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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T.W*가이아의창 스크랩 과학사
(상산고)김민철 추천 0 조회 95 07.02.21 15:2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꿈과 발명, 발견

여러분들은 꿈에서 미래를 예견하거나, 무언가 암시를 받았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을 것이다. (자신이 직접 체험했을 수도 있고...) 시중에 꿈을 풀이하는 해몽 책도 많이 나와 있을 정도이니, 꿈이 인간의 미래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거나, 그것을 반영한다는 것이 상당히 사실일 수도 있을 것이다.

발명, 발견의 역사에서도 물론 이러한 예가 있다. 그 중에서 유기화학자 케쿨레(Kekule)와 재봉틀의 발명자 하우(Howe)의 두 경우만 보기로 하겠다.

화학자 케쿨레는 1829년 독일에서 태어나, 동향의 스승 리비히(Liebig)와 함께 유기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에서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는 여러 유기물들을 탄소(C)원자와 수소(H)원자 등의 사슬 결합구조로 설명하는 이론 체계를 세워 나아갔다. (우리는 고등학교 화학책 마지막 장에서, 알칸족이니, 알켄족이니, 알킨족이니 나눠 가면서 유기화합물들을 지겹게 외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모두 그가 확립한 이론이다.)

그는 많은 유기물들의 사슬 결합구조를 대부분 밝혀 냈으나, 딱 한가지 풀리지 않는 종류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벤젠(C6H6)이었다. 벤젠이 탄소 6개와 수소 6개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아무리 이중결합, 삼중결합까지 고려하여도 결합구조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골치를 썩이던 그는 어느 날 깜빡 졸다가 꿈을 꾸었는데, 뱀들이 눈앞에서 춤을 추는 꿈이었다. 그러다가 뱀들은 뒤의 것이 앞의 것의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 지더니 드디어 맨 앞의 뱀이 맨 뒤 뱀의 꼬리를 물고 전체적으로 원의 모습을 그리면서 빙빙 돌았다.

"바로 이거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무릎을 친 후, 벤젠의 구조를 육각형으로 그린 후, 각 모서리에 탄소원자가 있고, 거기에 수소원자가 하나씩 연결되어 있는 구조도를 완성시켰다. 그는 또한 벤젠(Benzene) 과 같이 육각형의 고리구조를 갖는 유기물들은 향기를 낸다는 사실도 알아내고, 이같은 종류의 화합물을 "방향족(芳香族)"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케쿨레가 거북 등의 육각형 무늬를 보고서 힌트를 얻었다고도 하는데, 이 꿈의 이야기가 더 잘 알려져 있다.)

하우(E.Howe)는 1819년 미국 태생의 기계기술자로서, 일찍부터 재봉틀의 발명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자동으로 바느질을 하기 위한 핵심 요소인, 바늘의 모양을 이것저것 시도해 보았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중 잠이 들었고 다음과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꿈에서 그는 아프리카 어딘가를 갔는데, 그만 원주민들에게 잡혀가게 되었다. 토인의 추장은 그에게 며칠 안으로 재봉틀을 만들어 오라고 명령하였고, 만일 그때까지 못하면 죽는다고 말했다. (다행히도 "과일을 아무거나 10개 따와서 항문에 집어넣으라는" 명령은 아니었지만....) 그는 꿈속에서도 고심했으나, 역시 제대로 안되었다. 약속 날짜가 지나자, 토인들에게 끌려가서 처형당하게 되었다. 묶여있는 그에게 한 토인이 창을 들이댔는데, 이상하게도 그 창의 머리끝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잠에서 깨어난 후, 이상한 꿈을 생각하면서 비로소 아이디어를 얻었다. (오늘날의 재봉틀이 그렇듯이) 바로 재봉바늘의 머리끝에 바늘구멍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하여 그는 실용적인 재봉틀을 발명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아이디어를 그가 최초로 고안해 낸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 조금 앞서, 영국의 시모니도 이미 그와 비슷한 재봉틀을 고안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는 기술자간의 교류가 없었고, 시모니는 자신의 재봉틀을 비밀리에 혼자서만 썼으므로, 하우는 꿈을 통해서 비로소 자신의 재봉틀을 발명할 수 있었다.)

이왕 재봉틀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것에 관련된 역사도 잠깐 살펴보면, 당시는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중인 시기였고, 또한 기계의 출현으로 생계에 불안을 느낀 숙련노동자들의 반발도 거세었다. (이른바 "기계파괴운동"으로, 영국의 러다이트 폭동은 그중 유명하다.) 앞에서 언급한 영국의 시모니도 자신이 발명한 재봉틀을 수년간 비밀리에 혼자서만 사용하였다. 그러다가, 결국은 노동자들에게 알려 져서, 그의 재봉틀은 순식간에 박살났고, 집은 성난 노동자들에 의해 불태워 지고 말았다.

하우 역시 불운이 그를 따라 다녔다. 우리 속담에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인이 먹는다." 고 했듯이, 하우는 자신의 발명품을 사업화 하려고 무척 애썼으나, 자금부족, 시장개척의 어려움, 숙련노동자들의 반발 등으로 인하여 쉽게 되지 않았다. 그는 한번은 시장개척을 위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그는 어릴 적부터 한쪽다리를 절었다.) 영국에 갔다 왔는데, 와서 보니 싱거(I.M. Singer)가 자신의 재봉틀 기술을 도용하여, 미국에서 재봉틀을 대량생산하여 판매하고 있었다. 물론 싱거는 하우의 재봉틀을 개량하여 자신의 특허도 덧붙이기는 했지만, 그는 발명가라기보다는, 사업가로서의 수완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부품의 표준확립, 대량생산체계 등을 세웠고, "각 가정에 재봉틀 한대씩을!" 이라는 슬로건 아래 월부판매제도 등으로 재봉틀 보급을 크게 늘렸다.

한편, 하우는 싱거를 상대로 특허침해소송을 내었고, 결국은 승소하여 상당액을 배상 받기도 했으나, 이미 싱거의 회사는 크게 성장해서 엄청난 돈을 벌고 있었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회사는 최근까지, 세계적인 재봉틀 회사로 이어져 왔으며, 가정에서 재봉틀이 많이 쓰이던 시절 우리 나라에도 많이 들어 왔었다.) 또한, 마음씨 착한 하우는 자신의 불우했던 시절을 생각해서, 배상 받은 돈의 상당액을 자선기금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2. 플라스틱의 역사(1) - 상아를 대신할 물건

오늘날, 플라스틱은 일반 가정의 일상생활이나 여러 방면의 공업적 용도 등, 쓰이지 않는 분야가 거의 없다. 철기문명시대를 넘어서 이제는 "플라스틱 문명시대"가 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이다. 영어 "플라스틱"(plastic)의 원래의 뜻은 "모양을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즉, 가소성을 지닌다는 의미이다. 플라스틱의 이러한 성질을 이용하여 다양한 물건들을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플라스틱은 어느 한 종류의 물질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플라스틱으로 합성되는 물질의 종류는 엄청나게 많고 다양하며, 오늘날 화학공업의 발전과 더불어 온갖 새로운 특성과 기능을 지니는 플라스틱들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플라스틱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누구이며, 최초의 플라스틱은 어떤 종류의 물질로부터 만들었을까? 오늘날의 플라스틱과는 좀 다르지만, 플라스틱의 시초는 상아의 대용품을 찾는 과정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상아와 플라스틱은 성질도 다르고, 그다지 긴밀한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뜻밖에도 상아 당구공을 대신할 물건을 만드는 일이 최초 플라스틱 개발의 단초를 제공했던 것이다.

요즈음 웬만한 거리마다 당구장을 찾기가 어렵지 않을 정도로 당구는 대중화된 오락인데, 19세기 중반 미국 상류사회에서도 당구가 크게 유행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당구공을 만드는 재료로 아프리카 코끼리의 상아가 쓰였다. 오늘날에도 여러 야생동물들의 수가 급감하여 자주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듯이, 당시에도 아프리카 코끼리가 점점 줄어들게 되자 미국은 상아의 수입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원자재의 확보에 비상이 걸린 당구공 제조회사 중 하나가 급기야 거액의 상금을 내걸고 당구공을 만들 상아의 대용품을 찾기에 이르렀다.

하이아트(John Wesley Hyatt; 1837-1920)는 뉴욕주 스타키 출생으로, 16세때부터 인쇄공으로 일했는데, 손재주가 좋아서 몇 가지 발명을 한 일도 있었다. 1863 년, 뉴욕의 거리에 나붙은 현상 광고를 청년 하이아트는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거기에는 "당구공으로 쓸 상아의 대용품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1만 달러의 상금을 주겠다."고 써 있었던 것이다. 하이아트는 현상모집에 응하기로 결심하고, 여러 재료들을 모아서 개발에 착수하였다. 그는 나무가루, 헝겊, 펄프 등을 아교풀, 녹말, 셀락, 콜로디온 등과 혼합하여 반죽해 보는 등, 여러 가지로 실험해 보았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하이아트는 동생과 함께 상아 대용 당구공을 만드는 일에 몇 년 동안 매달린 결과, 드디어 비슷한 것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나무가루와 셀락을 혼합한 후, 그 것을 콜로디온으로 접착하는 방식이었다.

하이아트 형제는 이런 방법으로 당구공을 만들어내기는 하였으나, 콜로디온이 마른 후에는 오므라들어 버리는 등의 단점이 있었으므로, 상아의 성능에는 크게 못 미친다고 여겨졌기 때문인지 현상금의 일부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이아트는 다시 이러한 단점을 없애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는데, 콜로디온 속에 있는 니트로셀룰로오스 성분을 녹이는 물질을 섞으면 콜로디온이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다시 여러 가지 약품으로 실험을 계속한 결과, 당시 신경통, 타박상 등에 바르는 약으로 쓰이던 캠퍼정기가 바로 거기에 좋은 물질이라는 사실도 밝혀 내었다. 캠퍼정기란 장뇌를 알코올에 녹인 것이었으므로, 니트로셀룰로오스와 장뇌를 알코올에 혼합하여 가열한 결과, 1869년에 인류 최초의 플라스틱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이아트는 자신이 만든 새로운 물질의 이름을 "셀룰로이드"라고 지은 후, 동생과 함께 회사를 차리고 미국 특허도 취득하였다.

하이아트 형제가 생산한 셀룰로이드는 니트로셀룰로오스 성분으로 인하여 폭발성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화학적으로 니트로기가 세 개 붙어 있으면 폭발성이 있다. 니트로글리세린은 다이너마이트의 원료이고, 트리니트로톨루엔, 즉 TNT 는 지금도 많이 쓰이는 폭약이다.) 당구공으로는 그다지 좋은 반응을 얻지 못하였으나, 다른 용도로 많이 쓰이게 되었다. 하이아트의 회사는 셀룰로이드 틀니를 만들어서 판매했고, 셀룰로이드는 남성용 와이셔츠의 소매, 칼라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또한 오늘날의 플라스틱 제품들처럼, 단추, 만년필, 주사위, 크고 작은 상자 등 여러 가지 물건들을 만드는 재료로 널리 쓰였다. 하이아트는 화학공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적으로 1914년 퍼킨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상아를 대신할 당구공 재료를 찾으려던 노력이 플라스틱 시대를 여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된 것이며, 하이아트 형제가 발명한 셀룰로이드는 오늘날 우리 생활의 온갖 분야에서 쓰이는 "플라스틱의 할아버지"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에 이용되는 셀룰로이드는 불타기 쉬운 니트로기 대신에 아세틸기가 붙은 아세틸셀룰로이드가 주종을 이룬다.


3. "플라스틱의 역사(2)"

플라스틱의 원조라고 할 만한 셀룰로이드는, 미국의 하이아트가 상아당구공을 대신할 물건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발명된 것임은 전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러나, 하이아트 이전에도 물론 비슷한 것을 만들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독일의 화학자 쇤바인(Christian Friedrich Schonbein; 1799-1868)은 슈바벤의 메칭겐 출생으로, 대학에서 물리와 화학을 공부한 사람이었다. 셀룰로이드의 원료가 되는 니트로셀룰로오스, 즉 질산섬유소는 쇤바인이 1845년에 합성에 성공하였는데, 그는 파크스라는 영국인으로부터 이것의 견본을 부쳐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되었다.

영국 버밍엄 출생의 야금학자이자 고무제조기사였던 파크스(Alexander Parkes; 1813-1890)는 질산섬유소라는 물질의 중요성을 일찍 깨닫고서, 쇤바인으로부터 견본을 받게 되자 이것을 응용하는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질산섬유소로부터 콜로디온을 만들었고, 콜로디온을 금속 틀에 붓고 속에 남아 있는 에테르와 알코올 성분을 증발시키면 원하는 모양대로 단단하고 탄력성 있는 신물질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이 물질에 자신의 이름을 따서 "파크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1862년에 열린 만국 박람회에 파크신으로 여러 물건을 만들어 출품하였으나, 콜로디온을 증발시킬 때에 본래 모양보다 크기가 줄어드는 결점이 있었다. 파크스는 장뇌를 쓰면 이러한 결점을 방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것을 이용하여 연구한 결과 셀룰로이드의 제조법을 발명하게 되었다. 즉, 하이아트보다도 더 먼저 셀룰로이드의 제법을 알아낸 것이다. 하이아트가 이 사실을 진작 알았더라면 상아 대용의 셀룰로이드를 개발하는 데에 훨씬 수월했을지도 모르나, 하이아트는 전혀 모르고 후에 독자적으로 셀룰로이드를 발명했던 것이다. 파크스는 그 후 회사를 설립하여 자신이 만든 셀룰로이드 - 파크신 제품의 판매에 나섰으나 파크스의 회사는 몇 년 후 파산하고 말았다.

하이아트에 의해 실용화에 성공한 셀룰로이드 다음 세대의 플라스틱으로는, 페놀수지인 베이클라이트(bakelite)가 있다. 베이클라이트는 역시 이름이 비슷한 베이클랜드라는 화학자에 의해서 발명되었는데, 그는 전기절연체로 적합한 물질을 찾던 중 베이쿨라이트를 개발하게 되었다.

벨기에 태생의 미국 화학자 베이클랜드(Leo Hendrik Baekeland; 1863-1944)는 당시 번창하기 시작하던 전기공업의 미래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전기공업에 필요한 물질들을 연구 개발하는 일이 무척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베이클랜드는 전기분해에 쓰이는 용기를 개량하는 한편, 새로운 절연체를 개발하는 데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당시 절연체로 천연수지인 셀락 등이 쓰였으나, 고압의 전기에 이용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베이쿨랜드는 관련 자료를 찾던 중, 1872년에 독일의 유기화학자 바이어(J. F. W. Adolf Baeyer; 1835-1917)가 페놀과 포르말린을 혼합한 것에 산을 가하여 셸락과 비슷한 수지물질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 물질은 절연체로서 우수한 성질을 지니고 있었지만, 열에 너무 강하고 견고해서 가공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베이쿨랜드는 연구를 계속한 결과, 페놀과 포르말린이 너무 빨리 결합해버리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산 대신 알칼리를 써서 두 물질 을 결합시켜 보기로 하였다. 결과는 예상대로 성공이었고, 이렇게 해서 최초의 합성 고분자인 페놀수지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새로운 플라스틱인 페놀수지는 열 경화성 수지로서, 전기절연체로 매우 우수한 성능을 지니고 있었고, 발명자의 이름을 따서 "베이클라이트"라 불리게 되었다. 베이클랜드는 1910년 제너럴 베이클라이트 회사를 설립하여 새로운 플라스틱의 실용화에 힘썼고, 베이클라이트는 전기용 절연물질 뿐 아니라, 다른 용도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

베이클랜드는 고분자에 관한 연구를 계속하여 그들의 구조, 물성 등을 예측하여 적중시켰고 미국 화학회장과 칼럼비아 대학 명예교수를 역임하였다. 베이클라이트의 성공을 계기로, 화학자들은 다른 종류의 합성수지 개발에 뛰어 들게 되어, 1919년에 오스트리아의 화학자 폴럭은 페놀 대신 요소에 포르말린과 암모니아를 가해서 요소수지를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1939년에는 멜라민 수지가 나왔고, 2차대전 후에는 불포화폴리에스테르 수지, 에폭시 수지 등이 잇따라 선 보이게 되었다. 오늘날 플라스틱은 종류와 기능도 무척 다양하고, 인간생활의 구석구석에 쓰이지 않는 분야가 거의 없다고 할 것이다.

한편, 이처럼 편리한 플라스틱은 한편으로는 썩지 않는 성질 때문에 환경문제라는 골치 아픈 문제를 낳게 되었는데, 플라스틱의 재활용과 아울러, 친환경적인 새로운 플라스틱 물질을 개발하는 것이 커다란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4. "아마추어는 위대하다?"

"프로는 아름답다"... 몇 년 전엔가 꽤 인기를 끌었던 어느 광고의 카피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사에 있어서도 물론 "프로" 과학자, 기술자들의 기여가 컸던 것은 두말할 것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직업적인 과학기술자"로 보기에는 어려운 사람들이나, 혹은 다른 일을 생업으로 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매우 중요한 과학 기술상의 발전이 이루어졌던 경우도 매우 많다.

사실,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기술자처럼 전적으로 과학기술의 연구에만 의존해서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은 (시쳇말로 과학기술 연구로만 "밥 먹고 살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근대 과학혁명 초기에만 해도, 소수의 대학 교수들을 빼면, 많은 과학자들은 부자나 고위 귀족 출신으로, 생활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었다. 라브와지에, 캐번디쉬, 페르마 등도 여기에 포함되며, 어떻게 보면 그들이야말로 "애호가'"라는 본래 의미의 "아마추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산소의 발견자"인 프리스틀리도 성직자로서 과학의 연구에도 비교적 자유로운 형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아마추어의 일반적 의미인 다른 직업을 가진 "비전문가"로서, 도리어 직업적인 전문가보다도 더 훌륭한 업적을 남긴 사례들을 살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듯 싶다.

전화기의 발명자로 알려진 벨은 본래 음성학자이자 농아 교육에 힘쓴 교육자로서, 전기기술에는 아마추어였으나, 물리학을 전공하고 전기 분야의 "프로" 발명가로 일하던 그레이를 제치고 전화기의 특허 취득과 실용화에 성공하였다. 오늘날 자동차의 필수부품으로 쓰이는 "부드러운 바퀴", 즉 공기타이어를 발명 한 영국의 던롭은, 기계학이나 관련 기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수의사"가 원래 직업이었다. "천왕성"을 처음으로 발견한 허셸 남매는 오르간 연주자, 음악가로 생계를 이으면서 망원경의 제작과 천체관측에 힘을 기울인 결과 천문학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기게 되었다.

한편, 아마추어였기 때문에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유전법칙"의 발견자로 생물학사에 길이 남을 멘델 신부이다. 만약 멘델이 학회에서 유전법칙을 발표할 당시에, 과학분야에 관한 것이라곤 대리교사 경력이 전부인 카톨릭 신부가 아니라 저명한 대학교수나 생물학자였다면, 상황은 혹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무리 유전법칙이 당시 생물학의 주 관심분야가 아니었다고 해도, 그처럼 중요한 논문이 대다수 생물학자들에게 잊혀진 채 수십 년간 도서관 구석에 처박혀 사장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륙이동설"의 제창자 베게너도 비슷한 경우이다. 물론, 그는 탐험가이자 지구 과학자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주장을 펼칠 당시 왕립기상관측소에서 일하는 기상학자였지 지질학의 전문가로 인정받던 사람은 아니었다. 보수적인 대다수 정통 지질학자의 눈에는 "대륙이 움직인다."는 황당한 주장을 펴는 그가 "풋내기 아마추어 지질학자" 정도로 비쳤을 것임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근래의 가장 "위대했던 아마추어"로는 아인슈타인을 꼽아야 할 것 같다. 미국의 명문 프린스턴 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했던 현대 물리학의 대가 아인슈타인 박사가 어떻게 아마추어냐고 고개를 갸웃거릴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기존의 뉴튼 역학을 근본부터 뒤흔들고 물리학에 혁명을 일으킨 "상대성이론"을 발표할 당시 그는 스위스 특허청의 하급관리였다. 상대성이론과 같은 세기적 이론이 대학이나 저명 연구소가 아닌 스위스 특허청에서 나왔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아인슈타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진 후, 베른대학에서 그를 초빙하게 되어 스위스 특허청 일을 그만두자, 아인슈타인의 상관은 앞으로 뭐하면서 살아갈 거냐고 걱정스레 물었다고 한다. 그가 베른대학에서 강의하게 되었다고 하자, 상관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나무랐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아인슈타인이 곧바로 정식교수로 부임한 것은 아니었지만, 특허청의 말단관리가 대학에 강의하러 가게 되었다는 얘기를 그의 상관이 곧이 믿지 못한 것도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한편, 아인슈타인은 훗날 자신의 특허청에서의 경험이 물리학의 연구에도 도움이 되었다고 얘기하면서, 대학교수 등의 안정된 직장을 가진 학자들은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이 없지 않은 반면, 다른 직업을 가진 아마추어 학자들이 신선하고 새로운 주장을 펼 수도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었다.

매우 최근에도 아마추어에 의한 중대한 과학발전의 사례는 계속되고 있다. 상대성이론, 양자역학에 이어서 "20세기 물리학의 세 번째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카오스이론 역시 발단의 제공자는 물리학자가 아니었다. 기상예측에 관한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하던 기상학자 로렌츠는 예상외의 결과가 나온 것에 주목하여 1963년 "결정론적인 비주기성 흐름"이라는 논문을 대기 과학지에 실었고, 이것이 새로운 과학의 씨를 뿌린 것이다. 로렌츠는 기상학자이면서도 수학이나 물리학에도 일가견이 있었으므로 이런 문제에 흥미를 지니고 연구하여 논문을 게재하였으나, 당시 대부분의 기상학자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또한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질만한 물리학자나 수학자들은 대기 과학지까지 유심히 읽어볼 리가 없었기 때문에 로렌츠의 중요한 발견은 오랫동안 간과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로 비선형계, 복잡성에 관한 연구들이 진전되면서 로렌츠 논문의 진가가 뒤늦게 재확인되었고, 그는 "카오스 이론의 창시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멘덜, 베게너의 경우와는 달리, 생전에 새로운 과학의 전기를 마련한 인물로 인정받게 것은 행운일지도 모른다.

한편, 꼭 아마추어에 의한 것이 아니더라도 전문적인 한 분야만이 아닌, 과학의 여러 다른 분야에 두루 조예가 있는 사람에 의하여, 혹은 인접 분야가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과학의 길이 열리는 경우가 많음도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멘델, 베게너, 로렌츠의 경우가 모두 전자에 해당하며, DNA의 구조를 밝힌 와트슨과 클리크의 경우가 후자에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물론, 그래도 오늘날 대부분의 과학기술상의 발견, 발명들은 과학기술 연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특히 정부나 민간자본의 지원 아래 수십, 수백 명의 과학기술자들에 의한 조직적 연구개발이 빈번한 요즘에는 옛날보다 아마추어 과학기술자들의 입지가 더 줄어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분야에 따라서는 (예를 들자면, 새로운 혜성이나 소행성의 발견 등...) 직업적인 전문 과학기술자 못지 않게 아마추어들도 좋은 업적을 낼 수 있는 부문도 분명 있으며, 아마추어 과학기술자들의 기발하고 창의적인 사고가 다시 새로운 과학기술의 지평을 넓힐 가능성도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5. "꼬리 달린 별의 정체는?"

최근에 지구와 소행성의 충돌이라는 끔찍한 재난을 가상하여 그린 영화 "딥 임팩트"가 국내에서도 개봉된 바 있다. 그런데, 그 무렵 지구가 소행성이나 혜성 등의 다른 천체와 실제로 충돌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라는 주장이 나와서 천문학자들을 긴장시킨 적이 있다. (이 소식을 듣고 영화의 감독은 "현실이 영화를 닮으려 한다."라고 탄식했다는 얘기도 들렸다.)

혜성, 즉 꼬리별의 정체가 밝혀진 오늘날에도 인간들은 혜성을 여전히 두려운 존재의 하나로 인식하고 있는데, 혜성이 무엇인지 몰랐던 옛날 사람들은 훨씬 더 혜성을 무서워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평소에 안보이던 꼬리 달린 별의 출현은 불길한 징조로 여겨졌으며, 많은 고대 민족의 전설 속에 혜성에 대한 이야기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우리의 삼국유사에도 혜성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있다.)

중세시대 유럽에서는 혜성은 지구 대기 중의 해로운 증기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며, 이는 곧 전쟁, 가뭄, 홍수, 전염병 등등 온갖 재난을 불러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혜성은 "악마의 칼"로 묘사되었고, 혜성이 나타난 해에 공포심을 이기지 못하여 죽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혜성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더니 그 속에서 "머리를 풀어헤친 별이 무거운 칼을 들고 손을 굽혀 위협하였고, 그 양쪽에는 많은 도끼, 단 검과 피묻은 칼이 있었으며, 그 사이에는 잘린 목들이 머리와 수염을 풀어헤친 채 널려 있는" 무시무시한 광경을 목격했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는 웃음이 나올만한 이런 주장들이 옛날에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졌던 이유는, 아마도 혜성이 다른 천체와는 달리 갑자기 나타나는데다가, 긴 꼬리를 가진 특이한 모양을 지녔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

근대 과학혁명기에 접어들면서 천문학에 있어서 많은 발전이 이루어질 무렵, 혜성에 대한 연구도 큰 진전을 보게 되었다. 케플러의 스승으로 잘 알려진 덴마크의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는 혜성이 대기권 안의 증기가 나타내는 현상이 아니라 천체의 하나라고 주장하였고, 그 근거로 관측자의 위치를 달리 해도 혜성이 보이는 방향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었다.

행성에 관한 운동법칙을 세운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 역시 혜성에 대해 연구했는데, 그는 1607년에 나타난 혜성이 태양계 속을 직선적으로 통과하는 천체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케플러의 법칙을 토대로 만유인력과 운동법칙을 밝힘으로서 과학혁명을 완결시킨 뉴턴(Isaac Newton; 1642-1727) 역시 혜성이 태양계 주위를 운동하는 천체의 하나라고 생각했으며, 혜성도 일반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태양의 인력에 의해 운행되며 그 궤도는 포물선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혜성의 궤도를 면밀히 관측하고 이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연구를 한 인물은 에드먼드 핼리(Edmund Halley; 1656-1742)이다. 일반인들에게 아는 혜성의 이름을 대 보라 하면 아마 십중팔구는 "핼리혜성"이라고 답할 정도로 혜성의 대명사처럼 된 바로 그 혜성을 정확히 관측하고 예언한 사람이다. 핼리는 또한 뉴턴과 비슷한 시대의 사람으로서, 그의 친구이기도 했다.

1656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수학, 천문학에 흥미를 지녔고, 16세의 나이로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676년 대학을 중퇴하고 남반구의 천체와 항성을 관측하기 위하여 "나폴레옹의 유배지"로 유명한 세인트헬레나섬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351개의 항성을 관측하여 위치를 결정하고, 수성의 태양면 통과를 관측하여 태양시차 결정법을 고안해냈다. 그는 또한 항성들의 위치를 자세히 조사한 결과, 고대 그리이스 시대에 관측, 기록되었던 항성의 위치와 약간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았다. 이를 토대로 하여 그는 항성도 운동을 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이를 계산하려면 당시의 수준으로는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수학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항성에 대한 연구는 큰 진전을 보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여러 혜성들의 궤도를 자세히 관측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였고, 그 중 하나가 아주 주기적으로 태양계에 접근하였음을 밝혔다. 즉, 1531년, 1607년, 1682년에 나타난 대혜성의 궤도는 매우 비슷한 것으로 보아서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혜성일 것이며, 그 주기는 75-76년이기 때문에 1758년경에 다시 태양 주위에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대혜성이 바로 그의 이름을 딴 핼리혜성이다.

핼리는 1703년에 옥스퍼드대 교수가 되었고, 1720년에는 (오늘날에도 전세계에 표준시를 제공하는) 그리니치 천문대의 2대 대장으로 부임하는 등, 천문학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자신이 예측한 대혜성의 다음 출현을 보지 못하고 1742년에 세상을 떠났다. 1758년 크리스마스날 밤에 독일의 한 아마추어 천문가 바로 그 대혜성을 발견하였고, 이로써 혜성의 정체가 더욱 확실하게 밝혀지게 되었다. 모든 혜성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부는 태양의 주위를 타원형의 궤도를 그리며 주기적으로 운동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혜성은 더 이상 예측불허,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 다른 행성들과 마찬가지로 태양계의 한 식구임이 알려진 것이다.

예언자인 핼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 대혜성에 그의 이름을 붙여 주었고, 이 핼리혜성은 그 뒤로도 어김없이 75-76년에 한 번씩 지구와 태양 근처를 찾아 왔다. 가장 최근에 핼리혜성이 지구 부근을 방문한 것은 1986년인데, 그 궤도나 주기는 그때마다 조금씩 변화하여 왔다. 그 이유는, 태양계의 행성들 중 가장 크고 무거운 목성의 인력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핼리혜성에 관한 오래된 기록 중의 하나는, 1066년 중국 송사(宋史)에 "꼬리가 하늘을 가로지르고, 수미가 함께 지평에 달하였다." 라고 적혀있는 것이 있다.

태양계 주위에 찾아오는 혜성의 수와 종류는 무척 많으며, 그 주기도 짧은 것은 몇 년에서부터 긴 것은 수백, 수천년에 이르는 것도 있다. 또한, 다른 행성의 영향을 받아 태양계에서 영영 벗어나 버리는 것도 생기고, 도중에 소멸하기도 한다. 오늘날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혜성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그 중에는 아마추어 천문가들이 개가를 올리는 경우도 상당히 많다.

혜성은 긴 꼬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대단히 큰 천체라고 착각하기 쉬우나, 실은 대부분의 태양계 혜성들의 크기는 행성의 100만 분의 1이하로 매우 작고, 가스로 구성된 꼬리 부분은 밝게 빛나긴 해도, 밀도는 대단히 희박한 편이다. 따라서 혜성은 보기보다는 매우 미미한 천체이며, 더 이상 인간에게 불행과 재난을 예고하는 무서운 존재도 아니라고 할 것이다.



6. 찰흙에서 나온 은

현대 공업문명시대에 이르러, 인류는 매우 많은 종류의 금속들을 생활에서 이용하고 있다. 금, 은 등의 귀금속으로부터, 구리, 철, 주석, 알루미늄 등 많은 금속들이 일상 생활의 여러 방면에서 이용되고 있고 이들의 용도를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듯 싶다. 그 중에서도 인류가 가장 먼저 이용한 금속은 물론 구리이다. 신석기시대를 이어서 청동기시대가 개막된 것은 매우 오랜 옛날이며, 최초의 구리제품이 이용된 시기는 거의 기원전 7천년 내지 6천년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뒤를 이은 철기문명은 여러 측면에서 인류에게 혁명적인 변화를 몰고 왔고, 금, 은 등도 매우 일찍부터 알려져 왔다. 그러나, 유독 알루미늄만은 그렇지가 못했다. 알루미늄을 인류가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로, 다른 금속들에 비한다면 극히 최근의 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알루미늄의 양이 적어서 그랬던 것도 아니다. 도리어 알루미늄(Al)은 지각을 구성하는 8대 주요 원소들 중 산소(O), 규소(Si)에 이어서 세 번째로 많은 원소로서, 알루미늄의 전체 매장량은 철광석의 1.6배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루미늄이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진 채 인간의 이용이 미치지 못한 이유로는, 알루미늄의 독특한 화학적 성질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알루미늄과 산소의 화합물인 알루미나(Al2O3)는 찰흙 속에서 발견되었으나, 많은 화학자들이 그 정체를 밝혀내는 데에 실패하였다. 알루미늄은 철, 아연보다 화학적으로 이온화경향이 크고, 다른 원소와의 결합력이 매우 강해서, 이것을 독립된 원소로 분리해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요소의 합성으로 최초로 인공유기물을 만드는데 성공한 바 있는 독일의 화학자 뵐러(Friedrich Wohler; 1800-1882)가 1827년에 염화알루미늄을 칼륨과 반응시켜 알루미늄을 추출해 내었다. 그는 알루미늄의 비중이 철의 1/3정도로 매우 가볍다는 것을 알았고, 다른 물리적, 화학적 성질들도 밝혀 내었다. 뒤를 이어 프랑스의 드빌은 찰흙에서 추출한 염화알루미늄에 나트륨을 작용시켜서 알루미늄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였고, 이것으로 알루미늄으로 된 숟가락, 포크 등을 제작하여 1855년 파리의 세계 박람회에 출품하였다. 드빌은 자신의 알루미늄 제품들을 "찰흙에서 나온 은"이라고 지칭하였고,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나폴레옹3세는 거기에 큰 관심을 보였다. 가벼운 금속인 알루미늄으로 군대에서 쓰이는 갑옷이나 투구 등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드빌의 알루미늄 제조방법은 값비싼 나트륨을 많이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알루미늄은 은보다 훨씬 비싼 귀금속으로서 귀족이나 부자들의 보물로서 이용되었을 뿐, 실용적으로 널리 쓰일 수는 없었다.

미국의 화학기술자 홀(Charles Martin Hall; 1863-1914)은 오하이오 톰프슨 출생으로서, 오벌린 대학에서 공부할 때 독일유학에서 돌아온 주웨트 교수의 화학 강의를 듣게 되었다. 주웨트는 알루미늄이라는 새로운 금속을 학생들에게 선보였고, 당시에는 알루미늄의 가격이 너무 비쌌기 때문에, 알루미늄을 저렴하게 만들 수 있다면 실용적으로 널리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하였다. 그후 홀은 알루미늄의 새로운 제련법에 도전해 보기로 마음을 굳히고, 밤낮으로 연구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역시 알루미늄을 값싸게 제련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찰흙에서 나는 보크사이트는 불순물이 포함된 산화알루미늄인데, 철의 경우에는 산화철에 코우크스를 섞어서 함께 가열하면 산소가 분리되고 철을 얻을 수 있지만, 알루미나, 즉 산화알루미늄은 산소와의 결합이 훨씬 강해서 이런 방법으로는 알루미늄이 분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기 분해법 이라는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었는데, 보크사이트는 다른 물질에 잘 녹지 않았기 때문에 이 방법 역시 제대로 되지 않았다. 홀은 고심하던 끝에, 어느 날 빙정석(Na3AlF6)이라는 흰 색깔의 광물을 가열하여 용융 상태로 만든 후 보크사이트를 넣어 보았더니 아주 잘 녹았고, 그 상태에서 전기분해를 해 보았더니 드디어 알루미늄이 추출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지 1년 후인 1886년, 22세의 젊은 나이에 홀은 직접 전기분해법 이라는 새로운 알루미늄 제법을 발견해낸 것이었다. 홀은 훨씬 값싸게 알루미늄을 얻을 수 있게 되자 자본주와 함께 회사를 차리고, 부사장으로 일하면서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되었는데, 그만 41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재산은 모교인  오벌린 대학에 기증되었고, 홀의 업적을 기리는 의미에서 오벌린 대학에는 알루미늄으로 된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고 한다. 그런데, 홀이 새로운 알루미늄 제법을 발견한 해인 1886년에 프랑스에서는 에루(Paul Louis T. Heroult; 1863-1914)라는 야금학자가 홀과 똑같은 방법인 용융 빙정석을 이용한 전기분해법으로 알루미늄을 만드는 방법을 개발하여 프랑스 특허를 취득하였다. 물론 홀과는 아무런 사전 관계가 없었는데, 기존의 알루미늄 제법보다 훨씬 경제적인 이 방법은 두 사람의 이름을 따서 "홀-에루법"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과학기술의 역사에서 이처럼 동시발견의 예가 매우 많지만, 홀과 에루는 태어난 해도 같고, 22세로 같은 나이 인 1886년에 똑같은 알루미늄 제법을 각각 발견하였고, 심지어 죽은 해도 1914 년으로 같다는 점은 우연 치고는 상당히 기이하다는 느낌도 든다.

오늘날 알루미늄은 주전자, 식기 등의 일상 가정 용품으로부터 비행기의 몸체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이용되고 있고, 갈수록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음료용 캔으로 알루미늄이 이용된지도 오래고, 머지 않아 알루미늄으로 만든 자동차도 전망되는 등, "철"의 강력한 경쟁상대로 부상하고 있다. 인류가 본격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역사는 가장 짧은 편에 속하는 알루미늄이, 미래에는 가장 중요한 금속의 하나로서 쓰일 가능성이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7. 꿩 대신 닭?

최근 "남성을 세우는 묘약"으로 전 세계인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발기부전 치료제 "비아그라(Viagra)"는 처음에는 심장병 치료제로 쓰기 위하여 개발된 것이었다. "꿩 대신 닭"이 아니라, "닭 대신 꿩"인지도 모르겠으나, 이처럼 처음의 목표와는 달리 전혀 기대하지 않은 부산물을 얻게 된 경우가 과학기술의 발전사에서도 무수히 많다.

특히 의약품 개발의 분야에서 "비아그라" 이외에도 유사한 사례가 적지 않은데, 감기 약의 대명사인 아스피린(Aspirin)은 처음에는 해열, 진통제가 아니라 내복용 살균제로 쓰려고 개발된 약품이었다. 대머리였던 어느 고혈압 환자가 고혈압 치료제의 하나인 미녹시딜(Minoxidil)을 복용한 결과 머리털이 돋아나게 되자, 이 후부터 미녹시딜은 탈모방지, 발모촉진제로 더 널리 쓰이게 되었다. 암 치료제로 이용되던 인터페론이 관절염에도 특효가 있다고 밝혀진 것도 비슷한 경우이며, 이밖에도 상당히 많은 사례가 있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자면, "금을 만들기 위하여" 중세시대부터 활발히 행해졌던 "연금술"은 비록 다른 물질을 금으로 바꾸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새로운 물질들을 발견하였고, 이는 근대적인 화학의 발달에 밑거름이 되었다. 수학에 있어서도, "자와 컴퍼스만을 쓰는 3대 불가능문제"와 최근까지 수백 년간 풀리지 않았던 "페르마의 대정리" 역시 쟁쟁한 수학자들이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수학적 발견들을 하여 수학의 발달에 기여했다.

"꿩 대신 닭"의 재미있는 사례를 한가지 더 소개하자면, 바로 "카바이드"(=탄화 칼슘; CaC2)의 발견을 들 수 있다. LP가스가 널리 보급되고 휴대용 전등이 손쉽게 쓰이는 오늘날에는 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카바이드는 요즘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생소할지 모르나, 나이가 좀 드신 분이라면 옛날에 한잔하러 들른 포장마차의 카바이드에서 나오는 불빛과 독특한 냄새의 향수를 기억할 것이다. 또는 밤낚시를 즐겨하는 사람들에게도 카바이드는 필수 준비물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알루미늄 제련법이 확립되기 전까지는, 알루미늄을 추출하는 데에는 너무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알루미늄이 귀금속으로 여겨졌다는 것은 "...X파일" 바로 전편("찰흙에서 나온 은")에서 소개한 바와 같다. 때문에 상당히 많은 발명가, 기술자들이 알루미늄을 경제적으로 만드는 방법에 매달렸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들 대부분이 시도한 방법은 철을 제련하는 것과 같은 원리로 용광로에 산화알루미늄과 코우크스를 섞어서 고온으로 가열하는 방법이었다.

결국 미국의 홀(C. M. Hall)과 프랑스의 에루(P. L. T. Heroult)가 1886년에 빙정석과 산화알루미늄을 용융시켜 전기분해 하는 방법을 개발했지만, 그 무렵까지도 제철법의 원리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미국에서 작은 공장을 경영하던 제임스 모어헤드라는 인물과 캐나다 출신의 T. L. 윌슨도 그런 사람들 중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힘을 합쳐서 알루미늄 제련법을 개발하려 애썼는데, 제철법의 원리를 응용하되, 철을 분리할 때보다 훨씬 높은 온도를 낼 수 있는 전기로를 쓰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방법으로 알루미늄이 얻어질 리는 만무하였다. 그들은 다시, 산화칼슘에 탄소를 섞어서 가열하여 금속칼슘을 먼저 만들고, 칼슘에 산화알루미늄을 섞어서 다시 가열하면 알루미늄이 분리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 방법은 일찍이 프랑스의 드빌이 나트륨을 이용하여 알루미늄을 추출한 것과 비슷한 원리인데, 불행하게도 이렇게 해서는 산화칼슘으로부터 칼슘이 분리될 리가 없었다.

1891년에 산화칼슘, 즉 생석회에 탄소가 함유된 콜타르를 섞어서 전기로에서 높은 온도로 가열한 결과, 뭔가 반짝거리는 물질이 생겼다. 그들은 틀림없이 칼슘이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좋아하면서, 이를 확인하기 위해 그것을 물 속에 넣었다. 칼슘과 물이 반응하면 수소를 낼 것이고, 거기에 불을 붙이면 수소임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물질은 물 속에서 거품을 내면서 뭔가 기체를 발생시켰는데, 실망스럽게도 거기서 나온 기체는 수소가 아니었다. 수소라면 불을 갖다대면 폭발하듯 불이 붙을텐데, 그 기체는 불을 붙이자 노란 불꽃을 내면서 지속적으로 연소하였다. 즉, 산화칼슘과 탄소가 고온에서 반응한 결과, 칼슘이 환원된 것이 아니라 탄화 칼슘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카바이드이다. ( CaO + 3C → CaC2 + CO ) 카바이드(탄화칼슘)를 물에 넣었을 때 부글거리면서 발생했던 기체는 수소가 아니라 아세틸렌가스(C2H2)였던 것이다. ( CaC2 + 2H2O → Ca(OH)2 + C2H2) 아무튼 "꿩 대신 닭" 격으로 알루미늄 대신 카바이드 제법을 알아낸 두 사람은 연구를 계속하여 미국의 특허도 취득하였고, 카바이드는 이후 용접, 절단, 조명용 아세틸렌의 제조원료로 중요하게 쓰이게 되었다. 20세기초에 석탄질소 제조공업이 발달하고,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아세틸렌으로부터 많은 유기공업약품이 제조되었기 때문에 카바이드 공업은 계속 번창하였으나, 1960년대 이후에는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즉, 석탄질소 대신 요소가 쓰이고, 석유계 LPG가 용접에 이용되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화학공업의 발전으로 아세틸렌이 예전처럼 많이 쓰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카바이드의 용도는 갈수록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카바이드는 한 시대를 풍미했던 화학물질로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8. 포도서리를 막으려다...

과학적 발견, 발명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른바 우연한 계기로부터 중요한 발견, 발명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 동안 몇 차례 소개되었듯이, 꿈에서 영감을 얻은 경우, 어린 시절의 경험에서 힌트를 얻은 경우, 뜻하지 않은 실수가 도리어 성공의 밑거름이 된 경우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근래에는 이러한 "뜻하지 않은 우연"에 의한 발견과 발명에 대한 연구도 적지 않게 이루어지는 듯한데,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단순한 우연의 산물이나 행운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준비된 자만이 기회를 살릴 수 있다."는 교훈처럼,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고 해서 그것이 곧장 성공으로 연결될 수는 없는 일이다. 우연이나 행운 못지 않게, 치밀하게 준비하고 끈질기게 매달려서 연구한 결과 그것을 큰 성공의 발판으로 삼은 과정 또한 주목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포도나무의 병해를 막는 농약으로 널리 쓰이게 된 보르도액의 발견도 이와 같은 경우의 한 예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 하면 맛좋은 포도주를 연상할 정도로, 포도는 예로부터 프랑스 농민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작물이다. 특히 메독 지방은 기후와 환경이 포도재배에 매우 적합해서 오래 전부터 주요한 포도주 생산지로 내려져 왔다. 그러나, 포도는 병충해에 상당히 취약한 작물이었기 때문에, 여러 해충이나 병균들이 기승을 부릴 때마다 농민들은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곰팡이의 일종이 번진 적도 있었고, 1860년대에는 미국에서 건너 온 필록세라(Phylloxera)라는 해충이 들끓는 바람에 많은 포도나무들이 말라죽기도 하였다. 1870년대에는 노균병(露菌病)이 크게 번져서 포도농가들 마다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1876년 보르도 대학의 교수로 부임해 온 식물학자 미야르데(Pierre Marie Alexis Millardet; 1838-1902)는 포도의 병충해를 막는 방법을 연구하였다. 그는 지방의 기후, 토질에 적합하고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강한 포도의 품종을 개발하는 노력을 계속하였다. 1882년에 미야르데는 메독 지방의 포도밭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그 무렵에도 노균병이 크게 유행해서 포도에 큰 피해를 주고 있었다. 노균병에 걸린 포도나무들을 살펴보던 그는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포도나무가 병에 걸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길가에 있던 포도나무들은 병에 걸리지 않고 잘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미야르데는 그 원인이 무엇인지 골똘히 생각해 보았으나, 길가의 포도나무에는 황산구리와 석회를 섞은 용액이 뿌려져 있다는 점 이외에는 다른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이른바 보르도액이라고 불리는 이 혼합액은 어린이들의 장난이나 포도를 훔치려는 사람들로부터 "포도 서리"를 막기 위하여 뿌려진 것인데, 보기에도 흉측한 녹색이어서 독약처럼 보이는 데다가 나쁜 맛을 내기 때문에 길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로부터 포도를 지키는 데에는 효과가 있었다.

