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해글러vs오벨메히야스 1차전- 오벨메히야스도 해글러의 적수가 될 순 없었다 |
그 경기 당시만 해도 실력에 비해 인기와 평가가 낮았던 해글러는 이후 전세계에서 날아온 수많은 자객들을 하나하나 제거해가며 서서히 80년대를 대표하는 수퍼파이터로 거듭나게 된다. 해글러가 한창 세계 복싱계를 달구던 무렵 필자는 사춘기를 통과하고 있었고 이 지독하게 강한 대머리 복서는 필자에게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찬란한 기억들을 선사하며 청소년 시절 필자의 최고 영웅 중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패터슨을 동경했던 소년
두란과 마찬가지로 해글러 역시 불우한 환경을 딛고 수퍼스타로 도약한 전형적인 헝그리 복서다. 해글러는 54년 5월 23일(52년생이니 53년생이니 하는 말들이 많았는데 공식적으로는 54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뉴욕의 브라운스빌과 더불어 미국의 손꼽히는 슬럼가인 뉴저지주 뉴아크 흑인 빈민가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생아로 태어난 해글러는 어릴 때부터 혹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아버지가 없었으므로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1년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여야 했으며 가난은 해글러의 가족에겐 떼어낼 수 없는 꼬리표였다.
비록 가난했지만 해글러의 집안은 항상 따뜻한 온기가 흘렀다. 언제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어머니는 해글러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어머니의 철저한 가정교육 아래 자라난 해글러는 결코 우등생은 아니었지만 비행소년도 아니었다. 해글러의 어머니는 해글러가 철이 들기 시작할 무렵부터 몇 가지 생활의 지침을 내려주었다. 항상 남을 존중할 것. 이유없이 남에게 상처를 주지 말 것. 절대로 먼저 싸움을 걸지 말 것. 단 정당하다고 생각할 때는 끝까지 싸울 것 등이었다. 해글러는 어머니를 존경했으며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절대로 먼저 싸움을 걸지 않았으며 싸울 때에도 절대 무기를 들지 않았다고 한다(외신에서 종합한 내용인데 굳이 모두 믿을 필요까지는 없을 듯 하다).
소년시절 해글러의 영웅은 전 헤비급 세계챔피언 플로이드 패터슨이었다. 60년 6월 20일 열렸던 패터슨과 잉그마르 요한슨과의 재대결 포스터가 해글러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담벽에 붙었고 빗물에 젖어 너덜거리는 포스터 속에 실린 패터슨의 날렵한 모습에 해글러는 완전히 매혹되고 만다. 그리고 그 포스터는 해글러의 인생을 결정짓게 된다.
페트로넬리 형제와의 만남
16세가 되던 70년 해글러의 가족은 매사추세츠 브록턴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그해 가을부터 해글러는 본격적으로 복싱을 배우기 시작한다. 맨처음 해글러가 찾아간 곳은 동네의 철물점 2층에 있는 허름한 체육관이었다. 그 체육관은 이탈리아계인 페트로넬리(패트와 구디) 형제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세 사람의 인연은 해글러가 은퇴하는 87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
한창시절의 해글러. 이 딴딴한 몸매와 빛나는 대머리를 보라 |
해글러는 지독한 연습벌레였다. 손톱과 발톱이 다 빠져나갈 정도로 뛰고 두들겼으며 매일 남들보다 2배 이상 훈련에 매진했다. 성실한 해글러의 자세에 감명받은 페트로넬리 형제는 열과 성을 다해 해글러를 지도했다. 입관 초기에는 백인에게 복싱을 지도받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페트로넬리 형제의 진심을 알게 된 이후부터는 전적으로 그들을 신뢰하게 되었고 71년 아마추어 복서로 링에 오르게 된다.
73년은 해글러에게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매사추세츠 로웰(기억나시는가? 미키 워드의 고향이다)에서 벌어진 주 골든글러브대회에 출전한 해글러는 연전연승을 거두며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었고 최우수선수로 선정된다.
결승전이 끝난 후 페트로넬리 형제와 함께 라커룸으로 돌아온 해글러는 믿지 못할 일을 경험하게 된다. 라커룸 문이 열리고 건장한 체격의 흑인 사나이가 들어와 "자네가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고 말해 주는데 그 흑인 사나이는 다름 아닌 소년 시절 자신의 영웅이었던 플로이드 패터슨이었다. 패터슨은 해글러의 손을 잡고 시상식이 열리는 링까지 데려다 주었으며 해글러는 평생 잊지 못할 감격을 누린다. 자식이 매맞는 운동을 하는 것을 반대하던 어머니도 골든글러브 우승을 하자 반대를 굽히게 된다.
