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071123b디도서1장7절2
광주강의(07. 11. 23) 2번 녹취록 이름 : 서경수 2007-12-21 17:25:42 광주 강의(07. 11. 23) 31-2 두 번째 시간 시작합시다.
6절에 보면, 장로를 세우는데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그러니까 자식이 예수 안 믿으면 장로 되지 말라는 거지요.
“감독은 하나님의 청직이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사람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내가 당회장인데 내 마음대로 한다.’ 이런 인간들.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와락 갑자기 성질을 부려서 목사 성질 달랜다고 교인이 애를 먹는 그런 자를 세우지 말고. 교인들이 오히려 목사를 걱정해서 ‘목사 성내면 안 된다. 저 목사 성질 더럽다.’ 이런 식으로 거꾸로 돼서 교인들이 목사를 걱정해 주는 그런 교회가 되면 안 되고.
“술을 즐기지 아니하고” 술 먹고 싶어서 환장하는 사람. 그리고 “구타하지 아니하며” 성질나면 구타하지요.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사도행전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내가 은이나 금을 탐하지 아니하고’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미쁜 말씀” 믿음직한 것이죠.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런 분이 바로 우리 교회의 어르신이다. 머리 되신다는 거지요. C가 A를 만나는 거죠. 우리 안에 그런 어르신이 지금 활동하고 있고 작용하고 있다는 거지요.
그럼 지금 나오는 항목이 약 10개 되는지 모르겠는데, 1)책망할 것이 없고, 2)고집대로 안 하고, 3)분내지 아니하며, 4)술을 즐기지 않고, 5)구타하지 않고, 6)이를 탐하지 않고, 7)나그네를 대접하고, 8)근신하며, 9)의로우며, 10)거룩하며, 11)절제하며. 약 10개 정도 되는데, 그러면 이 10개 말고 다른 것은 해도 괜찮은가? 그런 문제가 있는데 여기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그 당시 그레데 사람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과 차이나는 사고방식을 교회가 가져야 교회가 그 시대에 뭔가 생명을 품고 있는 그런 집단이란 것이 드러나지요.
그러면 ‘목사님 10개만 지키고 딴 것은 내 마음대로 해도 되겠네요? 만화책도 보고 줄 담배 피워도 되겠네요?’ 이런 뜻이 아니고, 그 당시 교회라는 것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 달라요. 어쨌든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과는 무엇이 달라도 달라야 하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를 예로 들면 이렇습니다. 교회에서 사기 사건이 일어났어요. 교인으로 위장해서 교회에 와서 교인들 돈 뜯어내고 도망쳤단 말이지요. 그런 경우는 허다합니다. 큰 교회는 많아요. 작은 교회도 있고. 이런 경우가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 없는 자가 사기를 치는 사람이 있어요. 이럴 때 고린도교회는, ‘차라리 손해를 입더라도 세상 법정에 고소하지 마라.’는 쪽으로 처리를 했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있어요. 결혼을 해야 되는데 결혼을 아직 못하고 있으니까 고민이 되었는데,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결혼 안 하고 혼자 사는 것이 낫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겠거든 결혼해라. 하지만 욕망을 절제할 수 있거든 혼자 사는 것이 훨씬 낫다.’ 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을 법으로 만들면 안 됩니다. 방금 나온 이야기는 이런 것을 법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법이 아니라, 뭔가 천사처럼 생명이 왔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는 사람과는 뭔가 차별화 되어야 하지 않는가.’ 라는 것입니다.
이런 항목들을 여러 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데, 히브리서 11장을 봅시다. 7절에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방주를 짓지요. 그러니까 그 시대에 생명을 보여주는 것이 뭡니까? 방주 안에 들어가면 돼요. 쉽지요? 8-11절에 보면,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나오는데 그들이 보여줄 생명이 뭡니까? ‘그래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있을 곳이 아니야. 나그네야.’ 이것을 보여주면 되는 겁니다.
15절에 보면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예비 된 성이 있다는 것을 바라보고 사는 거예요. 이게 바로 아브라함 시대에 보여줄 일이었습니다.
그 뒤에 보면 여러 가지가 나오는데, 모세의 경우는 24절에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요새로 말하면 삼성그룹 아들이라는 자리를 거절하고, 25절에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렇게 살면 된다 이 말입니다.
이것을 저는 방향성이라고 합니다. ‘당신은 어디를 쳐다보며 삽니까?’ 지금 라이트클럽에서 술 마시면서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에게 ‘당신은 무엇을 바라보며 삽니까?’ ‘지금 조명을 바라봅니다.’ 이런 사람은 천장을 바라볼 뿐 아무것도 바라보는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은 술 먹고 집에 오면서도 밤하늘만 쳐다봅니다. 밤하늘 외에는 쳐다볼 것이 없어요.
그러나 성도는 방향성이 밤하늘을 뚫어야 해요. 하늘 너머에 천국이 있잖아요. 물론 친구한테 전할 말이 있어서 나이트클럽에 갈 수도 있어요. 가는 것은 좋은데, 나이트클럽에 있더라도 나이트클럽의 천장조명이 전부가 아니라 그것을 뚫을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돼요. 그것이 뭡니까? 그 천장 위에 뭐가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 거기에서 내 대신 돌아가신 예수님이 날 기다리고 있다.
성도는 어디에 가도 그곳을 쳐다볼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세상의 중심은 미국도 아니고 아프가니스탄도 아니고 영국도 아니에요. 세상의 중심은 내가 있는 현재 이 장소에요. 교회를 가느냐, 마느냐 그 문제에 있어서 ‘주일날 교회를 가야됩니까, 말아야 됩니까?’ 묻기 전에, 교회라는 것은 없어요. 내가 있는 그곳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성도가 예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이 교회입니다. 모일 때가 없으면 자기 자리가 주님께서 일하시는 중심지입니다. 그 순간 중심지가 되지요.
