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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함께 롱런의 기술 by 폴인
돈·학벌·집안 다 딸린 계약직, 구글 보내준 ‘점쟁이 마법’
카드 발행 일시2024.06.19
에디터
최정은
김다희
롱런의 기술 by 폴인
관심
회사 명함은 내가 아니다. 제가 구글 아시아 본사로 이직해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에요. 해외에서 일할 땐 나이도 회사 이름도, 학벌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실력만 있으면 100세 시대, 나만의 커리어 로드맵을 그릴 수 있죠.
타라윤 구글 아시아본사(APAC) Frontier Market 팀 리드. 방글라데시, 스리랑카, 캄보디아 등 6개국에 신시장을 개발해 구글 마켓 셰어를 늘리는 일을 맡고 있다. 사진 타라윤
구글 아시아 본사(APAC)의 마케팅 리드 타라윤. 17년 전 야간 대학을 졸업하고 계약직으로 일하다 싱가포르 해외 이직에 성공했습니다. 아버지가 건네준 단돈 200만원을 들고 낯선 땅에서 첫 커리어를 시작했죠. 지금은 구글 아시아 본사의 마켓 리드로 6개국의 신시장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영어를 잘하는 것도, 학벌이 좋지도 않았다는 그는 어떻게 해외 이직에 성공해 ‘우상향하는’ 커리어를 만들었을까요? “무조건 야심 차게,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세우라”는 타라윤 구글 마케터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차
🔹“잃을 것 없다, 일단 해보자”
🔹실무 15년이면 그 분야의 점쟁이 돼야
🔹계획은 무조건 야심차게, 말도 안 되게 세워라
“잃을 것 없다, 일단 해보자”
해외 이직, 고민하는 분들이 많아요.
일단 해보세요. 왜 안 하죠? (웃음)
고민한다는 건 원하는 마음이 있다는 거잖아요. ‘영어 점수 조금만 더 올려서, 타이밍 좀 더 기다려보고’. 그런 식이면 1, 2년 지나도 여전히 한국에 있을 거예요.
제가 구글에서 일하며 가장 많이 배운 게 그거예요. 회사 명함은 내가 아니다. 그걸 떼고 남는 게 내 실력이다.
실제로 채용 과정에서 스펙이 중요하지 않아요. 나이, 대학, 성별 다 상관없어요. 단순히 연차가 높다고 대우해주는 것도 없어요. 무조건 실무 경험이 우선이에요. 연관 경력이 있는지, 바로 투입될 수 있는지, 얼마나 빠르게 상황을 이해하고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보니까요.
저도 처음 싱가포르 마케팅 에이전시로 이직할 당시 아무것도 없었어요. 학벌, 집안, 돈 모두요. 삼수 끝에 야간대학에 들어갔고, 유학은 꿈만 꿔봤어요. 통장에 80만원 남짓 찍히는 계약직이었고요. 밑바닥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해외 이직도 시도할 수 있었어요. 잃을 거 없는데, 일단 해보자.
구체적인 이직 과정이 궁금해요.
대학 졸업 전 HP코리아에서 계약직으로 일했어요. 싱가포르 지사, 에이전시와 일할 기회가 많았죠. 점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나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영문학을 전공했는데, 돈이 없어서 유학은 꿈도 꾸지 못했거든요. 일도 하고 영어도 배우면 일석이조일 것 같고요.
그러다 싱가포르 마케팅 에이전시에 면접 기회가 생겼어요. 팀장님 한 분이 귀띔해주셨죠. 싱가포르 이직에 관심이 생기면서, 지사 미팅이 생기면 별것 아니어도 꼭 들어가고, 1:1 커피챗도 자주 요청했거든요.
엉망인 영어로 면접을 어찌어찌 봤는데, 덜컥 붙어버렸어요. 지금도 생생해요. 2006년 11월. 아버지께서 친구에게 빌려오신 200만원 들고 싱가포르로 떠났어요. HP에서 일한 지 딱 8개월 만이었죠.
막상 가보니 어땠나요?
처음엔 매일이 전쟁이었어요. 마케팅 경력이라곤 한국에서 계약직 신입으로 몇 개월 일한 게 전부였거든요. 동료들 말도 못 알아듣겠고,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요. 그래도 밥그릇 챙겨야 하니까 악착같이 해서 업무에 필요한 스킬은 빠르게 배울 수 있었어요.
