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29 앙코르와트 사원 앞 다리에서
45도를 오르내리는 날씨. 생각만해도 아찔. 오전일찍 준비하여
앙코르와트를 구경하기로 하였다.
앙코르와트. 다녀온 사람마다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가봐야한다던 곳.
오토바이 택시인 톡톡이를 2인씩 타고 이동하였다.
베트남에서 탔던 씨클로는 자전거였으므로 속도감이 없었는데
이 톡톡이는 오토바이였다.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울창한 아침
숲길 사이를 씽씽 달렸다. 시원하고 맑은 바람이 느껴졌다.
원숭이도 만나고 코끼리도 만났다. 다만 출발할 때에 엔진이
돌아가면서 뿜어내는 매연이 바로 뒷자리 우리에게로 날아와
매쾌하게 만들기는 했다.
앙코르와트로 들어가기 전에 입구에서 '번쩍' 사진을 찍었다.
잠시 뒤 입장권에 내 사진이 인쇄되어 나왔는데 목에 걸고 다니라나.
입장권을 유적지마다 확인하였다.혹 분실하게 되면 벌금 40달러에
입장료 20달러 더 내야한다나.
앙코르와트
12세기초 크메르제국의 수르야바르만 2세에 의해 37년간 건립.
30km 떨어진 돌산에서 돌을 운반해다가 지었다는데 현재의
신기술로도 100년은 걸릴거란다.그 옛날 그들은 어떤 기술로 이
돌들을 옮겨왔으며 이 거대한 석축물을 건설했다는 말인가.
라오스의 참파군에 희해 함락되어 지배받다가 12세기 말
자야바르만 7세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다.1850년 프랑스의
한 신부에 의해서 발견되어 세상에 공개되었단다.
길이 3.6km의 직사각형 해자에 둘러싸여 있으며 이 해자를 건너려면
250m의 사암다리를 건너야한다. 이 다리는 왕만 건널 수 있었단다.
가이드는 덧붙였다.'왕처럼 건너가세요' 서민들은 배로 해자를
건넜거든요. 왕처럼이라고?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고 위엄을 갖추고
무게있게 천천히. 그렇지만 아무나 왕이 되는가. 1초정도는 왕이 되었을지
모르나 곧 왕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우리는 깔깔거리며 촐랑거리며
그 다리를 건넜다.
앙코르와트 지붕 다섯개가 보이고, 그 다섯개의 지붕이
고스란히 반영된 연못가에서 사진을 찍었다. 정해진 카메라맨이 따라
다니면서 사진을 찍어주었는데, 뽀샤시 처리를 어찌나 잘해주었는지
폭보다 길이를 어찌나 늘려놓았는지 풍경도 풍경이려니와 십년은
젊고 늘씬한 내가 나왔다.
앙코르 와트 벽면을 따라 많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조각이 세밀하고
아름다웠으며 이야기로 채워져있었다. 특히 가이드는' 마하바라타' 라는
서사시를 꽤 길게 낭송해주었다. 삭막한 돌무더기 사이에서 울려퍼지는
서사시는 인상적이었다. 사암에 새겨진 사람들이 하나 둘 살아나오는 듯 했다.
관광객들이 하도 그 부조들을 만져서 훼손당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줄을
쳐 놓았을 뿐만 아니라 한번 만지면 벌금 30달러를 내야한단다. 나는 사실
농담으로 들었지만 줄을 쳐놓은 저쪽에 한 남자가 뚫어져라 감시를 하고는
있었다.
앙코르와트의 가파른 신전에 올랐다.신전이라 민소매 반바지 모자는
착용을 금한단다. 처음에는 가파른 신전을 맨몸으로 올라다니다가
떨어져 죽은 사람들이 많았단다. 신에 이르는 길이 아닌가.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목숨보다 중요했을 것이다.
앙코르톰
12세기 자야바르만 7세가 만든 곳으로 '거대한 도시'라는 의미.
크메르시대 최고의 도읍지로 앙코르 유적 중 유일한 불교 건축물이다.
9제곱킬로미터의 면적을 차지하며 앙코르 톰의 중심에는 자야바르만의
상이 있는 바이욘 사원이 있다.
