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다른날과 같은 날들을 보냈는데 운나쁘게도 말이지.
개미지옥에 빠진거야.
06
"어이- 일어나, 공주님."
오전시간을 정신없이 집안일에 허비하다보면 노곤해진 몸이 낮잠에 길들여져서 항상 잠이 드는
시간에 잠에 취해서 잘자고만 있었는데, 승민이 아닌 제 3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눈을 떳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아직 꿈? 꿈속의 왕자님?
공주라고 부르는것이 꿈속의 백마탄 왕자라고 추리할수도 있었는데 그것도
아닌것이 불량스럽게 으스대고 거들먹거리는건 언동은 누가봐도 왕자는 아니다. 다만 얼굴만은 왕자란 칭호가 적합하였다.
승민의 음색보다 높은 톤에 고운 미성의 목소리. 연갈색의 구불구불한 곱슬머리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남자. 동그랗게
장난스러운 눈이 데굴데굴 움직이며 그녀를 관찰하고 있었다. 승민에 버금가긴 했지만 미남보다는 미소년에 가까웠다.
승민이 그 나이에 맞지 않는 분위기로 연령이 높아보이는 반면 남자는 원래의 나이보다 어릴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나저나 꿈도 아니라면 이것은 대체…
"카일로가 꽁꽁 숨겨놓길래 난 또 엄청난 미인이라고 기대했더니… 평범하잖아."
"…"
"너무 긴장하진 마. 루스하게. 응? 아아- 아직 내 소개를 안했구나. 내 이름은 강준호. 너보단 나이 많고.
카일로가… 아니지, 승민이 보내서 왔어."
승민의 이름이 나오자 마법에서 풀린것처럼 뻣뻣하게 굳었던 근육들이 이완되었다. 아무리 승민의 부탁으로
왔다지만 곤히 자고 있는 방에 무작정 쳐들어와서 난데없이 깨운다거나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는듯 친근한
반말에 실없고 버릇없이 보이는것 모두 오랜시간부터 행해져온 익숙함이 베어 있었다. 오랜시간동안 그렇게
지내왔다는 뜻이었다. 구속받아온것없이 오로지 하고싶은것만 해온 자유분방한 사고방식의 소유자로 보였다.
쉴새없이 속사포처럼 쏟아 붓는데 카일로가, 그래서 카일로가. 하고 카일로란 이름을 들먹여졌다. 그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카일로라는 이름은 서구권 이름이다. 그는 '통화할 때 여러번 들었지만 생소한 이름이다. 6년전부터
'카일로'란 이름을 써왔으니 승민에겐 친숙한 이름이고 대부분의 사람도 그는 현재 카일로란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연에게는 처음만났던 12년전이나 지금이나 '서승민'이다.
분명 그의 측근중에서 승민이라 부르는 몇 안돼는 사람일것이다.
"지금쯤 카일로는 발을 동동 굴리겠지? 그렇게 꽁꽁 싸메놓은걸 어쩔수없이 공개했으니까.
카일로는 네 얘기만 나오면 잡아먹을듯 민감하게 구는걸. 우리사이에 너는 금기어라고. 모르고 있었지?"
두서없는 말을 뿌리는 그는 뭐가 그렇게 우스운지 낄낄대었다.
"확실히 귀엽긴 하네. 넋 잃고 있는게 콱 깨물어 주고 싶은데?"
모욕이 더 능숙한 상대에게 칭찬을 듣자 나연은 허를 찔린듯 귀까지 붉어졌다. 그 모습에 준호는 더욱 짖궂게 몰아쳤다.
나연이 하지마요- 으름장놓자 준호는 이번에는 뒹굴뒹굴 구르기까지하며 웃었다. 한참을 웃더니 준호는 자신을 추스르고는
아참! 하고서 모퉁이에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던 종이가방 세개를 꺼내들어 나연에게 내밀었다. 종이가방에 프린팅 된 로고는
사치부리기 좋아하던 회사동료가 좋아하는 브랜드였다. 상자도 그 이름을 치켜 세우듯 고급스러운 겉포장에 열기마저 조심스러웠다.
