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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 매헌공의 스승 임회(林檜)
1) 관해임공(觀海林公)의 행적(行蹟)
관해임공(觀海林公)은 매헌공의 스승으로 우리 매헌공과 관계를 알보기 위해 관해임공(觀海林公)의 행적(行蹟)을 살펴보자
공(公)의 휘(諱)는 회(檜)이고, 자(字)는 공직(公直)이며, 금호공(錦湖公, 임형수(林亨秀))의 조카이다. 금호공의 아우로서 임길수(林吉秀)는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지냈고, 임정수(林貞秀)는 형조 좌랑(刑曹佐郞)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승지공(承旨公, 임정수)은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현령(縣令)을 지낸 이진(李震)의 딸을 아내로 맞아 가정(嘉靖) 임술년(壬戌年, 1562년 명종 17년) 9월에 공을 낳았는데, 좌랑공(佐郞公, 임길수)이 후사(後嗣)가 없어서 공을 데려다가 아들로 삼았다.
공은 태어날 때부터 준수하고 우람하여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말을 할 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문득 문자(文字)를 이해하곤 하였다. 6세 때에 배우기 시작하여 책을 읽고 글을 지었는데, 총명하고 민첩함이 남보다 한결 뛰어나서 조금 자란 뒤에는 사조(詞藻)가 나날이 향상되었다. 매번 장옥(場屋, 과거를 보이는 과장(科場))에 나아갈 때마다 번번이 그 또래들을 굴복시키자, 당시의 이름난 사람들이 다들 배항(輩行)을 굽히고 공과 더불어 교유하였다.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에 상상(上庠, 성균관)에 올랐고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에 (생모인) 이 부인(李夫人)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미처 연제(練祭, 소상(小祥)을 말함) 때가 되기도 전에 또 승지공의 상을 당하였고, 승지공의 상기(喪期)를 채우기도 전에 좌랑공이 또 불행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에 공은 7년 동안이나 상주(喪主) 노릇을 하면서 마치 하루같이 철저하게 예법을 지켰으며, 지나치게 슬퍼한 나머지 하마터면 몸을 상할 뻔하였다. 복제(服制)가 끝나자 송강(松江, 정철(鄭澈)) 정 상국(鄭相國)의 집안에 장가를 들었다. 처음에 승지공이 송강과 더불어 약혼(約婚)을 하였는데 이때까지 8년이나 지나서야 마침내 성혼(成婚)을 하였으니, 두 집안의 신의(信義)를 사람들이 모두 탄복(歎服)하였다.
계사년(癸巳年, 1593년 선조 26년)에는 양어머니[所後妣] 노부인(魯夫人)이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에 왜구(倭寇)의 난리를 당하여 세상이 뒤숭숭하고 어수선하였으나 송종(送終)의 예법을 스스로 극진하게 다하고 유감이 없도록 하였다. 상기를 마친 뒤에 가묘(家廟)를 받들고서 해서(海西, 황해도) 지방으로 피난(避難)하여 수양산(首陽山) 아래에 우거(寓居)하였는데, 그 당시 송강(松江)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여서 시론(時論)도 또한 크게 변하였으므로 공은 공거(公車, 과거 시험을 말함)의 학업을 사절(謝絶)한 채 시골에서 느긋하게 지내면서 오직 술과 시(詩)로써 자오(自娛)할 따름이었다.
신해년(辛亥年, 1611년 광해군 3년)에야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공은 나이가 만 50세가 된 까닭에 전례에 따라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제수되었다. 나주(羅州)에 김우성(金佑成)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평소에 같은 마을에 살면서 서로 친하게 지냈으나 뒤에 그가 악인(惡人)들과 패거리를 지어 못된 짓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서 통렬하게 절교(絶交)하였는바, 공이 과거에 급제를 하여 영예롭게 고향에 돌아오는 날에 이르러 김우성이 예전의 우의(友誼)로써 공의 집에 찾아와 축하를 하였으나 공은 끝내 그와 더불어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는데, 이로부터 김우성이 공에게 갈수록 뼈에 사무치도록 원한을 품고서 정인홍(鄭仁弘)ㆍ이이첨(李爾瞻)의 무리들을 부추기어 공을 중상(中傷)하려고 온갖 꾀를 부리었다.
