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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참고말씀: 창35:3; 출34:29,30; 신4:7; 왕상3:4,7-13; 대하1:3-6; 에5:1,2; 시65:2; 잠8:17; 단1:12-16; 마14:22,23; 16:21-24; 17:1~8; 막1:35; 9:2-8; 눅3:21,22; 6:12,13; 9:18-20; 11:1-4; 22:42-46; 빌2:6-8; 계1:13-16
읽을말씀: 눅9:28-36
주제말씀: 눅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 가사.”
첫째, 기도의 자리로 올라가야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 가사.”(눅9:28)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 세 사람을 데리시고 어디에 가셨습니까?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마17:1)
언제 그리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처음으로 죽음과 부활을 가르치신 지 엿새 또는 팔일 후입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마17:1) /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막9:2 상) /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눅9:28 상)
왜 따로 높은 산에 오르신 것입니까? 특별히 더욱 기도하시기 위함입니다.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 가사.”(28절 상) 평상시에도 항상 기도에 힘쓰셨거니와,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막1:35) / “예수는 물러 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5:16) 특별한 일을 앞두고 더욱 기도하시기 위해 높은 산에 따로 오르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예수님의 생애는 항상 무엇과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까? 기도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도 기도하셨고,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 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눅3:21,22)
열두 제자를 사도로 택하실 때도 밤이 새도록 산에서 기도하셨으며,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눅6:12,13)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실 때도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신 후에 그리 하셨으며,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눅11:1-4)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신 후에도 홀로 남아서 기도하셨으며,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마14:22,23)
제자들의 신앙고백을 점검하실 때도 따로 기도하실 때에 그리 하셨으며, “예수께서 따로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이 주와 함께 있더니 물어 이르시되 무리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아라, 더러는 옛 선지자 중의 한 사람이 살아났다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니.”(눅9:18-20)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도 겟세마네 동산에 나아가 힘써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더하더라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2-44)
혹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수님처럼, 날마다 기도의 자리로 올라가고 있습니까? 예배의 자리로 올라가고 있습니까?
여기 ‘올라간다’는 표현에 주목해주십시오. 기도의 자리든, 예배의 자리든 항상 이 ‘올라간다’는 표현이 함께 사용되고 있는데, 어째서입니까? 물론 산이나 동산 등에 자주 올라가서 기도했기 때문이요,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 가사.”(눅9:28) 기도하는 곳이 지리적으로 위쪽에 위치해있기 때문이요,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창35:3) 당시의 성전이나 성소가 지형적으로 높은 데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거니와,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시120~134편)
기도할 때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로 올라가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기도하러 내려간다’는 표현을 성경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둘째, 기도할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눅9:29)
예수님이 따로 산에 오르셨을 때 어떻게 되셨습니까?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에서 광채가 나셨습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마17:2) /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막9:3)
그런데 이 모습은 본래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이 성육신 이전에 가지셨던 본래의 영광된 모습입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빌2:6-8) /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곳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 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계1:13-16)
왜 이 날 이 같은 모습을 드러내셨습니까? 이는 예수님과 나아가 모든 성도의 최종적 승리를 위한 것으로써, 잠시 후에 예수님께서 가장 치욕스러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것이나, 제자들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는 확신과 용기와 희망을 갖도록 해주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잠깐! 예수님은 언제 그와 같이 변화되셨다고 했습니까? 기도하실 때입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29절) 즉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그 용모가 변화되었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를 내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사람은 기도할 때에 가장 아름답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하나님과 대화한 후에 그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났으며,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출34:29,30)
왕후 에스더는 3일 동안 금식기도 한 후에 왕에게 나아갔더니 그의 모습이 매우 사랑스러웠으며, “제 삼일에 에스더가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궁 안 뜰 곧 어전 맞은편에 서니 왕이 어전에서 전문을 대하여 왕좌에 앉았다가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매우 사랑스러우므로 손에 잡았던 금규를 그에게 내미니 에스더가 가까이 가서 금 규 끝을 만진지라.”(에5:1,2)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은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물리고 오직 기도함으로 채식만 하였더니 열흘 후에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욱 아름답고 좋아보였던 것입니다.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당신 앞에서 우리의 얼굴과 왕의 음식을 먹는 소년들의 얼굴을 비교하여 보아서 당신이 보는 대로 종들에게 행하소서 하매 그가 그들의 말을 따라 열흘 동안 시험하더니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이 더욱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더 좋아 보인지라.”(단1:12-16)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기도할 때’ 우리의 얼굴이 변화되고 ‘간구할 때’ 우리의 삶이 더욱 빛나게 된다는 점을 깨닫고, 더욱 기도생활에 매진하고 있습니까? 특별히 새벽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금요기도회에 나와서 간절히 부르짖고 있느냔 말입니다.
