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정치에는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분의 삶의 여적을 보면서 저와 조금은 닮은 면이 있고 이런 분들이 새로운 정치의 주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소개합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면 괜히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새로운 각오(비록 몇일, 몇시간 안가지만)가 생깁니다.(참고로 이분은 이번 민주노동당 정책위원장 후보로 나온 분이십니다)
폐허 위에서 다시 싹튼 사회주의 운동
-70년대 학생운동, 부마항쟁, 한국노동당과 주대환위원장
옛일을 누구에겐가,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배경을 그리고 맥락을 잡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말하는 것은 나로서는 매우 힘겹고 어려운 일로 느껴진다. 차라리 체계적인 역사를 서술한다면 내가 좋아하는 ‘고집스러운’ 사실(事實)들을 확인하여 정확하게 쓸 텐데, 이 글은 역사도 아니다. 회고담 정도일 텐데, 아직 나는 내 마음에 담아둔 말들을 회고담으로 풀어놓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로운 입장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론과 실천>의 협박과 강요에도 불구하고 무척 주저하고 망설이고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책상에 앉았다. 그러나 도무지 떠오르는 것이 없다. 다 잊어버린 것이다. 특히 그토록 사랑했던 동지들, 선후배들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 무언가를 쓰기 위해서는 몇 생(生)을 거슬러 올라가 전생을 기억해내듯 70년대로 돌아가야 한다. 아! 70년대로, 나의 청춘으로,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는” 많은 친구들과 더불어 <목마와 숙녀>를 읊조리던 그 날로 돌아가야 한다. 그 모든 불평등을 원수같이 미워하고 모든 부자유를 치떨리게 저주하던 그 날로 돌아가야 한다. 명동에 흐르는 그 많은 인파에 감동하고 서울 출신 여학생들의 아름다운 서울 말씨에 매혹되었던 그 날로 돌아가야 한다. 마음 속 산도 높고 골도 깊던 그 날로 돌아가야 한다.
나의 대학 - 한국사회연구회
1973년 2월 말 아니면 3월 초, 어느 날 나의 서울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대학 생활도 시작되었다. 서울 생활은 자유롭고 새롭고 만족스러웠지만, 대학 생활은 정말로 실망 그 자체였다. 강의 시간은 그토록 지겨워하던 고등학교의 수업 시간과 전혀 다를 바 없었다. 학생들은 오직 고개를 숙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노트에 적고 있었다. 연필이 노트 위에 글씨를 쓰면서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들리는 고요한 교실은 참을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게 하였다. 심지어 한 문장 한 문장의 깊은 뜻과 미묘한 맛을 음미해야 할 한문시간마저 선생님의 풀이를 한 자도 빠트리지 않고 받아 적기에 바쁜 학생들이 태반이었다. 물론 교수들이야 고등학교 선생님들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들은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내가 그토록 철저히 경멸해마지 않았던 모범생들이었다. 그래도 서울대학교라고 해서, 그 중에서도 문리대라고 해서 전국에서 똑똑하다는 놈들이 모였을 것이라는 기대는 완전히 어긋났다. 바보들, 내가 익히 보아왔던 아이들, 대학 원서를 쓰는 날 교무실에 앉아 담임선생님이 “너의 지난번 모의고사 성적은 이러하고 너의 그 전번 모의고사 성적은 저러하니 영문학과로 가라”고 하면 ‘예’하고 답하고, “교육학과는 쉽게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이고, “섬유공학과에 원서를 내라”고 하면 그대로 원서를 써버리던 그런 모범생들, 오직 일류대학만이 인생의 목표인 그런 모범생 중에서도 가장 심한 놈들만 모인 곳이 서울대학교였던 것이다. 나는 정말이지 대한민국 교육 체제 속의 우등생들에 대하여 참을 수 없었다. 이유도 목표도 없이 단지 남에게 이기기 위해서 죽어라 뛰는 자들, 먼저 인생의 의미와 큰 목표를 정하지 않고서도 그렇게 열심히 공부할 수 있는 그들이, 머리 속에 자기의 생각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그들이, 인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내 나름대로 큰 마음 먹고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 해서 서울대학교를 들어왔지만 어떤 훌륭한 집단에 끼었다는 자부심 같은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었다.
학교생활에서 생각나는 일이라면 교양과정부 교지 편집위원을 했던 일 정도이다. 교양과정부 교지 편집위원을 공개 모집했는데, 10대1쯤 경쟁률이 되어서 말하자면 논술 시험을 쳤다. 세 가지 문제 중에서 한 가지만 선택해서 쓰면 되었는데, 나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쓰라는 문제를 선택하여 좋은 점수로 합격을 했다. 이미 오래 전에 민족주의에 깊이 빠져들고 쇼비니즘이라는 극단까지 갔다가(그 당시 만주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고, 연해주나 사할린, 대만,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를 정복 대상으로 생각하여 베트남과의 연합을 통한 중국의 분할이나 몽골족의 단일 국가 건설 등 온갖 대전략을 구상하기도 하였다) 국제주의, 사해동포주의로 전향하면서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써놓으니, 영문학자 황동규 교수를 비롯한 지도 교수들이 가장 높은 점수를 주었다. 지금은 다 잊어버렸지만 그 때는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았던지, 나의 답안 내용은 그 당시에 차하순 교수가 보편주의에 대해 써서 무슨 학술상인가를 받은 논문과 비슷했을 것 같다. 여하튼 교양과정부 교지 <향연> 편집위원회 활동과 거기서 만난 친구들이 그나마 서울대학교를 견딜 수 있게 해주었다.