미야르데는 보르도액을 뿌리지 않은 포도는 노균병에 걸린 반면, 이것을 뿌린 포도는 병이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더욱 깊이 연구해 보기로 하였다. 노균병균은 곰팡이의 일종으로, 여름철에 많은 포자를 만들어서 번식하는데, 이들 포자는 물에 닿으면 유주자(遊走子)라는 운동성이 있는 작은 홀씨들을 만들어서 다른 곳으로 퍼진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미야르데는 노균병균의 포자를 배양할 때에 다른 물을 사용하면 유주자를 잘 만들어 냈으나, 유독 자기집의 우물물을 사용하면 유주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였고, 우물펌프의 구리관으로부터 녹아 든 구리이온이 노균병 유주자의 발생을 방지한다는 점을 발견하였다. 따라서, 보르도액의 황산구리 속에 녹아 있는 구리이온이 노균병 방지에 효과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던 것이다.

보르도액에 의하여 노균병이 방지되는 매커니즘을 이론적으로 밝혀낸 그는, 그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할 준비를 하였다. 마침 1885년에 다시 노균병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을 때, 그는 포도밭을 반으로 나누어 한 편에는 보르도액을 살포하고, 다른 편은 그대로 두었다. 예상대로 보르도액을 뿌린 포도나무들은 거의 노균병에 걸리지 않았고, 보르도액을 뿌리지 않은 포도나무들은 대부분 노균병에 걸려 신음하게 되었다. 보르도액은 포도나무의 노균병 방지에 특효가 있는 것이 밝혀지자, 대량으로 생산되어 프랑스 곳곳의 포도밭에 뿌려졌고, 유럽의 다른 지방 및 세계의 포도 재배 지역에도 소문이 퍼져서 포도 농가들은 큰 이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미야르데는 또한, 감자나 토마토 등의 질병을 일으키는 곰팡이가 포도의 노균병균과 유사하다는 데에 착안하여, 보르도액을 감자의 병해를 예방하는 실험을 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전세계적으로 보르도액이 여러 다양한 농작물들의 병해를 막아 주는 중요한 농약으로 쓰이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미야르데가 보르도액을 처음으로 만든 것도 아니고, 전부터 쓰여 오던 보르도액이 포도의 노균병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단순히 확인한 것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새로운 용도를 발견한 것이므로 새로운 물질을 발명한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고 볼 것이다. 기존에 있던 물질인 DDT를 살충제로 이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발명이 된 것도 비슷한 경우라고 말할 수 있다. 보르도액을 그저 포도서리 방지용으로만 보아 넘겼던들, 이것이 중요한 농약으로 이용되어 인간에게 큰 혜택을 줄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9. 고통을 없애는 약

옛날에 마취제가 없던 시절의 외과 수술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환자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무릅쓰고 수술하지 않으면 안돼는 의사나, 환자가 요동을 치지 않도록 곁에서 억세게 붙잡는 역할을 하던 힘 좋은 "남자 간호사"들에게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마나 아편과 같은 자연산 마약이 고통을 덜기 위하여 쓰이기는 하였고, 알코올 함량이 높은 독한 술을 마셔서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드는 방법도 있기는 하였으나, 그다지 우수한 마취제 구실을 하지는 못하였다. 수술 도중 환자가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쇼크로 죽는 경우도 많았고, 수술을 하기도 전에 "저런 고통을 당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마취제다운 마취제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도 개발되지 않았다.

영국의 과학자 험프리 데이비(Humphrey Davy; 1778-1829)는 여러 기체의 특성에 관해 연구하던 중, "웃음 가스"로 알려진 아산화질소(N2O)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스스로 이 기체를 마셔본 결과, 기분이 좋아지고 술에 취한 듯 몽롱해 지고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를 발표하였다. 다른 학자가 어느 젊은 부인에게 그것을 마셔보도록 시험한 결과, 품위 있고 점잖기만 하던 부인이 갑자기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밖으로 뛰쳐나가 길가에서 개를 뛰어넘는 등, 평소와는 너무 다른 행동을 서슴지 않아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데이비가 이 기체를 수술의 마취제로 이용하려 했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후 웃음 가스는 의료용이 아니라 오락용으로 자주 이용되었다. 마치 가면무도회를 즐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파티에 손님들을 모아 놓고 장난 삼아서 웃음 가스를 함께 마시는 일이 많았는데, 다들 기분이 유쾌해지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장난이 지나쳐서 불상사가 생기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한다.

미국 코네티컷주에서 치과의사로 일하던 웰즈(Horace Wells; 1815-1848)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웃음 가스 아산화질소를 마시는 장난을 하였는데, 한 청년이 들떠서 소란을 피우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다리에 부상을 입게 되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상당한 피를 흘렸음에도 불구하고 통증을 느끼지 못하다가, 웃음가스의 효과가 다한 후에야 비로소 통증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것을 본 웰즈는 치과의사답게 발치(拔齒)시에 이 기체를 이용하면 통증 없이 쉽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자신의 충치를 통증 없이 뽑아 웰즈는 한 종합병원에서 이 실험을 공개적으로 실시하여 어느 충치환자의 이빨을 뽑았는데, 웃음 가스의 양이 적었는지 아니면 너무 서두른 탓에 마취효과가 돌기 전에 발치 한 때문이었는지, 그 환자는 고통을 호소하며 아우성쳤다. 이로 이하여 웰즈는 도리어 사기꾼으로 몰리고 치과 일마저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그 실험을 지켜 본 다른 치과의사 모튼(William T. G. Morton; 1819-1868)은 마취제를 이용하여 발치 하는 연구를 계속하기로 하였고, 친구의 조언을 듣고 아산화질소 대신 에테르를 마취제로 이용하기로 하였다. 1846년 9월 30일, 모튼은 에테르를 이용하여 환자에게 통증을 느끼게 하지 않고 발치하는 데에 성공하였고, 목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에도 에테르로 마취하는 실험을 하여 공개적으로 검증을 받았다. 그후 에테르는 우수한 마취제로 소문이 나서, 큰 외과수술을 할 경우에도 널리 이용되었다.

에테르를 이용한 수술법은 영국에도 전파되었는데, 외과의사였던 심프슨(James Young Simpson; 1811-1870)은 에테르를 이용하여 여성들이 고통 없이 분만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에테르에는 적지 않은 부작용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부작용이 덜 하면서도 우수한 효과를 지닌 다른 마취용 물질을 찾게 되었는데, 여러 물질들을 시험해 본 결과, 클로로포름이 좋은 마취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프슨은 왕립병원에서 이를 시험하여, 클로로포름으로 마취하는 외과수술을 성공리에 마쳤고, 이것을 발전시켜서 클로로포름을 이용한 무통 분만법을 제시하였다. 심프슨의 무통 분만법은 종교적인 이유 등으로 다른 사람들의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그는 지지 않고 마취제 사용의 정당성을 역설하고 그 보급에 힘썼고, 나중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분만시에 클로로포름을 쓰기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파티의 흥을 돋구는 엉뚱한 장난으로 이용하였던 마취작용 물질들이, 수술시에 통증을 없애주는 귀중한 물품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마취제의 이용과 더불어 의학기술 역시 큰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마취제는 인류의 은인으로서 오늘날에도 크고 작은 수술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


10. 인간 모르모트

흔히 "모르모트"하면 신약품이나 독성물 등의 생체실험에 이용되는 생쥐 비슷한 동물을 지칭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잘못된 표현이고, 남아메리카가 원산인 쥐과 설치류의 동물 기니피그(guinea pig)가 정확한 이름이다. 알프스 등지에 서식하는 다람쥐의 일종인 "Marmot"(마아모트)와 생김새가 비슷해서 이 런 혼동이 생긴 듯 한데, 아무튼 모르모트하면 본래의 그 동물 뿐 아니라, 인체를 대신하여 실험대상이 되는 것들을 통칭하는 의미로 쓰인다.

오늘날에는 갖가지 신약들이 쏟아져 나오고, 첨단의학의 발달에 따라 요구되는 실험들도 매우 많기 때문에, 인류를 대신하여 희생되고 있는 동물들의 수도 엄청난 수준이다. 모르모트를 쓰지 않으면 안돼는 생물학, 의학관련 연구소에서는, 인간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어간 동물들을 위하여 추모제를 지내거나 위령비를 세우는 예가 있다는 소식도 종종 들린다. 그러나, 살아 있는 사람을 그대로 생체실험으로 쓴다는 것은 윤리상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언젠가 영․유아에 대한 백신투여 실험이 문제가 되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도 있듯이, 암 등의 불치의 병에 걸려서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나, 기존의 치료법으로는 더 이상의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사람들이 새로 개발된 약의 임상실험을 자청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인간 모르모트"하면 이른바 "마루타"로 이야기되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부대의 잔혹한 생체실험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19세기 초엽에 미국에서, 어떤 사람에게 별 고통을 주지 않고도 사람 위(胃)의 기능을 실험을 통하여 밝혀내 관련 분야의 연구를 진전시킨 아주 기이한 일이 있었다. 그 전까지는 새 등의 동물을 통한 실험으로, 위에서 위액이 나오며, 소화기능을 한다는 어렴풋한 지식밖에는 알지 못했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소화의 과정이 이루어지는가는 알 수가 없었다.

1822년 6월, 미국의 5대호인 미시간호와 휴런호의 수로가 연결되는 곳에 위치한 매키낵이라는 작은 섬마을에는 아메리칸 모피회사의 거래소가 있었다. 회사의 점포 근처에는 사냥한 동물의 가죽 등을 팔려는 포수들, 구경나온 여행객들, 근처 요새에 주둔한 수비대의 병사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붐볐는데, 그 중에는 생 마르탱(Alexis Saint-Martin)이라는 19세의 프랑스계 캐나다 청년도 끼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어떤 사람이 산탄 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잘못 발사되어 바로 옆에 있던 생 마르탱 청년의 몸에 수십 발의 탄환이 박혀 버렸다. 그 청년은 옷도 산산조각 나고, 몸에 불이 붙어 쓰러졌고, 사람들은 근처 요새 수비대에 사람을 부르러 보냈다. 수비대의 군의였던 보먼트(William Beaumont; 1785-1853)박사가 급히 달려오기는 했지만, 그 청년의 몸에는 어른의 머리보다 더 큰 구멍이 생겼고 늑골의 일부가 날아가는 등 치료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보먼트는 일단 응급조치를 취하기는 했지만, 생 마르탱이 하루, 이틀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 마르탱은 죽지 않고 기적같이 버텨 내었다. 보먼트는 1년 가까이 그를 치료하였는데, 보먼트의 정성어린 치료와 간호 덕분에 마르탱은 거의 건강을 회복하였으나, 찢어진 위는 아물지 않고 약 6cm정도 되는 구멍을 남겼다. 처음에는 위 속의 음식이 구멍으로 스며 나오곤 했으나, 좀 더 시간이 흐르자 자연적인 치유력 덕분인지 위 내면의 막이 자라서 구멍을 덮어 일종의 뚜껑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위의 뚜껑은 안의 내용물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방지하였으나, 손으로 누르면 쉽게 안쪽으로 밀어 넣어서 위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게 되었다. 전무후무한 "뚜껑 달린 위를 가진 사람"이 탄생한 것이다. 보먼트는 생 마르탱이 완전히 체력을 회복한 후, 그의 위의 내부를 지속적으로 주의 깊게 관찰하고, 소화에 관한 실험과 연구를 하기로 하였다. 관찰 결과, 위액은 음식물이 없을 때에는 분비되지 않으며 식사 전에 미리 만들어져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물이 들어가야만 분비된다는 것, 위액은 위 속에서뿐만 아니라 위 밖에서도 음식물을 분해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 등을 알게 되었다. 또한, 쇠고기, 돼지고기, 양배추, 빵조각 등을 각각 명주실에 묶어서 함께 위 안으로 넣은 후, 시간에 따라 어느 정도의 속도로 소화가 진행되는지 실험하였다. 위액 이 소화작용을 하기 위한 온도와 기타 조건 등도 아울러 연구하였다.

생 마르탱은 자기가 보먼트의 실험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갈수록 무리한 요구를 하기도 하고 한때 도망치기도 하였으나, 보먼트의 은혜를 생각해서인지 다시 돌아왔다. 생 마르탱은 그 후로도 보먼트의 "인간 모르모트" 노릇을 하였고, 오래 살지 못하리라는 주위의 예상을 깨고 83살까지 살았다. 무서운 총기오발 사고가 뜻밖에도 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인간을 만들어, 위의 기능과 위액의 작용, 소화의 매커니즘 등이 밝혀졌고, 관련 의학 및 생물학 분야의 발전에 도움이 되었다.


11. 쓰레기에서 핀 장미(1)

과학기술 발전의 역사를 살펴보면, 도저히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종래의 상식이나 고정관념을 깨고, 예상외의 뛰어난 발명, 발견이 이루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플레밍(Alexander Fleming)이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추출해 낸 것을 꼽을 수 있겠는데, 물질을 부패시키는 더러운 푸른곰팡이에서 인간의 병을 고치는 귀중한 치료약이 나올 수 있으리라 예상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콜타르와 합성염료, 이 두 가지도 얼핏보면 그다지 서로 어울리는 물건이 아닌 듯이 보인다. 끈적끈적하고 시커먼 콜타르는 옷에 묻으면 잘 지워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냄새도 지독해서 옛날에는 거의 악성폐기물로 취급받아 왔는데, 사람들의 옷을 온갖 아름다운 색깔로 물들여주는 염료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물건으로 생각되어 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의복을 화려하게 염색해주는 인공염료는 바로 이 더러운 콜타르를 원료로 하여 만들어진다. 마치, 쓰레기더미 위에서 장미가 피어나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겠는데, 이것을 가능하게 한 사람들은 룽게, 호프만, 그리고 퍼킨 등이다.

머독(W. Murdock)이라는 뛰어난 기술자가 석탄가스의 연구로부터 가스등을 발명하여 보급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말에서 19세기초 무렵이었다. 종래에 촛불만 이용하던 사람들에게, 어두운 밤을 보다 환하게 밝힐 수 있는 가스등은 매우 편리한 물건으로 큰 환영을 받았고, 특히 산업혁명의 발전으로 밤늦게까지 일해야 하던 수많은 공장들에 급속히 보급되었다. 이에 따라 가스공업도 발전하게 되었는데, 여기에서 달갑지 않은 부산물이 생기게 되었다. 석탄을 건류하여 석탄가스와 코크스를 얻고 난 나머지 찌꺼기가 바로 콜타르인데, 검은 색깔의 끈끈한 이 액체는 당시에는 어디에도 쓸모가 없는 골치 아픈 폐기물이었다. 가스회사들은, 처음에는 콜타르를 땅 속에 묻어서 버리려 했으나, 급격히 늘어만 가는 콜타르를 처리하기에는 큰 곤란을 겪었다.

독일의 화학자 룽게(Friedlieb F. Runge; 1795-1867)는 함부르크 출생으로, 베를린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다가 전공을 바꿔서 괴팅겐 대학에서 화학을 배웠고, 1819년 예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823년 브레슬라우 대학교수에 임용되었으나, 얼마 못 가서 사임하고, 1832년에 왕립무역회사의 오라니엔부르크 화학공장에 입사하였다. 처음에는 양초를 만들어내려는 연구를 하였는데, 가스등이 나왔다고는 하지만 소도시나 시골의 가정에서는 아직도 양초가 필요했고, 양초의 연료가 되는 파라핀이 충분치 못했기 때문에 룽게는 콜타르로부터 양초의 원료를 만들어보려는 생각을 한 것이다.

룽게는 온갖 화학약품과 방법들을 총동원해서 콜타르로부터 뭔가 유용한 물질을 얻어내려 했으나 쉽지가 않았고, 끈끈한 콜타르 때문에 숱한 곤란을 겪었다. 콜타르와 계속 씨름하던 그는 어느 날 콜타르로부터 새로운 산(酸)을 추출해서 "석탄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콜타르로부터 새로운 물질을 뽑아낼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된 룽게는 양초에 관한 연구는 젖혀 두고 콜타르에서 다른 화학물질 들을 분리해 내는 연구에 매달렸고, 1834년에는 아닐린을 성공적으로 분리해낼 수 있었다.

룽게는 자신이 발견한 아닐린이 전혀 새로운 물질일 것으로 생각하고, 푸른 기름이라는 뜻의 "큐아놀"이라고 이름 붙였으나, 이것은 그보다 훨씬 전에 다른 사람이 쪽(藍)을 분해하여 발견한 물질과 성분이 같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물질은 후에 아닐린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천연염료의 재료가 되는 쪽(인도에서 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인도람이라고도 한다.)과 콜타르에서 동일한 물질이 추출된다면, 룽게는 콜타르로도 염료의 원료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본격적으로 콜타르에서 염료를 만들어 내는 연구를 하고 싶었으나, 회사 의 간부들은 터무니없는 짓을 한다고 그를 나무랐고, 할 수 없이 염료에 관한 연구를 중단하고 다시 양초에 관한 연구로 돌아갔다. 그는 콜타르에서 추출해 낸 몇 가지 물질에 관한 논문을 써서 내었으나, 그의 선구적인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는 화학자는 거의 없었고, 그의 귀중한 연구결과는 차츰 잊혀져 갔다.


12. 쓰레기에서 핀 장미(2)

오늘날에는 화학적 방법으로 대량 합성되는 인공염료 덕분에, 일반 서민들도 갖가지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을 수 있으나, 먼 옛날에는 왕족이나 권력자, 귀족 등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아니면 고운 염료로 채색된 옷과 장신구 등을 걸치기 힘들었다. 우리 나라 역사에서도 옷의 색깔로 벼슬이나 신분의 높낮이를 구분하던 시대가 있었고, 로마에서도 귀족이 아닌 사람이 보라색 옷을 입으면 엄벌에 처하는 등, 특정의 화려한 색상은 높은 신분과 특권을 상징했던 예가 동서를 막론하고 많이 있다.

천연염료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었는데, 수천년 전에 건설된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 아름다운 색깔로 채색된 여러 물건들이 나왔고, 고대 중국, 인도 등에서도 천연염료를 이용한 염색법이 일찍부터 발달되어 있었다. 옛날에 천연염료의 원료로 쓰인 것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나사조개에서 여러 염료를 얻는 경우도 있었고, 멕시코 선인장에 붙어사는 연지벌레에서 코치닐 이라는 붉은색 염료를 추출하기도 했으며, 식물성 염료로는 파란색을 낼 수 있는 쪽(藍)의 잎과 빨간색을 낼 수 있는 꼭두서니 뿌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매우 많은 수의 나사조개, 연지벌레나 쪽의 잎 등을 모아 봐야 그것으로 만들 수 있는 염료의 양은 극히 적었고, 따라서 염료는 귀하고 값이 비쌀 수밖에 없었다. 산업혁명으로 천, 옷감 등이 대량으로 생산됨에 따라, 그것을 염색 할 염료의 수요도 크게 늘었고, 사람들은 염료를 값싸게 대량으로 만들어낼 방법은 없는지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나, 유기화학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절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화학비료를 발명했고, 유기화학의 창시자라 불리는 리비히(Liebig; 1803-1873)는 산하 연구소에서 후에 화학발전의 주역이 된 많은 유능한 제자들을 길러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 중의 한 사람이 호프만(August W. Hofmann; 1818-1892)이었다. 그는 리비히 아래서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콜타르에 관한 룬게의 논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동료 연구원의 공장에서 콜타르를 충분히 공급받아서 콜타르로부터 유용한 물질을 추출하는 실험에 몰두하였다.

그는 룬게가 이미 분리해 낸 아닐린 이외에도, 콜타르에서 벤젠을 뽑아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벤젠은 강한 향을 내는 물질로, 당시에는 외국에서 수입해오는 안식향이라는 나무에서만 구할 수 있었으므로, 호프만의 연구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호프만은 연구를 계속하여, 콜타르로부터 벤젠과 아닐린을 값싸게 대량으로 제조할 수 있는 방법도 알아내었다.

화학자로서 명성을 쌓은 호프만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초빙으로 1845년 영국으로 건너가, 왕립화학학교 교수로 일하게 되었다. 호프만은 그곳에서 비료에 관한 강의를 하면서, 전부터 해오던 콜타르에 관한 연구도 계속 하였는데, 그의 실험실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어 함께 연구하게 되었다. 호프만의 연구실 학생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퍼킨(William H. Perkin; 1838-1907)이라는 소년이 연구에도 가장 열심이었다. 그의 재능과 열성을 알게 된 호프만은 15세의 퍼킨을 조교로 삼아서 함께 연구하였는데, 그 무렵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과제는 말라리아의 특효약인 키니네(quinine)를 합성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키니네는 귀중한 약으로서, 키나(Kina) 나무로부터 얻었는데, 값이 매우 비쌌으므로 콜타르로부터 값싸게 키니네를 만들어낼 수 없을까 궁리하였다. 집에까지 실험실을 차려 놓고 실험에 열중하던 퍼킨은, 1856년 부활절 휴가 때 집에서 콜타르를 이용한 키니네 합성실험을 하였다. 그러나, 콜타르로부터 추출되는 물질들의 화학식이 키니네와 비슷했음에도 불구하고, 원하는 키니네는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퍼킨은 다시 콜타르에서 추출한 아닐린에 몇 가지 화학약품을 가해 보았으나, 검은 침전물이 생길 뿐 키니네는 합성되지 않았다. 실망한 그는, 그것을 버리려 하다가 알코올에 녹여 본 순간, 뜻밖에도 더러운 침전물이 화려한 보라색의 액체로 변하였다. 그 순간, 퍼킨은 비록 키니네의 합성에는 실패했지만, 새로 발견한 보라색 액체를 염료로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고, 그 액체로 천을 염색하여 시험해 본 결과, 염색이 곱게 잘 될 뿐 아니라, 물에 빨거나 햇빛을 쪼여도 잘 변색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퍼킨은 새로 발견한 액체에 프랑스에서 볼 수 있는 보라색 들꽃 이름을 따서 "모브"(mauve)라고 이름지은 후, 영국의 가장 유명한 염색회사에 자신이 염색한 견본을 보내 의견을 물었다. 그 회사에서는 퍼킨의 염료가 자기회사에서 쓰는 것보다 훨씬 성능이 우수하기 때문에 그 새로운 염료를 값싸게 대량으로 만들 수 있다면 널리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답하였다. 나이 18세의 "소년 화학자"가 대단한 발명을 해낸 것이었다.

퍼킨은 합성염료 모브의 대량제조법을 확립하여 특허를 취득한 후, 이듬해 학교마저 그만두고, 아버지와 형을 설득해서 세계 최초의 인공염료공장을 차렸다. 비록 인공염료의 합성에는 성공했지만 그것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실용화하는 데에는, 벤젠 등의 원료공급 문제, 폭발사고의 위험이 따르는 제조공정의 문제, 기존의 염색업자들에게 보급하는 일 등 여러 가지 숱한 어려움이 있었으나, 퍼킨은 온갖 장애와 난관을 극복하고 인공염료의 상품화에 성공하였다. 퍼킨은 합성염료 모브를 프랑스에도 대량으로 수출하였는데, 모브의 보라색 패션이 파리에서 크게 유행하였고, 그 유행은 역으로 영국에까지 번져서 모브는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퍼킨은 젊은 나이에 큰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고, 합성염료 모브의 제조는 화학 염료공업의 시초가 되었다. 퍼킨은 1869년에 종래에는 꼭두서니에서 얻던 빨간색의 염료원료 알리자린의 합성에도 성공하였고, 1874년부터는 합성 염료사업에서 손을 떼고 화학자로 돌아와, 여러 중요한 유기화학상의 발견을 하였다.

한편, 합성 염료산업이 크게 발달함에 따라 종래에 쓰이던 천연염료의 생산은 사양길을 맞게 되었는데, 인도에서 주로 생산되던 쪽(藍)이나 멕시코에서 나오던 코치닐, 그리고 꼭두서니 등은 비싸게 팔리던 예전의 소중한 지위를 잃고 말았다. 공업화의 과정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기는 하지만, 천연염료의 생산으로 높은 수입을 올리던 농가들 역시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인도에서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농장에서 쫓겨나는 등, 산업구조의 재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콜타르는 더 이상 더러운 폐기물이 아니라, 나프탈렌, 벤젠, 아닐린 등 여러 화학공업의 원료가 되는 물질들을 추출해내는 귀중한 자원이다. 오늘날에도 환경 오염문제의 심각성 등으로 인하여, 쓰레기나 폐기물을 재활용하는 연구들이 활발히 진행되는 예도 많은데, 종전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시커먼 콜타르에서 아름다운 인공염료를 만들어낸 퍼킨 등의 화학자들의 공로는,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꽃을 피워 낸 선구적인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3. 불운의 선구자들(1)

발명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제품의 최초 발명자라고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이, 사실은 사상 처음으로 그것을 "발명" 했다기보다는, 그 제품의 사업화와 실용적인 보급에 성공하여 이름을 날린 사람들인 경우도 많다. 물론, 누가 최초로 "발명" 했는가를 밝히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닐 것이지만, 분명 그보다 앞선 선구자들이 발명에 성공하고도 불운하게도 별로 빛을 보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린 예가 적지 않은 것이다.

증기기관은 근대 산업혁명에 있어서 핵심적인 원동력 역할을 한 매우 획기적인 발명의 하나이다. 오늘날에는 이보다 훨씬 성능이 우수한 가솔린 기관, 전기동력 기관 등이 널리 이용되기 때문에 효율이 낮고 사용이 불편한 증기기관이 실제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지만, (관광용 증기기관차 정도...) 근대산업화 및 과학기술의 발달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증기기관은 공장의 기계를 돌리는 동력원뿐만 아니라, 증기기관차, 증기선 등의 기관으로도 널리 이용됨으로서, 육지와 해상의 교통혁명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면, 이처럼 중요한 증기기관, 증기선, 증기기관차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은 누구일까? 이런 질문은 학생 대상의 퀴즈대회 등에서도 단골로 출제되는 문제이다. 보통의 상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증기기관은 와트, 증기선은 풀턴, 증기기관차는 스티븐슨" 이라고 답할 것이고, 우리가 배운 교과서에도 대부분 그렇게 나올 것이다. 그러나, 발명, 발견의 역사를 좀 더 엄밀히 살펴보면, 유감스럽게도 셋 다 정답이 아니다.

우스터(Worcester)후작2세인 에드워드 소머셋(Edward Somerset; 1601-1667)과 세이버리(Thomas Savery; 1650-1715)가 증기기관 연구의 선구자들이며, 그 뒤를 이어 뉴커맨(Thomas Newcomen; 1663-1729)은 실용적인 증기기관을 만들어 탄광 등에 보급시켰다.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자면, 그리이스 알렉산드리아 시대의 헤론(Heron)이 그 원조라고 볼 수도 있다.

증기선의 발명자로 알려진 풀턴(Robert Fulton; 1765-1815)이 자신이 제작한 증기선 클레어먼트호를 미국 허드슨 강에서 시험 운항한 것은 1807년 8월이었다. 풀턴도 증기선을 개발하면서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듭하였고, 범선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뱃사람들의 방해와 저항도 만만치 않았으며,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미친 사람으로 보기도 하였으나, 온갖 어려움을 뚫고 증기선을 완성하여 진수시켰다. 40m정도의 길이에 두 개의 외륜을 장착한 클레어먼트호는 모양도 괴상하게 생긴데다가, 그간 풀턴의 거듭된 실패 때문인지 "풀턴의 바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으로 불려졌으나, 40명의 승객을 태우고 시속 7.5km의 속력으로 32 시간동안 240km의 뱃길을 무사히 운항하였다. 시험운항의 성공을 계기로, 풀턴은 운송회사를 차려서 본격적인 증기선의 상업운항에 나섰으며,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여 상당한 돈도 벌어들일 수 있게 되었다. 풀턴이 "동력기선의 시대"를 성공적으로 열게 한 장본인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클레어먼트호가 "세계 최초의 동력기선"인 것은 아니다. 풀턴보다 앞선 증기선 연구의 선구자는 여럿이 있으나, 그들은 대부분 증기선의 실용화를 성공시키지 못하고 불행하게 삶을 마쳤다.

증기선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가는 아직도 연구자들간에 의견이 분분하고, 명확하게 결론이 나지 않았으나, 1736년경에 영국의 해리스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증기기관을 이용하여 배를 만들어 보았다고 한다. 그 당시는 와트의 증기기관이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고, 성능이 와트의 것에 못 미치는 뉴커맨의 증기 기관만이 이용되던 무렵이었다. 해리스는 배의 뒷부분에 물레바퀴 비슷한 것을 장착하고 뉴커맨의 증기기관을 연결하여 바퀴를 돌림으로써 배를 움직이도록 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실제로 운항되었다면 이른바 "외륜선(外輪船)"의 시조인 셈이 된다. 그러나, 해리스의 증기선이 제대로 작동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와트의 증기기관이 나온 이후, 프랑스의 쥬프로우 다반이라는 발명가가 1780년 경 와트의 증기기관을 장착한 증기선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1789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후, 그는 증기선을 실용화할 틈도 없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나야 했고, 세인들의 기억에서 멀어진 그는 프랑스로 돌아온 후에 불행하게 삶을 마쳤다.

이들보다 좀더 증기선의 실용화에 다가선 인물로는 미국의 피치(John Fitch; 1743-1798)가 있다. 그는 처음에는 시계 공으로 일했으나, 미국 여러 지방을 떠돌며 모험을 좋아하다가 델라웨어에 정착한 후로는 증기선의 연구에 몰두하였다. 1785년에 증기선의 모형을 만들고, 2년 후인 1787년에는 실물의 제작에도 성공하여 시험운항을 마쳤는데, 그의 증기선은 배의 양옆에 노를 3개씩 달고, 증기 기관의 힘으로 노를 저어서 배를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피치는 증기선을 더욱 개량하고 1790년부터는 델라웨어 강에 정기항로를 개설하여 필라델피아와 볼티모어 사이를 운항하였는데, 그의 증기선은 시속 12km의 속도로, 풀턴의 클레어먼트호보다도 빠른 수준이었다. 그러나, 아직 승객 등의 수요가 적은 탓이었는지 증기선의 운항은 큰 적자를 보았고, 피치는 오늘날의 기선처럼 스쿠류우가 달린 증기선을 개발하려고 하였으나, 출자자와 후원자들은 등을 돌리고 말았다. 그는 가난 속에서도 연구를 계속하였고, 보다 훌륭한 증기선으로 넓은 바다를 항해하려는 꿈을 버리지 않은 채, 자신의 연구를 재정적으로 뒷받침 해 줄 후원자를 찾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에까지 건너가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을 찾으려 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미국으로 돌아온 후 가난과 절망 속에서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결국 수면제를 먹고 자살함으로써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쳤다.

증기선과 관련된 또 한사람의 불행한 발명가는 영국의 윌리엄 사이밍턴이다. 그는 원래 증기기관의 기사로 일하면서, 처음에는 증기자동차를 연구하다가 증기선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1788년 배의 양쪽에 바퀴를 단 외륜 증기선을 성공적으로 완성시켰고 연구를 거듭하여 1803년에는 "샤를로트 던다스호"라는 증기선을 제작하였다. 이 배는 주로 운하에서 무동력의 다른 배를 끌어주는 일을 하는 기선으로 쓰였는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산업혁명 당시, 기존의 숙련노동자들이 공장의 기계가 자신들의 일거리를 빼앗아 간다고 격렬히 저항한 것과 마찬가지로, 운하에서 사람이나 말의 힘으로 배를 끌어 주는 일을 생업으로 삼던 사람들은 사이밍턴의 증기선의 운항을 거세게 반대하고 나섰다. 그들은 증기선이 달리면 파도 때문에 운하의 둑이 무너지게 될 것이라든지, 증기선에서 내뿜는 매연이 농작물을 망칠 것이라는 등의 갖가지 이유를 대어 정부에 증기선의 운항금지를 촉구하는 등 조직적으로 저항하였고, 사이밍턴에게 갖은 욕설과 협박을 해대기 일쑤였다. 사이밍턴은 그들에게 비록 지금은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인간생활에 증기선이 유용하게 쓰이게 되면 결국은 모든 사람에게 큰 득이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으나, 당장 자신들의 밥줄을 걱정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막무가내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이밍턴은 샤를로트 던다스호의 운항을 포기하였고, 그간 증기선의 개발 에 많은 돈을 들였던 그는 가난에 시달리다가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풀턴보다 앞서서 증기선을 개발했던 많은 사람들이 실용화에 실패하고 세상에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사라져간 이유로는, 그들이 개발한 증기선의 성능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다든지, 혹은 증기선이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둘 만한 여건이 마련되지 못했다든지 등의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풀턴의 성공도 결국은 그들의 선구적인 노력과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가능했을 것이며, 그들의 희생과 시행착오가 후세의 발달을 앞당기는 밑거름이 되었음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14. 불운의 선구자들(2)

증기기관차의 아버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 1781-1846). 원래 탄광에서 일하던 그는, 갱내에서 폭발사고의 위험이 없는 "안전등"을 발명하여 역시 비슷한 시기에 안전등을 발명한 과학자 데이비(Humphry Davy;1778-1829)와 우선권다툼을 벌이기도 했고, 탄광의 물을 퍼내는데 쓰이던 증기기관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결과, 여러 탄광의 증기기관 고장수리를 도맡게 되는 "증기기관의 전문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증기기관차를 개발하고 실용적으로 보급시키는 데에 성공하여, 육상교통의 혁명을 불러온 인물로 유명하다. 그가 증기기관차의 대명사로 후세에 널리 이름을 날리게 된 데에는, 물론 그가 제작한 증기기관차가 다른 경쟁자들의 것보다 성능이 우수했다는 것도 큰 이유겠지만, 그의 아들인 로버트 스티븐슨이 함께 철도가설사업에 일생을 걸고 매진한 결과, 증기기관차가 기존의 마차를 대체하는 교통수단으로 자리를 굳히는 데에 크게 공헌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다면, 조오지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차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일까? "아니다"가 맞는 답이다. 스티븐슨보다 앞선 증기기관차 연구의 선구자들도 꽤 여럿이 있다.

증기기관을 수레에 장착하여 움직이도록 하는 시도를 처음으로 한 사람은 프랑스의 군사기술자 퀴뇨(Nicolas Joseph Cugnot; 1725-1804)이다. 그는 1769년 증기기관차의 모형을 만든 후, 레일 없이 길 위를 달리는 실물의 "증기자동차"를 성공적으로 제작하였다. 그의 증기자동차는 앞바퀴 한 개, 뒷바퀴 두 개가 달린 삼륜차였고, 앞부분에 육중한 증기기관이 장치되어 있었는데, 사람의 걸음걸이와 별 차이가 없을 정도로 속력이 느렸고, 15분마다 정지하여 연료인 석탄을 공급해 주지 않으면 안돼는 불편한 자동차였다. 그러나, 당시의 프랑스 육군대신은 말 대신 퀴뇨의 증기자동차로 막강한 나폴레옹 군대의 대포를 끌 수는 없을까 생각하여, 큰 관심을 가지고 실험해 보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퀴뇨의 증기 차는 파리의 거리를 시험 운행하게 되었는데, 평소보다 훨씬 빠른 속력을 내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모퉁이를 돌면서 남의 집 담장을 들이받고 넘어지고 말았다. 이 사고로 시험운행에 참가했던 군의 고위층 인물도 부상을 당하여, 퀴뇨는 위험한 물건을 만든 죄로 감옥에 갇히고 말았고, 증기자동차도 다시는 운행되지 못하도록 창고에 깊숙이 처박히게 되었다.

그후, 다시 증기기관차를 발명하려 노력했던 사람으로, 영국의 머독(William Murdock; 1754-1839)이 있다. 1754년 에이셔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일찍부터 기계제작 등에 뛰어난 재주를 보였는데, 23세때 보울튼-와트 상회에 취직하였다. 보울튼-와트 상회는 성능 좋은 증기기관을 개발한 제임스 와트가 사업가 보울튼과 손잡고 설립한 회사로서, 탄광배수용 증기기관을 만들어 판매하는 사업이 날로 번창하던 중이었다. 머독은 콘월 지방 주재기사로 일하면서, 증기기관차의 연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자신의 회사에서 만드는 증기기관에 대해 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증기기관차를 개발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1784년 도로를 달릴 수 있는 증기기관차의 작은 모형을 완성하여 실험하였는데, 처음에는 집안에서 실험하다가, 어느 날 집밖에서도 실험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을 마치고 온 그는, 밤에 마을에서 좀 떨어진 교회로 향하는 작은 길에 증기 기관차 모형을 가지고 나가 엔진에 불을 붙였다. 그 증기기관차 모형은 작았기 때문에, 사람이 타고 운전하기에는 어려웠는데, 증기기관차는 곧 소리를 내면서 빠른 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고, 그가 급히 뒤쫓아갔으나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하필 그때 교회 밖으로 걸어 나오던 목사가 자기에게 달려오는 머독의 증기 기관차를 보고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뭔가가 불꽃을 내뿜으면서 식식거리고 덤벼드는 모습에, 목사는 악마가 자기를 습격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람 살리라고 아우성 쳤다.

머독은 목사에게 사실을 설명한 후 사죄하였고, 자신의 증기기관차를 간신히 붙잡아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소문이 멀리 와트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와트는 머독이 증기기관차에 열중하느라 회사 일을 소홀히 하게 될지 모른다고 우려하여, 동업자인 보울튼으로 하여금 머독의 증기기관차연구를 중단하도록 하라고 종용하였다. 보울튼이 머독에게 간 것은 공교롭게도 머독이 자신의 증기 기관차 특허를 출원하려고 런던으로 가던 도중이었는데, 보울튼은 머독을 간신히 설득하여 증기기관차 개발을 포기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머독은 비록 "증기기관차의 발명자"로 역사에 남을 기회는 놓쳤으나, "꿩 대신 닭" 격으로 석탄가스를 이용하여 불을 켜는 방법을 연구하여 가스등을 발명하였고, 이것의 제작, 판매에도 성공하여 오늘날의 도시가스사업을 출발시킨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실용적인 증기기관차를 발명한 사람을 꼽으라면, 같은 영국 사람인 트레비딕 (Richard Trevithick; 1771-1833)이라고 답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그도 역시 광산에서 증기기관의 기사로 일하면서, 사람이 타고 달릴 수 있는 노상증기기관 차의 발명에 착수하였다. 그는 고압증기를 이용한 증기기관을 설계하였고, 마을의 대장간에서 조립하여 6명 이상이 탈 수 있는 증기기관차를 성공적으로 제작하였다.

180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트레비딕은 친구들과 함께 증기기관차의 시운전을 하였는데, 같이 탔던 사람들은 불안에 떨기도 하였으나 증기기관차는 험한 비탈길을 별 사고 없이 잘 달렸다. 이듬해에, 그는 다른 증기기관차를 제작하여 특허를 취득하였고, 이를 계기로 상업적인 운행에도 나섰으나 별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런던에서 승객으로부터 요금을 받고 증기기관차를 운행하기도 하였으나, 기관차의 전복사고 이후 사람들이 외면하는 등, 증기기관차의 실용화는 발명자의 의도만큼 따라주지 못했다. 트레비딕은 크게 실망하여 남아메리카로 이주하여 광산기술자로 일하다가, 그곳에서도 하는 일이 잘 안풀려 영국으로 돌아 온 후, 고향의 빈민구제시설에서 보호를 받다가 1883년에 불행한 삶을 마쳤다. 1932년에는 그의 증기기관차가 처음 달렸던 언덕에 그를 기념하는 동상이 설립되어, "불운한 증기기관차의 발명자"의 업적을 기렸다.


15. 바퀴를 부드럽게

수레바퀴는 인류가 고안해낸 중요한 발명품들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의 하나이다. 너무 아득한 옛날의 일이라, 정확히 언제, 누가 처음으로 만들었는지는 도저히 알 길이 없으나,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6천년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보다는 늦지만 메소포타미아, 인도 등에서도 기원전 수천년 전부터 수레를 이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퀴 살이 있는 수레바퀴는 기원전 2천년 전 무렵 이집트에서 발명된 것으로 보이며, 소나 말이 끄는 수레도 여러 문명지역에서 만들어져 교통, 운송수단으로서 널리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바퀴의 모양이나 구조는 그후로 매우 오랜 세월동안 거의 변화가 없었다. 마차 등의 운송수단에 쓰이는 바퀴는 근대사회에서도 방사살 모양의 쇠바퀴가 대부분이었고, 자동차발명의 선구자 벤츠, 다이뮬러 등이 가솔린자동차를 개발하던 초기에도 쇠바퀴가 그대로 쓰였다. 심하게 덜컹거리고, 승차감이 매우 나빴을 것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오늘날과 같은 공기타이어가 발명된 것은 19세기말경으로서, 고작 100년 남짓 전의 일이었다.

오늘날에는 승용차, 버스, 트럭 등 온갖 자동차들의 발전과 아울러, 타이어의 발전 또한 괄목할 만하다. 광폭타이어, 겨울용 타이어 등, 보다 쾌적한 승차감과 안전성을 제공하기 위한 공기타이어의 신제품 개발경쟁이 신종자동차 개발경쟁 못지 않게 치열하다.

그러면, 이처럼 중요한 공기타이어를 처음으로 발명한 사람은 누구일까? 그 주인공은 기계기술자나 관련 분야의 학자가 아니라, 뜻밖에도 수의사라는 직업을 가졌던 영국의 던롭(John Boyd Dunlop; 1840-1921)이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격언에 걸맞게, 마차로 왕진을 자주 다녔던 그는 보다 안락한 왕래를 위한 방안을 고심하던 중, 공기타이어를 발명하기에 이른 것이었다. 수의사 던롭은 에든버러 어빈즈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1862년 북아일랜드의 벨파스트에서 가축병원을 개업하였는데, 가축들의 병을 고쳐 주려고 먼 곳까지 왕진을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주로 마차를 타고 다녔는데, 험하고 울퉁불퉁한 시골길을 달릴 때마다 쇠바퀴를 단 마차는 크게 흔들렸고, 던롭은 하마터면 떨어 질 뻔한 적도 많았다. 한번은 마부에게 바퀴를 좀 더 부드럽게 만들어서 안전하게 달릴 수 없겠느냐고 묻자, 마부는 바퀴가 딱딱하지 않으면 쉽게 부서져 버리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였다. 그 이후로 던롭은, 안전하고 부드럽게 달릴 수 있으면서도 튼튼한 바퀴를 만들 수는 없을까 하고 자주 생각하게 되었으나 마땅한 방법을 찾지는 못하였다.

던롭이 수의사로 일한 지 거의 20년이 다 되어서, 어느 집에 왕진을 갔다가 우연히 집주인으로부터, 런던에서는 고무를 단 바퀴가 자전거에 쓰인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오랫동안 바퀴에 대해 생각해 오던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즉시 아들의 세발 자전거를 꺼내어 자전거바퀴를 고무호스로 감아 보는 실험을 하였으나, 별로 신통치 않았다. 그는 다시 고무호스 안을 헝겊으로 채워 보는 등, 여러 시도를 하였으나, 역시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탄력 있고 부드러운 바퀴를 만들기 위하여 고무 안을 무엇으로 채우면 좋을까 고민하던 그는, 어느 날 아들의 축구공에 바람을 넣어 주다가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바로 공기를 고무호스 안에 가득 채우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던롭은 고무 튜브를 이용하여 공기타이어를 만들기 위해 매달렸고, 처음에는 튜브가 쉽게 터지는 등, 어려움도 많았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오늘날과 같은 공기 타이어를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가 보다 나은 바퀴를 처음 구상한지 26년만인, 1888년의 일이었다. 사실, 공기타이어의 원리 자체는 톰슨이라는 사람이 오래 전에 구상하여 1845년에 특허까지 취득한 상태였으나, 던롭은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독자적으로 시행착오를 거듭한 끝에 공기타이어를 개발, 제작한 것이다. 던롭의 친구들은 공기타이어와 같은 훌륭한 발명품을 사업화 하면 크게 성공할 거라고 조언하였고, 그것을 받아들인 던롭은 자신이 발명한 공기타이어의 특허를 신청하고 던롭 러버회사를 설립하여 공기타이어의 보급에 힘썼다. 당시에는 주로 자전거바퀴용으로 보급하였는데, 광고를 위한 매스미디어 등이 그다지 발달하지 못한 시대였으므로 대중적으로 빠르게 보급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던 중, 공기타이어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1895년의 영국 자전거 경주대회였다. 15대의 자전거가 동시에 출발선을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흄이라는 선수의 자전거가 다른 자전거들을 훨씬 앞질러 쏜살같이 내달렸다. 마치 어린아이와 어른의 경주처럼, 다른 선수들은 도무지 상대가 되지 않았고, 그 광경을 본 관중들과 선수들은 다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승은 말할 것도 없이 흄의 차지였고, 경기가 끝난 후 그 비결을 묻는 많은 사람들에게 흄은 비로소 공기타이어 자전거의 비밀을 털어놓았다. 다른 선수들의 자전거바퀴는 모두 타이어 속까지 고무로 차 있었으나, 흄의 자전거바퀴는 공기타이어를 장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처럼 빨리 달리는 것은 당연하였던 것이다.