골든글러브 우승 이후 해글러는 AAU(전미선수권대회)에 출전, 역시 우승을 차지하고 73년 5월 프로로 전향하게 된다. 그의 나이 19살이었다.
무관의 제왕
프로 데뷔전에서 해글러는 테리 라이언에게 2회 KO승을 거두고 산뜻한 출발을 한다. 파이트머니는 50달러. 패트와 구디는 "첫 파이트머니 치고는 많은 편이다. 소중히 간직해두거라"라고 하면서 몽땅 해글러의 손에 쥐어준다.
해글러의 행보는 순조로왔다. 73년에 8연승(6KO), 74년엔 9연승을 달리다가 뮌헨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슈거 레이 실즈와 시애틀에서 맞붙었는데 홈타운 디시전으로 억울한 무승부를 기록하게 된다. 이후 다시 8연승을 거두었으나 76년 들어 필라델피아 원정전에서 보비 왓츠와 윌리 몬로에게 모두 텃세 판정에 밀려 두 개의 검은 별을 기록하게 된다(후에 두 선수에게 모두 KO로 복수한다).
해글러는 주로 보스턴을 중심으로 활동해왔는데 보스턴과 필라델피아는 뉴욕을 중심으로 같은 동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지역감정이 매우 심했다. 해글러는 지역감정의 애매한 희생자가 된 것이었다.
"텃세 판정? 그런 거 신경쓰지 않습니다. 진 건 진거죠"라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시 링에 오른 해글러는 무패 가도를 달리며 78년 3월 WBC 미들급 8위에 오르며 세계무대에 얼굴을 내민다.
당시 미들급은 카를로스 몬존의 은퇴 이후 강력한 통치자를 옹립하지 못하고 군웅할거하고 있는 중이었다. 몬존의 타이틀은 로드리고 발데스를 넘어 우고 코로에게 가 있었다. 해글러는 정상급의 기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좀처럼 세계도전의 기회를 얻질 못했다. 돈 킹이나 밥 애럼 같은 거물 프로모터에게 소속되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였다. 해글러는 데뷔시절부터 자신의 시합을 주선해준 늙은 프로모터 립 바렌치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계속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해글러를 주목하고 있던 선배 복서 스모킹 조(조 프레이저의 별명)는 해글러를 자신의 사무실에 불러 인상적인 충고를 해준다.
"자네가 세계타이틀에 도전하지 못하는 세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흑인이라는 것. 둘째, 왼손잡이라는 것. 셋째, 너무 강하다는 것."
해글러가 시합에서 이기면 이길수록 세계도전의 길은 멀어져갔다. 우고 코로는 너무 강한 해글러와의 대전을 노골적으로 기피했다. 그래도 해글러는 이기는 것만이 세계왕좌에 다가가는 유일한 길이라 믿었고 그 신념에 따라 꿋꿋이 연승가도를 이어간다.
79년 2월 해글러는 자신에게 무승부를 안겨주기도 했던 라이벌 슈거 레이 실즈를 불과 80초만에 실신시키고 세계 미들급 랭킹 1위에 오른다. 그리고 4개월 후 자신과의 대결을 거부해 온 우고 코로가 비토 안투오페르모에게 패해 타이틀이 이양되자 해글러는 79년 11월 30일 대망의 첫 세계도전 기회를 잡게 된다.
경기 전 전문가들의 예상은 5 : 1의 압도적인 해글러의 우세였다. 그날 라스베가스 시저스팰리스 호텔에서는 세계타이틀 더블헤더가 준비되어 있었다. 해글러vs비토 안투오페르모의 미들급 타이틀전과 슈거 레이 레너드vs윌프레도 베니테스의 웰터급 타이틀매치가 그것이었다.