이 말은 예배당 건물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모였고, 누구를 위하여 모였는가가 중요하지 장소는 별 문제가 안 됩니다. 여기 디도서에서 예배 장소문제, 예배당 설계문제 거론하든가요? 그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의 미쁘신 복음의 말씀으로 같이 모이자. 우리는 특이한 사람이니까. 우리는 방향성이 이 세상을 뚫고 바라볼 수 있는 방향성이 있다. 눈에 보이는 세계를 뚫고 보이지 않는 세계에까지 시선이 가 있어야 그것이 바로 C가 쳐들어와서 A를 만난 사람입니다. 낙원에서 돌이 굴러와 내 몸에 덮친 사람.
그 다음에 히브리서 11장 29절에 보면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고” 보세요. 뭔가 특이하잖아요. 뭔가 특이하다고요. 사람들은 홍해를 건너왔다고 하면 전부 거짓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을 진실로 믿었고, 30절에 보면 “믿음으로 7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어졌으며” 이것도 특이하지 않습니까?
31절에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라합의 앞에는 항상 ‘기생’이란 말이 붙어요. 요즘 말로하면 ‘창녀 라합은 정탐군을 숨겨 줌으로 멸망할 자와 함께 멸망치 아니하고’ 구원 받았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흘러가는 모든 것을 완전히 뚫을 수 있는 그러한 더 긴 방향성, 긴 창으로 이 세상 뚫고 하늘까지 도달될 수 있는 창이 있어야 돼요. 그 창으로 말미암아 천국과 내통할 수 있는 그러한 모습들을 여기 디도서에서는 그 당시 거짓말쟁이 그레데 사람들과는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자유’라 하고, 야고보서에서는 ‘하늘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유라는 것은 이 세상 법칙에 놀아나지 않는 사람. 이 세상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는 사람.
그런데 여기 12절에 보니까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디도가 있던 그 교회 주변 분위기가 다 이런 거예요. 그래서 약간 장난기를 발동한다면, 예배당을 세울 때 유흥가 중심에 세워도 괜찮다고 봐요. 왜? 극히 대조가 되기 때문에. 교회에서는 ‘주(主)여!’ 하고 있는데, 술집에서는 ‘주(酒)여!’ 하고. 서로 극히 대비가 되게. 물론 유흥가에 예배당 세울 리가 없겠지요. 땅값이 너무 비싸니까.
지금도 대구 중심지 동성로에 보면 옛날 세웠던 자그마한 교회들이 마치 문화재처럼 군데군데 있어요.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이것을 좀 설명 드리겠습니다.
왜 엄마들이 학원 좋은 데를 보내려고 하는가 하면, 선생님 입장에서 학생이 30명이 넘는데 어떤 특정한 학생에게만 신경 쓸 수 없어요. 학습 수준을 중간쯤에 맞춰서 진도를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학군이 좋은 곳에 가면 분위기 자체가 공부하는 분위기가 되어서 비록 내 아들, 딸이 공부 못해도 분위기에 따라서 공부 안하고는 못 베기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성적이 향상되는데, 만약에 학군이 나쁘면 학습 분위기도 엉망이고 선생님은 아이들 수준에 맞춰 가르치니까 전반적으로 낮은 수준으로 가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공부 잘하는 아이들도 분위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고, 열심히 안 해도 다른 애들보다 성적이 좋기 때문에 자기는 잘하는 줄 알고, 또 열심히 안 하고 노는 분위기에 편승해서 같이 놀게 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사람이 아무리 성도라고 우겨도, C를 만나서 A가 되고 백날 해도, 이 분위기가 세상에서 배만 채우고 거짓말하고 짐승 같은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이것을 어찌할 수 없이 물들게 마련입니다.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강력하게 교회 감독부터 모든 교인들에게 이것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감독자는 이러이러해야 된다.’ 이 말은, 감독자 목사보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고, ‘목사님이 이러해야 한다는 말은 결국 모든 교인들도 그래야 마땅합니다.’ 하는 이야기를 목사 한 사람을 모델 삼아서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목사 당신이나 그렇게 살아라. 나는 안 한다.’ 이것을 용납하는 구절이 아닙니다. 13절에 보면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여기에서 꾸짖는다는 말은, 참 어려워요. 누가 누구를 꾸짖으려면 본인은 그 부류에 안 묻어야 꾸짖을 수 있습니다. ‘뭐 묻은 개가 뭐 묻은 개 나무란다.’고 똑같이 묻어놓고 남에게 이야기 할 수 없단 말이죠. 자기는 전혀 그렇지 않아야, 그러니까 이회창 후보자가 전혀 돈도 모르고 그렇게 될 때 ‘이명박은 돈만 아는 놈’이라고 꾸짖을 수 있는 것이지, 자기도 돈 밝히다가 쫓겨났는데 상대를 욕하게 되면 꾸짖음에 의미가 없단 말입니다.
결국 교회로 하여금 세상을 꾸짖으란 말은 무슨 뜻입니까? 교회 너 만큼은 세상의 저런 물에 물들지 말아야 바로 특이한 집단으로서 계속 지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꾸짖으라.’ 이 말은 ‘꾸짖는 네가 그런 짓 하겠나.’ 라는 것입니다. 남을 꾸짖으면서.