이에 공도 또한 세상에 뜻이 없어져서 다시 해서(海西)의 옛 우사(寓舍)로 돌아가서 관해(觀海)라고 자호(自號)하고서 느긋하게 지내며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다. 계축년(癸丑年, 1613년 광해군 5년)에 이르러 다시 전적(典籍)에 제수되어 치제관(致祭官)으로서 장연(長淵)에 갔는데, 때마침 무고(誣告)의 옥사(獄事)가 크게 일어나 원서(爰書, 죄인이 진술한 죄상을 적은 서류) 안에 임호(林浩)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나오자 이이첨이 그 이름자의 음(音)이 공의 이름자와 서로 비슷한 까닭에 엉뚱하게 죄안(罪案)을 꾸미어 공의 부인(夫人)과 나이 어린 아들 임득붕(林得朋)을 잡아다가 옥(獄)에 가두었다.
공의 아들 임득붕은 나이가 겨우 14세 밖에 안되었는데도 이이첨이 법을 어겨가며 형신(刑訊)을 가함으로써 무복(誣服)을 받아내려고 하였으나 임득붕이 끝까지 자복(自服)하지 않자, 다시 임득붕을 꾀어 평소에 함께 어울려 놀던 아이가 누구인지를 물어본 뒤에 그 아이를 잡아들여 고문하면서 심문을 하였는데 그 아이도 또한 자복하지 않고 버티다가 고문을 못 견디어 죽었다. 이윽고 공이 장연으로부터 체포되어 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온갖 고문을 받으면서 심문을 당하느라고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정도였으나 그래도 끝까지 꼿꼿하게 버티면서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치대(置對:수감된 죄인들을 대질시켜 심문하는 일)할 때 붓을 쥐고서 쓰기를, “임호(林浩)의 ‘호(浩)’ 자는 호호기천(浩浩其天)할 때의 ‘호’ 자이고 내 이름 임회(林檜)의 ‘회(檜)’자는 만산송회(滿山松檜)할 때의 ‘회’자이다.”라고 하자, 적신(賊臣: 이이첨을 말함)의 무리들이 공을 강제로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아채고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유배를 보냈다.
이윽고 공은 양산(梁山)에 유배되고 아들 임득붕은 곤양(昆陽)에 유배되었는데, 두 곳 모두 돌림병이 잘 걸리는 멀고 나쁜 지역이었다. 공은 임득붕과 더불어 유배지에 끌려가느라고 갖은 고생을 하면서도 오히려 등에 부모(父母)의 신주(神主)를 짊어지고서 유배길을 끌려가니, 길에서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이 다들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였다.
유배지에서 10년 동안이나 고생하다가 계해년(癸亥年, 1623년 인조 원년)에 이르러 개옥(改玉: 인조 반정을 말함)하자 그동안에 유배된 여러 사람들이 모조리 풀려나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때 공도 풀려나서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임명되었고 이어 군기시 첨정(軍器寺僉正)에 전직(轉職)되었다. 그 무렵에 조정의 논의가 장차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수축(修築)하여 유사시에 보장(保障)이 되는 지역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그곳의 목사(牧使)를 누구에게 맡겨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 논란을 벌였다. 이때 문정공(文貞公) 신흠(申欽)이 맨 먼저 공을 광주 목사(廣州牧使)로 추천하였다. 광주는 본래 경보(京輔, 경성(京城)을 보조(輔助)하는 지역이라는 말)의 암읍(巖邑, 지세가 험한 산간 고을)이고, 또 산성을 수축하는 역사(役事)는 해야 할 일이 매우 많아서 여러 가지 사무(事務)들이 초창(草創, 전례가 없어 처음 마련하는 것을 말함)하는 상황이었는데, 공은 마음을 다하여 계획을 짜내었고 적절하게 조치(措置)를 하였다.