해글러는 시종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석연찮은 무승부 판정에 분루를 삼켜야 했다. 막판 안투오페르모의 분전이 빛을 발하긴 했지만 필자가 보기에 3점차 정도의 해글러의 판정승이 적당했다.
|
애매한 판정에 울어야 했던 안투오페르모 1차전 |
스코어카드는 145-141(해글러 우세), 144-142(안투오페르모 우세), 143-143이었다. 144-142 안투오페르모 우세로 채점한 부심은 Dalby Shirley로 라스베가스에서 오심으로 유명한 부심이다(필자가 알고 있기로 이 사람 여자인데 확실히 확인하지 못했다. 아시는 분 있으면 가르쳐주시라). 이 시합 말고도 이 부심이 남긴 작품으로는 레녹스 루이스vs에반더 홀리필드 1차전(홀리필드 2점 우세로 채점), 오스카 델 라 호야vs퍼넬 휘태커(6점차 호야의 우세로 채점. 이 시합은 보기에 따라서 휘태커의 손을 들어줘도 할 말이 없을만큼 호야가 고전한 경기였다. 원사이드한 호야의 우세로 기억하시는 독자분들이 많으리라. 의문나시는 독자분들은 냉정히 시합을 다시 보길 바란다. 거의 박빙에 가까운 시합내용이었다), 마르코 안토니오 바레라vs에릭 모랄레스 1차전(모랄레스 3점 우세로 채점. 이 경기 역시 박빙 또는 바레라의 근소차 우세로 보는 것이 옳겠다), 레너드vs헌스 2차전(11라운드까지 헌스의 2점 우세로 채점하다가 12라운드에 레너드의 10 : 8 우세로 채점해서 무승부 판정이 나는데 12라운드에 레너드가 헌스를 밀어붙이긴 하지만 다운도 없었고 2점차 채점은 과했다) 등이 있다. 지금도 활동하고 있으니 복싱중계 보다가 이 사람 이름 나오면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여담인데 채점 공정한 라스베가스 부심으로는 개인적으로 Jerry Roth를 꼽는다. 물론 이 양반이라고 다 잘하는 건 아니지만(휘태커vs호야전에서 Dalby Shirley와 마찬가지로 6점차 호야의 우세를 채점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공정한 채점을 매기는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몇 경기만 예를 들면 레너드vs헌스 2차전 (113 : 112 헌스 우세 채점), 래리 홈스vs제리 쿠니(타 2명의 부심이 백인인 쿠니의 인기 때문에 12회 까지 2점차로 채점했는데 Jerry Roth는 6점차로 비교적 정확하게 채점), 제프 페네크vs아주마 넬슨 1차전(희대의 오심 중 하나인데 세 부심 중 유일하게 Jerry Roth만 페네크의 2점차 우세로 채점) 등이 있다.
해글러vs안투오페르모전은 레너드vs베니테스전의 언더 카드로 열렸으며 당시 해글러의 파이트머니는 4만 달러, 레너드의 파이트머니는 100만 달러였다. 당시 두 선수의 지명도가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런던 공습 그리고 거침없는 방어 행진
|
80년대 펀치라인 표지의 단골복서였던 해글러 |
이 경기 이후 해글러는 "절대 심판을 믿지 않겠다. 모든 경기를 KO로 끝내버려 심판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비록 경기에 패했지만 해글러의 랭킹은 내려가지 않았다. 80년 3월 안투오페르모의 타이틀은 알란 민터에 의해 다시 바다 건너 영국으로 넘어가버렸다.
80년 9월 두번째 세계도전의 기회가 찾아왔다. 해글러는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진격해갔다. 민터는 웸블리구장에 모인 광적인 영국팬들의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시합에 임했지만 경기 내내 해글러의 냉정한 프레싱에 양쪽 눈자위가 모두 찢어지며 피투성이가 된 채 시합을 포기해야 했다. 수 년을 기다려온 감격적인 대관식이었다. 레퍼리스톱이 선언되자 해글러는 캔버스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번쩍 치켜들며 환희에 잠긴다. 그러나 환호도 잠시, 격분한 영국관중들의 물병세례에 해글러는 경찰에 휩싸여 황급히 링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브록턴으로 돌아간 페트로넬리 형제와 해글러는 록키 마르시아노의 묘지에 찾아갔다. 페트로넬리 형제는 25년 전 록키 마르시아노와 80년대를 이끌 복서를 록키가 세계챔피언에 올랐던 9월에 탄생시키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록키의 별명이 브록턴 블록버스터였다). 25년에 걸친 약속을 드디어 지킨 것이다.
꿈에 그리던 왕좌에 오른 해글러는 한가닥 한다 하는 도전자들을 모두 KO로 가라앉히고 거침없는 방어행진을 이어나간다.