입학 후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고등학교 선배가 찾아왔다. 그리고 ‘공부’를 하러 가자고 했다. 공부라면 정말 싫지만 그 선배가 말하는 공부는 뭔가 색다를 거라는 느낌이 있었다. 그래서 따라 갔다. 그리고 나는 거기서 과연 색다른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E. H. 카라는 유명한 영국 학자가 쓴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 토론했다. 그런데 나는 그 책을 이미 고등학교 때 영문판으로 읽었다. 아니 그렇지 않았더라도 나로서는 아무 어려운 이야기가 없는, 깊이있으면서도 쉬운 책이었다. 그럼에도 나의 동료들의 이해 정도는 천차만별이었으며 선배들의 설명은 아주 적절하고 풍부했다. 그 집단 속에서 나는 오랜만에 대화가 되는 상대들을 만나고, 또 잘난 체하기도 하면서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났다. 그런 와중에 나는 그 집단의 핵심 멤버가 되었다고, 아니면 선배들의 총애를 받는다고 스스로 느끼게 되었으며,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학회 세미나하는 재미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했다.
이름하여 ‘한국사회연구회’, 돌아가신 김병곤 선배와 이진순(전 KDI 원장), 백영서, 이종구 교수를 비롯한 많은 학자들과 김승호, 정태윤, 노병직, 박석운, 정은교, 박용훈, 박태주, 김현준, 장기영, 김창우, 정의헌 같은 운동가들(지금은 모두 열심히 운동한다고 보기 힘들고, 심지어 한나라당에서 일하는 사람마저 있지만)을 배출한, 아니 그 후에 더 훌륭한 후배들을 훨씬 많이 배출하였으며 70년대 후반의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한국사회연구회와의 만남은 나의 갈 길을 결정지었다.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의 사상적 방황과 독서, 그리고 ‘돝섬문학동인회’ 활동이 나의 인생에 크고 막연한 목표를 주었다면, 대학 1학년 한국사회연구회 가입은 나의 인생이 가야할 구체적인 방향을 결정하고 좁은 외나무다리 같은 길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그 시절에 우리는 비밀이 많았다. 같이 죽고 같이 살고 싶었던 그 동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다. 한국사회연구회에 대해서도 선배들이 누군지,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내가 7기라고 하니 나보다 여섯 해 선배 즉, 67학번 선배로부터 시작된 줄만 알고 있었다. 이미 내었던 학회지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그러하지는 않았던 것이 분명하지만 내가 가입했을 때 한국사회연구회는 거의 지하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많은 것들에 대해서 ‘묻지마’라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당시에는 몰랐으나 후에 들은 이야기로 정운영 교수가 후배들을 모아서 한국사회연구회를 처음 조직한 분이라고 한다. 그 분이 한국사회연구회를 만들 당시의 상황이나 문제의식을 나는 모른다. 그러나 뭔가 기존의 학생 써클들과는 달리 새로이 이론을 탐구, 축적하고 과거의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집단을 형성하여 한국 사회를 개조하겠다는 커다란 포부가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래서 진취적인 분위기가 있었으며, 학생운동에 대한 책임감과 긍지가 대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규모가 가장 컸다. 아마도 역사로 본다면 가장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회원이 많았던 것이다. ‘한국문화연구회’, ‘국제경제학회’, ‘농촌법학회’, ‘이론경제학회’ 등 다른 학회들이 전통적으로 단과대학 한 두어 개에 기반하고 있는 반면에 한국사회연구회는 문리대, 상대, 법대, 사범대에 걸쳐 골고루 많은 회원을 모집하여 후배를 공부시키고 조직하는 데 열중했기 때문인 것 같다. 40명도 넘는 1학년 학생들이 세미나에 참석하였으니 두 팀, 세 팀으로 세미나를 해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여름방학에 부석사 아래 마을로 농촌 봉사 활동을 갔을 때만하더라도 25명 이상의 1학년 학생이 참가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받아들여 ‘좌파’가 되어갔다. 이미 중학교 2학년부터 3년간을 학교 공부는 하지 않고 책 읽고 생각만 했던 나는 한국사회연구회 선배들이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던 ‘준비된 신입 회원’이었다. 불교와 기독교와 공자와 노자의 동양 철학과 낭만주의와 퇴폐주의와 유미주의와 실존주의, 민족주의, 국제주의에 두루 깊이 빠져들어 맛보며 사상의 늪을 헤매고 다닌 경력이 있었고 그 헤매임 끝에 다시 데카르트·뉴튼적 합리주의와 ‘과학이 인류를 구제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돌아가 있던 나는 좌파가 될 마음의 준비가 모두 끝난 상태라 망설임 없이 좌파가 되어간 것이다. 요컨대 나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연구회를 졸업했다.
