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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묵상글 ( 부활 제5주일. - 우리 안에 주님이, 주님 안에 우리가.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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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부활 제5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03 04:49
- 우리 안에 주님이, 주님 안에 우리가
오늘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가기에 앞서 믿으라는 말씀을 거듭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들을 보아서라도 믿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는 주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또 묵상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또’라고 제가 말씀드렸는데 그것은 제가 믿음에 대해
그리고 믿음의 중요성에 대해 이미 많이 나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오늘은 믿음의 일반적인 중요성이 아니라
어떤 믿음이 어떻게 제게 중요한지 보고 싶은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한 마디로 얘기하면
하느님의 존재를 믿는 것은 이제 별 의미도 없고 중요하지 않으며
하느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나도 하느님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객관적으로 계시는 것은 별 의미도 없고 중요치 않습니다.
쉽게 얘기해서 하느님이 계시긴 하지만 저기 시베리아에 계신다고,
거기서 벌벌 떨고 계시는 것이 제겐 별 의미 없으며 그렇게 믿는 것도 별 의미 없습니다.
시베리아에서 벌벌 떨고 계시는 주님은 제 안에서 죽어있는 하느님이나 마찬가지이고
제 안에 계실 때만 주님은 부활하신 하느님이요 살아계시는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 안에 있다고 믿는 것 또한 의미가 있고 중요합니다.
그래야 주님 안에 있는 내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믿게 되기 때문이고,
그래야 나는 외롭지 않고 든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 안에 있지 않고 또 주님 안에서 하느님 안에 있지 않지 않을 때
나는 시베리아에서 나 홀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시베리아가 아니라 저 우주 캄캄한 데서 나 홀로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한지 또 다른 이유를 이제 보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주님께 나아가라고 하고,
복음에서 주님은 당신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라고 하시는데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면 이미 주님께 나아간 것이 되고,
아버지께 가는 길이신 주님 안에서 이미 하느님께 간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태중의 아기는 엄마 안에서 그리고 엄마와 함께 엄마가 가는 곳 어디든지 갑니다.
마찬가지로 주님 안에 있는 우리도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주님 가시는 곳으로 덩달아 가겠지요.
그러니 주님 안에 아버지 계시고 아버지 안에 주님 계심을 주님께서 확고하게 믿고 계시듯
우리도 우리 안에 주님 계시고 주님 안에 우리가 있음을 확고하게 믿음으로써
우리는 주님 안에서 든든하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안심하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외롭지 않게 살 것이고,
삼위일체 하느님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며 살아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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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부활 제5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성모님이 들고 오시는 빛에 인도되어…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물 위를 걸으시며, 세상의 빛을 들고 오시는 성모님.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성모님이 들고 오시는 빛에 인도되어…
2026년 5월 2일 토요일
불처럼 타오르는 하느님의 어머니 안에서, 윌리엄 맥니컬스 신부와 미라바이 스타는 세계와 시대를 넘어 다양한 성모님의 모습을 기리는 이콘 성화와 기도의 책을 함께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호수의 성모님" 상 앞에서 기도하도록 초대받습니다:
물 위를 걸으시며,
세상의 빛을 들고 오시는 복되신 어머니.
제 삶의 거센 파도를 가르시고,
제 마음의 어두운 구석마다 당신의 등불을 비추시어
그곳에 쌓인 그림자를 몰아내소서.
찬란하신 성모님,
저는 길을 잃었습니다.
세속의 헛된 빛에 이끌려 방황하였습니다.
이제 제 영혼의 동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당신은 새벽별, 달콤하신 어머니,
저는 당신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해 드립니다.
어둠에서 일어나 새날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과거의 짐을 벗어 던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믿음으로 굳세게 하고,
빛으로 깨끗하게 하소서.
References
Prayer by Mirabai Starr, Mother of God Similar to Fire (Orbis Books, 2022), 60–61.
Icon (c) William Hart McNichols. All rights reserved. Images by Fr. Bill McNichols can be found here.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ao Dayag, untitled (detail), 2021,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씨앗이 땅에서 돋아나 빛을 향해 펼쳐지듯, 우리도 날마다 주님의 빛 안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께서 보호와 생명의 근원이심을 알기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안심하며 자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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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동정심(同情心)이라는 우리 믿음의 삶의 프로그램!....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 14장의 첫 부분으로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남기는 당부요 유언과도 같은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한 복음만을 보아도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제자들에게 미리 넌지시 알려 주셨고, 또 유다인들의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들은 그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구세주(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이 죽은 라자로까지 살리시는 모습을 그들은 보았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자기들이 생각했던 대로 예수님께서 죽음을 피해 당당한 승리자로서의 모습을 보이실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그 현실 속으로 온전히 뛰어들어 그 죽음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대반전이 있습니다. 이 대반전이 바로 부활 시기인 지금 우리가 이 예수님의 유언 말씀을 들으며 그 의미를 되새기는 이유입니다.
그분은 무질서와 혼돈의 현실을 제거하시기보다는 그 안으로 들어가셔서 그 현실을 받아들이심으로써 그 현실을 극복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고통과 죽음의 현실은 이 고통에 함께하는 사랑과 동정심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분은 우리의 현실로 들어오셔서 우리와 더불어 우리의 죄로 인한 아픔과 고통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셨고, 급기야 이런 현실을 온전히 뒤집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라고요.
지난 금요일 CAC(활동과 관상을 위한 센터) 매일 묵상에서 리처드 로어 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된 믿음이란 하느님 섭리의 사랑이라는 큰 섭리에 자신을 맡길 수 있는 능력입니다."라고요. 그러고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 사랑의 눈에 보이는 현현이신 그리스도(성자), 그 흐름이신 성령, 그리고 그 근원이신 창조주(성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바꾸거나 강요하거나 개선할 필요가 없는 신적 과정입니다. 다만 받아들이고 누리면 됩니다. 이는 특히 우리가 상처받을 때 하느님께 대한 큰 신뢰를 요구합니다. 우리는 종종 불안에 휩싸여 서둘러 모든 것을 바로잡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보면 현재에 머무는 능력을 잃고 머릿속으로 올라가 집착하기 시작합니다. 그 순간 우리는 마음과 몸으로 진정으로 느끼거나 체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억지로 이루려 하거나, 심지어 우리만의 강을 만들려 합니다. 그러나 큰 강물은 이미 우리 안에서 흐르고 있으며, 우리 각자는 그 흐름의 작은 한 부분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이 거대한 강물의 흐름이 우리를 온전히 맡기고 하느님 사랑의 섭리에 따라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이 하나로 일치해 계신 하느님 나라의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어떤 장애에 부딪치더라도, 즉 우리 인간과 세상의 어둠에도 불구하고, 당신 섭리 안에서 반드시 우리와 더불어 우리를 당신 사랑과 자비의 나라로 이끄시는 창조주 하느님 아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그것을 물리적인 공간으로 상상하지만, 사실 그것은 단순한 장소가 아닙니다. 우리의 상상은 공간을 그리려 하지만, 성녀 아빌라의 데레사(†1582)가 "내면의 성(城)"으로 표현했듯, 그 이미지를 더 깊게 열어갈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딱딱한 보석 속에 갇힌 것처럼 굳어 있는 상태가 아니라, 살아 계신 하느님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마태 22,32).