이게 뭐냐고 물어볼 틈도 없이 얼마나 열라 재촉하는지 나연은 한숨을 쉬고 상자를 열었다.
검은색 튜브 드레스, 백, 구두.
특별한 외출이란걸 광고라도 하는건지. 홈쇼핑 3종세트처럼 풀세트를 사온것이다.
제일 먼저 구두를 꺼내들자 아찔한 굽높이를 자랑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달콤하게 생긴 오픈토슈는 애교스럽게 얼른 신어주세요,
주인님.하고 속삭이는듯 했다. 커피 한잔도 아끼고 문화생활도 금하면서 3개월간 월급의 70%씩을 떼면서 모은 돈으로 마련한
명품 구두를 자랑스럽게 뽐내던 철없던 선배 한명이 떠올랐다.
또 하나는 백, 슈즈에 맞춘 색상으로 한손에 쥐는 클러치 백. 이런것 따위 관심없지만 준호는 어때 어때 어때 죽이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며 마지막 상자를 들이밀었다.
마지막 상자에서 꺼내든 드레스는 아수라백작처럼 두가지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드레스였다.
백합처럼 고고하면서 장미처럼 도도한, 또는 순결해보이면서 도발적으로 보이는. 어깨가 훤히 들어나는 슬림한 선에
스커트 라인이 물결처럼 흩날리는 드레스는 포인트로 허리에 빨간 리본이 들어갔다. 물론 예쁘긴 했지만 자기취향으로는
글쎄요올시다. 나연은 취향이라고 할것도 없는게 패션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현재 가지고 있는 옷가지들도 원래의 집에서
가져온게 아니라 승민이 사다 준 옷들이었다. 파자마부터 편안하고 무난한 일상생활용 옷가지부터
스웨터, 카디건, 팬츠, 스커트, 원피스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 잘 보일사람도 없는데 인형옷을 입히듯 두 세벌씩 사다놓으면
그저 손 가는데로 입었다. 그래서 선물이라며 사다 준 드레스도 예쁜지 안예쁜지 따지기 보다
의문을 띄는것이다.
"설마 마음에 안드는건 아니겠지? 다른건 사오긴 했지만 이건 내 작품이야. 내 컬렉션중에서 제일 잘 팔리는거다?"
"예쁘긴 한데, 왜 이걸 줄까 생각하는 중이었어요."
"승민이 오후미팅 때문에 바쁘다고 널 대신 데려오라고 부탁받았어. 저녁약속하기로 했다고.
그래서 내가 데려가는 김에 좀 꾸며서 보내줄까 하고 골라봤지."
"고맙다고 해야되는 건가요?"
"당연하지. 사이즈는 맞을것 같은데 가슴쪽이 작을지도 모르겠다. 피팅 잡아야 될수도 있으니까 얼른 입어봐."
이러니저러니 팝콘 튀기듯 말이 많은 사람. 한가지만 물어도 두 세마디 덧붙여 대답해주질 않나, 묻지도 않은말에는
네 다섯마디 덧붙여 말하질 않나. 불량스럽기 그지없는데다 헤퍼보이고 능글맞았다. 만난지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잔뜩 떠미는
선물들. 선물들을 받은데서 그치지 않고(원한게 아니라 찜찜했지만) 얼른 착용해보라 종용한다.
마지못해 드레스를 손에 꼭 쥐고 준호를 쳐다보자 준호는 멀뚱하게 왜? 하고 묻는다.
눈치가 없는건지 나연은 다시 얼굴을 붉으러뜨렸다.
"나가야 옷을 입죠."
"혼자 입기엔 힘든 옷인걸?"
"혼자 입을수 있어요…"
"내 직업은 의상 디자이너야. 여자 몸은 질릴정도로 봐왔다구. 꾸물럭댈 시간 없어. 사이즈 맞춰봐야 된다니까?"