갑자년(甲子年, 1624년 인조 2년) 봄에 역적(逆賊) 이괄(李适)이 군대를 일으켜 반란하자 온 나라 안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는데, 공이 다스리는 진(鎭)에는 관할(管轄)하는 군병(軍兵)이 없어서 맨주먹으로 분의(奮義)하였으나 계획을 시행할 곳이 없었다. 이에 부로(父老)들을 불러모아 대의(大義)로써 타이르고 민병(民兵) 수백 명을 규합하였는데, 반적(叛賊)들이 갑자기 경성(京城) 가까이에 들이닥치자 임금의 대가(大駕)가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다. 공은 그 소식을 듣고서 밤중에 말을 달려 과천(果川)에 가서 어가(御駕)를 출영(出迎)하였으나 대가는 이미 과천을 지나가 버렸다. 이에 공은 남쪽을 바라보며 통곡하고서 말을 달리어 대가를 뒤따라가다가 다시 생각하기를, “지금 서둘러 천탄(淺灘)을 방어하지 않고 반적들이 멀리서 밀고 들어오는 대로 그냥 두면, 반적의 흉봉(凶鋒)에 차마 말할 수 없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여기고서, 마침내 다시 광주의 경내로 돌아가서 부오(部伍)를 정돈(整頓)함으로써 강탄(江灘)을 가로막아 반적들의 진로(進路)를 끊으려고 하였는데, 바로 그날에 반적들이 안령(鞍嶺)에서 패하여 그들의 복심(腹心) 수백 명만이 이미 천탄(淺灘)을 건너 남쪽으로 갔다.
공은 고립된 군대를 거느리고 갑작스레 경안역(慶安驛)의 다리 옆에서 반적들과 맞닥뜨렸는데, 하루아침에 갑자기 불러 모은 오합지졸(烏合之卒)이라서 미처 싸우기도 전에 궤멸(潰滅)하였고, 공은 마침내 반적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런데 반적들도 평소에 공의 기절(氣節)에 감복(感服)하였으므로 감히 곧바로 해치지 못하였고, 적장(賊將) 한명련(韓明璉)이 이괄(李适)에게 말하기를, “만약 이 사람을 풀어주면 뒤에 틀림없이 우리의 뒤를 밟을 것이니, 어서 죽여 없애서 후환(後患)을 끊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괄이 항복한 왜인(倭人)으로 하여금 공을 휘어잡고 내리누르면서 협박하여 굴복하게 하였는데, 공은 성난 목소리로 욕하기를, “국가가 너를 공신(功臣)에 녹훈(錄勳)하고 너의 작질(爵秩)을 높여주었는데 네가 어찌 감히 이럴 수가 있으며, 네가 어찌 감히 반란을 일으킨단 말이냐? 너를 칼로 잘게 토막내어 베어 죽이지 못한 것이 한스러울 따름이니, 어찌하여 나를 빨리 죽이지 않고 뭐하느냐?”라고 하자, 이괄이 크게 화를 내어 손수 검(劍)을 뽑아 공을 찔렀는데, 공은 몸이 성한 곳이 없을 만큼 난도질을 당하고서도 오히려 입에서는 반적들을 꾸짖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자 이괄이 더욱 성을 내어 말하기를, “너는 서생(書生)인데 안고경(顔杲卿)이 어떻게 죽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느냐?”라고 하고서는, 즉시 공의 혀를 잘라 끝내 죽게 되었으니, 이때가 2월 12일이었으며, 공이 죽은 뒤 사나흘이 지나서도 얼굴 모습이 변하지 않고 늠름하여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공의 부음(訃音)이 임금이 피난을 가 있는 행재소(行在所)에 알려지자, 임금이 깜짝 놀라며 슬퍼하고, 급히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벼슬을 추증(追贈)하고 정려(旌閭)를 내리고 연로(沿路)의 고을에 영구(靈柩)를 호송(護送)하게 해주도록 하였다. 그해 5월에 순천부(順天府) 북쪽에 있는 모후산(母后山)의 건좌(乾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타고난 자질이 준결(峻潔)하고 풍채가 우람하여 기개와 의리를 숭상하고 담론(談論)을 잘하였으며, 집안에서의 행실이 독실하여 가정(家庭) 사이에 효도와 우애의 인륜을 극진하게 다하였다. 비록 유배되어 있을 때에도 아침저녁으로 반드시 조상의 신주(神主)에 전알(展謁)하였으며 봉선(奉先)하는 의절(儀節)을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었다.