이 말씀은 마태오 복음의 예수님 말씀, 즉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하신 말씀이 떠오르게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짐을 제거해 주시는 방식으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 그 짐을 지어 주시면서 그 짐을 가볍게 해 주시고 급기야는 그 모든 짐에서 해방되도록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방식이 또한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지극한 신뢰심으로 살아가신 방식이었습니다.
이 사랑과 자비의 동정심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내게 해 주는 원천입니다! 이 동정심에 의해 예수님께는 아버지와 일치하셨고, 그래서 그분은 이 사랑의 힘으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다."라고 말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지도를 보여주며 "이 길을 따라가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길이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우리가 인격적으로 만나는 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길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용서와 사랑, 희망과 정의의 길입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은 요령이나 지름길이 아니라, 바로 그 길이신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진리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내가 진리를 알려주겠다, 믿어라."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단순히 생각하거나 고민한다고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친구의 눈과 마음과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그분이십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생명이다."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단순히 영적 생활에 관한 강의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순한 생존이나 반쪽짜리 삶이 아니라, 충만한 생명입니다. 끝없이 미뤄지는 질문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손에 닿는 생명입니다.
"주님, 아버지를 보여주십시오." 필립보가 청했습니다. 그의 청원은 모세가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십시오."(탈출 33,18) 하며 청했던 것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모세나 이사야가 체험한 것과 같은 신비로운 체험을 마련해 주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원은 대담한 것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너는) 내 얼굴을 보지는 못한다.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살 수 없다."(탈출 33,20)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그분의 정체성에 대한 교회의 인식을 형성했습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요한 10,38 참조). 예수님은 단순히 아버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현존"하게 하십니다. 그분의 말씀과 행위는 아버지로부터 나오며, 아버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하신 주님의 말씀은 이 일이 우리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서 이루어 주시는 일임을 암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의 근원은 아버지의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례를 통해 예수님과 하나 된 우리 제자들의 일 또한 아버지께서 근원이십니다. 우리의 행위는 예수님처럼 "혈통이나 육정이나 욕망으로부터가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에게서 난 것"(요한 1,13 참조)이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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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부활 제5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인생은 나그네 길’(Homo viator)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길을 걷는 이에게 우선 중요한 것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가야 할 곳으로 가고 있는가?’ 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엉뚱한 곳에 가 닿는다면, 애초에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가야할 곳으로 간다할지라도 갈 수 있는 길을 모른다면, 가야할 곳에 도달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구와 함께 가느냐?’는 참으로 중요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에게 ‘올바른 길’을 보여주시고, 무엇이 ‘참된 삶’인지를 깨우쳐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에서 일곱 부제를 뽑는 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가는 ‘믿음의 길’을 제시해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믿고 주님께 나아가는 이들’, 곧 그분의 소유가 되는 백성에 대해 말해줍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지상을 떠나시기 전에 제자들에 하신 <고별사>중 일부입니다. 곧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유언 말씀’입니다. ‘유언’이란 남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가장 귀중한 가르침이라는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그러니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나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는가?’ ‘내가 믿고 있는 하느님과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겠다.”(요한 14,2-3)
이는 당신이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 ‘그곳이 어떠한 지’, 그리고 ‘그곳을 왜 가시는지’를 밝히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먼저 ‘아버지 집’ 가시어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시고, 그것은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비록 이 세상이 ‘나그네살이’이지만, 궁극에서 ‘이별이란 없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벅찬 ‘유언 말씀’입니다.
여기서, “거처”(μονη)는 ‘마련해(정해진) 둔’, ‘예비 된’이란 의미로, <요한묵시록>에서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21,2)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그분과 함께 거처할 자리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말씀하신 ‘시노달리따스의 실행의 해’를 보내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길 위에 있는 교회’(ecclesia viatrix)입니다. 그리고 ‘함께 걷는 길’의 ‘여정’을 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와 필립보에게 알려주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보았으면서도 보지 못함은 ‘믿지 않은’ 까닭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요한 14,1)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그렇습니다. 참으로 믿음이 ‘길’입니다. ‘길’은 진리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믿는 데’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 ‘믿음’이 ‘참된 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
사실, 당신께서 “길”이라는 이 말씀은 황당하고 당혹스런 발언이요, 혁명적인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길”의 표상은 본디 이집트 탈출의 상징이요, 해방의 길을 표상했고, 점차 주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영원한 보상을 위해 제시하는 삶의 방향을 가리켜주는 “율법”에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길”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길”의 의미가 ‘율법’에서 ‘예수님의 인격’으로 옮겨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신이 “진리”(áληθεια)라 함은 원어의 뜻이 ‘감추어진 보물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하듯이, 당신이 성부를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생명”이라 함은 당신께서는 단순히 구원에 인도하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체가 구원의 원천인 살아있는 ‘생명’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와 함께 살아있는 인격적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증언하십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진리를 알고자 하면서도, 막상 그 진리를 따르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그 진리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버리는 데는 ‘믿음’이 따릅니다. 그렇게 믿는 바를 따라 몸소 살 때라야 ‘자유’는 옵니다.
그렇습니다. ‘진리’는 알게 될 때가 아니라, 그 ‘진리를 믿음으로 따를 때’ 자유롭게 됩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하는 일 안에서,
당신의 진리가 이루어지도록 그 일을 믿음으로 실행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당신의 생명, 당신의 자유를 얻어 누리게 하소서.
저의 길이신 주님! 당신께서 길이 되어 제 발 아래에 밟혀가며 저를 이끄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 발아래 기꺼이 밟히는 길이 되게 하소서!