문제는 영어였죠. 비즈니스 현장에 바로 투입되려면, 생존 영어 이상이 필요하니까요. 시간 나는 대로 따로 영어 공부를 했는데요. 3가지 정도 방법을 썼어요.
첫째, 용어 마스터하기. 마케팅 용어들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고 정의하는지 샅샅이 정의했어요. 아주 미묘한 차이까지 파악하려고 했고요. 확실하게 이해해야, 질문 의도에 맞게 설명할 수 있으니까요.
둘째, 요약하기. 일할 때는 단어, 문장보다도 전체의 흐름과 요지를 보는 머리가 필요해요. 꾸준히 글을 읽고 요약했어요. 긴 회의의 핵심을 몇 줄로 표현할 수 있도록요.
셋째, 말하기. 발음보다 억양에 방점을 찍었어요. 억양만 좋아도 상대방이 제 말을 훨씬 잘 이해해요. 톤을 올리거나, 세게 발음할 부분의 규칙을 파악하려 했어요. 매일 새로운 숙어와 표현을 만날 때마다 따로 정리해 두고, 퇴근 후에 쭉 읽으며 익혔죠. 그러다 실제로 한 번씩 쓰면 엄청 뿌듯했고요(웃음).
꼭 영어를 네이티브 수준으로 구사해야 하는 건 아니군요.
맞아요. 커뮤니케이션은 단순 영어의 문제만은 아니니까요. 3가지가 중요한데요.
첫째, 비즈니스 센스예요. 센스가 있으면 영어가 좀 안 돼도 더 빨리 알아들을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미팅에서 30% 정도 알아들었다고 해볼게요. 일단 눈치로 캐치해요. 그리고 매니저에게 묻죠. “내가 이런 역할을, 이렇게 하면 된다고 이해했는데 그게 맞을까?” 무턱대고 “내가 못 알아들어서 그런데, 나 뭐 해야 돼?” 하면 안 돼요. 물론 매니저는 알려줄 거예요. 내 실력이 안 늘 뿐이죠.
둘째, 평판(reputation) 관리예요. 미팅 중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끝나고 사전 찾아보고, 위키피디아까지 읽었어요. 다음 미팅에 그 단어가 또 나왔을 때 설명하거나, 관련 질문을 할 수 있게 되죠. 그런 것들이 쌓이면 상사와 동료들이 저를 보는 시야가 달라져요. 당장은 언어 역량이 좀 부족해도, 일을 해낼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죠. 그걸 심어주는 게 중요해요.
셋째, 종착지에 대한 이해예요. 이 회의가 결국 어디로 가는가 파악하는 거죠. 광고 성과를 내려는 건지, 크리에이티브한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건지, 문제와 해결책을 도출해야 하는지. 그 요점을 이해해야 맥락과 흐름을 탈 수 있어요.
실무 15년이면 그 분야의 점쟁이 돼야
동남 아시아 6개국 프리미어 파트너사에 구글의 광고 제품과 트렌드를 설명하고 있다. 사진 타라윤
뭔가를 선택할 때 기준이 뭔가요?
고인물 같은 느낌이 들면 변화를 줘요. 한 업무를 2년 정도 하면 소위 ‘폼’이 오르기 시작하고, 3년이 되면 비교적 편하게 할 수 있어요. 저는 4년이 되면 못 견디겠더라고요. 최선을 다할 수 없으면 불안했어요. 저를 속이는 것 같고요. 깊은 고민 없이도, 좋은 말 버무려 멋진 프레젠테이션 만들 수 있거든요. 그쯤 되면 새로운 걸 찾았어요. 조직을 바꾸든, 업무를 확장하든.
제가 구글에서 8년째잖아요. 가장 오래 일하고 있는 조직이에요. 직무와 팀을 바꿔주거든요. 나한테 맞는 일을 찾을 기회를 줘요. 일이 바뀐다는 건 회사가 바뀌는 정도의 변화예요. 업무 내용, 성과 평가 방식, 동료가 바뀌면 새로운 시각으로 일을 보게 되고, 다시 일이 재밌어져요.
무엇보다 내가 재밌어야 해요. ‘아, 이 이상 절대 못 해’까지 해야 직성이 풀려요. 그러려면 재미가 있어야 하더라고요. 못 즐긴다? 그러면 위기감이 들어요. 열심히 하기 어렵거든요. 얼마 안 가 슬럼프가 오고요. 내 관심사, 내 재미가 아닌 걸로 움직이면, 그게 내 인생일까요.
구글로도 그 이유로 옮긴 건가요?