그후, 공기타이어의 우수성은 널리 알려지게 되어 가솔린 자동차에도 공기타이어를 이용하게 되었고, 특히 미국의 포드가 자동차를 대량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자, 공기타이어 역시 널리 대중적으로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던롭 러버회사는 그 후 말레이지아, 나이지리아 등지에서 고무농장을 경영하는 등, 유럽최대의 타이어회사로 성장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교통수단의 혁명의 시대에도, 공기타이어는 없어서는 안될 필수 부품의 하나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6. 맥주통과 청진기

"의사"의 이미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흰 가운에 청진기를 걸친 모습을 연상하게 된다. 최근에는 전기, 전자, 컴퓨터 등의 현대 과학 기술을 동원한 입체촬영장치, 초음파진단장치 등 온갖 첨단의료장비들이 널리 활용되고 있는 터이니, "청진기"가 병의 진단에서 이용되는 비중은 예전보다 많이 줄었을지 모르지만, 아직도 청진기는 의사의 필수품목 1호로 여겨진다. 또한, 경험 많은 의사들이 의료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환자의 가슴, 배 등을 두드려서 그 소리로 환자의 상태를 진단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환자의 몸을 두드리거나, 청진기 등으로 환자의 병을 진단하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은, 의학의 발전사에 비하여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고대 그리스의 힙포크라테스가 자기의 귀를 직접 환자의 가슴에 대고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어서 진찰하는 방법을 이용하였다고 알려졌으나, 그후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환자를 진단하는 방법에는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 18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오스트리아의 아우엔브루거, 프랑스의 코르비자르, 레에네크와 같은 의사들에 의해서 근대적인 진단법이 개발되었다.

1722년 오스트리아 그라츠 태생의 아우엔브루거(J. L. Auenbrugger;1722-1809)는 세상에서 처음으로 환자의 가슴 등을 두드려 병을 진단하는 방법을 알아낸 인물이었다. 그가 이러한 진단법을 개발할 수 있게 된 배경으로서, 재미있는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그의 아버지는 여관을 경영하던 사람이었는데, 그곳에서 파는 맥주는 술맛이 좋기로 유명해서, 여러 지방의 나그네들이 몰려들어 항상 붐볐다고 한다. 그래서, 맥주가 순식간에 동나는 경우도 많았는데, 그때마다 손님들의 원성과 성화가 빗발쳤음은 당연한 일이다. 손님을 대접할 맥주가 떨어지지 않도록, 맥주통 안에 맥주가 어느 정도나 남아 있는지 항상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는데, 육중한 맥주통을 들어보거나, 그 안을 들여다보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아우엔브루거의 아버지는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어서, 이것을 해결할 묘안을 찾아내었는데, 바로 맥주통을 주먹으로 두드려보는 방법이었다. 맥주통을 두드려서 맥주량을 알아내는 그의 기술은 아주 뛰어나서, 그 후로는 맥주가 떨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후원으로 당시의 명문대학이었던 비인 대학 의학부를 마친 아우엔브루거는, 의사가 되어 여러 환자들을 돌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환자의 병을 진단하는 방법은 거의 개발되지 않고 있었다. 중세와는 달리, 의사가 시신을 해부하는 것은 가능하였으나, 살아 있는 환자의 속을 들여다 볼 재주는 어느 누구도 없었던 것이다. 마땅한 환자의 진단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아우엔브루거는, 어느 날 좋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가 맥주통 안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통을 두드려서 그 안의 맥주량을 알아내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로, 환자의 가슴을 두드려 보면 환자의 병 상태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후, 아우엔브루거는 진찰하는 환자들마다 가슴, 배를 두드려 그 소리를 기억해 두었고,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은 그 소리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또한, 여러 해에 걸쳐서 그 일을 반복한 결과, 어느 병에 걸리면 어떤 소리가 난다는 것을 훤하게 알게 되었다. 그는 1761년, 자신의 연구 결과를 모아서 "가슴을 두드려 병을 알아내는 새로운 진단법"이라는 책을 써서 내게 되었다. 이것은 병의 진단법에 있어서 획기적인 발전이라고 평가되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의사들은 대부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아픈 사람의 몸을 두드리면, 병세가 더욱 악화될 것이 뻔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음악의 도시로 유명한 비인에서 의사일을 하던 그에게, "환자의 몸에서 나는 소리로 오페라를 작곡하려고 그러느냐?" 라고 빈정대는 사람마저 있었다.

이처럼, 아우엔브루거의 새로운 진단법은 오랫동안 빛을 보지 못하였으나, 이후 프랑스의 의사 코르비자르(J. N. Corvisart des Marest; 1755-1821)에 의해서 널리 소개될 수 있었다. 코르비자르는 당시 프랑스왕실의 시의로서 나폴레옹이 전적으로 신뢰했을 만큼, 세계적인 의사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1808년, 우연히 아우엔브루거의 책을 읽은 그는, 환자의 가슴을 두드리는 진단법이 매우 훌륭한 것임을 인정하고 주위의 많은 의사들에게 이 방법을 권장하였다. 또한, 아우엔브루거의 저서를 번역하고 자신의 연구를 덧붙여서 새로운 책으로 출간하였다. 아우엔브루거의 타진법은 이렇게 해서 널리 보급되었고, 그에 힘입어 근대적인 진단법과 의학이 발전할 수 있었다.

당시의 저명한 의사였던 코르비자르에게 제자가 되기를 간청한 사람이 있었는데, 레에네크(R. T. H. Laennec; 1781-1826)라는 프랑스의 젊은이였다. 그는 1804년 대학을 졸업하여 의사가 된 후, 주로 폐결핵과 심장병의 연구에 많은 힘을 기울였다. 레에네크도 환자의 몸에 귀를 대고 그 소리를 들어서 진찰하는 방법을 주로 이용하였으나, 그다지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소리가 너무 작거나,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길을 걷던 그는, 어린아이들이 통나무를 사이에 두고 놀이를 하는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한쪽의 아이가 통나무를 두드리거나 못으로 긁으면, 다른 편의 아이는 통나무에 귀를 대고 소리를 들어보는 것이었다. 레에네크도 호기심이 생겨서, 체면을 무릅쓰고 통나무에 귀를 대어 보니, 상대편으로부터 소리가 크고 똑똑하게 전달되어 들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힌트를 얻은 그는, 곧장 집으로 달려가, 나무막대기를 깎아서 가족들의 가슴에 대어 보았다. 심장의 고동 소리가 더욱 크고 또렷하게 들렸고, 레에네크는 이것을 개량하여 환자의 숨소리나 박동소리를 듣기에 적합한 긴 원통형의 "가슴 검사기"를 고안해내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청진기의 원조인 것이다. 레에네크의 가슴검사기는 환자의 진단에 탁월한 효력을 발휘하여, 그의 병원에서는 수많은 폐결핵 환자, 심장병 환자들의 병명을 조기에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1819년, 자신의 오랜 연구를 모아서, "심장과 허파의 병을 귀로 들어서 진단하는 법"이라는 책을 내었으나, 환자의 진찰과 연구에 너무 무리를 한 나머지, 자신도 폐결핵에 걸려서 1826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레에네크가 죽은 후, 그의 가슴검사기를 개량하여 2개의 고무관을 귀에 연결하는 모양의 지금과 같은 청진기가 미국에서 개발되었다.

술의 양을 알기 위한 맥주통 두드리기와, 어린이들의 통나무 소리전달놀이가, 타진법과 청진기의 발명이라는 근대 의학의 발전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단순한 우연이나 행운으로만 볼 수는 없으며, 이러한 힌트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던 사람들의 공로가 더욱 크다고 할 것이다.


17. 나침반 이야기

지구의 남북을 가리킴으로써 방위를 알려주는 나침반은 참으로 중요한 도구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미지의 세계를 모험하는 탐험가나 먼바다를 항해하는 선원들에게 있어서 나침반은 생명이나 다름없는 소중한 존재이다. 오늘날에는 자동항법장치 등 첨단장비들이 비행기나 큰 선박에 장치되어 있을 것이므로, 나침반이 그대로 쓰이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겠지만, 먼 옛날에는 나침반이 없는 항해는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물론, 나침반이 발명되기 이전에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방위를 알아내어 항해할 수 있었겠지만, 흐린 날에는 그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에, 길을 잃고 헤매다가 좌초하거나 엉뚱한 곳으로 가기 일쑤였을 것이다. 따라서, 제 아무리 항해술이 뛰어난 민족이었다고 해도 가까운 인근해를 오가는 정도이지, 먼 대양이나 지구 반대편 쪽까지 가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콜롬부스에 의한 신대륙의 발견이나 마젤란의 세계일주항해 등도 나침반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므로, 이처럼 나침반은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면, 이토록 중요한 나침반은 누가 처음으로 발명한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나침반은 어느 한 개인에 의해서 발명되었다는 명확한 기록이 없으므로, 최초 발명자는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나침반이 서양에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발명되었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과학기술상의 발명, 발견 이 주로 서양에서 이루어졌으므로, 나침반도 서유럽에서 발명되었으리라 생각하기 쉬운데, 이 경우는 그렇지가 않다. 나침반은 종이, 화약과 함께 중국이 자랑하는 "3대 발명품" 중의 하나이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으로서, 나침반은 아니지만 방위를 알려주는 장치로서 지남차(指南車)라는 것이 있다. 나침반의 주요 구성물인 자석을 일명 지남철(指南鐵)이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서, 지남차도 속에 자석이 장치되어 있어서 항상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 쉬운데, 사실은 지남차는 나침반이나 자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한다.

지남차의 제작과 관련해서, 고금주(古今注)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소개되고 있다. 중국의 역사시대 이전, 이른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의 전설상의 임금인 황제(黃帝)가 나라를 다스릴 때, 한번은 황제의 부하 치우(蚩尤)라는 자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반란군과 황제의 진압군이 한 들판에서 서로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일 무렵, 치우가 연막을 만들어 피움으로써 황제의 진압군을 혼란에 빠뜨렸다고 한다. 황제의 군사들은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황제가 지남차를 만들어서 항상 남쪽을 가리켜 줌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치우를 잡았다고 한다. 또한, 기원전 12세기경 주나라의 주공이 지남차를 발명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이 역시 크게 믿기에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밖에, 지남차의 발명자 내지는 제작자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은 삼국시대의 마균(馬鈞), 한나라의 장형(張衡), 진(晉)나라의 구순(區純) 등이 있고, "원주율을 정밀하게 계산한 수학자" 조충지도 지남차를 만들어 보았다는 설이 있다. 그러고 보면, 중국 역사상 이름난 과학자나 기술자가 다 한번씩 지남차를 만들어 보았다는 셈인데, 그만큼 논란거리가 되어왔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송사(宋史) 여복지(輿服志)에는 지남차의 구조가 기록되어 있다고 하는데, 수레 위에 수직으로 세워 놓은 목제 인형이 톱니바퀴 장치에 의하여 늘 남쪽만을 가리키는 것이지, 속에 자석이나 나침반이 장치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오늘날의 정설이다.

그러면, 중국사람들은 어떻게 나침반을 발명하게 되었을까? 4세기경 갈홍(葛洪) 이라는 사람이 쓴 포박자(抱朴子)라는 책에는, "철로 된 바늘에 머릿기름을 발라서 가만히 물위에 놓으면, 바늘을 물위에 띄울 수 있다." 라는 대목이 나온다. 오늘날의 과학으로 설명한다면, 물의 표면장력에 의하여 바늘이 뜨게 된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포박자는 과학에 대한 서적이라기 보다는, 도인들의 술법이나 중국식 연금술에 대해 써 놓은 책이므로 그것이 곧 나침반의 발명을 의미한다고 하기는 힘들다. 다만, 매우 오래 전부터 중국사람들은 바늘이 물위에 뜨는 재미있는 성질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을 이용하여 점을 치거나 놀이를 하다가, 나아가서 나침반의 발명으로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할 수 있다. 11세기 송(宋)나라의 심괄(沈括)이 쓴 몽계필담에는 자석의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는데, 진북과 자북이 다르다는 것이 기술되어 있고, 당시 사람들은 자석바늘을 물위에 띄워서 방향을 알아보았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서, 나침반은 11세기경 중국에서 발명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또한, 12세기에 평주가담 이라는 책에는 "별이 보이지 않는 밤에는 지남침을 보면서 항해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러한 나침반을 이용한 항해기록은 서유럽이나 다른 지역의 기록보다 훨씬 앞서는 것이다.

중국의 나침반이 서유럽에 전래된 것은 약 12세기말경 아라비아의 선원들에 의해서인데, 당시 유럽에서는 "아라비아 사람들은 바늘같이 생긴 자석을 밀집에 꽂아 물위에 띄워서 북쪽을 알아낸다."라는 이야기가 전해졌다고 한다.

영어로 "Compass"라고 불리는 나침반의 어원은 라틴어의 "Compassus"로서, 이는 "원을 방위로 분할한다."는 의미이다. 나침반으로서의 모양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14세기경부터인데, 자침과 방위표를 하나로 만들어서 운반이 가능한 나침반이 이탈리아에서 제작되었고, 카르다노(Geronimo Cardano; 1501-1576)는 항해 중에 배가 흔들려도 나침반이 수평을 유지할 수 있는 장치를 발명하였다. 오늘날과 같은 모양의 나침반은 19세기 후반 영국의 물리학자 톰슨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석을 이용한 전통적인 나침반은 지구상의 진짜 북극을 정확하게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즉, 나침반이 가리키는 자북과, 실제 북극인 진북은 약간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극지방의 탐험이나 더욱 정밀한 방위가 요구되는 경우에는 적합하지 않다. 따라서, 자이로의 성질을 이용하여 지구자전에 유도되어 정북 을 가리키는 "자이로컴퍼스"가 개발되어, 대형선박 등에 널리 이용되고 있다. 오늘날에는 첨단컴퓨터와 인공위성까지 동원하여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고, 갈 길은 자동으로 제시해 주는 항법시스템(Navigation System) 등이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있으므로, 전통적인 나침반의 비중은 점점 줄어들지 몰라도, 나침반이 인류 문명의 발전에 미친 영향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18. 끈기의 승리

역사상 위대한 과학적 업적을 이룬 사람들은 다들 천부적 능력을 타고났거나,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과학자들 중에는 "천재적인 인물"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반드시 남들보다 탁월한 두뇌를 지닌 사람들에 의해서만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발명왕 에디슨이 언급한 바 있는, "천재란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루어진다."는 너무도 진부한 격언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과학적 발견에 있어서 과학자들의 피땀어린 장인적 노력 및 고난과 실패에 좌절하지 않는 끈기와 의지가 성공의 비결인 경우는 매우 많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연구에 몰두하여, 마침내 큰 업적을 이루고야만 과학자들 중에서도 독일의 화학자 에를리히(1854-1915)는 단연 빛나는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에를리히는 대학시절 일부 과목의 학점을 제때 취득하지 못하여 남들보다 1년 늦게 졸업했을 정도로, 처음에는 그다지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으로 평가되지 못했지만, 자신의 분야에서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결과 생화학 및 의학의 발전에 중요한 자취를 남길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현미경의 발명에 힘입어, 여러 미생물들의 정체가 밝혀지게 되었고 전염병에 대한 연구 또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전염병은 하늘이 내리는 벌이 아니라, 병원체인 미생물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라는 사실도 밝혀지면서, 여러 전염병의 예방 및 치료법에서도 큰 발전이 이루어졌다. 여기에 가장 공헌이 컸던 인물들을 꼽으라면, 백신의 발견자인 프랑스의 파스퇴르와 독일의 세균학자 코호를 들 수 있을 것이다.

파스퇴르는 미생물의 성질을 깊이 연구하여, 부패와 발효 등의 현상이 미생물의 작용이라는 것을 밝혔으며, 독창적인 실험을 통하여 생물의 자연발생설을 부정하는 확증을 제시한 바 있었다. 그는 또한 인간이나 가축의 전염병도 미생물에 의하여 생기는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당시 대부분의 의사들은 파스퇴르의 견해를 그다지 믿지 않았다. 코호는 탄저병을 일으키는 세균의 정체를 밝혀 내었고, 당시 최대의 난치병이었던 결핵의 병 원균도 발견함으로써, 전염병의 병원체는 미생물의 일종인 세균이라는 사실을 입증하였다.

코호가 세균학의 대가로서 이름을 날릴 무렵, 에를리히는 결핵균을 효율적으로 염색하여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여 코호로부터 극찬을 들었다. 코호의 연구소에서 일하던 에를리히는, 세균을 염색하는 방법을 응용하여 세균을 죽이는 약을 개발할 결심을 하였고, 몇 년 후 자신의 독립된 연구소를 차리게되자 이 일을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당시 독일은 리비히 등이 유기화학을 개척하여, 염료공업 등에 화학지식을 응용함으로써 새로운 물질들을 추출할 수 있는 방법이 많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에를리히는 세균의 분자만을 파괴하고 인체에는 아무런 해를 주지 않는 물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에를리히는 세균만을 선택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물질을 "마법의 탄환"이라 이름 붙였는데, 처음에 연구한 것은 가축들의 질병을 일으키는 "트리파노조마"라는 미생물을 죽이는 약품의 개발이었다. 그는 생쥐를 대상으로 하여 여러 염료들을 써서 실험을 거듭한 끝에 트리파노소마를 파괴하는 염료물질을 발견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것의 성공을 바탕으로 에를리히는, 짐승의 질병이 아니라 인간의 질병을 치료하는 물질의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매독의 병원균인 스피로헤타가 그의 첫 번째 공격 대상이었다. 여러 종류의 화학물질을 검토하던 그 는, 비소(As) 계열의 화합물에 눈길이 갔는데, 비소는 매우 강한 독극 물질로, 미생물을 죽이는 효과가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소는 미생물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독극물이었으므로, 그대로는 "마법의 탄환"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인체에는 부작용이 없으면서도 병원균을 효과적으로 죽일 수 있는 분자구조를 갖춘 화합물을 만들어 내는 일이었는데, 여기에는 화학뿐 아니라, 의학, 생물학 등의 지식도 필요하였으므로, 에를리히의 연구소에는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모여들어 공동으로 연구를 하게 되었다.

에를리히는 주로 토끼를 이용하여 실험을 하였는데, 투여하는 물질의 분자구조를 조금씩 달리 하면서 토끼와 스피로헤타균의 변화를 지속적으로 살핀다는 것은 대단히 힘들고도 지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매우 많은 토끼들이 이 실험에서 희생되었으나, 실험 횟수가 수백회가 넘도록 원하는 결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즉, 스피로헤타균이 잘 죽는 경우는 토끼도 상태가 나쁘거나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실험에 참여한 연구원들의 불평과 회의도 높아만 갔다. 그러나, 에를리히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실험을 계속한 결과, 1910년에 이르러 606번째 실험에서 드디어 원하는 물질을 얻을 수 있었다. 토끼의 스피로헤타균을 부작용 없이 모두 죽인 그 화학물질을 인체 실험에도 적용해본 결과, 역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발견한 이 물질을 실험횟수를 따서 "606호"라고 지칭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인류 최초의 화학적 치료약품인 "살바르산"이다.

병원에 가면 대부분 주사를 놓거나 조제약을 주듯이, 오늘날 질병을 치료하는 가장 일반적인 수단으로 자리잡은 화학요법은 바로 에를리히에 의해서 처음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또한, 지금도 새로운 약이 개발되면 "OOO호" 하는 식으로 부제를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도 에를리히의 "606호"가 그 유래가 아닌가 싶다. (언젠가 중국에서 개발된 탈모증 치료약에도 101호니, 102호니 하는 이름이 붙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생화학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첨단 실험장비들이 갖춰진 오늘날의 신약개발시스템과는 달리, 모든 일은 수작업에 의존했던 당시에 에를리히가 600번이 넘는 실패를 무릅쓰고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대단한 집념과 끈기가 아니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의지의 과학자" 에를리히는 말년에 건강이 나빠져 온천에서 휴양을 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8월 20일 동맥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 전화 이야기 (1)

"전화기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으레히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1847-1922)을 떠올릴 것이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에리셔 그레이라는 발명가도 전화기발명에 성공했으나, 불과 한 시간 차이로 벨보다 특허출원이 뒤늦어서 "안타까운 2등"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는 얘기는, 몇 년 전 국내 모 그룹의 이미지 광고에도 원용되었을 정도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위의 이야기들은 그다지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그간 "최초 발명의 인물"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 경우도 많다는 사실은 그간 "...X파일" 전편들에서 종종 언급된 바 있다. 그런데, 전화기의 최초 발명자 역시 이 경우에 속한다. 독일의 공업학교 선생으로 일하면서 전화기를 개발했던 필립 라이스야말로 최초 발명자로 기록되어야 옳다.

19세기는 물리학의 분야 중에서도 "전자기학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전기 및 자기현상, 전류의 특성, 모터 및 발전기 등에 대하여 많은 연구성과들이 나왔고, 페러데이 등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노력한 결과 전자기 현상의 본질에 대하여 더욱 깊은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소리는 공기의 진동에 의해서 전달된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었으므로, 그 진동을 전류의 강약으로 바꿀 수 있다면, 소리를 멀리 보낼 수 있으리라는 예측도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에 기초하여, 처음으로 전화기를 만든 사람이 필립 라이스인데, 집이 가난했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여러 직장을 떠돌다가 각고의 노력 끝에 원하던 공업학교의 선생이 될 수 있었다. 낮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밤에는 전화기의 발명을 위해 애썼는데, 그가 주로 이용한 도구는 맥주통 마개, 돼지 오줌보, 스프링과 바이올린 등의 여러 가지 헌 물건들이었다.

맥주통 마개를 사람의 귀 모양으로 깎은 후, 돼지 오줌보를 붙이고 스프링을 연결하여 "송화기"를 제작한 후, 전자석에 바이올린을 연결하여 "수화기"를 만들어서, 최초의 전화기 실험에 성공하였다. 그의 "전화기"는 구조도 조잡하고, 모양도 괴상하기 짝이 없었으나, 아무튼 "소리를 전달하는 신기한 장치"로 소문이 나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라이스는 자신의 전화를 좀 더 개량하는 한편,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의 실용화에도 뜻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전화기의 실용적인 보급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라이스는 1861년 10월, 프랑크푸르트의 과학자 모임에서 자신의 발명품을 선보였으나, 다들 전화기를 "흥미로운 장난감"으로 취급했을 뿐, 어느 누구도 실용적인 이용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라이스는 전화기를 거듭 개량하여 판매에 힘쓰는 등, 전화기의 보급에 백방으로 힘썼으나, 그의 모든 노력도 헛되이 전화기는 그의 생전에는 끝내 실용화되지 못했다. 가난과 실망에 지친 라이스는 폐결핵을 앓게 되었고, 결국 1871년 1월 쓸쓸히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선구적인 발명가 한 사람이 불행히도 자신의 "때'를 만나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 것이다.

훗날, 미국인 그레이엄 벨이 다시 전화기를 발명하여 특허를 취득하고, 회사를 설립하여 전화기의 실용적인 보급에 크게 성공하자, 독일의 라이스의 고향사람들은 그때서야 크게 흥분하고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그들은 "필립 라이스가 벨이나 그레이보다 훨씬 앞서서 전화기를 발명하였다."고 주장하는 한편, 라이스의 묘소에 "전화기의 참된 발명자 - 필립 라이스"라는 비석을 세우고 그를 추모하였으나, 이미 저 세상 사람인 라이스는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20. 전화 이야기 (2)

독일의 필립 라이스의 전화를 처음으로 발명하고도, 실용화에 성공하지 못하고 죽은지 얼마 안되어, 미국에서는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과 그레이(Elisha Gray; 1835-1901)라는 두 명의 발명가가 거의 같은 시기에 전화기의 발명에 성공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전화기의 최초 발명자"로 알고 있는 벨은 1847년 영국 에든버러의 유명한 음성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음성학자이면서 농아들에게 말을 가르치는 교육자였고, 특히 아버지는 눈으로 보고 이야기하는 방법인 "시화법"을 창안해서 세계적으로 명성을 떨친 학자였다.

벨은 영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집안의 전통을 따라 음성학을 연구하였고, 보스턴 대학의 음성생리학 교수로 일하면서 농아학교를 운영하기도 하였다. 벨이 전화를 발명하게된 동기도 역시 농아들에게 발성법을 더 잘 가르치려 한 과정에서 생긴 것이었는데, 공기의 진동을 눈에 보이게 하는 장치를 만들어 소리의 구조를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면, 농아들의 교육에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전류를 이용하여 소리를 재생시키는 방법을 연구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소리를 전기로 바꾸어 멀리 전달할 수도 있겠다는 점에 착안하여 전화의 발명에 착수하게 되었다.

벨은 기계 제작이나 전기학에는 "아마추어" 수준이었으나 토머스 와트슨이라는 뛰어난 조수의 도움을 얻어 전화발명에 필요한 모형제작과 실험 등을 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 미국의 저명한 전기학자 헨리로부터 조언도 얻고, 자신이 경영하는 농아학교 학생들의 학부형 중 두 명이 연구비를 지원해 주는 등, 벨은 발명가로서 여러 가지로 운이 따랐다고도 할 수 있다. (벨은 자신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허버드의 딸과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 벨과 와트슨은 1875년부터 본격적으로 전화기의 발명에 몰두하였는데, 각고의 노력과 개량을 거듭한 끝에 1876년 초에 드디어 전화기를 완성하였다. 두 사람이 개발한 전화기의 방식은, 전자석과 철판을 장치하여 음파의 진동이 전자기유도를 일으켜서 전류를 발생시키고, 수신기 쪽은 반대의 경로를 밟아서 전류를 소리로 바꾸도록 함으로써 사람의 음성을 전달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벨은 1876년 2월14일 미국 특허청에 전화기의 특허를 출원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날 그레이라는 발명가 역시 전화기의 특허를 출원하였다. 벨 측의 특허 출원이 한 시간 가량 빨랐기 때문에, 벨이 정식으로 전화기의 특허를 획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듯이 이 "간발의 차이" 때문에 벨은 대성공을 거두고, 그레이는 "안타까운 2등"으로 분루를 삼켰다고 보는 것은 큰 무리이다. 벨이 전화의 사업화 과정에서 성공을 거둔 진짜 이유는, 단순히 특허를 먼저 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전화의 실용성"에 대하여 상대방보다 더 큰 관심과 확신을 갖고서 전화기를 꾸준히 개량하고 전화사업을 발전시켜 나아간 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벨과 비슷한 시기에 독자적으로 전화기를 발명한 그레이는 1835년 미국 오하이오주의 한 농촌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학으로 공부를 하였고, 전자기학에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한 결과, 이 방면의 유능한 발명가로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 그레이가 발명한 전화기 역시 벨의 방식과 비슷하였는데, 그레이는 전자기학 분야의 전문가였기에 벨의 전화기보다 성능 면에서 우수했다고 한다. 그레이가 독자적으로 전화를 개발하고도, 전화발명과 이후 사업화 과정에서 벨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만 것은, "1시간 차이의 불운"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레이 및 그와 관련된 회사가 "전화의 실용 가능성"에 대하여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전화기를 그저 "사람의 말을 전달하는 흥미 있는 장난감" 정도로 보았기 때문이다.

"전신의 발명자"인 모오스(1791-1872)가 1857년에 창업한 웨스턴 유니온 전신 회사는 당시 미국의 전신사업을 독점하면서 크게 번창하고 있었는데, 이 회사의 관계자들은 그레이가 전화 쪽보다는 다중전신 등 자신들의 회사와 직접 관련된 분야의 개발을 해줄 것을 더 원하였고, 그레이 스스로도 전화의 실용화에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전화라는 것은 통신수단이 되기에는 결점이 너무 많다. 이 기구는 우리에게 별 가치가 없다." 라고 한 웨스턴 유니온 회사 관계자의 말이 과학기술의 발전에 관련된 "역사적 유머"(?)가 되어 버린 것을 보더라도, 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벨은 이와는 반대로 "전화의 실용화"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서, 자신의 전화를 더욱 개량, 발전시켜 나아갔다. 1876년 6월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국 독립 100주년 기념 박람회에 그레이와 함께 자신의 전화를 선보인 벨은, 그곳에서 뜻밖의 행운의 인물을 만나게 되었는데, 예전에 자신의 농아학교를 견학하여 안면이 있었던 브라질 황제가 바로 그였다. "사람의 말을 전달하는 장치"인 벨의 전화기에 브라질 황제가 큰 흥미를 표한 것을 계기로, 전화기는 박람회장에서 대단한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이에 고무된 벨은 협력자들과 함께 벨 전화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전화사업에 나서게 되었다.

전화를 실용적으로 보급시키려는 벨의 노력이 차츰 성공을 거두게 되어, 전화는 장난감이 아닌 새로운 통신수단으로서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자, 예전에 전화의 실용성을 낮게 평가해 온 웨스턴 유니온 회사 역시 전화사업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 웨스턴 유니온 회사는 그레이의 전화 관련 특허를 사들인 상태였으므로, 벨 전화회사와 웨스턴 유니온 회사는 전화사업을 둘러싸고 격렬한 특허분쟁을 벌이게 되었다. 오랜 시간을 끈 소송 끝에 두 회사는 화해하여, 웨스턴 유니온 회사는 전화사업을 포기하는 대신에 벨 회사가 전화로 얻는 이익의 일부를 나눠 갖고, 벨 회사는 전신사업에 손대지 않기로 합의하였다.

이후에 벨 회사는 미국의 전화사업을 독점적으로 주도할 수 있게 되었고, 벨 회사는 전화기의 개량에 계속 힘쓰는 한편, 사업적인 측면에서도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발명왕 에디슨이 1878년에 탄소알갱이를 이용한 송화기를 개발하여 특허를 취득하였는데, 벨 전화의 송화기보다 훨씬 우수한 성능을 지니고 있었다. 벨 회사는 즉시 에디슨의 특허를 사들여서, 에디슨의 송화기와 벨의 수화기를 결합하여 더욱 성능 좋은 전화기를 제작할 수 있었고, 그 후로도 전화에 관한 우수한 특허가 나오면 곧 매입하여 전화사업의 발전에 이용함으로써, 벨 회사의 독점적 지위는 더욱 굳건해졌다.

벨 전화회사의 새 이름인 AT&T사는 오늘날에도 미국의 통신산업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 회사 산하의 벨 연구실 (Bell Lab.)에는 수많은 우수한 과학기술자들이 모여들어, 통신분야 뿐 아니라 다른 전기, 전자 분야에서도 중요한 신발명품들을 끊임없이 개발해내고 있다.



21. "대륙은 살아 있다."

세계지도를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남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해안선 모양에 눈길이 간 적이 있을 것이다.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은 크기도 엇비슷하거니와, 특히 아프리카의 서부 해안선과 남아메리카의 동부 해안선은 모양이 아주 흡사해서, 마치 "조각 그림 맞추기"를 하면 아주 잘 들어맞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조금만 생각을 보탠다면, 애초에 이 두 대륙은 하나였는데, 나중에 분리되어 이동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실제로 처음 한 사람은 독일의 지구과학자이며 탐험가인 베게너(Alfred L. Wegener; 1880-1930)였다. 1880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 시절 천문학을 공부하였고, 졸업 후에는 왕립기상관측소에서 일하면서 기상학, 지질학, 고생물학 등을 폭넓게 연구하였다. 또한, 기구를 타고 공중을 여행하기도 하고, 개썰매로 그린란드와 북극을 탐험하는 등, 탐험가이자 과학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다.

그가 "대륙이동설"을 처음 떠올린 것은 1910년 무렵이었는데, 북극탐험에서 돌아와서 세계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남아메리카의 브라질 동부해안선과 아프리카 카메루운 일대의 서부해안선이 너무도 비슷한 모양인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본 세계지도는, 태평양이 가운데에 표시된 아시아식과는 달리, 대서양을 가운데에 두고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가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었으므로, 그는 두 대륙이 처음에는 하나로 붙어 있다가 분리되어서 이동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베게너 자신도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으나, 한 고생물학자의 연구논문에도 두 대륙이 옛날에는 연결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 있어서, 더욱 대륙이동설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관련된 지질학, 고생물학 자료들을 널리 수집하고 연구한 그는, 1912년에 대륙 이동설에 대한 자신의 첫 논문을 발표하였고, 1915년에는 지질학사에 길이 남을 만한 중요한 저서인 "대륙과 해양의 기원"이라는 책을 써서 출판하였다.

"전 세계의 대륙은 원래에는 판게아(Pangaea)라는 초대륙으로서 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었으나, 지금으로부터 3억년 전쯤에 분열하기 시작해서, 각 부분이 동․서․남․북으로 계속 이동한 결과, 약 100만년 전쯤에는 지금과 같은 5대양 6대주의 모습을 형성하게 되었다." 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고, 이것에 의해 바다와 산맥의 형성, 섬의 생성과 소멸 등의 여러 문제들도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베게너의 견해에 관하여, 세계 지질학계는 격심한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는데, "대륙이 움직인다."는 황당하고 생소한 주장에 보수적인 대다수 정통 지질학자들의 반박은 한편으로는 당연한 것이었다. 대륙은 영구불변하며, 다만 침식에 의하여 표면이 깎여 나갈 뿐이라는 생각이 당시 학계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베게너는 자신의 대륙이동설이 단순히 세계지도에 의한 "조각그림 맞추기"의 산물이 아니라, 단층구조, 산맥 등 분리된 대륙들의 주변 지형이 유사한 데다가, 지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대륙의 양안에 비슷한 동물이 살았다는 등, 여러 가지 지질학적, 고생물학적 증거들을 거론하였다. 이에 대하여, 반대론자들은 분리된 양 대륙이 옛날에는 육교모양의 긴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가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는 둥, 더욱 희한한 반론을 펴기도 하였으나, 당시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에는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다.

무엇보다도, "정말로 대륙이 이동하였다면, 그 힘의 원천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였다. 여기에 대해서 베게너 자신도 만족할 만한 견해를 내놓지는 못했다. 지구의 모습에 따른 중력의 차이나 달에 의한 조석력 등을 들기도 하였으나, 대륙을 이동시킬 정도의 엄청난 힘으로 보기에는 무리였고, 반대론자들을 설득시킬 만한 근거를 베게너는 끝내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의 대륙이동설을 입증할 만한 새로운 증거를 찾기 위해, 1930년 제4차 그린란드 원정을 떠났으나, 11월1일 아침 눈보라 속에서 개썰매를 끌고 강행군을 한 끝에 결국 그곳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의 시신은 이듬해에야 발견되었고, 베게너의 죽음과 함께 대륙이동설도 지질학계에서 차츰 잊혀져 갔다.

베게너는 비록 생전에는 자신의 주장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나, 그가 죽은지 20여년이 지난 후 "대륙이동설의 부활"을 알리는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부터 고지자기학의 연구가 활발해 지면서, 여러 곳의 잔류자기를 측정해 본 결과, 대륙이동설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여러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지구의 자극이 계속 변해왔기 때문에, 과거 지자기의 방향이 옛 암석들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고, 이들의 위치를 추적한 결과, 대륙이동설은 단순한 가설이 아니라, 명백한 사실임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또한, 심해저의 연구 결과, 베게너가 생전에 입증하지 못해 애태웠던 대륙이동의 원천적 힘은 "맨틀의 대류"임이 밝혀졌다. 오늘날에는 맨틀 대류설과 아울러, 여러 대륙이 몇 개의 판으로 이루어져, 이들이 맨틀 위를 떠다니면서 이동한다는 "판구조론"이 지구과학계의 중요한 정설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베게너의 대륙이동설이 그 밑바탕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베게너 역시 생물학에서의 멘델의 경우처럼, 비록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였으나 이후 지구과학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업적을 남긴 인물로 길이 기억 될 것이다.


22. 생물은 저절로 생겨날까?

"모든 생물에는 어미가 있다." 라는 평범한 진리는, 오늘날에는 누구나 의심치 않는 상식으로 통할 것이다. 아무리 하찮은 생물이라도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개체로부터 발생한다는 사실은 당연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그러나, 먼 옛날에는 사정이 그렇지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물가에 있는 나무에서 거위가 생겨나고, 연못가의 돌에서 개구리가 생겨난다고 굳게 믿고 있을 정도로 "생물의 자연발생설"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생물학이 체계적으로 정립되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 시대에도, 고등한 생물들은 어미로부터 발생하지만, 하등한 생물들은 무생물로부터 "자연의 활력"에 의해 우연히 생겨난다고 설명되었다. 특히, 곤충이나 쥐와 같은 동물들은 흙이나 부패된 물질에서 자연적으로 생겨난다고 여겨졌다.

중세 이후까지도 널리 믿어졌던 이러한 "자연발생설"을 구체적인 실험을 통하여 최초로 입증(?)한 사람은 네덜란드의 의사인 헬몬트(J. Helmont; 1577-1644)이다. 그는 1642년에 땀에 젖은 더러운 셔츠와 밀이삭을 21일간 방치해 두었더니 셔츠에 배인 땀의 활력에 의하여 쥐가 생겨났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생물은 자연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아무리 하등생물이라도 어미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 학자들도 서서히 생겨났고, 이들은 "모든 생물은 알에서부터"라고 많은 예들을 통하여 주장하였다. 이탈리아의 레디(F. Redi; 1621-1697)도 그 중의 한 사람이었는데, 그는 생선도막 등을 병에 넣어서 실험을 하였다. 즉, 생선도막을 4개의 병에는 뚜껑을 씌운 채로 넣어 두고, 다른 4개의 병에는 같은 생선도막을 뚜껑을 씌우지 않고 방치하였다. 며칠 후에, 뚜껑을 열어 둔 병에서는 구더기가 생겼으나, 뚜껑을 씌운 병에서는 구더기가 발생하지 않은 사실을 관찰하고는, 이것을 자연발생설을 반대하는 근거로 주장하였다.

하지만, 레디의 실험 결과가 다른 모든 생물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자연발생설을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또한, 비슷한 무렵에 현미경이 발명되어서 미생물의 존재가 발견되자, 생물발생 논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계속되었다.

네덜란드의 레에벤후크(A. Leeuwenhoek; 1632-1723)는 자신이 만든 현미경으로 동물의 정자를 최초로 관찰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자의 내부구조까지 관찰할 수는 없었지만, 이를 바탕으로 생물의 발생학에 관해 연구하였고, 또한 국물이나 우유에서 미생물을 관찰한 후, "미생물의 자연발생"을 주장하였다.

1745년에 영국의 니담(J. T. Needham; 1713-1781)은 닭고기 즙과 야채 즙을 가열하여 시험관에 넣고 코르크마개를 막은 후, 다시 가열하여 방치해 두었는데도 많은 미생물들이 발생하였다고 보고한 후, 큰 생물들은 자연적으로 발생하지 않더라도, 미생물만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이탈리아의 스팔란차니(L. Spallanzani; 1729-1799)는 1765년에 비슷한 실험을 반복하면서, 니담이 마개를 잘못 막았거나 충분히 끓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였다. 즉, 시험관을 완전히 밀봉한 후 장시간 동안 펄펄 끓인 쪽에서는 미생물이 발견되지 않았으나, 마개를 느슨하게 막아서 약간만 끓인 쪽에서는 미생물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미생물의 자연발생설에 대하여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니담은 스팔란치니의 실험에서 고기국물 속의 생물발생의 요소가 장시간의 가열로 인하여 파괴된 데다가, 공기마저 변질되었기 때문에 미생물의 발생이 불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생물이 발생하는 데에는 "공기"가 꼭 필요하다는 견해도 그럴듯하게 보였기 때문에, 공기를 완전히 밀봉한 스팔란차니의 실험으로는 생물 자연발생설을 완전히 부정할 수 없었다.

생물의 자연발생 여부에 관한 지리하고도 오랜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은 "백신의 발견"으로 인류를 전염병의 공포로부터 해방시킨 프랑스의 과학자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 1822-1895)이다. 1822년 프랑스의 조그마한 시골에서 태어난 파스퇴르는 대학에서 뒤마 교수의 지도 아래 화학을 공부하였고, 유기물 의 부패나 포도주, 치즈의 발효 등이 미생물의 작용이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등, 미생물학의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그는 생물의 자연발생설이 잘못이라는 것을 명확히 입증하기 위하여, 플라스크에 설탕물과 효모의 혼합액을 넣고 플라스크의 목 부분을 가열하여 S자 모양으로 가늘고 길게 뽑은 후, 혼합 유기물용액을 끓여서 식힌 채로 공기 중에 방치하였다. 공기는 플라스크 안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만, 공기 중의 미생물이나 그 포자 등은 기다란 S자 관의 중간에서 붙잡힐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과연 파스퇴르의 추측대로, 몇 달이 지난 후에도 플라스크 안에서는 미생물이 발견되지 않았고, S자 관 부분을 잘라 버리거나, 플라스크를 기울여서 용액을 미생물이 붙잡힌 입구 부위에 접촉시켰다가 놓은 후에는 미생물이 자라기 시작하였다. 파스퇴르는 1862년 무렵까지 자신이 고안한 이 절묘한 실험을 반복해 보임으로써 생물 자연발생설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생물은 같은 종류의 개체들로부터 생겨난다."는 생물 속생설을 확립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는 또한 스승 뒤마 교수의 부탁을 받고 누에의 전염병을 막는 연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고, 소의 탄저병과 닭 콜레라의 원인을 밝히는 과정에서 "면역"의 원리를 알아내어, 마침내 전염병의 예방 수단으로서 "백신"을 만드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것으로 당시 유행하던 광견병으로부터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등, 인류가 전염병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데에 획기적인 공헌을 한 파스퇴르는, 물리학에서의 갈릴레이, 뉴턴의 업적만큼이나 미생물학, 의학의 분야에서 불후의 업적을 남긴 인물로 길이 기억되고 있다. 또한 그가 진작에 언급한 바 있었던 "세균으로써 세균을 죽이는 시대가 올 것이다."는 예언은 페니실린, 마이신 등의 개발로 항생제의 이용이 일반화된 오늘날 어김없이 적중하는 등, 의학발전의 앞날을 정확히 꿰뚫어 본 혜안이었다고 할 것이다.

한편, 생물의 자연발생설의 부정은, "그렇다면 최초의 생명체는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을까?" 라는 더욱 어렵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게 되었다. 이러한 생명 기원론에 대해서는 구 소련의 과학자 오파린(A. I. Oparin)이 "원시지구에서 무기 물질로부터 유기물질로의 화학반응을 통하여 단 한번의 자연발생이 일어남으로 써 원시적인 생명이 합성되었을 것" 이라고 1936년에 "생명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주장한 바 있다.

이른바 "오파린 가설" 혹은 "코아세르베이트설"로 불리는 이 견해는 지금도 가장 유력한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생명체의 기원"이라는 난해한 문제를 완벽하게 설명하기에는 아무래도 여러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생명의 씨앗"이 우주의 다른 천체로부터 빛의 압력이나 운석 등에 의해 지구로 날아 왔다는 "천체 비래설"을 주장하는 학자들도 꽤 있고, 심지어는 "생명은 창조주에 의해서 창조된 것"이라는 메타 과학적(?) 견해마저도 아직까지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형편이다.


23. 뛰어난 해부학자가 시체 도둑?

해부학은 인체의 구조를 밝혀 내는 기초적인 학문으로서, 의학의 필수 과목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오늘날에도 정식 의학 교육을 받고 의사 자격을 취득한 사람 치고, 인체 해부 등의 임상 체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때 베스트셀러 소설로 인기를 누렸던) "소설 동의보감"에서도 명의 허준이 스승이 돌아가신 후, 그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해부해 봄으로써 훗날 역사에 길이 남는 의사가 될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렇듯, 실제 인체 해부를 학습하지 않은 사람이 의사가 된다는 것은, 오늘날에는 이해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중세 시대만 해도 의학 교수나 의사가 실제 인체 해부 경험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던 시절이었으므로, "영혼이 되돌아와 부활할지도 모르는" 시체에 칼을 대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였기 때문이다. 아주 가끔씩 이발사가 시체 해부 일을 하고, 의과대 학생들과 교수는 옆에서 지켜보는 정도가 고작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는 피를 만져야 하는 외과의사는 이발사가 겸하는 천한 직업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스스로 인체 해부실험을 강행하여 근대 해부학의 기초를 닦은 인물은 베살리우스(1514-1564)이다. 오늘날의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태어난 그는, 파리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벨기에 루뱅 대학의 해부학 교수로 부임하였다. 해부학 교수가 인체 해부를 마음놓고 할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해 하던 그는, 어느날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심하였다. 곧 사형수의 시 체를 몰래 훔쳐오기로 한 것이었다.

