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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2월 19일 교중미사 후 구성 성당 ‘첫 번째 확대 사목회의’를 위하여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명
(신앙인이 지녀야 할 자세)
저는 오늘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적 사명에 대해서 몇 마디 말씀드리고자 한다. 이것은 신앙인 특히 봉사자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자세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저는 여러분에게 세 가지를 강조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1. 여러분이 주인이다
그리스도인은 각자가 공동체의 주인이라는 것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는 신앙인들을 만날 때마다 늘 주장하는 말의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기도 하다. 너무도 분명한 사실인데도 불구하고 어느 본당을 막론하고, 잘 실천되지 않는 부분이 바로 ‘희박한 주인의식’이라고 생각한다.
1) 떠나는 사람과 머무르는 사람
사제나 수도자는 몇 년 단위로 이곳을 떠나거나 바뀔 사람들이다. 이 공동체에 남는 사람은 당연하게 여러분들이다. 신자의 입장에서 사목지를 찾아온 사목자 마다 특색이 각양각색이기에 그때마다 적응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이 본당을 책임지고 끝까지 갈 사람은 여러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여러분 중에서도 머지않아 본당에서 전출할 사람도 있을 것이어서 언제까지 구성성당에서 살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오래도록 이곳에 남을 사람들은 사제나 수도자보다 평신도인 여러분이라는 점을 다시금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더구나 참된 공동체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유능한 사목자’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공동체 구성원 각자’의 역할이라고 믿고 있다. 물론 덕망있고 유능한 사목자가 오면 공동체 성장과 발전을 앞당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차피 그가 이룬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다. 왜냐하면 그 공동체의 발전이라는 것이 소위 ‘능력있는’ 사목자 개인의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본당 구성원들이 돕고 협력한 것은 사실이지만 구성원 모두의 오롯한 힘과 능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런 사목자라 해도 언제까지 이 공동체에 머물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한 개인인 사목자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공동체가 되면 될수록 건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서 영적이고 정신적으로 쉽게 병들 수 있고, 신앙생활 형태도 지극히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자세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고 보여 진다. 건강한 공동체는 사목자를 통하여 영적이고 사목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사목자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는 식의 의존적인 공동체에서 벗어나, 공동체 스스로의 영적인 자립심과 자강의 힘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본다. 이를 공동체 구성원 각자에게 요청되는 ‘주인의식’이라고 하겠다.
2) 자발적인 신앙
주인의식을 가진 신앙, 자발적인 신앙이라고 해서 내 나음대로 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말을 앞세우기보다 행동을 먼저 하는 것을 말한다. 비난만을 늘어놓거나 불평만을 앞세우지 않는다. 소위 문제있는 본당이란 말만 많고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 적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믿고 있다. 또는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명령에만 익숙하고, 정작 자기 스스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을 때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누구 하나 적극적으로 나서서 일하려 하지 않으며, 그래서 희생봉사하는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리스도인은 그래서는 안 되며, 스스로 알아서 하려는 자세, 자발적인 신앙, 누구를 시키려는 것에서 벗어나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자세가 되어야 올바른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주인의식이나 자발적인 신앙은 누가 알려주거나 던져주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필요성을 느끼고 그런 정신을 배우고 익히며 삶으로 옮기기 위해서 노력할 때 비로소 몸에 배는 그런 것이다.