당시 일하던 은행에서 3개월 만에 그만두고 백수로 지내고 있었어요. 동남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싱가포르 로컬 은행이었고, 디지털 마케팅 부장 자리에, 연봉 2배를 제안받았죠. 줄곧 에이전시에만 있었으니 클라이언트로서의 경험도 매력적이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한계가 있을 것 같았어요. 개인정보와 타기팅에 제한이 너무 많더라고요. 디지털 광고 시장에 다이내믹한 변화가 한창이었는데, 재밌는 부분은 다 빼고 일을 해야 한다니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그쯤 구글에서 이력서를 보고 연락이 왔어요. 면접 보자고요. 구글에 스펙 화려한 사람이 얼마나 많겠어요. 그걸론 승부 볼 수 없었죠. 일에 대한 열정을 자연스레 느끼게 하고 싶었어요. 사람들은 본인을 설득하려고 하는 것 같으면 본능적으로 방어적 자세를 취해요. 사라고 하지 말고, 사고 싶은 마음을 줘야 하죠. 일에 열정이 있다고 말하기보다, 그동안 무슨 일을, 어떻게, 왜 했는지 이야기했어요. 그게 어필이 된 것 같아요.
처음 구글 입사했을 땐 너무 신났지만, 얼마 못 갔어요. 살아남아야 했으니까요. 동료들을 따라잡으려고, 꼭 필요한 팀원이 되려고 하루하루 고군분투했어요. 결국 어디서 일하느냐는 중요하지 않더라고요. 내가 성장하느냐 문제죠.
회사에 목숨 걸면, 평가받기 급급해져요. 평가자는 오롯이 나 자신이어야 해요. 내가 생각하는 최선, 내가 원하는 결과, 그것의 의미를 묻고 답할 수 있어야 하죠. 그렇게 일하는 사람이 더 잘할 수 있고요. 구글엔 그런 동료들이 많아요. 저도 자연스레 배울 수 있었죠.
커리어에 다양하게 변화를 준 이유일까요.
마케팅 에이전시에서 일하다, 구글에 갈 땐 마케팅 솔루션 기획팀에 갔어요. 지금은 신시장을 발굴하고 파트너십을 론칭하는 팀을 리드하고 있죠. 언제까지 실무만 할 건 아니잖아요. 경력이 10년, 20년 되면 커리어도 진화해야 해요. 저변을 넓혀가든, 깊이를 더하든. 후배들한테 종종 그래요. 실무 15년이면, 그 분야 점쟁이가 돼야 한다. 다음을 내다보고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연차가 쌓이니까, 사람들이 자꾸 물어요. 몇 년 후 이 분야는 어떻게 될까요, 어디가 뜰까요, 어디에 투자하면 좋을까요. 이런 질문에 대답할 때 책임감을 느껴요. 경력이 길어진 만큼 제 말에 영향력이 있을 테니까요. 공부의 동력이 됐죠. 더 열심히 일하게 되고요.
계획은 무조건 야심차게, 말도 안 되게 세워라
라오스에서 열린 구글 신시장 파트너십 론칭 이벤트. 사진 타라윤
커리어 20년 차가 돼가요. 번아웃은 없었나요?
구글에 오고 첫 번아웃이 왔어요. 계약직으로 입사했었는데요. 오로지 정규직 전환이 목표였어요. 1년 남짓 미친 듯이 해서 이뤄냈어요. 잠 줄이고, 친구도 안 만나고.
문제는 그때부터였어요. 다음이 없는 거예요. 방향을 잃으니 바로 번아웃이 오더라고요. 장기 휴가도 쓰고 매니저와 상담도 자주 했는데, 별 소용이 없었어요. 멀리 보고, 방향을 갖고 가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체감했죠. 내 인생이 동으로 갈지 서로 갈지 정도의 방향은 있어야 하더라고요. 조금씩 수정하더라도요.
힘든 시간을 보내고 또다시 계획을 짜기 시작했어요. 사실 제가 ‘프로 계획러’거든요. 계획 없이는 하루도 못 살 정도죠. 다이어리, 일기장을 끼고 살아요. 주말이면 계획 짜러 카페 가는 게 루틴이고요. 그 시간이 제일 행복해요.
‘프로 계획러’의 계획 세우는 법이 궁금해요.
장기 계획과 단기 계획으로 나눠서 이야기해 볼게요. 장기 계획은 무조건 야심 차게 잡아요. 그래야 세부 내용이 달라져요. 현실적 계획이란 말이 제일 싫어요. 현실적인 일이라면 굳이 목표하지 않아도 일어날 거예요. 무조건 야심 차게, 말도 안 되게 쓰세요.