박종팔, 백인철과의 대결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풀헨시오 오벨메히야스(당시 전적 30승 무패 28KO)를 1차 방어전에서 만나 현격한 기량차를 보여주며 8회 TKO승, 비토 안투오 페르모와의 재대결에서 4회 종료 TKO승(대부분의 레코드 사이트에는 5회 TKO로 기록되어 있는데 시합 필름을 보면 4회 종료 TKO가 맞는 듯 하다)을 거두고 완전한 자신의 우위를 확인했으며 시리아에서 날아온 터프가이 무스타파 햄쇼와의 대결 역시 도전자의 눈언저리를 커트시키며 11회 TKO승을 거두고 롱런의 발판을 다진다.
82년 들어서도 해글러는 정력적인 방어행진을 거듭한다. 에마뉴엘 스튜어트가 키운 윌리엄 케이브맨 리를 불과 1분도 지나기 전에 기절시키며 4차 방어에 성공했고 오벨메히야스와 두번째 만나(박종팔과 오벨메히야스가 도전자 결정전을 치러 오벨메히야스가 도전했었다. 기억나시는가? 당시 박종팔의 베네주엘라 원정경기를 MBC에서 중계해주었었다. 이철원 캐스터 혼자 갔는데 언더카드가 이상봉선수-영화 챔피언을 보면 김득구의 친구로 나온다-와 베르나르도 피냥고 전이었고 메인 이벤트가 박종팔vs오벨메히야스전이었다. 오벨을 이기면 해글러vs박종팔전을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얼마나 설레였던가) 전율적인 완빤찌 KO승을 이끌어내며 5차 방어, 들소 토니 십슨을 6회 TKO로 분쇄하고 6차 방어에 성공하는데 이 시합의 해설을 맡았던 레너드는 "여러분들은 왜 내가 은퇴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지금 보고 계십니다"라며 해글러의 기량에 찬탄을 보낸다.
Marvellous
이 무렵 해글러는 너무나도 자신과 잘 어울리는 별명을 얻게 된다. 바로 "Marvellous". 바로 '경이로운' 챔피언이라는 뜻이었다. 어떤 도전자들도 해글러의 차가운 하드보일드 펀치에 걸려들면 종료 공소리를 듣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그런 대단한 기량을 지니고 있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해글러는 그리 주목받는 선수가 아니었다. 당시 인기의 중심은 미들급이 아닌 웰터급에 있었다. 두란의 웰터급 월장으로 시작된 웰터급 스타워즈 시리즈는 레너드vs두란 1, 2차전, 레너드vs헌스전을 거치며 전세계 복싱팬들을 달궈놓고 있었고 독재자 해글러가 철권통치를 휘두르고 있던 미들급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또한 해글러는 화려한 언변이나 제스처 등 프로기질이 별로 없었다. 묵묵히 운동만 하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그런 탓에 해글러는 막강한 실력과 통합챔피언이라는 레테르를 달고 있으면서도 방어전에서 챙기는 파이트머니는 푼돈에 지나지 않았다.
윌포드 사이피언을 4회 KO로 주니어미들에서 올라온 두란을 맞아 두란의 디펜스를 뚫지 못하고 고전 끝에 판정승, Marvellous라는 별명에 의구심을 품게 만들지만 이어진 롤단전에서 1라운드 다운(슬립 다운인데 주심이 다운으로 인정함. 해글러의 링캐리어 사상 유일한 공식 다운)을 극복하고 10회 TKO승을 거두었고 84년 10월 햄쇼와의 재대결에선 더티한 버팅으로 일관하는 햄쇼를 두 번의 다운을 이끌어내며 철저히 패대기치고 10차 방어에 성공하게 된다.
|
해글러vs햄쇼 2차전 경기모습 |
금세기 최후의 대결
햄쇼전을 12라운드 룰로 싸우는 바람에 WBC는 해글러의 타이틀을 박탈하려고 했으나 밥 애럼의 중재로 화해가 이루어져 해글러는 3대 기구 통합 타이틀을 계속 유지하게 된다. 84년 12월 13일 밥 애럼은(해글러는 챔피언에 등극한 이후 밥 애럼 휘하로 들어갔다) 이전부터 대전설이 피어오르던 디트로이트의 저격수 토머스 헌스와의 세기의 대결을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했다. 예정 일자는 85년 4월 15일. 흥행수익을 제외한 두 선수의 순수 파이트머니만 해글러 540만 달러, 헌스 530만 달러였다.
