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님이
이시영
용산 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까지를 털어 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 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어 주더니
왜 내가 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다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랑잘그랑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 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 나올 것만 같더니
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 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시집 『만월』, 1976)
[작품해설]
이시영은 한국적인 서정을 바탕으로 하여 사회 의식과 예술 의식을 탄력 있게 조화시킨 하나의 모범을 보여 주고 있는 시인이다. 그의 시 세계는 대체로 민중적 현실에 바탕을 둔 비판의 목소리가 주조를 이룬다. 그는 1970년대의 폭압적 정치 현실에 저항하던 민중들의 삶과 사상을 ‘이야기시’로 표현하는 독특한 리어리즘 시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이시영는 1980년애 둥반 이후에는 짧은 서정시를 통하여 민중들의 사랑과 희망을 노래하여 변화하는 시대 상황에 새롭게 대응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시는 그의 이야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과거와 현재를 교묘하게 교직(交織)하고 있다. 우연히 마주친 용산 역전 밤거리의 한 여인을 통해 화자는 추억 속의 ‘정님이’를 떠올리게 됨으로써 어린 시절의 행복했던 농촌 공동체의 달콤한 회상 곳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러나 무정한 현실로 보구기하는 이 시의 비극적 결말을 통해 결국은 그 달콤함도 잠시만의 행복으로 그치고 만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이 시의 사실적 묘사는 1970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었던 여러 문제점, 즉 근대화, 산업화, 도시화의 그늘 속에서 파생된 비참한 삶의 모습을 보여 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명랑하고 순박하기만 했던 ‘정님이’가 식모로, 방직 공장의 여공으로, 다시 영등포 색시집의 창녀로 전락해 가는 삶의 여정은 바로 1970년대 후반까지 커다란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소녀들의 무작정 상경’을 상기시켜 준다. 물론 이 시에서 그녀가 정말 ‘정님이’인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라며 단정하지 않는 데 이 시의 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이 여백을 통해서 농촌을 떠나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도시 빈민의 형상이 사회적 현실성을 획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님이’로 대유된 도시 빈민의 생활은 비참한 것이 틀림없지만, 그녀가 농촌을 떠나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한 삶을 살 것이라는 막연한 예측은, 이 시가 도시 지식인의 시각에 의해 농촌이 지나치게 이상화되었을 보여 준다. ‘머슴 마득이’와 진배없는 신분인데다, ‘학교도 못 다녔’던 그녀가 설령 농촌에 그대로 남았다 해도 결국은 주인을 위해 평생토록 힘겨운 노동을 바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가소개]
이시영(李時英)
1949년 전라남도 구례 출생
서러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196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시조 「수(繡)」가 당선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시 「채탄」 등이 당선되어 등단
1969년 문화공보부 예술상 수상
1987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집행위원
1987년 민족문화작가회의 창립에 참여
1996년 제8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시집 : 『만월(滿月)』(1976), 『바람 속으로』(1986), 『길은 멀다 친구여』(1988), 『피뢰침과 심장』(1989), 『이슬 맺힌 노래』(1991), 『무늬』(1994), 『사이』(1996), 『조용한 푸른 하늘』(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