재물을 하찮게 여기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탈속(脫俗)한 것처럼 구애받는 바가 없었으며, 살림살이를 나누어 분가(分家)할 때를 당해서는 노비(奴婢)와 전답(田畓)들을 형과 누이동생에게 좋은 것을 골라서 가지도록 하고 자기는 잔열(殘劣)하고 척박(瘠薄)한 것들을 가졌다. 종족(宗族)들을 사랑하고 화목하여 그중에 재주가 있는 자들을 가르치고 살림이 가난하여 굶주리는 자들에게 식량과 의복 등을 도와줌에 있어 보통 사람들은 해내기 어려운 일들을 많이 해주었다. 임진년(壬辰年, 1592년 선조 25년)의 왜란(倭亂) 때에 영남(嶺南) 사람 중에 나이가 아직 어린 형제가 있었는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구걸(求乞)하다가 금성(錦城)에까지 오게 되자, 공은 그들을 자기 집안에 거처하게 해주고 기르고 가르쳐서 성취(成就)하게 해주었다. 이윽고 공이 졸(卒)하자 그 형제가 공을 위하여 심상(心喪) 3년의 복(服)을 입었다.
공은 평생 동안 악(惡)을 원수처럼 미워하였고 그 때문에 남들에게 여러 번 미움을 받았으나 화복(禍福)이나 이해(利害) 관계로써 그 조수(操守)를 바꾸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뒤로 14년 동안에 조정에 벼슬한 기간은 겨우 3년 밖에 되지 않았으며, 혼조(昏朝, 광해조(光海朝))에서 당한 일은 진실로 논할 것도 못되거니와, 나라가 중흥(中興)한 초기에 이르러서는 공의 준재(俊才)와 직절(直節)로 볼 때 마땅히 맨 먼저 현직(顯職)에 발탁되었어야 하는데도 당로(當路, 당세에 권력을 장악한 실력자를 말함)의 뜻을 잃는데 걸려 그 벼슬길이 막히게 되었으며, 그 말년(末年)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성취한 바가 이와 같이 탁월하게 뛰어났으나, 오히려 지난날의 원한을 앙갚음하려는 자에게 방해를 당하여 추증(追贈)하여 포창(褒彰)하는 은전(恩典)이 끝내 한 품계(品階)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식자(識者)들이 거듭 그 점을 개탄하고 애석하게 여기었다.
공은 시문(詩文)의 풍격이 매일(邁逸)하고 완려(婉麗)하여 세속(世俗)의 구극(鉤棘, 남의 문구(文句)를 긁어 모으거나 골라내어 글을 지음)하는 버릇이 전혀 없었으므로 예원(藝苑, 예문관(藝文館))의 제공(諸公)들이 다들 공을 추허(推許)하였다.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 이 상국(李相國)이 일찍이 자기의 두 아들로 하여금 공에게 수업(受業)하도록 하였다. 공이 저술한 글들은 계축년(癸丑年)의 화(禍) 때에 모조리 산일(散逸)되고 단지 유배되어 있을 때에 읊은 시(詩)와 유전(流傳)하는 것들에서 찾아낸 것만이 집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지금 약간 수(首)를 초각(抄刻)하여 ≪금호집(錦湖集)≫ 안에 부록(附錄)하였다.