4월이 다가올수록 전세계는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는데 학교에서도 시합이 열리기 몇 주 전부터 내기가 걸리고 난리가 아니었다. 필자는 헌스의 광신도라 당연히 헌스에게 걸었으며 해글러를 지지하는 친구들과 함께 손꼽아 4월 15일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기 전 예상은 두란전의 상대비교에 의한 헌스의 근소한 우세였다. 두란을 2회만에 깨끗하게 손보고 한창 물이 오른 헌스에 비해 해글러는 피크를 지나가고 있는 시점이었고 두란을 시원스럽게 제압하지 못한 이력이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었다.
현지 도박사들은 6 : 4, 또 월드복싱지에선 전문가 20명의 예상평을 수록했는데 헌스 우세 10명, 해글러 우세 7명, 모르겠다 3명으로 역시 헌스의 우세를, 국내 언론과 이웃나라 일본 언론에서도 역시 헌스의 우세를 점쳤다.
당시 몇몇 전문가들의 의견을 잠시 살펴보자.
"헌스가 강한 체급은 웰터, 주니어미들이다. 미들급은 힘들 것이다. 게다가 헌스는 특급 사우스포와 싸워 본 경험이 전무하다. 해글러가 유리하다” (안젤로 던디)
“몬로(비록 어거지 판정이지만 해글러를 한 번 이겼던 윌리 몬로)는 헌스와 모든 면에서 비슷하다. 잽과 고성능 라이트 그리고 카운터. 해글러는 위대한 복서지만 달아나는 상대에겐 약하다. 헌스가 유리하다” (에디 퍼치-윌리 몬로의 트레이너)
“해글러는 현재 내리막이다. 오르막인 헌스와의 경기 결과는 뻔하다”(베니 조지노-대니 로페스, 하이메 가르사의 트레이너)
“해글러는 늙었다. 헌스의 발과 스트레이트로 승부가 날 것이다”(질 클랜시)
두 선수의 신경전도 대단했다. 헌스는 "나는 두란을 2회에 손봤다. 하지만 해글러는 고전 끝에 겨우 판정으로 잡지 않았는가. 나는 앞으로 4체급을 석권할 것이고 해글러 정도는 안중에도 없다"며 챔피언의 비위를 긁었고 해글러 역시 "난 쿠에바스나 두란 같은 멍청이가 아니다. 개천에서 놀던 고기와 바다에서 놀던 고기가 어떻게 다른지 확실히 보여주겠다"며 역시 강한 자신감을 피력했다.
이윽고 4월 15일은 다가왔고 라스베가스 시저스팰리스 호텔 특설링은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세간의 예상과는 달리 막상 뚜껑을 열자 헌스는 너무 연약했다. 1라운드 공소리와 동시에 용수철처럼 튀어나온 해글러는 후반에 승부를 걸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을 깨고 초반부터 폭발적인 러싱으로 헌스의 인사이드를 점하고 가공할 좌우 펀치세례를 퍼부었다. 신체조건의 불리를 감안한 깜짝 작전이었다. 예상 외의 초반 러쉬에 당황한 헌스는 아웃복싱을 포기하고 초장부터 전면전을 감행하며 관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빠뜨린다. 헌스는 여러 차례 카운터를 적중시켰지만 미들급 사상 최강 맷집을 자랑하는 해글러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2라운드 역시 비슷한 양상이었다. 라운드 초반 헌스의 카운터블로우가 해글러의 눈자위를 찢어놓았다. 그러나 이 커팅을 신호로 해글러는 더욱 살기등등해지며 쉴새없는 프레싱을 가하기 시작했다. 성명절기인 라이트 어퍼와 레프트스트레이트 콤보가 터지며 헌스를 휘청거리게 만들었고 헌스는 1라운드 직후 오른손가락 부상까지 입어 완전히 페이스를 잃었고 라운드 종료 공소리와 함께 비틀거리며 코너로 향하는 모습에서 시합이 얼마가지 않을 것임을 직감케 했다.