저의 생명이신 주님! 당신께서는 제 이빨에 씹혀 부서져 제 속에서 살이 되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에게 씹혀 부서지는 양식이 되게 하소서!
저의 진리이신 주님! 당신께서는 제 주장에 밀려 옳고도 져주셨듯이,
저 역시 형제들에게 밀려 저를 태워 진리의 빚을 밝히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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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부활 제5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요즘 뉴스를 통해 전쟁의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4년째 이어지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벌써 2달째 이어지는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있습니다. 미사일 한 발이 발사될 때마다 수백만 달러가 사라집니다. 하루 작전에 수천만 달러, 많게는 수억 달러가 사용됩니다. 항공모함 한 척을 움직이는 데에도 하루 수백만 달러가 들어갑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숫자이지만, 그것은 분명 사람들의 땀과 세금입니다.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미사일 한 발의 비용이면, 가난한 이들의 치료비를 얼마나 도울 수 있겠습니까? 하루 전쟁 비용이면, 얼마나 많은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줄 수 있겠습니까? 항공모함 하루 유지비면, 얼마나 많은 공동체를 살릴 수 있겠습니까? 전쟁은 막대한 돈을 태워 버립니다. 그러나 그 불꽃은 생명을 살리지 못합니다. 오히려 생명을 무너뜨립니다.
오늘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는 전혀 다른 길을 보여 줍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음식 나누는 일이 소홀해졌습니다. 그때 사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들을 세워 그 일을 맡깁니다. 자신들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고, 제자들의 수가 많이 늘어났다.” 초대교회는 ‘모든 일을 다 잘하는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분별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교회에도 조용히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어디에 힘을 쓰고 있습니까? 우리는 어디에 돈을 쓰고 있습니까? 물론 교회에 행사도 필요하고, 건물도 필요합니다. 공동체를 위해 꼭 필요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향한 나눔보다, 복음을 전하는 일보다, 눈에 보이는 것과 외적인 확장에 더 많은 마음과 재정을 쓰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초대교회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본질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교회의 중심은 구조가 아니라 생명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이 되어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십시오.” 살아 있는 돌은 벽을 높이는 돌이 아닙니다. 사람을 살리는 돌입니다. 서로를 지탱하고, 생명을 이어 주는 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맡기셨습니까? 미사일이 아닙니다. 권력이 아닙니다. 복음입니다. 사랑입니다.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다시 물어야 합니다. 나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우리 공동체는 어디에 마음을 두고 있는가? 우리의 마음이 머무는 곳에 우리의 삶이 따라갑니다. 우리의 재정이 흐르는 곳에 우리의 가치가 드러납니다. 전쟁은 돈을 태우지만, 사랑은 생명을 살립니다. 전쟁은 폐허를 남기지만, 복음은 공동체를 세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살아 있으려면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살리는 열매를 맺으려면,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명을 선택하게 됩니다. 나눔을 선택하게 됩니다. 사랑을 선택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선택의 자리 앞에 서 있습니다. 파괴인가, 생명인가. 소비인가, 나눔인가. 확장인가, 사랑인가. 마지막으로 마음에 새기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쓰는 돈이 우리의 믿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선택하는 길이 우리의 신앙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사랑할 때, 그곳에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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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부활 제5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얼굴을 통해 하느님을 뵙습니까? 신앙에 귀의한 사람들, 영적 삶에 들어선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갈망은? 아마도 ‘단 한 번만이라도 하느님을 얼굴을 한번 뵈었으면!’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게 너무 과도한 바람이라면 ‘적어도 하느님의 음성이라도 직접 내 귀로 들어봤으면!’ 하는 것일 것입니다. 필립보 사도는 이런 갈망을 아주 강하게 표출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요한 14,8) 아직도 갈 길이 멀었고, 아직도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은 그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나머지 예수님의 큰 탄식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합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요한 14,9-10) 신앙인으로서 우리가 ‘예수님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는가?’ 하는 문제는 신앙 여정 안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우리 머릿속에, 마음속에, 삶 속에 명료하게 자리 잡아야 하는 화두(話頭)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파악하고 있는 바처럼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곧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하느님은 일심동체입니다. 두 분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찰떡궁합, 불가분의 관계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아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은 따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을 뵙는다는 것은 곧 하느님을 뵙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100퍼센트 하느님의 의중을 반영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다시 말해서 복음서를 통해서, 하루에 몇 번이고 하느님을 만나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두 분은 언제나 상호 내재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계신다.’는 그 단순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진리를 겸손한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 오늘 우리 신앙생활 안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대 명제입니다. 돈보스코를 얼마나 사랑하고 존경했던지, 모든 측면에서 모방했던 후계자 필립보 리날디 신부에게 후배 살레시안들이 별명을 하나 붙여드렸는데, ‘제2의 돈보스코’, ‘목소리 빼고 돈보스코와 똑같았던 살레시안’이었습니다. 저희 후배 살레시안들은 필립보 리날디 신부를 통해 돈보스코를 봤습니다. 또한 필립보 리날디 신부님는 돈보스코를 통해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돈보스코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뵈었습니다. 한 무신론자가 택시를 타고 가다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단순하고 어눌했지만, 진심과 사랑으로 가득한 그녀의 목소리에 큰 감동과 매력을 느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듣는 동안 온몸은 전율이 가득했습니다. 그는 즉시 방송국으로 전화를 걸어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물었습니다. 그 여인은 콜코타의 성녀 마더 데레사였습니다. 곧바로 찾아갔고, 그녀의 소박하면서도 강렬한 영적 조언을 들은 그는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는 마더 데레사의 목소리를 통해 들려오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오늘 우리의 얼굴, 우리의 말투,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 뵙고 있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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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부활 제5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4,1–12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이 말씀은
두려움과 불안 속에 있는 이들을 향한
매우 따뜻한 돌봄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약함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
먼저 믿음 안으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보통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이 옳은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답만 주시는 분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바로 그 답이심을 드러내십니다.
주님은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길이십니다.
주님은 설명만 하는 진리가 아니라
우리 존재를 바로 세우는 진리이십니다.
주님은 멀리 있는 생명의 원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 생명을 다시 불어넣으시는 분이십니다.
성 예로니모는
말씀을 사랑한 교부답게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길과 뜻과 생명이 한 번에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성경의 문장을 아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 말씀의 중심이신 분을 만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는 선언은
신앙의 핵심 전체를 품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참된 길도,
참된 진리도,
참된 생명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은
회복의 출발점도 보여 줍니다.
