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서울지하철1호선 건설지
지난번 수도권전철의 동일한 가공전차선 방식에서의 전류 전쟁에 이어 이번에는 통행방향을 둘러싼 논쟁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짤방은 지난번 전압 논쟁에 이은 두번째 논쟁으로 바로 일본의 영향으로 부설되었고 철도와 직결운행하는 이상 좌측통행을 따라야 하는 철도측의 대립과 종로선 공사가 착수되기전 철거된 서울전차 계승에 도로통행방식에 젖어있는 시민들의 관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서울시의 대립과 그 부분에 대한 결정 사항입니다.
수도권전철 계획 당시 철도의 좌측통행 vs 도로의 우측통행이 있었고 결국 지하철 종로선 한정으로 철도의 좌측통행으로 결정되고 이후 서울시에서 자체 추진하는 노선만 우측통행을 따른다는건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관련 기록이나 이후 상황을 보면 그런 일이 있었다고만 넘겨짚기에는 의미심장한 부분이 있는데 여차하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뻔했던, 즉 철도청의 수도권 관내 직류전철화 수용 반대급부로 서울지하철의 좌측통행 채택 가능성입니다. 지난번 수도권 관내의 직류전철화 수용 결과처럼 어쩌면 수도권전철이 현재와는 약간 다른 모습이 될 뻔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우후죽순으로 등장한 전국의 지하철망도 지금과는 꽤 달라졌을... 아니 어쩌면 수도권 관내의 직류전철화 수용보다 더한 파급력이 내포되었을겁니다.
철거된 서울전차 계승 논리를 살펴보면 근본적으로 궤도사업, 즉 노면전차의 일환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도시철도법과 관련 시행령, 행정규칙 정비덕에 규정의 빈틈이 많이 줄었지만, 그 이전에는 지하철건설촉진법 등, 나머지는 노면전차를 관할하던 궤도운송법, 과거의 삭도궤도법의 주요 항목을 인용한 잡탕 그 자체였습니다.
사업단계부터 교통부나 철도청의 사업에서 출발하였다가 서울시 지하철로서 추진된 우여곡절의 연속 그 자체였던데다 이후 사업은 서울시가 궤도사업의 연장으로서 보고 추진했던 결과물이었습니다. 각종 규칙 역시 거기에서 기인했을 것이고 1968년 폐지된 서울전차가 지하철의 근간이 되는 사업이라는 논리도 여기서 출발한 셈입니다. 유럽대륙 주요도시의 지하철 노선체계가 영국, 일본과 중화권과는 달리 노선번호식인 것은 노면전차 계통에서 유래했거나 시스템 규모와 차량한계가 당시의 노면전차 혹은 버스와 다르지 않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궤도는 도로에 부속된 시설물이기에 궤도의 우측통행은 법으로 못박을 필요까지 없었을 정도로 상식이었습니다. 당시 1962년 제정 도로교통법의 제3장을 보면 '차마 및 궤도차의 통행방법'으로 규정되어있고, 해당 법조문의 11조 제3항에 차마의 우측통행이 규정되어 있었습니다. 노면교통에서 자동차는 확실히 우측통행이 자리 잡혔던 셈입니다.
신설동에 굳이 꽈배기굴을 넣고 이후 궤도법으로서 우측통행을 하도록 했던 이유도 여기서 드러나는데, 작업자나 이용객이 도로와 일치되는 방향감각 유지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상 이런 조건에서는 도로교통과 방향 일치를 해 두는 게 무조건 나쁜 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여기서 서울시가 그 논리를 주장하기 앞서 검토해야 할 사항을 간과한채 무리하게 밀어붙였다는 비판의 소지가 다분한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당시의 보도 통행 문화, 계획하고 있던 시스템의 규모와 궤도법의 괴리, 즉 이미 시스템의 규모를 법령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는데 있습니다.
의외로 보도 통행에 관해서는 딱히 규정이 없었으며 아직도 일제강점기의 잔영으로 우측보행은 커녕 좌측보행이 배어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심지어 경로의존성이라 하여 이런 분위기는 90년대까지 이어지다시피 한, 즉 본격적인 우측보행 장려는 2000년대 들어서야 시작되었던게 현재의 보도 통행이라 이미 여기서 서울시의 '도로통행 방식에 젖어있는 시민들의 관성'론은 이미 설득력을 잃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 회원분들 가운데 적어도 30대 이상이신 분들이라면 무려 그 시절의 국민학교에서부터 이런 풍경이 자행되었음을 기억하실겁니다 "복도 좌측통행 한 줄!! 거기 xx 선도부실로 와!!".