3라운드 공이 울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해글러의 부상을 링닥터가 검진했으나 경기는 속개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글러의 섬광 같은 좌우 연타가 헌스의 턱을 흔들자 헌스는 기우뚱거리며 반대쪽 로프로 밀렸다. 이윽고 해글러는 침몰직전의 헌스에게 라이트훅 피니쉬블로우를 터뜨렸고 종이인형 같은 헌스는 천천히 링바닥에 가라앉고 만다. 천정을 향해 허옇게 눈을 치뜨고 있는 헌스의 모습은 마치 전신마취에 걸린 환자같았다. 가까스로 몸을 추스려 일어나긴 했으나 리차드 스틸 주심은 더 이상 경기를 속행할 수 없다고 판단, 해글러의 TKO승을 선언한다. 8분 1초간의 하드보일드 액션스릴러가 마무리되는 순간이었다.
|
|
|
1라운드- 해글러와 헌스의 정면충돌 |
해글러의 레프트가 헌스의 턱을 강타 |
경기중단을 선언하는 리차드 스틸 주심 |
85년 링지 "Fight of the Year"로 선정된 이 시합은 공교롭게도 레너드가 해설을 맡았으며 충격적인 시합결과만큼이나 수많은 기록을 남겼다. Closed Circuit(폐쇄회로 중계방식, 현재는 사용하지 않음)로 중계된 이 시합은 총 200만 명의 유료 시청자가 몰려 71년 알리vs프레이저전의 160만 명의 기록을 능가하는 신기록을 작성했으며 순이익 역시 2,500만 달러를 기록, 홈즈vs쿠니전의 2,200만 달러를 앞서는 사상 최고의 흥행기록을 경신했다. 이에 따라 해글러는 파이트머니와 흥행수익을 합해 1,010만 달러를 벌어들였고 헌스 역시 810만 달러를 챙기게 된다(요즘처럼 PPV방식을 도입했더라면 흥행규모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요즘 호야를 비롯한 수퍼챔프들이 1,000만 달러 이상 파이트머니를 받을 수 있는 것은 PPV 때문이다. 그러므로 파이트머니만으로 80년대 4인방과 최근 복서들을 단순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85년 4월 15일 필자가 다니던 중학교에선 봄소풍을 갔었다. 당시 이 시합은 생중계로 편성되지 않았고 저녁에 녹화로 편성이 되었는지라 소풍 갔다 온 후 내기를 건 친구들과 목욕탕에 모여앉아 함께 보았던 기억이 난다. 필자의 패배였지만 그날의 기억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예상을 깨고 초반 KO승을 거둔 해글러는 슈거 레이 로빈슨, 카를로스 몬존과 맞먹는 슈퍼파이터로 격상된다. 레너드가 떠난 중량급에서 해글러의 존재는 신성불가침의 그것이었다.
헌스를 꺾고 난 후 적당한 도전자를 찾지 못하던 해글러에게 러브콜을 보낸 겁없는 아이가 있었으니 "아프리카의 야수"라 불리던 존 무가비였다. 모스크바 올림픽 은메달리스트였던 무가비는 영국의 매니저 미키 더프의 눈에 들어 유럽무대를 위주로 전적을 쌓아가던 주니어미들급 출신 선수였다.
가공할 라이트훅을 앞세워 26연속 KO행진을 벌여나가던 무가비는 세계랭킹 1위에 오르며 지명도전권을 획득하게 되고 해글러의 아성에 도전장을 내밀게 된다. 해글러는 부상으로 인해 4개월 가량 시합을 연기하는 바람에 50만 달러의 금전적 손해를 입으며 링에 오른다.
86년 3월에 벌어진 이 시합 역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도전자의 전적이 워낙 무시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국내중계권을 가지고 있었던 MBC에선 연일 두 선수의 경기장면을 틀어주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필자를 비롯 '무가비'의 '무자비'한 KO장면에 매료당한 중삐리들은 또다시 내기판을 벌였고 필자는 지난 번과는 달리 해글러에게 걸었던 기억이 난다.
경기 초반은 무가비의 분위기였다. 평소와 달리 스위치복싱을 구사하면서 오른손잡이 스타일로 싸우던 해글러는 2라운드와 4라운드에 무가비의 클린 히트를 허용하며 불안한 모습을 보였으나 5라운드부터 전열을 정비, 6라운드엔 폭죽 같은 좌우 연타를 터뜨려 무가비를 KO직전까지 내몬다(후에 이 경기의 6라운드는 86년 링지 최고의 라운드 후보에 오른다).