공은 아들 둘을 두었는데, 맏아들 임득열(林得悅)은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이고, 작은 아들 임득붕(林得朋)은 돌림병에 걸리어 장가를 가지 못한 채 요절(夭折)하였다. 또 측실(側室)이 낳은 자녀가 3남 3녀인데, 아들은 임득이(林得怡)ㆍ임득무(林得懋)ㆍ임득재(林得材)이다. 공의 장남인 임득열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맏아들 임치(林峙)는 일찍 요절하였고, 둘째인 임교(林嶠)는 참봉(參奉)이고, 막내는 임시(林峕)이다. 내외(內外)의 손자(孫子)ㆍ증손(曾孫)ㆍ현손(玄孫)은 남녀를 합하여 모두 약간 명이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당나라 신하가 되어 충의(忠義)를 지켜 왔는데, 너의 목을 베어다가 황제에게 바치지 못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안녹산이 그를 천진교(天津橋)의 다리 기둥에 결박한 채 온몸을 난도질하여 살점을 베어먹었는데, 안고경은 죽어가면서도 입으로는 계속 안녹산을 꾸짖는 욕을 그치지 않았다. 그러자 반란군이 그의 혀를 갈고리로 찍어내면서 “이놈! 어디 또 욕을 해봐라!”고 하니, 혀가 잘린 안고경이 입으로 중얼중얼 욕을 하다가 죽었다고 하며, 뒤에 충절(忠節)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나주의 정렬사(旌烈祠)에 제향되었다. 이겸익 관계는 형 이겸복과 함께 나주의 관해(觀海) 임회(林檜) [1562 ~ 1624]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임공은 1613년(광해군 5)에 다시 전적에 임명되어 치제관의 임무를 띠고 장연에 갔는데, 마침 무고옥(誣告獄)이 크게 일어나 이이첨이 억지로 죄인을 만들어 양산으로 유배 갔다. 유배생활을 한 지 10년이 지난 1623년(인조 1)에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해배(解配)되어 예조좌랑에 제수되고, 다시 군기시 첨정으로 전직되었다.
1613~1623(金壽恒의 관해임공 행장) 참조.
여러 가지 임공의 행적을 감안해 보아 10년간 유배 생활을 하고 1623년 인조반정 때 해배되었으므로 1613부터 유배된 것으로 보인다. 매헌공 할아버지가 1592년 18세 때 겸복 할아버지와 금성(나주)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여 인연이 되었으며, 임공(본향은 나주)이 유배 생활하기 시작한 해는 매헌공이 38세 때부터이므로 이때 부터 양산에서 임공을 모신 것으로 보아 상당한 오랜 기간동안 교류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임공이 1624년 매헌공이 50세 때에 돌아 가셨기 때문에 18세부터 32년간 교류하여 학문도 그만큼 깊었음을 알 수 있다. 매헌공 할아버지께서 임공 스승께 학업을 할 때 예의 바르고 명석하여 우수한 제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임공의 부인께서 많은 서적을 선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나주에 가서 3년간 임공 스승에게 수학한 나이는 임란이 끝난 25살부터 유배 오기전 37세 사이에 임회 스승에게 수학한 것으로 보인다.
2) 매헌공의 정신적 지주이신 임회 스승과의 관계
1590년(선조 23) 복을 벗은 후 29세에 송강(松江) 정철(鄭撤)의 따님과 혼인하였다. 부인 영일정씨는 아버지 정철과 어머니 문화 유씨의 사남삼녀 중 막내 따님으로 1563년(명종 18)에 태어났다. 그 전에 승지공이 송강과 더불어 혼약을 하였는데, 연관 후에도 변치 않고 8년 만에 혼사를 이루니, 양가의 굳은 신의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송강 정철은 1545년 셋째 매형인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留)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화를 당하자, 공의 집안도 연좌되어 부친을 따라 귀양지를 전전하다가 1551년(명종 6) 부친이 석방되자 조부 정위의 묘가 있는 창평(昌平)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그는 마침 사화 이후 낙향하여 1548년부터 순창에 우거하며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던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1510-1560를 만나게 되어 학업을 닦으며 그의 제자가 되었다.