“모른다!” - 민청학련
1학년이었던 1973년 10월 문리대에서 데모가 일어났다. 어떻게 보면 데모야 매년 있었던 일이니 새로울 것이 없었으나 1972년 10월 유신으로 본격적으로 유신체제가 시작된 이후에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당하던 그런 중에 문리대에서 데모가 일어나고(<이론과 실천> 창간준비3호의 “당원들이 쓰는 한국민중운동사” 정윤광 위원장 편 참고 - 편집자주) 학생들의 상당한 지지를 얻어 학생운동을 하는 선배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리고 부푼 마음을 안고 겨울 방학 중에 전국을 잇는 조직화를 하고 다닌 것이다. 나야 그런 일을 까맣게 몰랐으나 선배들의 비장한 언행에서 무언가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까닭 없이 덩달아 비장해져 있었다. 과연 2학년 1학기 개학을 해서 서울로 올라가 보니 뭔가 심상치 않는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런데 3월 말, 4월 초 어느 날 일어 공부를 한다고 모여 있는데, 친구가 하나 매우 피곤한 얼굴로 와서는 좀 도와달라고 하였다. 뭔가 심각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었고 그런 역사적인 일이라면 나도 일조하겠다는 생각에서 그 친구를 따라 갔다. 도봉산 가는 변두리 방학동 어느 집에 방을 얻어 놓고 있는데, 가보니 손으로 돌리는 등사기와 미는 등사기로 민청학련의 공식 선언문 외에 「민중의 소리」니 하는 제목으로 된 김지하나 장기표가 지은 글들을 등사용지에 타자로 쳐서 등사하고 있었다. 지금 본다면 참으로 수공업적인 방식이었고 인쇄된 유인물도 글자를 알아보기 힘들만큼 조잡하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민청학련의 유인물 등사 인쇄는 두 곳에서 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는 서양사학과 3학년이었던 정태윤을 비롯한 몇 사람이 하였고, 내가 갔던 그곳은 이근성이라는 국사학과 대학원 1학년 선배가 책임자이고 한국사회연구회 2학년 4명을 일꾼으로 하는 더 큰 인쇄소였다. 그 곳에서 거의 잠도 자지 않고 밤낮으로 인쇄를 하고 있는데, 이철이니 유인태니 하는 선배들이 드나들면서 찍어놓은 유인물들을 가지고 나갔다. 나는 당시에 그 선배들의 얼굴을 몰라서 누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었는데, 눈에 핏발이 선 김병곤 선배가 와서는 나와 동료들을 보고서 엄청나게 화를 내면서 “다 깨지려고 하느냐”고 꾸짖었다. 김병곤 선배를 비롯한 한국사회연구회 선배들은 2학년들을 분류하여 학회를 책임질 사람들을 민청학련에 동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2학년들끼리 2명이나 더 끌어들여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왕 왔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일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4월 3일 새벽에 그 집을 나오면서 우리들에게 물었다. “지금 나가면 어디로 갈 거냐?” 하숙집으로 가겠다고 답하니 하숙집으로 가지 말고 친척집으로 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오늘 만약 경찰에 잡혀 고문을 받으면서 민청학련에 관련된 일을 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그래서 내가 “안 했다”고 답할 것이라고 하니 김병곤 선배는 그렇게 말하지 말고 “모른다”고 답하라고 시켜 주었다. 그리고 잡히더라도 반드시 하루는 버텨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나는 “모른다”를 되내이면서 남가좌동에 있는 삼촌 집에 가서 비누로 등사 잉크가 잔뜩 묻은 손을 씻고 한 숨 자고서는 오후 늦게서야 동숭동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친구 감정기(경남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와 술을 한 잔 하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서는 오전에 있었던 문리대와 의과대학의, 봉쇄되고 조기에 진압된 데모 이야기도 듣고 하다가 동숭동 문리대 뒤 하숙집으로 들어가니 마침 9시 뉴스를 하고 있었다. 그 뉴스 첫머리에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국가를 전복하려던 반국가단체인 민청학련에 관련된 자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부터 최고 사형에 처한다고 발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며칠 내로 자수하는 자는 용서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왠지 그 무시무시한 말을 듣는 순간 배 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길이 없어 크게 웃고 말았다. 훗날 김병곤 선배도 같은 순간에 대구 어디선가에서 그 뉴스를 보고 크게 웃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민청학련의 전모를 내가 모르기는 해도 도대체 그 주된 인쇄소의 몰골로서 짐작할 수 있는 전체 규모와 정부의 발표는 너무나 맞지 않아, 두려움을 주지 않고 오히려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주고 장난같은 느낌을 주었던 것이다.
