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상계수
배세복
봄비가 잦았다 물이 불어날 땐 내를 건너지 않는 게 좋겠다고 갑천 따라 늘어선 경고판들이 젖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내가 더 슬펐느니 네가 더 울었느니 따지지 않기로 했다 강수량은 평균치에 근접했다 그해도 그랬다
새 시집을 보내자 전화가 왔다 원로 시인이었다 유명한 시인으로 거듭나라 했다 그냥 제가 좋아하는 거 하다 죽는 거죠 노인네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다고 나무랐다 서로 웃었다 웃음 끝이 짧았다
여름이 와서 장마가 길어져도 핑계 대지 않으려 한다 비가 온다고 젖은 기억을 말리지 못하는 법은 아니다 햇빛 뜨거운 날에 너는 절벽에서 몸을 던졌다 아니 더 많은 이들이 바람 좋은 날 퉁퉁 불은 제 씨앗을 물에 던진다
벚나무가 꽃잎을 날리며 동시에 푸른 잎을 피운다 분홍과 연두가 농담을 다툰다 수로를 미리 준비했다면 눈물이 시원히 흘러갔을까 시를 써서 그래요 형님이 자꾸 밑바닥을 보려 하잖아요 나는 들키지 않으려 무던히 애쓸 테다 허나 끝까지 절뚝일 것이다
는개라는 개
사내가 창밖을 내다보니
개 한 마리 벤치에 엎드려 있었다
젖은 몸이 어딜 쏘다니다 돌아왔는지
가로등 불빛에 쉽게 들통 났다
서서히 고개 돌려보니
곳곳에 개들이 눈에 띄었다
야외 체력단련기구 위에도
지친 여러 마리의 개들
차가운 철제 의자에 젖어 있었다
당신이 떠난 후로 습관처럼
밤은 또 개를 낳았다
그것들은 흐리고 가는 울음이다가
가끔은 말도 안 되게 짖기도 한다
어떤 밤은 안개라는 이름으로 부옇게
또 다른 밤은 번개로 울부짖다가
이 밤은 그냥 조용한 는개 된다
너는 개다 너는개다 너 는개다
이 정도면 키울 수 있겠다 싶어
사내가 불을 끈다 천천히 이불 당긴다
말사末寺들
어머니는 형에게 200원을 주셨다. 소풍 날이었다. 형은 그 돈으로 사이다 두 개와 달걀 두 개, 보름달처럼 생긴 빵도 두 개를 샀다. 그리고 한 개씩 내게 건넸다. 나는 그걸 소풍 가방에 넣었다. 작은 체구로 부지런히 걸었다. 오서산은 서해안에서 제법 높은 산이었고, 정상 가까운 곳에 내원사라는 절이 있었다. 우리는 내원사 경내에서 김밥을 먹었다. 우물이 있었고 거기서 물을 긷는 스님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유난히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늙었고 회색 옷을 입고 있었고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당연히 머리도 짧았다. 그는 물을 여러 번 긷고 나서도 한 시도 가만있지 않았다. 법당문을 열고 청소를 하는 것 같았다. 먼지를 터는 듯했고 빗자루질도 하고 걸레질도 했다. 걸레를 빨고 우물에서 법당으로 가는 그의 흰 고무신에 가을 햇빛이 잠깐 쨍하고 머물다 갔다.
일이 벅찬 날에는 종아리가 붓는다. 종일 서서 일하는 직업의 특성상 자주 종아리가 붓지만, 어떤 날은 오리걸음을 한 것처럼 근육통이 생긴다. 나는 침대 위에서 종아리를 주무르다가 간혹 그 내원사를 떠올린다. 수덕사의 말사를 떠올린다. 범종 소리 아련한 곳, 혼자뿐인 주지승은 새벽같이 일어날 것이다. 물을 길어 쌀을 씻고 홀로 예불을 올릴 것이다. 혓바닥은 목어처럼 입 안에 재우고 부지런히 두 다리 놀리는 곳. 그곳의 주지 스님인 그도 이 밤엔 고단하겠지. 고단해서 나처럼 종아리를 주무르거나 혹은 잠자리를 준비하겠지. 어쩌면 이미 곤한 잠에 빠져 나지막하게 코를 골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몸이 하나의 교구敎區라면 머리는 본사本寺라고 생각해 본다. 그리고 몸을 제외한 육체는 말사다. 특히 팔다리는 말사 중에 말사다. 본사는 끊임없이 말사에게 지령을 내린다. 본사의 지령은 막강할 수밖에 없다. 막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해서는 말사까지 전달될 리가 없다. 말사에게는 행동보다 편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言語]이다. 간혹 세 치 혀가 말사의 실천을 막아버릴 수 있다. 말로 때우는 것은 누구든 할 수 있다. 말사의 주지승이 말뿐인 주지승이라면 그 말사는 어떤 지령도 전달될 리 만무하다. 일반 가정家庭으로 따지면 홀로뿐인 말사의 주지승은 곧 그 집의 아버지고 어머니고 자식들이기 때문이다.
나는 주지승이 천천히 경내를 둘러보는 것처럼 종아리도 만져보고 발바닥도 쓰다듬어 본다. 허벅지도 눌러본다. 그리고 반대 팔로 서로의 팔도 주물러 본다. 이제 이것들을 편안히 뉘어야 하므로 종국에는 살살 토닥여 본다. 본디 거만한, 아니 거만할 수밖에 없는 본사 덕에 오늘도 말사들은 바빴다. 그러나 내일도 다른 또 어떤 날도 그들을 편히 놀릴 생각이 없다. 말로 때우고 말로 핑계 대고 말만 가지고 논다면 어떤 사찰도 존재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 정신에서 내 몸이 나가 버려야만 하는 이유가 된다. 말의 무덤은 곧 폐사廢寺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창밖으로 달이 기울 시간이다. 내일도 모레도 힘든 하루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미리 나는 내 몸에게 달래본다. 미안하다 내 말사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