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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누구인가 3] 출세가도 달린 남로당 출신 주변인물들
한상범 교수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지 44년째인 2005년 5월 16일 민주화 운동 기념 사업회에서 열린 만화박정 희 출판기념회. ©이철우 기자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진실위)’는 지난 7일 박정희 정권시절 대표적 공안사건으로 조작논란이 끝이지 않았던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과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 사건이 ‘학생시위로 인한 정권의 위기상황 속에서 대통령과 중앙정보부장이 사건의 실체를 매우 과장되게 발표한 사건’이라며 정권에 의한 조작임을 발표했다.
<참말로>는 그동안 친일청산과 역사 바로 잡기에 헌신적 노력을 해온 한상범(대통령 소속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장) 교수의 <박정희는 누구인가?>를 79년 유신을 마감한 10.26에 이은 또 다른 군사독재정권의 시작인 12.12사태에 즈음해 6회에 걸쳐 연재한다.(편집자)
남로당과 박정희 : 역사에 남은 수수께끼, 이제는 밝혀라
(1) 여순병란(반란) 사건수사에서 박정희의 남로당 군사책 들통 나다
박정희가 1961년 반공을 국시 제1호로해서 쿠데타를 한다고 정권탈취에 성공한 후에 그가 민정이양 약속을 무시하고 대통령을 하겠다고 소장에서 한꺼번에 대장으로 별을 덕지덕지 달고 난후에 “나처럼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랍니다”하고 떠벌렸을 적에는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그런 불행한 군인이 싫으면 대통령이 되겠다고 악을 쓰고 나서지 말았을 것이다. 국민 누구도 그를 잘 알지도 못했고 대통령하라고 한 적도 없다. 그런데 별은 그렇게 따기가 어렵다는데 한꺼번에 공로도 없이 감옥에 갈 군사반란의 주범이 스스로 달고 그것에도 모자라서 대통령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러니 쿠데타의 목적이 박정희의 출세였고, 그는 부귀영화와 헛된 명성에 사로잡혀 살아온 것이 분명한 것이다. 정치가나 지사의 첫 번째 조건이 출세와 돈과 인연을 끊는 것이라고 함은 초등학교 선생을 하였으니 그가 잘 알만한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 당시에 느닷없이 외국 시사주간지에 박정희의 공산당 전력이 터져 나왔다. 당시에 박정희 졸개들은 그 기사가 게재된 잡지를 몽땅 걷어서 씨를 말려 못 보게 했다.
그러나 당시 외국 공보원에 가면 그 잡지가 그대로 있어서 보려고 한 사람은 다들 보았을 것이다. 특히 대통령선거 유세에서 라이벌 후보인 전 대통령 윤보선 씨가 박정희 공산당 전력을 폭로한 것이다. 그런데 최고회의란 군정기관은 오히려 그러한 문제제기에 대해 매카시즘이라고 호령하고 위협했다.
1990년대 문화방송에서 이영신 각본으로 제3공화국이 방영되었었다. 실록으로 꾸민 것이어서 사건의 이면을 보는 것으로 인기 프로였다. 그 각본이 책으로 되어 나온 것이 이영신“대하정치실록 격동 30년”으로서, 그 제2부 - 제3공화국 (전편)2(고려원 1993년)의 문제부분을 49쪽 이하에서 인용해 본다.
1963년 대선당시 윤보선은 2월24일 전주유세에서 박정희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며 그의 남로당(공산당) 전력을 문제 삼았다.
“ ~ 박의장(박정희)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구정치인과 자기와 대결을 민족 이념을 망각한 가식의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강력한 민족이념을 바탕으로 한 자유민주주의사상의 대결이라고 했는데, 누가 민족주의자며 누가 비민족주의자라는 것과 누가 민주주의신봉자이며 누가 민주주의신봉자가 아니냐는 것, 그리고 누가 공산당이며 누가 공산당이 아닌가 하는 것은 각자의 경력을 캐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외다!”
결국 윤후보의 폭로에 대하여 최고회의라는 군정권력기구의 공보실장 이후락(후에 정보부장)은 ‘국가안보’를 해치는 발언으로 몰아세웠고, 최고위원이란 군장교인 홍성철 위원은 ‘매카시즘의 악랄한 수법’이라고 성명을 발표하며 법 조치를 취하겠다고 협박했다.