회복은
마음이 하나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흔들리는 마음을 주님께 다시 맡기는 일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는 말씀은
걱정을 금지하는 명령이 아니라
걱정 속에서도 누구를 믿어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초대입니다.
주님은 불안 자체보다
불안 속에서 길을 잃는 것을 더 염려하십니다.
그래서 먼저
당신을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필립보가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는 매우 깊은 위로입니다.
우리는 자주
하느님이 너무 멀리 계시다고 느끼지만,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은 아주 가까이 오셨습니다.
주님의 얼굴을 보면
아버지의 자비를 보게 되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아버지의 마음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을 잃은 인간에게
하느님이 얼마나 가까이 계신지를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돌봄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돌봄의 본질을 가르쳐 줍니다.
돌봄은
상대를 대신 살아 주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다시 길을 찾도록
곁에서 빛이 되어 주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겠다고 하시지 않고
당신 자신을 길로 내어 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돌봄입니다.
그리고 회복은
그 길 위에서 조금씩 다시 일어나는 은총입니다.
오늘은 성체의 날입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멀리서 말씀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성체 안에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 주십니다.
성체는 우리에게
“너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네 안에 머물고,
너도 내 안에 머물러라” 하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가장 깊은 돌봄입니다.
흩어진 마음이 다시 하나 되고,
지친 영혼이 다시 힘을 얻으며,
길을 잃은 사람이 다시 중심을 찾는 은총이
바로 성체 안에서 자랍니다.
오늘 우리는 묻습니다.
내 마음은 지금 어디에서 산란해지고 있는가?
무엇이 나를 흩어지게 하고 있는가?
나는 길을 묻기만 하고 있는가,
아니면 길이신 주님과 함께 걷고 있는가?
나는 성체를 단지 익숙한 예식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나를 다시 살리시는 주님의 돌봄으로 모시고 있는가?
주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회복은
빠른 해결이 아니라
깊은 동행이며,
성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일치입니다.
주님,
산란한 제 마음을 당신 안에서 다시 모아 주소서.
당신이 길이시니 헤매지 않게 하시고,
당신이 진리이시니 속지 않게 하시며,
당신이 생명이시니
지친 제 영혼을 다시 살려 주소서.
성체 안에서 당신을 깊이 모시며
돌봄과 회복의 은총 안에 머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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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부활 제5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
| 참으로 아름다운 5월 성모성월이며, 아름다운 계절만큼 사랑할 기회가 주어지는 가정의 달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들과 함께 아름다운 추억을 나눌 기회가 주어진 5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그리고 스승이 날이 있는 사랑과 기쁨으로 넘치는 달입니다. 하지만 저는 마음이 산란합니다. 어버이날이 곧 다가오기에 이런 생각 저런 추억으로 인해 제 마음이 뒤숭숭하고 어수선합니다. 저의 산란한 마음이 지금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지 못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때’란 바로 예수님께서 이제 세상을 떠나실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때가 되었음을 아시고 예수님은 극진한 사랑으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지만, 유다의 배신과 베드로의 부인을 예고하시는 주님의 말씀(13장)을 들은 제자들은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4,1)라고 말씀하시면서 굳건한 믿음으로,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도록 당부하십니다. 사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남 체험은 어떤 경우에든 세상에서 겪는 시련과 어려움의 시간을 지난 다음 더욱 굳건해진 믿음을 기반으로 하고 참된 내적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16.33)라고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는 말씀은 마치 부모님이 먼 곳을 잠시 떠나시기 전에 혼란스러워하고 불안해하는 자녀들에게 걱정하지 마. 엄마 곧 갔다 올 테니까, 라는 표현처럼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십자가에 죽임을 당하더라도 당황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지 말라고, 미리 제자들의 산란한 마음을 달래주려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기에 이내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14, 2~3)하고 당신이 떠나야 하는 이유와 의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신께서 떠나야 하는 이유란 우리가 아버지 집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이고, 다시 오셔야 하는 까닭도 전부 우리를 그곳에 데려다가 당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란 것입니다. 이렇게 떠남과 다시 오심은 바로 우리를 영원히 아버지의 집에서 당신과 함께 머물고 살아갈 자리를 마련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헤어짐은 잠시이겠지만 만남은 영원할 것이고, 슬픔은 순간이겠지만 기쁨은 영원할 것이니 지금 주어진 모든 것을 하느님과 당신께 대한 믿음으로 꿋꿋이 살라는 당부이자 다짐입니다. 인생이란 회자정리 곧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이고, 그리고 다시 만날 걸 기대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재차 확인하는 뜻에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4)라고 말씀하시자 생뚱맞게 토마스가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5)라고 반문합니다. 이를 어찌할꼬!! 도대체 이런 토마스의 반문을 들으면서 예수님은 한 마디로 ‘멘붕’ 상태였음에도, 자기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토마스나 제자들을 야단치기보다 어쩌면 이런 터무니없는 질문을 들으시고 오히려 복음서에서 당신의 정체와 역할을 가장 분명하고 명쾌하게 드러내십니다. 사실 좋은 질문은 좋은 해답을 찾는 계기가 됨을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서 잘 드러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14,7) 그러니까 예수님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고, 아버지께 가는 길을 걸으면서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 진리를 살 때 참 생명을 깨닫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진리인 아버지의 말씀이 우리 발걸음의 등불이며 이 빛을 따라 걸어갈 때 자유를 누릴 것입니다. 자유를 누리면 누릴수록 아버지의 생명을 얻고 더 얻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께 나아가는 길이며 진리이고 생명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도달할 수 없다는, 믿음의 여정과 영성의 길이라고 하신 말씀은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유일무이한 길입니다. 부활하신 다음 마리아에게 “내가 아직 아버지께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마라. 내 형제들에게 가서,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이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20,17)라고 하신 말씀에도 드러나듯이 당신은 아버지께 이르는 유일무이한 길이며 통로입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은 바로 파스카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어리석음의 길, 좁은 길이며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길이지만 길 자체인 그분처럼 그 길을 지나가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이 길은 이사야 말한 것처럼 “너희 길은 내 길과 같지 않다. 내 길은 너희 길 위에 드높이 있다.”