목사가 화정동에 있는 50명의 급진투사들에게 가서 그들이 총을 내려놓고 협상을 하도록 무릎을 꿇은 채로 설득했다는 애기를 들었다.
나는 그 날 오후의 대부분을 미대사관을 대신해서 전화를 여러군데 하느라고 보냈다. 대사관 은 미공군기지를 통하여 여러번 나에게 연락을 했다. 매번 그들은 나에게 그들이 안전을 확인하 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름, 전화번호, 혹은 다른 정보를 주었다.
금요일 저녁 6시 30분에서 8시 사이에 나는 다시 한번 도시를 걸어다니면서 살펴보았다. 이 번에는 나는 백운동과 월산동 지역으로 가보았다. 그러는 동안 나는 말하기 원하는 시민들하고는 누구를 막론하고 대화를 했다. 나는 그들이 매우 적극적으로 대화에 응하고 기꺼이 자신들의 생 각을 피력하는 것을 보았다. 이때 그들의 가장 지배적인 관심사는 다음과 같다. ⑴지금의 모습은 학생들만의 사건이 아니라 시민들의 봉기(uprising)이다. ⑵정부는 시민들에 대한 범죄를 고백해 야 한다. ⑶정부는 그죄를 전국민과 전세계에 방송을 통해 인정해야만 한다. 만일 이러한 일이 이 루어지지 않으면 시민들은 다시 봉기해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오후 10시의 AFKN뉴스는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그들이 보도한 유일한 정보는 한국정부에 의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그들의 보도는 엄청나게 상황을 곡해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릿기사는 육일간의 학생 유혈폭동이었다. 사실은 군인들이 적극적인 저항에 맞섰던 5월 20일과 21일 이틀간만 유혈항쟁이 있었다. 5월 18일과 19일 이틀간에는 군인들이 잔혹행위를 저질렀는데, 때때 시민들은 대개 저항하지 못했다. 유혈이라는 말은 유형(bloodshed)이 광주 시민 들에서가 아니라 군인들에 의해 일어났으므로 잘못된 도발적 표현이었다. 학생폭동이라는 말도 광주민주화 운동이 주로 학생들의 시위가 아니라 시민들의 봉기였으므로 잘못된 것이었다. 게다 가 그 사건들은 폭동이라는 말로는 정확히 불려질수 없으며, 그것은 부득이한 저항(rebellion)이었 다.
5월 24일
오전 5시 30분쯤에는 총소리가 산발적으로 났지만 그 날 밤은 조용하였다. 군인들이 아직 도 시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았다. 문제들이 풀리고 사건이 지금쯤에는 끝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러나 나는 대치상황이 계속되어서 놀랐다.
내가 전화로 들은 말은 무기가 아직 다 수집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총은 수거되 어서 도청에 있는 수습위원회가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부 급진주의자들이 총을 버리는 것을 거부했다.
나는 이런 대결상황이 지금쯤 끝나리라고 생각했다. 군인들이 도시를 포위한 지가 이틀이 꼬 박 지났다. 얼마나 오래까지 군인들이 기다리다가 필경 도시를 무력으로 진입할 것인가? 얼마나 오래 도시의 평화적 상태가 지속될까? 사람들은 이런 질문과 다른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이 상태가 모두 끝났을때 보복이 있을것에 대해 두려워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떠났을 때 떠나지 않고 광주에 머물러 있기로 한 것이 올바른 결정이라 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광주시 바깥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결정과 도시의 진정한 상황들을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뉴스보도는 너무 왜곡되고 진실에서 벗어나서 그 보도들은 일어나고 있는 일을 완전히 거짓 되게 전하고 있었다. 나는 바바라와 주디와 자녀들이 안전하기를 기도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그 들에게서 연락을 받지 못했었다.
나는 돈을 주고 자전거를 한대 빌려서 오전 9시쯤에 도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도청 근처에서 나는 광주지역에서 일하던 평화봉사 단원중 한 명인 주디 챔버린(Judy Chamberlain)을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과 함께 연합통신 기자를 만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도청 근처의 작 은 여관에 가서 그 기자를 만났다.
그 기자는 테리 앤더슨(Terry Anderson)이었는데, 그는 지금 레바논에서 인질로 잡혀있는 바 로 그 사람이다. 우리는 한시간 정도 그와 만났으며, 그가 몇몇 한국인들과 인터뷰할 때 그것을 통역해 주었다. 앤더슨은 처음에는 목포로 가서 그 뒤 택시로 왔다가 마지막에는 자전거를 타고 군인들의 행렬을 통과해서 광주로 간신히 들어왔다고 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정보에 의하면, 여 러 병원들과 다른 단체들에 의해 107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했다. 이 숫자는 5월18일 과 19일에 군인들이 잔혹행위를 저질렀을때 발생한 사망자 수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었다. 물론 이 숫자는 금요일인 5월 23일 이후에 일어난 사망자수도 포함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앤더슨과 챔버린과 헤어진 후에 몇 군데 교회를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산수동으로 가서 대광침례교회의 최목사를 만났다. 그런 다음 성림교회로 갔지만 김목사가 없어서 도시를 가로질러 일신교회로 가서 박목사를 만났다.
박목사를 만나는 사이에 나는 장목사와 박목사와 신목사가 목요일 아침에 시민들과 군인들 사이에서 협상을 벌이면서 보인 활동들에 대해 상세히 들었다. 대화가 끝날쯤에 박목사는 자신이 사는 동안 전쟁이나 여러 번의 싸움을 경험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한국이 자유를 되찾을때 누렸던 그 해방일을 기억할 만큼 나이가 든 사람이었다. 그는 6.25 한국전이 발 생했을때 젊은 사람이었다. 그는 그 당시의 엄청난 파괴적 행위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 을 무너뜨렸던 4.19 학생의거가 일어났을때 대학생으로 그 시위에 가담한 사람이었다. 박정희 장 군이 군사 쿠테타를 일으켰던 5.16때는 군인의 입장에서 사태의 추위를 목격한 사람이었다. 그런 데 지금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그의 생애에서 가장 사악하고 음산한 경험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전의 어떤 싸움에서도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그런 좁은 지역에서 이보다 더 많은 생명의 손실을 목격한 적이 없다고 느끼고 있었다.
나는 박목사와 헤어져서 도시 중심가로 돌아왔다. 나는 도청 앞 광장으로 왔는데, 그 때가 오 후 1시 15분쯤이었다. 둥근 플랫폼으로 바뀐 분수대 주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플랫폼 위 에는 전두환 장군의 초상 인형이 1m정도 위에 투박하게 매달려 있었다. 그들은 그 초상인형에 불 을 지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군중 속에 끼어 있던 내 옆에는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내가 완전 히 이해하지 못했던 어떤 말을 했다. 그러나 사태가 점점 걷잡을 수 없게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사람들이 타협해 협상이 정상상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으 냐고 물어 보았다.
그는 매우 화가 난 표정으로 매우 큰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그는 나를 향해서 살인자와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 공의는 행해져야만 한다. 이런 잔혹행위를 저지를 사람들은 반 드시 처벌받아야 한다. 가신의 친구, 자녀가 이번 주에 살상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는 미국 이 민주주의 편에 서서 광주시민들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 시적했다. 그는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가 어떻게 전두환과 같은 살인을 일삼는 독재자를 지지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가 큰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강당을 향하다가 이제는 우리 쪽으로 시 선을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나는 자전거에 발을 걸친 채로 있었기 때문에 자전거를 금방이라도 타고 달아나고 싶었다.