무리 중 누구 한 사람이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가만 두지를 않아요. 같이 휩쓸려야 서로의 나쁜 짓이 안 드러나요. 그래야 자기들 행동이 정당화 되고. 세상이 그렇습니다. 세상은 삼투압 작용이 있어서 저쪽의 수압이 밀도가 높으면 밀도 높은 곳에서 밀도 낮은 곳으로 밀려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감당 못합니다. 저항이 안 돼요. 이건 저항이 안 돼요. 그래서 우리는 악한 세대며,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생명으로 하여금, 그리니까 이렇게 나쁜 짓 할 수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마누라 덜 구타하고, 아직 술 안 좋아하는 것 보니까 하나님께서 아직 우리를 버리지 않고 있는 증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15절에 보면,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여기에서 ‘깨끗하다’는 말은 상대적인 것이죠. 무엇에 비해서 깨끗하다? 하나님을 모르는 더러운 그레데 불신자 사람들보다는 우리가 차이나는 그런 깨끗함이 있어야 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이번에 엮은 책 이름에 뭐에요? [은혜와 양심]인데, 거기에 양심이란 것은 사실은 양심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텅 비어있는 것입니다. 양심이란 테두리만 있지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양심에는 뭐가 들어오느냐? 자기를 의롭다고 인정해줄 요소만 골라 다 들어옵니다. 왜냐하면 양심이란 것은 선입관이 뭡니까? 착해야 된다는 거지요.
양심대로 살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뭐냐? 조폭이에요. 남의 돈 빼앗아서 ‘야, 양심껏 나눠라!’ 그러니까 이것은 양심이라는 것은 좋은 것은 다 골라놓고 좋아하는 거예요.
여자들은 명품 가방을 그렇게 좋아 한답니다. 남자들은 차를 좋아하고. 그래서 어떤 여자들은 아르바이트 해서 명품 가방하나 사서 사는 보람을 느껴는 여자들도 있는 모양이에요. 그만큼 명품을 좋아해요. 이런 명품 가방 10개 있는 사람 앞에 누가 양심적이냐? 1개 밖에 없는 사람은 양심대로 산 것입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상대보다 더 착한 것을 골라 골라 골라 몽땅 다 집어넣은 그 박스. 그 상자가 양심이라. 그래서 이 양심은 유동적이지요. 항상 출렁거려서 뛰다보면 다 흘러버려요. 회사에서 멀쩡한 과장, 부장님이 1차 회식할 때도 멀쩡했는데 2차 노래방에서부터 망가지기 시작해서 3차에 가면 개판 됩니다.
노래방에서 가서 넥타이를 풀어서 머리띠를 하고, 텐버린 친다고 쟁반 들고 설치고, 술이 취해서 코는 빨갛게 되어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비틀거리면서 혼자 마이크 잡고 2시간 다 보내고 할 때, ‘저게 인간이야, 괴물이야?’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회사에서 보면 멀쩡하거든요.
결국 양심은 누구 중심으로 돌아갑니까? 내 중심으로 돌아가요. 그래서 양심은 텅텅 비어있는 겁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믿을 것이 양심밖에 없어서 마지막 최후의 보루가 ‘그래도 나는 착해, 착해, 착해 --’ 마지막까지 버티는 것이 뭐냐? 마지막 자기 종교가 뭐냐? 양심이 자기 종교가 돼요.
양심이 자기 종교인데, 이 양심의 종교는 그냥 소원대로 비는, 양심을 근거로 해서 ‘이렇게 착한데 내 소원 안 들어줍니까?’ 물이 깨끗하면 소원 들어줍니까? 옛날 할머니들은 깨끗한 물 떠놓고 기도했어요. 정화수 떠놓고 한복 갈아입고 기도했지요. 이것이 근대에 와서 좀 발달을 하면 목욕제게 하고 기도하지요.
우리교회 바로 옆에 보면 산이 있는데, 그곳 팔공산에 갓바위가 있어요. 수능시험 때만 되면 우리교회 (예배 시간)지각사태가 벌어집니다. 일요일에 차가 얼마나 막히는지 전국에서 온 차들이 쭉 갓바위로 올라갑니다. 그 바위 앞에 엎드려 빌고, 어떤 사람은 아예 100일 동안 합숙을 하면서 빌어요. 밤낮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어요. 이것이 그 사람의 양심이고, 그 사람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 주일 설교에서, “참 부처도 뿔따구 나겠다. 수능시험 때는 그렇게 몰려오다가 시험 끝나면 아무도 안 찾고.” 내가 부처 같으면 화나겠어요. 도대체 부처를 뭐로 봅니까? 수능 점수 올리는 기계로 보잖아요. 부처를. 부처 믿는 사람들이 부처를 그 따위로 본다고요. 수능시험이라고 와 올라오고, 수능 끝나면 조용하고.
16절에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이것은, 벌써 물들었다. 그레데 사람처럼 세상 물에 푹 젖어버렸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2장 1절에 보면,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2장에서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이 텅 빈 양심에 뭐가 들어가야 돼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누가복음 2장 34절을 보겠습니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누가? 이 아이가. 그러니까 아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칼을 쥐고 사람의 소위 그 양심이라는 마음을 푹푹 찔러대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라면, 정말 그리스도 몸의 지체라면 양심 속에 세속에 물들어 그것만 출렁이면 안 되고, 뭐가 들어와야 된다? 바른 교훈이 들어와야 해요. 바른 교훈은 결국 뭐냐? 우리를 찌릅니다. 우리를 찔러요. 찌르는 이유가 우리에게는 정당화 될 수 있는 행동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한복음 12장 25절. 이런 말씀이 나올 때, “처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이런 말이 나올 때, “너희가 어린 아이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 이런 말씀 나올 때, 이 말씀 하나하나가 우리를 찔러대는 거예요.
산상설교 알지요. 산상설교가 방향성이 있습니다. 두 가지 방향성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해석하는 율법관.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법으로 생각하고 ‘내가 법을 지킨다.’ 방향이 이렇게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법이란, 내가 법이 있고 내가 그 법을 내 쪽에서 다가가서 지킨다. 이것이 아니고, 법의 완성태가 있어요. 이 완성태가 ‘너는 가만히 있어라. 완성한 법이 너를 찌르리라.’ 이것이 산상설교에요. 방향이 달라요.