(55,8)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이고(요17,17), 예수님은 진리이신 아버지의 말씀이시며 우리 가운데 오시어 아버지를 대신해서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시기에 예수님은 진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이신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고 진리이신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시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우리 역시도 진리이신 아버지의 말씀을 삶으로 증거하며 살아가도록 초대하고 축복해 주십니다. 『 아버지 이 사람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라 진리를 위해 몸 바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모두 진리이며 생명의 말씀이옵니다. 』 (성가 39번 참조) 하지만 우리는 진리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막상 진리를 찾으면 꽁무니를 뺍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깨달으면 거짓되고 위선적이며 가식적인 자아가 죽어야 하기에 우리는 진리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 눈을 감거나 도망치기 바쁩니다. 이런 거짓과 위선이 죽을 때 그 진리가 바로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진리이신 아버지의 말씀을 위해 몸 바치는 거룩한 사람이 될수 있도록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진리를 산다는 것은 쉽지 않고 힘듭니다. 제1독서 사도행전에 의하면, 초대 교회는 믿는 이들의 수효가 점차 늘어나면서 본의 아니게 과부들의 식량 분배 문제로 불평과 갈등이 증폭되었습니다. 이때 사도들은 공동체의 문제 란, 곧 하느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6,2.4)라고 식별하고 해결 방안을 제안합니다. 구성원들 사이에 일어난 불평과 불만의 주된 요인이 진리의 말씀과 기도하는 일에 소홀히 한 탓이라 판단하고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사도들은 자신들의 파견과 소임에 충실하기 위해 부차적인 식탁 봉사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겠다는 결단을 내립니다. 진리이신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붙잡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6,7) 예수님은 생명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양 떼인 우리가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요10,10) 우리를 위해 사랑으로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10,15) 그리고 생명을 얻고 또 얻는 길은 바로 “참 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17,3) 그래서 오늘 2독서에서 베드로는 살아있는 ’생명의 돌‘인 예수님께 나아가라고 당부합니다. 예수님은 본디 사람들에게 쓸모없다고 “버림받은 돌이지만 하느님께는 영적 집을 짓는데 요긴하게 쓰이는 모퉁이의 머릿돌이”(2,2~5참조) 되신 분이십니다. 모퉁이의 머릿돌이신 그분께 나아가는 사람은 이 땅에서부터 생명이신 아버지의 집을 짓는 사람이지만, 아버지께 가는 길이요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은 “차여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며, 걸려 비틀거리게 하는 바위”가 될 것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대로,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 그 돌에 차여 넘어집니다.”(2,8) 결국 생명이신 그분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그들은 생명이 아닌 죽음에 이르는 길을 걷게 되고, 그 길을 걸으면서 진리가 아닌 거짓과 빛이 아닌 어둠의 자녀가 되어 억눌리고 묶이며 눈먼 상태로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나는 심판하지 않는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은 내가 한 바로 그 말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요12,47~48) 우리 모두 주님의 떠남이 마음을 산란하게 하겠지만, 예수님의 떠남이 영원히 떠남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가 영원한 사랑이며 생명이신 아버지 계신 곳에 우리도 당신과 함께하기 위해 떠남임을 굳건히 믿으면서 살아갑시다. 주님이신 예수님은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14,1)하고 당부하십니다. 마음이 산란할 때마다 우리 함께 성가 34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를 그리고 성가 44번 「평화를 주옵소서.」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노래하도록 합시다. 그러면 한결 마음이 편해질 것입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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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부활 제5주일. 키엣 대주교님.
살아 있는 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자상한 아버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자녀들을 위해 집을 준비하는 사랑 많은 아버지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위해 거처를 마련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보다 더 큰 사랑으로, 특별한 거처를 준비하십니다. 바로 하느님 아버지의 집 안에 머무는 자리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집은 어디에 있을까요? 제자들도 이 점을 궁금해했습니다. 복음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예수님께서 밝히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 (요한 복음 14,10)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시니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이 되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계시기에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집이 되십니다. 이는 물리적인 집이 아니라 사랑 안에 머무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누군가의 안에 산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사랑 안에 거하며, 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는 것이 곧 아버지를 보는 것이며,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아버지를 아는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께서는 예수님 안에 계시기에 예수님의 삶 전체는 곧 아버지의 삶입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의 온 존재 안에 계십니다. 생각과 감정, 이성과 의지, 생명 전체 안에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이 아닌 것은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으셨고, 아버지께 들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완전히 계시며 당신의 일을 이루신 모습입니다.
우리가 아버지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가는 ‘길’이십니다. 이 길은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영적인 길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요한 복음 14,6)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나 하느님께 선택되고 귀하게 여겨진 살아 있는 돌”이 되셔서 우리를 위한 집을 세우셨습니다.
하느님의 돌이 되기 위해 우리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고통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내려놓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며 아버지의 사랑 안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곧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으로 이끄신 분” 안에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집, 사랑과 행복의 집 안에 머무는 삶입니다.
말씀을 섬기는 선택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의 집을 세우는 삶입니다. 기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 머물며, 하느님의 집 안에서 살아갈 때 사랑과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끊임없이 풍요로워지는 행복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하느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때, 결코 마르지 않는 행복의 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랑의 집, 행복의 집. 이미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두신 집입니다.
이제 주님의 길을 따라 나아간다면, 우리는 그 사랑과 행복이 충만한 집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에 대해 깊이 묵상해 보십시오.
2. 내 삶에서 아직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은 무엇입니까?