하지만 군중들의 수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달아나거나 달아나고자 한다면 오히려 그들이 나 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걱정이 되어서 달아나지 않았다. 대신 나는 조용히 말하면서 그가 목소 리를 낮추기를 기대하면서 계속 그와 대화를 했다. 나는 그에게 동의했으며, 나도 그와 마찬가지 의 의견을 갖고 있다고 애기했다. 그것은 사실어었으며 적어도 그 순간만은 내가 그에게 동의하 지 않는다면 내 자신이 거짓말하는 꼴이 된다고 생각했다. 점차 그는 목소리를 낮추었고, 군중들 은 다시 플랫폼쪽으로 시선을 집중시켰다.
나는 그 도심지역에서 오후 내내 머물렀다. 오후 4시경에 나는 군중속에서 신목사와 이목사 를 만났다. 그때 장목사는 분수대 위 플랫폼에 앉아있었다. 그들은 사실 수숩위원회에 의해 진행 된 협상과정에 대해 대중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학생들은 수습위원회에 의해 협상된 조항들을 받 아들일지의 여부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양분된 입장을 보였다. 보다 급진적인 학생들은 군인들을 신뢰할 수 없으므로 전세계 미디어를 통해 죄를 인정하고 보복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기 전에는 총을 버려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그런 약속을 받운 후에야 총을 넘겨주는 것이 안전할 것이 라고 애기했다. 학생들 중 급진파들은 세 가지 이슈 면에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국가적 불만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전두환 장군을 모든 정치적 지위에서 축출하고, 계엄령을 철폐하 고, 김대중을 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도심지역을 떠나 그 모임이 해산되기 전에 집으로 돌아왔다. 장목사가 이후에 말해준 바에 따르면 그 모임이 더이상 위기 해결책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지기 시작한 전환점이 된 것 같다.
어떻게 말해줄 것인가? 5월 25일
주일아침에 깨어났을때 나는 사건이 일어난 지 처음으로 총소리가 나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밤새 비가 몹시 내렸다. 나는 덕성침례교회에 출석했다. 나는 이경남 목사가 수습위원회의 총무로 일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배후에 이목사와 나는 도청까지 걸어갔다.
우리가 2층 사무실에 도착했을때 일단의 서방기자들이 시민 지도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 다. 침례교 목사인 장세균이 도청에 있는 사실상의 리더였다. 나이든 변호사는 수습위원회의 공식 적인 위원장이었다. 나는 그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호주와 유럽의 몇몇 신문 라디오 기자들을 위 해 잠시 통역관 역할을 했다. 중요한 질문이 제기될때마다 그 변호사 위원장을 계속해서 문제를 장목사에게 떠맡겻다. 장목사는 수습위원회를 대신해 학생들과 대화하고 있는 주요인물인것 같았 다.
오후가 중간쯤 지났을때, 나는 도지사의 사무실을 떠나 도청건물 앞쪽으로 나갔다. 거기에서 나는 미국 ABC 방송사의 기자를 만났다. 피터 콜린스(Peter Collins)라고 기억되는 기자가 지난 한주간의 사건들에 대해 내가 녹화인터뷰를 할 수 있는지를 부탁했다. 나는 미남침례회의 해외선 교위원회의 공식적 정책에 의하면 선교사들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어야만 하기 때문에 내가 카메 라를 향해 그 사건들의 상세한 추이들을 애기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대신에 이같 은 위기 상황에서 미국인으로서 지내는 것이 어떤 모습과 같은지에 대해 말해줄것을 제안했다. 나는 동의한 후 그 인터뷰에 응했다. 그 인터뷰의 일부는 우리가 도심의 시가를 등지고 내가 머 물고 있는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이루어졌다. 나는 그 갈등에서 어떤 편을 들고 있다고 해석될 수 있는 언급은 가급적 신중히 피했다.
인터뷰가 끝난 후 나는 존 언더우드에게 내가 대답하고자 했던 질문들을 피한 것에 대해 불 편함을 느낀다고 애기했다. 대화중에 그는 비록 우리가 선교사로서 정치적으로 관여하지 않는 것 이 필요하겠지만 현 상황은 정치적 이슈 이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잔혹행위가 저질러졌으므로, 현 상황은 정치적 이슈가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 방문후에 나는 또 다른 기회가 생긴다면 이번에는 침묵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결심했다.
오후 늦은 시간에 데이브 힐 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는 양림동에 남아있는 모든 미국인들 은 철수해야만 된다고 경고했다. 그는 한국정부에 의한 군사적 행위가 임박했기 때문에 우리가 남아있으면 우리의 안정이 보장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미공군은 헬리콥터를 우리 정원에 착륙시 켜 우리를 탈출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떠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나의 생각을 말했지만, 존과 벳츠와 데이빗과 다른 사람들과 말해 보겠다고 했다. 우리가 함께 모였을때 우리는 철수를 원하지 않는다는데 의 견을 모앗다. 우리는 지금 떠나는 것은 우리가 목요일에 스스로에게 한 공약 곧 우리는 머물러 있으면서 광주시민과 함께 사건들을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 될 것이라고 느 꼈다. 나는 데이브에게 다시 전화해서 남아있기를 결정했다고 말해주었다.
마지막 기회 5월 26일
월요일 아침에 일어났을때 도시는 평화스러웠으며 놀라울 정도로 내 마음에는 두려움이 없었 다. 선교사들은 8시 30분에 헌트리가에 모여서 상황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 우리는 도시에 머물러 있기로 한 결정을 재차 확인했다. 우리는 일단의 군인들이 그날 아침 도시로 파견되어 들어와서 수피아여고가 있는 지점까지 진입했다가 철수했다는 비확인 보도를 들었다.
장목사와 나는 이후의 대화를 통해 나는 탱크가 도시에 들어오기 시작했을때 소수의 사람들 이 백기를 들고 가서 들어오지 말도록 간청했다는 것을 들었다. 그는 그들이 하루만 더 기다리도 록 설득했다. 그런데 군인들은 만일 모든 총이 넘겨지지 않고 모든 저항자들이 오는 항복하지 않 으면 내일 도시에 분명히 진입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미국 CBS 방송사의 기자가 오전 9시 30분쯤에 헌트리가에 왔다. 그는 우리가 함께 카메라를 향해 직접 녹화인터뷰에 응해줄 것을 요구했다. 우리를 동의를 했다.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자 주 도시 주위를 살펴보았기 때문에, 많은 질문들이 내게 쏟아졌다. 다른 사람들보다 내가 더 자주 도시 주위를 살펴보았기 때문에, 많은 질문들이 내게 쏟아졌다.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현 소요의 군본적 원인이 학생들이 잘못된 행동이 아니라 군인들의 비행임을 분명히 밝혔다. 우리는 광주의 사건들이 공산주의자나 공산주의 동조자들에 의해 조장되었다는 정부의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느 냐는 질문을 받았다. 우리는 그 주장을 부인하면서 사건을 조장한 사람은 군인들임을 분명히 밝 혔다.
이 CBS 인터뷰는 현대 커뮤니케이션에 있어서 교훈을 주는 하나의 경이적 사건이었다. 인터 뷰는 광주에서 월요일인 5월 26일 오전 10시쯤에 끝났다. 광주시는 한국군인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어서 나머지 세계로부터 차단된 것처럼 보였다. 뉴스 보도자들이 모든 도로가 군인들에 의해 차단되었는데 도시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 하나의 경이적 사건으로 보였다. 이후에 나는 인터 뷰 한 부분이 인터뷰가 있은지 22시간 후인 오후 6시에 미국 CBS 저녁뉴스 시간에 방영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명 녹음된 테이프가 직접 인편으로 서울로 이동되어서 동경까지 전달되고 동경에서 위성으로 미국으로 보내진 것이다.
