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우(梨花雨) 흩뿌릴 때 매창 공원을 돌아보며
아담한 규모다. 매창 공원을 알리는 커다란 기념 석을 뒤로 한 채 한 바퀴 둘러보면 매창의 주옥같은 시와 매창을 기리는 시가 적힌 돌들이 여기저기 나붓이 앉았다. 매창 공원은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서외리에 있으며 매창을 추모하여 조성한 공원이다. 현재 지방 기념물 6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중기 황해도 개성에 황진이가 있었다면, 전북 부안에는 이매창이 있었다. 가사, 한시, 시조, 가무, 현금, 등에 능해 조선 명기(名妓)의 쌍벽을 이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 대표적인 여류시인은 규수로는 허난설헌이고 기녀로서는 매창이었다. 본명은 향금(香今), 자는 천향(天香), 호는 매창(梅窓), 계생(癸生), 계랑(桂娘)으로 여럿을 썼다.
황진이는 스스로 자신과 박연폭포와 서경덕을 일컬어 송도삼절이라 했는데, 시인 신석정은 매창과 촌은(村蘟) 유희경(劉希慶)과 직소폭포를 부안 삼절이라고 불렀다.
촌은 유희경은 일찍이 기생을 가까이하지 않았으나, 매창을 보고 파계하였으며 매창과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유명한 이화우란 시는 매창이 촌은을 생각하며 지은 시조이다. 멀리 떠난 사랑을 기다리며 그리워하는 애절한 마음이 담겨있다.
이화우(梨花雨) 흣뿌릴제
울며 잡고 이별(離別)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千里)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떠난 임을 그리워하는 정서도 세월 따라 차츰 변하고 마는가.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라는 아리랑만 해도 그리움이 지나쳐서 저주한다. 지금의 남녀관계에서 끝이 나면 ‘얼마나 잘 사나 두고 보자’ ‘바로 옆집에 가서 보란 듯이 더 잘 살겠다’는 복수형이 더 많으니 미움도 사랑이런가. 갈수록 자기 주도적 사랑으로 변해가는 씁쓸함이 있다.
그녀가 죽은 지 45년 만에 무덤 앞에 비가 세워졌고, 1668년에는 아전들이 외워 전하던 각 체 58수를 얻어 개암사에서 목판에 새긴 시집 「매창집」이 간행되었다. 당시 목판은 모두 불에 타 버리고 겨우 두 권이 전해진다. 현재 간송 미술관과 하버드대 도서관에 보관돼 있다고 한다.
당시 여류 예인은 주로 기방에서 나왔으니 시대적으로 남녀 차별 문화에서 오는 폐단이었다. 반가의 여인네는 삼종지도를 지키느라 남자라고는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밖에 가까이할 수 없었으니 카테고리가 좁아서 더욱 예와는 거리가 멀었으리라.
그때는 기생이라고 해도 정신적으로 앞서간 여인이라 신체적인 어떤 남녀 상렬 지사만 들먹이는 것이 아니고, 한 번 준 마음 멀리 떨어져 있어도 기다리고 그리워하며 안타까움을 나누는 아가페적인 순정이 있었다.
이황 이퇴계 선생과 단양 기생 두향의 슬픈 로맨스도 시인 묵객들 사이에선 부러움의 대상이다. 당시에는 관직을 받아서 멀리 객지로 떠나면 대가족제도에서 식솔이 따라가기 어려우니, 그 지방의 관기가 수발을 들 수밖에 없었다. 시대적 배경이 그러하니 한량이 아니더라도 애첩을 거느렸으며, 그것이 가문의 수치는 아니었다.
매창도 대학자들의 수발을 들며 공부를 했으므로 예인으로서 격조가 높아졌으리라. 사람은 누구와 상대하느냐에 따라 학식이나 인격이 달라질 수 있으니 조선 중기 학자들 옆에 있던 여류시인이 기생 출신이 많았음은 당연한 결과다.
한 바퀴 돌며 곳곳에 새겨진 고운 시를 음미하며 그녀의 시심에 취한 향기로운 하루였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배꽃에 흩날리는 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