"아니, 그러니까…"
의상디자이너건 여자몸을 질릴정도로 봐왔건 나연은 알바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남자는 남자.
더더군다나 나연은 모델도 아닌데 처음 보는 남자에게 대뜸 옷을 훌훌 벗고 몸을 보일수 있을 리가 없었다.
남자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하는 남자에게 훌러덩 옷을 벗는것, 가능은 하나 쑥쓰러운것이다.
준호가 한참을 망설이는 나연을 보다가 알았다는듯이 아- 하고 짧게 소리내었다.
"날 남자로 보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
"나는 너보단 남자가 더 좋아."
나연이 이해 안되는 그의 발언에 고개를 갸웃했다.
"너보다는 승민이 내 취향이야. 남자가 더 좋다구."
직격탄에 경악할 새도 없이, 옷을 벗겨버린다. 으악! 하고 반항할 틈도 주지 않는다.
우여곡절끝네 드레스는 입혀지고 등쪽에 지퍼까지 채우고는 준호는 나연의 차림을 확인했다.
음 대충 맞네- 피팅은 안해도 되겠어. 자! 이제 출발! 명랑하게 외치는 준호였다.
그렇게 충격에 휩싸인 나연은 자기의 의지와 상관없이 납치되듯 준호가 운전하는 차에 몸을 실어야 했다. 그것까지는 좋았다.
차안에서 맡아보는 바람의 냄새는 틀리다. 속도감이 느껴지는 바람은 얼굴을 때렸다. 귓뺨을 맞던 머리카락이 흩날려
머리채를 잡히는 느낌. 뭐가 되었든 어쨓든 좋았다. 정녕 자유의 냄새가 이런거라는거 잊고 있었다.
무엇이든지 잊어가고 있었다.
"이봐. 아무리 그래도 목은 집어넣지? 보는 사람 불안하다구."
잠시 혼자가 아녔다는걸 잊고 있었다. 나연은 민망한지 차창밖으로 내밀었던 머리를 원위치시켰다.
준호는 그걸 보고 쿡쿡 웃었다. 하라면 하라는데로 곧이곧데로 한다. 귀가 얇아서 줏대가 없는건지.
놀리는 보람도 있고 그녀가 화를 내면 어떨지 궁금한 준호였다. 정확히 어떻다라고 단정지을수 있는건 아니지만
어떤 돌발행동을 할것도 같다. 준호는 카일로와 친하긴하나 아직도 그 속내를 알수 없다. 영국에 있을적 사교계에서
만나 여러모로 비슷한 점이 많아서 친구란 명분하에 지내고 있는데 솔직히 그 명분은 가식이었다. 이익추구를 위해
만남을 유지하는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한쪽이 깨뜨린다면 쉽게 결렬된 명분. 한없이 쉬운 관계다.
이 여자에게 어떤식으로 대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보아 온 카일로는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누구에게나 선을
그어놓고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그런 그의 유일한 약점은 나연이었다.
그녀는 라푼젤이다.
성탑 꼭대기에 숨겨놓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라푼젤.
긴 머리칼로 마녀만을 탑에 들여보내던 라푼젤의 이야기. 그 동화의 끝이 어떻게 되더라…
준호는 갑자기 생각난 동화를 잠시 생각하다가 별생각을 다하게 되는 자신을 깨닫고 혼자 실없이 웃었다.
웃음소리에 나연이 뭔가하고 보다가 다시 시큰둥하게 창밖으로 손을 내밀었다. 목을 내밀지 말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손이다. 준호는 운전대를 잡은체로 슬며시 나연을 불렀다.
"공주님."
"징그러워요. 그렇게 부르지 마요. 내 이름은 나연이에요. 김나연."
"오케이. 공주님. 질문이 있으니까 대답해줘."
"뭔데요."
"카일로가… 그러니까 승민이 잘해줘? 비결이 뭔지 알수 없을까? 아무리 봐도 승민이 아깝거든. 섭섭해하진 마.