한편 박정희의 집 안방에서는 박정희의 아내가 남편의 침묵으로 고민하며 절간을 찾아가 기원하며 마음을 달랬다고 이 실록을 기록하고 있다(위에 이영신의 책 51쪽 참조)
박정희는 자신을 빨갱이 몰이인 매카시즘의 피해자인양 논쟁을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여 인심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리는데 성공했다. 박정희가 오히려 동정표를 모으는 결과가 되었다고 한다.
박정희가 남조선노동당 군사책인 것이 여순사건 수사에서 들통이 난 것은 사실이다.
여기서 만일 들통이 안 나고 그대로 은폐된 채 지나쳤으면 박정희는 어떤 일을 했을까? 그가 스스로 자진해서 사실을 밝히진 아니했었으니, 그 귀추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추측해 볼만한 것이기도 하다는 말에도 일리가 있다.
박정희는 자기가 남에게 전향을 강요하면서도 자신의 전력에 대한 해명과 사상문제에 대해선 한 번도 명쾌한 해명을 해 본적이 없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도 되고 그를 영웅으로 찬양하는 자유는 있으면서 멀쩡한 사람이 친일기득권 실세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면 빨갱이로 만들어 내는 세상이다. 무엇이 잘못되었을까?
(2) 박정희의 남조선노동당 입당경위에 대한 은폐
박정희가 남로당 당원으로서 군사부장(군사총책)이란 것은 여순사건 수사과정에서 드러나서 그가 남로당 프락치를 밀고 또는 제보하여 준 대가로 자신은 사형을 간신히 면하고 무기로 선고된 후에 형 집행을 면하고 불명예 제대하였다.
사형을 코앞에 두고 살아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불명예제대 후에 육군정보기관에 무급 문관(군무원)으로 근무하다가 1950년 6.25전쟁이 시작된 후에 소령계급을 가지고 복귀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박정희의 노동당입당에 누가 입당보증을 섰는지, 언제 무슨 동기로 친일파인 박정희가 공산당으로 목숨을 걸고 싸우기로 작정해서 육사생도대장의 요직으로까지 진출해 조직을 확장했는지, 포섭당한 인물이 누구이고 그것이 군에 준 영향이 어떠한 것이었는지 등 규명할 일이 많다.
여순사건에서 남로당 계열임이 폭로되어 처형된 군인장교들은 누구누구이고, 그에 따른 군대조직을 어떻게 개편하게 되었는지 소상하게 밝히는 일 자체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서 그가 쿠데타 후 활동할 당시에 전 남로당계 인물이 주변에 계속 인연을 두고 그의 파트너가 되어 온 것을 정리하는데 그친다.
(3)박정희 주변 남로당 출신 인물들
박정희의 형인 박상희는 남로당원으로 1946년 대구사태 당시에 미군정 경찰에게 사살 당했다. 바로 그 박상희는 김종필의 장인이다. 김종필이 박정희의 조카사위라고 함은 바로 이 점이다.
박상희의 단짝친구인 남로당원인 황태성은 박정희가 남로당 입당을 할 당시 입당 보증인이라고 한다. 남로당은 입당과 정식당원이 되는 절치와 수련과정이 복잡하고 어렵다.
입당보증인이 확실해서 심사를 통과해야만 후보당원이 된다. 일정기간 후보당원으로서 투쟁경력을 쌓아야 만이 정식당원이 된다. 그러한 심사관문도 문턱이 높고 고개가 많다. 그런데 박정희가 어떻게 그러한 고위직에 발탁될 정도로 인정받게 되었는지 아직 밝혀진 기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작년에 나온 정운현기자의 ‘실록 군인 박정희’에도 아주 조심스럽게 여순 사건에서 문제된 좌익(공산당) 경력문제를 당시에 보도된대로 자료를 꿰어 맞추고 있다.
황태성은 1961년 5.16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에 성공한 후에 북에서 밀파되었다. 그 이유는 박정희·김종필과 접선에 있다고 하는데, 여기서 서울신문에 황태성의 조카사위인 권상능의 말을 인용해 해설한 기사를 보자.
2001년 6월 1일자 대한매일(현 - 서울신문) 15면 기사를 보면 황태성의 조카사위로서 당시 황태성 사건에 연루돼 2년간 감옥살이를 한 권상능은 당시 발간된 월간‘민족21’과 인터뷰에서 황태성이 남파된 것은 박정희와 접촉이 목적이었으며 1961년 8월경 황태성은 박정희와 김종필 등과 접촉을 시도, 공식적인 만남은 불발인 채 1963년 처형됐다고 한다.