인터뷰가 끝난후에 나는 집으로 돌아와서 아침 대부분의 시간을 대사관에서 연락해보도록 요 청했던 미국인들 중 일부와 전화연락을 시도하는데 보냈다. 그러는 중에 나는 공군기지에 있는 데이브 힐과 다시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전화교환수를 통해 그와 연락하는 것이 어려웠다.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지 못할 것 같았다.
그와 대화하는 중에 데이브는 다시 한번 우리가 떠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지 만 밝힐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 불길하게 말했다. 후에 나는 그로부터 한국 공군이 공결의 일환 으로써 도시에 폭탄을 떨어뜨릴 계획을 했다는 것을 들었다. 미군들은 분명 한국군이 그 계획을 변경시키도록 압력을 가했던 것 같다.
정오 뉴스에 AFKN은 다시한번 광주를 폭동에 뺏긴 도시 라고 전했다. 이 표현은 나를 화나 게 만들었다. 그들의 보도는 사실과 달랐다. 이 뉴스보도는 정부가 미디어를 통제하고 있고, 그럼 으로써 실제상황을 왜곡해 전하도록 있다는 한 예였다. 도시 자체는 조용하고 평화스러웠다. 총을 메고 다니는 급진파들이 격력하게 싸웠다는 보도는 산발적으로 가끔 들리기는 했다. 그렇지만 시 민들이 학생들이나 급진파들의 격력한 행동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다고 암시하는 것은 완전히 잘 못된 보도였다. 사람들의 마음에 두려움은 있었지만, 그 두려움은 학생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군 인들에 대한 것이었다.
점심을 먹은 후 나는 걸어서 도시 주위를 살펴보았다. 걸어다니는 동안에 몇 번이고 사람들 은 내 주위로 몰려와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미국이 광주시민들을 도와 한국이 군사독재로부터 자유를 얻도록 할 것인가?
나는 도청 근처에서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보면서 시간을 좀 보냈다. 나는 서울의 한 신 문사에서 온 기자를 만났다. 그는 도시에 숨어 들어올 수는 있었지만 카메라를 가져올 수 없었다 고 말했다. 그는 필름은 갖고 있기 때문에 카메라만 내가 빌려줘서 자신이 사진을 찍도록 해달라 고 부탁했다. 나는 카메라를 그에게 빌려줬고, 그런 후 우리는 같이 이런저런 곳을 방문하였다. 그동안 그는 사진을 찍었다.
나는 장목사와 연락을 시도해 보았지만 아무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았 다. 그는 학생들과 시민들 중 급진파 투사들에게 그들이 무기를 넘겨주고 계엄군과의 협의 상황 에 동의할 것을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은 수의 사람들은 군인들이 그들의 약속을 지킬 만큼 신뢰성이 없다고 말하면서 협력할 것을 거부했다. 그들은 죽기까지 싸우겠다고 말했다.
오후 8시쯤에 장목사는 문제가 협상에 의해서 풀릴 수 없음을 감지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했다. 그는 군인들이 다음날 쳐들어오리라는 것을 알면서 집으로 갔다. 그는 문제 를 풀고자 닷새 내내 노력했었다.
잠자리를 준비하면서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내가 내일 아침이 오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 각에 직면했다. 나는 군인들이 도시에 들어서면 우리가 살고 있던 선교사 주택단지가 그들의 목 표물들 중 하나가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선교사 주택단지는 도시 중심가 근처의 숲이 몹시 우거진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저항하는 사람들이 숨기 좋은 장소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군인 들이 주택단지에 진입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바라가 여기 있었던 마지막 밤인 지난 수요일 밤에 우리는 그런 가능성에 대해 애기를 나 눴다. 우리는 목요일에 헤어지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확신 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 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감금되어 강제로 광주를 떠나야 한다면, 그녀에게 보여줄 메모를 써서 그것을 침실장롱의 미닫이 문 뒤에 테이프로 붙여놓기로 결정했다. 나는 월요일 밤에 책상 에 앉아 그녀와 아들들에게 보여줄 편지를 썼다. 그들이 결코 읽지 않아도 될 편지가 되기를 기 대한 그런 편지를 썼다. 편지를 장롱 문 뒤에 테이프로 붙여 놓은 후에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아 이의 기도가 마음에 떠올랐다. 만일 깨어나기 전에 죽는다면...
침공 5월 27일
그들이 전쟁을 일으켜, 내가 그 전쟁속에 묻혀 잠자고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바로 거의 그런 일이 일어났다.
새벽 3시 30분쯤에 한국군은 도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진입해 들어온 곳들 중 하나 는 우리의 주택단지가 위치해 있던 산언덕이었다. 후에 내가 들은 보도에 의하면 군인들이 자동 소총을 무차별로 쏘면서 주택단지에 들어섰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너무 피곤해서인지 혹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그 소리에 깨어나지 못했다.
나는 도청 방향에서 나는 매우 거센 총소리를 듣고 4시 30분쯤에 깨어났다. 그 소리는 마치 대포소리나 탱크에서 발사되는 포탄소리 같았으며, 또한 매우 오랫동안 퍼붓는 자동소총 소리 같 았다. 포탄의 사정거리가 어느 정도인지 어는 정도 치명적인지를 알길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2층 에서 빠져나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옷을 입고 지하에 있는 침실로 갔다. 지하에 앉아 있었을때 포 탄 소리는 훨씬 더 다가왔으며, 마치 우리 집 바로 근처에서 포탄이 떨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 았다. 나는 병사들이 우리 집에 쳐들어올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하면서 지하 침실에 있는 장롱 위 에 앉아 30분쯤을 보냈다.
오전에 나는 도시의 여러 교회에 전화를 해서 목사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장목사를 포함하여 모두가 안전했다.
오후 2시에서 4시 사이에 나는 도심지역을 다시 걸어다니면서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나는 매 우 조심스럽고 멈칫거리면서 다녔다. 나는 어둑한 뒷길을 통해 주택단지를 빠져나갔다. 거리의 대 부분은 거의 황량했다. 첫 번째 몇 개의 코너 지점에 이르렀을때 나는 앞으로 나가기 전에 우선 코너를 조심스럽게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안전해 보여서 확신있게 걸어갔다.
강가에 이르렀을때 나는 몇 명의 군인들이 도심지역에서 떨어진 강의 측면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강의 도심쪽 방향에는 군인들이 기관총을 어깨에 두룬채로 많은 건물 옥상에 서 있 었다. 나는 다리를 건너 도심지역으로 걸어갈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았다. 나는 한 구획을 더 걸어 갔는데 거기에서 군인들이 지붕 위에 배치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다음 교차로에서 나는 계속 위 를 치켜보면서 왼쪽으로 돌았는데 그 순간 거의 기관총 총구에 부딪힐 뻔했다. 그때가 내 생애에 서 아마도 가장 음산했던 순간이었던것 같다.
나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도청 앞 광장으로 걸어갔다. 그 지역은 탱크로 엄격히 경계되고 있었으며 아무도 도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광장으로 이르는 거리 입구에 조용 히 서 있었다. 서로에게 말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그 광경은 매우 이상하여 마치 다른 세계에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 서 있을때 일본인 기자 한명이 내쪽으로 가만히 걸어왔다. 우리는 같이 서서 조용한 목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나는 계속해서 도심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중무장한 군인들과 탱크가 거의 모든 주요 교차로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나는 오후 4시가 막 지난 시간 에 집으로 돌아왔다. 오후 5시에 나는 김목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취소되었던 복음전도 대회에 서 준비위원회원으로 일했던 목사들 중 일부는 내가 그들을 대전까지 데려다 줄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플로리다 전도팀이 그렇게 부리나케 광주를 떠나야만 했던 것에 대해 미안해한다고 말했 다. 그들은 팀원들에게 주기로 계획했던 선물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대전으로 가서 좀 더 격식있 게 인사를 나누고 싶어했다. 나는 우리가 도시를 떠날 수 있을까 의아해했다. 그렇지만 목사들은 우리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여행허가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계획을 실행하기로 했다.