네가 못났단 소리가 아니라 승민이 여러모로 잘났다는 뜻이니까. 외모, 권력, 지위. 아버지 덕이지.
어쨓든간에 당신에게 집착하고 있거든."
"비결은 없어요. 제가 고마워해야되는게 맞는 말이죠. 승민이 잘해주는걸 묻는다면 잘 웃어주고, 다정하고. 그래요. "
"뭐? 타협도 모르는 그 얼음덩이가?"
"밖에선 잘 안웃나봐요?"
"그래. 그 놈 가면 쓴줄 알았다니까. 표정이 하나밖에 없어서."
나연의 표정은 전혀 의외라는 듯했다. 놀라워야 될껀 준호쪽.
기쁨을, 슬픔을, 절망을, 안타까움을, 행복을, 불행을 읽을수 없다. 한가지 표정뿐이다.
무표정. 세상에 관심없음을 나타내는,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 두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
승민의 얼굴은 그래서 '가면'과도 같았다.
"당신이 모르는게 또 하나 있어요."
"뭔데? 흥미진진한데! 잠깐 잠깐. 내가 맞춰볼게. 잠버릇? 그 얼굴에 잠버릇은 어떤건지 궁금하다. 코를 곤다는건
상상할수도 없어! 테크닉인가. 녀석, 화장실에서 봤을때 물건도 튼튼하던데. 하하핫-!"
"승민에 대한 얘기가 아니에요."
농도 짙은 농담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꾸했다.
"집착하고 있는건 나에요. 승민이 아니라, 나. 김나연이 서승민에게 집착하고 있는거라구요."
카페 게시글
로맨스 소설 1.
[ 중편 ]
개미지옥 06
브로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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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3,950
08.07.30 01:38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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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점점내용이 재밋어지는거같애요!!!!!! 요새폭염주의보라죠.. 폭.염!!! 조심하세요~ 더위라도걸리신다면 .. ㅠㅠ 흐흑ㅋㅋㅋㅋ
네 날씨 정말 더워요 에어컨 없으면 못살듯. 이번달 전기요금...제가 내는건 아니지만 감당이 불감당일듯 ㅜ
ㅋㅋㅋ 드디어 읽네요...인소닷에 얼마나 들어왔던지...ㅋㅋㅋ 아무튼 잼있어요... 새로운 등장인물...ㅋㅋㅋ 내용이 더 풍부해질듯...ㅋㅋㅋ
아 그리고 이거 6편인데....맨 위에는 5편이라고 적혀있네요....^-^
이런 센스쟁이, 사실 5편인줄 알고 제목도 5편으로 해놨다가 6이라고 바꿨는데 내용에선 깜빡하고 안바꿔놨네요; 지금 당장 바꿔야겠습니다. 린아님 쌩유! 히히
올라와서 기뻤어요^^ 재밌게 일구있으니 담편두 얼렁얼렁 써주세여~
감사합니다 ㅜ 자학중에 있습니다 머리가 안돌아가서 고작 몇편 썼다고 벌써 돌...조금 더 머리 박으면 마구마구 떠오르겠죠? ;
ㅠ.ㅠ...........재밋어요!!!!!!!!!!!!!!!!!!!!
느낌표에서 느껴지는 정열(퍽) 제가 더 감사합니다. 항상 댓글 달아주셔서 ㅜ
윽 날이덥죠 작가님수고하셔요^^!!
네네 ㅜ 딸기님도 몸조심하셔요. 더위먹기 딱 좋은 날입니다. 저도 힘내서 열심히 쓸께요/
와~재밌어요~..ㅋㅋ담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요..ㅠ
네, 쓰는 저도 어떻게 될지 궁금합니다. 스토리를 정하고 쓰는편이 아니라서 ㅜ
아진짜잼땅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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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옷, 나연이가 집착한다라, 작가님! 넘 잼있어용~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