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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 기자의 기인이사(奇人異士)(3):나혜석-(中) 유부남이던 춘원 이광수와 사랑에 빠지고
문갑식
사회부기자 당시 중국민항기 김해공항 추락-삼풍백화점 참사-씨랜드 화재-대구지하철화재 등 대형사건의 현장을 누볐다. 이라크전쟁-아프가니스탄전쟁을 취재했으며 동일본 대지진때 한국기자로선 처음 현장에서 들어가기도 했다.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문갑식의 세상읽기’ ‘문갑식이 간다’같은 고정코너를 맡고 있다. 일본 게이오대학 미타(三田)캠퍼스 초빙교수, 미국 하와이대학 마노아 캠퍼스 미래학과정(삼성언론재단)에 이어 영국 옥스포드대학 울프슨칼리지 방문교수로 연수중이다. 공교롭게도 섬나라에서만 수학한 이색적인 경력의 소유자다. <上편에서 계속> 김우영과 나혜석의 러브스토리를 말하기에 앞서 언급해야 할 이가 있습니다. 춘원 이광수(李光洙·
자꾸 이야기가 샛길로 갑니다만 당시 신(新)지식인의 사랑도 대단했습니다. 본처와 두 애인 사이를 방황하던 춘원이 대담하게 “인간에게는 부모의 허락 없이도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할 권리가 있다”는 ‘자유(自由) 연애론’을 편 것입니다. 춘원은 백혜순과 이혼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제물포항에서 중국 북경으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교사라는 사람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타락, 음란, 부도덕한 짓을 했다”는 비판을 받지요.
다시 김우영-나혜석으로 방향을 돌려봅니다. 1920년 두사람은 결혼하는데 함흥 영생중학교를 거쳐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하던 나혜석은 4가지 결혼조건을 제시해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여자가 결혼에 조건을 단다는걸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었지요.
첫째, 평생 지금처럼 사랑할 것, 셋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 넷째, 전(前) 애인 최승구의 비석(碑石)을 세워줄 것.
더 놀랍게도 김우영은 신혼여행차 최승구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워줍니다. 두사람의 결혼은 당시 화제를 몰고왔습니다. 4가지 조건 외에 결혼청첩장을 신문광고로 대체한 것입니다. 둘의 결혼은 염상섭의 소설 ‘해바라기’의 소재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남편 김우영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 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석세우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 전처(前妻)와의 사이에 낳은 딸과 떨어져 지내게 했지만 신혼살림은 시어머니가 있는 서울 숭이동 집에서 차린 것입니다. ‘평생 사랑한다’는 조건도 결과적으로 나혜석의 불륜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나혜석은 왜 파격적인 여성이 된 것일까요.
첫째 나혜석은 너무도 똑똑했습니다. 그는 삼일여학교-진명여고보에서 1등과 반장을 도맡았습니다. 진명여고보 졸업 때 ‘매일신보’에 최우등 수석 졸업생으로 얼굴 사진까지 실릴 정도였습니다. 둘째 나혜석이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유학간 것은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였으며 남자까지 포함해도 당시 서양화를 전공한 이는 다섯명이 넘지 않았다고 하지요. 셋째 어머니의 사랑없는 결혼생활을 보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고 합니다.
나혜석은 유학시절 ‘세이토’라는 페미니스트 잡지와 입센의 ‘인형의 집’을 읽고 감화를 받은 후 이런 글을 국내외 잡지에 씁니다.
김우영과 결혼한 직후 나혜석은 화가로서 짧은 전성기를 맞습니다. 결혼 이듬해 만삭의 몸으로 개최한 개인전에 이틀간 5000 여 인파가 몰렸으며 70 여개의 작품 모두가 고가(高價)에 팔린 겁니다. 여기엔 변호사인 남편의 후광이 있었겠지요. 이 개인전은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유화전(油畵展)이었는데 이후 나혜석은 매년 조선미술전람회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그런 두사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27년 남편을 따라 나선 유럽 여행길이 파탄을 가져온거죠.
둘의 여행루트는 지금봐도 대단합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신의주~중국 봉천(奉天)~하얼빈~시베리아횡단열차 편으로 러시아 모스크바~프랑스 파리로 간 겁니다. 여행은 남편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특별포상을 받아 이뤄진 겁니다. 나혜석은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과 함께 간 유럽에서도 프랑스 파리의 매력에 푹 빠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독일로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떠나자 파리에 홀로 남아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공부에 열중하게 됩니다.
처음에 부부는 여행을 떠날 때 서너달 정도로 예정됐지만 여행은 1년8개월이나 이어집니다. 안타깝게도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의 앞에 천도교 교령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릅니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에 포함된 인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후 천도교에서 활동합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최린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흘러갑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이지요.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여하간 일본의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최린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최린과 나혜석은 “서로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될 길을 가고 맙니다. 그해 11월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두사람은 본격적인 불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두사람은 통역을 고용해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사람들 눈에 안뜨일리 없고 말이 안나올 수 없지요.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 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은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장면을 목격하지요. 김우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릅니다만 그것은 두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여정(旅程)입니다. 그렇다면 최린은? 최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한 뒤 나혜석에게 흥미를 잃습니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하자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 않고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주고 입막음을 시도했지만 한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겁니다. 나혜석의 대담함은 여러군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최린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 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는군요. <下편에계속>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