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세기 중엽 신라의 대당종속과 소위 나당동맹 결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하는 평가는
"살아남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나름대로 사료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 사료란, 신라가 당에 '구원요청'하는 외교문서에 적힌 이야기들이다.
뭐 대충 이런 투다.
"대당제국 황제님하 빨리 구해주세여. 고려 백제 못된넘들이 괴롭혀여. 죽을거같아여ㅜㅜ"
위의 견해는, 이런 외교문서의 수사에 진정성이 있다는 전제하에서만 타당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외교문서의 수사에서 진정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구구절절히 이야기하는 것은 지면과 시간의 낭비일것이다.
일본이 외교성명으로 '과거는 유감'이라 했다고 해서, 그것을 '진정한 사과'라고 볼 수 있는가?
한마디로 사료에 남은 당시 신라의 대당 외교문서는 당시의 상황을 사실대로 전해준다고 볼 수 없다.
진정성이 결여된 문서의 수사에만 의존하여 당시 정세를 판단하는것은
대단히 안일한 태도이거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위라고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과연 당시 신라는 정말 고려/백제의 협공으로 '곧 멸망할 것 같은' 상황이었는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는 것만이 방법일것이다.
640년대의 한반도 정세.
세세한 사료검토를 굳이 여기서 반복재탕하지 않더라도,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당시 정세는 간단히 정리된다.
고려는 당과의 긴장이 높아지고 있어 신라에 대해서는 적극적 공세를 펼 수 없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임박한 당과의 정면대결도 벅찬데 후방에다 긁어부스럼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655년 이전까지, 고려가 신라에 대해 유의미한 적극적 공세를 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사료마다 시기가 서로 다른 당항성 공격 기록은 실체도 주체도 모호하다.
백제는 642년 대대적 공세로 구 가야령의 대부분을 점령했고, 이후 645년까지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645년 가을에서, 647년 가을까지는 전쟁기록이 없는 소강상태였다.
비담의 난 이후인 647년 10월 백제의 공세로 전쟁이 재개된다.
649년까지 3차례에 걸친 전쟁은 모두 백제의 패배로 끝났다.
이후 655년 이전까지 다시 전쟁기록이 없는 소강상태를 보인다.
(자세한 사항은 2336번 글 '646년의 공백, 그 의미는?'을 참고)
대당 외교문서에 써있는 우는 소리들이 주는 인상을 지워버리고
단지 허심하게 전투기록을 검토해 볼 때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이렇다.
적어도 655년 이전까지는, 신라는 결코 핀치에 몰리지 않았다.
신라는 여/제의 협공을 당하지 않았고 다만 백제와 싸웠을 뿐이며
대체로 수세였고 구 가야령의 적지않은 영토를 상실하기는 했지만
끝내는 방어에 성공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라가 정말로 여/제의 협공을 당하고, 어느정도 핀치에 몰렸다고 할 수 있는 시기는 655년에 이르러서이다.
이때에는 백제뿐 아니라 고려도 공세에 나섰고 신라는 북쪽 국경을 강릉선까지 후퇴시켜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655년이라면, 이미 신라가 극단적인 대당종속외교를 선택한 이후이다.
태평송, 당의 복식 수용, 당의 연호 사용 등이 모두 647년 비담의 난과 진덕여왕 즉위 직후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선입관을 벗고 허심하게 선후관계를 분석한다면
여/제의 신라협공 -> 신라의 대당종속외교
가 아니라,
신라의 대당종속외교 -> 여/제의 신라협공
이라고 봐야 맞다.
이러한 가설이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렇다면 신라는 왜, 핀치에 몰리지도 않았는데 대당종속외교를 선택했는가?"
이 점이 설명되어야만 할 것으로 생각된다.
답은 그 시기에 있다.
위에 잠깐 언급했듯이, 신라가 대당종속외교로 기울어진 것은 비담의 난과 진덕여왕즉위 직후이다.
참으로 절묘하게도 비담의 난과 진덕여왕즉위를 경계로 하여
선덕여왕대의 대당외교에서 보였던 묘한 긴장감이 사라지고,
신라는 당에 대해 그야말로 철저하게 엎드리는 태도로 돌변한다.
진덕여왕을 옹립한 세력은 잘 알려진 대로 김춘추-김유신.
김춘추가 642년 백제의 대공세 때 딸과 사위를 잃고 큰 원한을 품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 맹세하기를 '어찌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하랴!' 하였고
훗날 실제로 사비성에 입성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원수'인 대야성의 배신자 검일/모척을 찾아 처단한 일이었다.
그의 아들 법민이 항복한 백제왕자 부여륭에게 한 말 또한 사료에 남아 그 진상을 보여준다.
굳이 재론이 필요없으리라 믿는다.