3. 나 또한 ‘살아 있는 돌’로서 공동체를 세우는 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지 돌아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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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부활 제5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 17세기 영국에서 여왕이나 궁정 사람들은 차를 즐겨 마셨습니다. 차 마시는 것은 고상해 보였고, 품위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한 세기가 지난 18세기에는 어떤 사람이 차를 많이 마셨을까요? 여전히 여왕이나 궁정 사람들이 마셨을까요? 아니었습니다. 이 시기의 임금 노동자들의 양식이 ‘차’였다고 합니다. 노동자들은 잠을 깨우기 위해 차를 마셨고, 곧바로 일터로 가야만 했습니다. 즉, 밥을 챙겨 먹을 시간이 없어서 차를 마셨던 것입니다. 차를 끓여 마시는 것이 빵을 굽거나 수프 만드는 것보다 시간이 적게 들었고, 또 돈도 적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시대에 따라 다른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귀하다고 하는 것도 얼마 후에는 쓸모없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순간의 만족을 위한 삶을 지향하는 우리가 아니었을까요? 영원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중요했고,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실천하는 삶이 중요했습니다. 이런 삶이 앞으로 다가올 시간에도 귀하고 중요합니다. 특히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가 되기에 더 중요합니다. 제자들은 당신을 배신하는 제자가 있다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요한 13장 참조)을 듣고 마음이 산란해지지요. 그런데도 토마스는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라면서 세상의 방식으로 물어보고, 필립보는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요한 14,8)라면서 눈에 보이는 기적을 요구합니다. 3년 동안 함께 했는데도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함에 얼마나 답답하셨을까요? 그런데도 인내심 있게 가르치시면서 당신을 통해 하느님을 바라보도록 시선을 교정해 주십니다.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십니다. 요즘 사람들은 운전할 때 대부분 내비게이션을 이용합니다. 이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적으면, 다양한 경로가 나옵니다. 추천 길, 빠른 길, 짧은 길, 무료 길 등의 경로가 나와서 직접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진리요 생명으로 가는 길은 단 하나의 길, 유일한 길입니다. 이렇게도 갈 수 있고, 저렇게도 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만이 진리이며 생명인 하느님 나라에 제대로 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고 주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레스티나 지역에서만 활동하셨지만, 이제 아버지께로 돌아가셔서 성령을 보내주시면, 제자들은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해서 땅끝까지 주님의 구원이 이루어질 것을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삶을 지향해야 할까요? 순간의 만족만을 위한 세상의 삶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영원한 만족을 위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지혜로운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지금 세상은 공황 발작 중이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건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프랭클린 D.루스벨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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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부활 제5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부활한 주님 중심
“생명의 터전 교회 공동체”
“주님, 우리가 당신께 바랐던 그대로
어여삐 여기심을 우리 위에 내리소서.”(시편33,22)
오늘은 부활 제5주일이자 제16차 생명주일입니다. 신록의 5월 성모성월, 온 누리가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사랑의 생명, 성령의 생명입니다. 생명 충만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더불어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오래전 시 두 편의 시가 생각납니다. 하나는 자연을 통한 깨달음이고 하나는 사람들을 통한 깨달음입니다.
“저렇게 사는 거다
생명들이 함께 어울려!
인위와 무위, 자연과 문명의 조화는 어디쯤일까?
뽑고 뽑아도 줄기차게 솟아나는 잡초들
아예 더불어 살도록 내버려 두니
잔디밭이 잡초밭이 되었다
저렇게 사는 거다
자연이 좋다
제 각기 제 모습 제 색깔로 함께 어울려 사는 거다
잔디밭이 따로 있나?
잡초가 어디 있나?
다 고유의 이런저런 모습으로 폈다지는 풀꽃들이 아닌가?
좋고 새롭고 평화롭기가 무궁무진이다”<2007.5. >
함께 어울려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자연은 공동체 삶에 참 좋은 가르침과 깨우침을 줍니다. 예전에는 참 많은 팀들이 수도원을 찾았습니다.
“함께
먹는 기쁨,
사는 기쁨, 나누는 기쁨
배꽃들
아늑한 풀밭 어머니 같은 품안에서
소풍 나온 무려 일곱 여덟 명씩 여섯 팀 자매들
성경공부, 성무일도 끝낸 후
곳곳에 둥그렇게 앉아
싱그러운 풀냄새 꽃냄새 맡으며 점심식사를 하네”<2007.5. >
지금도 눈에 선한, 식사 때 자매들의 행복 해 하는 꽃같은 모습들입니다. 요즘은 이런 작은 모임 찾아보기 힘듭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아름다운 생명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 수 있을까요?
첫째, 믿음의 참된 진(眞)의 공동체입니다.
부활한 주님 중심의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믿음은 인간품위의 기초입니다. 믿음 없어 불안과 두려움입니다. 땅 깊이 뿌리내린 나무들이 늘 푸르른 생명이듯 하느님의 공동체 생명의 텃밭에 깊이 믿음의 뿌리 내릴 때 안정과 평화의 튼튼한 영혼들입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노년 품위의 우선적 순서도 “1.하느님 믿음, 2,건강, 3.돈”입니다. 주님 중심의 믿음에서 샘솟는 기쁨, 평화의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이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바 믿음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 믿음이 빈자리를 마련할 때 주님 친히 임하셔서 일하십니다. 믿음의 공동체는 영적 공동체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권고가 좋은 도움이 됩니다.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살아 있는 돌이십니다.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았지만 하느님께는 선택된 귀한 돌이십니다. 여러분도 살아 있는 돌로서 영적 집을 짓는 데에 쓰이도록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모퉁잇돌 주님을 중심으로 이뤄진 영적 집의 공동체를 이루는 살아 있는 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어둠에서 불러내어 당신의 놀라운 빛 속으로 이끌어 주신 분의 위업을 선포하는 공동체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희망의 선(善)한 공동체입니다.
부활한 주님은 우리 공동체의 중심이자 희망이요 기쁨입니다. 희망에서 샘솟는 기쁨입니다. 희망의 힘, 희망의 빛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희망과 꿈이 사라질 때 유혹과 타락이 죄와 병이 뒤따릅니다. 참으로 영적건강에 우선적 처방이 희망과 꿈입니다. 진짜 희망이자 꿈은 부활하신 주님뿐입니다. 갈 길을. 희망과 꿈을 잃어 방황이요 표류입니다. 삶은 속도가 아니라 제대로의 방향입니다. 바로 주님 친히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하늘 길>이심을 천명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길이라고 다 길이 아닙니다. 지옥으로 포장된 화려한 길도, 죽음과 파멸에 이르는 가짜 길도 참 많습니다. 진리와 생명의 아버지께 이르는 참길, 하늘 길은 예수님뿐입니다. 다시 나누는 수도원 하늘 길을 걸을 때 마다 되뇌는 고백입니다.
“하늘 님 그리울 때,
보고 싶을 때
하늘보고 하늘 기운 숨쉬며
하늘품위 되찾고 <하늘의 왕자>되어
하늘 님, 예수님 따라
가슴펴고 힘차게 나는 듯 걷는다
이 기쁨에 이 행복에 산다.”
진리와 생명이자 희망이신 아버지께 이르는 하늘 길이신 예수님께 희망을 둘 때, 비로소 늘 푸르른 생명의 순례 공동체로 살 수 있겠습니다.