김형욱 들은 당시 미국정보기관이 황태성 사건에 대해 정보를 입수해 한국 측 정보관계자나 박정희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일설은 황태성이 사전 비밀조직 준비 중이던 민주공화당 조직 훈련을 지원했다고도 한다. 진실은 아직도 안개 속에 가려진 사실로 남아있다.
가장 문제가 된 인물은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창이고 하숙 친구인 일본규슈제대 출신인 엄민영과 관계다. 엄민영은 일제고문 합격자로 군수를 한 친일파인데 해방 후 남로당 당원이 되었다.
1950년 6.25 전쟁 직후엔 당시 북에서 남파된 역사학자 전석담 밑에서 서울지역 대학책의 중요 요직을 담당 활동하다가, 미군이 진격해 들어오자, 먼저 처자를 평양에 보내고 그 후에 월북하다가 동두천근처에서 미군포로가 되어 거제도에 수용되었다가 그 후 석방된 자이다.
엄민영이 왜 포로가 되었는가 하면 노동당원은 전시에 ‘무장 빨치산’으로 활동하기 때문에 무장한 부대원으로 월북하다가 미군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는 박정희 가 집권할 때에 내무장관과 주일 한국대사를 했고 박정희의 정치고문이었다. 그의 규슈제대 출신과 인연이 되어 박정희 주변에서 활약한 이는 공화당 의장 백남억이다.
백남억은 대구대학 교수로서 공화당에 가담하는 것으로 돼 있으나, 원래 그는 일제 때 조선총독부 철도국 직원이었다가 해방 후에 부산 철도국 운수과장으로서 총파업을 지도 선동한 주모자로 활약했다.
그로 말미암아 미군정의 수배인물로 돼 도망쳐서 잠적했다가 후에 대구대학교수가 된 인물이다(정영진, ‘폭풍의 세월 - 대구10-1사건을 일으킨 사람들과 그 이데올로기’(한길사,1990년 ,297쪽 참조). 그가 박정희의 공화당 간부가 되었다.
김형욱의 ‘회고록’을 보면 김성곤 공화당 재무위원은 남조선 노동당 경북도당 재무책이었다고 한다. 그는 박정희처럼 내무부 친안국 정보파일에 기록된 그의 남로당 참여기록을 말소하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실패했다고 한다.
이런 박정희 주변인물 중에서 박정희 재임 중 사고가 난 것은 엄민영이다. 그는 주일 대사시절에 조총련을 통해 재북 처자와 접선을 하려다 미국정보기관이 포착해 자살을 하려했고 일본 게이요대학 병원에서 사망했다. 문명자 기자는 박정희가 엄민영을 어떻게든 살려내라는 간곡한 부탁도 허사로 독극물 중독으로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다.
김성곤이 박정희가 의도한 삼선개헌에 반대, 배신했다고 해서 정보부에 끌려가 수염이 뜯기는 소동이 벌어진 것은 널리 알려진 소문으로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엄민영의 자살사연은 당시에 아무도 몰랐다고 한다. 거제도 포로수용소 출신은 교수를 비롯한 각계의 명사 중에도 있다. 그래도 그들이 박정희 밑에서 활약하며 전력 때문에 문제된 적은 없다. 그렇지 않고 박정희 반대편에 서는 사람은 생트집이 잡혀 좌경 용공으로 신세를 망쳤지만.
여기서 박정희의 쿠데타 이전(1961년)까지의 연보를 정리한다.
1947년 소위에서 대위로 승진 사관학교 중대장 근무
1948년 소령진급.10월 여순반란사건 발발,11월 남로당간부사실이 발각되었으나 수사협조(밀고)로 처형모면하고 석방.
그 후 6.25전쟁 전까지 육군정보국에 근무하면서 보도연맹원 처리안 기획.
이 사실은 미국정보공개에 의한 문서조사에서 드러났다. 월간 ‘말’2001년 5월호에 실린 이도영의 ‘제주도민 예비검속은 이승만 피신을 위한 정지작업’이란 글을 보면 박정희와 김종필은 전쟁 후에 벌어진 민간인 집단학살의 주역으로 그 육군본부정보국 작전 과장이었다(위 잡지 187쪽참조). 이 사실은 피살자 유족이기도 한 제주도 교사인 이도영의 미국에서 공개된 문서조사를 통해 밝혀졌다.