하서의 스승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같이 배웠다. 성리학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말부터 조선 중기까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 -조광조 · 김안국-이황 · 김인후-임회로 도통이 이어져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임회는 이와 같은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한 직계 인물로 후대 사림들로부터 학문과 덕행의 사표가 되었다.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문묘 종사 교서에서 "하서 선생을 정암 · 퇴계 · 우계 · 율곡의 반열에 올린다."라고 한 근거가 이해된다. 따라서 임회는 사림의 도통을 이어 받아 제자들에게 위기지학爲己之學의 가치를 심어 매헌공의 학문도 도학道學을 중시하는 사림의 지표를 이어 받았다 할수 있겠다.
김인후는 승지공의 중형 금호 임형수'와는 동년으로 교분이 매우 두터웠고, 이때는 승지공 역시 1547년 벽서의 변 때 가문이 화를 입어, 고향에서 수신제가의 도에 치력하던 때라. 김인후의 문화를 자주 왕래하면서 도의를 다졌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훗날 자연스럽게 두 집안은 혼인을 약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1591년(선조 24) 송강 정철은 건저 문제로 파직되어 강계에 유배되어 있었다. 이때 임회가 강계에 있는 장인을 찾아뵈었을 때 송강이 사위 임회와 작별하며 준 <별임서회가 「송강집에 수록되어 있다.
1593년(선조 26)에 양모(養母) 노부인(魯夫人)이 세상을 버리니, 때는 왜란을 당한 뒤라 모든 일이 어려웠지만, 초상을 치르는 예를 스스로 다하여 유감이 없게 하였다. 상을 마치고는 신주를 모시고 해서(海西) 피난하여 수양산(首陽山) 아래에 우거를 정하였다. 이때는 송강이 이미 서거하고, 당시의 여론이 크게 변하여서 과거 보는 일을 단념하고 시골에 살면서 시주로 낙을 삼고 지냈다.
1611년(광해군 3)에 비로소 대과에 급제하니 나이 50이라, 예에 따라 성균관 전적으로 제수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관해의 시 중에는 양산 유배시절에 지은 것이 많다. 다음은 <차성헌백장운(次惺軒白丈韻)>이다.
문장은 다함이 없는 큰 강의 흐름과 같은데
인간 세상의 존망은 한때라
술잔 앞에서 옛일을 슬퍼하지 말라
눈앞의 영고성쇠 모두 걱정거리인 것을.
文章不廢大江流,/人世存亡又一秋. /莫向樽前悲舊事,/眼中榮落摠堪愁,
위 시는 성헌(惺軒) 백현룡(白見龍)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1617년 관해가 양산에서 유배 중일 때 백현이 찾아와 그와 함께 쌍벽헌(雙碧軒)(쌍벽루)에서 술을 마시다가 벽 위에 있는 조익의 시구를 보고 지은 것이다. 조익(趙翊)은 관해와 같은 해에 급제한 친구이고, 백현룡은 조익이 양산의 수령으로 있을 때 방문하여 몇 달을 머물고 갔었다. 두 사람 모두 옛일이 생각나고 그리운 마음이 있어 시를 지은 것이다. 이때는 조익이 죽은지 이미 4년이라 인간의 존망(存亡)에 대한 슬픈 생각도 나고, 더욱 관해 유배객의 처지인지라 영락에 대한 우울한 감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그의 심회가 2, 4구의 '存又一'와 ''榮落摠堪愁,
위 시는 성헌 백현룡의 시에 차운한 것이다. 1617년 관해가 양산에서 유배 중일 때 백현이 찾아와 그와 함께 쌍벽에서 술을 마시다가 벽 위에 있는 조익의 시구를 보고 지은 것이다. 조익은 관해와 같은 해에 급제한 친구이고, 백현룡은 조익이 양산의 수령으로 있을 때 방문하여 몇 달을 머물고 갔었다. 두 사람 모두 옛일이 생각나고 그리운 마음이 있어 시를 지은 것이다. 이때는 조익이 죽은지 이미 4년이라 인간의 존망에 대한 슬픈 생각도 나고, 더욱 관해 유배객의 처지인지라 영락에 대한 우울한 감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그의 심회가 2, 4구의 '存又一'와 ''에 드러나 있다.