대체로 한국 그리스도인의 신앙형태는 피동적이고 수동적일 때가 많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형태의 신앙생활을 하는 공동체에서는 구성원들이 소속감을 느끼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말만 많지 움직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구성원들이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면 그 어떤 일에도 협력하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은 명령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래야 구성원들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핑계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저는 본당에서 기간과 시간을 정하여 보는 판공성사를 가능한 한 피하려고 한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신앙생활의 패턴을 바꿔야 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심하게 표현한다면 최근의 판공성사 형태는 마치 토끼몰이처럼 때가 되면 신자들을 몰아가는 것처럼 보여서 문제가 있다고 본다. 혹은 21세기를 살고 있으면서 결코 예전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구태의연함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버릴 수 없다. 문제는 지금의 판공성사 형태가 거의 일방적이라는 데 있다. 심하게 표현하면, 판공성사표가 마치 법정 출두일을 고지하는 최종명령서처럼 여겨져서 표를 받는 신자들의 마음을 무겁게 하고, 조급하게 만들며, 심지어 없는 죄목을 쥐어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뿐인가, 시간에 쫒기며 줄서서 하는 고백이기에 고백내용도 훈계하는 사목자도 모두 피로가 겹치고 형식적일 때가 많다. 그것은 주인의식의 육성과는 한참 거리가 멀며, 나아가 스스로 알아서 하는 자발적인 신앙 형태를 직접적으로 방해하는 것이 아닐 수 없고, 신앙생활 자체를 피동적이고 수동적으로 만들어가며, 일방적인 교회 명령에 따르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러한 판공성사 방식은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교회만의 희한한 풍습이며, 신앙인들의 신앙자세를 어린 유아기적인 자세에 머물게 만드는 것 같아서 안타깝고,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신앙생활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것이라고 보아서 문제가 많다고 본다. 하지만 지금의 판공성사의 유익함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냉담자 회두 등) 다만 성사적인 유익함에 비하여 신앙적이고 영적인 태도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되기에 피하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사목자마다 혹은 신자들마다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며, 다만 신자의 입장에서 이러한 장,단점들을 잘 알고 성사생활에 임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적어도 사실을 알고 임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한편, 한국교회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한국교회의 창립동기는 ‘평신도들의 자발적인 신앙’에 의한 것이었음을 기억할 것이다. 외국선교사들이 이 땅에 올 수 있었던 것도 한국 평신도들이 나서서 영입운동을 벌인 결과였다. 그만큼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평신도였지만, 스스로 ‘하느님 신앙’을 으뜸으로 알고 평생을 살았으며, 비록 순교의 마지막 순간이 와도 하느님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타인이 가져다 준 신앙이었다면 신앙형태가 많이 달랐을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선조들의 자발적이고 강렬한 신앙을 요즘 우리의 나약한 신앙심으로는 이해조차 힘든 부분이라고 하겠다.
사실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신앙을 지켜간다는 것이 여러 면에서 박해상황만큼이나 어렵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까 신입교우들이 줄어가고, 기존의 신자들 중에서도 낙오자들(냉담)이 생겨나기도 한다고 본다. 그 동기와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현대사회의 여러 유혹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보니 신앙인 각자가 하느님 신앙을 찾기 위한 의지적이고 자발적인 노력이 없이는 신앙을 지켜내기가 말처럼 수월해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어찌 되었든 내 신앙은 내가 지키고, 우리 본당공동체는 우리가 지켜간다는 소명의식, 주인의식이 없으면 점점 힘든 상황이 되어 가고 말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그리고 너무도 할 일이 많다는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봉사할 일꾼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리신 것이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오 9장 38절)
2. 우리는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다
지난 연중5주일 복음(마태오 5장 13-16절)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은 우리에게“너희는 세상의 빛이고 소금이다! 라고 하셨다. 이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특히 봉사자의 자세를 갖추는 데 있어서 더 할 나위 없이 중요하고 필요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1) ‘세상의 빛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무엇보다도 주변을 환하게 비출 수 있는 빛과 같은 존재, 빛의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사실 빛 자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다만 우리는 빛 자체이신 그분을 따라서 빛의 자녀가 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예수님처럼 빛의 역할을 똑같이 세상에서 수행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요한 3,19-21) 여기서 ‘빛의 역할’이란 세 가지 측면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세상 사물은 빛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제 색깔을 갖고, 저만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빛은 모든 존재 자체의 가치와 의미를 드러내주는 것이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 값진 역할이라고 하겠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는 어떤 것도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외친다. “밤이 물러나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있게 살아갑시다.”(로마 13,12-13)
둘째, 빛이란 단순히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일 이외에 ‘진실을 밝히고, 거짓을 들추어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빛이 있어야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제대로 밝힐 수 있다. 워낙 세상이 하도 수상하여 거짓이 진실처럼 행세하고, 진실이 거짓 속에 파묻혀 헐떡거릴 때가 많아 보인다. 사도 바오로는 예수님께서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신다고 고백한다.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 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1코린 4,5) 이점에서 빛의 시대적인 역할은 예언자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것은 시시비비라는 등불을 적당히 등경 위에 걸쳐서 그림자 속으로 밀어 넣는 비겁함이 아니라,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는 단호하고도 분명한 자세를 갖추는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빛의 역할이라고 해서 사사건건 모든 것을 들춰내는 일만 하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진실을 드러내려는 긍정적인 측면을 사는 자세라고 할 것이다. 빛이 된다는 것은 매사에 긍정적인 자세를 갖추는 것이고, 비난하는 태도가 아닌 격려하는 자세이며, 올바른 자세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셋째,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세상의 빛이 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것은 한 마디로 구원을 위하여 ‘세상에 봉사’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존재’가 되는 삶이라고 할 수 있겠다. ‘봉사’란 부모가 자녀에게 하듯이 사랑을 지니고 ‘희생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인의 봉사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섬김의 자세가 근본적이기에 자기희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겠다.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들을 불러 모으시고, 제자교육에 충실하시어 세상에 파견하신 것이 바로 세상을 향한 봉사에 관건이 있었다는 것과 같다고 할 것이다. 이점에서 희생없는 신앙은 말뿐인 신앙이며 위선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더구나 예수님은, 사람에게 봉사할 줄 아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하느님의 봉사를 받을 수 있다고까지 말씀하셨다. 이를 ‘봉사’라고 하시면서 곧, ‘주인이 종에게 시중드는 일’이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왔을 때 깨어있는 종들이여.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루카 12,37)
이처럼 빛의 역할을 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진실 편에 서 있기에 착한 일을 많이 하게
될 것이고, 자비와 사랑이 클 것이며, 겸손함이 묻어나는 사람일 것이다. 예를 든다면,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주는 사람이며,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을 거저 주는 사람이고, 복수 대신 용서를 택하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다”(요한 3,17)고 하셨기 때문이다. 스승을 닮은 제자는 상대를 쉽게 판단하기보다 이해하고 감싸는 일을 우선하게 될 것이다.