그날 저녁 6시에 나는 막스박사 부부(Dr. and Mrs.Marks)와 저녁을 들었다. 막스박사는 전 남대학교에 교환교수로 온 포두대학의 교수였다. 그들은 선교사 주택단지에 살고 있었다. 저녁을 든 후에 선교사 단지에 머물고 있던 미국인들은 짤막한 기도모임을 가졌다.
우리가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이동해서 걸어갈때 우리는 집 주위의 숲에 군인들이 경계를 서 고 있음을 보았다. 그들은 우거진 숲 지역을 보초서면서 그곳에 숨었을지도 모를 시민 투사들을 찾고 있었다.
기도모임에서는 그날 아침 도청에서 죽은 사람들 중 한 사람은 젊은 장로교 신학교 학생이라 는 보고가 있었다. 그는 제일장로교회의 전도사였다. 그는 그 위기를 풀기 위해 노력하는 수습위 원회에서 일하고 있었다. 평화스러운 해결책이 가능하지 않음이 분명해지자 수습위원회의 대부분 의 위원들은 밤 12시 전에 도청을 나와 안전한 집으로 돌아갔다. 이 젊은 전도사는 자원해서 도 청에 남아 있으면서 시민들이 그 주 초에 넘겨주었던 총기가 간직되어 있는 방을 지키고 있었다. 군인들이 도청을 접수했을때 그들은 그가 총을 갖고 있지도 않은데 그 자리에서 총을 쏴 죽였다.
글을 맺으면서
수요일인 5월 28일 아침에 우리는 계엄사령부로부터 여행허가증을 발부 받을 수 있었다. 나 는 침례교목사들을 차에 가득 태우고 대전으로 갔다. 대전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물품을 나르고 있는 몇 대의 트럭을 보았다. 트럭에는 광주시민들을 위한 구호품 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우 리는 그런 트럭을 보면서 화를 냈다. 목사들 중 한사람은 우리는 원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 라 진실과 자유를 필요로 한다. 고 말하였다. 군부와 정부는 자신들을 광주의 구원자들, 곧 공산 주의자의 사주를 받은 학생들의 폭력으로부터 시민을 장롭게 한 사람들로 표현하고자 애썼다. 세 상은 잠시 그것을 믿을지는 몰라도 광주시민들은 이 원조를 경멸하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나는 대전에서 사흘을 보낸 후 가족을 데리고 광주로 돌아갔다. 나는 우리가 대전에서 받은 반응에 대해 매우 불쾌하고 불만족스러워하였기 때문에 특히 광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군사 정부는 일어난 일에 대해 너무나 거짓말을 잘 퍼뜨려서 우리가 보고 경험한 것에 대해 말하고자 했을때 우리를 믿는 친구들은 매우 드문 것 같았다.
우리가 돌아왔을때 나는 장목사가 금요일인 5월 30일에 체포된 것을 알게 되었다. 즉시 나는 그의 아내와 몇몇 광주지역 목사들과 함께 그를 찾아 그의 석방을 보장받고자 노력했다. 우리는 그가 어디 갇혀있는지 몰랐고 더욱이 어떤 기소제목으로 갇혔는지를 몰랐다. 우리가 찾고자 노력 했지만 분명한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다음 며칠동안 우리는 도시에 있는 거의 모든 군 기지나 사무실을 들렀다.
마침내 수요일인 6월 4일에 우리는 그가 같혀있는 곳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의 석방을 보장받는 데는 별 진전을 보지 못했다. 수요일 오후에 우리는 광주 계엄사령본부로 갔다. 우리는 장목사가 안전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확답을 한 장교로부터 들었다. 그러나 그는 우 리가 석방을 기대할 수 있다고는 암시하지 않았다.
나는 그 장교가 나로 하여금 사령관실에 전화를 하도록 했고 그는 내가 전화를 하도록 도와 주었다. 나는 내 자신을 광주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 남침례교 선교사로 소개하고 장군을 만나 장 목사의 석방에 대해 논의하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나는 장군이 바빠서 우리를 만날 수 없다는 애기를 들었다. 나는 장목사가 정당한 이유없이 감금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나 는 목요일 정오 전에 장군과 만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구했다. 만일 내가 그를 만날 수 없다 면 장목사의 불법적 억류를 외국언론에 공표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장군의 부관은 그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아침에 다시 전화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절망 스러운 마음을 갖고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날밤 10시에 장목사는 감금에서 풀려났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 있어서 계속되는 관심사와 논쟁점이 되고 있는 한 문제는 얼마난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하는 문제다.
공식적인 정부 보고에 따르면 민주화운동 동안에 200명 이하의 사람이 죽었다. 그러나 반정 부 소식통의 주장은 2000명에서 15000명이 죽었다는 것이다. 물론 숫자 자체는 많은 선량한 사람 들이 죽었고 아직까지도 한국사회가 그 문제에 대한 진상을 조사할 수 없었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다.
민주화항쟁동안 죽은 사람중 침례교와 관련된 사람은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도청 근처의 군 중 사이에 있다가 5월 21일인 수요일에 난사된 총탄에 맞아 죽은 고등학교 학생이었다. 다른 한 사람은 5월19일인 월요일에 공장으로 일하러 가기 위해 집을 떠났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젊 은 여성이다. 그녀는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리는 이 두사람 중 어느 누구도 정치적 행동 대원이었다고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광주사태의 선량한 희생자들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여러면 에서 1980년 광주의 비극을 대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얼마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죽었단 말인가? 1980년 6월 중순에 내가 가진 대화에 따르면 사망자 수는 832명이었는데 이 숫자는 신빙성이 있는것 같다.
나는 서울에서 광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있었다. 내 곁에는 반정부활동에 참여한 많은 친구 들과 한국군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친구들을 둔 한 광주 거주 젊은 남성이 앉아 있었다. 그는 정 부 관련 일을 하고 있었다. 광주민주화항쟁 바로 전 며칠 동안만 민주화 항쟁 동안 그는 자신의 지위를 사용해서 학생시위자들의 행동을 도와주었다. 이 젊은이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가고자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한국을 떠나고자 하는 주된 이유는 한국에 머물러 있으면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는다는 것이었다.
그와 내가 최근에 광주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귓속말로 이야기를 나눌 때, 나는 얼마나 많 은 사람들이 죽었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는 그 항쟁동안 광주에 거주했던 한국군에서 일했던 친구 가 있었는데 그 친구에 따르면 조사 당국자들은 사망자 수를 832명으로 확인했다고 한다.
다시 회고해보면 그 수는 통계적으로도 내 추측과 일치한다. 1980년에 광주 인구는 약 750.000명이었다. 그 인구 중 광주의 여러 침례교에 출석하고 있는 교인들의 수는 대략 2.000명이 었다. 이들 2.000명의 침례교인들 중에서 우리는 2명의 사망자를 경험했는데, 그 비율은 100명대 1명인 것이다. 만일 그 비율을 광주시 전체에 적용하면 약 750명의 사망자가 된다. 그러나 침례교 도들은 일반적으로 정치적으로 활발한 사람들이 아니므로, 침례교도들은 일반인보다 더 적은 수 의 사망자를 경험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총 832명의 사망자 수는 - 혹은 대략 그 정도의 수는 - 통계적으로 타당한 결론인 것 같다.