1950년 박정희 소령지위 회복. 중령진급. 김호남과 이혼하고 육영수와 결혼.
1953년 정전협정 체결 후 준장으로 진급.
1957년 제7사단장
1958년 소장진급
1960년 부산군수기지사령관. 2군 부사령관.
1960년 4-19혁명으로 전쟁전후의 민간인학살과 친일파죄과에 대한 조사 성토로 불안을 느낀 박정희 등 친일파의 박혁명 음모가 싹틈.
1961년 군사반란인 5-16 쿠데타를 일으킴
(이후의 연보는 대개 공지된 것이므로 생략함) (계속)
한상범 동국대 명예교수 지난 2002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으며 최종길 교수 살해사건과 비전향장기수 옥사 사건에 대한 의문사 인정을 비롯해 인권과 민주주의 신장, 과거청산에 기여해 왔다. 그는 1964년 한일협정반대교수단 서명을 시작으로 저술 등을 통해 과거청산 작업을 벌였다. 1991년에는 ‘한국 법 학계를 지배한 일본 법학의 유산’을 역사비평에 발표해 일제잔재 청산문제를 공식 제기했다.
쓴 책으로는 <사상을 벌주는 나라>, <인권-민중의 자유와 권리>, <화 있을진저 너희들 법률가여>, <금서 세상을 바꾼 > 을 비롯해 수십 권이 있으며 <일제잔재 청산의 법이론>으로 외솔상을 수상했고 <한국의 법문화와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로 현암법학저작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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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에 빨갱이 주장하는 사람들이 빨개이라 하는 일은 없을 듯한데??
어떤 미친쎄이가 이따위 글로 한국의 위대한 대통령을 폄하 하는가....아마도 박정희 전대통령을 극도로 싫어하는 북쪽 놈이거나, 일본의 조상놈 들인가 보지... 배 안곯고 먹고 살게 해준 대통령을 떠 받들지 못하더라도,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이따위 글을 만들어 올리지는 못할거다...쓰레기 통에 대갈박고 뒈질놈...
오호..그대는 빨갱이에 일본식민지 활동에 협조했던 분을 존경하는군..ㅎㅎ 그리고 논리적으로 보면 IMF를 불러온 영삼이는 경멸하고 증오해야 할 대상인 듯한데...^^
박정희는 친일 일본군 장교로 근무하다 남로당 입당한 사실이 있고 ( 추후 동료를 고발하고 빠져나왔슴) 그것이 두려워 4.19후에 목숨걸고 쿠테타 한 사실은 분명합니다. 산업화로 나라를 잘 살게 하긴 했지만 너무도 큰 국민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전력이 그렇다고 쳐도 그분이 집권하고 난후에는 반공이 제일의 핵심 사업이었고, 국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기를 위해 몸 바쳤어며,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깨끗한 정치를 했다. 당신이 말하는 그런 논리로 본다면, 민주주의를 하겠다며, 공산빨갱이들에게, 그저 허리 굽혀, 돈주고 찬양하는 그런 대통령이 더 나뿐, 성토 할 대상이 아니냐? 그리고 imf를 불러운 영삼이도 증오 해야하지만, 그걸해결한다고, 그걸이용해, 국토를 팔아먹고, 공장을 팔아먹고, 무조건 카드를 남발해 캐피탈업체 배불리고 (국가에서 인정해준 대형 사채업자)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그돈을 빼돌려, 북한 정권에 갇다 바친 개중이가 더 증오할 대상이지.
박정희 좀 들춰 내니까.. 열받는겨..? 반공이 핵심사업인 것은 뒤가 구려서이기도 하였지만 그걸 구실로 국민들을 압제하고 고문하고 죽이고 그래서 18년간 독재하려는 구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지..누가 반공을 뭐래.. 그러다 결국 부하 총맞아죽었지만..
시대에 따라 기회주의로 살다간 모습이 지금 그의 딸에서도 똑같이 나타나지..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입다물고 있다가 여론이 좀 그쪽으로 치우치면 그때서야 여론편에 한미디 던지는 그네공주.. 이런 기회주의적인 태도가 아버지의 피를 받았으니 어디 가겟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