김유신은 당시 신라에서 다소 유별난 군사모험주의자이며 팽창주의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는 진골 내에서 소외된 가야계라는 그의 가문배경도 어느 정도 작용했으리라 생각되는데
자세한 사항은 후에 기회가 되면 상세히 이야기하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신라의 대당종속외교와 이른바 나당동맹의 성립은
여/제의 신라협공에서 기인한 불가피한 선택이 아니라,
신라 지배층 내의 일파가 자신들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던 것이다.
첫댓글 ....설령 그랬다고 할지라도, 어떤 요인이 되었건 이 시기 신라의 버팀목은 당 밖에는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보입니다...; 그렇다고 왜를 기대하기도 힘들었고... 저도 근래 이 시기의 신라와 왜의 관계 쪽도 잠깐 찾아봤었는데 다시 좀 봐야겠네요... 그나저나 여담이지만 655년 조천성 전투는 왜 백제본기에 없는 건지 내심 궁금해지네요... 똑같은 전투도 각국 본기마다 그 톤이나 디테일이 다른 것도 걸리고...
글에서 썼다시피 655년 이전엔 신라는 단지 백제만을 상대하고 있었을 뿐이며, 그렇게 결정적으로 패퇴당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640년대 후반의 전쟁은 거의 신라가 승리했고, 이후 백제는 더 이상 단독으로는 의미있는 공세를 펴지 못합니다. 물론 고려가 反唐의 파트너로 백제를 고른 상황에서 대당외교의 필요성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지요. 하지만 단지 대당외교라면 이미 선덕여왕대에도 잘 하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645~647년의 소강상태는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생존을 위해 전쟁 하다가 통일된것 같습니다. 백제의 의자왕이 주여 여러 성들을 점령했고 신라는 동맹으로 고구려와 중국을 골랐는데, 연개소문과의 동맹이 실패하여 당나라와 연합, 당나라는 고구려의 동맹이던 백제를 공격해 고구려의 힘을 빼기 위해, 신라는 백제를 막기 위해 전쟁을 일으켯고 결국 통일에 이른것이 아닐까요?
음... 저는 당나라의 야욕과 신라의 살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로 나온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죠 결론적으로 당나라는 고구려를 먹으려 신라는 백제로 부터 살려고 동맹을 맺고 통일이 이루어 진것이죠.
우선 신라가 살아남은 7세기 상황은 통일이라고 하기가 그렇습니다. 신라는 백제만 병합하고자 했습니다. 고구려는 당나라가 어떻게 하던말던 상관도 않했습니다. 제2차고당전쟁에서 신라군은 백제부흥군 막는다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죠. 그걸 통일이라고 하는건 너무 기록만 믿는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일시적이긴 하지만 신라는 대백제 방어기지인 대야성을 빼앗겼고, 대당외교기지인 당항성도 빼앗겼습니다. 물런 일시적이었지만요. 신라인들은 분명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은 고백이 마음만 먹으면 신라의 숨통도 끊을 수 있다는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죠. 그리고 일시적이지만 백제군은 신라 수도 서라벌근처까지 군대를 진군시킨 후 돌아온 전적도 있습니다. 신라인들의 위기감은 엄청났을것이라고 봅니다. 물런 김춘추-김유신의 사심과 출세욕이 있었긴 했지만 이것만으로 신라수뇌부들이 백제와 치열하게 전쟁을 하지 않았겠죠. 신라가 백제멸망전에 사용한 5만이란 대군을 모으고, 그군대를 뒷받침할 군량과
당군도 먹일 군량을 어디서 구했을까요? 분명 신라귀족들이 내놓것이죠. 위기감이 없었다면 그누구도 미쳤다고 자기재산 내놓리가 없습니다. 못배운 백성들이야 속일지 몰라도 지식층인 귀족들까지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윗분님들 말씀처럼 신라는 백제만 병합하고자 했죠. 고구려는 당나라의 야욕이였죠.
선덕여왕시기 서라벌근처까지 백제공격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지명에 관한 해석으로 봐야 한다고 봅니다..예전엔 여근곡을 경주시 건천읍 라고 지명해석을 했지만..요즘은 경남합천군 가야면으로 지명을 해석하고 있는걸로 압니다...또한 비담의 난을 수습하는 과정과 대당외교의 영향으로 김춘추 -김유신 라인이 신라 주도세력으로 급부상하면서 중앙집권화가 되었죠.. 중앙집권화가 되고 있는 시기에 지방귀족들이 반발하기는 힘듭니다..고구려,백제의 멸망 주요요인은 지방분권이었고 , 나당연합군의 승리 주요요인은 중앙집권이라고 해석하시는 분들도 많죠...