“너희 의가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으니까, 바리새인들은 자꾸 법을 지키려고 해요. 디도서를 공부하고 난 후에, “나는 이제 분내지 않아야지. 이제는 내 마누라 안 때려야지. 이제는 술 안 먹어야지.” 자꾸 법을 지키려 해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에요. ‘나그네를 대접해야지. 더러운 이득을 취하지 않아야지.’ 자꾸 지키려고 하는데, 이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모든 율법의 완성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우리를 찌릅니다. 찔러대면 그 말씀의 완성이 뭡니까? ‘사랑’입니다.
사랑이 찔러대면 결국 우리는 나만 사랑했지 남을 나만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각 당합니다. 그리고 발각 당해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발각 당했다고 해서 그 다음부터 남을 사랑할 수 있는 입장이 안 됩니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기라는 법 테두리를 못 벗어나요. 남을 사랑한다는 것은 순간이고 결국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남 사랑한다고 해봐야, 여러분 산상설교에 무슨 말씀이 있습니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어느 인간이 이 구절을 실천합니까? 저는 장담합니다. 아무도 이런 인간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너의 필요한 것은 주께서 아신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 기도하지 말라.”고 할 때, 기도할 때 자기 필요한 것을 안 구하는 기도. 저는 아무도 없다고 봅니다. 그리고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발라라.” 금식 하면서 금식 안 한 채 하는 사람 저는 아무도 없다고 봅니다. 인간으로서는 있을 수 없어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같은 손인데. 이건 속일 수가 없어요. 그리고 기도할 때 필요한 것을 구하지 그것 안 구하면 기도할 게 뭐가 있습니까? 모든 기도가 다 필요해서 기도하는 것이지 필요 없는데 왜 기도합니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그런 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도대체 말이 됩니까? 자기 눈의 들보를 빼라고요. 사람은 자기 눈에 들보가 있는지를 몰라요. 티가 들었는지 들보가 들었는지 몰라요. 순수하게 자아를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산상설교는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지킨다는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인간도 지켜내는 인간 있다, 없다?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이게 바른 교훈이에요. 이것이 디도서 3장에 나옵니다. 5절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이것을 주께서 압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할 때 우리 행위의 완전함, 발전 가능성 이런 것을 기대하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아예 우리는 구원 받을 때부터 우리의 행위와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면 그길로 우리는 불쌍히 여김 받아서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식구입니다.
식구인데 식구 안에 뭐가 들어왔다고 했습니까? A가 C로 들어가는데, C로 나가는 도중에 뭐가 와요? B가 들어오지요. 그런데 B는 어디서 온 거예요? C에서. 천국에서 온 B라는 분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를 어떻게 한다? 찔러대는 겁니다. 찔러대면 비로소 우리는 ‘아, 구타하는 것이 나쁜 것이구나! 술 마시는 것이 나쁜 것이구나! 고집대로 하는 것이 나쁜 것이구나! 더러운 이득을 취하는 것이, 탐내는 것이 나쁜 짓이구나!’ 라는 것을 알아요.
‘나쁜 짓을 앞으로 안 하겠습니다.’ 라는 것이 아니라, 나쁜 짓인 것을 아는 겁니다. 나쁜 짓을 안 하는 것이 아니고 나쁜 짓인 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나쁜 짓을 아는 상태에서 계속 나쁜 짓하면 되겠네.’ 라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런데 그 말이 어패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본인 스스로 그것을 나쁘다고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하는 행위는 모두 안 나쁜 거예요. 이런 말 하면, 어떤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길에서 노상방뇨 하면 그것은 나쁜 짓인 줄 압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 나쁜 짓인 줄 모른다고 합니까?” 하는데,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나쁜 짓인 줄 알고 노상방뇨 하잖아요. 그것은 나쁘긴 나쁘지만 아주 나쁜 것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노상방뇨를 하는 겁니다. 아주 나쁜 것은 아니다. 음주운전이 나쁜 짓이지만 면허정지 될 정도로 나쁜 것은 아니다. 이런 생각하고 음주운전 하는 겁니다. 아주 나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거지요.
그런데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노상방뇨를 하고 있는데, 언제 자기가 노상방뇨가 나쁜 줄 알았는가 하면, 자기가 오줌 누는 그 자리에 어떤 아저씨가 누워있었다. 그 사람 얼굴이 오줌이 다 묻었어요. 그때 주춤하면서 보니까 그 사람이 자기 아버지라. 이럴 경우에 자기가 진짜 나쁜 짓을 한 것을 아는 거예요.
진짜 나쁜 짓을 한 사람은 그 짓을 한 그 순간만큼은 앞으로도 이런 나쁜 짓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안 나게 됩니다. “주여, 이것이 나쁜 짓이지만, 나쁜 줄 알지만 다음에 또 하게 됩니다.” 라는 생각이 그 순간은 안 난다니까요. 아, 요 말이 참 미묘하다. 지금 제가 ‘그런 나쁜 짓을 되풀이 안 합니다.’ 라는 것이 아니고, 진짜 나쁜 짓을 아는 것 같으면 ‘앞으로 나쁜 짓 또 해야지. 또 해도 천당 가는데.’ 라는 그런 생각 자체가 전혀 안 나게 된다니까요.