그러나 희생자의 수가 832명이건 혹은 200명 이하건 아니면 2.000명 이상이건 간에 5.18 광주 민주화항쟁은 이 잔혹행위를 영구화하는데 관여한 모든 사람들의 삶에 수치를 남기는 상징물이 되고 있다. 또한 5.18 민주화 항쟁은 이 경험에서 희생된 모든 사람들의 삶에 잊을 수 없는 비극 적 상징물로 남아있다. 비록 10년이 지났지만 광주 민주화 항쟁은 군사 독재 시대의 종말을 고하 는 시작이요 자유 탄압의 종말을 고하는 시작을 알리는, 깜빡거리는 자유의 불길이 되는 기념비 적 사건으로 남아있다
첫댓글한 나라의 대통령이 믿고 있던 심복에 의해 경호원들과 함께 피살된 초유의 국가비상태때 외국은 어떻게 할까요. 국가안보를 위해 선포한 비상계엄령 해제하라 요구할까요, 권력에 눈먼 김대중, 김영삼 요구대로 4공 문민 최규하정부 무너뜨리고 시민군을 앞세운 군사정권 세우는 것이 옳은가요.
피터슨 목사는 사회과학도도 아니고, 5.18측 유언비어에 상당히 물들어 있는 시각에서 글을 썼습니다. 그 시대를 겪으셨던 Dr.OB/GYN님은 그런 그의 오류를 인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1980년 초에 최대통령은 전두환 장군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다"는 중대한 오류입니다.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중앙정보부장이 아니라, 중정 서리입니다. 본래 이희성 대장이 임명받았던 자리입니다. 그리고, 10.26 수사가 종결되고 합수부가 해체된 후였던 4월 중순에야 임명받고 5월 초에 취임하셨는데 광주사태가 일어나자마자 최규하 대통령이 해임하셨으니 실제로 중정 서리로 재직하신 기간은 보름밖에 안됩니다.
<김대중은 이제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게 되었으나. 김영 삼은 물러나서 당을 김대중의 지도아래 연합하겠다는 어떤 암시도 보이지 않았다. > 역시 중대 오류입니다. 김대중이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김대중에게는 정당 소속이 없었어요. 3월에 각목들고 김영삼씨 지지자들을 공격해 보았지만 신민당 경선에서 김영삼의 벽을 넘을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대중이 신민당을 여러번 기웃거린 것은 사실이지만 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제로였기 때문에 아예 입당을 하지 않았습니다. 피터슨 목사는 이런 사실 관계조차 모르기 때문에 중대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그날까지 개헌에 대해 어떤 특정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선거일이 발표되지 않으 면, 가두시위를 벌이겠다고 공포했다.> 이것 역시 그 시대를 겪은 우리가 볼 때는 어이없는 거짓말입니다. 선거일을 발표하려고 노렸했던 쪽은 최규하 대통령이고, 방해한 쪽이 김대중과 김대중이 선동한 시위대였습니다. 선거일을 발표하려면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개헌을 하여야 했는데, 개헌 반대가 당시 시위 구호였습니다. 만약 Dr.OB/GYN님이 광주사태 당시 참으로 시위 현장에 계셨다면 "최돼지 물러가라"는 구호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최돼지"란 최규하 대통령을 말합니다.
선거일을 발표하려 애쓰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에게 김대중이 "5월 19일까지 퇴진하라. 만약 5월 19일까지 퇴진하지 않으면 그 후에 일어나는 사태에 대하여는 책임지지 못한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습니다. 피터슨 목사는 그런 기본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에 사실을 거의 정반대로 왜곡하는 서술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계엄령 철폐 유신 헌법 철폐 민주주의 회복과 같은 표어들을 제창했다.> 역시 중대 오류입니다. 계엄령은 해제의 대상이지 철폐의 대상이 아닙니다. 유신헌법 역시 개헌의 대상이지 철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최돼지 물러가라"는 구호가 "민주주의 회복"으로 들렸나 봅니다. "민주주의 회복"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12.12사태 이전으로 복귀하자는 뜻이었던가요? 그런 구호가 있었는가요?
<5월 16일에 서울의 학생지도자들은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누구에게 요구했다는 말인가요? 그것이 아니라, 5월 16일 오후 6시에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가 열려 5월 19일부터 전국 대학교 수업을 전폐하고 시위하여 5월 22일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고, 김대중이 새 내각을 임명한다는 내란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대중 홍위병들은 그 내란을 목적으로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참석자 전원이 내란 음모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시위를 자제하자는 의견을 내는 학생도 있었고,
김대중 내란 음모 주동자 명단을 치안본부에 건네준 학생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5월 16일에 서울의 학생지도자들은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가 아니라, 5월 19일부터 전국 대학교 수업 전폐하고 전국적으로 크게 시위하자고 선동하는 대자보를 나누어주었습니다. 5월 17일 저녁부터 각 대학교 운동권이 교내 벽보에 야간작업으로 붙이기 시작한 대자보들이 그 증거물입니다. <5월 16일에 서울의 학생지도자들은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는 오류입니다. 누가 학생 지도자들인가요? 김대중에게 용돈 받으며 각 대학교 회장단에 대자본 전달한 홍위병들이 서울의 학생지도자들인가요?
<서울 학생들의 결정을 따라 광주의 학생들은 5월 17일 토요일에는 어떠한 시위도 열지 않았다> 이것 역시 오류입니다. 김대중 홍위병들은 5월 17일 고려대로 장소를 옮겨 속회를 하였는데, 전남대는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어요. 전남대학교 운동권은 스폰서 윤상원을 통해 김대중으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고 있었기에 따로 지령문 수령하러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에 참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5월 17일 "민주화 성회"라는 명칭의 시위가 광주에서 있었지요? 그 시위 도중에 서울의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야당인 신민당은 여러 주 동안 그런 입법안을 주창하고 있었지만 국회에서 그 안건을 통과시 키기에는 표가 부족했다>는 무식의 극치입니다. 당시 신민당은 의회정치가 아니라, 거리 정치를 하였습니다. 민주주의 정치는 의회정치라는 것을 모르는 정치꾼들이 거리에서 돌맹이 던지는 것 선동하는 거리 정치를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표가 부족하다니 무슨 표가 부족했다는 말입니까? 님도 기억하시다시피 3김씨 중 아무도 여당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여당 의원은 한 명도 없고 전체가 야당 의원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표가 부족했다는 말인가요? 이 역시 1980년 봄의 시국을 전혀 모르는 이의 중대 오류입니다.
<광주출신 의 군인들은 대전으로 부산출신의 군인들은 광주로 이전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님도 군 복무를 하셨다면 그것은 대한민국 군대에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만약 모르시겠거든 군 과거사위에 가셔서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 문의를 해 보세요. 피터슨 목사는 한국 사회에 대하여 무지하실 뿐만 아니라, 군 복무 경험조차 없으신 듯합니다. 더구나 한국처럼 춣생지와 고향이 다르고 사람들이 이 도시 저 도시로 자주 이사다니는 나라에서 누가 광주 출신이고 누가 부산 출신인지를 단 몇시간 내에 가려내는 것이 가능한가요?
<5월 17일 한밤중에 전두환 소장의 지휘아래 있는 계엄사가> 이 또한 이희성 대장이 중장 시절 직속 상관으로 모시며 군 복무를 했던 저희들이 보기에는 어이없는 오류입니다. 1979년 초까지 전두환 소장은 이희성 중장 부하였습니다. 이희성 중장이 군단장이었고, 전두환 당시 소장은 사단장이었습니다. 전방에서 군단장과 사단장의 상하 관계는 매우 엄격합니다. 그런데, 그 상하 관계가 단 몇개월만에 뒤바뀌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전두환에게 이희성은 어른이며, 그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쉬고 깍듯이 어른으로 받드는 관계입니다. 어떻게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전두환 소장 지휘를 받는 것이 가능한가요?