2) ‘세상의 소금이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이는 한 마디로 어느 것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소금과 같은 귀한 존재’로 살아가라는 것이라고 하겠다.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 아니라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 살라는 것이다. 음식을 썩지 않게 하고, 그 본래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소금과 같은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존재가 되라는 것이다. 소금과 같은 역할이란 무엇보다도 상대를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참을성있게 들어주고(경청), 공감하며, 위로(격려) 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누구나 필요로 하는 소금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헤픈 사람’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서 넉넉함이 있고, 조급해 하지 않으며, 함께 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이로써 그리스도인의 뭔가 ‘다름’을 남들에게 한 눈에 알아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은 더 잘 봉사하기 위하여 봉사자가 지녀야 할 리더쉽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의 리더쉽은 무엇보다 ‘경청의 리더쉽’이 요청된다. 그리고 ‘희생의 리더쉽’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현대인들의 대화방식을 보면 서로 자기의 말을 하느라 말이 많은데, 정작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기만 해도 ‘관계회복’이 몰라보게 빨라지며, ‘치유’에 쉽게 이를 수 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 ‘내가 먼저’라는 솔선수범하는 자세가 있다면 누구나 그를 신뢰하고 따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현대인은 말을 앞세우는 사람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을 가장 신뢰하기 때문이다.
다만 빛과 소금의 역할을 제대로 하려면 한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곧 스스로를 태우거나, 녹여내야 역할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스스로 타지 않는 빛은 주변을 환하게 비출 수 없으며, 스스로 녹아들지 않는 소금은 결코 짠맛을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빛이 되고, 소금이 되려면 ‘자기희생’이 있어야 가능해진다. 이점에서 그리스도인이란 빛이 되어 스스로를 타오르게 하는 사람이며, 소금처럼 스스로를 녹일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하느님 보시기에 좋고,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의 부족한 부분들은 하느님께서 다 채워주실 것이라고 사도 바오로는 강조한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떨렸습니다. 나의 복음선포는 지혜와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토 2,3-4)
3. 봉사자는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영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신앙인은 자기방식대로 살기보다 먼저 하느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는 ‘하느님을 중심 삼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주님 말씀’을 자주 접하고 묵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인의 삶의 근거는 하느님의 ‘말씀’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우고, 하느님과 사귈 수 있으며, 온갖 삶의 지혜를 건져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보고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말씀으로 무장한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매사 ‘영적인 기도’로 무장하여 자기 자신 외에 주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점에서 두 가지를 살펴볼 수 있겠다.