계획을 짤 땐 과거를 들여다봐요. 출생부터 초·중·고 입학, 취업, 이직까지 타임라인을 쭉 적어요. 지난 20년을 어떻게 살았는지 보면서 ‘내가 이런 식으로 움직였구나’ 보는 거예요. 그럼 그다음 10년은 이 정도 할 수 있겠다 보여요. 목표를 잡고, 그걸 이루려면 뭘 어떻게 다르게 해야겠다 감이 잡히죠. 그 계획을 보면서 연, 분기, 월, 주별로 해야 할 것들을 쪼개는 거예요.
단기 계획은요?
작은 성공을 성취할 수 있는 단위로 촘촘하게 짜요. 하루 일과도 세세하게 계획하는 편인데요.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면 화장실을 먼저 가고, 몸무게를 재고, 물을 마셔요. 내게 효율적인 순서를 찾고, 루틴화하는 거예요.
미라클 모닝 이전에 ‘미라클 드림’이 중요해요. 어디로 가고 싶은지, 무얼 하고 싶은지 정의하고, 그걸 위해 아침에 일어나 무얼 하겠다는 계획을 짜보세요. 아침에 일어나 바로 뭘 해야 할지 모른다? 그럼 일찍 일어나봤자 피곤하기만 할 거예요(웃음). 계획을 스스로에게 설득하는 것도 중요해요. 설득되지 않으면 아침 일찍 일어나기 힘들 테니까요.
매일 작성하는 하루 계획표. 사진 타라윤
업무에 있어선 다음 날 할 일을 밤에 미리 적어요. 그래야 객관적인 우선순위를 지킬 수 있어요. 아침에 출근해 상사와 대화하고, 밀린 메일 보다 보면 순식간에 우선순위가 뒤섞이거든요. 자기 전에 내일 뭐 할지 3개씩만 적어보세요. 훨씬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어요.
계획을 짜다 보면, 그대로 안 됐을 때 힘들지 않나요?
중요한 건 계획하는 과정 그 자체예요.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시간이 되거든요. 이거 진짜 할 거야? 좀 더 쉽게,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더 재미있게 하려면?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에서 나와의 약속들이 생겨요. 그게 다이어리가 되는 거죠.
계획을 짠다는 게 모든 걸 계획대로 통제한다는 의미도 아니에요. 어차피 인생엔 계획하지 않은 것들투성이잖아요. 싱가포르에 온 것도, 구글에 다니는 것도 제 계획엔 없었죠. 다만 그런 변수를 만났을 때 그것에 따라 인생이 좌지우지되는 게 싫었어요. 내가 어디로 가는지, 얼마만큼 왔는지 알기 위해서 짜는 거예요. 안 그러면 매일 열심히 사는 데 힘만 들어요. 보람은 없고요.
해외 이직을 고민하는 분들께 팁을 준다면요.
2가지예요. 첫째, CV(자기소개서)는 콤팩트해야 해요. CV가 길다는 건 직무를 명확히 이해 못 했단 거예요. 직무를 확실하게 파악하고, 거기에 필요한 스펙만 쓰면 돼요. 써야 할 내용과 그렇지 않은 내용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단 거죠.
둘째, 지원을 많이 하세요. 처음이라면 더더욱요. 경험해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엄청나요. 진짜 가고 싶은 회사가 있다고 바로 지원하지 말고요. 최소 3~5군데 정도 먼저 지원하고, 면접도 보세요. 실전 경험으로 감을 잡고, 실력을 쌓아가야 해요.
이쯤 되니,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해집니다.
100세 시대잖아요. 지금까지의 커리어가 저를 많이 키워줬어요. 내가 누구인지, 어떤 동력과 동기에 반응하는지 더 알게 됐죠. 이걸 바탕으로 다음 챕터를 준비하려고 해요. 5년짜리 계획인데, 올해부터 시작입니다(웃음).
일단 올해는 저만의 무언가를 세상에 내보내려고요. 책이든, 유튜브든, 블로그 글이든요. 한국 가면 종종 대학에서 강연 요청이 들어오는데요. 저에겐 그저 제 삶이고, 생각일 뿐인데 누군가에겐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되기도 하더라고요. 제 삶을 다양한 형태로 발신해 보고 싶어요.
에디터
최정은
관심
중앙일보 폴인 에디터 [출처:중앙일보]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57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