달도 없는 캄캄한 밤, 교수대에 매달려 죽은 사형수의 시신을 업고 자신의 연구실로 돌아 온 베살리우스는, 밤새도록 사형수의 시신을 해부하고 정밀히 관찰하여 노트에 기록하였다. 날이 밝자 그는 시체를 원상 복구한 후, 이미 공인되어 해부에 이용했던 다른 시신과 함께 관에 넣어서 처리하였다. 그 관은 그날 아침에 무덤에 묻혀지게 되었으므로, 베살리우스의 모험은 들키지 않고 감쪽같이 성공하였으나, 만약 발각되었다가는 자신이 해부한 사형수와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될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스스로 인체 해부실험을 경험해 본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강의는 아주 유명해 져서, 대학에서 이내 "탁월한 해부학자"라는 평을 들었으나, 기어코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마치 산 사람을 해부해 본 것 같다."라는 학생들의 말에, 교수대에서 없어진 시신의 행방을 찾던 경찰은 베살리우스에게 시체 도둑의 혐의를 두기 시작한 것이었다. 동료교수의 귀띔을 전해들은 그는, 그날로 모든 짐을 꾸려서 도망쳐 나와 학문의 자유가 있는 이탈리아로 향하였고, 뛰어난 해부학 능력을 인정받아 파두바 대학의 해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이탈리아는 르네상스의 본고장답게, 많은 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하고 실험할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었고, 로마 교황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의학자들이 스스로 인체 해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베살리우스는 그곳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할 수 있었다. 자신이 기록한 노트를 바탕으로 한 화가의 도움으로 정확한 그림을 곁들여서 1538년에 "학생을 위한 해부학"이라는 책을 펴냈고, 강의와 아울러 해부 실험도 여전히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당시 중세의 의학은 로마시대에 "제2의 힙포크라테스"라고 불린 갈레노스 (130-200)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었는데, 갈레노스 역시 훌륭한 해부학자이기는 했지만, 수많은 오류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회는 그것을 그대로 믿고 도그마로 삼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근대 의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구실을 하였다. 베살리우스는 교회가 부여한 갈레노스의 잘못된 권위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의학의 발전을 앞당기는 중요한 일임을 깨닫고, 더욱 깊이 연구에 정진하였고, 강의 중에 갈레노스의 잘못을 2백여 가지나 지적하였다고 한다. 베살리우스는 자신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여, 1543년 "인체의 구조에 관하여" 라는 책을 출판하였는데, 곧장 기독교회의 맹렬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교회의 주된 비판은 "인체에는 '넋의 자리'가 있어야 하는데, 베살리우스의 책에는 그것이 없다." 거나, "성서에 의하면, 아담의 갈비뼈 하나로 이브를 만들었으므로 남자는 여자보다 갈비뼈가 하나 적어야 하는데, 베살리우스는 남자나 여자나 갈비뼈 수가 똑같다고 하였다." 등등,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웃음이 나올만한 것들이었으나, 천문학에서 지동설이 거센 비난과 탄압을 받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베살리우스의 이론 역시 심한 반발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베살리우스의 책은 악마가 썼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그를 종교재판에 회부해야 한다." 고 협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베살리우스 역시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인체 심장의 구조 및 피돌기의 원리에 대하여, 정확히 설명해내지 못한 점이었다. 교회의 비난이 두려워서 애매한 표현으로 두루뭉실하게 넘어간 것이었는지, 그 자신 역시 제대로 밝혀내지 못한 것이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이 부분은 훗날 영국의 하아비(1578-1657)가 "혈액 순환의 법칙"을 명확히 밝혀내어 의학의 발달에 신기원을 이룩하게 되었다. 하지만, 베살리우스도 갈릴레이 등 근대과학의 선구자들이 고난을 겪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편견과 억압에 맞서서 싸워야 했으며, 자신의 주장을 펴려고 온갖 험난한 일들을 겪은 끝에, 1564년 10월 50세의 나이로 그리스의 한 섬에서 쓸쓸하게 삶을 마쳤다.


24. "과학자는 별난 사람?"

아직도 "과학자"라고 하면, 연구실에 틀어 박혀 속세와는 동떨어져 살아가는 무슨 고고한 선비거나, 세상 물정을 잘 모르고 괴팍한 성정을 가진 "기인"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의 연구개발이 사회의 다른 분야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고, 과학자 일개인이 아닌, 수십, 수백 명의 과학자들의 조직적 연구활동이 빈번한 오늘날에는 "과학자의 이미지"로 적합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과거의 유명한 과학자들 중에는 "기인"들이 제법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만유인력의 법칙을 세운 위대한 물리학자 뉴턴(Isaac Newton; 1642-1727)과 관련된 여러 재미있는 에피소드들은 그의 뛰어난 업적만큼이나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물이 끓거든 달걀을 넣어달라는 하녀의 부탁을 받고서, 연구에만 너무 열중한 나머지 모양이 비슷한 회중시계를 넣어 버렸다는 이야기는 이미 자주 들었을 것이다. 추운 겨울날 난로가에 앉아 있던 뉴턴이, 난로가 너무 뜨거워서 석탄 일부를 꺼내려 하다가, "선생님, 난로에서 좀 떨어져 앉으시면 되지 않을까요?"라는 조수의 얘기를 듣고서야 그것을 깨달았다는 이야기는 거의 희극 수준이다. 이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아니면 지나치게 과장된 것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아무튼 뉴턴은 자신의 연구에 몰두한 나머지 옷차림, 몸단장 등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괴팍한 성격의 기인" 이미지에 가장 어울리는 과학자는 아무래도 캐번디쉬 (Lord Cavendish; 1731-1810)일 것이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유명한 귀족이었고, 일찍 친척의 재산을 상속받은 그는 대단한 부자였다. 그러나, 그의 생활은 지극히 검소했으며, 혼자서 항상 연구에 몰두한 결과 많은 업적들을 남겼다. 프랑스의 한 학자는 그를 평하여, "모든 학자 중에서 가장 부유했으며, 또한 모든 부자 중에서는 가장 학식 있는 사람"이라고 한 바 있다. 그는 도통 말이 없고 사람 만나기를 꺼려하기로 유명했는데, 특히 여자들을 싫어하여 하녀들에게는 메모지로 식사를 지시하였고, 하녀 전용 계단을 따로 만들어서 여자들과 마주치는 것을 피할 정도였다고 한다.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음은 물론이다. 당시의 귀족들은 초상화를 여럿 그려서 집안 곳곳에 걸어 두거나 후손에게 물려 주는 것이 풍습이었는데, 그는 단 한 장의 초상화만을 그리게 하였고, 그나마 화가가 예복을 입은 캐번디쉬의 몸만을 미리 그리고 얼굴은 기억해 놓았다가 나중에 그려 넣었다고 한다.

대단한 부자였으나 돈에도 무척 무관심하여, 사람들에게 거액의 돈이나 선물을 하기 일쑤였고, 그의 예금을 맡고 있던 은행에서 너무 큰돈을 예치하고만 있기가 미안해서 예금의 일부를 투자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고했으나, 그는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하면서 도리어 화를 냈다고 한다. 항상 똑같은 옷을 입고 세세한 부분까지 일정한 방식의 생활을 하였으며, 죽을 때에도 "기인답게" 행동했다고 한다. 죽기 2~3일 전부터 그는 병석에 누웠는데, 죽는 날에는 하인을 불러서, "나는 이제 죽게 되었으니, 만약 내가 죽거든 사촌에게 가서 그렇게 알리게"라고 이른 후, 하인이 물러간 지 30분이 지나자 다시 불러 서 자신이 한 말을 복창하도록 했다고 한다. 하인이 다시 물러간 후 30분이 지났는데도 아무 호출이 없기에 들어가 보니,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고 한다.

캐번디쉬가 사람들을 피하고 항상 외롭게 지내기를 좋아했던 이유는, 고위 귀족이었던 그가, 당시 영국의 산업 혁명으로 몰락해 가는 귀족들의 운명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류의 발전을 위하여 산업혁명은 진행되어야 하며, 또한 이를 위하여 새로운 과학이 더욱 발전하여야 한다."는 모순된 생각 사이에서 늘 고민을 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 이유야 어쨌든, 그는 외로운 연구를 통하여 수많은 중요한 업적들을 남겼고, 산업 혁명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분야의 새로운 과학을 찾아 나서는 선구적인 모습을 보였다. 수소(水素)의 발견, 비틀림 진자를 이용한 만유 인력 상수의 측정 등이 그의 대표적 업적이며, 그밖에도 정전기에 관한 기초적 실험, 지구의 비중 측정, 열, 융해 현상 및 공기의 연구 등에 대해서도 훌륭한 연구 성과들을 남겼다. 그의 이름을 딴 영국의 캐번디쉬 연구소는 오늘날 영국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널리 명성을 떨치는 저명한 연구소로 남아 있다.


25. "라브와지에의 비극"

연소 이론으로서 "플로지스톤 이론"을 깨뜨리고, 산소 결합설을 확립했으며,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하는 등, 화학 전반의 기초를 세워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고 추앙 받는 프랑스의 대화학자 라브와지에(1743-1794)는 프랑스대혁명의 소용돌이가 한창이던 1794년 7월8일, 교수형을 선고받고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51세로, 과학의 발전을 위해서 한창 일할 수 있는 아까운 때에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훌륭한 과학자를 단두대로 몰아 넣은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라브와지에의 아버지는 부유한 변호사였으며, 그 덕택에 그 역시 쉽게 귀족이 될 수 있었다. 대혁명 직전의 당시 프랑스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 귀족들은 호의 호식하면서 온갖 특권을 누린 반면, 대다수 평민들은 귀족의 횡포와 수탈로 인하여 참담한 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든 돈만 내면 쉽게 높은 지위를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라브와지에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귀족의 지위를 사주었던 것이다.

그는 1779년 36살의 나이로 세금 징수관이 되었는데, 이 직위가 나중에 그를 단두대에 오르게 한 직접적인 원인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의 세금 징수관들은, 정부를 대신하여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이고 그 일부를 자신들이 수수료 명목으로 챙겼는데, 국민들에게 비싼 세금을 부과하여 징수하였고 잘 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혹독한 처벌을 내렸다. 한 명의 세금 징수관 밑에는 수천명에 달하는 징수원들이 있어서 인정사정 가리지 않고 세금을 거둬들였고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하여 왕과 고관들에게 뇌물을 주기도 일쑤였다. 당연히, 세금 징수관과 징수원은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가장 미움을 받는 존재였고, 당시의 만화는 세금 징수원들이 부인들의 시장 바구니까지 들춰서 세금을 우려내는 모습을 풍자할 정도로 원성이 높았다.

라브와지에 같은 탁월한 과학자가 왜 하필이면 대다수 국민들에게 공포와 저주의 대상인 세금 징수관이 되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그는 여러 모로 고통받는 평민들의 실상을 이해하지 못했거나, 세금 징수관의 직위로 많은 돈을 벌어서 자신의 실험과 연구에 이용하려는 단순한 생각만 하였는지도 모른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고, 이후 세금 징수관제는 폐지되었으며, 갈수록 혁명의 물결은 급진화하여, 자코뱅 산악파가 집권한 후로는 모든 세금 징수관들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1794년 5월부터는 로베스피에르 등의 공포 정치 아래서 세금 징수관들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는데, 재판장은 코피나르라는 과격한 인물  이었다. 그는 라브와지에가 세금 징수관으로서 프랑스 국민들로부터 온갖 착취와 수탈을 일삼았으며, 국가에 납부하여야 할 많은 돈을 횡령하였다고 몰아붙였다.

라브와지에는 대혁명 전인 1775년부터 국립 화약 공장의 감독관으로 일하면서 화약의 개량 등으로 국가에 공헌한 점과 혁명 정부 아래서도 미터법의 제정에 관여한 것 등을 들어서 정상 참작을 호소하였고, 자신의 중요한 실험을 위하여 재판을 2주일만 늦춰 달라고 청원하기도 하였으나, 코피나르는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코피나르가 실제로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는 설도 있으나, 당시 쟈코뱅 집권파들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세금 징수관들에게 교수형이 선고되었고, 라브와지에 역시 1794년 5월 8일, 단두대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그가 죽고 난지 불과 두 달 후, 공포정치의 중심인물인 로베스피에르 역시 실각하여 코피나르와 아울러 처형되었고, 많은 과학자들은 라브와지에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였다. 특히, 유명한 수학자 겸 물리학자인 라그랑지(J. L. Lagrange; 뉴턴의 고전 역학을 계승, 발전시킨 라그랑지 방정식의 창시자)는 "그의 머리를 치는 데에는 몇 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와 같은 머리를 다시 만드는 데에는 백년이 걸려도 부족할 것이다." 라고 하면서 당대의 위대한 화학자의 죽음을 아쉬워하였다.

라브와지에의 비극적인 죽음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하여,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의 죽음을 "과학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한 민중들의 무지와 분노가 빚어낸 어처구니없는 결과"라고 보아야 할까 아니면 "착취 받는 민중들의 고통을 외면했던 오만한 과학자의 자업자득 격인 말로"로 해석해야 할까? 그의 죽음은, 한 세금 징수관에 대한 처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과학을 "지식 귀족들에게 독점되고, 대다수 민중을 수탈하는 과학" 이라고 규정하고, "새로운 민중의 과학"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쟈코뱅 혁명주의자들의 사고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고 할 것이다. 또한, 이와 비슷한 사조는 그 이후에도, 과학의 발전에 의한 폐해가 지적될 때마다 간간이 역사상에 등장 한 바 있고, 때로는 반(反)과학주의로 나아가기도 한다.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 및 눈부신 성과 못지 않게, 그로 인한 부작용과 폐해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 또한 높은 오늘날, 바람직한 과학관의 정립 및 과학과 사회간의 올바른 상호 이해,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 등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고민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몇 년 전, 여러 저명한 과학 기술자들에 대해 무자비한 폭탄 테러를 일삼았던 미국의 유너보머(Unabomber)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역사가 들려주는 교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한다는 말처럼, 우리가 과학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대한 조명을 게을리 한다면, "라브와지에의 비극"은 언제까지 되풀이될 지 모른다.


26. "남매 명콤비"

과학발전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 개인뿐 아니라, 부자(父子)나 형제지간, 혹은 부부간에 서로 협력하여 좋은 성과를 이룬 경우가 많다. 부부가 공동으로 훌륭한 업적을 성취한 대표적인 경우라면, 퀴리 부부의 예를 들 수 있겠고, 부자간이라면 증기 기관차의 개발자 스티븐슨 부자, 원주율 Pi를 정밀하게 계산한 중국의 조충지 부자, 여러 폭약을 제조한 임마뉴엘 노벨과 그의 아들인 다이너마이트의 발명자 노벨 등등 대를 이어서 같은 분야에 매달린 경우가 상당히 많다. 또한 "형제 명콤비"라면 비행기를 발명한 라이트형제, 기구의 제작자 몽골피에 형제, 릴리 엔탈 등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런데 "남매 명콤비"라면...? 이에 해당하는 인물로는, 천왕성을 처음으로 발견한 천문학자 윌리엄 허셜과 그의 누이동생 캐롤라인이 있다. 이들 남매의 헌신과 애정은 과학사의 한 편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에피소드로 남아 있다. 허셀의 아버지는 독일 하노버 왕실 악단에서 오보에를 연주하던 음악가였는데, 천문학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둘째 아들인 윌리엄이 나중에 뛰어난 천문학자가 된 것이나, 딸인 캐롤라인 역시 오빠를 도와서 천문학에 많은 업적을 남긴 것은, 그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허셸은 일찍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를 따라서 음악 공부를 하여 오보에 연주악사가 되었으나, 당시 유럽에서 일어난 7년 전쟁을 피하여 온 가족이 영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배드라는 영국의 작은 마을에서 오르간 연주자로 자리 잡은 윌리엄은, 낮에는 오르간 연주, 작곡, 음악 교습 등 음악가로서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도, 밤에는 망원경으로 별을 관찰하는 일에 열심이었다. 여동생 캐롤라인은 그의 옆에서 오빠가 별을 관찰하는 것을 항상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에는 망원경의 성능이 그다지 좋지 않아서 천체 관측에 많은 한계 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윌리엄은 스스로 반사 망원경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천체 망원경의 제작을 시도하게 되었다. 반사경의 제작에는 많은 수학적 계산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캐롤라인은 오빠를 도와서 수학공부를 하기도 하였고, 윌리엄이 반사경을 연마하느라 16시간동안이나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몰두했기 때문에, 캐롤라인이 그의 입에 음식물을 넣어 주기도 했다고 한다.

온갖 어려움 끝에 반사 망원경을 제작한 윌리엄 허셸은, 1781년 어느날 밤, 자신 의 망원경으로 천체를 관측하던 중 쌍둥이자리 근처에서 그 전까지는 볼 수 없던 새로운 별을 하나 발견하였다. 천문학에 상당한 흥미를 지녔던 당시 영국왕 조오지 3세의 이름을 따서 "조오지의 별"이라고 별의 이름을 붙힌 후, 왕립학회에도 보고하였는데, 이 별이 바로 태양계의 7번째 행성인 천왕성이었던 것이다. 천왕성은 6개의 다른 행성보다 훨씬 멀리 있었으므로, 육안이나 그 전의 망원경으로는 관찰이 안되었던 것이다. 그리스 시대부터 알려져 온,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그리고 지구로 구성된 6개 태양계 행성 이외에, 또 다른 행성이 있다는 사실은 천문학계에 대단한 충격이었고, 천왕성의 발견으로 인하여 태양계의 넓이는 대번에 2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천왕성의 발견을 계기로, 영국왕실 전속의 천문학자가 된 윌리엄 허셸은 더욱 큰 반사 망원경을 제작하는 한편, 태양계 바깥으로 눈을 돌려서 항성 및 은하계의 관측과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수많은 항성을 관측하고 여러 수치들을 계산하는 데에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였으므로, 윌리엄은 관측을 전담하였고 그 옆에서 관측값을 기록, 계산하는 것은 온전히 캐롤라인의 몫이었다. 별들을 관측하기에는 최적인, 맑게 갠 추운 날밤, 잉크가 얼어붙어서 캐롤라인은 자신의 체온으로 잉크병을 녹여 가면서 기록을 계속해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허셸 남매는 2500개의 성운과 850개 정도의 이중성을 관측하여 수많은 성운, 성단, 이중성 등을 새로 발견하였고, 은하계와 우주의 구조를 대략적으로 밝혀 낼 수 있었다. 윌리엄 허셸은 말년에 왕실 천문학회장에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은 1822년에 병을 얻어서 세상을 떠났고, 여동생 캐롤라인은 그의 관측기록을 정리하여 6년 후인 1828년 도표로 만들어서 세상에 발표하였다. 오빠가 죽은 후에도 캐롤라인은 그의 조수 겸 협력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던 것이다. 또한, 자기 스스로도 8개의 혜성과 몇 개의 성운, 성단 등을 발견하기도 하였다. 천왕성의 발견은 또한, 서양의 천문학이 동양의 천문학을 압도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하였는데, 행성의 이름들을 곰곰히 살펴보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수성에서 토성까지는 수성(水星-Mercury), 금성(金星-Venus), 등 동양식 이름과 서양식 이름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천왕성(天王星)은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의 신인 "Uranos"와 같은 뜻이고, 해왕성 (海王星-Poseidon), 명왕성(冥王星-Pluto)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곧 동양에서도 오래 전부터 5개의 행성은 잘 알고 있었으나,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천왕성부터는 발견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서양의 천문학이 들어 온 후, 그대로 서양식 이름을 따서 명명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곧 망원경의 발명 등에 기반한 근대 서양과학의 발전 및 동양과학에 대한 "승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허셸의 천왕성 발견 이후, 태양계의 나머지 두 행성인 해왕성은 1846년 독일의 가르레에 의하여 발견되었고, 명왕성은 1930년 미국 로우웰 천문대의 톰버에 의해 발견되어, 태양계의 구조가 완전히 밝혀지게 되었다.


27. "화석 이야기"

오늘날에는 "화석"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몇 년 전 영화로도 폭발적 인기를 끌었던 마이클 클라이튼의 소설 "쥐라기 공원"에서도, 중생대의 "모기의 화석"으로부터 공룡의 DNA를 추출해 복원해낸다는 기발한 착상이 소개된 바 있다. (공상과학소설이니, 실제의 가능성은 차치하기로 하고...) 또한, 화석이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인류가 탄생하기 훨씬 전에 "공룡"이라는 덩치 큰 흥미로운 동물들이 지구 곳곳을 누볐다는 사실도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처럼, 화석은 "지구의 역사를 아는 열쇠"구실을 함으로써, 고생물학, 지질학 등에서 그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옛날 사람들은 화석에 대해서 어떠한 생각을 하였을까?

그리스 시대의 한 학자는 땅 속에서 물고기의 화석을 발견해 내고는 "인간의 조상은 물고기의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땅 속에서 발견된 물고기 모양의 돌은 인간 조상의 유해일 것이다." 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피라미드의 석회암 속에서 발견된 작은 콩 모양의 원생동물 화석을 보고는, "그것은 피라미드를 건설하던 사람들이 먹던 콩 등이 굳어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라고 추측한 사람도 있었다. 흔히 "생물학의 시조"라고 일컬어지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들은, "모든 생물은 흙 속에서 태어나는 것인데, 처음에 잘못 만들어져서 그대로 흙 속에 버려진 것이 화석이다." 라고 설명하였다.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배한 중세 유럽에서는, "과학은 신학의 시녀" 라는 표현에 걸맞게, 화석도 "성경의 말씀"을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설명되었다. 즉, 산 속에서 조개의 화석이 발견된 것을 두고 "노아의 홍수 때 산까지 떠밀려간 조개들이 죽어서 남은 것" 이라고 해석하였다. 또한, 이미 멸종되고 없는 기이한 동물들의 화석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흙으로 빚어서 창조하려다가, 실수로 생명을 불어넣는 것을 잊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라고 그럴듯하게 설명하였다.

근대 초까지도 널리 믿어졌던 이러한 견해들에 맞서서, "화석은 고대 동식물의 유해가 땅 속에 묻혀 오랜 세월을 지나는 동안 돌과 같이 변한 것"이라는 정확한 해석을 처음으로 한 사람은 "만능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이다. 그의 고국인 이탈리아 북부의 롬바르디아 지방은 알프스 산맥이 인접한 곳으로서, 조개의 화석이 많이 나오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바다 근처도 아닌, 높은 산기슭에서 조개의 화석이 발견된 것을 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홍수"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조개 화석이 발견된 지층의 구조, 화석의 배열 모양 등을 일찍부터 유심히 관찰해 온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노아의 홍수론"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예를 들어, 조개껍데기 화석을 포함한 지층이 2층 이상이었던 경우도 많았는데, 성경에 노아의 홍수가 2번 이상 있었다는 기록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방면에서 특출한 재능을 보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당시 활발히 행해졌던 큰 건물의 건축, 운하의 개설 등을 설계하고 지휘하는 일도 자주 맡아보게 되었다. 여러 공사의 과정에서 땅 속을 깊숙이 파 내려가는 경우도 많았으므로, 그는 자연스럽게 화석과 지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갖게 되었고, 습곡과 단층 등 여러 모양의 지층과, 그 사이에서 발견된 여러 화석 등을 빠짐없이 노트에 기록하고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 후, 조수와 함께 롬바르디아 지방을 여행하면서 조개 화석과 지층에 대해서 더욱 면밀히 관찰하고 충분한 화석들을 채집한 결과, 그는 다음과 같은 옳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지금은 산악지대인 롬바르디아 지방은 먼 옛날에는 강이나 바다였을 것이다. 퇴적된 흙모래나 화산재 등으로 인하여 많은 조개들이 묻히고, 그 후 큰 지각변동이 일어나서 표면이 솟아올라 산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산 속에서 많은 조개 화석들이 발견되는 것이다. 따라서, 노아의 홍수와 조개 화석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런데,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와 같은 화석에 관한 훌륭한 연구와 업적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보기 어렵게, 글자의 좌우가 뒤집힌 모양으로 왼손으로 노트에 기록해 놓았다는 것이다. 거울에 비쳐 보면 내용을 곧 알 수 있겠지만, 그냥 볼 때에는 읽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아마도, 기독교회의 위세가 대단하던 당시 사회에서, 교회의 가르침이나 성경의 말씀과는 다른 자신의 주장을 나름대로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었을 것이리라 추측된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고, 태양이 지구 주위를 공전하는 것이다."는 교회의 가르침에 맞서서, "지동설"을 주장하던 갈릴레이 등의 과학자들이 모진 탄압을 받았던 것을 보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왼손 노트 기록"은 현명한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죽은 후, 언젠가는 자신의 주장이 올바르다는 것을 인정해 줄 시대가 올 것이라는 것을 굳게 믿고서 선구적인 업적을 노트로만 남겼을 것이다. 그 노트에는 조개 화석에 대한 연구뿐 아니라, 비행기의 원리에 대한 연구 등 시대를 뛰어넘는 많은 선구적인 업적과 연구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왼손 노트"는 그가 죽은 지 300년이 지난 후에야 빛을 보게 되었고, 지질학자들은 그의 노트를 화석에 대한 연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또한, 그가 지층을 연구할 때 자신의 논거로 삼았던 "자연에는 거짓이 없다."는 믿음은, "현재는 과거를 아는 열쇠이다."라는 지질학의 동일과정의 법칙과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근대적인 지질학과 고생물학의 연구에도 올바른 지침을 마련해 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8. 한 붓 그리기

여러분은 어릴 적에, 어떤 도형들을 "연필을 떼지 않고" 한 번에 그리기, 즉 "한 붓 그리기" 문제들을 접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단순한 심심풀이 퍼즐 같은 이 문제에도 꽤 의미 있는 수학적 정리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것도 흥미 있을 듯 싶다. 이 문제를 수학적으로 명쾌하게 풀이한 사람은 스위스의 저명한 수학자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이다. 또한, 오일러가 이 문제를 해결하게 된 배경에는 이른바 "쾨니히스베르크의 7다리 건너기" 라는 재미있는 역사적인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다.

옛날, 18세기 무렵 유럽에 쾨니히스베르크라는 도시가 있었다. 소련연방이 해체된 오늘날, 리투아니아 공화국의 한 도시에 해당되는데, 당시에는 동프로이센의 영토였다. 이 도시를 가로질러서 큰 강이 하나 흐르고 있었는데, 모두 7개의 다리가 강 위에 놓여 있었다. 어느 날 이 도시의 시민 하나가 "한 다리를 두 번 건너 지 않고, 단 한 번씩으로 7개의 다리를 모두 건널 수 있을까?" 라는 문제를 내었고, 사람들은 재미있는 문제로 여기고, 나름대로 풀어 보려고 애썼다. 또한, 그 방법을 알면 외지인의 관광 안내에도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 많은 시민들이 앞다투어 문제 풀이에 도전하였으나, 어찌된 일인지 제대로 풀었다는 사람은 한 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 동안에 이 문제는 널리 소문이 나서, 독일 전역에서도 아주 "유명한" 문제가 되기에 이르렀다. 마침 그 무렵,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 오일러가 쾨니히스베르크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 왔고, 시민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일러에게 이 문제를 물어 보기로 하였다. 자신들이 못 푼 문제를 오일러 같은 대수학자가 속 시원히 해결해 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받아 본 오일러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더니, 뜻밖에도 "이런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풀리지 않는다."고 간단하게 대답하였다. 사람들은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고, 빈정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오일러는 자신의 말뜻이 잘못 전달되었음을 깨닫고, "내가 아무리 연구해 보아도 능력이 부족해서 풀지 못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그 문제는 어느 누구도 풀 수 없는, 다시 말하면 원래부터 답이 없는 문제" 라고 덧붙였다. 어떻게 그토록 쉽게 단정지을 수 있느냐고 어리둥절해 하는 시민들에게, 오일러는 그 원리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쾨니히스베르크의 7개의 다리를 한 번에 건너는 문제를 도형으로 표시해 보면, 결국 아래와 같은 도형을 같은 곳을 두 번 지나지 않으면서 붓을 떼지 않고 한 번에 그리는 문제, 즉 "한 붓 그리기" 문제로 귀착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한 붓 그리기가 가능한 도형은 홀수점의 개수가 0이거나, 2인 경우에만 해당될 뿐, 홀수점이 그보다 많으면 한 번에 떼지 않고 그리기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위의 쾨니히스베르크의 7다리 문제와 같은 도형은 홀수점의 개수가 4개이므로, 원천적으로 한 붓 그리기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오일러는 한 붓 그리기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2개의 정리를 제시하였다. 첫 번째 정리는 "모든 도형의 홀수점의 개수는 짝수개이다" 라는 것이고, 두 번 째 정리는 "도형의 모든 꼭지점이 짝수개이든가, (즉, 홀수점의 개수가 0이든가) 혹은 단 두 개의 홀수점을 가지는 경우에만 한 붓 그리기가 가능하다." 는 것이다.

두 번째 정리를 좀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1) 짝수점 만으로 된 도형은 어디에서 출발하여 그려도 마지막에는 제자리로 돌아오는 한 붓 그리기가 가능하       고,

2) 홀수점이 2개인 도형은 한쪽 홀수점에서 출발하여 나머지 홀수점에서 끝나는 한 붓 그리기가 가능한데,       홀수점 이외의 지점에서 출발하면 한 붓 그리기는 불가능하게 된다는 점이다.

   (수학에 관심있는 독자분들은 한 번 증명해 보셔도 좋을 듯...)

역사적인 쾨니히스베르크의 7다리 건너기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한 수학자 오일러는 1707년 4월15일, 스위스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부터 비범한 재능을 보인 그는, 베르누이(J. Bernoulli; 1667-1748)에게서 수학을 배웠으며, 나중에는 수학뿐만 아니라 천문학, 물리학, 의학 등도 폭넓게 연구하여 많은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천부적인 재능에 엄청난 노력을 겸비한 그의 연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경탄을 자아내었으나, 지나치게 눈을 혹사한 나머지 말년에는 실명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맹인이 된 이후에도 더욱 정력적으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여 방대한 양의 저술과 논문을 남겼다. 1783년 9월7일, 죽기 직전의 순간까지도 천왕성의 궤도 계산과 관련된 연구를 하였다고 전해진다.

오일러가 죽은 후, 사람들은 그의 전집을 발간하려 했으나, 너무 양이 방대하고 많은 자금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미뤄지다가,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특수출판사가 설립되어 45책에 이르는 오일러 대전집이 발간되었다. 오늘날에도 대학에서 배우는 수학과 물리학의 교과서에 "오일러의 정리" 혹은 "오일러의 공식"으로 이름 붙은 것이 한둘이 아닌 것을 보아도, 그가 학문의 발전에 기여한 공로가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29. 카메라의 역사(1)

오늘날, 사진기, 즉 카메라는 널리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제품 중의 하나이다.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보고 옛날 사람들은 (혹은 현대의 원시부족들도) "혼을 빼내간다." 하고 두려워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카메라 사진은 예술의 한 장르로 편입되기도 하는 등 이미 우리 생활의 일부로 자리를 잡은 지 오래이다. 이처럼 편리하고 요긴한 카메라를 발명한 사람이 누구인지 밝혀내는 데에도 상당한 설명이 필요하다. 가깝게 보면, 프랑스의 화가 다게르를 사진기의 발명자로 꼽을 수 있겠지만, 사진을 찍어내는 것도 인류의 오랜 소망의 하나였던 만큼, 카메라의 역사는 그 뿌리가 상당히 깊다.

지금으로부터 거의 천년 전인 11세기 무렵, 아라비아에 이븐 알 하이삼(Abu Ali al'Hasan Ibn al'Haitham)이라는 과학자가 있었다. 당시의 아라비아는 세계적으로 부강한 나라였고 문화가 융성하였으며, 과학기술도 매우 발달된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대 그리스의 과학을 이후 서구세계에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븐 알 하이삼은 수학, 물리학, 천문학, 의학 등 여러 과학분야에 걸쳐서 깊이 연구하여 많은 책들을 저술하였는데, 약간 엉뚱한 면도 있었는지, 한번은 이집트의 왕에게 나일강의 홍수를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이집트에서 쫓겨난 적도 있다고 한다.

"구면 거울이나 포물면 거울에서 광원과 눈의 위치가 정해져 있을 때, 거울면에서 반사가 이루어지는 지점을 구하라." 는 이른바 "알 하이삼의 문제"는 매우 유명한 데, 이는 곧 일종의 2차 방정식을 푸는 문제로 귀결된다. 완벽한 해법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것을 여러 경우에 대하여 풀이하였다. 그가 쓴 책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빛과 사람의 눈에 관해 연구한 "광학 보전"(Opticae thesaurus)이라는 책인데, 이것은 유럽에서 근대 과학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전까지 광학에 관한 고전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광학 보전"에는 태양 쪽을 직접 쳐다보지 않고도 일식을 효과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캄캄하게 닫힌 방의 창문에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태양 광선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빛은 방의 반대쪽 벽에 부딪쳐 거기에 태양의 모습이 비친다. 눈부신 태양을 직접 쳐다보지 않고도 벽에 비친 태양을 보고 있으면 일식의 모습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어두운 방의 벽에 상을 비추는 방식으로, 태양뿐만 아니라 다른 풍경 등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곧 오늘날의 카메라, 특히 바늘 구멍 사진기와 똑같은 원리이다. 오늘날의 "카메라"라는 단어 자체도 여기서 유래되었는데, 알 하이삼의 책은 13세기 이후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 사람들에게 널리 읽혀졌고, 그의 일식 관찰 방식은 라틴어로 "어두운 방"을 뜻하는 "카메라 오브스큐라"라고 불리게 되었다. 또한 그의 이름도 라틴식으로 "알하젠"(Alhazen)이라고 불려 졌으며, 17세기 무렵까지도 많은 유럽의 과학자들은 그의 책을 토대로 연구를 시작하였다.

"만능의 천재"로 알려진 15세기 이탈리아의 예술가 겸 과학자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어두운 방"을 이용하여 경치를 그릴 때에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는 고안을 하였다. 또한 1558년, 역시 이탈리아의 과학자인 포르타는 자신의 저서 "자연의 마법"(Magiae naturalis)에서 "어두운 방", 카메라 오브스큐라의 여러 재미있는 성질을 소개하였고, 특히 그 원리를 이용하면 사생화의 윤곽을 쉽고 정확하게 잡을 수 있으므로 화가들에게 그것을 사용하도록 권장하였다. 카메라 오브스큐라의 신기한 성질은 더욱 많은 유럽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이후 근대적인 카메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30. 카메라의 역사(2)

여러 선구적인 과학자들에 의해서, 카메라 오브스큐라의 원리가 연구되고 일반에도 소개되었지만, 카메라 오브스큐라는 글자 그대로 "어두운 방"에 불과한 것이었고, 렌즈, 조리개, 필름 등 카메라가 갖추어야 할 필수적인 요소들은 아직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으므로 마음대로 가지고 다니면서 이용하기는 힘들었고, "바늘구멍 사진기"의 기능을 지니는 정도였으므로 구멍이 작으면 빛의 양이 적어서 벽에 나타나는 상이 어둡고, 그렇다고 구멍을 크게 하면 상 자체가 희미해져서 알아보기 어렵게 되어버리는 등 여러 가지 어려운 점들이 많았다.

이탈리아의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카르다노는 1550년, 카메라 오브스큐라의 구멍에 볼록렌즈를 끼우면 보다 밝은 상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혀 내었고, 1567년 베네치아의 귀족 다니엘 발바로는 렌즈 앞에 조리개를 부착하여 빛의 양을 조절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었다.

또한, 당시의 카메라 오브스큐라는 벽에 비친 경치 등을 직접 보면서 그림을 그리는 용도 등에 이용하였으므로, 상이 거꾸로 비친다는 것은 이용하기에 상당히 불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1573년 역시 같은 이탈리아 사람인 단디는 오목거울을 써서 상이 거꾸로 비치지 않고 똑바로 서도록 하는 연구를 하였다.

이와 같이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카메라의 원리가 차차 정립되어 갔는데, 16세기까지 카메라 오브스큐라의 개선과 연구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래로 거의 대부분 이탈리아 사람들이었다. 이는 이탈리아가 르네상스의 중심지를 거치면서 당시로서는 유럽에서 가장 문화와 과학이 앞선 곳이었다는 사실과 크게 관련이 있을 듯 싶다.

보다 개선된 상을 얻을 수 있는 카메라 오브스큐라를 지니게 된 사람들은, 이제는 크기가 좀 더 작고 이동이나 휴대가 가능하도록 하는 연구에 주력하게 되었다. 천막이나 가마 같은 모양의 이동식 카메라 오브스큐라가 등장하기도 하였고, 크기를 더욱 줄여서 상자와 같은 모양이 되도록 하는 시도가 잇따르게 되었다.

1657년 독일의 카스팔 쇼트는 카메라 오브스큐라의 크기를 오늘날의 카메라처럼 작은 상자 수준으로 줄이는 데에 성공했는데, 2개의 상자를 이어 붙여서 늘이거나 오므리면서 렌즈의 초점을 맞출 수 있게 하였다. 또한 1676년 독일의 스츠름은 렌즈의 축과 직각을 이루는 거울을 추가하여 상이 위쪽의 기름종이에 비추어지도록 하는 반사식 카메라 오브스큐라를 만들었다.

1685년 뷔르츠부르크의 수도승 요한 찬은 기름종이 대신에 젖빛 유리에 상이 비추어지도록 하고, 보다 정교하게 고안된 휴대형 카메라 오브스큐라를 제작하여, 훗날의 리플렉스 카메라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것을 제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17세기 말엽의 카메라 오브스큐라는 원리적으로 오늘날의 카메라와 거의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였으나, 다만 필름과 셔터가 제대로 구비되지는 못한 상태였다.


31. 카메라의 역사(3)

필름에 의한 현상 등의 요소까지 갖춘 근대적 카메라의 발명자로는,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1787-1851)와 조세프 니에프스(1765-1833)를 들 수 있다. 다게르는 당시에 이름난 풍경화가로서, 그림을 그릴 때에 카메라 오브스큐라를 자주 사용하곤 하였다. 다게르는 카메라 오브스큐라에 비치는 아름다운 풍경을 그대로 한 장의 그림으로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하고 궁리한 끝에, 종이 등의 필름에 현상, 인화하는 방안을 연구하게 되었다. 다게르 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사람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연구와 발명에 몰두하였으나, 뜻하는 결과를 얻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의 사람들이 주로 시도한 방식은, 빛을 받으면 검게 변하는 특성이 있는 질산은 용액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종이 위에 질산은 용액을 바르는 방식 등으로 "필름"을 만들어 카메라 오브스큐라에 장착하는 실험을 하는 등, 많은 발명가들이 노력하였으나, 특히 두 가지의 난점이 있었다. 하나는, 종이 위에 복사된 모습은 흰색과 검은 색이 정반대로 나타난다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밝은 곳에서 보면 금새 종이 전체가 까맣게 변해 버려서 애써 찍은 것이 아무 소용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이 문제를 처음으로 해결한 사람은 니에프스였다. 그는 빛을 쬐면 단단하게 굳어지는 아스팔트의 성질을 이용하여, 은으로 도금한 금속판에 아스팔트를 칠하여 쉽게 지워지지 않는 사진을 찍는데에 성공하였다. 이때 니에프스가 찍은 풍경사진이 곧 "세계 최초의 사진"이라고 볼 수 있겠으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었다. 사진을 촬영하는 데에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점이었다. 최대 8시간 정도까지 시간이 소요될 정도였기 때문에, 풍경을 찍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람을 찍는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어서, 모델들은 카메라만 보면 도망갈 지경이었다. 그러던 중, 역시 새로운 사진 촬영법을 위해 노력하고 있던 화가 다게르를 알게 되어서, 다게르와 니에프스, 두 프랑스인은 의기 투합하여 공동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러나, 니에프스는 몇 년 후에 먼저 세상을 떠났고, 다게르는 본업인 화가 일까지 제쳐 두고 사진의 연구에만 전념한 결과, 1837년 드디어 만족할 만한 사진 촬영법의 개발에 성공하였다. 그가 개발한 방법은, 은판에 요오드의 증기를 쬐어서 표면에 요오드화은의 얇은 막을 형성한 다음, 상을 촬영한 후 수은 증기를 이용하여 현상, 정착하는 방식이었다.

그의 발명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 등에서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고, 물리학자 아라고는 그의 사진이 "과학과 예술의 세계에 새로운 선물"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찬양하였다. 또한 프랑스 의회는 다게르와 그의 후손에게 고액의 연금을 지급하는 대신, 그의 사진 발명 특허를 공개하여 누구나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하였다. 다게르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839년 8월 19일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와 예술원의 합동회의에서 사진의 비밀을 공개하였고, 덕분에 전세계 사람들은 사진의 혜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 이후로 좀 더 나은 사진술과 카메라의 개량 및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급증하여, 발전 속도가 한층 빨라지게 되었다.

은판을 쓰지 않고, 질산은 용액을 칠한 종이에 촬영한 다음, 소금물이나 요오드화칼륨 용액에 담가서 현상, 정착하는 톨보트법도 비슷한 시기에 선보이게 되었고, 1851년에는 F. S. 아처에 의해 콜로디온을 이용하는 "습판법"이 개발되어 촬영의 감도를 한층 높일 수 있었다. 다만, 습판법에서도 촬영을 위한 노출에 몇 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수준이었고, 또한 감광막이 젖어 있을 때에 찰영을 끝내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이와 같은 단점을 해소하기 위하여 습판막을 아라비아 고무액이나 젤라틴, 카세인 등의 용액으로 덮어서 건조시키는 이른바 "건판법"이 새로 개발되었고, 건판을 이용한 방식에서는 감도가 비약적으로 높아졌기 때문에 노출시간을 짧게 조절할 수 있는 "셔터"가 카메라에 장착되게 되었다.

19세기 말엽까지 여러 방식의 사진법과 카메라가 다양하게 소개되기도 하였으나, 그중 주목할 만한 것은 1884년 J. 이스트만에 의해 발매된 종이 롤필름이었다. 1888년에는 이 필름을 이용한 코닥 카메라가 제조되어 널리 판매되었으며, 이는 "단추만 누르세요. 뒷일은 저희들이 맡겠습니다." 라는 유명한 선전문구와 더불어 사진의 대중화에 크게 공헌하였다.

20세기에 들어 와서는, 1925년 독일의 O. 바르낙이 설계한 35mm 필름을 이용한 라이카 카메라가 나왔고, 1929년에 발매된 프랑케 하이데케사(현재의 롤라이 사)의 롤라이플렉스는 2안리플렉스 카메라의 시대를 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펜타프리즘을 이용한 1안리플렉스 카메라 등이 출현하였고, 오토포커스 카메라 등도 새롭게 개발되었다.

오늘날에는, 초소형, 고성능의 여러 카메라들이 다투어 선보이고 있으며, 촬영한 화상을 현상, 인화할 필요 없이 PC 등에서 볼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가 최근에 개발되어, "필름 없는 카메라"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카메라는 미래의 생활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인류의 벗이자, 과학 기술과 예술을 잇는 가교역을 계속하게 될 것이다.


32. 자살한 과학자들

어떤 이유에서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류 역사의 여러 방면에서 잘 알려진 인물들 중에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비운의 화가 고호, 세기적 문호 헤밍웨이(여기에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등 문화, 예술 방면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이들도 있고, 히틀러와 같은 실패한 정치가도 있고 그밖에도 많은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과학 기술사에 있어서도 자살한 사람들의 경우가 결코 적지 않다. 그 원인이야 연구상의 좌절이나 위기 등 자신의 일과 관련된 것이었든, 아니면 가정사나 다른 개인적 문제였든 간에 일일이 파악하기도 쉽지 않겠지만, 과학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인물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과학 기술자들의 자살에 관하여 심층적으로 분석, 연구된 바가 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들 몇몇의 경우를 살펴보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듯 하다.

① 나일론의 발명자 캐러더즈.

1938년 9월21일, 미국의 유명한 화학회사 뒤퐁(Du Pont)은 "나일론(Nylon)"이라는 새로운 섬유의 발명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신문들은 "석탄과 공기와 물로 만든 섬유", "거미줄보다도 가늘고 강철보다 질긴 기적의 실" 이라면서 대서 특필하였고, 이 소식에 세계 각국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는, 명주도, 식물성 재질도 아닌 석탄, 물, 공기 따위로 어떻게 섬유룰 만들 수 있느냐고 "엉터리"임이 틀림없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그래도 세계 굴지의 화학회사인 뒤퐁과 신문사들이 아무 근거 없는 이야기를 했겠느냐고 하면서도, 의아한 생각을 떨치지 못하던 사람들도 많았다.

제품을 하루 빨리 보고 싶다는 사람들의 열망으로 인하여, 나일론 견본은 세계 여러 나라로 보내졌고, 각국의 과학자들은 인공섬유 나일론을 분석한 후, 그 우수성에 감탄하였으며, 관련 업자들은 발빠르게 나일론 제품의 판매를 서두른 결과 나일론은 전세계로 급속히 전파되었다. 1939년의 뉴욕 만국 박람회에서 나일론은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었고, 1940년 5월, 뉴욕에서 여성용 나일론 스타킹의 판매가 시작되자 많은 여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스타킹을 사고서 치마를 걷어붙이고 즉석에서 신어 보았다고 한다. 값싸고 질 좋은 나일론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라고 할 만 했다. 그러나, 정작 이 제품의 개발자 캐러더즈 (Wallace H. Carothers; 1896-1937)는 자신의 발명품이 날개 돋치듯 성황을 이루는 행복한 장면을 볼 수가 없었고, 그로 인한 부와 명성도 누리지 못했다. 캐러더즈 박사는 뒤퐁사가 나일론의 발명을 발표하기 전해인 1937년 4월, 필라델피아의 한 호텔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살을 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캐러더즈는 1896년 4월, 미국 아이오와 주의 벌링턴에서 가난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상업학교의 선생으로서, 아들이 좋은 직업을 얻도록 상과 대학에 들어가도록 하였고, 캐러더즈는 열심히 공부하여 남들보다 일찍 졸업하기는 하였으나, 그의 소원은 수학이나 과학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미주리 주 타키오 대학에서 상학부 조교를 하면서 화학을 공부하여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고, 일리노이 대학에서 유기화합물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하버드 대학에서 천연 섬유 등의 고분자 구조에 관해 연구하였다. 대학에서 그는 "매우 탁월한 유기화학자"라는 평을 들었으나, 한정된 예산으로 인하여 당시로서는 매우 새로운 분야인 고분자설에 관한 연구가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그의 스승은 캐러더즈를 뒤퐁사의 중앙연구소에 추천하였고, 그도 역시 세계 굴지의 화학회사인 뒤퐁사에서 충분한 연구비와 풍부한 기자재를 지원 받아서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였다. 1928년 뒤퐁사에 입사한 그는 이듬해에 중앙연구소의 기초과학 연구부장이 되어서 고분자 연구를 주도하였고, 1929년에는 세계적으로 대공황이 닥쳐왔으나, 도리어 뒤퐁사는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튼튼한 기초연구와 그에 기반한 신제품 개발만이 살길이라고 판단하고, 캐러더즈에게 충분한 연구인력과 설비를 지원하였다. 덕분에 그는 회사의 사장, 중역 등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풍부한 연구비를 지원 받으면서, 분자량이 작은 물질을 연결해 고분자를 만드는 "고분자 중합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천연고무보다 우수한 물성을 지닌 합성고무 네오프렌의 발명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의 연구팀은 고분자 연구를 계속하던 중, 연구원 중의 한명인 줄리언 힐이 이상한 것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는 실패한 찌꺼기를 씻어 내다가, 불을 쬐어 본 결과, 찌꺼기가 계속 늘어나서 실같은 물질이 되었다. 이것을 본 캐러더즈는 합성섬유의 개발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고, 1935년에 마침내 합성 섬유로 적합한 폴리아미드를 발견하여 나일론의 시제품을 만들어 내었다.