그런 생각이 안 나는 사람에게 ‘다음에 또 나쁜 짓 할 거니?’ 라고 묻는다는 자체가 이것은 의미 없는 일입니다. 애가 고추장을 먹었어요. 고추장이 굉장해 맵잖아요. 울었어요. 울면서 ‘다시는 고추장을 안 먹어야지. 하지만 언젠가는 또 먹게 될 거야.’ 라는 생각을 그 순간만큼은 절대 안하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에게 ‘너, 지금 고추장이 맵다고 다시는 안 먹겠다고 하지만 다음에 또 먹겠다고 할 걸.’ 라고 묻는 자체가 의미가 없다 이 말입니다.
제가 개고기를 안 좋아해요. 개고기 먹는 시도를 한 다섯 번 정도 시도해 봤습니다. 먹으면 죽는 것은 아니잖아요. 또 몸에도 좋다고 하고. 그래서 제 아내가 “당신은 몸에 좋다는 것은 일체 안 먹는다.”고 하는데, 개고기를 억지로 먹어요. 억지로 먹지만 ‘다음에 또 개고기 먹어야지.’ 라는 생각은 두 번 다시 안 들어요. 그러면 다음에 또 안 먹습니까? 또 여섯 번째 먹게 될 날이 올 거예요. 오지만 ‘다음에 일곱 번째 또 먹어야지’ 라는 생각은 두 번 다시 안 든다니까. 왜? 그것이 내게는 안 맞아요.
이처럼 성경에서 바른 교훈이 들어오게 되면, 다음에 바른 교훈이 들어와도 ‘이제 바른 교훈이 들어왔으니까 이 교훈대로 완벽하게 행동해도 천당 간다.’ 이런 생각도 안 들고, 다만 그 순간 드는 생각은 ‘야, 이런 교훈에 비춰보니까 내가 나쁜 사람 맞구나!’ 그러니까 구원은 내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나같이 못된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분 때문에 구원 받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 C가 A를 찾아온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에게 찾아오면 그런 현상이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뭐냐 하면, 내가 나를 잊어버리는 거예요. 나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강의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나는 나에 대해서 이미 죽은 자다.’ 죽은 자를 왜 생각합니까? 이미 죽은 자인데. 이게 성령이 올 때만 느끼는데, 성령이 올 때는 나에 대해서 생각 안 해요. 그런데 이 사회의 모든 불행과 걱정, 근심은 내가 나를 생각할 때 등달아 걱정, 근심이 밀려옵니다. 매사가 그래요.
내 생각 하면 뭘 해도 걱정, 근심이 따라오고, 내 생각 안 하면 걱정, 근심도 사라져요. 여러분들이 잠을 자면서 깊이 잠들었을 때 걱정되든가요? 잠들면 다 잊어버립니다. 깨면 또 걱정되지요.
‘교회 갈까, 말까?’ 이것도 마찬가지에요. ‘가는 것이 옳습니까, 나쁩니까?’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고 왜 나를 생각하느냔 말이지요. 제가 강의 처음에 뭐라고 했습니까? ‘현재 내가 있는 것이 주의 뜻이면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한다.’ 이러면 될 터인데, 자꾸 뭘 생각합니까? 나를 생각하는 거예요. 나를 생각하니까 그 다음부터 ‘내가 잘 했나, 못했나?’
하나님의 바른 교훈이 들어오면, 나 자신을 생각하는 자체가 바로 눈물의 씨앗이다. 나 자신을 생각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고,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한 세대에 속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비행기 안에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서 내 생각 때문에 고민 안 해도 이미 비행기 안에 주님의 사랑이 둘러싸고 있는데 구태여 내 생각 할 필요 없어요.
‘내 생각 하지 마라.’ 하니까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말란 말입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어요. 여러분, 어떤 일에 몰두가 되면 나를 잊어버립니다. 아주머니들이 가내공업 하는 직장에 가보면 항상 라디오를 켜 놓아요. 그러면 그 순간에 아주머니들이 ‘내가 이일하면 얼마나 벌지?’ 이런 생각 잊어버려요. 라디오에서 나오는 사연들이 재미있고 우껴서 자기 힘든 것을 잊어버려요.
어떤 일에 정신을 몰두하게 되면 자기를 잊어버립니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공부에 몰두하면 성적 오를까 하는 걱정이 안 되는데, 공부하면서도 공부에 몰두 안하고 자기한테 몰두하니까 ‘내일 시험 잘 치겠나?’ 자꾸 걱정하다보니까 성적이 안 오르는 거예요. 성적을 걱정하니까 성적이 안 오르는 거예요. 어디에 몰두해야 됩니까? 공부에 몰두하게 되면 ‘이것을 못 풀면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 안 나는데, 공부에 몰두 안하고 ‘시험 못 치면 또 꾸중 듣는데.’ 이렇게 자기 생각에 빠지면 공부에 집중이 안 되니까 성적이 떨어지지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나는 공부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이 없다.’고 하는데, 왜 그 사람은 그렇게 공부하는 것이 제일 쉬운 일인가 하면, 공부하는 순간에 자아를 잃어버리기 때문에 공부가 제일 쉬운 거예요. 그런데 공부 외에 다른 것을 하면 자꾸 자기가 생각나서 그게 힘든 거예요. 공부하지 말고 고스톱 치라고 하면 그게 더 힘든 거예요. 왜? ‘이것을 낼까, 저것을 낼까?’ 힘이 드는데, 공부는 공부 자체에 빠져버리니까 자기 자신을 잊어버려 자기가 힘든 줄 모르지요. 내가 없는데 내가 힘들 리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신앙이란 뭔가? 우리를 힘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날마다 주께서 우리를 죽은 자로 만들지요. ‘내(주님)가 산 자니까 내가 죽은 너를 다룰 게. 내가 너를 인도할 게. 오늘도 일거리 시킬 게. 그 일에 몰두해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젊은 사람들은 일이 힘들다고 괴로워하고, 노인들은 할 일이 없다고 괴로워해요. 젊은 사람들은 밤낮 잔업하며 힘들어 죽겠다고 하는데, 노인들은 오늘도 무슨 일 하며 시간을 보낼지 그것이 걱정이에요. 양쪽 다 문제점이 뭡니까? 바른 교훈에 몰두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 몰두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럼, 바른 교훈이 뭐냐? 3장 5절입니다. ‘우리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했다.’ 