그렇다. 정부는 학생들을 너무 키워주었다. 그 어설픈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이라는 이름만 그럴싸한 조직을 실제로 위협적이고 대단한 조직으로 만들어주었다. 비록 2학년이라 선배들이 꾸민 일의 전모를 알지는 못하였지만, 도무지 무서운 느낌이 없고 오히려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어 태연하게 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형사들이 그 전에 살던 하숙집으로 찾아오고 수배가 되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래서 나는 대충 짐을 챙겨서 마산으로 도망치고 말았다. 마산에서 먼 친척집에 숨어서 두어 달 잘 놀다보니 거의 수사가 마무리되어가는 것 같아서 슬금슬금 내 발로 경찰서로 들어가니 거의 조사도 할 것 없이 동대문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동대문 경찰서 유치장에는 이미 석 달 전에 잡혀 들어온 선배 동료들이 수십 명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사회학과 3학년이었던 이해찬이나 국사학과 3학년이었던 정동영, 서양사학과 3학년이었던 백영서, 동양사학과 2학년이었던 박용훈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동대문 경찰서는 문리대 학생들을 수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 또 한 달 정도 지내다가 이제 모두 서울 구치소로 이감을 시키는데, 그 때 나는 처음으로 서대문 서울구치소 구경을 하였다.
처음 옥사 안으로 들어섰을 때 나의 등뒤로 철문이 ‘철커덩’하고 닫히는 그 순간, 이제 완전히 닫힌 공간에 갇혔다는 것을 실감할 때의 그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한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니 지금도 서대문 구치소에 들어가던 그 순간을 때때로 떠올리며 몸서리를 치면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되고는 한다. 그러나 몇 번 검찰청에 불려 다닌 끝에 나같은 2학년들의 대다수, 그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곧 풀려났다. 그 3평도 될 것 같지 않은 작은 방에 18명씩, 그것도 8월 한창 더위에 갇혀 있던 서대문 구치소 생활은 창밖에 몰려드는 무수한 참새들과 감옥 안에도 범털이 있다는 사실, “학생의 웃음이 참 맑다”고 하던 늙고 지친 미결 수감자들의 모습을 기억 속에 남긴 채 열흘도 되지 않아 끝났다.
그리고 나는 10월에 입대를 하였다. 그 다음해 1월에 내가 한참 졸병으로 고생하고 있을 때 민청학련 관련자는 재판을 받고 모두 풀려났다. 김지하, 이철, 유인태, 김병곤 등에게 공연히 사형 선고를 하였다가 다 석방한 것이다. 그 재판에서 김병곤 선배는 “영광입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시인 김지하가 출소 후에 <동아일보>에 연재한 글에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나는 일등병으로서 <동아일보>를 읽었다.
“사형이 구형되었다. 나도 웃었다. 김병곤의 최후진술이 시작되었다. ‘영광입니다!’ 아아, 이게 무슨 말인가? 사형을 구형받자마자 ‘영광입니다’가 도대체 무슨 말인가? 죽인다는데, 죽는다는데, 목숨이 끝난다는데, 일체의 것이 종말이라는데, 꽃도 바람도 눈매 서글한 작은 연인도, 어여쁜 놀 가득히 타는 저 산마을의 푸르스름한 저녁 연기의 아름다움도, 늙으신 어머니의 주름살 많은 저 인자한 얼굴 모습도, 흙에 거칠어진 아버지의 저 마디 굵은 두 손의 훈훈함도, 일체가 모든 것이 자취없이 사라져버린다는데, 그런데 ‘영광입니다’?”