그는 자신이 발명한 세계 최초의 합성 섬유를 "폴리머 6-6"이라 명명하였고, 이것을 상품화하기 위해 뒤퐁사는 230명의 화학자를 포함하는 대규모의 연구 개발 인력과 시설을 총동원하였다. 기초 연구의 성공을 본격적인 상품화로 연결시키는, 오늘날의 전형적인 R&D 방식이 이때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상품화 및 양산 공정을 위한 몇 가지 난제를 해결한 뒤퐁사는 1938년, 나일론을 공식적으로 세상에 선보였고, 석탄과 물과 공기에서 만들어진다는 "이상한 섬유" 나일론은 양말, 여성용 스타킹, 의류 등으로 급속히 보급되었다. 또한, 제2차 세계대전 시에는 낙하산의 제조에 널리 이용되었다.

나일론의 발명에 힘입어, 인류는 의복의 재료를 면화, 비단, 모피 등의 자연물뿐만 아니라, 대량생산되는 인공 합성물로부터도 값싸게 얻을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이것은 민간기업의 대규모 연구 개발 능력이 신제품 개발에 대성공을 거둔 최초의 사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캐러더즈 박사의 탁월한 능력 못지 않게, 자유로운 기초 연구를 보장하고 연구비와 인력, 설비를 전폭적으로 지원한 뒤퐁사 경영진의 방침이 없었더라면, 나일론은 세상에 나오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한편, 발명자인 캐러더즈 박사가 성공을 거두고서도 왜 자살을 택했는지에 대 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나일론의 상품화 과정에서 주도권을 빼앗긴 것이 한 원인이었다는 설도 있고, 러시아 음악을 좋아했던 그는, 매우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고도 한다. 그는 자신의 발명품이 세상에서 큰 빛을 발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41세의 아까운 나이로 스스로 삶을 마쳤다.

② 소다 제조법의 발명자 르블랑

화학식 NaHCO3, 명칭은 탄산수소나트륨, 산성탄산나트륨, 중탄산나트륨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 화학 물질이 하나 있다. 간단히 "소다"라고 말하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화학공업이 근대화되고, 급속히 발전된 오늘날에는 그다지 특별히 중요한 물질이 아닐 수도 있겠으나, 역사적으로 소다는 근대 산업사회에는 무척 중요한 물질의 하나였다. 황산과 아울러 소다의 대량 제조가 중화학 공업의 시초이기도 했다고 볼 수 있다.

산업 혁명기의 영국에서는 급속히 발전한 방적․직물 공업에 따라서 많은 양의 직물들이 생산되었는데, 이것을 완제품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깨끗이 씻기 위한 비누 역시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비누의 원료가 되는 소다를 당시에는 나무를 태운 재로부터 얻었는데, 갑자기 폭증한 소다의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나무를 필요로 하였으므로, 유럽의 각 지역에서는 산림이 황폐화될 지경이었다. 따라서, 나무를 태우지 않고 소다를 대량으로 제조하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해초를 태운 재를 소다의 원료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스페인으로부터 수입해서 비누를 만드는 데에 써 왔으나, 18세기 초 프랑스와 스페인의 전쟁 이후 수입이 막히게 되었다. 그리하여, 1775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소다의 대량 제조법의 발명에 2400프랑의 상금을 걸고서 널리 모집하게 되었다. 마라르베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소금과 황산으로부터 소다를 만드는 방법을 고안하여 상금을 타기도 하고, 실제 소다의 제조에 그 방법이 이용되기도 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철이나 납, 식초와 석탄 등이 필요하였으므로 그다지 값싼 방법은 아니었다.

그 후, 프랑스의 귀족 오를레앙 공의 전속 의사로 일하던 르블랑 (Nicolas Leblanc; 1742-1806)은 한때 화학을 공부했던 사람으로서, 소다의 제조법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보다 싼 가격으로 소다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던 그는, 소금과 황산으로 황산소다를 만든 후, 숯과 석회석을 섞어서 노 속에서 구워서 소다를 추출해내는 방법을 발명하였고, 이른바 "르블랑식 소다 제조법"으로 불린 이 방법은 과학아카데미에도 당선되었다. 1790년, 조수와 함께 대량 생산법을 개선한 그는 본격적으로 소다의 생산을 시작할 계획을 세우고, 이듬해인 1791년 오를레앙의 자금을 바탕으로 하여 소다 공장을 설립하였다.

그러나 1789년에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의 소용돌이가 점점 거세어져서, 쟈코뱅 산악파가 득세한 이후에는 국왕 루이 16세를 비롯한 많은 왕족, 귀족들이 사형에 처해졌고, 드디어 르블랑의 후원자였던 오를레앙 마저 1793년 11월 재판에 회부되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 과정에서 오를레앙의 전재산은 혁명정부에 의해 몰수되었으며, 르블랑의 공장 역시 그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공장에서 쫓겨났으며, 르블랑식 소다 제조법의 비밀은 그에게 아무런 보상도 없이 일반에 공개되고 말았다. 혁명의 소용돌이가 조금 잠잠해지게 된 후, 프랑스 정부는 산업에 꼭 필요한 소다의 제조를 촉진하기 위하여 그의 공장을 돌려주었으나, 이미 7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르블랑은 공장 재건을 위하여 자금을 모으고 설비를 갖추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아내 마저 병석에 눕게 되었다. 아내와 함께 극빈자 구호소에 들어간 그는 절망 속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내다가, 1806년 권총으로 자살을 함으로써 한 많은 일생을 마감하였다. 르블랑은 소다 공장을 세우기 직전인 1790년 3월, 자신의 불길한 운명을 예견한 듯 소다 제조법이 담긴 가방을 한 변호사에게 맡겼는데, 보관기간이 "50년"이라고 말해서 변호사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로부터 66년이 지난 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그 가방을 발견하였고, 그 안의 서류에는 르블랑식 소다 제조법과 함께 그가 최초로 그것을 발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자손을 위하여 발명의 권리를 남기려 한 그는, 자신이 예감한 대로 프랑스 대혁명의 와중에서 비극적인 삶을 마쳤다.

한편, 불행한 발명가 르블랑이 발명한 소다 제조법은 그 후 아일랜드 출신의 머스프래트(1793-1886)에 의해 영국에서 크게 빛을 보게 되었는데, 그는 리버푸울을 비롯한 영국의 여러 지역에 르블랑식 소다 공장을 세우고 엄청난 양의 소다를 생산해내었다. 머스프래트에 의해 대성공을 거둔 영국의 소다 제조업은 중화학공업 발전의 시초가 되었고, 르블랑의 소다 제조법은 19세기 후반 솔베이법이라는 새로운 소다 제법이 나오기 전까지 널리 이용되었다. 소다 제조법의 경우도 "애써서 발명한 사람 따로, 돈 번 사람 따로"인 경우의 한 예인 듯하다.

③ 통계물리학의 창시자 - 볼쯔만(Boltzmann)

현대 물리학의 거장 중의 한사람인 파인만(Richard Feynman)은 많은 업적으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그가 쓴 물리학교재(Lectures on Physics) 및 명강연, 여러 재미있는 행적 등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강연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장기 말이 한둘만 놓인 장기판의 한 귀퉁이만 보면, 당장 무엇이 어떻게 될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기 말 모두가 놓인 장기판 전체를 보면, 장기 말이 너무 많아 무엇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서 내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여러분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이 행위도 따지고 보면 간단한 법칙을 따르는 하나 하나의 원자가 엄청 나게 많이 모여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인데, 이것을 믿는 사람은 많지가 않습니다."

기존의 물리학의 주요 관심사는, 자연 현상을 일으키는 기본 법칙들을 밝혀 내는 것이었다(중력, 전자기력 등 입자들간에 상호 작용하는 힘, 물체의 운 동법칙 등...). 즉, 장기에 비유한다면, 장기 말 하나 하나가 움직이는 규칙을 알아 내려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장기 말 각각의 규칙을 안다고 해서, 장기 한판 의 승부를 예측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원자 등의 기본 입자에 작용하는 힘과 법칙 등을 알아냈다고 해서 자연 현상을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일 것이다. 입자의 수가 많은 대상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엄청나게 다양하고 복잡하며, (예를 들면, 기체 및 유체의 운동, 기상의 변화 등) 인간을 포함한 생명 현상 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와 같이 복잡한 자연 현상을 다입자의 집단적 시스템의 운동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곧 통계물리학이며, 극도의 복잡성에서 새로운 질서를 찾아내는 것이 그 목표이다.

통계물리학은 19세기 후반, 오스트리아의 대(大)물리학자 볼쯔만(Ludwig Boltzmann; 1844-1906)에 의해서 창시되었다. 음악의 도시로 유명한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난 그는, 뮌헨 대학, 빈 대학 등에서 물리학을 강의하면서 기체의 운동, 열현상 등에 대해 깊이 연구하여 많은 업적을 쌓았고, 열적 현상의 비가역 과정(Irreversible process)은 원자, 분자 등의 운동 개념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오스트발트, 마하 등의 원자론에 반대하는 당시의 학자들과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특히, 1895년 뤼벡에서 열린 독일 자연과학자 대회에서의 대(大)논쟁은 매우 유명한데, 많은 학자들이 원자론자와 원자 반대론자의 두 패로 갈리어 치열한 논쟁을 거듭하였다. 돌턴(Dalton)의 원자론이 나온 지 거의 100년이 되었건만,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 분자의 존재를 믿지 않는 과학자들도 매우 많았던 것이다. 그후, 원자론자들은 일정 부피에 들어 있는 기체 원자의 수를 정밀하게 계산해 내고, 기체의 미립자 운동(=브라운 운동)을 분자운동의 이론으로 해석해 내는 등, 많은 증거들을 제시하고 명확한 근거를 설명하자 원자 반대론자들은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고, 원자, 분자론은 현대 과학의 수많은 분야에 적용되는 중요 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통계물리학의 창시자이며, 원자론을 승리로 이끈 핵심인물이었던 볼쯔만은 1906년 9월6일, 어느 피서지의 호텔방에서 목매달아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다. 그가 자살한 원인에 대해서는, 그간 원자 반대론자들과 반복된 격렬한 논쟁에 지쳤기 때문이라고 하며, 말년에는 극심한 신경 쇠약 증세에 시달렸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그가 제시한 통계물리학 이론에 비춰 본 우주의 미래를 비관했기 때문이라고도 하는데, 우주를 닫힌계(Closed system)로 보면, 우주 전체의 엔트로피(Entropy)는 계속 증가하여, 그것이 최고에 이르는 순간은 바로 우주의 열적 죽음, 즉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고 해석하였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당시 또 다른 상태에 처하게 된 고전 물리학의 위기를 반영하는 사건으로 주목받기도 하였다. 비록 볼쯔만은 스스로 세상을 떠났으나, 그가 제시한 통계물리학이라는 새로운 방법론은 오늘날 물리학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과학분야에도 널리 적용되는 중요한 것으로서 현대 과학사상의 한 축을 이루며, 최근에 각광받는 카오스이론 (Chaos theory) 등의 "복잡성의 과학"에도 그 토대를 제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④ 표본 위조 혐의의 생물학자 - 캄메러

생물학에 있어서 진화론은 오늘날 널리 인정되고 있으며,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진화론"하면 다아윈(1809-1882)을 떠올리게 되는 데, 진화론에도 여러 가지 다른 이론이 있으며, 다아윈 이전에도 진화론을 주장한 학자들이 꽤 있었다. 물론, 오늘날 정설로서 인정되는 것은 "자연 도태설"에 기반한 다아윈의 진화론이지만, "용불용설"(用不用說)에 기반한 라마르크 (1744-1829)의 진화론도 옛날에는 만만치 않았다. 용불용설과 자연도태설의 가장 큰 차이는, "획득형질의 유전" 여부인데, 예를 들어 "기린의 목은 왜 길까?" 를 설명할 경우, 라마르크의 용불용설에서는 "기린은 높은 나무의 잎을 먹으려고 자꾸만 목을 길게 뽑았으므로 목이 길어졌을 것이다."라고 설명하는 반면, 다아윈의 자연 도태설에서는 "기린의 목이 저절로 길어진 것이 아니라, 치열한 생존 경쟁의 과정에서 목이 짧은 기린들은 도태된 반면, 목이 긴 기린들만이 살아 남아 세대를 거듭하면서 지금처럼 진화한 것이다." 라고 설명한다.

오늘날에는,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라마르크의 학설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극단적 예를 들자면, 꼬리를 자른 암수 쥐를 교미시킨다고 해서, 꼬리가 없는 새끼 쥐가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연도태설도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한다고 보기는 어려운 점이 있으며, 이로 인하여 20세기 초반 무렵까지만 해도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을 지지하는 주장을 펴는 생물학자들도 많았다.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 파울 캄메러(1880-1926)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빈에서 태어난 그는 빈 대학을 졸업한 후, 주로 양서류와 파충류를 연구하였는데, 그는 이 종류의 동물들을 사육하고 관찰하는 데에 특출한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그는 두 종류의 유럽산 불도마뱀을 표본으로 삼아,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사육하여 그들의 형질을 다르게 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즉, 얼룩 불도마뱀을 검은흙에서 사육하면 노란 반점이 점점 없어져서 도마뱀의 몸이 거무칙칙하게 되고, 반대로 노란 흙에서 사육하면 노란 반점이 점점 커져서 도마뱀의 몸 색깔이 전체 적으로 노랗게 된다는 것을 밝혔는데, 그는 이것을 라마르크의 이론에 유리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가 더욱 강력하게 라마르크의 이론을 주장하게 된 것은 이른바 "두꺼비의 혼인혹"에 관한 실험인데, 이는 나중에 숱한 논란을 낳게 되었다.

양서류, 즉 물뭍동물인 개구리는 대부분 물 속에서 교미를 하기 때문에, 교미할 시기가 되면 그에 적합하도록 개구리의 몸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즉, 암개구리를 붙잡기 편리하도록 수캐구리의 앞발 끝에 검고 뿔 같은 모양의 융기가 생겨나게 되는데. 이를 "혼인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개구리 종류 중에서도 두꺼비의 경우는, 땅 위에서 교미를 하기 때문에 혼인혹 같은 것을 필요로 하지 않으므로 교미기가 되어도 이런 것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캄메러는 작은 동물의 사육에 관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해서, 두꺼비를 물 속에서 사육하였고, 그렇게 하면 두꺼비에게도 혼인혹이 생겨날 것이라고 믿었다. 1919년, 그는 자신의 실험 결과 한 마리의 숫 두꺼비에게도 혼인혹이 만들어졌다고 학계에 보고하였으며, 많은 생물학자들은 이것이 라마르크의 이론을 확증하는 명백한 증거라고 주장하여, 세계 생물학계는 큰 충격과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특히 소련의 생물학자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에 근거하여 획득형질의 유전을 믿는 경우가 많았는데, 당연히 캄메러의 주장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1926년 생물학자들은 별도의 위원회를 조직하여, 캄메러가 사육하였다는 숫 두꺼비 표본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몇 주일의 정밀한 조사 끝에 나온 결론은, 캄메러의 실험 결과가 엉터리였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개구리의 혼인혹은 가시모양의 돌기가 있어야 하는데, 캄메러가 지니고 있던 두꺼비는 그런 모양이 아니었고, 거무스름한 빛깔은 인위적으로 먹을 주입한 결과라는 것이었다.

이 보고서가 발표된 지 얼마 후인 1926년 9월23일, 캄메러는 오스트리아의 어느 산 속에서 머리에 권총을 쏘아 자살한 채로 발견되었다. 캄메러가 공명심에 눈이 어두운 나머지, 학자적 양심마저 내팽개친 채 스스로 두꺼비 표본을 조작했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조작에 그도 속았는지는 지금도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33. "색맹 대화학자"

역사상의 위인들 중에는 신체적 장애를 불굴의 의지로 극복하고, 훌륭한 업적을 남긴 인물들의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3대 고통의 성녀"라 불리는 헬렌켈러라든가, 소아마비였던 루스벨트 대통령, 귀머거리가 된 후에도 불후의 명작을 남긴 베에토벤 등등...  그런데, 과학 분야에서는 선뜻 떠올리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필자가 대학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이공계의 몇 학과나 의학과 등에는 색맹은 말할 것도 없고, 색약 등의 장애가 있는 사람도 입학이 허용되지 않았다.

영국의 화학자 돌턴(J. Dalton; 1766-1844)은 근대적 원자론의 토대 위에서 화학을 체계화한 인물로서, 모든 화학 교과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위대한 화학자가 선천적 색맹이었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아마 믿지 못하겠다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돌턴은 가난한 직물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소년 시절부터 수학에 뛰어나서 "수학의 천재"라는 칭찬을 받기도 하였고, 12살 때에 마을 사람들의 추천으로 마을 소학교의 교장이 된 적도 있었다. 청소년 시절에는 기상학을 깊게 연구하여, 20만장에 달하는 엄청난 관측 기록을 남길 정도로 놀라운 집념을 보였고, 외국어, 물리학, 화학 등도 폭넓게 공부하였다.

1794년 맨체스터 문학, 과학협회 회원으로 선출된 그는 이즈음부터 기체론과 원자론을 연구하며 화학의 새로운 장을 열어 나아가기 시작하였다. 즉, 고대 그리스 데모크리토스 이래의 원자론을 화학에 체계적으로 적용하여, 수소와 산소가 결합하여 물이 되는 원리를 밝혀 내었고, 당시 다른 화학자들이 발견하기 시작한 기체의 여러 성질들을 "원자"라는 명확한 개념 아래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또한 이 과정에서, "○"(산소;O), "●"(탄소;C)와 같은 형태의 원소 기호를 처음으로 고안하여 사용하였다.

돌턴이 자신의 색채 감각에 이상을 느낀 것은 소년 시절에 친구들과 군대의 행진을 구경하던 무렵이라고 한다. 한 친구가 "'빨간색 군복이 너무나 멋지고 화려하다"라고 말하자, 자기는 풀색으로 보인다고 하여,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집안은 비록 가난하였으나, 신앙이 독실한 엄격한 퀘이커 교도 집안이었는데, 당시의 퀘이커 교도들은 빨간색과 같은 화려한 색의 의복을 입는 것을 금하였으며, 폭력을 멀리하고 평화를 사랑한다는 의미에서 무기 등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돌턴은 청년시절 어머니에게 비단 양말 한 켤레를 선물로 사 드렸는데, 자신의 눈에는 푸른빛이 도는 회색양말로 퀘이커 교도에게 적절한 것으로 보였으나, 어머니는 새빨간 양말을 받아 들고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고 한다. 또 한 번은 그가 파리에 갔을 때, 양복을 새로 맞추려고 진열되어 있는 천을 골라 양복을 주문하였는데, 수렵용 빨간 코트를 만드는 천을 택했기 때문에 그가 퀘이커 교도임을 아는 양복점 주인을 의아하게 만든 적도 있었다.

돌턴이 많은 업적을 쌓은 후, 나이가 들어서 은퇴하게 되자 영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려서 고액의 연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국왕을 배알토록 하였다. 그런데, 당시 국왕을 뵈려면 반드시 화려한 예복을 입고 칼을 차야 했으므로, 관계자들은 상당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돌턴이 퀘이커 교도임을 감안하여, 칼을 차지 않아도 되는 법학 박사의 예복을 입기로 합의하였는데, 그 옷의 빛깔은 화려한 빨간색이었으나, 돌턴의 눈에는 칙칙한 흙색으로 보였으므로 아무 문제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돌턴은 자신이 색맹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은 후, 원자론의 연구만큼이나 색맹에 관해서도 깊게 연구하였다. 그는 전형적인 적록색맹이었는데, 자기가 색맹인 이유가 "눈 내부에 있는 액체가 빛 가운데에 빨간 부분을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라고 믿고서, 자기가 죽거든 자기의 안구를 조사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가 죽은 후, 친구인 의사 랜섬이 유언을 따라 그의 한쪽 눈을 조사하였으나, 눈 안의 액체가 색맹의 원인이라는 돌턴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음이 밝혀졌다. 오늘날에도 영어로 선천성 색맹, 특히 적록색맹을 "돌토니즘(daltonism)"이라고 부르는데, 물론 돌턴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다.


34. "비행기의 역사(1)"

새처럼 하늘을 날고 싶다는 소망은 인간의 매우 오래된 꿈이었음에 틀림없다. 세계 여러 민족의 전설, 신화 등에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고,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도, 날개를 만들어서 태양을 향하여 새처럼 날아올랐으나, 날개를 접합한 촛농부위가 태양의 열기로 녹아 버리는 바람에 추락하여 죽고 말았다는 이카루스(Icarus)의 이야기가 나온다.

비행의 시도에 관련된 사실이 고대 로마나, 중세의 기록에도 남아 있으며, 르네상스 시대 이후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여러 과학자, 철학자 등이 인간의 비행 문제에 관심을 갖고서 연구를 하기도 하였다. 16세기 초엽에 비행기 등에 관해 놀라울 정도로 심층적인 연구를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왼손의 천재"로 일컬어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이다. (멘사인가 하는 세계 천재 클럽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천재로 선정했다던가?) 문학, 예술, 과학 등등 온갖 방면에 걸쳐서 만능에 가까운 능력으로 수많은 업적을 남겼던 그는, 새의 비행의 본질과 운동 및 공기의 저항 등에 대한 논문을 저술하였고, 인간의 힘으로 날개를 움직이는 "오니솝터"라는 비행기 및 낙하산, 헬리콥터를 설계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을 직접 제작하여 실험했다는 기록은 없으며, 설령 실험했다 해도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성공할 수도 없었겠지만, 이 시대를 뛰어 넘은 위대한 천재의 대담한 업적은 "비행기의 역사" 에 있어서도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비행기"는 아니지만, 실제로 인간을 태우고 하늘을 나는 것이 18세기 말경에 가능해 졌는데, 몽골피에 형제의 열기구가 바로 그것이다. (묘하게도, 비행과 관련된 발명에는 "형제" 발명가가 많다. 라이트 형제도 그렇고, 글라이더의 발명자 릴리엔탈도 형제가 함께 노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 리용 근처 마을의 제지업자 몽골피에 집의 두 형제, 조세프와 쟈크는 종이봉투에 불을 쬐면 하늘로 날아 오르는 데에 착안하여, 열기구(熱氣球)의 개발에 착수하였다. 1783년 6월, 종이와 베로 거대한 기구를 만든 후, 화로불로 뜨거운 연기를 주입하여 하늘로 띄우는 데에 성공하였고, 그 기구는 1000m 이상의 상공까지 올라갔다가, 출발지점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인근 마을에 떨어졌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하늘에서 왠 괴물이 내려왔다." 고 크게 놀라서 괭이, 낫, 장대 등을 들고 덤벼들었다고 한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후원을 받으면서 열기구 연구를 계속하던 몽골피에 형제는 국왕 루이 16세를 비롯한 수많은 구경꾼이 지켜보는 가운데 기구에 염소, 닭, 오리 등의 가축을 태우고 하늘로 날리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드디어 유인 비행도 시도하기에 이르렀다. 1783년 11월, 물리학자 드 로제와 아를란드 후작이 기구에 밧줄을 묶지 않고 기구 안에서 계속 짚을 태워 부력을 유지해 가면서 하늘을 나는 "세계 최초의 유인비행"에 무사히 성공하였다.

한편, 그 무렵 프랑스의 물리학자 샤를은 (보일-샤를의 법칙으로 유명한...) 몽골피에 형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기구의 개발을 추진하였는데, 열기구 대신에 가벼운 수소를 기구에 주입하는 방식이었다. "과학자" 라기 보다는, 오랜 경험과 장인적 노력에 의하여 열기구를 개발했던 몽골피에 형제와는 달리, 샤를은 기체의 성질에 관해 연구한 뛰어난 물리학자였고,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의 특성을 이용하여 기구를 만드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실험용 수소기구가 상공에서 폭발을 일으키는 등, 어려움도 많았으나 문제점들을 지속적으로 해결하여, 1783년 12월 수십만의 파리시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샤를 자신이 직접 수소기구를 타고 하늘 높이 올랐다가 무사히 내려옴으로써 그의 수소기구도 커다란 성공을 이루었다.

그 후, 비행의 주도권을 두고서 열기구와 수소기구의 치열한 경쟁이 계속 되었는데, 수소기구는 수소를 만드는 데에 비용이 많이 들고 제작과정도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었으나, 소형으로 만들 수 있고 안정성 및 조종성도 뛰어나다는 장점이 있었다. 샤를 자신도 수소기구의 연구, 제작에 많이 기여하였고 공업의 발전에 따라 비용도 절감되어, 차츰 열기구에 비하여 수소기구가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더욱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수소기구를 이용한 도버해협의 횡단 비행이었는데, 1785년 1월 두 사람이 샤를의 수소기구를 타고 영국을 출발하여 도버해협을 횡단하여 프랑스의 한 마을로 내려오는 데에 성공하였다. 비행 도중 부력이 약해져서 기구가 자꾸 하강하였으므로 두 사람은 실었던 짐들을 모조리 내던지고, 나중에는 웃옷과 바지까지 벗어 던졌으나, 프랑스 해안가에 다다랐을 무렵에는 그걸로도 부족하여 아예 기구의 곤돌라 부분마저 떼어 내버리고 밧줄에 매달려서 간신히 땅으로 내려오는 등, 톡톡히 곤욕을 치른 것으로 전해 졌으나, 아무튼 인명피해 없이 횡단비행에 성공한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듣고 몽골피에 형제도 자신들의 기구로 도버해협을 횡단할 계획을 세웠고, 기존의 열기구만으로는 횡단비행이 불가능할 것이라고 판단한 이들은, 샤를의 수소기구에 열기구를 복합시켜 만든 절충형 기구를 제작하였다. 비행사는 최초의 유인 비행을 성공시킨 드 로제를 포함한 두 사람이었는데, 1785 년 6월,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출발하여 영국으로 가기 위하여 기구에 올랐다. 그러나, 출발 30분 후 기구에 불이 붙어 폭발하는 바람에 프랑스 해안가에서 추락하여 즉사하고 말았고, 이는 인류 최초의 항공사고로 기록되어 있다.

미국의 과학자 겸 정치가 벤자민 프랭클린(피뢰침의 발명자)은 당시의 기구실험들을 관찰한 후, 장래에 이들이 전쟁에 이용될 것이라고 "프랭클린의 편지" 에서 예언한 바 있었다. 사실, 1793년부터 프랑스 육군은 정찰용 기구를 만들어서 실전에서 사용하였으며, "기구의 손자뻘"이라고도 볼 수 있는 오늘날의 전투기 등을 감안해 보면, 프랭클린의 예리한 분석과 예언이 정확했다고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35. "비행기의 역사(2) - 글라이더"

우리는 "비행기 발명" 하면 흔히 라이트 형제를 떠올리게 된다. 물론, 라이트 형제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성공적인 "비행기"를 만들었고, 이것을 널리 보급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함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항공시대를 여는 데에 결정 적으로 공헌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20세기초 라이트 형제의 성공이 있기까지, "하늘을 날기 위하여" 수많은 과학자, 기술자, 발명가들이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치렀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처음으로 하늘을 날게된 18세기의 기구로부터, 릴리엔탈의 글라이더, 체펠린 백작의 비행선, 라이트 형제 이전에 실패로 끝나고만 여러 종류의 프로펠러 비행기 등등...  더구나, 다른 발명품과는 달리 "하늘을 날아야 하는" 이것들은, 단 한 번의 실수나 사고가 곧 안타까운 인명피해에 직결되는, 심각한 희생을 치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몽골피에 형제와 샤를의 기구로부터, 라이트형제의 비행기로 넘어가는 연결 고리에는, 릴리엔탈의 글라이더와 체펠린 백작의 비행선이 있다. 18세기 말엽에 프랑스에서 활발히 개발된 기구는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구임에는 틀림없으나, 반드시 바람에 의존해야만 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원하는 곳으로 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처럼 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영국의 케일리도 그 중 한사람이었다. 그는 솔개나 박쥐 등이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나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였고 실험을 통하여 비행이 가능한 날개의 크기, 모양 등을 여러모로 연구하고 논문들을 남겼다. 그리고, 새의 모형을 본떠서, 하늘을 날 수 있는 글라이더를 제작하였는데, 이 글라이더의 모형은 오늘날 비행기 모형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비록 인간이 타고 날 수 있는 글라이더를 제작하지는 못했지만, 이에 관한 기초적 연구들을 훌륭히 이루어 놓았던 것이다.

그후 수십년이 지나서, 독일의 릴리엔탈이 글라이더를 타고 하늘을 나는 데에 성공하였다. 1848년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하늘을 날아 보고 싶다는 꿈을 지니고 있었고 비행기를 만들기 위하여 많은 서적들을 읽는 등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사람의 힘으로 날개를 움직여서 날아가는" 비행기의 제작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론적, 실험적으로 알아낸 그는, "날개를 펼친 채로" 날아가는 글라이더의 개발에 열중하게 되었고, 새가 나는 모습 및 새의 날개 등에 관하여 끈길 지게 관찰하고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하늘을 나는 기초 원리로서의 새의 나는 방법"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발표하는 한편, 사람이 탈 수 있는 글라이더의 제작에도 착수하여, 1891년 드디어 자신이 직접 타고서 비행에 성공하였다.

그는 그 후로도 글라이더의 개량과 비행에 계속 몰두하여, 5년 동안 2천 번 이상의 비행실험을 하였다. 비행의 방향을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하여, 글라이더에 비행키를 달아서 실험해 보려던 그는, 1896년 8월9일 강한 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하늘을 향해 높이 날아올랐으나, 거센 바람을 맞아서 글라이더가 뒤집혀져 추락하고 말았다. 큰 부상을 입은 그는 이튿날 "무슨 일이든지 희생자가 없으면 진보하지 못한다."는 말을 남기고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릴리엔탈이 마지막 글라이더 실험 비행을 하다가 추락하여 죽은 그 언덕에는, 그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는 기념비가 서 있다고 한다. 그는 비록 엔진이 달린 비행기를 만들려는 꿈은 이루지 못하고 죽었으나, 그의 업적 및 이론 등은 훗날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발명할 수 있게된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36. "비행기의 역사(3) - 비행선"

우리는 오늘날 "하늘을 나는 교통수단" 하면 두말할 것 없이 "비행기"를 떠올리게 된다. 소형 경비행기로부터 점보 여객기, 화물용 수송기, 전투기 등 많은 종류의 비행기들이 세계 곳곳의 하늘을 누비고 있으니, 처음부터 비행기 이외의 공중의 교통 수단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그러나, "공중 교통기관"의 역사는 그렇지 않다. 비행기의 개발이 크게 진전되고 널리 보급되기 이전인 20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비행선"이 대중용 공중 교통수단으로서 널리 이용되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커다란 럭비공"인 비행선은 독일의 체펠린 백작(1838-1917)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개발, 보급되었다.

전편에서도 소개했듯이, 인간을 처음으로 날 수 있게 한 기구가 발명된 것은 18세기말이었다. 비행선도 하늘을 나는 원리는 기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나, 기구에는 독자적인 엔진이 없으므로 자유로운 비행이나 조종이 매우 어려울 수밖에 없고, 특히 바람이 불게 되면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버리기 쉬웠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기구에 엔진과 조정장치를 부착시키면 더욱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글라이더의 창시자" 케일리도 비행선의 설계를 계획한 적이 있었다.

최초로 비행선을 제작하여 비행에 성공한 사람은 프랑스의 앙리 지파아르였다. 길이 44m, 직경 12m의 거대한 유선형 공기주머니에 증기기관과 프로펠러를 탑재한 그의 비행선은 1852년 9월 시속 약 10km 정도의 속도로 비행에 성공하였다. 그 뒤 유럽 각국에서 비행선의 연구, 개발을 활발히 하게 되었으나, 성능면에서 획기적으로 발전된 것은 거의 19세기 말 까지도 나오지 않았다.

독일의 장교였던 체펠린은 사관학교 시절부터 용맹을 떨쳤으며, 남북전쟁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전투에 여러 번 참전했던 체펠린은, 한 번은 프랑스군의 기구 정찰부대를 보고서 비행선의 개발을 떠올렸다고 한다. 당시에는 대공포 같은 무기가 없었으므로, 더욱 성능이 우수한 비행선을 만들어 프랑스군의 기구에 대항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대에서는 그와 같은 것을 개발할 여유는 없었으므로, 그의 나이 50이 넘어서 중장 계급으로 제대한 이후에야 비로소 비행선의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는 독일 공업협회의 후원 아래 비행선 제조 회사를 세우고 공장을 차려서, 1900년 가솔린 엔진과 알루미늄으로 된 프로펠러를 장착한 대형 비행선을 완성하였고, 이 비행선은 시속 약 30km의 속도로 8분 정도 날아 시험비행 에 성공하였다. 그후, 비행선의 성능을 거듭 개량함으로써 비행시간을 크게 늘리고, 탑승 가능한 승객의 수도 더욱 늘어나게 되어 체펠린은  "공중왕"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체펠린의 비행선이 큰 성공을 거두자 세계 각국에서는 앞다투어 비행선을 연구, 개발하게 되었고, 비행선 경주 대회 등의 행사도 열려서 체펠린의 비행선이 경쟁에서 이기기도 하였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군용 비행선으로도 이용되었으나, 체펠린은 민간 여객용으로 비행선을 널리 이용하려던 꿈은 이루지 못한 채 1917년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전쟁 후 민간여객용 비행선이 활발히 개발, 보급되어, 그의 이름을 딴 "채펠린 백작호"가 1929년 만들어지기도 하였는데, 길이 235m에 550마력의 엔진을 5개나 장착한 이 초대형 비행선은 65명의 승객을 태우고 평균 시속 110km의 속력으로 세계 일주 비행에 성공하였다. 1930년대까지는 "비행선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세계 각국의 "초대형 럭비공"들이 하늘을 주름잡고 있었으나, 비행선에는 몇 가지 약점이 있었다. 첫째, 덩치가 너무나 크고 바람에도 취약해서 이리저리 떠밀려 가기 쉬웠다. 게다가 덩치에 비해 탑승 가능한 승객은 적은 편이었고, 속력도 느리며 보관 및 유지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위험한 것은, 폭발하기 쉬운 수소 가스가 선체에 가득 차 있다는 점이었다.

1935년에 제작된 독일의 129번째 비행선 "힌덴부르크호"는 "체펠린 백작호"보다도 훨씬 큰 초호화 비행선으로서 승객들을 날랐으나, 1937년 5월 미국의 한 공항에서 뇌우로 인하여 큰 폭발 사고를 일으키고 말았다.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이 참사로 인하여 이후 독일에서는 비행선의 제작과 이용이 금지되었고, 세계 각국에서도 심각한 사고들이 자주 발생하였다. 그리하여, 비행선에 비해 작고 속력이 빠르며 제반 성능도 우수한 "비행기"가 본격적으로 개발된 이후에는, 결국 비행기에게 "하늘의 왕좌"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수소가스 대신에 안전한 헬륨가스를 이용하는 비행선이 있기는 하지만, 광고용, 기상관측용 등의 특수한 목적에 쓰일 뿐, 일반 여객용으로는 거의 이용되지 않고 있다.


37. "비행기의 역사(4)"

글라이더에 엔진을 단 것, 이것이 곧 비행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하게 되려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어려웠던 것은, 작고 가벼우면서도 큰 힘을 내는 엔진을 제작하는 문제였다. 글라이더의 선구자 케일리도 기구에 엔진을 달아서 프로펠러를 돌리는 비행선 같은 것을 구상하였으나, 엔진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포기하고 결국 엔진이 없는 글라이더의 개발에 주력했던 바가 있었다.

케일리의 연구를 관심 있게 읽어보았던 영국의 헨슨과 스트링펠로는 대형 글라이더에 프로펠러 엔진을 붙이는 형태의 비행기를 발명하려 노력하였고, 하늘을 날 수 있을 정도로 가볍고 작은 엔진을 만들고자 무척 애썼다. 그러나, 1842년 그들이 제작한 비행기는 하늘을 날지 못하고 "땅위로만 달리는" 작품이었고, 글라이더의 크기, 날개 등을 개량하였으나 거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연구 자금도 바닥나고 계속되는 실패에 지친 헨슨은 비행기의 발명을 포기하였고, 스트링펠로 혼자서 날개와 프로펠러를 다시 개량하고 더욱 작고 가벼운 증기 기관을 만들어 장착시킨 결과, 1848년 드디어 모형 비행기를 하늘로 날릴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사람이 탈 수 있는 비행기를 개발 하고자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출력이 낮은 증기 기관으로 하늘을 나는 데에 필요한 동력을 얻기란 너무 무리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라이트형제에게 비행기 발명의 선두를 빼앗기기는 하였으나, 미국의 랜글리는 오늘날 비행기의 원리를 확립한 인물로서, 비행기의 발달사에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유능한 천문학 교수로서 명성을 날렸던 그는 대학에서 물리학, 수학 등도 강의하고 연구하였으며, 공기 역학 지식과 실험을 바탕으로 하여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는 원리 및 조건들을 밝혀냈다. 모형 비행기의 제작과 시험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는, 1903 년 사람이 탈 수 있는 실물 비행기를 만들어서 시험하였으나, 그의 비행기는 이륙 직후 강물로 추락해 버리는 등 두 차례에 걸친 유인 시험 비행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비행 실험이 실패하고 난 불과 9일 후인 1903년 12월17일,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가 최초의 유인 동력비행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크게 낙담하였고, 실의에 빠져서 몇 년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가 성공을 거두자, 세계 각국은 성능이 우수한 비행기의 개발에 앞다투어 뛰어 들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프랑스는 진작부터 비행기의 연구에 공을 들여온 나라로서, 이후 비행기의 발전을 주도하게 되었다. (프랑스에서 비행기 등의 항공산업이 특히 일찍부터 발달한 원인으로서는, 역사적으로 인접국인 독일의 막강한 육군에 번번이 혼난 것에 대한 대비책이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프랑스의 비행기가 미국을 앞지를 수 있게 된 공로자로는 파르망과 블레이료를 꼽을 수 있다. 파르망은 비행기에 바퀴를 달아서 활주로를 통하여 이․착륙할 수 있게 하였고 (라이트형제의 당시 비행기는 레일 위를 달 려서 이륙하는 방식이었다.) 자유롭게 원을 그리면서 날 수 있는 비행기를 만들어서 1908년 프랑스 정부 주최의 비행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블레이료는 종전까지의 겹날개 구조로 된 복엽기 대신에 홑날개로 된 "단엽기"를 세계 최초로 발명하였고, 1909년 상금 5천 파운드가 걸린 영국 데일리메일 신문 주최의 도버해협 횡단비행에 성공하여 교통수단으로서의 비행기의 가치를 확인하고 이의 발달을 촉진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후, 영국의 휘틀은 제트 엔진을 발명하여 비행기에 장착하는 데에 성공함으로써 비행기의 속력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게 되었으며 1955년 미국의 한 제트 전투기는 "마의 벽"이라는 음속(시속 1230km)을 돌파하는 속력을 냄으로써 "소리보다도 빠른" 비행기를 현실화시키기에 이르렀다.

라이트형제가 처음 하늘을 나는 데에 성공한 비행기의 속도는 불과 시속 16km 이하로서 자전거보다도 느린 정도였으나, 오늘날의 제트비행기는 음속의 2배인 마하 2 이상도 가능한 것을 보면, 얼마나 비행기의 성능이 급속도로 발전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비행기 성능이 획기적으로 발달된 데에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큰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도 부인할 수 없다.)  하늘을 난다는 인류의 오랜 꿈을 실현시키고, 오늘날 가장 빠른 교통수단인 문명의 이기로서 비행기가 자리를 잡게 된 데에는 라이트 형제처럼 잘 알려진 인물이건, 무명의 숨은 공로자이건 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밑바탕이 되었고, 오랜 시간과 역사를 거친 인류 과학기술의 발전 이 복합적으로 요구되었던 것이다.


38. "시계 이야기"(1)

오늘날 시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논한다는 것은 정말 입만 아픈 일이 될 것이 다. 갈수록 바쁘고 복잡해지는 현대 사회에서, 만약 시계가 없다면 (혹은 아주 부정확하다면) 사람들의 생활 자체가 뒤죽박죽이 되어버릴 것이다. 요즘엔 " 시테크"라 하여, 촌각의 시간도 제대로 활용하자는 이야기도 자주 들린다. 시계의 역사는 어찌 보면 인류 문명사의 한 축을 이루어 왔는지도 모른다. 해시계, 물시계 등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나타났으며, 보다 정확한 시계를 만드는 일은 많은 과학자, 기술자들의 커다란 관심사로 남아 있었다. "시계의 역사" 속에서 인류는 어느 시대에 어느 정도로 정확한 시계를 만들 수 있었는지, 그리고 이와 관련된 뒷이야기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아주 옛날, 사람들의 생활이 단순했던 시대에는 시계가 별로 필요치 않았을 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수렵, 목축 등으로 살아가던 원시 사회나, 농경 시대에서는 그다지 정확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초의 시계가 고안된 것은, 기원전 약2000년전, 고대 바빌로니아에서라고 하는데, 역시 "해시계"가 가장 먼저였다. 지표면에 막대기 등을 세워서 그림자의 위치만 재면 되므로, 만들기도 간단했을 것이다. 햇빛이 없는 밤에는 별의 방향을 정확하게 재어서 시간을 아는 "아스토로라브"라는 시계가 쓰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흐린 날이나 비오는 날은 햇빛도 별빛도 볼 수 없었을 것이므로, 물시계, 모래시계 등이 고안되어 쓰였다. 이들 시계들은 이집트, 중국, 인도, 알렉산드리아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널리 쓰였다. 고안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비교적 쉽게 구상해서 만들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시계의 개량으로 유명한 사람은 헤론의 친구 크테시비오스가 있다. 그는 기존의 물시계에 톱니바퀴를 붙여서 보다 정밀하도록 만들었으며, 1년 중 해뜨는 시각과 해지는 시각이 항상 6시로 고정되어 있었다 한다. 그밖에도 여러 시계가 있었는데, 9세기경 독일의 알프레트 대왕은 "양초 시계"를 즐겨 사용했다 한다.

조선시대 초, 우리 나라에서도 아주 정확한 물시계가 만들어졌으니, (잘 알고 있듯이) 세종대왕 때 장영실이 그 주인공이다. (이분의 이름을 따서 국산화기술에 수여하는 "장영실 상"이라는 것도 있지요?)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한 영특한 임금답게, "과학기술"의 진흥에도 많은 힘을 기울였는데, 아마도 그 당시가 (근대 서양과학이 들어오기 전) 우리 역사상 가장 과학 기술이 발달했던 시기로 꼽힐 것이다. 물론, 세종 때의 그것을 엄밀한 의미의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또한 그 이후에는 왜 그토록 급속히 쇠퇴하고 말았던가에 대한 논의는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장영실은 원래 천한 노비신분이었으나, 기술에 뛰어난 재주를 보여서, 세종대왕에게 천거되어 물시계의 제작에 착수하게 되었다. 당시 궁중에는 중국에서 들여온 물시계가 있기는 하였으나, 자주 고장이 나고 시간을 알아보기에도 매우 불편하였다.  장영실은 물시계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고, 중국, 아라비아 등의 시계와도 비교하면서 연구하여, 세종16년 자동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어서 경복궁에 설치하였다. 그는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시계와 천체 관측 기구인 혼천의를 결합시켜서 새로운 자동 물시계를 만들었고 "옥루"라고 이름하였다. (만약 이 "옥루"가 지금도 남아 있다면 우리 나라의 과학기술 유물 중 손꼽히는 걸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옥루는 시간, 절기 등을 나타내는 방법이 아주 정교하고도 흥미 있게 되어 있었다고 한다. 가운데에 높이 2m가량의 산모형이 있고, 구름 속의 선녀들이 시간마다 금방울을 흔들면서 시간이 적힌 카드를 들고 나오며, 산기슭에서는 땅속에 숨어 있던 동물들이 "제 시간"에 맞추어서 한 마리씩 스스로 구멍을 열고 나타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자시(子時)에는 쥐가, 축시(丑時)에는 소가 나오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그는 이밖에도 해시계, 천문기구 등을 만들었고, 우리의 자랑거리의 하나인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도 발명하였다. (그런데 요즈음 중국의 학자들은 이 "측우기"가 중국에서 발명된 것이라고 우기고 있다는데... 서양의 학자들도 대부분 그렇게 알고 있다고 한다. 남들은 없는 자랑거리도 만들어 내거나, 남의 나라 것까지 빼앗아 와서 전시해 놓기도 하는데, 우리는 "우리의 것"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명가" 장영실의 만년은 불행하였다. 세종대왕이 타고 다닐 가마를 하나 새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그만 부서져 버렸고 그 죄로 의금부에 갇혀서 문초를 당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상당히 높은 자리에까지 올랐던 벼슬도 박탈되고 말았다.

(다시 서양으로 거슬러 올라 가서...)

로마에 아우구스티누스라는 신부가 있었다. 당시 신부들의 중요한 일 중의 하나는 예배시간을 알리는 종을 치는 것이었다. 그의 교회 앞마당에도 해시계가 있었지만, 항상 태양의 그림자를 지켜봐야 했기 때문에 불편했고 흐리거나 비오는 날에는 그나마도 사용할 수 없었다.