<계엄령은 또한 모든 대학들을 폐쇄시켰으며> 이것은 중대 오류입니다. 계엄령과 휴교령은 아무 관계가 없어요. 공교롭게도 문교부의 휴교령과 최규하 대통령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선포 시점이 일치하였던 것뿐입니다. 만약 계엄령이 모든 대학들을 폐쇄시켰다면 10.26비상계엄 선포 때 폐쇄되었어야지요. 계엄은 그때 선포되었던 것이니까요. 5월 16일 오후 6시에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가 5월 19일부터 전국대학교 수업을 전폐하고 시위하여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기로 하였다고 하니깐 문교부에서 휴교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계엄령 확대조치 발표 몇시간 전에 오후 6시경을 기점으로 하여 계엄 당국자들은 알 수 없는 정도의 많은 수의 학생지도자들을 체포했다. > 이 또한 사건 내용과 날자에 대한 중대 오류입니다. 5월 17일에 오후 6시경에는 그런 일이 없었고, 5월 16일 6시경에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여러 명이 검거되었는데, 그 이유는 김대중 내란 음모가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 현장에서 적발되었기 때문입니다.
<공수부대원들 각각 대검을 꽂은 소총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이 또한 중대 오류입니다. 착검설을 주장하는 이들 편에서도 착검이 5월 19일 오전 10시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고 확인하여 줍니다. 18일에 동원된 7공수여단은 전라북도 금마 병력으로서 명확하게 광주 사람 정웅 소장 통제 하에 있었습니다. 19일 동원된 11공수와 20일 동원된 3공수에 대하여는 정웅 소장이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했다고 변명하더라도 18일 동원된 병력에 대하여는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호남 춣신 장성 휘하의 전라도 병력이었습니다.
<시민투사들은 5 월 21일 오후 1시 30분에는 총으로 무장하고 있지 않았다. > 이 또한 중대 오류입니다. 폭도들은 5월 19일부터 나주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사실은 푸른 눈의 목격자로 알려진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의 5월 20일자 사진들이 명확하게 입증합니다.
< 14시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 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對空 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다. 15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放送을 하던 같은 機種의 61 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戰敎司로 복귀한 61연대장은 戰敎司에 병력 교체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보고했다. >
<전두환 장군과 그의 동료들은 박총리에게 왜곡된 상황보고를 했으며> 과연 이런 주장은 피터슨 목사가 목사의 양심으로 할 수 있는 말일까요? 님에게는 이런 주장은 5.18유언비어 물들고 찌든 주장이라는 것이 안보이나요?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인 것을 아는 이들이 피터슨 목사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을 옹호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려면 사실에서 출발하시고 이런 무확인 유언비어들을 거두워내셔야 합니다.
<침례교와 관련된 사람은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도청 근처의 군 중 사이에 있다가 5월 21일인 수요일에 난사된 총탄에 맞아 죽은 고등학교 학생이었다>도 명백한 오류입니다. 침례교 신자였던 그 고등학생은 시민군 총탄에 죽었음을 목격한 당시 18세의 시민군 김수영(당시 전남고 2학년)의 증언을 아래 인용하여 드립니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 http://study21.org/518/doc/518movie05.htm
늑대자슥/ 피터슨 목사가 광주사태에 대하여서 무지하면서 광주사태에 대한 저서를 낸 것은 그리 진실된 행동이 되지 못합니다. 무식하면 자료라도 보아아죠. 5월 21일 사망한 고등학생은 시민군 총탄에 의한 사망이라는 시민군 증언이 1988년에 발간되었는데, 그것조차 안 읽어보고 마치 군인들이 총을 난사하였던 것처럼 픽션 소설을 써서 사람들을 속여온 것은 사기행각입니다. 우리가 용납해서는 아니되는 사기행각입니다.
일곱색깔무지개 님.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의 비디오로 증명되었다시피 5월 19일 나주경찰서를 습격하여 광주시민군은 무장해 있었고 후일 그것으로 군과 교전했습니다. 5.18관련자들의 영상물 중 헬리콥터 나오고 군이 많은 무기를 들고나오는 장면은 시민군으로 부터 회수해 온 것을 이동시키는 장면입니다. 광주 시민군은 군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로 교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곱색깔무지개 님. 5.18관련 홈페이지에 가서 그쪽 얘기를 살펴본 바에 의하면, <5.18 전야제 노동시위>가 있었고, 계획된 바대로 5.18이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묶임당한채 폭도 혹은 시민군에게 맞아 죽임당한 이는 광주경찰서의 경찰들이었고, 5월 19일 광주천변에서 광주인들에게 돌로 찍혀 죽임당한 공수부대원 있었고, 8월 21일 권용문 상사의 머리가 짓이겨져 죽임당했습니다. 5월21일 13시경까지 공수부대원 3명, 경찰 4명 학살당했지만, 광주시민은 시민군 오발에 의한 시민군 1 명 사망자 있었습니다.
늑대자슥/ 그러나 그 고등학생은 시민군 총탄에 죽은 것이라고 시민군들이 증언합니다. 전남대 518연구소 사이트에 있는 시민군 증언록 말입니다. 여기 인용해 드립니다. 당시 18세의 시민군 김수영(당시 전남고 2학년)은 5월 21일 시민군 오발 사고로 시민군이 죽어간 사건을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
일곱색깔무지개 님. 광주시민군은 광주교도소 해방을 위해 총 6차례 습격하였고 저지하려는 군과의 교전으로 50여명 사망자가 있었습니다. 만약 님이 주장하시는 것처럼 훈련받은 군이 완전무장한 무기로 죽이기로 작정하고 수만~수십만 웅집해 있던 시위대에 집중 난사하였다면 수분내 수천~수만명이 사망했을 겁니다.
일곱색깔무지개님, 총기 오발 사고로 10명 이상, 시민군 사격 훈련 중 총기 조작 오발로 10명 이상 사망한 외에도 시민군끼리 벌인 시가전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 중 발생한 17명의 시민군 사망자 외에는 시민군 총탄에 의해 대부분 사망하였던 이유입니다.
첫댓글 한 나라의 대통령이 믿고 있던 심복에 의해 경호원들과 함께 피살된 초유의 국가비상태때 외국은 어떻게 할까요. 국가안보를 위해 선포한 비상계엄령 해제하라 요구할까요, 권력에 눈먼 김대중, 김영삼 요구대로 4공 문민 최규하정부 무너뜨리고 시민군을 앞세운 군사정권 세우는 것이 옳은가요.
피터슨 목사는 사회과학도도 아니고, 5.18측 유언비어에 상당히 물들어 있는 시각에서 글을 썼습니다. 그 시대를 겪으셨던 Dr.OB/GYN님은 그런 그의 오류를 인정하셔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1980년 초에 최대통령은 전두환 장군을 중앙정보부장에 임명했다"는 중대한 오류입니다. 그런 사실이 없습니다. 중앙정보부장이 아니라, 중정 서리입니다. 본래 이희성 대장이 임명받았던 자리입니다. 그리고, 10.26 수사가 종결되고 합수부가 해체된 후였던 4월 중순에야 임명받고 5월 초에 취임하셨는데 광주사태가 일어나자마자 최규하 대통령이 해임하셨으니 실제로 중정 서리로 재직하신 기간은 보름밖에 안됩니다.
<김대중은 이제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설 수 있게 되었으나. 김영 삼은 물러나서 당을 김대중의 지도아래 연합하겠다는 어떤 암시도 보이지 않았다. > 역시 중대 오류입니다. 김대중이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 당시에 김대중에게는 정당 소속이 없었어요. 3월에 각목들고 김영삼씨 지지자들을 공격해 보았지만 신민당 경선에서 김영삼의 벽을 넘을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김대중이 신민당을 여러번 기웃거린 것은 사실이지만 경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제로였기 때문에 아예 입당을 하지 않았습니다. 피터슨 목사는 이런 사실 관계조차 모르기 때문에 중대 오류를 범한 것입니다.