1) 공동체를 대변하고 공동체에 봉사하려는 사람의 최우선적인 역할은 본당 공동체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 솔선수범하고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적인 노력과 협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영적인 기도로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공동체이건 풀어가야 할 문제점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문제없는 가정 없듯이 문제없는 공동체도 없을 것이다. 두 사람 이상이 모인 곳에는 항상 불평과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전제해야 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해결해야 할 크고 작은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해결방식에 있어서 전적으로 인간적인 방식에만 의존하기보다 하느님께 의탁할 때, 곧 영적인 기도의 힘을 빌릴 때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때가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수 있는 때가 되기 때문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장 13절)
일례로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 공동체가 첫 번째로 맞이한 문제는 바로 식량배급이었다.(6장 1-7절) 당시 신자들은 식사할 때 함께 공동으로 하였는데, 그리스말을 하는 유대인 과부들이 늘 뒷전으로 밀리는 푸대접을 받으면서 불만이 터진 것이다. 그리스말을 쓴다는 이유로 은연중에 찬밥신세일 때가 많았던 것이다. 남편 없이 혼자 사는 것도 서러운데 먹는 것까지 눈치를 보게 되면서 하나인 식탁공동체의 삶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난감해진 사도들은 해결방안으로 식탁공동체를 직접 도와서 협력할 조력자들을 뽑기로 했고, 그래서 봉사자로 스테파노를 비롯한 7명을 선발하여 식량배급에 만전을 기하도록 한 것이 바로 부제의 시작이었다. 역할분담 차원에서 식탁봉사를 위한 부제단이 출범하면서 기존의 사도단과 함께 선교하는 교회질서의 초기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신약성서의 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바오로 사도의 서한들이 많은 이유는 그가 지역마다 신앙공동체를 세우게 되면서 각각의 공동체마다 야기된 신앙상의 문제들에 대하여 일일이 사목적으로 응답한 편지글이었기 때문이었다.(참. 선교란 무엇인가, 156-158) 결국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봉사직무와 함께 영적인 기도의 삶을 적절히 배분하면서 그때그때 적절히 해결해나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 본당의 봉사자들은 사제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제가 사제로서의 삶에 충실하고, 서품 때의 초심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제 자신의 노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평신도의 진정어린 기도로 협력할 때 큰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사제는 직무상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아울러 인간적인 나약함을 그대로 지닌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적으로 부족한 사제를 대하면서 단순히 비난만을 앞세우기보다 용기를 잃지 않고 공동체를 인도하려면 사제 혼자만의 힘으로는 부족하며, 무엇보다 영적인 도움, 곧 기도로 응원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점에서 사제는 교회 앞에 선 사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도의 대상이라는 것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제가 영적으로 행복해야 공동체도 행복할 수 있으며, 사제가 불안하면 공동체도 따라서 갈팡질팡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무조건 사제를 지지하고 따르기만 하라는 것은 아니다. 한 인간인 사제가 안고 있는 인성적으로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면서 평신도의 협력하는 기도로 채우고 도울 수 있다면 그가 공동체를 더 잘 이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3) 기도의 모범은 언제나 ‘주님의 기도’에 있다.(마태오 6장)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 대한 고백과 인간의 청원이라는 두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첫째, 우리 또는 봉사자들이 기도할 때에는 먼저 하느님의 뜻을 구해야 하며, 그리고 필요한 부분을 청하는 것이라야 함을 알아들을 수 있다. 기도의 첫 자리는 항상 하느님을 향한 찬미와 감사기도이며, 이어서 각자가 개인적인 청원기도를 바치는 것이 주님의 기도의 정신이다. 뒤집어서 말하면, 단순히 내 뜻만을 이루려고 하는 기도는 자칫 이기적인 기도가 될 수 있으며, 올바른 기도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째, 우리가 유의해야 할 부분은 ‘용서’에 관한 두 번째 형태이다. 용서를 실천하기란 결코 쉽지 않으며 힘든 것이다. 한 마디로 용기가 없으면 용서하기가 힘들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기에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4) 겸손한 ‘솔로몬의 기도’는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하는 것이 좋은지를 알려준다.(열왕기 상 3장) 다윗 성군이 죽자 임금이 된 솔로몬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청한 내용이 그의 기도였던 것이다. 한밤중 꿈속에서 하느님이 “네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 하자, 솔로몬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백성들을 올바로 통치할 수 있는 바른 지혜, 곧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청했다. 올바른 응답을 들으신 하느님은 그에게 분별력을 주시면서 아울러 ‘청하지 않은 것들’(부와 명예)까지 덤으로 주셨다. 기도는 그런 것이다. 사실 우리의 기도 습관을 보면 청원기도가 대부분이지만, 청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의식하면서 기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피조물을 내신 조물주이시기에 한낱 세상살이를 위한 것만을 관심 쓰지 않으시고, 세상살이를 지혜롭게 극복해 나갈 수 있는 근원적인 동력에 더 관심이 많으시기 때문이다. 나약한 인간에겐 오로지 부귀영화만이 최고랄 수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지혜롭고 현명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것) 더구나 하느님은 올바른 것을 청할 때 청하지 않은 것까지 덤으로 더 쳐주신다는
것도 알아두면 좋을 것이다. 한 가지 기도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서 나누고자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기도는 ‘비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이다. 기도는 ‘없는 것을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감사’해 하는 것이다.”
특히 기도의 힘은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할 때 하느님께서 애써 도와주신다는 것을 명심한다면, 우리가 청하지 않은 것까지 덤으로 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 대로 될 것이다. 이러한 분명한 사실을 우리는 ‘마르코 복음’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마귀를 쫓아내는 일에 대해서 주님께서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아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9장 14-29절) 고 분명히 말씀하셨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