그 바른 교훈이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랑에 푹 빠지세요. 사랑에 도취되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구원을 받았어요. 용서를 받았습니다. 아무 한 것도 없는데. 내가 흘려야 할 피를 그분이 다 흘리고, 내가 당할 저주를 그분이 대신 다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저주 안 받습니다. 바른 교훈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감독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1장 7절처럼 고집대로 할 필요도 없고, 급히 분내지 않아도 되지요, 미쳤다고 술 먹습니까. 구타는 무엇 때문에 해요? 더러운 이를 탐할 이유도 없지요. 이것이 이런 법을 지키려는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이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고 죽은 자로 간주하니까 바른 교훈이 들어오니까 저절로 이런 성령의 열매가 피어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대표자로서 장로나 감독이 될 그러한 자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것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가? 자기는 아내를 구타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긴 결혼생활에서 한두 번씩은 아내를 때려요. 왜냐하면 이것이 계획적으로 때리는 것이 아니고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일이 발생합니다. 여자가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따따따 말을 막 쏟아놓거든요. 그러면 그것을 막기 위해서 자기도 모르는 순간 손이 올라갑니다. 이렇게 되면 두 달 동안 말도 안하고 밥도 안 주고 이런 엄청난 사태가 발생하지요. 이것을 ‘말벌 집을 건드렸다’고 합니다. 말벌 집을 건드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순간적으로 화가 나니까 건드려버려요.
그래서 구타하지 않는다는 말이 절대로 ‘때리면 지옥 간다’는 말이 아니고, 물론 부인도 나빠요. 왜냐하면 성자같은 남편이 자기는 바른 교훈을 받아서 지금 자아를 생각 안 하고 있는데, 집에 들어오니까 아내는 남편이 자아가 있다는 전제하에 따따따 쏘아대거든요. ‘다른 남편은 어떤데 당신은 뭐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 하니까, 분명히 집에 들어올 때는 ‘주여, 성령의 긍휼하심을 감사합니다.’ 하고 왔는데, 아내는 나에게 이야기하거든. 분명히 자아가 없어졌는데 공격을 받아야 되기 때문에 자아를 임시적으로 만들어 내요. 만들었는데 너무 심하게 당하니까 도분(화)이 나는 거라. 에라이 시. 하면서 손이 올라가니까 두 달간 손해가 막심해요. 그 다음부터는 이 자아는 한 방 때려놓고 열 방 이상 손해를 봅니다. ‘저 인간이 시댁집의 버릇을 그대로 답습했다. 쌍놈 집안 내력이다.’ 하면서 족보까지 다 들먹이고.
지금까지 한 번도 아내를 때린 적이 없는 사람도 그것을 장담하면 안 됩니다.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이 큰 문제는 아니에요. 그렇다고 이것을 즐기면 안 되지만.
2장 2-5절을 봅시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을 보고 여러분 중에 성경공부 참석 안 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이 말씀은 그 당시 교회 밖 세상 분위기가 이런 분위기로 대세를 이뤘어요. 그러니까 성도는 달라도 뭔가 달라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쪽은 자아가 확고히 갖춰진, 오직 사나 죽으나 자기밖에 모르는 그런 인간들, 하나님이고 예수고 그런 것은 관심 없고 오직 자기만 잘되면 최고라는 그런 것이 진리인 것처럼 통용되는 그런 세계에 있고,
우리는 바른 교훈 때문에 매일 주님께 찔려서 자아를 잊어버리고 사는 입장에서, 적어도 저쪽에 있는 모습이 판박이처럼 나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라. 하지 말라.’는 것은 뭐냐? 이미 저쪽에서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들은 저런 짓을 보편적으로 행하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 2절 “늙은 남자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이 모든 것은 바로 우리 행함대로 구원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구원 받았다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이런 열매들이 나올 수밖에 없지요.
3절에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여자들이 말이 많아요. 그래서 비밀이라고 말한 이야기를 ‘비밀이다’는 말까지 해가면서 다 이야기해요. 남성들은 요점만 이야기하는데, 여성들은 요점에 접근하는 길이 너무 많아요. 너무 먼 길을 돌아서 요점에 접근해 가요. 뭔데? 하고 물으면 아직 본론은 이야기 안 했어요. 이것은 구조상 여성은 하루에 일만 마디를 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생리학에서 이야기합니다.
여자는 말을 많이 해야 자기 몸의 생리적 균형을 맞출 수 있답니다. 그러니 말을 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여자가 원하는 것은 남편도 아니고 자식도 아니고 자기 말을 들어줄 사람을 원해요. 자기가 1시간 동안 이야기해도 잘 들어주는 사람.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모이면 술을 마시게 되고, 이것이 교회 밖의 분위기입니다.
현재 직장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살림 사는 40대 중반이나 50대 주부들의 하루 스케줄이 뭐냐 하면, 아침에 에어로빅 하고, 찜질방 가서 몸 씻고, 그 다음에 사람들 만나 같이 점심 먹고, 노래방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가서 장보고 집에 옵니다. 집에 와서는 연속극 (아현동 마님, 왕의 남자 등등)보고, 밤 11시에 잡니다.
