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욱진 연보
1918년 충남 연기군 동면 송룡리 105번지에서 아버지 결성 장씨 기용(基鏞)과
어머니 이기재(李基在)의 차남으로 출생하다.(음력 1917년 11월 26일)
1922년 (5세) 일가가 서울 당주동 한옥으로 이사
1923년 (6세) 부친 별세, 고모 옆집(내수동)으로 이사
1924년 (7세)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현서울사대부초)입학하다.
공부보다 그림에 더 열중하여 다섯 살 위인 형에게 꾸지람을 자주 듣다.
까치를 많이 그리다.
1926년 (9세) 보통학교 3학년생인 그의 그림을 새로 부임한 미술교사가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주최의 <전일본 소학교미전>에 출품, 일등상을 받다.
처음으로 유화를 시작하다. 이후 미쓰코시 백화점 주최.
1930년 (13세)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입학하다.
1932 (15세) 일본인 교사의 공정치 못한 처사에 격렬히 항의한데 대한 징계로 경성 제2고보를 중퇴.
1933년 (16세) 중퇴 이후 집에서 그림을 그렸으며, 성홍열을 앓아 충남 예산
수덕사(만공선사 선실)에서 6개월간 정양.
때마침 수덕사를 찾아왔던 화가 나혜석을 만나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하다.
1936년 (19세) 체육특기생으로 양정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학.
육상(높이뛰기)과 빙상선수로 활약.
1937년 (20세) 동아일보주최<학생미전>에서 가작상을 두 차례 수상.
1938년 (21세) 조선일보 주최<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공기놀이》를 출품하여
특선과 사장상을 수상하고 상금으로 100원을 받다.
이를 계기로 가족들은 그가 그림그리는 것을 반대하지 않게 되다.
1939년 (22세)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23회)하다.
4월, 일본 동경의 제국미술학교(현 무사시노 미술학교)서양화과에 입학.
1940년 (23세) <제19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선전)에 《소녀》로 입선.
1941년 (24세) 4월 12일, 이병도박사의 장녀 이순경과 결혼.
1942년 (25세) 장남 정순 출생.
1943년 (26세) 9월, 일본제국미술학교 졸업. <선전>에《언덕》이 입선.
1944년 (27세) 일제의 강제징용으로 경기도 평택 비행장 건설작업에 동원.
이후 일본 관동군 해군본부(서울 회현동)의 경리요원으로 배속.
1945년 (28세) 장녀 경수 출생.
해방 후 국립박물관(진열과)에 취직하여 도안과 제도일. 박물관 내 관사에 거주.
1947년 (30세) 차녀 희순 출생. 국립박물관 사직.
덕수상업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로 재직.
김환기,유영국,이규상 등과 "신사실파"결성.
1948년 (31세) 12월, 동인전<제1회신사실파전>(화신백화점)에 출품.
1949년 (32세) 11월,<제2회신사실파전>(동화백화점)에 《독》,《조춘》, 《面》,《마을,》《까치》,《몽》,
《방》,《원두막》,《점경》,《수하》,《아이》등 유화 13점 출품.
1950년 (33세) 6.25발발 후 바로 피난가지 못하고 가족이 먼저 부산으로 피난.
1951년 (34세) 1월 초 부산으로 피난.
여름에 종군화가단(중동부전선 제8사단)에서 그림을 그리고, 종군작가상 수상.
1952년 (35세) 제4회 종군화가단전<3.1절 기념 종군화가미술전>(부산 대도회 다방)에 출품.
1953년 (36세) 피난지 부산에서 어린이 동화책의 컷을 많이 그리다.
《자동차 있는 풍경》을 제작. 5월 말<제3회 신사실파전>.
1954년 (37세) 3월, <제6회 종군화가전>(부산국제구락부>에 출품.
7월, 대한미협전<한국현대회화 특별전>에 출품.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우 교수 취임. 동료 미대교수 노수현과 친분.
4녀 윤미 출생.
1955년 (38세) 「문학예술」지에 "발상과 방법"기고.
1957년 (40세) <동양미술전>(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출품.
1958년 (41세) 11월 20일, 동경제국미술학교 동문전인 <백우회 제1회전>(국립박물관 화랑)에《樹下》를 출품.
<한국현대작가전>(미국샌프란시스코)에 출품.
1960년 (43세)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직 사임.
명륜동(2가 22-2)개천가의 초가집을 양옥으로 개조.
1961년 (44세) 경성 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 출신의 동문화가들인
권옥연, 유영국, 이대원, 김창억, 임완규 등과 "2·9동인회" 조직,
그<제1회 2·9동인전>(국립도서관 화랑)에 《산수》등 유화 2점 출품.