사실 지명비정이라는 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 크게 설득력 있는 건 못 봤네요..... 너무나 모호합니다 지명비정은... 한 예로 대구-구미 근방으로 비정되는 동잠성은 어디서 해석하기엔 충주 동남방으로도 해석되고, 어떤 분은 논문에서 무왕 때 우소가 군사를 거느리고 습격한 옥문곡도 (그 당시 경남 서쪽 변경을 직접 못 점령했다는 이유 하나만 따지고는) 무주 근방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무왕때 뜨거운 감자였던 가잠성은 비정되는 후보지만 안성, 괴산, 거창 세 곳입니다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설인 괴산설조차 제가 보기엔 별 설득력이...;;
구가야령을 상실한 상황에서, 신라 지배층에 어느정도의 위기의식이 공유되었음은 사실일 겁니다. 김춘추/김유신의 대두는 그런 분위기와 연관되어 있겠지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위기의식'정도였을 뿐입니다. 당시 신라인들은 자국의 상황이 존망의 기로에까지 몰려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듯 합니다. 그 증거가 비담의 난이죠. 비담으로 대표되는 구귀족세력은 백제라는 외적보다 김춘추/김유신이라는 '내부의 적'을 더 위협적인 존재로 파악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반대 입장에서도 마찬가지고요. 압량주 군주였던 김유신의 부대가 내란에 가담한 것은 현대 한국에 비유하자면 휴전선을 지키는 사단이 군사쿠데타에 투입된 것과 같습니다.
5만의 백제침략군이 동원되는 시기는 김춘추 일파에 의한 권력 일원화가 달성된 이후의 일이지요. 그것이 신라 지배층의 일치단결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고려가 연개소문이 집권한 후 온 국력을 기울여 대당항쟁에 나섰던 것과 같은 이치니까요. 누구도 연개소문 치하의 고려 지배층이 '일치단결'되어 있었다고 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640년대는 ' 존망의 위기 ' 라는 분위기 까지는 아니었다는 게 느껴지진 합니다. 내전과 정권장악을 할 정도의 ' 여유 ' 가 있었다면....
물런 존망의 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김춘추-김유신에겐 당시 신라의 위기감정도면 충분했겠죠. 그후엔 우리도 7,80년대에 너무나 많이 당했던 위기조성과 여론몰이만 하면 되니깐요. 사실 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의 말을 누가 '노'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를 살아보지 않았다면 지금의 시각에서 당시를 바라보면 안됩니다..
지금의 시각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지요. 자기딴에는 '객관적'이라 생각한다해도 실제로는 지금의 시각일 수밖에 없죠.(이런걸 누구 표현빌리면 '객나적'이라 하나요? ㅎ) 지금의 시각에서 과거를 바라보는것 그게 바로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 아닐까요?^^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다 잘못된 것처럼 보이죠..당시에 신라가 멸망의 위기로 느껴질 정도의 상황인데 뭘 못하겠습니까? 땅 잃은 것만 생각하지 말고 당시의 상황을 이해해보세요..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 순순히 죽음 받아들이는 사람 몇이나 될까요..
제가 보기엔 모대왕님의 문제제기는 "당시 신라의 상황이 멸망의 위기가 아니었을 수 있다"인 것 같습니다. 이러한 문제제기에 반론을 제기하려면 멸망의 위기였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야지, 지금의 시각에서 재단해선 안된다는 식의 지적은 올바른 지적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일제강점기 친일파들을 청산해야 한다는 주장에, 당시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는 식으로 핀트가 맞지 않는 반론을 제기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해당 인물의 친일 행위의 정도가 어땠느냐는 식으로, 구체적으로 들어가야 마땅하지요.
무엇이 '지금의 시각'이고 무엇이 '당시의 상황' 인가요? 하물며 어제의 일도 모두 기억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편집하는게 인간인데, 1400년 전의 일에 대해서 '당시의 상황'과 '지금의 시각'을 무슨 기준으로 구분한다는 것이죠?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오는데...' 운운하신 것도 제가 보기엔 '지금의 시각'일 뿐인데요? 당시 신라인들이 '자기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느꼈는지 아닌지, 그걸 어떻게 아나요?