<그날까지 개헌에 대해 어떤 특정조치가 취해지지 않고 선거일이 발표되지 않으 면, 가두시위를 벌이겠다고 공포했다.> 이것 역시 그 시대를 겪은 우리가 볼 때는 어이없는 거짓말입니다. 선거일을 발표하려고 노렸했던 쪽은 최규하 대통령이고, 방해한 쪽이 김대중과 김대중이 선동한 시위대였습니다. 선거일을 발표하려면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개헌을 하여야 했는데, 개헌 반대가 당시 시위 구호였습니다. 만약 Dr.OB/GYN님이 광주사태 당시 참으로 시위 현장에 계셨다면 "최돼지 물러가라"는 구호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최돼지"란 최규하 대통령을 말합니다.
선거일을 발표하려 애쓰던 최규하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하였던 것입니다. 더구나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에게 김대중이 "5월 19일까지 퇴진하라. 만약 5월 19일까지 퇴진하지 않으면 그 후에 일어나는 사태에 대하여는 책임지지 못한다"는 최후 통첩을 보냈습니다. 피터슨 목사는 그런 기본 사실조차 몰랐기 때문에 사실을 거의 정반대로 왜곡하는 서술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계엄령 철폐 유신 헌법 철폐 민주주의 회복과 같은 표어들을 제창했다.> 역시 중대 오류입니다. 계엄령은 해제의 대상이지 철폐의 대상이 아닙니다. 유신헌법 역시 개헌의 대상이지 철폐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리고 "최돼지 물러가라"는 구호가 "민주주의 회복"으로 들렸나 봅니다. "민주주의 회복"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12.12사태 이전으로 복귀하자는 뜻이었던가요? 그런 구호가 있었는가요?
<5월 16일에 서울의 학생지도자들은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누구에게 요구했다는 말인가요? 그것이 아니라, 5월 16일 오후 6시에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가 열려 5월 19일부터 전국 대학교 수업을 전폐하고 시위하여 5월 22일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고, 김대중이 새 내각을 임명한다는 내란 음모를 꾸미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대중 홍위병들은 그 내란을 목적으로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참석자 전원이 내란 음모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시위를 자제하자는 의견을 내는 학생도 있었고,
김대중 내란 음모 주동자 명단을 치안본부에 건네준 학생들도 있었던 것입니다. <5월 16일에 서울의 학생지도자들은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가 아니라, 5월 19일부터 전국 대학교 수업 전폐하고 전국적으로 크게 시위하자고 선동하는 대자보를 나누어주었습니다. 5월 17일 저녁부터 각 대학교 운동권이 교내 벽보에 야간작업으로 붙이기 시작한 대자보들이 그 증거물입니다. <5월 16일에 서울의 학생지도자들은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고>는 오류입니다. 누가 학생 지도자들인가요? 김대중에게 용돈 받으며 각 대학교 회장단에 대자본 전달한 홍위병들이 서울의 학생지도자들인가요?
<서울 학생들의 결정을 따라 광주의 학생들은 5월 17일 토요일에는 어떠한 시위도 열지 않았다> 이것 역시 오류입니다. 김대중 홍위병들은 5월 17일 고려대로 장소를 옮겨 속회를 하였는데, 전남대는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어요. 전남대학교 운동권은 스폰서 윤상원을 통해 김대중으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고 있었기에 따로 지령문 수령하러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에 참석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5월 17일 "민주화 성회"라는 명칭의 시위가 광주에서 있었지요? 그 시위 도중에 서울의 학생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야당인 신민당은 여러 주 동안 그런 입법안을 주창하고 있었지만 국회에서 그 안건을 통과시 키기에는 표가 부족했다>는 무식의 극치입니다. 당시 신민당은 의회정치가 아니라, 거리 정치를 하였습니다. 민주주의 정치는 의회정치라는 것을 모르는 정치꾼들이 거리에서 돌맹이 던지는 것 선동하는 거리 정치를 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표가 부족하다니 무슨 표가 부족했다는 말입니까? 님도 기억하시다시피 3김씨 중 아무도 여당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여당 의원은 한 명도 없고 전체가 야당 의원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표가 부족했다는 말인가요? 이 역시 1980년 봄의 시국을 전혀 모르는 이의 중대 오류입니다.
<광주출신 의 군인들은 대전으로 부산출신의 군인들은 광주로 이전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님도 군 복무를 하셨다면 그것은 대한민국 군대에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것입니다. 만약 모르시겠거든 군 과거사위에 가셔서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 문의를 해 보세요. 피터슨 목사는 한국 사회에 대하여 무지하실 뿐만 아니라, 군 복무 경험조차 없으신 듯합니다. 더구나 한국처럼 춣생지와 고향이 다르고 사람들이 이 도시 저 도시로 자주 이사다니는 나라에서 누가 광주 출신이고 누가 부산 출신인지를 단 몇시간 내에 가려내는 것이 가능한가요?
<5월 17일 한밤중에 전두환 소장의 지휘아래 있는 계엄사가> 이 또한 이희성 대장이 중장 시절 직속 상관으로 모시며 군 복무를 했던 저희들이 보기에는 어이없는 오류입니다. 1979년 초까지 전두환 소장은 이희성 중장 부하였습니다. 이희성 중장이 군단장이었고, 전두환 당시 소장은 사단장이었습니다. 전방에서 군단장과 사단장의 상하 관계는 매우 엄격합니다. 그런데, 그 상하 관계가 단 몇개월만에 뒤바뀌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전두환에게 이희성은 어른이며, 그 앞에서 숨도 제대로 못쉬고 깍듯이 어른으로 받드는 관계입니다. 어떻게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전두환 소장 지휘를 받는 것이 가능한가요?
<계엄령은 또한 모든 대학들을 폐쇄시켰으며> 이것은 중대 오류입니다. 계엄령과 휴교령은 아무 관계가 없어요. 공교롭게도 문교부의 휴교령과 최규하 대통령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선포 시점이 일치하였던 것뿐입니다. 만약 계엄령이 모든 대학들을 폐쇄시켰다면 10.26비상계엄 선포 때 폐쇄되었어야지요. 계엄은 그때 선포되었던 것이니까요. 5월 16일 오후 6시에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가 5월 19일부터 전국대학교 수업을 전폐하고 시위하여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기로 하였다고 하니깐 문교부에서 휴교령을 내렸던 것입니다.
<계엄령 확대조치 발표 몇시간 전에 오후 6시경을 기점으로 하여 계엄 당국자들은 알 수 없는 정도의 많은 수의 학생지도자들을 체포했다. > 이 또한 사건 내용과 날자에 대한 중대 오류입니다. 5월 17일에 오후 6시경에는 그런 일이 없었고, 5월 16일 6시경에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여러 명이 검거되었는데, 그 이유는 김대중 내란 음모가 "전국대학교 총학생회장 연석회의" 현장에서 적발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산지역에서 5월 17일 토요일에 광주로 이동된 검은 베레모를 착용한 공수부대원들이었다.> 이 또한 중대 오류입니다. 7공수여단은 전북 금마에 소재한 부대로서 부산에서 광주로 이동한 사실이 없습니다. 전라도 부대요, 지휘관도 호남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의 부대는 베트남전에도 참여한적이 있었다> 이 또한 오류입니다. 특전사는 월남전 참전 이후 창설되었습니다.