이것이 바로 저쪽 바른 교훈이 없는 여자들의 일과입니다. 성도는 이런 것과는 뭔가 방향이 달라야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다음에, 4절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 시대에는 여자가 직장생활 하는 그런 자본주의 사회가 아니잖아요. 그만큼 여자는 시간이 많이 남아돌고 남자는 시간이 촉박한 시기에, 여자들이 시간을 너무 낭비하지 말고 알뜰하고 집안일에 충실해라. 이렇게 해서 안 믿는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란 말입니다.
6절에 보면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젊은 남자들은 바로 사회생활 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도 불신자들과는 뭔가 다른 방향성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단 말이지요. 결국 이건 뭐냐? 거룩한 - 거룩이란 말은 구별된, 뭔가 달라도 다른 그런 사람으로의 자긍심을 가져 달라. 존재 바탕이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하나의 전도가 된다 이 말입니다.
9절에 보면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옛날 이 당시에는 종이 시민보다 더 많았답니다. 종이 더 많은 거예요. 마치 내가 어릴 때 도시에 사는 사람은 얼마 안 되고, 시골 사는 사람이 많을 때 촌에서 일가친척들이 와 몰려오면 그 집안의 원 주인은 몇 명 안 되는데 촌에서 올라온 일가친척들이 많은 그런 셈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와서 옛날 촌사람들이 애들 자녀교육을 제대로 시켰습니까? 초등학교도 제대로 안 보냈는데. 그런 애들이 좀 사는 집에 가서 식모도 하고, 살림도 살아주고, 애도 봐주고 그게 그 당시 하나의 종이 되는 겁니다.
종이라고 해서 생면부지의 사람을 종으로 삼는 것이 아니고 먼 일가친척 가난한 사람을 불러다가 종으로 삼고 그렇게 하나의 집단을 이룬 거예요. 그런 종으로써 나중에 좀 재주 있다 싶으면 자기 가게에 회개도 맡기고, 손님 접대도 맡기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가업을 잇게도 하고 그런 식으로 했습니다.
그럴 때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순종하고, 돈 떼어 먹지 말고,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라’고 했지요. 이 세상의 부귀영화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 세상에 있는 소소한 이익이 더 이상 나의 유혹거리가 되지 말라 이 말입니다.
제가 수요일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복음에 붙잡힌 사람들은 더 이상 세상 것이 부러워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날 용서했다는 것, 내 모든 죄를 용서했다는 거기에 감격하면 세상이 나에게 억만금을 주고, 세상이 나에게 어떤 좋은 것을 준다 할지라도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어야 돼요. 세상에 있는 것들보다 더 좋은 것은 원초적으로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 이것이 더 좋지, 세상의 물질로 입고 먹고 마시고 해봐야 이것은 죄 용서 받은 것보다 못한 거예요. 교회가 이런 것을 이야기해 줘야 됩니다.
11절 봅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 여기에 나오네요. ‘세상 정욕.’ 세상 정욕은 이게 하나의 힘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어요. 세상 정욕이라는 것은 분위기이기 때문에, 대세기 때문에 정욕이라는 것은 우리의 윤리 도덕으로 카바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속에 끓어오르는 욕정을 누가 말립니까. 말릴 수가 없어요. 이것을 절제할 수는 있어도 아예 안 올라오게 할 수는 없다 이 말입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말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12살 나이 많은 여자와 결혼하면 어떤데? 사랑하는데 뭐. 사랑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정욕이란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욕만으로 산다는 것은 문제가 큽니다. 이것은 감각적이죠. 이것은 방향도 없고 그냥 쾌락적인 것에 빠져 산다는 것은 자아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특히 20대 젊을 때 그런 경향이 많아요. 먹고 노는 일에 탐닉하다가 30대가 되어서 한 게 아무것도 없고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사람이란 게 참 이상해서 20대에 신나게 놀면 30대에 후회하지만, 20대에 안 논 사람도 30대에 가면 후회합니다. 왜? 20대에 못 놀았다고. 이게 인간입니다. 희한해요. ‘아이고, 미쳤다고 시집 일찍 가서 미팅도 한 번 못해보고 --’ 20대 초반에 결혼해서 자기애밖에 모르고, 뱃살이 나와서 다른 사람이 보면 임신한 줄 알고.
이런 식으로, 못 놀았다고 후회하고, 잘 놀았는데 남는 것 없다고 후회하고. 이게 세상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어서 그래요. 하나님의 사랑,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13절에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게 뭡니까? 방향성 아닙니까. 이 앞에 있는 모든 교훈들은, 이렇게 반듯하게 살면 구원 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방향이 이 어두운 세상을 뚫고 나간 사람 같으면 세상 사람들이 좋다고 뛰놀며 까부는 그것, 술 먹고 좋다고 하는 것이 하나도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것들이 시시하게 보일 수밖에 없어요.
이처럼 나이 많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세상 것들은 다 시시한 것들이고 잠시 있다 사라져 버릴 가치 없는 것이란 사실을 가르치고 훈계하라는 것입니다. ‘나도 해 봤는데 그런 것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마음을 낮추는 것이 중요하지 세상 것들을 성취했다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14절에 보면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여기에서 구속이란 말은, 대신 죽으신 것을 말합니다.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구속이란 말이 성경에 많이 나오는데 구속이 무엇인가? 대신 값을 치른 것을 구속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대속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대신 구속이니까 대신을 떼버리면 ‘값을 치른다.’가 구속입니다.
지금 내가 극장에 표를 사서 들어가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그냥 들어오세요.’ ‘왜요?’ ‘내가 값을 미리 치렀습니다.’ 그러면 ‘고맙습니다.’ 하고 들어가야지요. 천국도 이와 똑같은 식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내 죄 값을 내가 받으려고 섰는데, 저 뒤에서 ‘그냥 들어와라.’ 하는 거예요. ‘누구신데요?’ ‘나는 널 구속한 예수다.’