"시계가 이렇게 불편해서야 원... 차라리 나 혼자 시간 재는 방법을 알아내야겠군." 그는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려 하던 중,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다. 그는 매일 구약성서의 "시편"을 읽는 습관이 있었는데, 처음부터 읽다가 "아삽의 시"라는 대목에 오면 항상 예배 시간을 알리는 종을 칠 시간이 되곤 하는 것이었다. 그의 책 읽는 속도는 거의 일정했으므로 이것을 시계 대신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 "인간 시계"는 놀랍게도 아주 정확하여 큰 효과가 있었고, 덕분에 그의 교회에서는 언제나 정확한 시간에 예배 종이 울리게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신부님은 흐린 날이건 맑은 날이건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 시간에 종을 치실 수 있을까? 해시계가 아닌, 다른 무슨 숨겨두신 시계가 있나봐." 동네 사람들은 그를 "시계 같은 신부님"이라고 불렀고, 이웃교회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가 치는 종소리에 맞추어서 종을 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항상 정확한 시간에 들려 오던 종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동네 사람들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상하군요. 신부님께 무슨 일이 일어난 것 아닐까요?" "그러게요. 해가 벌써 저렇게 높이 떴는데 예배 종소리는 들리지 않으니..." "우리 모두 신부님께 가봅시다." 동네 사람들은 교회로 모이기 시작했고, 이웃 동네의 신부들마저 뛰어왔다. ("학교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가 아니라 "교회종이 안친다. 빨리 가 보자...?") 그러나, 마을 사람들이 밖에서 불러도 신부님은 나오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방문을 살며시 열어 보니, "시계 같은 신부님" 은 그만 책상에 엎드려 곤히 자고 있었다. 성서를 읽던 중 피곤해서 졸다가 그만 잠이 들어서 종을 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한마디씩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신부님이 주무시더라도 저절로 종을 쳐주는 자동 시계를 만 들 수는 없을까?" 영어로 괘종시계를 "Clock"이라 하는데, 이 말은 원래 "종"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였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시계는 "종을 쳐야하는" 신부의 고생을 덜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39. "시계 이야기 2"

14세기 중반, 프랑스왕 샤를마뉴 5세는 정확한 시계를 갖기를 원했으나, 프랑스 기술자들이 만든 시계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해서, 재주가 뛰어나기로 소문난 앙리 드비크라는 독일인이 불려와 정확한 시계의 제작을 청탁 받게 되었다. 그는 줄 도르레의 원리를 응용하여, 도르레에 매달린 추의 낙하를 적당히 조절하고, 여기에 연결된 드럼을 일정한 속도로 회전시켜서 바늘이 시간을 가리키게 하는 일종의 "추시계"를 만들어 내었다. 프랑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 시계를 궁전탑에 세우도록 하였고, 앙리 드비크는 두둑한 상금을 챙겨서 독일로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시계가 고장나자 그는 다시 파리로 불려 왔고, 다른 사람은 시계의 고장을 고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아예 봉급을 받으면서 시계탑 속에서 살게 되었다. 유능한 재주꾼이 바로 그 재주 때문에 시계탑 속에 갇혀 버리게 된 것이었다.

이후, 시계는 부자층들을 중심으로 급속히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1500년경에는 독일의 뉘른베르크를 중심으로 시계 제조와 연구가 더욱 진전되어 드디어 태엽을 이용한 휴대용 시계도 나오게 되었다. 이 무렵의 휴대용 시계는 그 모양이 달걀과 비슷하다고 하여 "뉘른베르크의 달걀"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또한 추를 이용한 시계는 가정용 괘종시계로서 보급되었다. 그러나, 용수철을 동력으로 하는 휴대용 회중시계나 추시계 모두 당시의 기술로 정밀한 시간을 제공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하루에 15분쯤 틀리는 게 보통이었다.

보다 정확한 시계를 만들기 위한 이론적 기반을 제공하여, 이에 크게 공헌한 인물이 바로 "근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이탈리아의 갈릴레이이다. 그는 사원의 천장에 매달린 램프가 일정하게 흔들리는 것을 발견하고는 맥박을 짚어서 확인한 결과, 램프의 폭과 관계없이 흔들리는 주기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 내었다. (이것이 곧 "일반물리"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단진자운동 - Simple Harmonic Oscillator - 의 원리이다.) 진자의 주기는 진폭이나 추의 무게와는 무관하게, 오직 진자끈의 길이에 의해서만 변한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알아낸 그는, 직접 진자시계를 만드는 일에는 그다지 큰 힘을 기울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진자 등을 비롯한 물체의 운동에 관한 역학적 법칙의 기초를 세웠기에 훗날 좋은 시계들이 제작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었다.

1492년, 콜롬부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의 각국들이 앞다투어 항해에 나서던 "지리상의 발견" 시대에, 옳고도 안전한 항해를 위하여 보다 정확한 시계가 요구되었다. 네덜란드의 과학자 호이겐스는, 처음으로 진자시계를 발명하여 특허권을 취득하였고, 1664년에는 최초의 항해용 시계가 이용되기도 하였다. 또한 후크는, "물체의 탄성은 주어진 힘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후크의 법칙을 발견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용수철 운동의 등시성을 이용한 용수철 시계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18세기초, 해상 진출 경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정확한 항해용 시계는 항해의 성공 여부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보고, 항해용 시계의 발명에 엄청난 상금을 내걸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 조건이 만만치 않았는데 영국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영국에서 서인도 제도까지 항해하는 동안 2분 (경도로는 0.5도) 이상의 오차가 있어서는 안된다." 는 것이었다. 당시 선박의 운항속도를 고려한다면, 하루에 3초 이상의 오차가 생기면 불합격일 정도로 고도의 정밀성이 요구되었다. 수많은 기술자, 발명가 등이 심혈을 기울여 도전한 결과, 영국의 존 해리슨은 하루에 1/10초밖에 틀리지 않는 우수한 시계를 만들어서 1765년 상금을 받았다. 또한 프랑스의 궁정 시계공 르로아는 가느다란 태엽을 정확하게 움직이게 하는 장치를 발명하여 이를 바탕으로 역시 정밀한 항해용 시계를 제작하였다.

오늘날에는 태엽을 쓰는 기계식 시계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일상적으로 널리 쓰이는 전자시계뿐 아니라, 정밀한 시계로는 수정편의 전기적 진동을 이용한 "수정 시계"나, 분자 속의 원자의 진동을 이용한 "원자시계"도 있다. 또한, 시간의 단위 기준 자체도 바뀌어서, 지구의 자전을 기준으로 한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지금은 "1초"의 기준을 "세슘 133 원소에서 발생하는 특정파장 빛의 진동 주기의 9,192,631,770 배" 로 정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지금까지 매우 다양한 시계들이 선보여 왔으나, 근대 이후 "정확한 시계의 발명"은 근대 과학의 축적된 연구에서 비롯된 성과였으며, 또한 근대적인 기계 발명의 시초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40. "TV의 역사"

오늘날, TV처럼 대중들에게 널리 사랑 받는 전자제품도 드물 것이다. 때로는 "바보상자"라는 달갑지 않은 표현과 함께, 그 역기능을 우려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TV는 대중 문화의 꽃으로서, 현대인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TV는 누가 맨 처음 발명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전기로 그림을 보내려는" 착상은 19세기 후반 이후 많은 사람들이 했었고, 셀렌 광전지를 이용하여 텔레비젼을 만들어 보려는 노력이, 전화기의 발명자인 벨 등 여러 사람에 의해 시도되기도 하였으나, 반응속도가 느린 셀렌으로 실용적인 텔레비젼을 만들기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러던 중, 1884년 독일의 닙코프가 전기신호를 영상으로 바꿀 수 있는 초보적인 장치를 발명하여 (이른바 "닙코프 원판"으로 부름) TV개발에의 길을 닦았다. 브라운관을 채용한 오늘날의 전자식 TV와는 원리가 다르지만, 이 원판을 회전시키면 움직이는 영상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하였다. 실용적인 텔레비젼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사람으로는 영국의 존 로지 베어드(1888-1946)가 꼽힌다. 소년 시절부터 과학에 흥미를 지니고, 기계 제작, 실험 등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몸이 병약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 난 재능과 불굴의 집념, 노력을 바탕으로 하여, 사람들이 볼 수 있는 TV를 발명해 내었다. 그는 독자적인 이론이나, 특허를 지니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탁월한 장인적 기질을 발휘하여 못쓰는 가구에 24개의 구멍이 뚫린 닙코프 원판을 조립하여 움직이는 영상을 구현해 내었다.

지금과 같은 전자식 TV가 아닌, "기계식 TV"라고 말할 수 있는 베어드의 TV는, 닙코프 원판을 1분에 600번 회전시켜서 작은 구멍을 통과한 빛을 전기적인 신호로 바꿔서 동화상을 만들어 내는 방식이었다. 1925년 4월, 런던의 셀프리치 백화점 앞에서 최초의 텔레비젼을 시험해 본 그는, 화질을 거듭 개선하여 다음해 1월에는 영국 왕립 과학협회의 50여명의 과학자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텔레비젼 공개시험을 성공리에 마쳤다. 주사선 30개의 그의 새로운 TV모델은 영국의 BBC 방송을 통해 1935년까지 시험방송 되었고, 그때까지 영국 전역에 약 4천대 정도 보급되었다고 한다.

베어드는 컬러 텔레비젼의 연구에도 착수하여 성공하였으나, 뜻밖에도 새로운 강적과 경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강적이란 곧 오늘날과 같은 방식의 전자식 TV였다. 더욱이, 미국의 벨 전화 연구소 같은 경우는 (오 늘날의 AT&T) 천여명 이상의 고급 과학기술자에 훌륭한 시설들을 바탕으로 막대한 투자를 하여 전자식 TV를 개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어드와 같은 개인 발명가가 상대하기란 너무도 벅찬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베어드의 기계식 TV는 전자식 TV에 자리를 물려 줄 수밖에 없었고, BBC방송도 1936년 정규방송을 시작하면서 EMI가 개발한 전자식 TV를 채용하였는데, 주사선 수 240개에 훨씬 간편하고도 고화질의 성능을 구현 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더욱 그러하지만) "적자생존"이라는 냉엄한 논리가 기술 발전사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밖에 없는 만큼, 경쟁에서 패배한 베어드는 가난 속에서 불행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필자의 견해로는 바로 이 20세기 초반이 기술 발전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로 여겨진다. 천부적 능력의 발명가 개인보다는, 기업이나 연구소 등 대규모의 투자와 조직적인 R&D를 바탕으로 한 기술개발이 과학기술 발전의 주된 동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전기, 전자산업과, 나일론을 발명한 뒤퐁회사와 같은 화학산업 등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한편, 베어드의 방식을 밀어내고, 오늘날 TV의 왕좌자리를 차지한 전자식 TV는 러시아 태생의 미국인 즈보리킨에 의해 개발되었다. 전자식 TV에 널리 채용되는 브라운관(CRT)은 독일의 물리학자 브라운(Braun)에 의해서 이미 1897년에 발명되었지만, 이것은 원래 텔레비젼에 쓰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브라운관을 TV에 응용하자고 주장한 사람은 즈보리킨의 러시아 페테르스부르크 대학시절 담당 교수였던 로징 교수라고 하는데, 그는 모터로 원판을 돌려서 영상을 구현하는 닙코프 원판 방식보다는, 진공관 속에서 전자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는 전자관 방식이 훨씬 낫다고 생각하였으며, 제자인 즈보리킨은 스승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인다.

즈보리킨은 1928년 전자식 텔레비젼 촬영용 진공관인 아이코노스코우프를 발명하여 전자식 TV의 길을 열었으며, 1940년 무렵에는 이를 이용한 컬러 텔레비젼의 실험이 시작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민생용 텔레비젼의 연구, 개발은 한때 중단되었지만, 뜻밖에도 커다란 부산물을 얻을 수 있었다. 초단파를 쓰는 텔레비젼 방송의 연구는 전쟁 중 군용통신의 연구에도 그대로 이용되었고, 전후 활발히 재개된 텔레비젼의 개발과정 중에서, 난제의 하나였던 안테나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전쟁시 쓰이던 레이더가 바로 TV의 안테나로 쓰이게 되었다. (군사용 연구가 바탕이 된 민생용 첨단기술들은 이 이외에도 매우 많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미국 라디오 회사(RCA)의 방식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컬러 TV규격인 NTSC 방식이 미국의 텔레비젼 방식으로 채택되었고, 그후 TV는 급속도의 발전을 계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요즈음에는, TV용 디스플레이 방식의 터줏대감 자리를 아직도 굳건히 지키고있는 브라운관 못지 않게, 경박형 대화면, 저소비전력 등을 기치로 하여, TFT-LCD, PDP 등의 여러 방식들도 활발히 선보이기 시작하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을 대체할 디지털 TV가 몇 년 후 방송되게 되면 또 한차례의 영상혁명을 맞을 것이고, 2000년 이후에는 고선명 TV(HDTV)에 이어, 3차원 입체 TV도 나오게 될 전망이다. 다가오는 21세기에는 어떠한 영상구현 방식 및 기술들이 최종 승리자가 될 지, 또한 어떠한 신개념의 TV들이 나와서 인류의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해줄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41. "불가능의 문제들"

우리는 흔히 과학이나 수학이 모든 문제들을 풀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물론, 과거에 비해서 풀 수 있는 문제들이 훨씬 많아졌고, 지금은 잘 풀리지 않는 문제들도 과학, 수학이 더욱 발전할 미래에는 언젠가 풀릴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과학에서 "풀리는 문제"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고전물리학에서도 Analytic하게 풀리는 것은 2체문제(두 물체에 관한 일반적인 운동방정식을 구하는 문제)와 선형진동자밖에 없다. 나머지는 거의 모두가 섭동(Pertubation)에 의한 풀이하고, (엄밀히 말하면) 근사적으로 값을 구한 것일 뿐이다. 물체의 개수가 하나만 많아져도 (이른바 "3체문제") 이들 사이의 일반적인 운동방정식을 세워서 풀이하는 것은 불가능이다.

요즈음 "패러다임 쉬프트"가 얘기되는 경우가 많은데, 과학이나 수학에 의해서 모든 문제들이 다 풀리는 것이 아니라, "원래 안 풀리는" 문제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일종의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수학사상 이러한 "불가능의 문제"로 가장 유명한 것이 이른바 고대 그리스 이래의 "3대 작도문제"이다.

3대 작도문제란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가지고

1)임의의 각을 3등분하여 작도하는 것

2)주어진 원과 같은 면적의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것

3)임의의 정육면체의 체적이 2배가되는 정육면체를 작도하는 것

이다. 첫 번째의 각도 3등분 문제 같은 경우, "각도기"를 쓰면 금방 해결이 될 텐데 왜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써야 하느냐고 의아해 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고대 그리스 기하학의 전통을 이해할 필요가있다. 기하학의 창시자는 흔히 "과학의 시조"라 일컬어지는 탈레스(Tales: B.C. 624-546; 밤하늘의 별만 보고 걷다가 물에 빠졌다는 바로 그 사람)인데, 막대기의 그림자를 이용하여 (비례식으로) 이집트 피라미드의 높이를 재고, (중학교 수학 책에 나오는) 맞꼭지각의 같음, 삼각형의 합동 등을 증명하는 등 기하학의 기초를 닦았다. 고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등에서도 상당한 수준의 기하학 지식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들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이용했을 뿐, 이론적으로 밝혀서 증명을 하고, 학문적인 체계를 세운 것은 고대 그리스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따지기를 좋아하는" 민족이어서 그런지...)

플라톤과 피타고라스 등에 의해 더욱 발전된 그리스 기하학은 유클리드("기하학에는 왕도가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긴 인물)에 의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일단의 완성을 보게 되는데, 그가 쓴 13권의 "기하학 원본"은 오늘날까지도 기하학의 교과서로 쓰이고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리스 사람들은 기하학이야말로 가장 아름답고 완전한 학문으로 여기게 되었으며, 원과 직선만으로 모든 체계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기하학의 도구로는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 이외에는 인정하지 않게 된 것이다. 각의 3등분 문제에 각도기를 쓰면 어떻겠냐는 질문에 대해서 그리스 기하학자라면 다음과 같이 대답했을 것이다. "각도기는 편리한 도구일지 모르나, 읽을 수 있는 것은 눈금이 표시된 데까지만 가능할 터이니, 원리적으로 각을 이 등분하거나 삼등분 하는 일은 각도기로는 불가능하다."

위의 3대 문제 중 3번째 정육면체에 관한 문제는 이른바 "델로스의 문제"라고도 불리는데, 여기에 관해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고대 그리스의 델로스 섬이라는 곳에서 나쁜 전염병이 창궐하여, 사람들은 아폴로 신에게 그 병을 없애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폴로 신은 "신탁 "으로서 "나의 신전 앞에 정육면체의 제단이 있는데, 그 제단의 2배의 부피를 갖는 새로운 제단을 만들어 바쳐라"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제단과 똑같은 부피의 제단을 하나 더 만들어 2개의 제단으로 만들었는데, 그 이후에도 전염병은 없어지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시 한번 물으니, 아폴로 신은 "내가 바라는 것은 2개의 제단이 아니라, 원래보다 부피가 2배가되는 정육면체 제단이다"라고 하였다. 정확한 뜻을 알게 된 사람들은 이 문제를 풀어 보려고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였으나 제대로 되지 않아서 당대의 유명한 학자인 플라톤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플라톤은 자와 컴퍼스 이외에, 새로 고안한 기계를 써서 부피가 2배가되는 정육면체를 만들었으며, 그 이후로는 전염병이 사라져서 그 섬은 평화를 되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문제를 해결한 플라톤은 우쭐해하기는 커녕, 제자들에게 "나는 비겁하게도 자와 컴퍼스 이외에 기계를 사용함으로써, 고귀한 기하학의 정신을 더럽히고 손상시켰다."라고 말하는 등,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다고 한다. 여기서, 당시 그리스 사람들의 학문을 대하는 태도의 일면을 볼 수 있다. 이러한 "3대 작도 문제"는 이후에 거의 2천여 년 동안 수많은 쟁쟁한 수학자들이 "자와 컴퍼스"만으로 풀려고 도전하였으나,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차츰 " 원래 불가능한" 문제가 아닌가 의심하는 학자들이 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많은 학자들은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으로 불가능한 기하학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고 더욱 연구에 매진하였다.

이 문제들이 해결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 이다. 1837년 미국의 수학자 원 첼(1818-1848)이 1)의 각 3등분 문제는 자와 컴퍼스만으로는 해결 불가능이라는 사실을 해석 기하학을 써서 증명하였다. 즉, 이 문제는 3차식의 해를 구하는 문제로 귀결되는데, 3차식의 해를 일반적인 작도로 구한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임을 밝혀낸 것이다. 그는 3)의 정육면체 문제도 비슷한 방법으로 불가능임을 증명하였다. 이것은 x×3-2 = 0에 해당하는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문제로 귀결되는데, 2의 세제곱근을 자와 컴퍼스만으로 작도한다는 것은 원래 안되는 일인 것이다.

2)의 원을 작도하는 문제는 독일의 린데만(1852-1939)에 의해서 해결되었는 데, 그는 바로 원주율 Pi가 무리수라는 사실을 증명한 사람이다. Pi를 근으로 하는 대수방정식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이 문제 역시 원천적으로 불가능임을 증명하였다. "문제를 풀어내는" 일 못지 않게 "원래 안 풀리는" 문제를 증명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헛된 노력, 수고 등을 미리 방지하여, 그들이 그 시간에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셈도 될 것이다. (불가능한 문제를 풀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다른 "부산물"도 얻어질 수 있으므로 반드시 "헛수고"라고만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러나, 3대 문제가 모두 불가능이라는 것으로 결론 지어진 오늘날에도 이것을 풀겠다고 머리를 싸매고 노력하는  "기인"들도 (꽤 유명한 수학자들 중에 도...) 아직 적지 않다고 한다.


42. "플로지스톤(Phlogiston)이라는 유령"

"물질이 탄다는 것은 어떠한 현상일까?" 이러한 질문에 오늘날에는 초등학생 정도의 상식만 있어서 "산소와 결합하는 것"이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이것을 명확히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먼 옛날에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산소(Oxygen)"라는 존재를 밝혀 내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질이 연소한다는 것은 "산소와 결합하는 현상" 이라는 것이 화학적으로 밝혀지기 전에는, 이른바 "플로지스톤說" 이라는 것이 물질의 연소를 설명하는 확고한 이론이었다.

독일의 슈탈(Stahl;1660-1734)에 의해서 정립된 이 플로지스톤(Phlogiston) 이론에 따르면, "물질이 탄다"는 것은 그 속에 들어 있던 플로지스톤(일명 "연소"-燃素)이 빠져 나아가는 것이라고 설명되었다. 플로지스톤이 빛과 열을 내며 격렬하게 빠져 나아가는 것이 곧 "불"이며 이것이 다 빠져나간 뒤에는 "재"만 남는다고 여겨졌으므로, 일견 그럴듯하게 해석이 되었다. 타기 쉬운 물질일수록 플로지스톤을 많이 포함하고 있으며, 따라서 숯은 거의 순수한 플로지스톤의 덩어리로 인식되었고, 금속에 녹이 슬거나, 공기 중에 태워서 산화하는 것도 금속의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하였다.

이것을 식으로 정리하자면,

타는 물질 = 재 + 플로지스톤

금속 = 금속재 + 플로지스톤

이러한 플로지스톤 이론은 연소의 과정뿐만 아니라, 금속의 산화와 환원, 동물의 호흡 등을 설명하는 데에도 플로지스톤이라는 정체불명의 원소를 이용하여 하나의 일관된 이론체계를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에는 널리 인정되었다.

한편, 금속이 산화하여 금속재가 될 때에는 무게가 늘어나게 된다는 사실이 당시에도 알려져 있었으므로 일반적으로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면 무게가 가벼워지고 재만 남는다는 해석과 일견 모순이 있어 보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플로지스톤은 마이너스의 무게를 지닌다." 라는 이상한(?) 논리가 통용되었고, 플로지스톤 이론은 18세기말까지 화학계의 움직일 수 없는 패러다임으로서 대부분의 학자들이 신봉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플로지스톤說을 깨뜨리고, "물질의 연소는 산소와 결합하는 현상" 이라는 것을 명확히 밝힌 사람은 프랑스의 대화학자 라브와지에(Antoine Laurent de Lavoisier;1743-1794)이다. 그는 "근대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릴 만큼, 화학의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

금세기 최고의 과학사학자 쿤(Thomas S. Kuhn)은 그의 명저 "과학혁명의 구조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에서, "패러다임"이 바뀌는 과학혁명의 중요한 예로서, 바로 라브와지에에 의해 이룩된 "물질의 연소에 관한 화학혁명"을 자주 거론한 바 있다. (잠깐, 쿤의 과학사에 관한 견해를 설명하자면, 그는 과학발전의 역사가 수세기에 걸친 과학자들의 연구 업적의 단순한 누적이 아니라, "과학혁명 ⇒ 새로운 패러다임 위에서의 정상과학의 발전 ⇒ 변칙성의 출현 및 정상과학의 위기 ⇒ 새로운 과학혁명에 의한 패러다임의 변화" 의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요즘 유행어처럼 자주 쓰이는 "패러다임(Paradigm)"이라는 용어 자체도 쿤이 이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개념이다.)

물론, 라브와지에가 산소를 처음으로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산소를 발견한 화학자들로는, 스웨덴의 약제사 출신인 셰일레(Scheele;1742-1786)와 영국의 프리스틀리 목사(Joseph Priestly;1733-1804)가 있다.

셰일레는 물질의 연소를 돕는 "불의 공기"로서 산소를 발견하였고 프리스틀리는 생명체에 활력을 주는 "신선하고 깨끗한 공기"로서 산소를 발견하였다. 프리스틀리 목사는 성직자로서도 꽤 이름이 높았고, 전기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산소를 "플로지스톤을 제거한 공기"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플로지스톤 이론"의 신봉자들이었기 때문에 연소의 매커니즘을 제대로 밝혀 내지는 못하였다. 셰일레는 "불의 공기"를 발견한 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어쩌면 불의 공기는 플로지스톤에 세게 끌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모든 가연성 물질 속에 있는 플로지스톤을 쉽사리 붙잡아 낸다. 그런 까닭에 모든 물질은 "불의공기" 속에서 잘 타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매우 훌륭한, 상당히 그럴듯한 설명이었으나 여전히 큰 수수께끼 하나는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플로지스톤은 그렇다 치고, 그 "불의 공기"는 연소 후 어디로 없어져 버리는 것일까? 만약 셰일레가 연소 실험 후 플라스크 안에서 그 없어진 플로지스톤을 정성껏 찾았다면, 그는 놀라운 발견을 하고 세기적 화학자로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플로지스톤說"을 너무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플로지스톤의 정체가 무엇인지 끝내 밝히지 못하고 말았다. 프리스틀리 목사는, "더러워진 공기를 맑고 깨끗하게 해 주는" 산소를 발견하였고, 이 공기가 식물에서 나오며 인간의 건강 및 생존에도 필수적이라는 사실까지 알아내었다. 또한 빨간 수은 (=산화수은)에 볼록렌즈로 태양광을 집속시켜 가열함으로써, 산소를 포집하는 데에도 성공했으나, 이 공기의 이름을 "플로지스톤을 제거한 공기"라고 붙일 만큼, 역시 플로지스톤설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오직 라브와지에가 "플로지스톤 따위는 없다!" 라는 (당시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대담한 주장을 펴기까지, 플로지스톤은 당시의 수많은 화학자들을 괴롭힌 "유령"으로 남아 있었다.


43. "플로지스톤은 없다!"

물질의 연소에 관한 이른바 "플로지스톤 이론"을 깨뜨리고, 산소 결합설을 굳건히 세우는 등, 근대화학의 기초를 세운 당대의 대화학자 라브와지에는 1743년 8월, 파리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때부터 매우 영특했던 그는 귀족, 부자집 자제들만이 다니는 학교에서 새로운 과학을 접하여, 거기에 큰 흥미를 갖게 되었고 법과 대학을 졸업한 후 곧 변호사가 되었으나, 화학 등의 제반 과학 분야에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특히, 1765년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가 현상 모집한 조명등 제작에 응모하여 금메달을 받기도 하였고, 25세의 젊은 나이로 과학 아카데미의 정회원이 되었다.

셰일레가 물질의 연소를 돕는 "불의 공기"로서 산소를 발견하고, 또한 독립적으로 프리스틀리 목사가 생명체에 활력을 주는 깨끗한 공기로서 산소를 발견하여 "플로지스톤을 제거한 공기"라 이름 붙인 것은 앞의 글에서도 설명한 바 있다. 라브와지에 역시 그 무렵 프리스틀리 목사와 교류하면서, 물질의 연소 및 산소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화학자들과는 달리, 라브와지에는 모든 화학 실험의 과정에서 매우 유용한 도구 하나를 반드시 이용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소홀히 여겼으나, 라브와지에가 언제나 애지중지한 이 도구는 바로 "저울"이었다. 그는 물질의 화학 변화의 전․후 등에 반드시 저울로 무게를 측정함으로써 이론적으로 더욱 잘 설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고, 당시의 수많은 화학자들이 명확히 설명해내지 못했던, "연소의 비밀"을 드디어 밝 혀 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훗날 "질량보존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 계기도 되었을 것이다.)

라브와지에는 1772년, 밀폐된 플라스크 안에서 인(P)을 태우는 실험을 했는데, (셰일레도 이미 똑같은 실험을 한 바 있었다.) 인이 연소되면서 플라스크안의 공기 중 1/5이 어디로 없어져 버리는가하는 문제를 해석해 내려 하던 과정에서, 연소 전후의 인의 무게를 달아보았다. 연소되기 전의 인과, 연소돤 후의 인(무수인산) 중 어느 쪽이 무거울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하여, 기존의 플로지스톤 이론의 신봉자라면, (측정해 보지도 않고) "물론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가기 이전의 상태인, 연소전의 인이 더 무거울 것이다. 혹은, 플로지스톤에 무게가 없다면, 최소한 양쪽의 무게가 같을 것이다." 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브와지에가 실제로 무게를 측정해 본 결과, 도리어 연소 후인 무수인산이 더 무거웠던 것이다. 플로지스톤이 빠져나갔다면 무게가 줄어야 할텐데, 도리어 무게가 늘어 난 이 결과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지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드디어 옳은 결론에 도달하였다. 연소 후 플라스크 안에서 없어져 버린 것처럼 보이는 이 "불의 공기"(=산소)는 연소의 과정에서 인과 결합하여, 무수인산 이라는 화합물이 만들어지면서 무게가 늘어난 것이라고 해석하면, 모든 것이 쉽게 잘 설명이 되는 것이었다. 굳이 "플로지스톤"이라는 있지도 않은 유령을 끌어들이지 않고도, "연소란 물질이 산소와 결합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인 해석임을 밝혀낸 그는 자신의 실험결과에 관한 논문을 써서 발표하였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당신은 물질이 타거나, 금속이 녹스는 과정에서 그것이 파괴되거나, 분해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불의 공기'와 결합한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려는 것인가?" 라브와지에도 지지않고 대답하였다.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나의 실험결과가 이것을 증명한다."

"그렇다면, 한가지 묻겠다. 당신은, 연소할 때 플로지스톤은 어떻게 된다고 설명할 것인가?" 반대론자들은, 이렇게 물으면 라브와지에가 꼼짝없이 항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질문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답변은 뜻 밖에도 단호하였다. "플로지스톤? 나는 그 따위는 모른다. 나는 인과 '불의 공기'만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에서 연소 실험을 했는데, '불의 공기'가 없어지고 새로운 물질이 생겼다. 그리고 이 물질의 무게는 연소 전의 인과 없어진 '불의 공기'의 무게를 더한 것과 똑같았다. 인이 '불의 공기'와 결합한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나는 '플로지스톤'이라는 유령 같은 것을 본 적도 없거니와, 나의 저울은 플로지스톤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뭐라고? 그럼 플로지스톤이란 없다고?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다니, 당신 지금 제 정신인가?" 라브와지에의 주장은 당시의 화학계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고, 반대론 역시 격렬히 지속되었다. 플로지스톤 이론을 금 과옥조처럼 떠받들고 있던 화학자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라브와지에가 정확한 실험결과를 토대로 하여 합리적인 설명을 펼쳐 나아가고, 그밖에도 여러 사실들을 밝혀서 증명했기 때문에 결국 "플로지스톤 이론"은 패배를 당한 후 과학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또한, 라브와지에는 1789년에 저술한 "화학원론"에서 질량보존의 법칙을 밝힌 이외에, 원소(元素)를 정의하고 오늘날 널리 쓰이는 방식인 물질의 원소기호와 새로운 화학용어들도 제안하는 등, 화학 발전의 토대를 굳건히 세워서 "근대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과학 발전에 있어서 "패러다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산소결합설"은 오늘날에는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플로지스톤설"이라는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패러다임이 바뀌기 위해서는 보통 대단한 진통과 논란이 따르기 마련이며, 이러한 패러다임 변화의 과정을 쿤(T.S.Kuhn)은 "과학혁명"이라고 지칭하였다. 역사상 과학혁명의 예는, 라브와지에에 의한 화학상의 혁명 이외에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기존의 뉴턴 역학의 틀을 뛰어넘은 것, 프톨레마이오스의 천동설을 뒤엎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나온 것 등등 매우 많다.

일반적으로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제대로 설명이 안돼는 "변칙성"이 다수 출현하고, "정상과학의 위기"가 닥치게 되면 이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이 나오게 되며, 과학혁명의 과정에서 2개, 혹은 그 이상의 패러다임이 경쟁하다가 결국은 어느 한쪽이 정합성을 획득하여 "과학적 진리"로 추인 받는 것이다.

쿤이 말한 패러다임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에 바로 이러한 "공약불가성(共若 不可性)"이 있다. (혹자는 쿤이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너무 여러 개념들을 혼재시켜 사용하였다고 비판하기도 하나, 필자가 무식하게(!) 패러다임을 정의 내린다면, "다수의 과학자집단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어떤 것" 이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과학혁명의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혁명의 不可視性; 논쟁에 참여하는 과학자들은 그것이 "혁명"인지 모르며, 다 끝난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과학혁명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패러다임이 바뀌게 되는 자연 과학상의 혁명은 흔히 세계관의 변화도 수반한다. 오늘날에는 "패러다임"이라는 용어가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 사회과학 심지어 문화, 예술 분야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쓰이고 있다. "패러다임"이라는 유행어의 명확한 뜻과 유래를 잘 알고서 사용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싶다.

* 사족 1 :

당대의 탁월했던 화학자 라브와지에는 그러나 한참의 나이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됩니다. 원래는 오늘 여기까지 쓰려고 하였으나, 너무 길어지고, 주제가 양분될 것 같아서 그의 비극적인 죽음과 당시의 연관된 시대상황 등의 의미와 교훈을 짚어 보는 일은 다음의 기회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아마도 이런 제목이 되겠지요. - "라브와지에의 비극"

* 사족 2 :

쿤의 이론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고 싶으신 분은, 그의 저서 "과학혁명의 구조"를 한 번 읽어 보실 것을 권합니다. 과학사에 익숙하지 않으신 분에게는 약간 어렵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는데, (저처럼) 이른바 "과학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현대의 고전"이라고 할만큼 유명한 필독서입니다.


44. "달력 이야기"

여러분들 중 달력을 보실 때마다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먼저, 많은 달 중에서 왜 하필이면 2월만 28일밖에 없는가? (윤년에도 기껏 29일) 그리고 대개는 큰 달(31일)과 작은 달(30일)이 한번씩 번갈아 가면서 있는데, 왜 유독 7월과 8월은 연달아서 큰 달로 되어 있는가? 또, 영어의 접두어에 관심 있는 분은 잘 아시겠지만, 9, 10, 11, 12월을 나타내는 단어의 접두어가 사실은 라틴어로 7, 8, 9, 10을 의미하는 점도 의문과 혼란을 자아내게 한다. 이것에 얽힌 이야기를 설명하자면, 상당히 길다. 고대 로마시대 이래의 서양 달력의 변천사와 연관이 되어 있다.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서양식 역법인 그레고리 달력은 태양력이고, 1년이 365일에 4년에 한번씩의 윤년, 그리고 400년에 3번은 윤년이 없다. (끝이 100단위로 끝나는 해 중에서 앞 숫자가 4의 배수가 아닌 해; 예를 들어 1900 년은 윤년이 아니다.) 지구의 공전주기(+알파)인 평균 태양년이 365.2422일 이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소수점 이하의 날을 보정 해주면, 어느 정도는 정확한 달력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달력의 유래는 고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로마의 역법은 기원 전 8세기 무렵에 만들어졌다고 전해 오는데, 이 역시 고대 그리스의 태음력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 달력은 1년이 10개월, 총 304일로 되어 있는 매우 조악한 태음력으로, 나머지 날들은 무시되었고 한겨울의 61일은 아예 달력의 날짜 자체가 없었다. 9, 10, 11, 12월의 영어 단어가 라틴어로 7(Septa), 8(Octo), 9(Nova), 10(Deca)을 뜻하는 이유도, 고대 로마의 달력은 10개월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460년경에 1년의 처음에 야누아리우스(-> January)를, 마지막에는 페브루아리우스(-> February)를 추가하여 12달로 만들었다. 즉 지금의 2월은 1년의 맨 마지막달 이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나중에 태양력으로 전환된 이후에도 28일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이후에 몇 차례의 혼란을 겪은 후에야 지금의 위치에 오게 되었다.

당시 로마에서 달력을 관리하던 제관들은 자신들이 편리한대로 달들을 덧붙이거나 빼는 바람에 혼란이 심하였고, 윤달을 넣는 방법이 잘못되어 3개월 정도 계절과 달력의 날짜가 틀리기도 하였다. 그 후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의 라틴식 발음;영어식 발음으로 줄리어스 시저)가 집권하여 이집트 정벌을 나갔을 때, 그곳 사람들의 편리한 태양력을 본떠서 1년을 12달 365일, 4년에 한번씩 윤년을 두는 율리우스력을 제정하였다. 7월은 케사르의 생일이 있는 달이라서 그의 이름을 본떠서 July라고 부르게 되었고 8월은 그의 조카인 아우구스투스황제(=옥타비아누스)의 전승일을 기념하여 August로 부르게 되었다. 한편, 큰 달(31일)과 작은 달(30일)이 한번씩 교대로 되었으나, 7월은 큰 달인데 대해 8월이 작은 달이 되자 아우구스투스가 불만을 느껴서 자신의 달인 8월마저 큰 달로 만들었기 때문에 원래 마지막 달이었던 2월은 애초의 29일에서 하루가 더 줄어서 평년에는 28일로 되었다.

그러나, 4년마다 한번씩의 윤년만으로는 365.2422일의 평균 태양년을 온전히 보정 할 수는 없었던 법이었기 때문에, 그후 많은 세월이 흐르자 상당한 오차가 생기게 되었다. 즉 율리우스 달력의 1년은 실제보다 0.0078일이 길어서 130년에 하루 정도의 오차가 나는데, 16세기가 되자 그 차이가 무려 10일이나 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기독교의 명절인 부활절이 천문관측 결과, 성경의 기록과 다르게 되는 등의 문제가 생기자,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13세는 다시 달력을 교정하여, 오늘날과 같은 그레고리 달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레고리 달력은 400년에 97번의 윤년을 두는 셈이므로, 훨씬 오차를 줄일 수 있게되어 적어도 앞으로 몇 천년 동안은 다시 달력을 손질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현행 달력인 이 그레고리력에도 불합리한 점들이 꽤 있다. 각 달마다 날짜의 수가 28일에서 31일로 들쭉날쭉하며, 어떤 때는 7년간 평년이 계속되기도 하는 등을 들 수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결점을 없애고자, 많은 사람들이 달력의 재개정을 위해 노력했으며, 특히 1930년대에 미국에서 발족한 세계 달력 협회는 "세계력"이라는 개정 달력을 내놓았는데, 한달은 31일이나 30일로만 이루어지게 하였고, 1년을 4개의 분기로 나누어 매 분기마다 요일과 날짜를 일치하게 하는 등 보다 합리적으로 만들려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달력의 개정에 일부 나라들이 찬성하기도 하였으나, 많은 나라에서 종교상의 이유, 기타 관습이나 다른 이유들을 들어 반대하였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그레고리 달력이 가장 보편적인 세계 공용 달력으로 쓰이고 있다.

달력은 가장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견지에서 만들어져야 하나, 지금까지 세계 각국의 달력 변천사를 보면,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종교, 문화 등의 모든 면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나라들이 기존의 관습을 버리고 보다 합리적인 새로운 달력을 채용한다는 것은 기대하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45. "잠자던 멘델법칙"

19세기에 이룩된 생물학상의 매우 중요한 발견 2가지를 꼽으라면, 곧 다아윈의 진화론과 멘델의 유전법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들이 발표된 뒤에 나타난 반응은 무척 대조적이었다. "자연도태설"에 기반한 다아윈(Darwin;1809-1882)의 진화론이 발표되자, 곧바로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켜서, 생물학계는 말할 것도 없고, 다른 학계와 종교계 등에서 전폭적 찬성과 함께 극단적 비난이 쏟아지는 등, 대단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물론, "인간은 하느님이 창조한 것"이라는 성서의 가르침에 배치되므로, 당시의 기독교계가 비판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원숭이"의 몸에 다아윈의 얼굴 모습을 그려 넣은 당시의 풍자만화는 무척 유명하다.) 그러나, 멘델의 유전법칙 역시 생물학상 대단히 중요한 발견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학자들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멘델 신부 (Mendel;1822-1884)가 자신이 몸담던 수도원의 뒤뜰에서 완두콩을 재료로 하여 8년간 325회의 실험을 통해서 정립한 이론을 학회에 발표한 것은 1866년 2월8일이었다. 약 40여분간 멘델은 완두콩의 형질이 후대에 유전되는 법칙을 열심히 설명했건만, 참석한 생물학자 중 흥미를 나타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등학교 대리 교사 경력의 한 카톨릭 신부의 발표에 대부분 지루하다는 표정이었고, 하품을 하거나 졸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멘델의 발표는 아무런 질문이나 토론도 없이 그냥 끝났고, 그 이후로 멘델의 논문은 34년간이나 도서관 구석에 처박힌 채 썩고 있었다.

멘델 신부는 그 이후 수도원으로 돌아가, 수도원 원장으로서 조용히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언젠가는 반드시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는 확신을 버리지 않았다고 하지만, 당시의 생물학계에서는 끝까지 외면하였다. 멘델의 대발견에 왜 당시의 생물학자들은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는가 하는 것도 과학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빠지지 않고 주목하는 수수께끼의 하나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멘델의 이론이 당시의 생물학계의 주된 관심분야가 아니었고, 또한 생물학자들에게는 익숙지 않은, 수학적으로 처리된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주류를 이룬다. (당시 생물학자들은 수학 을 못해서 그런지...)

멘델의 발표가 있고 난 후 수십 년이 지나서, "달맞이꽃의 돌연변이"에 관해 연구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생물학자 드프리이스 (De Vries)는 도서관에서 관련 문헌들을 훑어보던 중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자신의 연구 결과와 똑같은 내용의 멘델의 논문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또한, 그와 같은 휼륭한 논문이 34년간이나 묻혀져 있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놀란 그는, 1900년에 자신의 연구 결과와 함께 멘델의 논문을 첨부하여 발표하였다. 얼마 후, 독일의 한 대학에 있던 코렌스(Correns) 교수로부터 편지가 왔다. 코렌스 자신도 "완두콩과 옥수수의 실험"으로 똑같은 결과를 얻었는데, 이미 수십 년 전 멘델이 발표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서, 더 이상의 연구와 발표를 포기했었다는 것이었다.

한편, 역시 혼자서 같은 연구를 하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체르마크(Tschermak)는 자신이 수년간 연구해 온 결과를 막 발표하려고 하던 즈음, 드프리이스와 코렌스의 발표를 접하고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이 남 몰래 이룩해 온 성과가 사장되어 버리게 될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자신이 이룩한 연구가 34년 전 이미 멘델이 해 놓은 것이라는 사실을 덧붙여서 발표하였다.

생물학계에서는 불과 두어 달 사이에 무려 세 명의 생물학자가 같은 내용을 잇달아 발표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도대체 유전 법칙이란 무엇인가?" "멘델이라는 사람은 누구이며, 무엇을 연구했는가?" 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00년은 "멘델 유전 법칙 재발견의 해"가 되었고, 그후 모오간이 초파리(사람과 유전자 구조가 비숫 하여 실험용으로 많이 쓰인다.) 연구에서 유전학을 더욱 진전시키고, 멀러는 초파리의 인공돌연변이에 성공하게 됨으로써, 멘델은 "유전법칙의 선구자"로서 생물학사에 길이 남게 되었다. 1953년, 와트슨과 클리크가 이중나선으로 된 DNA의 구조를 밝힌 이후, 바야흐로 분자생물학과 유전공학은 비약적 발전의 전기를 맞고 있다. 최근에는 인간 유전자의 비밀을 밝혀 내려는 "인간 게놈 프로젝트"도 커다란 진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마이클 크라이튼의 소설 "쥐라기 공원(Jurassic Park)"에서처럼, 유전공학의 남용으로 생길 수도 있는 끔찍한 재앙을 경고하기도 하고, 인간 유전자 조작으로 인한 윤리적 문제들이 심각하게 제기되기도 하지만, 유전 공학이 제대로 이용되기만 한다면 식량난 해결 등 인류에게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때를 잘 만나야 한다."는 얘기는 어디서나 자주 듣는 소리일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과학 이론" 역시 마찬가지로 보인다. 하나의 과학적 이론이 충분한 설득력을 얻으려면, 그 이론의 옳고 그름 못지 않게, 학계 내외적인 여건의 성숙 등의 "시대적 요청"이 있어야 하리라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과학사학계에서도 상당히 논란이 되는 것 같은데... 더 이상 깊이 들어갔다 가는 필자 같은 "풋나기 아마추어"는 곧 "바닥"을 드러내게 될 터이니 이쯤 해 두기로 하고...)

최근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에 뒤이은, 20세기 물리학의 세 번째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카오스 이론"도 마찬가지이다. "복잡성"에 관한 관심의 증대, 급속히 발전한 "컴퓨터"의 성능에 힘입어 이 이론이 각광받을 수 있게된 것이다.  만일, 이러한 "복잡성 이론"에 대한 시대적 요구와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면, 1963년 "대기과학지" 20권 130페이지에 발표된, 기상학자 로렌츠의 "카오스 현상"에 관한 대발견 역시 멘델법칙처럼 오랫동안 묻혀져 버렸을 지도 모를 일이다. (기상학자들이 그러한 수학적, 물리학적 문제에 별 관심을 가졌을 리 없고, 또한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가질만한 수학자, 물리학자들은 " 대기과학지"까지 읽어 볼 일이 없었을 테니까...)


46. "고무 인간"

현대 공업사회에서 중요한 자원들을 꼽으라면, 강철, 석유, 석탄 등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고무이다. 자동차의 타이어에서부터 전기의 절연체, 장난감, 튜브, 벨트 등의 각종 부속품 등. 만약 고무가 없다면 사람들의 생활이 어떻게 될 것인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류가 고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나, 고무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약 500년 전으로, 콜룸부스가 서인도 제도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고무공을 가지고 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남아메리카 인디언들은 헤베아 나무, 즉 "고무나무"의 수액에서 천연고무를 채취했는데, 이 수액을 원주민 말로 "나무의 눈물"이라는 뜻의 "카우체"라고 불렀다 한다.