셋째, 사랑의 아름다운 미(美)의 공동체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에 길이 없습니다. 무지와 허무, 무의미에 대한 궁극의 답도 사랑입니다. 사랑의 평화, 사랑의 일치, 사랑의 균형과 조화입니다. 사랑에서 지혜도 나옵니다. 공동체의 위기는 외부에서 보다는 내부의 분열에서 시작됩니다.
아무리 부유한 공동체도 내적으로 분열하여 무너지면 저절로 자멸입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공동체가 내적 분열을 슬기롭게 해결한 참 좋은 보보기 였습니다.
부활한 주님 중심의 사도들의 분별의 지혜가 위력을 발휘하여 공동체를 살렸습니다. 이런 분별력의 잣대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에서 나온 분별의 지혜였습니다. 식량 배급시 차별로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자 공동체 분열의 위기를 감지한 사도들의 기민한 조치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말씀을 제쳐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사도들의 지혜로운 결정이 가능할 수 있었음은 사랑의 성령 은총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고 공동체도 성장하니 분열의 위기에 처했던 공동체는 전화위복, 이제 생명 충만한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모든 공동체의 원형이자 모범인 생명 충만한 교회공동체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부활한 주님의 중심의 신망애信望愛의 공동체이자 진선미眞善美 공동체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런 공동체를 이루는데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생명주일에 적당하다 싶어 교황님의 5월 기도문중 한 대목을 나눕니다.
“주님, 모든 음식에 감사하고, 검소하게 먹고. 기쁨으로 나누며, 땅의 열매를 당신께서 모두를 위해 주신 선물로 여기고 소중히 여기도록 하소서.” 아멘.
*참고; 소개하고 싶은 내용입니다.
‘정조 임금은 할아버지 영조를 닮아 의식주 생활을 매우 검소하게 꾸려 음식은 하루에 두 끼 정도만 먹고, 반찬은 두서너 가지에 지나지 않았으며, 진귀한 음식의 진상을 중지시켰다. 평상시 옷은 무명옷을 입었으며, 한번 지은 옷을 여러번 빨아 입었다. 거처하는 집도 겨울 비를 가릴 정도로 검소하여 신하들이 보고 놀라움을 금치못하였다.’(성군의 길; 정조평전 상권 ‘한영우’ 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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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부활 제5주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서하
■ [성모성월, 생명을 묵상하다] 01. 있음 자체가 선물입니다
있음 자체가 선물입니다
부활 5주일 ㅣ 생명 주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성모성월을 시작하는 첫날,
엄마와 함께 남양성모성지를 순례했다.
공휴일이기 때문일까, 성모성월을 시작하는 첫날이기 때문일까 성지를 순례하는 신자들이 많이 있었다.
"있음"
그곳에 신자들이 있었다. 이 있음의 근거는 무엇일까. 무엇이 누가 우리를 이곳에 있게 했을까. 묵주알 하나하나를 짚으며 엄마와 함께 걷는 묵주기도길에서 나는 우리 존재의 "있음"에 머물렀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존재의 용기』에서 말한다. 하느님은 존재들 중 하나가 아니라 존재 자체(Being Itself)라고. 모든 있음의 근거이신 그분으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온다고. 그렇다면 살아있다는 것, 숨을 쉰다는 것, 지금 이 순간 여기 있다는 것은 단순한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주신 선물, 하느님 자신이 우리 안에 현존하시는 신비이다. 나는 성지에서 단순히 북적이는 사람들을 만난 게 아니라 하느님 자신이 현존하시는 "있음"들을 만난 것이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사랑만이 믿을 수 있다』에서 생명은 단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한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본래 사랑의 관계이시며, 그 사랑의 드라마 안에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태어났다고.
우리는 우연히 이 세상에 던져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의 의도 안에서 불러내어진 존재였다.
2천여 년 전, 한 젊은 여인이 있었다. 약혼한 몸으로 예상치 못한 잉태의 소식을 들었다. 당시 사회에서 그것은 수치였고, 위험이었고,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었다. 마리아는 두려웠을 것이다.
발타사르는 마리아를 교회의 원형으로 본다. 마리아적 교회란 하느님의 말씀을 논리로 따지기 전에 먼저 몸으로 받아들이는 교회이다. 그리고 마리아는 케노시스, 즉 자기 비움으로 응답했다. 자신의 계획, 자신의 두려움, 자신의 안전을 내려놓고 생명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소서." (루카 1,38)
이것이 생명을 향한 가장 깊은 응답이다. 설명할 수 없어도, 감당하기 어려워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것.
오늘 우리 사회에는 생명이 조건부로 평가받는 일들이 있다. 원하지 않는 임신,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두려움과 외로움 속에서 태어나지 못하는 생명들이 있다. 낙태는 단순한 의료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를 그 사랑 이전에 멈추는 것이다.
틸리히는 말했다. 존재의 용기란 불안 앞에서도 있음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발타사르는 덧붙인다. 그 용기의 근거는 우리가 먼저 사랑받았다는 사실이라고.
마리아가 보여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두려움 앞에서, 불확실함 앞에서, 그럼에도 사랑으로 생명을 품은 용기.
신앙이 있든 없든, 우리는 모두 묻는다. 이 생명은 어디서 왔는가. 누가 그 가치를 결정하는가.
가톨릭 교회는 오늘(부활 5주일) 생명주일을 지내며 답한다. 생명은 사랑으로부터 왔고, 그 가치는 어떤 조건으로도 줄어들지 않는다고. 태어나기 전도, 나약해도, 환영받지 못해도, 있음 자체가 이미 사랑받음이라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 생명이 오늘 우리 곁에 있습니다.
두려움 속에서도 생명을 품으셨던 어머니,
저희가 모든 생명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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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부활 제5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23:55 추가.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1-7)>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믿음으로 두려움을 극복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이 말씀의 바로 앞에는 유다의 배반을 예고하는 말씀이 있고(요한 13,21),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예고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13,38).
또 제자들은,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일과(요한 11,53) 예수님이 계신 곳을 알면 신고하라는 명령을(지명수배령을) 내린 것을(요한 11,57) 이미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제자들의 마음은 몹시 심란했을 것이고, 시시각각 다가오는 일을 두려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예수님도 피하고 싶어 하시는 일,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루카 22,41-44).
그러니 제자들이 심란해 하고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은, “너희가 두려워하는 그 일을 하느님과 내가 없애 주겠다.” 라는 뜻이 아니라, “그 일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다.