신농님 이야기가 논리적이라고 봅니다. 형식적으로 볼 때, 모대왕님의 주장을 반박하려면 '멸망의 위기였다' 라는 주장을 펴거나 '멸망의 위기가 아니라는 결론을 도출한 모대왕의 A, B, C 라는 논거는 잘못되었다' 라는 주장이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역사를 정통하지 않아서 세세한 반론은 못합니다..하지만 삼국사기에 기록된 요충지 대야성과 그 외 성 수십개를 빼앗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그 정도의 정황이면 신라에 위기감이 조성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그리고 김춘추가 백제를 멸하겠다 공언하고 고구려에 원병을 청했을 때 거절당한 것으로 압니다..결국 길은 당나라 아니었나요? 제가 말씀드린 것은 지금 기록을 보고 당시의 상황을 논하는 것과 당시를 살면서 실제로 상황에 닥쳐 생사가 걸린(이게 좀 애매하긴 한데..) 경우가 비교가 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제 생각이 맞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저도 역사를 좋아하지만 많이 알지는 못합니다..지식이 많은 것도 아니고
의견이나 피력해본 것인데 좀 커졌네요..사과드립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야기를 하자면 고구려는 물론 백제조차도 신라를 멸망시키려 했는지는 지극히 의문입니다. 백제 정부(특히 왕권) 입장에서는 신라라는 '외부의 적'이 있어야 왕권 강화에도 명분이 생기는 마당인데 멸망시켜보아야 아무런 실익도 없었을 것입니다. '설욕' 차원에서 라면 백제도 힘을 다했겠지만 굳이 신라를 멸망시켜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훗날 태봉의 김궁예 왕처럼 신라를 멸망시키겠다는 식의 말이나 의도는 백제에서(삼국사기, 삼국유사, 금석문을 불문하고) 전혀 발견되고 있지 않습니다. 백제 입장에서는 설욕 문제가 아닌 이상 국내 귀족들과의 갈등 쪽이 더 머리 아픈 사안이니 말입니다.
당연히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제가 쓴 100년 전쟁에서 보듯이 신라는 640년대 초기, 중기에 국가존망 수준의 위기를 잇따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구 가야제국령 전부 상실, 당항성 공성전, 비담의 난등 굵직한 사건만도 이정도입니다. 게다가 왕통마저도 성골이 절단나면서 최악의 시기였습니다. 외부상황? 고구려는 외교적 수사이긴 하다만 한강유역 반환요구, 백제는 연일 공격, 일본? 다이카 개신하면서 신라를 위협하니 사면이 고립된 상황입니다. 오로지 당제국만이 구원의 손길을 줄 상대였습니다. 이러니 당연히 신라-당 군사동맹이 유일한 대안인 것입니다.
위에서 썼듯이 고려는 실질적으로 신라를 공격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백제와 싸웠을 따름이고, 많이 깨지긴 했어도 그다지 위태로운 상황까지 가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대화개신 이후 왜국에선 오히려 친신라 계열이 득세하고 있었지요. 그것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 '당 복식 착용사건'이죠. 신라가 급격히 대당사대복속으로 기울면서 왜국도 경계심을 품게되어 다시 친백제계가 득세하는 역반전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위에서 쓴 것과 마찬가지 메커니즘입니다.
일본은 645년 부터 효덕왕 655년 부터는 제명여왕이 즉위하였는데 무슨 친신라계라는 뜻인지요???...당복식 착용때문에 신라사신을 꾸짖었다는 기사가 잇지만 그것 때문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것은 효덕이나 제명여왕이 친신라계가 아닌 친백제계였다는 사실을 외면한 주장입니다..신라가 대당사대복속으로 기울면서 왜국이 친백제계가 득세하는 역반전이 일어났다고하는 주장은 도대체 효덕왕과 제명여왕이 누군지?도 알아보지도 않고 이상한 주장을 하는것 같습니다만...
효덕왕대는 친백제계인 소아씨를 타도한 시기인데 무슨 근거로 친백제계라고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7세기 들어 백제와는 완전히 분리된 일국이 된 왜국은 이미 이전의 백제일변도 외교를 탈피하고 있었고, 특히 당의 팽창위협이 가속화되던 효덕왕대에는 다자간 등거리외교를 추진했음과, 특히 대화개신에서 김춘추의 방문에 이르는 시점에서 친신라적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것은 상식인데요. ㅎㅎ
아니? 효덕왕은 백제 무왕의 아들로 알고 있으며 중대형(교기)의 외삼촌이며 중대형 교기는 제명여황이 백제에서 시집오기 전에 낳아서 데려온 아들이라는 것은 이미 상식인데..그들이 죄다 백제 왕실과 혈연관계에 잇는 사람들인데 무슨 친신라계라는 거죠?? 일개 대아찬 김춘추의 방문으로 인질까지 삼았다는 백제왕실의 일본천황들이 갑자기 친신라계로 바뀌어졌나요??..그렇다면 김춘추의 외교술은 경천동지 시킬만한 능력이군요....ㅎ.ㅎ!
효덕왕이 무왕의 아들? 교기와 중대형이 동일인물? 제명여왕이 백제에서 시집왔다? 이게 대체 뭔소린가요? 어디에 근거를 둔 이야기입니까? 전거를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통용되지 않는 황당한 이야기를 님은 '상식'이라고 하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