바이욘의 미소라고도 불린다. 크기와 형태가 다른 20만개의 바위들을 블록
맞추기식으로 하나씩 끼워맞춰 대략의 형상을 만든 후 거기에 얼굴을
새기고 신화와 업적을 새겨 넣었단다. 부조의 숫자만도 11,000여개
관세음보살상에 자신의 미소를 집어넣어 참족과의 승리와 국가 번영의
업적을 나타내고 싶어했던 자야바르만 7세는 여기에 쏟아부은 엄청난
재정난으로 후세 왕들은 몰락의 길을 가게 되었단다.
여기봐도 얼굴 저기봐도 얼굴, 뱅뱅 돌아도 얼굴. 처음 신기하게
마주하던 얼굴은 무덤덤해졌고 더위에 지친 우리는 자꾸 그늘진 곳에
앉았다. 우리는 별 사진을 남기지 못했는데 둘째언니가 사진 한장을
제대로 남겼다. 비이욘의 얼굴과 언니의 얼굴을 대각선으로 나란히
사진에 넣어 찍은 것인데 둘이 닮아있었다. 칠십평생 나보다 남을 위해
살아온 둘째언니 마음이 부처 아닌가.
타프롬
자야바르만 7세가 앙코르톰을 만들기 전에 모친을 위해 건립한 불교사원.
거대한 나무가 사원을 감싸고 있는데, 폐허가 된 사원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과 하나된 모습을 보여준다. 스펑나무(벵골 보리수)라는
나무인데 강인한 뿌리의 생명력에 아! 입을 벌릴 수 밖에. 땅에 닿아야
뿌리는 죽지 않는 법인데, 이 나무의 뿌리는 허공에서도 땅을 향해 잘
자라고 있었다. 언젠가는 땅에 닿을 것이라는 나무의 희망, 그 희망을
가난한 캄보디아인들이 배우기를 기도했다. 언젠가는 잘 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 말이다. 닭들까지도 비쩍 말라있는 그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말이다.
어머니를 위해 만든 보석방도 있었다.삼층 건물 높이의 방에 수많은 구멍을
만들어 보석을 넣어두었다는데 햇살이 비춰들면 보석들의 반짝거림으로
휘황찬란하였을거란다. 상상해보라. 전쟁으로 지금은 단 한개도 남지 않았지만.
덥다 더웠다. 한 군데 구경을 하고 나오면 얼음에 저장되었을 듯한 시원한
물이 톡톡이에 준비되어 있었다. 중간에 쉬는 장소에서 가이드는 파인애플
바(파인애플을 먹기 좋게 깎아 막대기에 끼웠다) 하나씩을 선물했다.
이곳에서 이보다 좋은 선물이 있을까. 배려를 받는다는 이 느낌. 좋다.
이번 가이드는 꽤나 감성적으로 다가왔다. 경험담도 들려주었다.
한 캄보디아 소녀가 제 물건을 사달라고 떼를 쓰다시피 졸랐던 모양이었다.
'네 이름을 쓸 줄 안다면 사주겠다고 했다는데' 그리고는 잊고 있었는데.
어느날 관광객들과 이동 중에 그 소녀가 저 멀리에서부터 달려왔단다.
아주 기쁜 얼굴로. 그리고는 땅바닥에 제 이름을 또박또박 썼단다.
그렇게 맺어진 인연으로 꽤나 친한 사이로 지냈는데 어느날부터 보이지
않아 알아봤더니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환경이 지저분한데다가
먹는것도 부실하여 병에 잘 걸릴뿐만 아니라 치료제나 약이 없어 어린이들이
죽는 경우가 허다한 것을 알았단다.
그 이후로 그는 관광객들이 한국에서 가져온 비상약이나 아니면 호텔에
비치되어있지만 사용하지 않은 치솔이나 비누 등등을 모아서 캄보디아
아이들을 돕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도움을 주고 싶어하지
않는 이 또 누구일까.
무엇을 하며 살아가느냐보다 어떻게 살아가느냐를 생각하게 하는 가이드였다.
관광객들을 상대로 몇군데 상점을 돌며 영업행위를 하면서도 절대로 관광객들
기분을 거스르지 않고 일을 진행시키는 그 힘, 그러면서도 팔 것은 제대로 다 파는 능력,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결과도 중요하지만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지
않는가. 사람은 정말 작고 보잘것 없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좋아하는
습성이 있다. 반면에 치사하리만치 작은 것에 마음을 닫기도 한다.
풍성하고 싱싱한 야채와 주물럭돼지불고기로 점심을 먹었다. 농약이나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다니 청정 먹거리였다. 시들었던 몸이 살아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