이 밖에 〈초추독음初秋獨吟> · <교거독좌(僑居獨坐>·<중소문두견中宵聞杜鵑)이 모두 적소에서의 고달픔과 외로움을 표출한 것이며, <곡최덕여哭崔德輿>·<강상차박응휴운다江上次朴應休韻>·<지원념일일견심학이서至月念一日見沈學而書>·<화기담호진여욱和寄淡湖陳汝郁>. <답심덕현김거비지수이시상화록기答沈德願金去非地粹以時相和錄寄>·<송윤현세질만환경送尹顯世滿還京>• <기금리삼유자寄錦里三猶子>은 모두 양산 유배시절에 최홍재. 심열·진경문・심광세. 김지수 등 가까운 친구나 조카들을 생각하며 지은 것인데, 벗들에 대한 그리움과 자유롭지 못한 몸으로 쉬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꾸지 못하는 우울한 심회를 드러내었다.
3) 유배시절에 학문의 승화
다음은 <소요각기(逍謠閣記)>의 일부이다.
(장자가 말한 <소요유(逍遙遊)> 편의 유명한 첫 구절)
대저 속에 터득한 바가 있으면 밖으로 사모하는 것이 없고, 밖으로 사모하는 것이 없으면 즐거움이 온전한 바가 있는 것이다. 오직 즐거움이 온전한 바가 있은 연후에라야 능히 마음 내키는 대로 하면서 여유있게 거닐 수가 있는 것이니 소요라는 것은 곧 여유 있게 거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옛날에 장주(莊周)가 능히 여유 있게 자적하였으니 대붕(大鵬)으로 그 큰 것을 비유하고, 박새로 그 작은 것을 비유하고, 일찍 죽는 것은 아침에 나는 버섯 같은 것이 있고, 오래 사는 것은 대춘(大椿)이란 나무가 있으니, 모두 하늘의 이치를 터득하여 작고 크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이치에 자적한 것이다. 요·순·우·탕왕의 천하에 대해서와 공자·맹자·정자·주자의 도학에 대해서와 굴원(屈原). 가의(賈誼) 충분과 한유(韓愈) 종원(宗元) 문장은 모두 스스로 그에 맞는 도리에 여유 있게 자적하면서 다른 것을 사모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위 글은 윤계선이 소요각을 짓고 기문을 청했을 때 써준 글이다. 기문에 의하면 '소요'는 속에 터득한 바가 있어 외물(外物)을 사모함이 없고, 오직 즐거움이 온전한 바가 있을 때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장주는 작고 크고,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小大壽千>이고 요. 순·우·탕왕은 천하에, 공자·맹자·정자·주자는 도학(道學)에, 굴원과 가의는 충분(忠憤)에, 한유와 유종원은 문장(文章)에 자적하여서 다른 것을 사모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윤이술(尹而述) 또한 문장으로 간쟁(諫諍)으로 정치로 소요 자적한 것이니, 귀천과 영욕 · 득실·진퇴에 소요 자적하였다고 하였다. 이술이 소요각을 거닐 때 부유(蜉蝣)처럼 구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미치광이처럼 좋아하면서 떠날 줄을 알지 못하여, 득실을 같이 보고 화복을 잊으면서 천지 사이에 다시 무슨 즐거움이 이것을 대신하는지 알지 못하니, 이술은 소요에 대하여 다 터득하였다고 말할 만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 기문의 앞부분에는, 윤이술이 꼭 자신의 붓을 빌어 기문을 쓰게 한 것은, "내가 세상 밖에 거닐면서 소요하는 즐거움에 터득한 것이 있어 이를 발휘하게 하려함이 아닌가 싶었다." 라고 하여, 임회 스스로 '소요의 즐거움을 터득한 사람이라 자평하였다. 그래서일까, 임회는 <초추독음初秋獨吟>에서 자신의 험난한 유배생활을 사마천의 장유壯遊에 빗대어 얘기하는 호기(豪氣)도 보인다. 그리하여 임회의 고결한 시격과 호방한 문장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쇄연(灑然)하게 한다.