폭풍 같은 6라운드가 지나고 해글러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서서히 무가비를 압박, 10회 들어 짧은 어퍼와 양훅을 적재적소에 히트시켜 완전히 시합의 균형을 깼고 최종회가 된 11회엔 수비에 급급한 무가비의 안면에 원투 스트레이트를 쑤셔박아 게임을 종료시키며 12차 방어에 성공한다.
|
해글러vs무가비전- 11라운드 해글러의 연타를 맞고 다운당한 무가비 |
혹시나 하는 기대에 부풀었던 복싱팬들은 서서히 목을 죄어가다 막판에 숨통을 따버리는 해글러의 진면목을 다시금 확인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경기 후 무가비는 해글러의 명성을 의식해 자신의 스타일대로 싸우지 못했다며 재대결을 강력히 원했으나 그런 기회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애초에 이 시합은 미스 매치에 가까운 시합이었다. 무가비가 26연속 KO행진을 벌이고 있었다고는 하나 대부분의 시합을 주니어미들 체중으로 치렀고 무가비가 상대한 선수들 중 특급 복서는 거의 없었다. 에디 가소, 프랭크 플레처, 제임스 그린, 얼 하그로브 등을 이겼다고는 하나 가소는 이미 한 물 아니 두 물 정도 간 상태였고 그린, 플레처, 하그로브 등은 세계 타이틀 언저리에서 머물던 수준이었으며 그나마 그린에게는 고전 끝에 역전 KO로 이겼었다. 한체급 아래의 무가비가 미들급에서의 검증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은 상태에서 전적만 믿고 당대, 아니 미들급 역사상 최강이라 꼽아도 무색할 수퍼챔피언인 해글러에게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헌스전 이후 이렇다 할 도전자를 찾지 못하고 있던 해글러의 그물에 스스로 와서 빠진 꼴이랄까. 상황이 그러했으니 결과는 불문가지였다.
만약 무가비가 자신의 본 체급인 주니어미들 타이틀을 노렸다면 어떠했을까. 당시 주니어미들급은 마이크 맥컬럼과 토머스 헌스가 각각 양대기구 챔피언으로 체급 역사상 가장 강한 두마리 호랑이가 호령하던 시절이었다. 두 선수 모두 무가비가 넘보기엔 힘든 상대들이었고 그랬다면 우리는 무가비라는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해글러를 택한 건 최악이자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떠나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알고…
체력과 기량의 저하로 은퇴의 기로에서 고민하던 해글러는 레너드가 자신과의 대결을 위해 조건부 컴백을 선언하자 결국 레너드와의 꿈의 대결에 사인하게 된다. 무가비전 이후 IBF는 해글러가 지명 방어전 시한을 넘기자 타이틀을 박탈해버리고 WBA 역시 해롤 그래햄과 지명 방어전을 치르지 않고 레너드와 대결을 벌이는 것을 이유로 타이틀을 박탈해 버린다.
WBC 타이틀을 놓고 벌인 레너드와 해글러의 대결은 WBC 룰에 따라 12라운드로 합의되었으며 경기 전 5 : 2(해글러 우세)의 예상을 깨고 레너드의 2 : 1 판정승으로 막을 내린다(경기 내용과 평가는 레너드 편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
해글러vs레너드전- 레너드의 레프트가 해글러의 템플에 꽂히고 있다 |
근 11년간 패배를 모르던 해글러의 패배는 당시 필자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경기 후 해글러는 분명한 자신의 승리였다며 심판 판정에 불쾌함을 표시했으며 헌스와의 재대결, 레너드와의 재대결 등 수백만 달러를 더 벌 수 있는 꿈의 카드들을 남겨두고 글러브를 벗어 버린다.
은퇴 이후 영화판에 뛰어든 해글러는 B급 액션물 "인디오"의 주연을 맡아 영화계에서의 성공을 꿈꾸었지만 흥행에 실패하고 만다. 레너드전 이후 아내 Betha와 자주 다투게 되었는데 결국 90년 이혼까지 이르게 된다. 이혼 직후 이태리로 건너가 "인디오 2"를 촬영했으나 속편 역시 흥행에 실패하자 영화계에서도 떠나고 만다.
복싱계에선 여러 차례 그의 컴백설이 나돌긴 했지만 해글러는 다시는 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최상의 기량을 보여주지 못할 바에야 링에 서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나이 마흔이 넘도록 링에 서면서 추한 모습을 보여준 레너드, 두란과는 상반되게 퇴장에 있어서도 거장다운 모습을 보여주어 현재까지 그의 위대함은 더욱 빛나고 있다.