소위 ‘무림’ 그룹의 내력
1977년 7월 17일, 제대한 날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제대를 하고 돌아오니 나의 동기들은 이미 졸업을 해버리고 나는 3년 후배들, 76학번들과 함께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당시 4학년이었던 74학번 국사학과 김경택과 농업경제학과 장기영, 이런 사람들이 10개 정도 되는 지하 이념 써클의 76학번들 중에서 한 사람씩 모아서 의논하는 비밀 모임을 만들고서 거기에 나를 끼워 넣어 주었다. 나는 물론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으나 단지 군대를 갔다온 선배라는 이유 하나로 후배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나로서는 기왕 학생운동을 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행운일 수도 있었으며 세상을 좀 편히 살자는 입장에서 본다면 큰 불행이었다. 모든 정보가 여기로 집중되었기 때문에 단기간에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만큼 책임도 커서 다른 문제는 생각할 수도 없었다. 1977년 가을부터 1978년 가을에 내가 잡혀 들어갈 때까지 1년간은 나의 일생에서 가장 긴장된 한 해였고 젊을 때인데도 어떤 성적 욕구와 관련하여 해석할 만한 꿈을 한번도 꾸지 못했다. 나는 그 당시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부정하였노라고, 아니 프로이트 심리학의 한계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치기였지만 그 당시에는 매사에 그런 식으로, 프로이트나 도스토예프스키나 싸르트르나 그런 사람들과 대결한다는 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이 비밀 모임이 지휘 중심이 되어 학내의 지하 조직들을 정확하게 동원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데모를 주동할 사람은 정해진 장소 시간에 유인물 수백장을 들고 나타나기만 하면 되었다. 심지어 유인물을 등사할 비용까지 마련해주었다. 그것은 주로 내 몫이었는데 졸업한 선배들을 찾아가 돈을 얻어와서 주동팀에 주고는 하였다. 그리고 반드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 상호간의 엄청난 신뢰와 사랑, 동지애였다. 사실 데모가 끊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탄압 자체에 있었다. 사랑하는 선배나 동료를 형사들이 잡아가면 후배나 동료들은 그야말로 온몸으로 형사들과 싸우면서 그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애쓰고는 했다. 그리고 그를 생각하면서 눈물 흘리고 그를 잡아간 적을 증오하다가는 마침내 감옥가기를 결심하였다. 지금도 내 눈에 선한 장면은 주동황(광운대 언론학과 교수)이 누군가를, 아마도 서동만(북한 연구자)으로 기억되는데, 잡아가는 형사들을 향해 노란 잠바를 휘날리며 2단 옆차기로 덤벼들던 모습이다. 평소에 얌전한 이필렬(방송통신대 교수, 환경운동가)도 시위가 일어나면 몽둥이를 들고 설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나는 당시에 주로 데모가 벌어지면 미리 전망이 좋은 높은 곳에 올라가 우리 작전대로 이루어지는지를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잘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면 77년과 78년 내가 사귄 1백 명에 가까운 후배들, 나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나의 존재에 가장 큰 근거가 되어준 사람들은 지금 대부분 학자가 아니면 기자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원래 학자가 될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시대는 그들을 투사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떤 권력 투쟁이나 파벌 싸움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개인들끼리도 어떤 경쟁심 같은 것도 없었으며, 집단적으로도 어떤 헤게모니 다툼 같은 것도 없었다. 하기는 감옥을 가고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자기의 청춘을 맡기는 일이니 다투어 할 리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본성 이면에 있어서 성악설(性惡說)이 거기에 근거하는, 권력욕이라든지 하는 그런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지하 써클들은 서로 역사도 다르고 선배들도 달랐지만 완전히 하나의 동질감과 단결을 이룰 수 있었으며, 그런 단결의 중심에 ‘비밀 모임’이 있었다. 그러한 경험은 나의 인간관으로 하여금 지나치게 성선설(性善說) 쪽으로 기울게 했으며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너무 쉽게’ 믿도록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조직력은 예를 들면 동일방직 사건 같은 데서도 발휘되었다.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자들에게 경찰의 비호를 받는 어용 조직이 똥물을 뒤집어씌운 사건이 일어났는데, 우리 학생들도 대단히 흥분하여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자들을 돕기로 결의하였다. 투쟁은 장기화되고, 해고된 여성 노동자들을 돕기 위하여 우리는 2학년 이상 지하 써클 회원들이 두당 1만원씩(아마도 지금의 10만원보다는 많은 돈일 거다)을 내어 2백만원 가까운 돈을 당시에 동일방직 노동조합과 연결을 맡고 있던 정태윤 선배를 통하여 전달하기도 하였다.