더 큰 문제는 기존철도와 직결운행이 확정된 이상 차량한계 하부나 상부 동일한 것만 다를 뿐 일반철도 그 자체, 즉 사실상 시스템 규모대비 궤도법으로는 처음부터 한계가 명확했다는데 있습니다. 특히 처음에 철도법을 적용받지 않는 시설로 지었다가 이후 관련 안전규정에서 철도법을 인용한 것부터 사실상 당시 궤도법만으로는 서울지하철의 규모와 시스템을 포괄하는데 한계가 명확했음을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여기에 전술한 신설동에 꽈배기굴을 넣은 것은 당시 예산 문제로 우여곡절끝에 착공했던 상황을 감안할때 가장 큰 논란이 되었을 겁니다.
이쯤되면 서울시도 어차피 궤도마저도 역사속으로 사라진 이상 궤도법부터 유명무실한데다 시스템의 규모는 일반철도에 가깝기에 처음부터 지하철의 우측통행을 고집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이 사업의 최종책임자였던 양택식 시장부터 철도청장을 지낸 이상 "우측통행을 고집할 필요까지는..."이었던 분위기였을 것이고 이미 운영주체가 국가가 아닌 지자체인 것만 다를뿐 시스템 규모는 일반철도와 대동소이한 그 자체라는 판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만 지하철의 우측통행론으로 기운건 당시 기록에서도 뚜렷이 알 길은 없습니다만 종로선 개업 당일 광복절 기념식 테러사건에 따른 인책사임, 후임으로 구자춘 시장의 부임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특히 종로선의 차량기지였던 군자차량사업소 조성과 논란의 신설동역 꽈배기굴은 지하철 개업 직후애 착수된 점을 감안할때 바로 후술할 구자춘의 성향이 큰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여기에 故 손정목 교수 등 당시 서울시의 마스터플랜에 참여했던 핵심 인물들의 증언에 따르면 구자춘의 교통정책은 전임이었던 양택식 보다는 김현옥에 가까웠는데, 김현옥은 대중교통망의 확충보다 청계고가와 금화터널 등 도로망 확충에 더 관심이 있었던 전례를 볼때 지하철의 좌측통행론이 힘을 잃은 건 이와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추론입니다만 양택식의 자진사퇴도 전술한 광복절 기념식 테러사건은 표면적인 이유고 다른 이유가 있었던, 즉 광주대단지 사건의 경과와 수습과정으로 몇몇 정부 실세들의 눈밖에 난 상황에서 지하철의 좌측통행론이 기름을 부어버렸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지 않나 싶은...
4호선과 과천선 사이에 있는 꽈배기굴이 별게 아닌 거 같지만 운전 측면에서는 차량의 운전대를 중앙에 배치해야 하며, 승객안내 측면에서도 진행방향 출입문 열림 안내 등의 투자와 노력이 따라야 합니다. 특히 철도신호기나 각종 표지판의 설치위치 특성상 운전대가 중앙에 배치되는건 운전사의 각종 신호확인 동작에 변화가 가해지는 요인이며, 지난번에 설명한 절연구간에 꽈배기굴의 급구배 돌파 등이 가세하면 운전측면에서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철도 현업에 계시거나 철도차량 운전쪽 지망하시는 분들이라면 아시겠지만 2종 전기차 운전 시험이 4호선에서 실시되는 것도 다 이런 요인 때문입니다.
지난번 수도권 관내의 직류전철화 가설에 대한 내용을 쓸때도 느낀거지만 이후 4호선과 과천.안산선의 직결운행으로 2라운드에 접어든 해묵은 논쟁과 관련 사고로 인한 혼란, 현재도 9호선과 공항철도의 직결운행 부담 문제와 종로선 교류화 논란 등을 생각하면 한번쯤은 곱씹어볼 내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지금에 와서 옛날이야기를 하는건 그렇습니다만 2기 지하철 개업당시 반쪽에 그치는 지하철네트워크라는 오명, 특히 요즘 또다시 화두가 되고 있는 광역버스 입석금지 문제 등을 생각할때마다 뭔가 묵직한 느낌마저 든다면...
첫댓글 저는 좌측통행으로 배우다가 아마 초등학교 고학년 되니 우측통행으로 바뀌어 배운 세대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