그후, 남아메리카에 진출한 유럽사람들에 의해 고무의 이용이 차츰 퍼져 나아가서, "산소의 발견자" 중 한사람인 영국의 화학자 프리스틀리 목사가 처음으로 지우개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외에 방수천, 신발, 의복에까지도 고무를 이용했으나, 오늘날과 같은 고무의 가공법을 몰랐기 때문에, 날씨가 더우면 냄새가 나고 끈적끈적하게 녹아버리고, 추우면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생고무의 성질 때문에 여름날 고무 옷을 입은 두 마차승객이 서로 달라붙어 버리는 등, 적지 않은 해프닝이 일어났다 한다.

위와 같은 종래 고무의 결점을 제거하여 오늘날처럼 다방면으로 이용할 수 있는 제조방법을 확립시킨 데에는 '굿이어'라는 한 미국인의 집념과 의지 덕분이었다. 그의 한 평생은 고무를 위해서 바쳐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가난에 시달리고 빚을 갚지 못해 몇 차례 투옥되기까지 하면서도 외곬으로 고무의 연구에만 매달렸다. 그의 고향인 미국 코네티컷주 뉴헤븐에서 그를 찾으면, 마을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 그 미치광이요? 고무로 만든 모자에 고무로 만든 바지와 코트를 입고, 고무신발을 신고, (돈은 한푼도 없는) 고무지갑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면, 그가 바로 틀림없는 굿이어 랍니다."

마을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그는 전 재산과 자신의 정력을 오로지 고무의 제조법, 품질개량연구에만 쏟은 "고무에 미친 인간" 이었다. 그러나, 그의 "고무인생"은 실패와 불운의 연속이었다. 고무의 개량법으로 고무에 마그네슘을 섞어 석회수로 쪄서 표면을 매끈하게 만드는 방법을 개발했으나, 그다지 실용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고무를 산에 쪄서 끈적거리는 성질을 제거하는 방법을 발견 한 후, 회사를 차려서 사업화를 꾀했으나, 1836년의 금융공황을 맞아 파산하고 말았다. 또한, 고무에 황가루를 발라 햇볕에 말리는 품질개량법의 특허를 헤이워드라는 사람으로부터 사들여 고무우편 행낭 등을 제작하였으나, 거듭 실패하였다.

1839년경 그는 고무와 황을 텔레핀유에 섞어 쪄보는 실험을 계속 하던 중, 실수로 고무덩어리가 난로 위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것도 "푸른곰팡이에서 페니실린을 얻은" 플레밍의 경우처럼, 우연이나 뜻하지 않은 발명, 발견으로 분류될 수 있는데, 근래의 과학사 연구에서는 이러한 경우를 결코 단순한 우연의 산물로 보지 않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무가 녹지 않고 약간 그슬리는 정도였다. 그는 고무에 황을 가하여 가공하면 고무의 성능을 크게 높일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연구를 계속하여 오늘날과 같은 "고무의 가황법" 을 확립하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과 같은 "고무의 시대"를 만든 고무공업 발전의 기초가 된 것이다. 그가 평생 지녔던 "언젠가는 고무가 굉장히 중요한 재료로서 여러 방면에 걸쳐 널리 사용될 것이다." 는 신념이 실현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고무 가황법의 발견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경제적 이익을 얻지 못했다. 계속되는 연구를 위해 돈을 다 써버렸고, 평생 동안 다른 사람들의 특허 침해와 싸워야 했기 때문에 죽을 때에는 20만 불의 빚밖에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역사상의 개인발명가들 중에는 발명과 함께 그것의 사업화에도 크게 성공하여 돈을 많이 벌어들인 인물들도 물론 많다. 조지 웨스팅하우스는 철도용 에어브레이크를 발명해서 그것으로 크게 돈을 모은 후, 나중에 전기사업에도 뛰어 들어 성공하였고, 포오드 같은 이는 자신이 발명, 개량한 가솔린 자동차 제조회사를 차린 후 대량생산 공정인 이른바 포오드 시스템을 확립하여 세계적인 기업가로 성공하였다. ("발명가" 포오드 보다는 도리어 오늘날의 컨베이어 생산체제를 만든 "기업가" 포오드로 기억하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다이너마이트로 떼돈을 번 "노벨상의 창시자" 노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반면에 굿이어처럼(그의 이름을 딴 타이어회사도 있기는 하지만) 평생 발명에 몰두하고도 아무런 경제적 이득을 누리지 못한 이들도 허다하다. (오늘날의 개인발명가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또한 발명왕 에디슨마저도, "나는 전구를 발명했지만, 그로 인한 이익은 거의 누리지 못했다." 고 말하는 등, 자신의 발명을 사업화에 이용한 기업들에 대해 "섭섭한 감정"을 숨기지 않은 적도 있다. (물론 에디슨 자신은 끊임없는 발명에 더 심혈을 기울일 뿐, 스스로 큰돈을 벌겠다는 욕심은 없었지만...)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손으로 사업화에 성공했든, 못했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공업 문명의 혜택은 그들의 피와 땀이 하나하나 밑거름이 되었음은 후세에도 길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47. 페르마의 대정리

17세기 프랑스의 수학자 페르마(Fermat;1601-1665)는 불과 몇 년 전까지도 수학계의 풀리지 않는 과제로 남아있던 의문의 정리(定里)를 남겼다. 프랑스의 법률가로서, 지방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그는 수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서 많은 중요한 업적들을 남겼으나,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 이유는 그가 대학교수 등 학자적 직업을 택하지 않고 "아마추어 수학자 "로 남아 있었다는 것과,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자기가 발견했다는 정리 등을 완전히 증명하고 치밀하게 이론 전개를 하기보다는, 그냥 던져 놓은 것들이 많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가 던져 놓은 과제들을 후대의 수학자들이 해결하려 몰두한 결과, 수학상의 많은 중요한 발전들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는 광학에서도 중요한 것을 발견했는데, "빛이 반사, 굴절 등으로 진행 할 경우, 최단 시간이 되는 경로로 진행한다." 는 이른바 "페르마의 원리 "(Fermat's principle) 혹은 "최단 시간의 원리"로 알려진 이 사실은 이후 광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는 또한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 철학자인 데카르트, 파스칼 등과도 교류하면서 해석기하학, 확률론의 창시에도 공헌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정수론"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소수(素數)의 연구에도 주요한 간여를 하였고, 부정방정식인 이른바 "디오판토스(Diophantos)의 방정식"의 해법에도 큰 공헌을 하여, 정수론의 진보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이른바 "페르마의 대정리" 혹은 "최후의 정리"로 알려진 다음의 정리이다. 그의 저서 마지막 장에서 그는 " X×n + Y×n = Z×n의 관계식에서, n이 3 이상일 경우에는 이 식을 만족하는 X, Y, Z의 세 자연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라고 밝힌 후, "나는 이 놀라운 정리를 발견하여 완전히 증명했으나, 지면의 여백이 부족하므로 증명은 생략하겠다." 라고 썼다. 위 식에서 만약 n=2라면, 즉 "X×2 + Y×2 = Z×2" 을 만족하는 X, Y, Z 의 세 자연수 쌍은 매우 많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만족하므로 이른바 "피타고라스(Pythagoras)의 수"로 알려진 이 자연수 쌍들은 (3,4,5), (5,12,13) ... 등등 매우 많이 존재한다. (피타고라스 자신도 이 수들을 많이 발견했다. 물론, 위의 수들의 배수도 곧 피타고라스의 수이다.) 그러나, n이 3 이상이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즉, 위의 관계식을 만족하는 자연수 쌍이 하나도 없게 되는 것이다.

그가 죽은 후 300년 이상의 세월 동안 수많은 쟁쟁한 수학자들이 그것을 증명하려고 무척 애썼으나,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미스터리의 문제" 로 남은 것이다. 그 대신, 이 정리를 증명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수학상의 발견들이 이루어지고, 이로써 수학의 발전이 크게 촉진되기도 하였다. (꿩 대신 닭, 아니 닭 대신 꿩이라고나 할까?)

18세기의 저명한 수학자 오일러(Euler) 등이 일부 제한적으로 증명하기도 하였으나, 이것을 완전하게 증명한 사람은 불과 몇 년 전 까지도 없었다. 1908년에는 독일의 월스켈이라는 사람이 이 문제와 관련된 유언을 남겼는데, 앞으로 100년 내에, 그러니까 서기 2007년까지 이 정리를 완벽하게 증명하는 사람에게는 10만 마르크의 상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 따른 악성 인플레이션과 환율변동 등으로 인하여 지금은 "상금"이라고 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작은 액수라고 한다.) 불과 5년 전인 1994년, 미국의 어느 수학자가 드디어 "페르마의 정리"를 완전하게 증명하여 "1994년을 빛낸 각계의 인물"에 오르기도 하였다. (작은 상금이나마 받았는지는 알 수 없음)

수백년 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던 페르마의 대정리 못지 않게 수수께끼였던 것은, 과연 페르마가 그것을 정말로 증명했겠느냐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당시의 수학발달의 정도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48. "에디슨의 두 얼굴"

1000여가지가 넘는 발명을 했다는 에디슨과 그의 업적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논한다는 것은 정말 진부한 일일 것이다. 그의 전기는 청소년들에게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였고, 그가 남겼다는 "천재의 정의"에 관한 격언도 귀아프게 들었을 것이다.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상의 중요한 발명들이 천재적인 발명가 개인보다는, 연구기관, 민간기업 등의 조직적인 대규모의 R&D에 의해서 이룩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적어도 필자가 보기에는) "과학자"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에디슨과 같은 개인발명가가, 과학기술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중요한 발명들을 한 것은, 아무래도 에디슨이 마지막 인물이 되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발명왕", "멘로파크의 마술사" 등의 숱한 찬사를 들어 온 이 위대한 발명가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이런 것보고 문자써서, "천려일실(千慮一失)"이라고 하는 건지는 모르지만...

그중에서도 전기의 송전 방식으로서 교류의 채용에 반대하고, 심지어 이를 방해까지 하여 교류 송전 방식의 발전을 늦춘 것은 매우 큰 잘못으로 비판받을 만하다. 더욱이,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하여 "전기 의자" 를 사형집행에 채용 하도록까지 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세계위인전 에디슨 편" 등에도 이런 이야기는 안나오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것을 쓰게 되었냐고요? 제목 그대로 제 글은 "...X파일"이니까... )

에디슨이 그의 숱한 발명품 중에서도 첫손가락으로 꼽힐 만한, 전구 를 발명한 것은 1879년이었고, 그는 전구의 재료로 여러 가지를 시험해 본 끝에, 무명실을 탄화시킨 필라멘트를 쓴 진공 전구를 40시간 지속적으로 켜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는 전구를 더욱 개량하여 수명을 늘리는 데에 주력하는 한편, 전구를 켜는 전기의 공급에 필요한 송전선, 소켓, 스위치, 퓨즈 등의 부품을 개발하고, 자신의 연구소를 비롯해 발전소들을 세워서 많은 가정의 전등에 전류를 공급하였다. (에디슨의 이 연구소가 바로 "제너럴 일렉트릭스사의 모태이기도 하다.)

그는 송․배전에 110V의 직류를 사용했기 때문에, 낮은 전압과 전선의 저항으로 인한 손실이 매우 커서, 발전소에서 2-3마일 바깥은 제대로 송전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사업가 조지 웨스팅하우스가 전력 공급 사업에 새로 뛰어 들게 되었다. 중간 손실이 큰 직류 송전 방식의 문제를 해결하려 고심하던 그는, 변압기를 통한 교류 송전 방식을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변압기의 특허를 사들이고, 개량하여 실용적인 변압기를 만들고 전기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원거리 송전 사업을 시작하였다.

변압기는 패러데이의 전자기유도 법칙에 의해 전압을 변환해 주므로, 전압을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비율로 바꿀 수 있기 때문에, 송전시에는 전압을 크게 하여 중간의 손실을 줄이고, (송전손실은 전압의 제곱에 반비례) 일반 가정에서는 안전한 낮은 전압을 쓰는, 오늘날과 같은 송전 방식을 채택한 것이었다. 1886년 3월에는 4마일 거리의 송전에 성공하였고, 추수 감사절날 밤에는 버팔로 시의 수많은 전등을 켜서 각광을 받는 등, 그의 사업은 갈수록 번창하였다.

송전사업의 선발 주자격이었던 에디슨은 교류 송전 방식에 갈수록 위협을 느끼고, 자신의 직류 송전 방식은 안전한 반면, 교류 송전 방식은 위험한 것이라는 선전 공세를 적극적으로 펼쳐 나아가기 시작했다. 자신의 연구소에 기자, 관계자, 관람객 등을 대거 모아 놓고 개, 고양이들을 고압의 교류 전류로 태워 죽이는 끔찍한 실험을 반복하였는데, 이 때문에 근처의 개와 고양이의 숫자가 1/10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더우기 뉴욕주의 교도소에서 사형집행 방식으로 기존의 교수형 대신에 고압의 교류를 쓰는 "전기 의자방식"을 채용하자, 에디슨 측은 더욱 대대적으로 "교류의 위험성"을 부각시켰다. (전기의자도 에디슨 자신이 발명한 것이며, 그것을 사형방식 으로 채택하도록 로비를 벌였다고도 한다.)

에디슨 측의 악랄한 선전 공세로 교류 사업은 커다란 난관에 부닥치게 되었으나, 1893년 시카고의 만국박람회에서 25만개의 전등을 켜는 계획에 에디슨 진영을 제치고 낙찰 받는 데에 성공했으며, 나이아가라 폭포의 수력 자원을 이용하는 거대한 규모의 발전 계획에도 참여함으로써, 송전 방식을 둘러싼 교류와 직류의 대결은 결국 교류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고, 웨스팅하우스사는 오늘날과 같은 커다란 전기회사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물론 에디슨에게 이러한 잘못이 있었다고 해서 그의 업적이 과소평가 되어질 수는 없으며, 의도적으로 그의 명예에 흠집을 내려는 것도 결코 아니다. 다만, 근래에 "세계 소프트웨어 업계의 황제"로 군림하고 있는 빌 게이츠 같은 이도 독과점, 불공정거래 등의 문제로 심심찮게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것을 보면, 천재적인 인물들을 좀더 총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49. 靑出於藍

영국의 과학자 험프리 데이비(1778-1829)는 전기분해에 의한 알칼리 금속의 단리, 안전등의 발명 등으로 과학사에 이름이 올라와 있다. 그러나 그의 최대의 업적은 자신의 과학적 발견보다는, 제자인 마이클 패러데이(M.Faraday;1791-1867)를 발견한 일이라고도 한다.

동양적 사고방식으로는, 제자가 스승을 능가하는 것이야말로 스승의 은혜에 진정으로 보답하는 것이라 하여 고사성어에서도 "靑出於藍, 靑於藍"이라고 비유한 바 있다. 그러나, 데이비는 패러데이에게, 끝까지 "좋은 스승" 이 되어 주지는 못했다. 스승도 인간인 이상 제자가 자신을 앞지른 데에 대한 질투심을 이기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서양이라서 그런지?)

우리는 불우한 환경을 딛고서 자수성가하여 나중에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종 듣는데, 과학자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사람을 꼽으라면 곧 마이클 패러데이가 될 것이다. 집안이 매우 곤란했던 그는 정식 학교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채, 구두수선공, 제본공 등을 전전하면서도 과학에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패러데이가 제본소에서 일할 무렵, 데이비는 영국 왕립연구소의 교수로서, 일반인을 상대로 하여 공개 화학강의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제본소에 온 한 손님이 데이비의 공개강의 입장권 몇 장을 패러데이에게 주었고, 평소 제본소에 맡겨진 책들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과학에 대한 흥미와 지식을 갖고 있던 그는 강의를 들으면서 노트하고 정서 한 후 솜씨 좋게 책으로 만들어 내었다.

본격적으로 과학에 관련된 일에 종사하고 싶어진 그는 자신이 손수 제본한 데이비의 강의노트를 동봉하여, 데이비에게 자신의 소원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데이비는 1812년 연말쯤 이 편지를 받고서 답장을 써서 이듬해 패러데이를 왕립연구소로 불렀다. 그러나, 기대에 부풀어 찾아간 그에게 데이비는, 아직은 결원이 없어서 그를 고용할 수가 없는데다가, 과학에 관련된 일로는 먹고살기가 쉽지 않으니 그냥 제본 일을 계속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충고하였다. 돌아와서 낙심의 나날을 보내던 패러데이에게 한달 쯤 후 다시 희소식이 날아 왔다. 데이비는 실험실의 조교 한사람이 그만두게 되었으니 대신 근무 할 용의가 있냐고 물었고, 연구소의 건물 꼭대기에 있는 주거용 방 2개와 주급 25실링을 준다는 조건을 덧붙였다. 패러데이는 말할 것도 없이 당장 승낙했고, 과학에 관련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여겼다. 물론 그의 일이란, 교수의 강의준비, 강의 중의 조교역할, 실험장치나 도구의 운반과 청소, 점검 등 잔심부름에 가까운 일이었지만 (대학원때 조교 해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오늘날의 이공계 조교들도 별로 다를 것이 없기는 하지만...) 그는 차츰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데이비와 다른 교수들도 패러데이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좀더 수준 높은 일들을 맡기기도 하였다. 그러나 패러데이가 과학적 능력을 본격적으로 발휘해 나아가자, 그를 과학계로 이끌어 준 스승 데이비의 경계심과 질투심 또한 높아졌다. 패러데이를 고용한 지 약 반년 후, 데이비는 유럽 전반의 과학 현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부인 동반으로 1년 반 정도의 유럽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패러데이를 비서로 데려가고 싶어했다. 패러데이도 유럽 대륙의 과학자들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승낙했다. 그런데 데이비의 하인이 함께 가기를 거절했기 때문에, 패러데이는 하인이 하는 일까지 떠맡아야 했다. 데이비의 부인 역시 그를 하인으로만 취급하여 식사 초대를 받았을 때에도 패러데이를 따로 식사하게 하는 등 냉대했고, 패러데이의 능력을 알고서 자신들과 같은 과학자로 생각하고 있던 대륙의 과학자들은 매우 놀랐다.

유럽에서 돌아온 패러데이는 자신의 연구 업적을 더욱 쌓아 나아갔고, 제자가 자신을 앞지르고 있다는 것을 느낀 데이비의 질투와 경계 또한 더해갔다. 자신이 발명한 안전등의 결점 몇 가지를 패러데이가 지적하자 몹시 자존심이 상하게 되었고, 패러데이가 염소의 액화에 관한 중요한 논문을 1823년 왕립학회에 제출하자 데이비는 그 논문에 자신의 기여도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면서, 그 실험에서 자신의 권고가 곳곳에 있었다는 것을 밝히는 주석을 제 손으로 첨가하였다. 곧 이어 패러데이가 왕립학회의 회원으로 추천되자 데이비의 질투는 극에 달했는데, 당시의 학회장이 바로 데이비였다. 데이비와 윌리엄 월라스튼이 패러데이의 회원 선출에 반대하고 나섰는데, 월라스튼은 곧 오해가 풀려 찬성 쪽으로 입장을 바꾸었지만 데이비는 패러데이에게 스스로 사퇴하라고 강요했고 패러데이를 추천하는 사람들에게는 추천을 철회하라고 고집하였다. 그러나 결국 패러데이는 정식 추천되어 1824년 회원들에 의한 투표를 통해서 학회의 회원이 되었는데, 반대표는 단 한표 뿐이었다.

정식 과학교육을 거의 받은 적이 없는 패러데이는 32세의 나이로 일류 과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후 그는 전자기유도(패러데이의 법칙)의 발견, 전기분해법칙의 발견 등등 특히 전자기학에 관련된 수많은 중요한 발견들을 이룩하여 19세기 최고의 실험 물리학자로 꼽히고 있다. 나중에 동료 과학자중 한 명은  "패러데이는 지식을 냄새 맡는 코를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 라고 칭송한 바 있다.

만약 그 무렵에 노벨상이라는 제도가 있었다면 그는 이 상을 몇 번 수상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특히 이 노벨상이라는 것은 실험 과학자들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 "휠체어 위의 물리학자"로 잘 알려진, 아인쉬타인 이후 최고의 이론 물리학자로 꼽히는 스티븐 호킹박사도 아직 노벨상을 받지 못한 것을 보면 알 것이다. 하긴, 아인쉬타인도 그 유명한 상대성이론으로 노벨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훨씬 덜(?) 중요한" 광량자 가설이 나중에 실험적으로 입증되고 응용됨에 따라 가까스로 노벨상 수상자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대중적인 과학 강연에도 탁월하여, 크리스마스 강연으로 했던 "양초의 과학"은 무척 유명하다.

후에 맥스웰(James C. Maxwell; 그는 엘리트 과학 교육을 받았고 수학에도 천재적인 능력을 가진 물리학자였다.)이 패러데이 등의 실험 결과들을 집대성하고 수학적으로 공식화하여, 오늘날 전자기학의 근본이 된 "맥스웰 방정식"(Maxwell Eqution)을 세운 후 패러데이에게 의견을 묻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패러데이는 수학 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맥스웰의 편지 내용 (패러데이 자신의 이론을 미분방정식으로 표현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패러데이는 뛰어난 실험적 능력과 탁월한 과학적 통찰력을 기반으로 하는 무수한 발견들로 19세기 물리학을 중심에서 이끌었고, "19세기의 발견 왕"이라 불려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50. 퀴리부인의 딸

퀴리부인으로 잘 알려진 마리 퀴리에 대해서는 대부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폴란드 출신의 물리학자로서, 일찍부터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문에 정진하여 나중에 노벨상을 두 차례나 수상하는 등, 그녀의 전기를 감명 깊게 읽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남편인 피에르 퀴리 역시 뛰어난 물리학자로서, 부부 공동으로 많은 연구와 업적을 이룩한 것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장녀인 이레느 퀴리 역시 부모 못지 않은 뛰어난 물리 학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또한 그녀는 과학사상 매우 중요한 발견들을 두 번씩이나 아깝게 놓쳐 버린 불운의 과학자이기도 했다.

이레느 퀴리(1897-1956)는 어머니 퀴리 부인의 연구소에서 만나 결혼한 3살 연하의 남편 프레더릭 졸리오(1900-1958)와 함께 방사성 충돌 등에 관해 연구를 계속하였다. 이들 "2세 퀴리 부부" 역시 부모처럼 모든 논문을 부부 공동으로 발표하는 등 금술 좋게 과학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들은 1934년 알루미늄(Al)에 알파선 입자를 충돌시키면 양성자가 방출된 후 방사능을 지닌 인(P)이 생긴다는 사실을 확인하여, 1935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1930년 독일의 보테와 베커는 가벼운 금속 베릴륨(Be)에 알파입자를 충돌시키면 매우 관통력이 강한 선이 나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방사선인 감마선처럼, 파장이 짧은 전자기파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레느 퀴리, 졸리오 부부는 이 실험을 반복하여 베릴륨에서 나오는 선의 관통력이 감마선보다 훨씬 강할 뿐 아니라, 수소를 많이 포함하는 물질에 충돌시키면 고에너지의 양성자를 튕겨 낸다는 사실을 규명하였고, 이 결과를 1932년 1월에 발표하였다. 그런데 바로 한달 후, 영국의 제임즈 채드윅은 그 밖의 다른 실험결과들 까지 생각해서, 베릴륨에서 나오는 선은 전자기파가 아니라 무게는 양성자와 거의 같으나 전기를 띄지 않는 중성 입자라고 결론 내렸다. 수수께끼가 풀려서 채드윅은 1935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였고, 지금도 "중성자의 발견자"로서 과학사의 한 페이지에 공식 기록되어있다.

이들 부부는 그후 페르미가 실험한 바 있는, (그 당시에) 가장 원자번호가 높은 원소인 우라늄(U)에 중성자를 충돌시켜서 원자번호가 더 높은 초우라늄을 만들어내는 실험에 몰두하였다. 지금도 자연상태로 존재하는 것 중 가장 무거운 원소는 우라늄이지만, 그 당시에는 92번 우라늄 이상의 원자번호를 갖는 원소는 없었기 때문에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켜서 원자번호 93이상의 원소를 만들려는 시도는 많은 과학자들의 지대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 전의 페르미의 실험결과 원소주기율표상 우라늄 아래의 각 원소들에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거의 예외 없이 베타선(=음극선)을 방출 한 후 원자번호가 하나 높은 원소로 변환한 사실은 (이른바 베타붕괴) 그러한 가능성을 한층 높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페르미도 한때 원자번호 93의 초우라늄 원소를 만들었다고 발표하기도 하였다. 1937년 이레느 퀴리와 조교 파르베사비치는 우라늄에 중성자를 충돌시킨 실험 결과, 원자번호 57인 란탄과 비슷한 물질을 발견하고 이것을 란탄을 닮은 초우라늄 원소라고 결론짓고 1938년 가을에 발표하였다. 한편, 역시 초우라늄 원소에 관한 비슷한 연구를 하던 독일의 오토 한(1879-1968)은 이 보고를 듣고서 깜짝 놀라 그때까지의 연구를 중지하고 처음부터 다시 실험을 시작하였다. 오토 한은 다른 분석방법을 써서, 이 레느 퀴리가 발견한 란탄 비슷한 원소는 초우라늄이 아니라, 원자번호 56인 바륨(Ba)이라는 사실을 밝혀 내었다.

원자번호 92인 우라늄에(이 경우, 질량수238인 일반 우라늄이 아니라, 질량수235의 방사성우라늄) 중성자를 충돌시키면, 더 높은 번호의 초우라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자번호 56인 바륨과 36인 크립톤(Kr)으로 분열하면서, 막대한 에너지가 함께 방출된다는 사실도 이후에 밝혀짐으로써, 오토 한은 "핵분열 원리의 발견"이라는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느 곧 오늘날의 원자력발전 등 원자력에너지의 원천이라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원자 폭탄의 원리이기도 하다.) 또한, 원자번호 93의 초우라늄은 반감기가 몇 초도 안돼는 매우 불안정한 물질이어서, 페르미를 비롯한 당시의 과학자들이 밝혀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레느 퀴리 부부는 두 차례나, 실험적으로는 다른 과학자들보다 훨씬 앞선 결과를 얻고서도 정확한 해석을 하지 못하고 있는 바람에, 다른 과학자들이 그 결실을 차지해 버렸던 것이다. 과학사에서 정확한 이론적 구성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 주는 교훈적인 대목이 기도 하다. 만약 그녀가 자신의 실험결과의 의미를 보다 정확하게 해석했더라면, 자신의 어머니 이상의 커다란 명예를 남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퀴리 집안에서는 2대에 걸쳐서 3번의 노벨상을 받았으니 참으로 대단한 집안 사람들임에는 틀림없다.)


51. 사기꾼들

그럴듯한 말로 사기를 치거나, 남을 속이는 사람들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 에서나 있기 마련이듯이, "발명, 발견의 역사" 에서도 이러한 "사기꾼들"의 예가 적지 않다. 그 중에서 재미있는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우리 나라에서도 "충무공이 거북선에서 썼던 별황자총통"을 해저에서 발굴했다고 떠들썩하게 발표하고 국보로 지정까지 되었다가, "가짜"를 만들어서 미리 바다에 빠뜨렸다가 건져 올린 것이 들통나서, 국보도 취소되고 충무공까지 욕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와 비슷한 사례들이 과학사에도 꽤 있다. "거짓은 언젠가는 탄로난다." 는 지극히 평범한 교훈과 함께 이들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싶다.

①.고생물학 최대의 가짜발견사건; 도슨의 "잃어버린 고리"

영국 시골의 변호사이며, 아마추어 지질학자인 찰스 도슨은 1911년, 필트다운 지방의 한 자갈층에서 인류조상의 것으로 보이는 몇 개의 뼈를 발굴했다고 발표하였다. 두개골 파편과 이빨이 달린 턱뼈를 감정한 런던자연사박물관의 아더 스미스 우드워드는 이것이 약 50만년 전쯤의 인류의 조상인 원인(原人)의 뼈라고 주장하였다. 함께 발굴된 동물의 화석들이 약 50만년 전의 것이라는 사실이 그 근거였다. 그러나, 우드워드의 주장에 반대한 학자들도 상당히 많았다. 턱뼈가 원인(原人)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원숭이의 것과 닮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당시는 다윈의 진화론이 학계에서 정설로 인정되어, 인류와 유인원이 같은 조상에서 출발하였다는 주장이 널리 받아들여지던 시기였다. 다만, 유인원에서 인류로 넘어오는 진화의 과정에서 그것을 잇는 존재, 이른바 "잃어버린 고리" (Missing Link)가 충분히 발견되지 못하여, 그것을 찾아내려고 많은 학자들이 열을 쏟고 있던 중이었다. (이 "잃어버린 고리"에 관련된 논쟁은 오늘날에도 마무리되었다고 볼 수 없다. 그리하여, 이것이 충분히 발견되지 못했다는 것이 소위 "인류창조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논거가 되기도 한다.) 우드워드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양쪽에서는 상당한 논쟁이 이어지던 중, 1915년 도슨은 또 한 벌의 두개골과 턱뼈를 발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것은 좀더 온전한 형태로 발굴되었으므로, 우드워드의 주장이 옳은 것으로 결론지어졌고, 도슨은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인물로 널리 알려져서, 원인의 명칭도 그의 이름을 따서 "에오안트로푸스 다우소니"(도슨의 여명인이라는 뜻)라고 명명되었다. 혹은 발견된 지방을 따서 "필트다운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도슨은 1916년에 죽었으나, 이상하게도 그 이후에는 필트다운에서 원인의 뼈가 전혀 발굴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이 필트다운인의 특징은 매우 이상해서, 이후의 발견들로 차차 밝혀지게 된 인류진화계통의 그 어디에도 끼워 넣을 수가 없었다.

대영박물관의 케네스 오클리, 옥스퍼드 대학의 J.S.웨이너, 그로스 클락 등의 학자들이 드디어 이 "필트다운인"의 비밀을 밝혀 내려고 도전하였다. 그들은 방사성동위원소 측정법, X선투시검사 등의 첨단 방법들을 동원하여 1953년 결국 수수께끼를 풀어내었다. 필트다운인의 두개골은 원인의 것이었으나, 턱뼈는 오랑우탕의 뼈를 가공하여 붙인 것이었고, 표면에 약을 발라서 오래된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함께 발굴된 50만년 전의 동물화석은 세계 각지에서 모아서, 필트다운의 자갈층에 가짜 원인의 뼈와 함께 묻었다가 다시 파낸 것이었다. 찰스 도슨은 생전에는 "잃어버린 고리"를 찾아낸 과학적 대발견을 이뤘다는 찬사를 들었을지 모르나, 오늘날에는 원인발굴사상 "최대의 사기극"을 꾸민 장본인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있다. (혹자는, 도슨이 의도적으로 조작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도 화석 발굴꾼들에게 속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그의 오명이 쉽게 벗겨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② 누가 "진짜 인공다이어몬드"를 만들었나?

다이어몬드는 지금도 가장 귀하고 값진 보석이지만, 옛날에는 천연다이어몬드 밖에 없었을 것이므로, 이것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보려는 노력은 상당히 오래 전부터 있었을 듯하다. 1797년 영국의 스미드슨 테넌트가 자기의 다이어몬드를 태워서 생긴 기체를 조사 해본 "값비싼 실험" 결과, 그 귀한 다이어몬드가 탄소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 이후 다이어몬드가 많이 나는 남아프리카 지방의 지질을 조사해 본 결과, 다이어몬드는 땅속에서 아주 높은 정도의 고온, 고압에 의해 생성된다는 사실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곧 탄소에 인공적으로 고온, 고압을 가하면 다이어몬드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 방법으로 앞다투어 실험하였다. 그러던 중, 1880년 영국의 하네가 최초로 인공 다이어몬드의 제조에 성공했다고 보고하였다. 그는 탄소원으로 파라핀 등의 탄화수소를 썼고, 이것을 리튬 등에 섞어 철관 속에 넣어서 빨갛게 달을 때까지 가열하였다. 80번 이상 실험했으나, 관이 파열되지 않고 견딘 것은 단 3번뿐이었고, 그 속에서 인공 다이어몬드가 생성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이 다이어몬드는 지금도 런던의 대영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또한, 프랑스의 화학자 앙리 무아쌍(1852-1907)은 자신이 개발한 강력한 전기로로 철에 탄소를 섞여서 녹인 후, 이것을 갑자기 찬물에 넣어서 수축시켜 강한 압력을 발생시킨 다음, 철을 산에 녹였더니 작은 다이어몬드 결정이 만들어졌다고 발표하였다. 무아쌍은 노벨 화학상까지 받은 바 있는 유명한 학자였으므로 다들 그것이 사실이라 믿었다.

한편, 1933년 독일의 한스 가라바첵은 복잡한 공정을 통해서 다이어몬드를 생성시키는데 성공했다고 보고하고, 독일의 특허까지 취득하였다.

그러나, 1941년경, 미국의 물리학자 브리지먼(1882-1961)이 고압물리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추진한 결과, 그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한 실험으로는 인공다이어몬드를 생성시킬 정도의 충분한 고온, 고압에 도달하지 못했음이 드러났다. 즉 대부분 엉터리거나 사기극이었다는 것이다.

가라바첵의 경우 분명한 사기였고, 하네도 그런 혐의가 짙다고 한다. 그리고 무아쌍의 경우는 그가 죽은 후, 실험 조교가 계속되는 실험에 짜증이 났었고, 또 선생님을 기쁘게 해 주려고 몰래 진짜 천연 다이어몬드 조각을(그러니까, 가짜 인공다이어몬드) 집어넣었다고 고백하였다.

브리지먼은 고압물리학의 연구공로로 1946년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고, 그의 연구를 토대로 하여 1955년 미국 제너럴 일렉트로닉스(GE)의 연구소에서 최초로 인공다이어몬드가 만들어졌으며, 이 회사는 오늘날에도 세계 인공다이어몬드(공업용 다이어몬드) 시장의 큰 부분을 독과점하고 있는 기업으로 남아 있다.

③ 키리의 영구기관

어릴 적부터 기술 등에 흥미와 재능이 있었던 여러분이라면 "영구기관"의 제작을 한번쯤은 꿈꾸어 봤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성능이 좋은 발전기와 모터를 서로 연결하여, 외부전원 없이 서로의 힘으로만 계속 작동하는 방식 등...) 물론 "열역학 제1법칙" 즉, 에너지보존의 원리를 배운 후부터는 이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겠지만, 과학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영구기관"의 예가 숱하게 등장한다. 그것도 자력을 이용한 것, 낙하의 힘을 이용한 것, 부력, 수력, 전기, 열, 빛, 화학반응을 이용한 것 등등 모양과 종류도 매우 다양한데, 제대로 작동된 것은 하나도 없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영구기관의 발명자"들 중에는 자기의 발명이 옳다고 확신한 사람들도 물론 있었겠지만, 사기꾼들도 많았다. 그 중에서도 미국의 존 워렐 키리(1837-1898)라는 자는 아주 탁월한 사기꾼이었다.

키리의 발명은 단순한 영구기관이라고 하기에는 좀 복잡해서, 무에서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물을 사용해서 "공감적 진동"에 의해 재결합을 일으켜서 대량의 에너지를 낸다는 그럴듯한 이론을 폈다. 그는 교육을 받지는 않았으나 언변이 뛰어났고, 난해한 용어들을 거침없이 구사하며 자기주장을 종횡으로 전개하여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거나 혹하게 만드는 "혹세무민"의 대가였다.

1872년에 10여명의 기술자, 자본가 등이 1만 달러를 출자해서 "키리 모우터회사"를 설립했고, 키리는 이 돈으로 부품을 사서 금속관, 구, 밸브, 계기 등이 복잡하게 꾸며진 정교한 기계를 조립했다. 1874년 필라델피아의 유지들 앞에서 공개실험이 실시되었는데, 참석자의 한사람은 "압력계는 1제곱인치당 5만 파운드 이상의 압력을 나타냈다. 굵은 밧줄이 끊어지고 쇠막대가 휘었으며, 총알은 12인치 두께의 판을 관통했다." 고 보고 하였다. 또 키리는 "나는 약 1리터의 맹물로 기차를 필라델피아에서 뉴욕까지 달리게 할 수 있다." 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이 실험으로 많은 출자자들이 서슴없이 거액의 돈을 투자하였고, 키리는 기계의 상업적 실용화 비용으로 거듭 더 많은 돈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연구는 지지부진하였다. 그러는 동안 20년의 세월이 흘러서 1898년 그는 죽었고, 그후 출자자들이 조사해 보니 기계의 설계도도 없었고, 수십만 달러의 투자비는 그의 사치스런 생활비로 탕진되었으며, 이익은 한푼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넋을 잃었지만, 그때까지도 자신들이 속았다는 것을 정확히 깨닫지 못했다. 즉 죽은 키리와 함께, 그 "키리 모우터의 비밀"도 수수께끼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가장 열성적인 투자자의 한사람이었던 무어부인의 아들 크라렌스 무어는 전부터 키리의 행동에 의심을 품었고, 그가 죽은 후 그의 실험실이 있던 건물을 임대하여 샅샅이 조사하였다. 그 결과 실험실의 마루 밑에 압축공기탱크가 감춰져 있었고, 거기서 파이프를 각지에 끌어들여 압축공기의 힘으로 기계를 움직였던 것을 밝혀 내었다. 키리 모우터는 영구기관도, 아무것도 아닌 사기극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영구기관을 발명" 했다고 특허 출원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서, 세계 각국의 특허청 담당자들을 골치 아프게 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이러한 "영구기관" 특허의 경우 신청서류에 반드시 동작하는 모형을 첨부한다는 조건을 붙임으로써 신청 자체를 저지하고 있다고 한다.


52. "잘못된 상식들"(1)

우리에게 상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과학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 중에는, 실제와는 다르게 잘못 알려져 있는 것들도 매우 많다. 과학자들의 업적이 부풀려지고 너무 미화되기도 하고, 혹은 "후세에 교훈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왜곡되거나, 꾸며내어진 이야기들도 적지 않다. 이러한 "오해의 과학사"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을 몇 가지만 알아보기로 하겠다.

① "갈릴레이는 피사의 사탑에서 물체의 낙하실험을 하였다."

근대과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업적은 매우 많으나,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가벼운 물체나 무거운 물체나 같은 속도로 낙하"한다는 사실을 밝혀서, 기존의 아리스토텔레스의 "무거운 물체가 먼저 떨어진다."는 이론을 깨고, 근대적 역학법칙의 기초를 세운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기로, 갈릴레이는 그 유명한 피사의 사탑에서 두 공의 낙하를 실제로 실험하여, 이것을 증명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 알려진 과학사의 대표적 사례이다. 사실 피사의 사탑은 갈릴레이가 생존했던 시대에도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고 하니, 물체의 낙하 실험을 하기에 매우 좋은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갈릴레이는 그곳에서 물체의 낙하실험을 한 적이 없다. (갈릴레이의 업적을 후세에 널리 알리려다 보니 생겨난 이야기거나, 혹은 피사의 사탑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높이려고 이탈리아 관광 당국에서 퍼뜨린 것이거나 ...)

갈릴레이는 물체의 낙하에 관하여 그의 대표적 저서 "두개의 새로운 과학에 관한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만약 무거운 물체가 먼저 땅에 떨어진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무거운 물체와 가벼운 물체를 서로 연결해서 떨어뜨리는 경우를 고려해 본다면, 무거운 물체는 빨리 떨어지려 하고 가벼운 물체는 그보다 늦게 떨어지려 할 것이므로, 그 결과는 처음의 무거운 물체 하나만인 경우보다는 늦고, 가벼운 물체 하나만인 경우보다는 빨리 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두 물체가 연결되어 있으므로 전체 무게는 더욱 무거워져서 더욱 빨리 떨어져야 옳다는 결론도 나온다. 하나의 가정에서 이처럼 상반된 두 결론이 나왔으므로, 그것은 애초의 가정이 틀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무거운 물체나 가벼운 물체나 동시에 떨어져야 옳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갈릴레이는 이처럼, 실험에 앞서서 논리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이래 중세의 역학이론을 지배해 온 "무거운 물체일수록 빨리 떨어진다."는 설이 명백한 잘못임을 밝혔던 것이다. 실제로 두 개의 납 공을 떨어뜨려서 (그것도 피사의 사탑이 아닌, 2층 창문에서) 실험한 인물은 시몬 스테판이라는 네덜란드인인데, 갈릴레이의 제자가 쓴 "갈릴레오전"에서, 저자가 스승의 업적을 찬양하려는 나머지, 그만 다른 사람의 업적까지 혼동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② "노벨은 자신이 발명한 다이너마이트가 평화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되기를 바랐          으나, 인명살상용 군사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보고 크게 낙담하고 가슴아파 하였         다. 그래서 자신의 유산을 털어서 인류평화에 기여한 사람에게 수여하라는 노벨         상을 제정하였다."

우리가 자주 들어 온 위의 이야기에는 중대한 오류가 두 가지나 있다. 첫째는 "다이너마이트"가 군사무기로 이용되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노벨이 자신의 발명품이 군사용 무기로 쓰이는 것을 반대한 것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알프레드 노벨(1833-1896)은 아버지 대부터 화약의 생산에 종사했으며 처음에는 액체 폭약인 니트로글리세린을 제조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조금만 흔들어도 폭발하는 아주 위험한 것으로서, 노벨의 공장에서도 몇 차례 폭발사고가 일어나서 그의 동생이 죽기도 하였고 세계 각국의 공장, 창고 등에서도 심각한 폭발사고가 잇달았다. 안전한 폭약을 만들려고 노력하던 노벨은 고심 끝에 니트로글리세린을 규조토에 삼투시킨 폭약을 발명하여 1867년에 특허를 취득하였다. 이것이 곧 다이너마이트인데, 흔들거나 두들겨도, 심지어 불을 붙여도 반응이 없고 뇌관을 쓰지 않으면 폭발시킬 수 없다. 따라서 토목이나 건설, 광산 등지에서 널리 쓰여져 노벨은 곧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둔감한 폭약"은 군사용 무기로 쓰기에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었다. 설사 쓴다고 하더라도 직접적인 인명살상보다는 포대, 진지의 폭파 등에 제한적으로 이용되는 정도가 고작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노벨은 적극적으로 군용화약의 개발에도 힘을 쏟았으며 1887년에 발명한 무연화약은 총포, 기뢰, 폭탄 등에 쉽게 쓰일 수 있었다. 노벨은 이 우수한 군용화약을 대량으로 생산하여 세계 각국에 널리 수출까지 하였다.

물론 노벨 자신은 전쟁을 싫어한 "평화주의자"였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납득하기 힘들겠지만, 그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했다고 한다. "무엇이든 모조리 부숴 버릴 가공한 힘을 가진 물질이나 기계를 만들고 싶다. 그것으로 적과 우군이 1초 동안에 서로 상대방을 말살할 수 있게 된다면, 모든 문명국들은 공포를 느낀 나머지 전쟁을 외면하고 군대를 해산할 것이다." 마치 핵무기가 있기 때문에 "무장평화"가 유지된다는 식처럼, 살상효과가 큰 병기를 개발할수록 평화가 올 수 있다는 역설적인 생각을 노벨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53. 잘못된 상식들(2)

1. "소년 와트(J. Watt)는 수증기로 인하여 물주전자의 뚜껑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서 증기기관의 발명을 착상하였다."

제임스 와트(1736-1819)의 증기기관은 산업혁명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주역으로서, 기술 발달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와트가 증기기관을 "최초로" 발명한 것은 아니다. 토머스 뉴커멘(1663-1729)이 발명한 증기기관은 와트의 증기기관이 나오기 50년 전부터 영국의 탄광에서 지하수를 퍼 올리는데 널리 쓰이고 있었다.

위의 와트의 소년 시절의 "주전자 일화"는 우리도 어린 시절에 누구나 다 한번씩 들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에 와트 소년처럼 관찰력을 가지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친절한 가르침과 함께...) 그러나, 이 이야기가 처음 나온 것은 와트의 어린 시절에서 50년 이상 지난 뒤였다. 그것도, 와트가 주전자뚜껑을 유심히 관찰하여 무엇을 구상한 것이 아니라, 그냥 주전자 뚜껑을 가지고 장난을 치다가, 고모에게 꾸중을 들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소년 와트는 미혼인 고모 뮤어헤드양과 차를 마셨는데, 고모는 소년 와트를 이렇게 야단쳤다고 한다.

"제임스야, 너처럼 게으른 아이도 처음 보겠구나. 어쩌자고 한시간 동안이나 주전자 뚜껑만 들었다 놓았다 하니? 그런 일로 시간을 낭비하다니, 부끄럽지도 않니? 책을 읽던가 아니면 다른 쓸모 있는 일을 해야지... " 어린 시절 와트의 이 기억이 먼 훗날 증기기관을 제작하는데 어떤 영감을 주었는지, 확언하기는 힘들지 모르나, 이것을 계기로 증기기관을 발명했다는 것은 너무 과장되고 터무니없이 비약된 것이 아닐 수 없다. 와트가 증기기관에 손을 댄 것은 1763년 글래스고우 대학에 있던 뉴커맨의 증기기관 모형이 고장난 것을 수리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는 곧 고장을 수리했고, 이후 흥미를 가지고 좀더 효율적인 증기기관을 만들려고 노력한 끝에 성능이 우수한 증기기관을 제작하여 널리 보급함으로써 산업혁명에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소년 시절의 단순한 호기심이 나중에 큰 업적을 낳게 되었다는 설명은 어린 학생들에게 교육적인 효과는 클지 몰라도 그다지 사실과 부합되는 해석은 아니다. 또한 재미있는 것은, 와트보다 앞선 시대의 증기기관연구의 선구자인 우스터 후작2세(1601-1667)와 토머스 뉴커멘에게도 위와 똑같은 일화가 있다는 일이다.