우리는 미행을 우려하여 서울 시내 변두리 길가에서 만나 중국집 같은 데로 들어가 회의를 했는데, 약속은 플러스 마이너스 30초에 지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것은 수학적 엄밀성과 정확성을 좋아하는 내 체질에 꼭 맞았으며 약속에 관한 나의 오랜 습관이 이때 굳어졌다. 절대로 일찍 가지도 않는다. 물론 지금은 그런 비대중적 습관을 버리려고 노력하여 성공한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이 모임은 나중에 77학번, 78학번, 79학번까지도 이어져 서울대학교 학생운동의 사령탑 역할을 하였는데, 77학번 모임에 들어간 선배는 사범대 국어교육과 76학번 이원주였다. 그는 말하자면 내가 맡았던 역할을 이어받았는데, 특히 체구가 작았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 당시의 그 사람만큼 흔들림 없는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바위덩어리처럼 흔들림이 없으니 그가 지도자가 된 것을 모두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1979년, 76학번들인 김창호, 김용호, 김준희, 김용흠, 주동황, 곽병찬 등이 정해진 순서에 따라 데모를 주동하고 모두 감옥으로 갔을 때에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다가 갑작스런 박정희의 죽음으로 닥친 그 혼란스런 정국을 침착하게 준비하고 후배 77학번 심재철(국회의원)을 학생회장으로 내세워 엄청난 일을 책임지고 감당하였다. 그것이 바로 이른바 ‘무림’이었으니 당시 학생운동의 주류였으며, 그를 비판하고 나서면서 80년 여름에 급조된 ‘학림’과는 역사적 품격과 위상을 달리하는 바 있다. 무림이라는 이름은 1980년 가을에 77학번 최영선(한겨레신문 기자), 김명인(문학평론가), 현무환(웅진출판 이사) 등이 일으킨 불발 데모를 단초로 배후 조직을 수사하다가 족보를 캐면 캘수록 방대하고 윤곽을 잡을 수 없고 오리무중이라 해서 수사팀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너만 애국자냐?” - 긴급조치 9호 하의 학생운동
1976년 초겨울 졸업을 앞두고 법대의 73학번 박석운과 백계문, 이범영이 데모를 하고서는 잡혀 들어가 있었다. 그들이 주동한 데모가 크게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재판을 받는 공판정은 매우 훌륭했고 매우 큰 역할을 했다. 나는 영등포 지방법원이나 서울 고등법원에 후배들 1, 2백명과 함께 다니고는 했는데 법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려던 3명(특히 그 중에서 박석운은 법대를 2등으로 졸업할 예정이었으며 일본 신문에서는 그것을 과장하여 서울대학교 수석 졸업 예정자라고 보도하였다는 설이 있다)과 검사, 또는 판사, 변호사들이 같이 벌이는 유신 헌법의 정당성이나 긴급조치 9호의 정당성을 둘러싼 법철학적 논쟁은 볼만한 구경거리였고, 거기서 후배들은 쉽게 감동을 하고 잘도 선동이 되었다. 그렇게 3, 4백명의 지하 써클 조직원들이 선동이 잔뜩 되어 있는 상태에서, 그 해 가을에 또 74학번의 김경택, 장기영, 75학번의 연성만 등이 데모를 주동하니 매우 큰 학내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에는 긴급조치 9호를 근거로 전경 차량이 여러 대 학교 교정 뒤편 후미진 곳에 대기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사복 형사들 1, 2백 명이 캠퍼스의 중심부, 도서관 앞, 학생 회관 앞에 죽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데모 주동자가 “유신헌법 철폐하라! 긴급조치 9호를 해제하라!”고 소리치며 유인물을 뿌리고 앞으로 나서면 5분도 되지 않아서 벌떼처럼 달려드는 형사들에게 붙들려 어디론가 끌려 가버리는 그런 식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지하 써클 조직을 최대한 동원하여 주동자를 보호하고 형사들과 몸싸움을 벌여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일반 학생들이 모여들어 수천명이 되면 이제 시위가 성공한 것으로 생각했다. 물론 다음에는 전투 경찰이 출동하여 캠퍼스 안을 온통 전쟁터로 만들고 강의실을 최루탄 가스로 채우며 시위대를 흩어놓음으로써 그 날의 시위는 끝나게 되고, 그 날 저녁 학교 앞 막걸리집은 온통 학생들로, 그리고 그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었다.
데모가 성공하기 위해서 D데이 H아워를 정보기관에서 모르게 하면서 지하 써클의 조직을 최대한 동원하는 것이 물론 중요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일반 학생들의 호응 정도였다. 그러므로 시위를 너무 자주 벌여서 식상하게 해서도 안 되고 학기초에 너무 일찍 데모를 일으켜 공부 좀 해보고 싶은 마음을 거슬러서도 안 된다. 적어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중간 고사는 치른 후라야 학생들의 호응은 좋다. 왜냐하면 중간고사를 치른 후라면 설사 시위로 인하여 휴교를 하더라도 두어 달 재미없는 강의에 지친 학생들은 오히려 좋아하고, 내심 기다리고 있던 교수도 리포트 숙제를 내주어 나중에 다시 개교를 하면 한 두어 번 강의를 하고서는 한 학기를 적당히 마무리 지어 학사 일정에 차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나름대로 학생들의 민심의 흐름을 파악하고 분석하여 데모의 적기(適期)를 잡고는 했으며 학생들의 열렬한 호응이 있는 한 우리는 매번 성공하고는 했다.