1963년 (46세) "덕소시절"(1963-75).
1964년 (47세) 차남 홍순 출생하다.
제1회 개인전(반도화랑, 11월 2일-8일)을 개최.
1967년 (50세) <제5회 앙가주망전>에 출품하는 등 서울대 제자들과 그룹활동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와 실험에 자극을 받음.
1968년 (51세) <제6회 앙가주망전>(신세계백화점 화랑)에 출품.
1969년 (52세) 3월부터 6월까지 동아일보의 「書舍餘話」란에 수필 발표.
("표현", "죄가 있다면", "발산", "저항", "나의 주변")
1970년 (53세) 정초에 명륜동집에 머물던 중 아내가 불경공부를 하는 모습에 착상,
덕소로 돌아온 후 일주일간 식음을 전폐하면서 아내의 초상화《진진묘》.
이 그림을 그린 뒤, 명륜동에 돌아와 3개월간 앓아 눕다.
1972년 (55세) <한국근대미술 60년전>(국립현대미술관 주최)에 《모기장》등 4점 출품.
1973년 (56세) <한국현역화가 100인전><국립현대미술관 주최)과
<제11회 앙가주망전>(신세계백화점 화랑)에 출품.
1974년 (57세) 제1회 개인전 이후 십년 만에 제2회 개인전(공간화랑, 4월12일-18일)을 열고,
근작 중심의 유화 32점 출품.
1975년 (58세) 5월, 덕소생활을 청산 "명륜동시절"(1975-79)시작.
1976년 (59세) 불교인 백성욱 박사와 함께 시골의 사찰을 많이 찾아다녔고,
그 영향으로 《팔상도》와 《사찰》등의 작품을 제작. 잡지, 신문에 기고했던 글을 모아
산문집『강가의 아틀리에』(민음사)를 발간.
1977년 (60세) 양산 통도사에서 경봉스님(1892-1982)을 만나 법명 비공(非空)을 얻다.
1979년 (62세) 차남 홍순 사망.
<화집발간 기념전시회>(현대화랑, 10월11일-17일)에 유화25점, 판화 13점, 먹그림 18점 출품.
1980년 (63세) 봄, 수안보의 농가를 고쳐 화실로 사용,
"수안보시절" (1980-1985)시작.
1981년 (64세) 개인전 직전에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백내장 수술.
<장욱진 개인전>(공간화랑, 10월 11일-17일)에 유화 20여점,
에칭판화 5점 출품. <앙가주망 20년>1,2부에 출품.
1982년 (65세) 7월 중순, 부인과 함께 여류화가들의 미국여행에 동행.
이때 가지고 간 유화, 실크스크린, 에칭판화, 먹그림으로
재미화가 김봉태의 갤러리스코프(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장욱진전>개최.
1983년 (66세) 3-4월, 부인과 함께 처음으로 유럽여행(스페인,영국,이태리,프랑스).
근작 석판화 4점과 함께 판화집 출간기념<장욱진 판화전>(연화랑, 10월 22일-29일)개최.
1985년 (68세) 엔티크 컬러 사용을 중지하다.
수안보 화실 정리하고 서울로 이주.
<한국 양화70년전>(호암갤러리)에 출품. 기관지염으로 술과 담배를 끊다.
1986년 (69세) 겨울동안(1월 중순-2월 말)부산 해운대에서 제작한 유화 8점과 먹그림,
소묘 등으로 개인전<장욱진 작품전>(국제화랑, 6월 12일-19일)개최.
1987년 (70세) 2월, 대만과 태국을 여행.
화집발간 기념 개인전<장욱진전>(두손갤러리, 5월 28일-6월 6일)개최하다.
유화 80여점 출품.
1988년 (71세) 1월에 딸, 며느리와 인도로 여행, 뉴델리 박물관에서 깊은 감명.
12월, 발리섬으로 여행.
1989년 (72세) 7월, 경기도 신갈의 한옥 옆에 양옥을 짓고 입주.
가을, <한국현대화전>(미국 뉴저지주 버겐 예술·과학박물관)에 유화8점 출품.
<1900년대 한국미술대표작가전>(국립현대미술관)에 출품.
1990년 (73세) 가을, 고향의 생가 방문.
미국 "한정판 출판사"The Limited Editions Club)선정 수제작(水制作)
한국관련 도서의 그림을 맡기로 위촉.
12월 27일 점심식사 후 갑자기 발병, 오후 4시 한국병원에서 타계.
12월 29일 영결식(오후 1시 수원 시립장제장).
1991년 3월, 후학들이 유골을 모신 기념비 건립(충남 연기군 동면 응암리 선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