② "뉴튼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 힌트를 얻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 하         였다."

너무도 유명한 이 이야기에도 과학사학자들간에 무척 논란이 많다. 사과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물리법칙을 세웠다면, 누군들 못했겠냐고 일축해 버리는 사람들도 무척 많다. 다만, "사과와 만유인력" 의 상관관계를 어느 정도 인정하더라도 이것만으로는 너무 불충분하다. 물체가 떨어지는 것이 지구인력의 작용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그전에도 많이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지구의 인력으로 사과가 떨어졌다." 고 생각한데에 그친 것이 아니라, "사과를 떨어지게 한 지구의 인력이 하늘에 떠 있는 달의 운동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한 것이다. 즉 뉴튼 이전에는 "하늘나라의 역학(力學)" 과 "땅위의 역학"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으로 보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뉴튼은 지구와 행성들의 공전, 달의 공전, 물체의 낙하와 운동 등, 천상의 운동과 지상의 운동이 똑같은 물리법칙에 의해서 설명된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기존의 역학이론을 종합, 완성하고 고전물리학의 완결된 토대를 만들었던 것이다.


54. 동시발견과 우선권 논쟁(1)

과학상의 발견에는, 똑같은 이론을 거의 같은 시기에 여러 사람이 주장, 발견한 경우가 매우 많으며, 이것은 과학사학자들의 좋은 연구거리가 되기도 한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보기는 어려우며, 사회적, 환경적 맥락에서 접근하려는 설명이 많다. 더구나, 단독발견보다는 도리어 동시발견이 더욱 일반적인 사례라는 주장도 있다. 유명한 SF작가 겸 과학평론가 아시모프 박사는 그의 저서 "아시모프의 과학이야기"에서 이러한 동시발견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고 쓰고 있다.

한편, 이러한 동시 발명, 발견은 당사자들간에 격렬한 우선권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특허로서 독점적, 배타적 권리가 보장되는 기술적 발명은 말할 것도 없고, 학문적인 발견의 경우에도, "점잖은 학자" 들간에 이전투구 적인 다툼이 수없이 벌어졌다. 물론 과학자들도 인간인 이상, "과학사의 한 페이지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가느냐, 못 올라가느냐" 는 문제인 만큼 우선권에 대한 집착은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례들 중 대표적인 경우 몇 가지만 보기로 하자.

① 미적분의 발견자 ; 뉴턴 vs 라이프니쯔

우선권을 둘러싼 논쟁들 중 이처럼 격렬하고 오래 지속되었던 것도 드물다. 사실 잘 살펴보면, 싸움에 불을 지르고, 더 나아가 서로 상대방이 도용했다고 까지 주장하게 된 것은 당사자들보다는 주위의 추종자들 때문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뉴턴(Newton)이 미적분의 힌트를 얻은 것은, 1666년 런던에서 흑사병이 크게 유행하여 고향으로 내려가 있을 때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미적분 체계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그가 죽은 후인 1736년이었다. 1686년에 발표된 그의 명저 "프린키피아"(Prinkipia;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도 미적분은 사용되지 않고 "아폴로니우스의 원" 등으로 그 까다로운 문제들을 "기기묘묘하게" 풀이하고 있다. 다만 뉴턴은 자신의 친지들에게 그 개략을 얘기했고, 1676년부터 시작된 라이프니쯔(Leibniz)와의 서신왕래에서 당시 유행하던 일종의 수수께끼 문자인 "아나그램"으로 그 개념을 설명했다고 한다. 뉴턴의 첫 편지에는 "6acc...... 4s9t 12vx" 등의 기호가 쓰여 있는데, 이것을 풀이하면 라틴어로 "임의의 유량(변수)을 포함하는 방정식이 주어졌을 때, 그 유율(미분계수)을 찾아내는 일 및 그 반대"를 뜻한다고 한다.

이듬해 라이프니쯔는 답장에서, 지금도 쓰이는 dx, dy 등의 기호를 사용해서 자신의 미분방법을 분명히 기술하였다. 나중에 일어난 논쟁의 초점은 뉴턴 편지의 아나그램이 과연 미적분을 뜻하는지, 아닌지에 모아졌다.

라이프니쯔는 1684년 자신의 방법을 공표 하였고, 이 무렵까지 두 사람의 사이는 좋았다. 그러나, 1699년 라이프니쯔에게 적의를 품고 있던 스위스의 한 수학자가 라이프니쯔의 미적분은 뉴턴의 것을 도용한 것이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논쟁이 불거지기 시작하였다. 라이프니쯔는 이에 항의하면서, 경솔하게도 1705년 뉴턴이야말로 자신의 것을 도용했다고 은근히 비치는 글을 썼다. 이에 옥스포드 대학의 수학자 존 케일이 라이프니쯔야말로 도용자라고 강경하게 비난하였다. 라이프니쯔는 왕립학회에 케일을 제소하였고, 학회에서는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그때의 학회장은 뉴턴이었다. 1715년에 발표된 결론은 예상대로, "미적분의 최초 발견자는 뉴턴이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에도 이 논쟁은 가라앉지 않았고, 심지어 영국과 독일 양국의 국민 감정까지 개입, 흥분하여 격렬하게 지속되었다. 당사자 두 사람이 다 죽은 지 한참을 지나서도 논쟁은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오늘날에는 두 사람이 각각 독립적으로 미적분을 발견했고, 발견은 뉴턴이 빨랐으나 발표는 라이프니쯔가 빨랐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② 안전등의 발명자 ; 데이비 vs 스티븐슨

탄광의 폭발사고는 예나 지금이나 무서운 사고이지만, 옛날에는 더 자주 일어났고, 피해도 컸다. 전등이 없던 때라 촛불을 썼고 이것이 갱 속의 메탄으로 인하여 폭발사고를 일으켰던 것이다. 메탄 가스는 빛깔도 냄새도 없어서 탄갱 내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항상 불안에 떨어야만 했다.

잉글랜드 북부 탄광지방의 한 지역유지가, 여행 중 우연히 이곳을 들른 유명한 과학자 험프리 데이비(1778-1829)를 만나 탄광사고의 비참한 실정을 호소하고, 그것을 막는 방법을 연구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데이비는 동정과 호기심이 일어서 런던으로 돌아 간 후 안전한 탄광용 등불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불꽃을 쇠그물로 감싸면 철사 속으로 메탄가스가 흘러 들어가 불이 붙어도 불꽃이 쇠그물 밖으로 나가지 않고, 폭발도 일어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해서 데이비는 탄광용 안전등을 발명하였고, 그에 관한 논문을 왕립학회에 발표했다.

그런데, 같은 시기에 북부 잉글랜드의 어느 광산에서 근무하던 조지 스티븐슨 (1781-1848;후에 증기기관차를 크게 보급시킨 바로 그 인물)도 안전등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 역시 실험을 통해서 불길이 가느다란 파이프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측면을 유리원통으로 싸고 구멍을 뚫은 철판을 씌우고 공기는 꼭대기와 바닥에 있는 작은 구멍을 많이 뚫은 판으로 드나들게 설계한 안전등을 완성하였다.

그리하여, 데이비와 스티븐슨의 안전등 중 누구의 것이 좋은가, 누가 먼저 발명했나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 졌다. 두 사람 다 자기가 먼저였고 상대방의 연구는 전혀 몰랐다고 주장하였다. 데이비는 스티븐슨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쳤다고까지 주장했다.

1817년 왕립학회를 중심으로 조사가 진행되었는데, 데이비는 나중에 학회의 회장까지 맡게 되는 유명한 과학자였으므로, 유리한 입장이었다. 결국 조사위원회는 데이비를 안전등의 발명자로 선언하고 탄광주들의 기부금을 모아서 2,000 파운드의 상금을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스티븐슨에게도 노력한 대가로 100파운드 정도의 돈을 주었다. 이에 스티븐슨의 탄광 친구들이 격분하여, 자신들의 주머니 돈을 털어서 1,000파운드를 모금한 후 스티븐슨이야말로 최초의 안전등 발명자라고 결의한 후 그 돈을 스티븐슨에게 보냈다.

공정한 관점에서 보자면,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각각 독자적으로 안전등을 발명하였고, 시기적으로는 스티븐슨이 빨랐으나 과학 이론적 뒷받침에서는 데이비가 뛰어 났다고 할 수 있다.


55. 동시발견과 우선권논쟁(2)

역사상 동시발견의 예를 몇 가지만 더 소개하자면, 수학에서 로그(log)의 발견이 네이피어와 뷔르기에 의해서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고, "열역학 제1법칙"으로 잘 알려진 에너지보존의 원리는 1842년에서 1847년 사이에 마이어, 헬름홀츠 등 무려 4명의 과학자에 의해서 독립적으로 연구되었다. 학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수십년간 잊혀져 왔던 멘델의 유전법칙은 1900년에 드프리이스, 코렌스, 체르마크의 세 명의 생물학자에 의해서 동시에 다시 발표되었다. (그래서 1900년을 "멘델법칙 재발견의 해" 라고 부르게 되었다.) 물론 이 이외에도 매우 많다. 그래서 영국의 저명한 과학사회학자 머튼(Merton)경은 동시발견이 오히려 주류라는 주장을 한 바 있다.

① 비행기의 발명자 : 라이트형제 vs 랜글리

우리는 비행기의 발명자로 라이트형제를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하마터면 비행기의 최초 발명자가 랜글리로 잘못 기록될 뻔하기도 하였다. 라이트형제는 오랜 시간을 끈 진상규명 노력 끝에 비로소 최초의 비행기 발명자로 "공인" 받을 수 있었다. 사건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형인 윌버 라이트(Wilbur Wright; 1867-1912 ) 동생 오빌 라이트(Orvill Wright; 1871-1948 )는 모두 일찍부터 기계제작 등의 기술에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으며 형제가 함께 자전거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은 그 당시 활발히 개발, 보급되기 시작한 가솔린 자동차에도 큰 관심을 보였고, 결국은 가솔린 엔진을 이용한 비행기의 발명에 착수하게 되었다.

19세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비행기를 개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증기기관으로는 충분한 출력을 낼 수가 없어서 대부분 실패하고 말았다. 1903년 12월 17일, 가솔린 엔진과 프로펠러를 장착한 라이트형제의 쌍엽기 플라이어호가 드디어 세계 최초의 비행기로서 하늘을 나는 데에 성공하였다. 자세히 표현하자면, "하늘을 날았다."라기 보다는 "10여초 동안 땅에서 1m쯤 떠서 갔다." 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지만, 그 의미는 대단히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라이트형제는 자신들의 비행기를 거듭 개량하여, 1-2년 후에는 30분 이상의 연속비행에 성공하기도 하였다.

한편 라이트형제가 최초의 비행에 성공하기 불과 9일 전에, 역시 비행기 개발에 힘써온 랜글리가 제작한 비행기의 시험비행이 있었다. 그러나, 랜글리의 비행기는 곧 강물에 추락하고 말았다. 랜글리는 그 당시 미국의 저명한 과학 단체인 스미소니언협회의 회장을 맡아 온 원로과학자로서, 비행기의 개발은 그가 마지막으로 심혈을 기울인 일이었다. 그는 몇 년 후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제자 및 후임자들은 "비행기 발명의 명예를 자전차포 직공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는 비뚤어진 마음을 품고, 랜글리의 명예회복을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1914년에 라이트형제의 라이벌 격인 비행가 글렌 커티스가, 실패로 끝난 랜글리의 비행기를 수리, 복원해서 정말로 날 수 없었던가 어떤가를 실험해 보고 싶다고 청해 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검은 속셈이 있었다. 얼마 전 그는 보조날개의 특허를 둘러싸고 라이트형제와 다툰 소송에서 패소했던 참이었고 아이디어를 약간 변경해서 다시 소송을 청구하는 동시에, 랜글리의 비행기가 사실은 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이면, 앞으로의 재판에서 자신이 유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스미소니언협회는 커티스의 신청을 받아 들여, 실험비용으로 2,000달러를 지불하였고 그는 랜글리의 비행기를 "복원"하여 (사실은 개조하여) 1914년 5,6월 뉴욕주의 큐커호에서 비행실험을 하였다. 괴상한 모양의 이 비행기는 몇 차례 수면을 떠서 날아올랐으나, 최장 비행시간은 단 5초였다. 스미소니언협회는 그 해의 연차보고에서 "이 실험으로 랜글리의 비행기가 세계 최초로 날 수 있는 비행기라는 것이 실증되었다."라고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편 라이트형제는 오래 전에 랜글리의 비행기의 구조를 연구해서 도저히 날 수 없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에 스미소니언협회의 성명에 놀랐고, 뭔가 흑막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조사를 하였다. 자세히 살펴 본 결과, 커티스가 날린 비행기는 랜글리의 비행기를 복원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르게 개조한 것임을 곧 알았다. 형태만 본래의 것과 같았지 크기와 구조도 크게 다르고, 엔진과 기체가 훨씬 강력했으며, 놀랍게도 라이트 형제의 특허인 보조날개까지 붙이고 있었다. 동생인 오빌 라이트는 (형인 윌버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협회에 증거를 제출하고, 잘못된 성명을 취소하라고 요구했으나 협회는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설사 기체에 변경이 가해졌다 해도 그것은 사소한 것이라고 변명하였고, 도리어 랜글리의 비행기를 복원 조립하여 "인간을 태우고 날 수 있었던 세계 최초의 비행기" 라는 팻말과 함께 화려하게 항공박물관에 전시하였다. 그러던 중, 런던의 과학박물관에서 라이트의 최초 비행기를 전시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오빌 라이트는 미국에서 자신의 비행기를 전시하고 싶었으나, 스미소니언협회가 여전히 자신의 주장을 묵살하고 있었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1928년 비행기를 영국으로 보냈다. 그런데, 유럽관광을 온 미국인들이, 뜻밖에도 자신들이 자랑하는 라이트의 비행기가 런던에 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라의 수치이니 다시 미국으로 가져가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 졌고, 라이트와 랜글리의 비행기 중 어느 쪽이 먼저인지 조사해서 확정하라는 의안이 의회에 제출되기에 이르렀다.

스미소니언협회의 새 회장은 조사위를 구성해서 다시 1914년 비행실험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고, 그 결과 역시 라이트의 주장대로 랜글리의 비행기에 대폭적인 변경이 가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1942년 협회는 조사결과를 발표한 후 라이트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하였고, 라이트도 납득하고 자신의 비행기를 다시 미국으로 가져오도록 승락하였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기 때문에 그 일이 지연되어, 1948년에야 간신히 미국으로 돌아왔고, 그때는 동생인 오빌 라이트 마저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② 진화론의 주창자 : 다윈"과" 월러스

자연도태설을 바탕으로 한 생물의 진화이론을 수립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영국의 찰즈 다윈이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영국의 앨프리드 월러스도 같은 착상을 하였고, 두 사람은 이론의 내용이 거의 같을 뿐 아니라 영향을 받게된 책, 외지에서의 관찰까지도 공통적이었다.

다윈은 1831년부터 1836년까지 군함 비글호의 세계일주항해에 참가한 후, 모은 자료의 정리와 관찰, 사색을 통하여 마침내 진화론을 구상하였고 1842년 몇 가지 노트를 만들고 작은 논문들로 정리하였다. 그러나 그는 좀더 많은 사실을 수집하여 자신의 이론을 완벽하게 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식 발표는 미루고 있었으며 한 선배과학자는 "누군가가 자네를 앞지를지도 모르니" 빨리 논문을 발표하라고 충고하였다.

다윈이 망설이는 동안에 1858년 6월 인도네시아의 물러카즈 제도에 있던 월러스라는 무명의 박물학자에게서 두툼한 편지가 날아왔다. 놀랍게도 거기에는 자기가 생각한 이론과 거의 같은 형태의 논문이 동봉되어 있었다. 더우기 다윈에게 그 논문을 비평해주도록 요청했고, 괜찮다면 학회에 소개해 달라는 청탁까지 있어서 다윈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다윈은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만약 월러스의 희망대로 그 논문을 세상에 내놓 으면 자신이 20년에 걸쳐서 남몰래 해온 연구는 매장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의 연구를 먼저 발표하면, 월러스의 신의를 배반했다는 세상의 비난을 살 것이고 어쩌면 도작의 혐의까지 뒤집어 쓸지 모른다. 다윈은 친구들과 상의하였고, 그들은 다윈이 일찍부터 진화론을 연구해 온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린네협회에 월러스의 논문과 다윈의 학설의 요약을 함께 낭독하도록 절차를 주선하였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논문은 동시에 발표되었다.

다윈과 월러스는 모두 다 겸손하고 인격이 고매한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우선권을 다툴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월러스는 진화이론을 스스로 "다위니즘"이라고 부르기를 제안했고, 이 이론에 기여한 자신의 역할은 "다윈의 20년에 대한 1주간" 에 불과하다고 했고, 다윈이야말로 "이 이론을 전개하기에 가장 적절한 인물" 이라고 칭찬하였다. 다윈도 월러스에게 "당신이 나만큼의 여가가 있었더라면, 나 이상으로 이 이론을 잘 전개했을 것" 이라고 대답하였다.

최초 발견의 명예를 서로 양보한, 과학사상 보기 드문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56. "2천년전의 증기기관"

"증기기관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이렇게 물으면, 여러분은 서슴없이 "제임스 와트"(James Watt)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틀린 대답이다.

제임스 와트가 증기기관을 만들기 50여년 전에도 이미 영국의 탄광에서는 증기기관이 이용되고 있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증기선의 발명자" 풀턴과 "증기기관차의 발명자" 스티븐슨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발명품들이 가장 성공적으로 작동했고, 그것을 널리 보급시키는 데에 크게 공헌했기 때문에 그들을 "증기기관차(증기선)의 아버지" 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할 지 모르나, 그들이 최초로 발명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사실 진보와 개량이 거듭되는 기술발전사에 있어서, 최초 발명자를 밝혀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며, 아직도 학자들 간에 논란이 많다. 앞의 예의 증기기관차만 하더라도 스티븐슨 이전에 여러 선구자들이 있었다. 다만 여러 이유들로 인하여, (예를 들어 퀴뇨의 증기자동차의 경우는 시험 운행 중에 남의 집 담장을 크게 부수고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고, 트레비딕의 증기기관차도 상업적인 운행 도중 일어난 전복사고로 인하여 사람들이 기피하게 되었다.) 그들은 대중적인 보급에 실패했기 때문에 그다지 유명해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처음으로 돌아가서, 증기기관을 세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이 누구냐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 필자는 놀랍게도 2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 알렉산드리아시대의 기술자 헤론(Heron)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쉽게도, 헤론이라는 인물의 개인적인 신상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삼각형의 면적을 구하는 공식인 "헤론의 공식"의 발견자와 동일인인지에 대해서도 아직 논란이 있다.) 그러나 그가 저술한 여러 권의 저서를 통하여 이 시대를 앞선 선구자가 만든 놀라운 발명품들을 접할 수 있다.

다음은 그 당시의 그리스 어느 신전 앞의 한 풍경 ....

거대한 신전 양쪽 벽면의 화로에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고, 앞에는 육중한 돌문이 닫혀 있다. 신전 마당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꿇어앉아 열심히 기도를 올리고 있다. "위대하신 제우스(Zeus)신이시여, 태양신 아폴로(Apollo)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엄숙한 표정의 사제들이 앞으로 나와 소리 친다. "시민들이여, 여러분들의 기도가 진실되면 제우스신께서도 응답하실 것이다. 그러나, 신성을 의심하는 자가 있다면, 답하시지 않을 것이다. 만일 여러분의 진실된 기도를 받아들이신다면, 저 육중한 돌문이 저절로 열릴 것이다." 시민들은 더욱 열광적으로 기도를 올린다. 사제들도 더욱 엄숙해진다. 시간이 흐르자, 정말로 육중한 돌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시민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제우스신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전지전능한 제우스신이시여!" 사제들도 득의만만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위의 "저절로 열리는 돌문"은 사제들의 농간이었다. 사실은 헤론이 만든 정교한 기계장치를 이용한 것으로, 벽면 화로의 불길이 수증기를 팽창 시켜서 증기압의 힘이, 안 보이는 곳에 설치된 기구를 통하여 돌문을 연 것이다. 물론 일반 시민들은 까맣게 몰랐고, 비밀은 몇몇 사제들만이 알고 있어서 "신의 위대함"을 선전하는 데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우리 역사상의 인물과 견준다면, 조선 세종때의 "장영실"과도 비교할 수 있겠으나, 헤론은 장영실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더욱 놀라운 발명들을 많이 이룩하였다. 그가 발명한 것 중에 "기력구"(氣力球;편의상 한자식 단어로 번역한 것임)라는 것이 있다. 모양은 둥근 구의 양쪽에 공기 통로가 달려 있고 구에 연결된 아래쪽 통 안에는 물이 채워져 있다. 밑에서 불을 때면, 안의 수증기가 팽창하여 나오면서, 구가 축을 따라서 회전하게 되어 있다. (혹 대학 때 공업 열역학을 배우신 분은, 교재의 표지그림으로 보셨을지도 모름. 필자는 전공이 달라서 못 봤음) 이것을 당시에는 "에오리아의 공"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에오리아의 공(=기력구)"이야말로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인 것이다. 물론 엄밀히 따진다면, 엔진으로 실제 이용된 것은 아니므로, "증기기관"이라고까지 부르는 것은 무리일 수도 있겠으나, 아무튼 증기기관의 원리를 정확히 응용한 세계 최초의 증기터어빈 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밖에도 헤론은 여러 재미있는 것들을 발명했다. 한번은 욕심 많은 한 사제의 요청으로, 동전을 넣으면 일정량만큼의 성수(聖水)가 나오는 "성수자동 판매기"를 만들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커피자동판매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수레의 축에 기어들을 연결해서, 수레가 얼마만큼의 거리를 달렸는지 알 수 있는 장치도 고안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택시미터기와 같은 원리이다. (물론 그 당시에 택시는 없었겠지만...)

그러면 우리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당신의 그 멋진 발명품들을 잘 응용해서, 실제 인간생활을 편리하게 하는 데에 썼더라면, 사람들의 생활이 크게 풍요로워지고 훨씬 빠르게 발전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역사에 있어서 가정이란 무의미한 것이라지만, 정말 헤론이 자신의 발명품들을 실생활에 보급시키려고 노력했다면, 산업혁명이 17-18세기의 영국에서가 아니라, 2천년전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되었을 지도 모를 일일 것이다.

그러나 헤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음과 같이 우리의 질문에 답할 것이다. "인간생활을 편리하게 한다고?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힘든 일은 노예들이 다 알아서 해 주는데 굳이 번거롭게 그런 것들을 쓸 필요가 있을까? 괜히 노예들만 편하게 만들어 줄 필요는 없쟎아?"

당시 그리이스의 노예제 사회아래서는, 헤론의 훌륭한 발명품들도 실제의 생활에는 그다지 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저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장난감" 에 불과할 뿐... 앞의 "신전의 돌문"의 예에서 보듯이, 인간보다는 신을 위한 기구였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과학이나 기술의 발전은 그것이 속한 사회와는 별로 관련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나, 과학기술사를 조금만 살펴보아도, 정 반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헤론의 경우도,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증명하는 그 숱한 사례들 중의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현대사회에 있어서 어떠한 영향들을 서로 주고받고 있는 것인가? 과학기술 개발의 현장에 몸담고 있는 우리 연구원들도 마땅히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할 과제가 아닌가 생각된다.


57. "비운의 두 수학자"

역사상의 수많은 과학자들 중에는 생전에 큰 업적을 쌓고, 명성과 영예를 떨친 인물들도 많지만, 비범한 능력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생을 마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의 알려지지 않은 업적은, 사후에야 비로소 크게 평가받기도 한다. 오늘은 이러한 인물들 중의 한 예로, 20대의 젊은 나이로 요절한 두 천재 수학자 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여러분은 고등학교 수학 시간에 "일반적인 5차 이상의 방정식은 대수학적 방법으로는 풀 수 없다." 고 배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수학의 정석"이나 "해법수학" 혹은 교과서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이것을 증명한 사람은 노르웨이 출생의 수학자 아벨(Abel, 1802-1829)이다.

1802년 노르웨이 남쪽지방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중학교 때부터 수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대학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러나, 18세때 부친이 돌아가시게 되어,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돌보지 않으면 안되었고, 가난 속에서도 장학생으로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1824년, 22세의 젊은 나이로 "5차 이상의 방정식은 대수적으로 풀기가 불가능" 하다는 사실을 밝혀 내었다.

아벨은 이 연구결과를 출판하려 했으나, 논문이 너무 어려워서인지 교수들이 아무도 지원해 주려 하지않았다. 할 수 없이 자비로 출판하였으나, 경비를 아끼기 위하여 내용의 많은 부분을 압축했기 때문에 결국은 더욱 어려운 논문이 되고 말아서, 제대로 알아주는 수학자가 없었다. 당대의 저명한 수학자 가우스(Gauss; - 초등학교때 1에서 100까지의 합을 구하라는 숙제를 수열공식으로 단번에 풀어서, 느긋하게 "농땡이"치려한 담임선생님을 놀라게 만들었고, 대학생때 이미, 당시로서는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정17각형의 작도법을 발견하여 수학계 전체를 경악케 한 장본인으로, 그밖에도 Gauss함수 등 수많은 발견을 하여 지금도 "수학의 왕" 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조차도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다고 한다.

1826년 파리로 옮겨간 그는 다시 타원함수에 관한 논문을 써서 파리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하였으나, 심사위원인 코오시(Cauchy; 코오시수열의 창시자)가 논문을 읽지도 않고 팽개쳐 두는 바람에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계속되는 불운 속에서 다시 연구에 몰두하던 그는, 모교에서 간신히 대리강사 자리 하나를 얻었고, 가난과 과로로 인하여 폐결핵이 심해져서 1829년, 27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가 죽은 지 이틀 후, 그의 집에는 베를린 대학의 정식 교수로 채용한다는 초청장이 배달되어 많은 사람들을 가슴아프게 하였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아벨의 연구와 같은, 타원함수에 관하여 연구하고 있던 독일의 야코비(Jacobi; 수리물리학의 유력한 방법의 하나인, Jacobian Matrix의 제창자)는, 자신보다 앞서서 아벨이라는 수학자가 파리과학 아카데미에 비슷한 논문을 제출했다가 묵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의분을 느껴서 파리로 찾아가 항의하였다.

파리과학 아카데미에서 놀라서 찾아보니, 아벨의 논문은 벽장구석에서 2년간 방치되어온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과학 아카데미에서는 이 논문을 예회에서 낭독하기로 하고, 야코비의 논문과 함께 그랑프리를 주기로 결정했으나, 아벨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앞의 5차방정식이 대수적으로 해법 불가능이라는 증명을 비슷한 시기에 같은 방법으로 해결한 사람으로 프랑스의 갈로아(Galois; 1811-1832)가 있다. 묘하게도, 역시 불우하게 요절한 천재수학자라는 점도 아벨과 같다. 다만 갈로아는 경제적인 고생은 모르고 자랐으며, 역시 중학교 때부터 다른 과목은 낙제한 것도 있었으나, 수학에는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다만, 너무 수학에만 몰두하고 성격이 불같아서 다른 사람들의 비난도 들었다. 수학을 계속 공부하려고 당시의 명문 학교인 에콜 폴리테크니크(Ecole Polytechnique)에 입학하려 했으나, 두 번이나 낙방하였다. 그 이유로는, 면접시험에서 시험관이 너무 쉬운 문제를 묻는 바람에 화가 나서 칠판 지우개를 던져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즈음 그는 "정수론"에 관해 첫번째 논문을 어느 잡지에 실었는데, 후에 "갈로아의 정리"로 유명해진 그 글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갈로아의 이 이론이 우리가 요즈음 연구개발하고 있는 광디스크 매체의 에러정정방식에도 응용된다는 사실을 필자도 최근에야 알고 놀랐음) 그는 또한 "방정식론"에 관한 논문 한편을 파리과학 아카데미로 보냈으나, 이번에도 심사를 맡았던 코오시가 논문 원고를 분실하고 말았다.

1829년 에콜 노르말(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간 그는 방정식에 관한 논문을 다시 과학아카데미에 제출하였으나, 심사관인 수학자 푸리에(Fourier; 열전도이론과, 그 유명한 푸리에급수의 창시자)가 논문을 읽으려고 집으로 가져갔다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또 논문 원고가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사제들의 압박에 견디다 못한 부친이 자살을 하는 등 불행이 겹치자 그의 사상은 날로 급진화하여(요즘식으로 말하면 "좌경화"하여) "천재가 부당하게 냉대되고, 하잘것없는 범인들이 판을 치는 추악한 사회기구를 개혁"하기 위하여,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 물결을 타고 혁명운동에 열중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학교에서 추방되었고, 1831년 6개월 금고형을 받고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콜레라에 걸렸기 때문에 이듬해인 1832년 3월 가출옥하여 요양소에서 지내게 되었다.

이즈음 그는 일생에 단 한번의 연애사건을 일으키게 되었다. 요양소에서 만난 한 여성에게 반하게 되었는데, 5월 29일에 그가 정식으로 석방되자, 그 여자의 약혼자라고 자칭하는 사나이로부터 결투의 도전을 받았다. (그 여자는 매춘부였으며, 이것은 갈로아를 위험인물로 보고, 그를 없애려고 우익세력이 꾸민 함정이었다고도 한다.) 그는 결투를 승락하였고, 자신이 죽을 것을 미리 예견한 그는 전날 밤 친구인 슈발리에에게 자신의 연구결과를 유서로 썼다. "친애하는 벗이여! 나는 해석학에서 몇 가지 중요한 발견을 했다네."로 시작하는 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수학상의 견해를 전개하였고, 군(群)의 개념을 써서 방정식을 대수적으로 풀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 편지를 '르뷔 앙시클로페디크'에 발표해 주게나... 공개장을 내어 야코비, 가우스에게 내 정리(定理)의 정당성이 아니고, 그 중요성에 대한 의견을 물어주게." 라고 끝맺었다.

5월 31일 이른 아침, 한적한 교외에서 두 "서부의 사나이"는 권총으로 결투를 하였다. 그러나 역시 갈로아는 상대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는 배에 총을 맞고 쓰러졌고, 상대방은 그대로 줄행랑 치고 말았다. 인근의 농부에게 발견된 그는 병원으로 운반되었으나, 이미 살아나기 어려운 상태였다. 단 하나뿐인 혈육인 동생이 기별을 받고 달려와 가까스로 임종에 대했다. 흐느껴 우는 동생에게 갈로아는 "울지 말아라. 남자가 스무살에 죽는 데에도 큰 용기가 필요한 거야" 라면서 도리어 위로했다고 한다. 그는 그날 아침에 20년 7개월의 짧은 삶을 마쳤다. 한편 그가 유서로 쓴 편지의 내용은 14년 후 프랑스의 수학자 리우빌에 의해 발표되어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고, "갈로아 학파" 로 불리는 연구자들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58. 이발사와 외과의사

이 글의 제목을 보신 분들은 "이발사와 외과의사가 도대체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건가?" 하고 의아해 하실 것이다. (둘 다 흰 가운을 입는다는 것 이외에는....)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는 이발사들이 외과의사의 일도 함께 보았다. 당시에는 외과의학이라는 별도의 학문분야도 없었고, 피를 만져야 하는 외과의사는, 이발사가 겸하는 천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아직도 혹 믿지 못하시는 분들이 있을 것 같아서 그 증거를 제시하자면, 여러 분들은 지금도 이발소에 갈 때마다 빨간색, 파란색, 흰색의 줄들로 된 네온사인을 보실 것이다. 이 이발소의 네온사인이 무엇을 나타내는지 아시는 분? (이미 잘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빨간 것은 동맥, 파란 것은 정맥, 흰 것은 붕대를 의미한다. 이것은 곧 옛날에는 이발사와 외과의사가 동일한 직업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외과의학이 천한 직업에서, 학문의 한 분야로 자리잡게된 데에는 프랑스 사람 파레(A.Pare 1510-1590)의 공이 컸다.

중세시대에는 진통제도, 마취약도 없었으므로, 외과수술은 웬만큼 잔인한 고문보다도 훨씬 끔찍하였다. 환자의 몸을 쇠사슬로 묶은 후 외과의사(이발사)는 톱, 망치 등을 써서 무지막지하게 수술한 후, 빨갛게 달군 인두로 상처를 지져서 지혈을 하였다. 수술도중 환자가 죽는 경우가 매우 많았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파레는 어린 시절부터 외과의사가 되기를 희망해서, 여러 이발소(=외과병원)들을 전전하면서 외과의술을 배웠고, 파리에서 공부한 후 정식으로 외과의사가 되었다. 성년이 된 그는 군에 종군하는 군의(軍醫)가 되어서 전쟁 때마다 부대를 따라 다니면서 부상병들을 치료하였다. 한번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와의 전투에서, 프랑스가 이기기는 했지만 격렬한 전투였기 때문에 특히 총상환자들이 많았다.

당시의 총상치료법은 총알을 빼낸 상처 부위를 벌린 후 펄펄 끓는 기름을 붓는 방식이었다. 뜨거운 기름이 상처를 소독한 후 막을 형성하여,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물론 파레도 이 치료법이 옳다고 생각하고, 부상병들을 치료했지만, 고통을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한마디씩 하였다. "이보시오, 의사양반, 좀 아프지 않게 치료할 수는 없소? 총에 맞을 때보다 치료받을 때가 더 아프니, 이거 원...." 그러던 중, 총상환자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준비해 둔 끓는 기름이 다 떨어져 버렸다. 하지만, 부상자들이 이 사실을 알면 큰 동요가 일지도 모를 상황이었으므로, 파레는 급한 대로 달걀노른자, 장미향유, 텔레핀유 등을 섞어서 고약처럼 만든 후, 부상자들에게 새로운 약이라고 속이고, 상처에 발라 주었다. 그날밤 그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는 했으나, 무책임하게 가짜 약을 쓴 것이 크게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 환자들이 대부분 죽기라도 한다면... ?

다음날 아침 일찍 그는 자신이 치료했던 환자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가짜 약(?)을 발랐던 환자들은 상태가 아주 좋았다. 상처가 붓거나 덧나지도 않았고 고통도 거의 없이 상처가 아물어갔던 것이다. 도리어 끓는 기름으로 치료한 환자들은 대다수가 상처가 부어 오르고, 고통이 심하였다. 그는 그제서야, 끓는 기름을 붓는 치료법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이 개발한 약이 옳바른 약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쩔 수 없이 취한 응급처치가 옳바른 치료법을 낳은 것이다. 이후로도 그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고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여러 치료법 개발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인두로 지져서 상처를 지혈하는 난폭한 방법 대신에, 혈관을 결찰하여 지혈하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또한 처음으로 틀니, 의안, 의족 등을 고안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갔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자신의 치료법을 책으로 써서 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도 책을 쓰고 싶기는 했으나, 한가지 마음에 걸리는 문제가 있었다. 다름아니라, 그는 라틴어를 쓸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학자들은 모두 라틴어로 책을 저술하였고, (우리 나라도 조선시대에 한글을 "언문"이라고 천시했듯이) 프랑스어로 책을 쓴다는 것은 학문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외과의학이 별도의 학문으로 여겨지지 않는 시기였으므로, 그는 라틴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는 프랑스어로 책을 써서 내었고, 체면을 중시하는 학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그의 책은 널리 읽혀져서 근대적 외과의학을 이루는 토대가 되었다. 그는 프랑스 국왕의 시의를 4대에 걸쳐서 역임하였고, 명성을 전(全)유럽에 크게 떨쳤으며, 지금도 "근대 외과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다급할 때 응급처치로 쓴 방법이 도리어 옳바른 방법을 낳은 경우는 이밖에도 많이 있습니다.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면, 새로운 방법이 열리는 것 아닐까요?


59. Pi(원주율)의 역사 - (1)

"원주율(pi)의 정확한 값은 얼마일까?" 지금도 이런 질문을 한다면, 필경 어리석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아마 국민학교(초등학교)때 대략 3.14라고 배운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인류 역사상 pi의 정확한 값을 계산한 시기는 언제이며, 어느 정도까지 정확한 값을 계산해 낼 수 있었을까? 이것의 역사와 그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살펴보는 일은 자체로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인류의 수학사, 혹은 과학사의 한 축소판을 나타낼 정도로 의미가 있다.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부분들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원전 약 2000년 전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papyrus)기록에 원의 넓이를 구하는 다음과 같은 방식이 있다. ("Papyrus"란 나일강 유역에서 자라던 풀의 일종으로 이집트사람들은 이것을 종이처럼 만들어서 기록을 했다. 곧 영어 "Paper"의 어원이기도 하다.) "원의 넓이를 구하려면, 지름의 9분의 1을 뺀 후 그것을 제곱한다." 즉 지름을 d라 하면 원넓이는 가 된다. 이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원면적 공식 pi × 과 비교해 보면 (r은 반지름) 이집트 사람들이 계산한 원주율 값 pi = (16/9)^2 = 3.1604... 이 나온다.

이 값은 현재와 비교하면 그렇게 정확한 값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에 알려진 값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역시 피라밋을 건설한 장본인답게 뛰어난 기하학 지식을 가졌음이 틀림없다.

(학문적 의미의) 과학이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원주율을 효과적으로 계산해 내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안티폰 이라는 사람이 원 안에 정사각형과, 무수한 내접 삼각형을 그려서 그 넓이를 합하여 원의 면적을 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본인 스스로는 계산해 본 것 같지 않고,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실제로 원주율을 계산해 낸 사람이 바로 잘 알려진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부력의 법칙)"로 유명한, 이 그리스 알렉산드리아 시대 최고의 수학자(과학자)는 재미있는 일화도 많이 남겼다. 금과 은이 섞인 가짜왕관의 진위를 밝혀 내라는 왕의 명령을 받고 고심하던 끝에 목욕탕 안에서 부력의 법칙을 우연히 발견하고는, 알몸으로 거리로 뛰쳐나와서 "Eureka"라고 외치고 다녔다는 얘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Eureka는 그리스어로 "알았다, 됐다!"라는 의미. 아르키메데스는 삼각형들을 원에 내접, 외접 시켜가면서 원주율을 계산한 결과, 3과 10/71 보다는 크고, 3과 1/7보다는 작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 pi = 3.14... 라는,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정확한 값을 최초로 계산해 낸 것이다.

그는 또한 이 값을 바탕으로, 원기둥, 구의 체적을, 얇은 원들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오늘날의 적분개념과 비슷함) 구했다. 그리고, 원기둥에 내접하는 구의 체적은 그 원기둥의 2/3가 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그런데, 그가 이 연구를 자기 집 뒤뜰에 그림을 그려 가면서 하던 이 당시는 전쟁 중이었다. (제2차 포에니전쟁으로 생각됨) 마침 로마 병사 하나가 그의 집에 침입해 그의 그림(원기둥 안에 구가 접해있는)을 무심코 밟아 버렸다. 아르키메데스는 그 그림은 자기의 연구이니 밟지 말라고 했으나, 로마병사는 화를 내면서 그를 죽여 버렸다. 아르키메데스의 제자들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면서, 그의 마지막 업적을 묘지의 비문에 새겼다. 지금도 그의 비석에 원기둥과 구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B.C.287-212?)이후 약 700년이 지나서, 동양에서 훨씬 정확한 원주율 값이 계산되었다. 6세기 경, 중국 남북조 시대 송(宋)나라의 수학자 조충지(祖沖之)가 pi = 3.1415926... 를 계산해 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서양의 과학이 항상 앞서 왔었고, 동양은 뒤쳐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서양의 과학이 앞선 것은 16-17세기 과학혁명 이후로, 불과 300-400년밖에 안된다. 중세까지의 세계3대 발명품(나침반, 화약 종이)이 모두 중국에서 발명되었고, 중국과학사, 문화연구의 대가인 죠셉 니담(Joseph Needham)에 따르면, 중국은 15세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과학과 기술을 지니고 있었다.

잠깐 중국의 고대수학에 대해서도 살펴보면, 고대 중국의 기술관리를 위한 수학책 "주비산경(周婢算經)"에는 피타고라스(Phytagoras)의 정리와 내용이 똑같은 "구고산법"이 나온다.('구'나 '고'는 직각삼각형의 밑변, 높이 등을 말하며, 빗변의 제곱은 밑변, 높이 제곱의 합과 같다는 피타고라스의 정리와 동일한 내용이 그림과 함께 실려 있다. 이것은 고대 삼국시대 우리 나라에도 전해 졌으며, 한국과학사를 전공한 외국어대 박 모 교수는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아니라 "구고산법"으로 불려야 한다고 아직도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세기경에 Tm여진 것으로 추측되는 유명한 중국의 수학교과서 "구장산술(九章算術)"은 246가지의 예제가 실려 있는, 당대 세계 최고 수준의 수학책 이었으며, 13세기의 수학자 진구소는 부정방정식의 해법 등 서양 수학에서는 18세기 오일러(Euler), 가우스(Gauss)에 가서야 발견된 고도의 대수학 해법들을 알아내었다. (물론, 중국의 수학은 논리적인 증명보다는, 계산 등 실용적인 면만이 중시된 측면이 크다. 이점이 곧 나중에 서양에 뒤지게 된 원인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고대 중국 수학의 바탕 위에서 조충지는 아르키메데스와 비슷한 방법으로(물론 그는 교통, 통신이 발달 안된 그 시대에 아르키메데스가 한 것에 대해 전혀 몰랐을 것이다.) 원주율 pi의 값이 3.1415926보다는 크고, 3.1415927보다는 작다는 것을 계산해 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값이 아닐 수 없다. 이 정도의 값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는 무려 소숫점 300자리 이상의 수치들을 계산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전자 계산기도, 컴퓨터도 없던 시대의 그의 업적은 중국인, 나아가서 동양인의 끈기를 잘 보여 준다 하겠다.


60. Pi(원주율)의 역사 - (2)

왜 원주율을 "Pi"라고 부르는지 참고로 밝혀 두면, 그리스어로 "주위, 원주"를 뜻하는 "페리페레이아"(그리스문자 Font를 못써서 한글로 씀; 영어의 periphery에 해당)의 맨 앞글자인 "Pi"를 따서 기호로 사용하는 것임.

앞글에서 얘기했듯이, 조충지의 원주율 값은 오랫동안 세계에서 가장 정밀한 값으로 남아 있었고, 355/113이라는 근사값으로 서양에 전해지기도 했다. 서유럽에서는 15세기가 지나서야 조충지를 능가하는 계산이 나왔다. 그 이후 서유럽의 수학자들 사이에서는 원주율 계산 경쟁이 벌어졌으며, 어떤 이는 거의 평생을 다 바쳐서 원주율 계산만 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7세기 말엽 뉴턴(Newton)과 라이프니쯔(Leibniz)에 의해 미적분 법이 개발된 후, 수학자들은 이것을 써서 한결 수월하게 원주율을 계산할 수 있었다. 손계산에 의해 가장 긴 원주율을 계산해 낸 사람은 영국의 수학자 샹크스(Shanks)로서, 1870년경에 소수점이하 707자리까지 Pi의 값을 계산해 내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원주율을 쉽게 계산할 수 있는 강력하고도 편리한 tool이 개발되었다.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Computer"이다. 1960년대에 미국의 한 IBM 컴퓨터는 소수점이하 10만 자리까지의 원주율을 계산해 내었다. 이 값을 앞의 샹크스가 계산한 값과 비교한 결과, 그의 계산이 소수점이하 528 자리까지는 정확히 맞았으나, 그 뒤부터는 틀렸다는 사실도 밝혀 내었다.

이쯤 되면, 많은 수학자들은 진작부터 의심을 품었을 만하다. 과연 Pi의 값은 어디까지 계속되는 것인가? 끝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어떤 사람은 "원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형이지만, 원주율은 세상에서 가장 보기 싫은 수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1882년 린데만(Lindemann)이 Pi는 유리수가 아닌 무리수임을 증명하여, Pi를 끝자리까지 계산해 내려는 수학자들의 노력을 중단시켰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이른바 "3대 불가능문제"의 하나인 "주어진 원과 같은 면적의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문제"가 자와 컴퍼스만으로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함도 증명하였다.

("3대 불가능문제"란 고대 그리스시대로부터 수천년간 수많은 수학자들을 괴롭혀 온 문제로서,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써서 1) 각을 3등분하여 작도하는 것, 2) 원과 같은 면적의 정사각형을 작도하는 것, 3) 한 정육면체의 체적이 2배가되는 정육면체를 작도하는 것이다. 물론 자와 컴퍼스 이외에 각도기 등을 쓰면 쉽게 해결될 수도 있겠지만,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쓰는 것이 탈레스(Tales; 과학의 시조) 이래 기하학의 전통으로 여겨져 왔으며, 다른 기구를 쓰는 것은 비겁하고 음흉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지금은 3문제 모두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으로는 불가능함이 증명되었다.)

물론 오늘날에는 더 이상 정확한 Pi값을 계산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없다. 혹 있다면 도리어 컴퓨터의 성능을 시험해 보려는 이유 정도일 것이다. 컴퓨터로는 10만, 100만 자리, 아니 그 이상도 계산해 낼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실생활에서 필요한 근사치도, 인공위성의 발사와 같은 중대한 경우에도 Pi=3.1416 (다섯째 자리 반올림) 정도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결과를 얻기까지, 무수한 수학자, 과학자들의 피땀과 노력이 수천년간 이어졌으며, 이것이 곧 오늘날의 수학과 과학문명을 이루게 된 한 원동력이 되어 왔음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자료는 인터넷에서 다운 받은 자료입니다. (자료 제목 : 과학사 X-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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