1976년 말이나 1977년 봄의, 크게 성공적이지 못한 시위에 이어 1977년 가을에는 데모가 크게 성공하니, 자신감을 얻고 학생 대중의 지지에 대해 확신을 얻은 우리는 1978년부터는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아이디어들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건물의 난간에 서서 주동자가 외치는 방식, 심지어 밧줄을 타고 고공에 매달려 외치는 방식은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그런 방식으로 주동을 한 것은 내 기억으로는 동양사학과 75학번 이우재, 중문학과 75학번 김수천, 국문학과 75학번 성욱 등 5인조가 주동을 한 1978년 봄의 데모였다. 성욱이 유리창을 깨고 3층 난간 위에 올라가 외칠 때 얼마나 다급했으면 중앙정보부 서울대학교 책(責)이었던 김만복이란 자가 저도 난간 위로 나아가 “너만 애국자냐?”라고 소리치며 악을 썼다는 것은 하나의 에피소드다. 성욱이는 몽둥이를 휘둘러 김만복이나 다른 형사들을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서 한참을 그렇게 외치다가는 땅바닥이 높은 곳으로 이동을 해가서는 땅으로 뛰어내려 군중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으니 그야말로 영웅이 되었다. 학생 대중의 호응은 크고 주동자가 나타나는 장소는 뜻밖의 곳이니 형사들은 우왕좌왕하여 5명의 주동자 중에 2명인가 밖에 잡히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들, 학교 안에서지만 데모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무엇보다도 학생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고 있다는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더 큰 시위 투쟁을 생각하게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 바깥으로 나가는 활동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래서 황광우 동지(그 당시만 하더라도 이렇게 큰 활동가가 될 줄 몰랐던 열혈 청년)를 비롯한 몇 사람으로 하여금 수만장의 반정부 유인물을 만들어 시내 곳곳에 뿌리게 하였다. 그리고 고려대학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그때까지만 해도 공릉동에 있었다), 성균관대학교, 서강대학교, 이화여대 등 다른 학교들과 공동으로 연합 시위를 시내 한 가운데 광화문에서 할 계획을 꾸미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모의는 거사 이틀을 남겨두고 정보기관에 누설되어 모두 잡혀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새벽에 여동생과 같이 자던 자취방에 들이닥친 형사들 4명에 의해 관악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침착을 가장하기 위해 칫솔을 챙기고 여동생을 안심시킨 후(나의 여동생은 안심이 된 것이 아니라 그 날의 충격으로 후에도 나의 활동을 마음 속 깊이 혐오하게 되었다), 그들을 따라 나섰다. 관악경찰서에서 나는 오직 학내 ‘비밀 모임’을 보호하고 나의 출신 써클인 한국사회연구회를 숨기는 데 열중하였다. 마침 카터가 한국의 인권에 간섭을 하면서 미국 CIA가 한국 중앙정보부에 감시자를 파견하고 있을 때라 나는 심한 고문을 받지 않았고, 보호해야 할 조직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 공범이었던 정경련(고려대)이나 장준영(성균관대)은 지금 민주당에서 일하고 있다. 그리고 김부섭(서울공대 74학번)은 당시 남민전 학생조직책이었으니 남민전 입장에서 본다면 학생운동에 뭔가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당시 도망을 쳐서 나중에 남민전 사건으로 잡혀 들어가 오랜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이로써 나의 짧은 학생운동은 끝났다. 그리고 감옥에 들어가니, 경찰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내가 취했던 모든 행동과 자세가 부끄러워 견딜 수 없었다. 물론 심문을 받으면서 내가 특별히 중요한 정보를 준 것도 없고 동지와 조직을 배신한 것도 없었지만,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내가 마음속으로 얼마나 위축되고 쫄았는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자신만은 아는 것이다. 물론 그 이전 1년 동안 나는 서울대학교에서 항상 적극적인 투쟁을 주장하는 가장 용감한 사람으로 자타가 공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자아상에 비하면 힘 앞에서 위축된 나의 마음은 너무 참담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말 죽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한 죽고 싶은 마음을 잊기 위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루카치의 영문판 『역사와 계급의식』을 먼저 읽었다. 그리고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 프랑크, 아민, 돕, 파농의 책들을 계속해서 영문판으로 읽었다. 그렇게 책에 매달려 몇 달 지나니 영등포 구치소에 당시 함께 있던 사십여 명의 동료 학생들 중에서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 때 나는 내 평생에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소리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들었다. 그리고 서서히 그토록 참을 수 없었던 수치심, 죽고 싶은 마음을 잊을 수 있었다. 아니 그 지독한 부끄러움을 달래어 김수영의 “모래야 먼지야 나는 얼마나 적으냐”라는 보편적 부끄러움으로 위로할 수 있었다. 그 후로 “비겁”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특별하다. 김수영이 그랬듯이 나는 나의 ‘비겁’을 인정한다. 비겁은 나의 존재, 부모를 속이고 친구에게 구걸해 살아온 나의 삶 그 자체인 것이다.
70년대 학생운동을 남한의 ‘독립파 사회주의 운동’의 산실로 볼 수 있는가?
나의 가설은 이렇다. 남한이라는 특수한 조건의 나라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은 필연코 ‘의존파’와 ‘독립파’로 양분된다. 물론 이러한 말은 분열이 좋다는 말도 아니고 분열이 필연적이라는 말도 아니다. 다만 심각하고 결정적인, 그리고 장기적인 분열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북한과의 관계를 둘러싼 분열일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다른 어떤 문제도 남한의 좌파를, 사회주의 운동을 그렇게 심각하게 분열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 사회주의운동을 멘세비키와 볼세비키로 분열시켰던 문제나, 제2인터내셔널로부터 제3인터내셔널이 분리되어 나오게 했던 문제는 그 시대, 그 조건 속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남한에 사회주의 운동이 존재한다면(지식인들끼리 이론과 전략을 토론하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운동이라고 하기 힘들고 대중을 상대로 한 사상의 선전, 선동, 조직 활동이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사회주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만들려고 평생 노력했지만 아직도 만들지 못했다고 느끼고 있다) 그 내부의 문제로서 북한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라는 문제만큼 심각한 문제는 없다. 북한은 누가 무어라고 해도 반자본주의적인 지향이 분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어떤 수식어를 붙이더라도 사회주의적임에 틀림없으며, 이 땅의 오랜 역사, 전(前)시대 사회주의 운동이 남긴 물질적 실체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수천대의 탱크로 무장한 커다란 힘을 가진 현실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떻게 남한의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지 아니할 수 있단 말인가?