하느님과 내가 하는 일의 과정일 뿐이다.” 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실 때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고(마태 26,56; 마르 14,50),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지만(요한 18,15-18.25-27),
그래도 아주 흩어져 버리지는 않고 다시 돌아와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요한 20,19).
아마도 제자들은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라는 말씀과 다시 오겠다는 말씀을(3절)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부활 신앙은 없었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어떻게든 다시 오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고, 그래서 함께 모여서 기다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2) ‘무서운 일’을 만났을 때 무서워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본성입니다.
<믿음이 부족해서 그런다고 나무랄 일은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실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1코린 2,3-4).”
바오로 사도를 대단히 강하고 용기 있는 사도로,
또 두려움 같은 것은 하나도 없는 사도로 생각할 때가 많기 때문에,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렸다.” 라는 고백은 놀랍기도 하고, 우리에게 큰 위안을 주기도 합니다.
아마도 박해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컸겠지만,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 앞에 서는 것 자체도
두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두려움을 극복한 비결은, 복음 선포에 대한 ‘사명감’(1코린 9,16-17),
그리고 ‘성령의 인도와 보호’입니다(1코린 2,4).
<성령께서 언제 어떻게 인도해 주시고 보호해 주실지, 우리가 그것을 모를 때가 많지만(요한 3,8), 그래도 우리는 ‘성령의 인도와 보호’를 믿어야 합니다.>
3)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게 될 박해를 예고하실 때,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을 무서워하라는 뜻이 아니라,
‘영혼의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히브리서에 있는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그 광경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모세는 ‘나는 두렵다.’ 하며 몸을 떨었습니다(히브 12,21).”
모세도 인간을 심판하시고 멸망시키시는 하느님의 권능이 두려워서 떨었다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에 대해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8).”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사랑을 완성할 때까지는 두려움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뿐만 아니라 온갖 종류의 모든 두려움...
사랑이 완성되는 때는 언제일까?
살아 있는 동안 그 단계에 도달하는 사람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 사랑의 완성 단계에 도달합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두려움에 맞서 싸우는 일은,
평생 실행해야 할 숙제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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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03. 부활 제5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23:55 추가.
요한 14,1-1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해마다 많은 젊은이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습니다. 그런데 그 길은 사실 걸어보면 그리 대단한 길이 아닙니다. 유럽의 유명 관광지처럼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맛있는 음식이나 내세울만한 특산품 조차 없는 그냥 '시골길'일 뿐입니다. 그러나 매년 수 십 만명의 사람들이 그 길을 찾습니다. 그들은 왜 그 길을 걷는 것일까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뉩니다. 하나는 “산티아고 데콤포스텔라 대성당”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걷는 ‘관광객’들입니다. 이들의 관심은 오직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일 뿐, 그 과정은 어떻든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힘들면 차를 타고 이동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은 채 시끄럽게 떠들거나, 냄새 나는 음식을 해 먹으며 주변에 민폐를 끼치기도 합니다. 또한 본인이 그곳에 다녀갔음을 ‘흔적’으로 남기기 위해 낙서를 하는 등의 만행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행이 끝난 후 그들에게 남는 것은 목적지에 도착해서 찍은 ‘기념사진’ 한 장 뿐입니다.
다른 하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것 자체가 목적인 ‘순례객’들입니다. 이들은 800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여정을 걷는 동안 자신을 비우고 또 비웁니다. 무턱대고 부렸던 ‘욕심’을 비우고, 삶을 내 뜻대로 쥐고 흔들려고 했던 ‘계획’을 비우고, 육체의 즐거움만 쫓았던 ‘기호’를 비우고 그렇게 모든 것을 비워냅니다. 그러고나면 자기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진 후,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그렇게 순례길이 끝날 때 즈음엔 스스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찾습니다. 그들은 그 길 안에서 물리적 장소가 아닌 “자기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구원의 진리를 찾아가는 구도의 길을 걷는 ‘순례객’들입니다. 그 목적지는 물리적인 장소도, 세상 사람들이 꿈꾸는 세속적 성공도 아니지요.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뜻을 따름으로써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신앙생활의 궁극적 목표인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과정이 중요한데 제자들은 그 길을 생략한 채 ‘목적지’에만 관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길’을 먼저 알아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지, ‘목적지’만 생각한다고 ‘길’이 알아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지요.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구원으로 잘 나아가고 있는가 하는 ‘방향성’이지, 신앙생활의 결과로 무엇을 얻게 될 것인가 하는 ‘대가’가 아닙니다. 그런데 필립보의 요청을 보면 과정은 소홀히 여기며 대가만 바라는 제자들의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필립보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여 그분과 일치를 이루는 힘든 길을 가려고 하지 않고, 그냥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거룩하고 좋은 것들을 수동적으로 누리려고 했습니다. 또한 자신이 원하는 뜻이 하느님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지기만을 바랐습니다. 길은 걷지도 않고 목적지에 도달하겠다는 심보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지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자신이 원하는 결과만 얻겠다는 허황된 욕심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이십니다. ‘구원’은 우리가 가만 있으면 예수님이 알아서 갖다 주시는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뜻과 가르침을 열심히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는 ‘과정’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도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의 목적지인 ‘하느님 나라’를 눈으로 볼 수도, 그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제대로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목적을 이룰수 있다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세상의 관점에 물들어 있으면 악마의 유혹에 쉽게 걸려 넘어집니다. 최대한 쉽고 편한 길로 가보겠다는 얄팍한 심보를 갖고 있으면 길을 잃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게 됩니다. 구원에는 “왕도”가 없습니다. 그저 꾸준히 그리고 충실히 주님 뜻을 실천하며 그분 뒤를 따라가는 것만이 하느님 나라에 다다르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유혹에 휘둘려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않도록, 욕심에 눈이 멀어 벼랑인지도 모르고 가다 굴러떨어져 다치지 않도록, 당신 말씀과 가르침으로 우리 삶 곳곳에 사랑의 ‘이정표’를 남겨주셨습니다. 당신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우리를 위해 직접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되어 주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길만 충실히 따라가면 됩니다. 주님의 뜻과 가르침에 맞는 것이라면 ‘예’하고 따르고, 그분 말씀과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아니요’하고 단호하게 끊어내면 됩니다. 구원의 길은 어렵지만 복잡하지 않습니다. 힘들지만 단순한 길입니다. 거북이처럼 요령 피우지 않고 우직하게 ‘주님의 길’만 걷다보면 어느 새 하느님 나라에 다다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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