예수님 빽으로 우리는 그냥 천국에 가는 겁니다. 천국 문은 우리가 못 엽니다. 여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예수님이 열어줍니다. 그것을 가지고 ‘구원 창구의 일원화’라고 합니다. 구원의 창구를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신이 있다고 하면서 제각기 신에게 나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아요. 각자가 신에게 나아가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어디다 모읍니까? 예수 그리스도한테 묶인 자만, 예수님께 묶인 자의 명단을 가지고 예수님이 혼자 하나님을 만나야 예수님께 묶인 자가 구원 받습니다. 다른 이름으로 구원 받을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구원 창구를 일원화 했습니다. 이게 바로 복음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구약의 언약은 각자가 그 법을 지켜야 하는 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지키지 못했어요. 그래서 새 언약을 주셨는데, 새 언약은 인간이 설 자리에 예수님이 혼자 서서 혼자 합의를 따 냈습니다. 모든 사람 다 제쳐놓고 예수님하고 하나님 둘이서 합의를 봤어요. 그것이 새 언약입니다.
예수님께서 살 찢고 피를 흘리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원하는 자를 반드시 구원한다는 조건이 그 안에 들어 있어요. 이것이 ‘값’이거든요. 예수님이 자기 죄를 위해 치를 값은 없어요. 그러면 예수님이 피를 흘린 것은 누구의 값이냐 하면, 예수 믿는 사람이 저주의 피를 흘려야 될 그 피를 대신 자신의 피로 그 값을 치르고 우리를 공짜로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창구는 일원화, 하나로 묶어졌어요. 예수님 아니면 하나님께로 갈 수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왜 그렇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아버지와 예수님이 이미 합의를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구원되는 방법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구원 못 받습니다. 그래서 제가 전에 있던 교회에서 항상 물었어요. “할머니! 예수님이 왜 피 흘렸습니까?” “나는 피 안 흘렸어요.” “할머니가 피를 흘렸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왜 피를 흘렸는데요?” “몰라. 늙어서 그런지 들어도 다 잊어버려.” 들어도 다 잊어버릴 수밖에 없지요. 왜? 눈에 보이는 세상이 더 좋으니까.
교회 나와도 방향성은 어디입니까? 교회 나와도 교회 바깥에 있는 자기 손자 건강하고 자식들 잘되고, 방향성을 세상에 두고 있으니까 목사가 복음을 이야기해도 방향성이 저쪽에 있으니까 그것하고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차라리 남편죽고 자식죽고 집안이 폭삭 망해서 “주여, 나 어쩌지요?” 이렇게 와야 “네 죄 값을 이미 치렀다.”는 그 소리가, 방향성이 하늘로 향하는 방향성이 될 텐데, 자기네들 아이 걱정이나 하고 있으니까 “아이고, 목사님. 내가 들을 때는 알겠는데 듣고 나서는 다 잊어버립니다.”
“그 피는 할머니의 죄를 위해서 값을 치루기 위해 흘린 피입니다.” “내가 뭐 죄 지은 게 있어야지.” “할머니가 죄 지은 것이 없으면 예수님이 왜 피를 흘렸겠습니까? 할머니는 죄 지은 것이 생각 안 나겠지만 예수님 죽으신 것보고 ‘내가 죄인이구나’ 그렇게 생각하세요. 내일 주일인데 세례 받으러 나오세요.”
그렇게 해서 제가 세례 많이 줬습니다. 가라로 줬는지 어떻게 줬는지. 많이 줬습니다. 그런데 또 안 주면 비칩니다. 뭐든지 남이 받는데 안 받으면 사랑 안 하는 줄 알고, 미워하는 줄 알고 교회 안 나와요.
자,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머리 뇌경색 걸렸다. 당뇨다. 오락가락한다. 교사인데 아이들 가르치기도 힘들다. 그러면 그 인생 망했습니까? 실패한 거예요? 창구의 일원화 원칙을 보면 이 사람이 지금 당뇨인지 이런 것은 하등의 문제도 안 되지요. 부자가 되었던 당뇨가 걸렸던 문제 아니지요. 뭐가 중요한 문제입니까? 창구가 일원화 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내가 지금 당뇨에 걸렸다는 것은 문젯거리도 안 돼요.
그런데 왜 그것이 문젯거리가 됩니까? 주님 생각 안 하고, 창구가 일원화 된 것 생각 안하고 내 생각하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지요. ‘나는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었는데. 더 살아야 될 텐데.’ 이렇게 자기 생각하는 순간부터 모든 걱정 귀신들이 다 따라와요.
이제부터 저와 여러분들은 창구의 일원화를 생각합시다. 곡성에 사나 무안에 사나 아무 상관없어요. 이것은 문젯거리도 안 돼요. 내가 생각하는 그 방향이 내 고향입니다. 그 방향이 내 본향이지 내가 지금 어디 있느냐 하는 것은 주의 뜻대로 아무데나 던져진 존재기에 어디든 관계없어요.
이것이 바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14절)입니다.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15절) 이것이 뭐냐? 그 당시에 그레데 사람들의 악함과 뭔가 달라도 달라야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쪽은 방향성도 없고 오직 세상만 바라보지만, 우리는 적어도 하나님의 이런 하늘의 사랑을 받았으면, 이런 창구의 일원화를 받았으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마음을 낮추면서 그 사랑 만끽하면서, 멍청하지만 하늘 쳐다보면서 세상 것을 초월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께서 죽으셨던 이유를, 피를 흘린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 피는 우리가 저주 받을 피인데 대신 흘려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되었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오늘 밤에 죽어도 천당 가는 사람 되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이런 고마움을 가지고 어두운 세상에 나가서 뭔가 세상 사람과는 달라도 다른 생활 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2007. 12. 20. 17:20 녹취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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