셋째, 사명 감당을 위해 특별히 더 기도해야 합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 새.”(눅9:30,31)
이날 예수님은 따로 산에 올라가셔서 무엇을 놓고 기도하신 것으로 보입니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더불어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했다는 점으로 보아,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 새.”(30,31절) 겟세마네에서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자신의 사명 감당을 위해 기도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 하필 이 두 사람이 나타난 것입니까? 모세는 구약 율법의 대표자요, 엘리야는 구약 예언의 대표로써, 모든 율법과 예언으로 말해지던 것이 이제 예수님의 생애, 그중에서 특히 십자가 대속을 통해 완성될 것을 나타내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보이거늘.”(마17:3) /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막9:4)
이를 통해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우리는 기도생활에 힘쓰되, 특별히 자신의 사명 감당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사명 감당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로써, 우리 모두는 크든지 작든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누구의 경우를 통해 여실히 드러납니까? 솔로몬입니다. 그는 즉위 초에 어디로 나아가 그 유명한 일천번제를 드렸습니까? 기브온에 있던 모세의 성막과 그 놋 제단 앞입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 번제를 드렸더니.”(왕상3:4) / “솔로몬이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 하나님의 회막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이 거기에 있음이라 다윗이 전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궤를 위하여 장막을 쳐 두었으므로 그 궤는 다윗이 이미 기럇 여아림에서부터 그것을 위하여 준비한 곳으로 메어 올렸고 옛적에 훌의 손자 우리의 아들 브살렐이 지은 놋 제단은 여호와의 장막 앞에 있더라 솔로몬이 회중과 더불어 나아가서 여호와 앞 곧 회막 앞에 있는 놋 제단에 솔로몬이 이르러 그 위에 천 마리의 희생으로 번제를 드렸더라.”(대하1:3-6)
그는 일천번제를 드린 후에 하나님 앞에 무엇을 구했습니까? 듣는 마음, 곧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네 앞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네 뒤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왕상3:11-12)
왜 그것을 구한 것입니까? 사명 감당을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나님의 많은 백성을 맡겨주셨으므로, 이들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이끌려면 무엇보다도 지혜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3:7-9)
그랬더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들었고,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왕상3:10) 그가 구하지도 않았던 것들까지 덤으로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왕상3:13)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명 감당을 위해 따로 더 기도하며, 또 솔로몬처럼 사명 감당을 위해 일천번제를 드리는 각오로 특별히 더 기도하고 있습니까?
넷째, 기도해야 할 때 하지 않으면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됩니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 온전히 깨어나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눅9:32,33)
예수님이 기도하시는 동안에 세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도 함께 기도하고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깊은 졸음에 빠져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32절 상) 어느 때와 판박이입니까? 겟세마네 동산 때입니다. “기도 후에 일어나 제자들에게 가서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 하시니라.”(눅22:45,46)
이와 같이 기도해야 할 때 그렇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본문 속 베드로의 모습처럼, 엉뚱한 말을 하게 됩니다. 그는 깊이 졸다가 깨어서 무슨 말을 했습니까? 자신도 알지 못하는 말들로 횡성수설 했습니다.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3절 하)
얼마나 엉뚱한 소리를 했습니까? 초막 셋을 짓고 예수님, 모세, 엘리야와 함께 여기서 눌러서 살자는 말입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33절 상)
왜 이 말이 엉뚱한 소리입니까?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도가 완성된다’는 예수님의 메시야적의 본질과 그 사명과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1-24)
그러니 우리는 어찌 해야 합니까?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으면 엉뚱한 소리를 내게 된다는 점을 깨닫고, 기도생활에 더욱 매진하되, 특별히 새벽에 나와서 간구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은 특별히 새벽에 나와서 부르짖는 자들을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히, 새벽에)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다섯째,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록 예수님만 보이게 됩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눅9:35,36)
세 제자들은 구름 속에서 무엇을 들었습니까? 성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무엇을 듣게 됩니까?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우리 하늘 아버지께서는 기도를 들으시는 주로써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가까이 해주시고 또한 응답해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65:2) /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7)
그러니 우리는 기도하러 나아올 때마다 ‘부르짖는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하거니와, 무슨 기도도 열심히 해야 합니까? ‘듣는 기도’입니다. 즉 하나님께 부르짖어 우리의 기도와 간구도 아뢰어야겠지만,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하시는지를 부지런히 듣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들을수록 누구만 따르게 됩니까? 예수님입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35절 하)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 들을수록 누구만 보이게 됩니까? 예수님입니다.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36절 상) /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마17:8) /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막9:8)
혹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날마다 하나님의 음성에 집중함으로써,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예수만 보입니까? 한 찬송가의 가사처럼 말입니다. 아직 그러지 못하다면 이제부터라도 다시 기도에 집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안에 기쁨 누림으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 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 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 새찬송가 288장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3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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