매헌공의 학문과 정신세계가 스승 임회선생의 정신을 오롯이 이어 받았음을 볼 수 있다. 형의 공신 후광으로 울주에서 권세와 부귀를 누릴 수 있음에도 어린 시절 임란의 고초를 겪으면서도 나주로 배움을 청하고 도학(道學)을 익혀 매헌정사를 지어 자녀와 후학을 양성하고 수신(修身)과 출처(出處)의 선비정신의 절의(節義)를 지킬 수 있었던 것 은 스승과 만남의 인연이었다고 본다.
4) 관해임공(觀海林公)의 시운
임공이 양산에 유배 생활을 하면서 남긴 시를 소개한다.
-. 시운1
스님은 내가 산 보는 것을 좋아함을 알아 해 저문 승방에서 문을 닫지 않네. 사면에 저녁노을 모두 가려졌는데 동쪽에 다만 작은 봉우리만 있네.
山儈知我好看山, 四面烟嵐渾蔽盡,
日暮山齋不掩關. 東邊只有小峰巒
용당 뒤 바위 위에 저물녘에 앉아
龍堂後巖上暮坐
먼 변방에서 가을을 슬퍼함에 혼이 끊어질 듯한데
강촌은 다행히도 고향 마을과도 같네.
삼차산의 저문 기운 하늘 끝에서 오고
일곱 점의 뜬 구름 바다와 막혀 있네.
나루터에 소리 나니 어시장 흩어지고
객선엔 달이 없어 밤에 등불 번득이네.
부질없이 밤중에 북극성 바라보니
늙은 이 몸 어느 때 성은에 보답할까.
絶塞悲秋獨斷魂, 江村猶幸似鄉園
三叉暮色來天末, 七點浮雲隔海門
官渡有聲魚市散, 旅船無月夜燈翻
北辰空費中宵望, 老矣何時答聖恩.
-. 시운2
소암이 영남에 와서
여러 사람과 함께 지은 시가 있어 그 시에 차운하다
疎菴來嶺南,與諸公酬唱有作,乃次其韻
막다른 길에서 친구의 마음을 볼 수 있으니
영남의 바다 산천 속에 찾는 시간을 허비했네.
천리 밖에서 정겹게 만나니 새로운 친분이요
십 년 동안 머리는 옛 책 속에서 희어졌네.
북두성 사이에 자기가 비치니 칼이 묻힘을 알았고
솥 안에 단사는 금으로 화하지 않았네.
하늘가에서 만나는 일 두 번 하기 어려우니
봄밤은 침침한데 술을 주고받는 일 싫어하지 말게.
途窮因見故人心, 嶺海山川費獨尋
千里眼青新道契, 十年頭白舊書林
斗間紫氣元知劍, 鼎裏丹砂未化金
簪盍天涯難再得, 莫嫌春的夜沈沈.
-. 시운3
임시 거처에서 홀로 앉아
僑居獨坐
번거로운 별도 성기어 있고 밤에 외로이 앉았으니
작은 달 강에 잠기고 기러기 물가에 우네.
어둠 속에 작은 등불 반벽에 밝고
시들하게 병들어 가는 잎 앞뜰에서 소리 나네.
거울 앞에 머리가 희어짐을 스스로 슬퍼하고
사람을 만나 푸른 눈으로 대하려 하지 못했네.
북쪽의 거듭된 구름천리나 막혔으니
쫓겨난 신하의 심사를 뉘를 빌려 들려줄까.
繁星牢落夜亭亭, 缺月沈江雁叫汀
翳翳殘燈明半壁, 蕭蕭病葉響前庭
自悲臨鏡頭全白, 未擬逢人眼更青
直北重雲千里隔, 逐臣心事亻靑 誰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