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제가 8년 전에 펴낸 《나눔을 실천한 한국의 명문 종가》 책에는 명재 윤중 선생도 있습니다.
선생은 가을걷이한 뒤 집으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며칠 동안 나락을 쌓아 두었다고 합니다.
그리곤 밤에 마을 사람들이 가져가도 일부러 모른 체 했지요.
그것은 밤에 가져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인데
혹시 머슴들이 누가 가져갔는지 말하면 모른 체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선생은 부자가 양잠까지 손을 대면
가난한 사람이 먹고살 일이 막막해진다는 생각에서
자기 집안에서는 양잠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이웃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선생의 지론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 윤증고택 사랑채 전경, 편액에는 "무릉도원에 사는 사람의 집"이라 쓰여 있다.
그 윤증 선생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서 이름이 높았으며,
당시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대립해 소론의 영수로 추앙을 받았던 분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현종과 숙종으로부터 지평, 호조 참의, 대사헌, 이조 판서, 우참찬, 좌찬성, 우의정 등
20번이 넘게 관직을 제수받았지만, 그는 한 번도 벼슬길에 나가지 않아
‘백의정승(白衣政丞)’ 곧 관복을 입지 않은 정승이라고 불렸을 정도입니다.
그런 선생은 책력 앞머리에 《주자대전(朱子大全)》의 목차 편명을 나열해 써놓고
매 편당 10번을 읽을 때마다 한 획씩 그었는데,
그 획수로 읽은 횟수를 계산해보니 무려 3,400번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공부는 60살이 될 때까지 계속하여 여전히 횟수를 세어가면서 주자서를 읽었다고 하지요.
또 선생은 책을 읽을 때는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단정히 꿇어앉아서 나지막한 소리로 읊조렸는데
이러한 독서 태도는 80살 이후에도 여전히 그랬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