강함. 그 아름다움
해글러의 시합은 마치 차가운 금속을 만지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던 이 냉정한 사나이의 최대 무기는 견고한 밸런스였다. 해글러의 부드러운 밸런스는 신체의 유연성과 탄탄한 기본기에서 비롯되었다. 어느 각도에서나 주먹의 각을 형성할 수 있었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불가사의한 중심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해글러는 카운터를 위주로 수비적인 전술을 펼치는 일반적인 왼손잡이와는 달리 매우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특이한 사우스포였다. 라이트 오버핸드를 공격루트의 출발점으로 하여 언제나 선제공격을 시도하는 복싱스타일 때문에 그의 경기는 언제나 타이트하고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었다. 또 해글러의 정평난 무기가 있으니 어퍼컷이었다. 라이트어퍼를 리드펀치로 낼만큼 어퍼컷 구사가 능숙했으며 좌우 어퍼가 모두 부드러웠다(햄쇼 2차전에서의 라이트어퍼 레프트 스트레이트 콤비네이션을 보라).
거기에 미들급 역사상 최강 턱의 소유자로 총 67전을 치르면서 다운 한 번 당하지 않았던(롤단전의 미스 판정은 제외) 철벽 맷집은 상대들의 펀치를 부끄럽게 했으며 15라운드를 뛰고도 남을 활화산 같은 스태미너, 유연한 신체를 이용하여 상대의 정타를 흘리는 탄탄한 수비전술 등 전성시절의 해글러는 너무도 강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흔히들 차베스를 "신이 빚은 복서"라 부르곤 했는데 그 호칭은 오히려 해글러에 더욱 걸맞는 게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하곤 한다(차베스가 가지고 있는 장점들을 해글러 역시 거의 다 가지고 있었다. 오히려 밸런스나 근육의 유연성 등 신체적 조건에서는 더욱 앞섰다).
88년 링지는 역대 미들급 올타임 랭킹을 발표하면서 20세기 초반에 활동한 백인 복서 해리 그렙을 1위에, 몬존을 2위에, 해글러를 3위에 랭크시켰다. 또한 20위까지 70년대 이후 복서는 몬존과 해글러밖에 없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거의 50년대 이전의 백인복서들에 편중되어 있는데 정말 백인제일주의의 망령에 찌든 참으로 링지다운 한심한 발상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기량만으로 따진다면 단연 해글러가 1위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호사가들 사이에서 몬존과 해글러의 가상대결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언급되는데 많은 매니아들은 박빙을 예상하지만 필자는 해글러가 분명히 낫다고 생각한다. 찬스 때 꽂아넣는 몬존의 라이트 스트레이트는 가공할만 하지만 몬존은 허리의 쓰임이 좋지 않고 수비패턴이 단조로운 단점(클린치가 너무 많다)을 지니고 있다. 또 전반적으로 스윙의 궤적이 크고 숏펀치 구사에 미숙하다. 해글러라면 충분히 타격거리를 주지 않고 몬존의 인사이드를 점하고 정평난 쇼트 컴비네이션을 통해 몬존을 공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해글러가 장신에 스트레이트를 장착한 선수들을 잘 다뤄왔던 것을 상기한다면 서너점차의 넉넉한 판정승 또는 경기 막판 TKO까지도 가능하다고 본다. 기실 몬존vs로드리고 발데스 2차전은 필자가 보기에 발데스의 2~3점차 승리였다.
해글러가 사라진 이후 황폐화된 미들급은 현재 버나드 홉킨스라는 강력한 군주를 옹립하긴 했지만 해글러 시절의 카리스마를 느끼기는 힘들다. 홉킨스가 몬존의 최다 방어기록을 갱신하며 상종가를 올리고 있는 강한 챔피언임에는 분명하지만 경기스타일이나 인기 면에서 해글러와 비교하기에는 2%, 아니 20% 정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모든 체급을 통틀어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강한 단 한 명의 복서를 꼽으라면 필자는 주저없이 해글러를 꼽을 것이다. 이미지상으로나 기량으로나 80년대 초중반의 해글러는 아무도 이길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런 강함에 링밖의 성실한 생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정확히 알고 떠난 아름다운 뒷모습 등이 보태어져 그는 더욱 위대한 복서로 평가받고 있다. 80년대를 라이브로 경험한 복싱팬이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 해글러. 오늘따라 그의 빛나는 대머리가 더욱 그립다.
|
일본 복싱매거진 83년 8월호에 실린 해글러 친필 싸인 |
해글러 형님. 고맙슴다. 형님 때문에 내 청소년기가 졸라 즐거웠슴다. 비바 해글러!!!
첫댓글 눈팅유령회원입니다만, 마블러스 마빈의 글에 무플인 것을 눈 뜨고 볼 수가 없어서 리플 하나 남기고 갑니다. 경이로운 챔피언 해글러 만세
만쉐이~~~~~~~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