<공수부대원들 각각 대검을 꽂은 소총으로 무장되어 있었고> 이 또한 중대 오류입니다. 착검설을 주장하는 이들 편에서도 착검이 5월 19일 오전 10시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고 확인하여 줍니다. 18일에 동원된 7공수여단은 전라북도 금마 병력으로서 명확하게 광주 사람 정웅 소장 통제 하에 있었습니다. 19일 동원된 11공수와 20일 동원된 3공수에 대하여는 정웅 소장이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했다고 변명하더라도 18일 동원된 병력에 대하여는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호남 춣신 장성 휘하의 전라도 병력이었습니다.
<시민투사들은 5 월 21일 오후 1시 30분에는 총으로 무장하고 있지 않았다. > 이 또한 중대 오류입니다. 폭도들은 5월 19일부터 나주경찰서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기 시작하였으며, 이 사실은 푸른 눈의 목격자로 알려진 독일인 기자 힌츠페터의 5월 20일자 사진들이 명확하게 입증합니다.
<시민들에게 총을 쏘는 헬리콥터>는 비전문가가 사실을 거꾸로 본 예입니다. <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를 아래 인용하여 드립니다:
< 14시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남도청 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對空 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다. 15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放送을 하던 같은 機種의 61 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戰敎司로 복귀한 61연대장은 戰敎司에 병력 교체가 불가능한 상황임을 보고했다. >
<대광침례교회에 다니는 한 고등학 생이 싸우는 가운데 죽었다는 것이다.> 군인이 없는데 누구와 싸웁니까? 그것이 아니라 시민군에 징집되어 사격 훈련을 받다가 죽은 것입니다. 시민군 사격 훈련 중 오발 사고로 죽은 고등학생이 열 명이 넘었습니다.
<전두환 장군과 그의 동료들은 박총리에게 왜곡된 상황보고를 했으며> 과연 이런 주장은 피터슨 목사가 목사의 양심으로 할 수 있는 말일까요? 님에게는 이런 주장은 5.18유언비어 물들고 찌든 주장이라는 것이 안보이나요?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거짓말인 것을 아는 이들이 피터슨 목사의 이름을 팔아 거짓말을 옹호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진실을 말하려면 사실에서 출발하시고 이런 무확인 유언비어들을 거두워내셔야 합니다.
<침례교와 관련된 사람은 두 명이 있다. 한 명은 도청 근처의 군 중 사이에 있다가 5월 21일인 수요일에 난사된 총탄에 맞아 죽은 고등학교 학생이었다>도 명백한 오류입니다. 침례교 신자였던 그 고등학생은 시민군 총탄에 죽었음을 목격한 당시 18세의 시민군 김수영(당시 전남고 2학년)의 증언을 아래 인용하여 드립니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 http://study21.org/518/doc/518movie05.htm
그래 오발사고로 시민들이 200명명이 집단으로 죽었는지 묵도 싶소이다,군인들의 오인사격으로 총 몇명이 죽은줄 아시요
자꾸 사건을 은폐시키고,화제를 딴데로 돌릴려구 하지는 마소.
늑대자슥/ 시민군끼리의 총격전으로 가장 많은 사망자가 생겼으며, 두번째로 큰 사망 원인은 6차례에 걸친 시민군의 광주교도소 습격 사건이었습니다.
역사학도님 잘못 설명하신것 같습니다 (1)시민군끼리 총격전으로 누가 사망자가 생겼다는 의견이지요? (2)또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으로 누가 사망했나요? 두가지 답변 정확히 적어주세요
이 증언은 1988년 발간된 것이고, 피터슨 목사의 윗글은 1990년에 쓴 것이니 시민군 증언이라도 좀 읽어보고 쓰셨다면 선교사가 저런 거짓말을 글로 남기는 오류를 조금이나마 면할 수 있었을 것을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당신보다는 저 선교사가 더 진실된다고 생각이 되어지는데요
늑대자슥/ 피터슨 목사가 광주사태에 대하여서 무지하면서 광주사태에 대한 저서를 낸 것은 그리 진실된 행동이 되지 못합니다. 무식하면 자료라도 보아아죠. 5월 21일 사망한 고등학생은 시민군 총탄에 의한 사망이라는 시민군 증언이 1988년에 발간되었는데, 그것조차 안 읽어보고 마치 군인들이 총을 난사하였던 것처럼 픽션 소설을 써서 사람들을 속여온 것은 사기행각입니다. 우리가 용납해서는 아니되는 사기행각입니다.
아직은 공수군인의 만행이 너무 악랄했다는것은 이미 여러 증언에 밝혀진 사실입니다.최초사망자가 시민이고 군인은 아니잖아요?
총기도 처음부터 시민들이 들고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사격을 하지 않았으면 시민들이 촟기를 들지않았을것으로 생각합니다.
일곱색깔무지개 님.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의 비디오로 증명되었다시피 5월 19일 나주경찰서를 습격하여 광주시민군은 무장해 있었고 후일 그것으로 군과 교전했습니다. 5.18관련자들의 영상물 중 헬리콥터 나오고 군이 많은 무기를 들고나오는 장면은 시민군으로 부터 회수해 온 것을 이동시키는 장면입니다. 광주 시민군은 군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로 교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곱색깔무지개 님. 5.18관련 홈페이지에 가서 그쪽 얘기를 살펴본 바에 의하면, <5.18 전야제 노동시위>가 있었고, 계획된 바대로 5.18이 있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묶임당한채 폭도 혹은 시민군에게 맞아 죽임당한 이는 광주경찰서의 경찰들이었고, 5월 19일 광주천변에서 광주인들에게 돌로 찍혀 죽임당한 공수부대원 있었고, 8월 21일 권용문 상사의 머리가 짓이겨져 죽임당했습니다. 5월21일 13시경까지 공수부대원 3명, 경찰 4명 학살당했지만, 광주시민은 시민군 오발에 의한 시민군 1 명 사망자 있었습니다.
늑대자슥/ 그러나 그 고등학생은 시민군 총탄에 죽은 것이라고 시민군들이 증언합니다. 전남대 518연구소 사이트에 있는 시민군 증언록 말입니다. 여기 인용해 드립니다. 당시 18세의 시민군 김수영(당시 전남고 2학년)은 5월 21일 시민군 오발 사고로 시민군이 죽어간 사건을 이렇게 증언한다. <광주은행 반대편에 위치한 최희천이비인후과 앞에서 청년이 총을 나누어 줘 나도 실탄 5발과 카빈총을 받았다. 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
오발 사고로 200명 이상이 죽고 수천명이 부상을 입었는지요?제발 확실한 답 해주세요.
일곱색깔무지개 님. 광주시민군은 광주교도소 해방을 위해 총 6차례 습격하였고 저지하려는 군과의 교전으로 50여명 사망자가 있었습니다. 만약 님이 주장하시는 것처럼 훈련받은 군이 완전무장한 무기로 죽이기로 작정하고 수만~수십만 웅집해 있던 시위대에 집중 난사하였다면 수분내 수천~수만명이 사망했을 겁니다.
일곱색깔무지개님, 총기 오발 사고로 10명 이상, 시민군 사격 훈련 중 총기 조작 오발로 10명 이상 사망한 외에도 시민군끼리 벌인 시가전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5월 27일 도청진압작전 중 발생한 17명의 시민군 사망자 외에는 시민군 총탄에 의해 대부분 사망하였던 이유입니다.
역사학도님은 사실에 근거한 자료를 가지고 댓글을 올리시길 바랍니다.님의 글을 보면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럴싸한 분위기로 글을 쓰더군요.
Dr.OB/GYN님, 혹시 님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른 점이 있는지요. 그럴 때는 서로 같이 근거 자료를 제시하도록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