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도요새
제주에서의 여름살이는 동경했던 것과는 달랐다.
햇빛이 강해도 너무 강했다. 투명한 빛 화살이 나를 과녁 삼아 내리꽂히는 것 같았다. 한번 섭씨 30도를 찍은 후론 상승만 할 뿐 도무지 하강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온도계. 이대로 여름인 채 계절이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한낮엔 나갈 엄두가 안 났다. 해가 수그러진 후 바닷가에 가보지만 더운 바람이 식지 않아 해안 길도 시원하지 않았다. 바다가 옆에 있으니 뛰어들면 그만인데, 그 쉬운 일도 무슨 용기가 필요한 건지 고작 모래사장이나 밟아볼 뿐 내가 자주 가는 곳은 소금막 해변이다. 모래사장 길이가 500여 미터나 될까 싶게 작은 백사장이지만, 아이를 데리고 놀러온 가족이나 서핑 하는 젊은이들로 여름내 북적인다.
맨발로 모래사장을 밟으려고 해 질 녁 찾아간다. 그때쯤이면 동네 사람 몇만 보일 뿐 한산하다. 매일 가도 물때가 다르고 바람이 달라 백사장 풍경도 변한다. 파도가 센 날은 뿌리째 뽑힌 해초가 모래 위에 널려 있기도 하고, 강풍이 바다를 뒤집은 날은 바닷속 돌멩이가 밀려와 모래에 박혀 있을 때도 있다.그럴 땐 모래사장에 띠를 두른 현무암 자갈을 피해 걷기가 쉽지 않다.
며칠 동안 그악스럽게 굴던 파도와 바람이 잔잔해진 날,
하늘이 보상이라도 하듯 노을을 펼쳐 보였다. 하늘만 분홍빛으로 법한 게 아니라 모래사장도 온통 분홍빛이었다. 모래사장 끄트머리쯤 갔을 때 하얀 새 몇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몸집이 참새보다 조금 더 크고 부리가 길고 배가 유선형이다. 파도와 장난이라도 치듯 쫓아가다가 물살에 놀라 종종걸음 쳐 돌아오는 모습이 여간 귀엽지 않았다. 새도 분홍빛 모래가 신기한지 부리로 연신 모래를 쪼아댓다.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고 가까이 갔더니 어찌나 빠르게 도망치는지 새의 다리가 바람개비로 보였다. 도요새다. 작지만 가장 빨리 나는 새.
여름이 권세를 부리며 폭정을 멈추지 않을 것 같더니, 어느 날 온도가 2도 떨어졌다. 28도만 돼도 공기가 달랐다. 비를 머금은 먹구름 때문일까. 바람도 어깨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그런 날은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풍경이 그만일 터. 해비치 언덕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그새 더 무거워진 구름이 축 처져 수평선까지 엉덩이가 닿았고 바람도 드디어 몸을 풀있다는 듯 거세지기 시작했다
언덕 아래 펼쳐진 검은여(현무암 암석) 위로 파도가 달려와선 하얗게 부서지는 그때. 들판 쪽에서 날아온 무언가가 그대로 포말 속에 휩싸였다. 하도 빨라서 새인 줄도 몰랐다. 높은 파도가 삼켜버렸다고 생각한 순간. 물에서 솟구치듯 날아오르는 새. 그러곤 눈 깜짝할 새 들로 날아갔다. 도요새다. 작지만 가장 높이 나는 새, 그리고 가장 멀리 나는 새. 한 마리 새가 바다로 향했다가 몸을 돌려 들로 날아간 그 짧은 순간. 눈이 그 비행을 따라갔을 뿐인데 내가 바다로 떨어졌다가 다시 솟아오른 기분이었다. 흠뻑 파도를 뒤집어쓴 것처럼, 물기를 털어내듯 부르르 어깨를 흔들었다. 도요새는 수평으로 수직으로 종잡을 수 없이 빠른 몸짓으로 날아 다녔다. 다른 새들에게선 불 수 없는 속도와 민첩한, 그 몸짓이 먹이보다 더 큰 이상항을 향하는 것으로 보였다. 달보다 먼 거리를 오간다 해서 문버드라고 불린다는 새.
월동을 위해 북반구에서 남반구까지 만 킬로 이상 이동한다니 "굳이 왜?"하는 의문부터 든다. 그러니까 내가 보고 있는 저 도요새는
러시아에서 날아와 제주도에서 잠깐 몸을 추스르는 중인 것이다. 다시 호주나 뉴질랜드로 날아가기 전 이곳은 도요새의 휴게소쯤이라고 할까. 도요새에게 묻고 싶다. 좀 쉽게 살 생각은 없느냐고. 먹이가 그곳에만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몸무게가 반이나 줄어들 정도로 먼 거리를 꼭 가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도요새에 관해 알게 된 후엔 바랍개비 다리가 귀엽게만 보이지 않는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부러질 것 같은 다리조차 내려앉을 자리가 없는 공중의 삶이라니 그러나 도요새는 내 시선 따위는 아랑곳 않고 모래를 뒤적이고 있었다. 오늘의 먹이에만 집중하면서. 먼 여정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한가롭고 태평한 몸짓이었다. 한참을 보니 새가 부리로 올려낸 것은 자연의 대답이었다. 도요새의 비행은 이제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는..
만일 저 새가 더 멀리 날기를 포기하고 이만큼이면 됐다고 제주 바다에 머물게 된다면 지구이는 엄청난 변수가 생기고 말 거라는 .. 그 변수를 상상이나 해보았느냐고.. 그러니 고작 며칠 도요새를 관찰한 내가 연민할 일인가. 저 작은 새도 자연에서 엄연히 제 몫을 하고 있는 건데. 내가 할 일은 어쫍잖은 염려가 아니라 도요새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었다. "도요새, 도요새 그 몸은 비록 작지만~.'' 뒤돌아서며 나직이 . 노래를 부르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몸도 작지만 높은 데는 올려보지도 않고 느리기만 하며 멀리 가는 것을 싫어하는구나. 닮은 거라곤 작은 것 하나뿐이면서 감히 누구더러ᆢ.
이혜숙
2001년 (현대수필> 등단. (나는 팝콘이|다). (아직도 들고 계세요?), (꽃을 솎는 저녁) (1990 독산동 세 여자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옷). 구름카페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