50년대의 진보당이나 4.19 직후의 사회대중당, 사회당, 사회민주당 등 3개 혁신 정당들은 전쟁 전의 좌파 세력 중에서 중도 좌파라고 볼 수 있는 일부 잔존 세력과 한민당 등 보수 세력에서 소외된 일부가 합쳐 만든 정당이다. 이들은 대체로 조선로동당과는 족보를 달리 한다고 볼 수 있으나 전전 중도 좌파의 연장이고 잔재였다. 그들은 아직 전후(戰後)라는 새로운 시대가 장구하게 지속되리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분단을 일시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더욱이 남한에서 자본주의가 이렇게 고도로 발전하여 새로운 노동운동이 대두한다든지 새로운 사회적 조건이 형성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을 전후 남한의 사회주의 운동사의 일부로 서술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오히려 전전(戰前) 시대의 잔재 또는 그림자, 여파라고 해야 할 것이다.
60년대의 통일혁명당이나 인민혁명당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흔히 통일혁명당은 북한 의존 노선이고 인민혁명당은 독립 노선이라고 대비시켜 말한다. 그러나 그 성격 차이는 그렇게 뚜렷한 것이 아니고 다만 통일혁명당의 핵심이 북한과 직접 연결된 반면 인혁당은 그러한 연결이 없었고 그 핵심이 주로 조선로동당 내 비주류였던 남조선로동당 계통이어서 그러한 말이 나왔다는 평가도 있다. 즉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기본적으로 북한 의존노선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60년대의 북한 의존노선의 사회주의운동은 심한 탄압을 받았지만 후세에 나름의 영향을 남겨 70년대에 남민전이라는 의존파 사회주의 운동 단체를 마지막으로 남긴다. 남민전과 같은 단체가 새로이 70년대에 형성된 독립 노선의 사회주의 운동과 논쟁하고 가상의 노선 투쟁을 벌이는 것이 유명한 재일교포 작가 이회성의 『금단의 땅』이라는 소설이다. 소설은 사실을 전하지는 않지만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남민전이 탄압으로 소멸한 이후 한동안 남한의 좌파들은 북한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의 존재를 애써 강조한 것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이었다. 그만큼 반대로 반정부 진영에서는 애써 북한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6년 갑자기 일부 학생들이 북한이라는 존재를 상기하고 나섰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기가 북한이라는 존재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북한에서 모든 문제 해결의 출구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모든 문제는 분단으로 인한 것이며 통일만 된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거대한 남한의 지배 체제를 극복하고 혁명을 하기에는 아무래도 남한 좌파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남한 민중의 힘이라는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지만 북한의 힘은 구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철학으로 파악할 수 있는 힘보다는 눈에 보이는 힘과 세력을 쉽게 따르는 인간의 일반적 행태로 볼 때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북한에 기울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북한의 실상이 잘 알려지지 않고 국가사회주의체제가 가진 문제들이 인식되기 이전이라 북한은 이미 사회주의 이상이 실현된 곳으로 생각되기 십상이었다. 60년대의 의존파가 극심한 탄압을 받아 거의 소멸하고 그나마 남은 세력도 남민전 사건으로 뿌리 뽑힌 후, 1986년에 새로이 학생운동 속에서 새로운 세대의 의존파가 스스로 발생하여 커다란 흐름을 형성하였다. 즉 1986년의 의존파의 대두와 그로 인한 많은 문제는 북한이라는 실체를 고려하지 않았던 독립파의 한계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독립파는 어디로부터 연유하였는가? 독립파 사회주의 운동은 70년대 학생운동을 산실로 하여 그 속에서 자연 발생하였다는 것이 나의 두 번째 가설이다. 70년대라는 한정(限定)이 너무 짧고 부족하다면 72년부터 87년까지 15년간의 군사파쇼체제 하의 학생운동에서 독립파 사회주의 운동이 발생했다는 가설을 세워 본다. 오랜 독재하의 민주화 운동이 사상적 좌경화를 가져온 것이다. 과거의 전통과는 무관하게 새로운 지적 모색 속에 온갖 종류의 비판적, 반자본주의적, 반제국주의적, 진보적 사상들이 유입되어 그것들이 혼합돼 남한 땅에 새로운 좌파적 흐름을 형성하였다는 가설이다. 출발은 4.19, 거기서 연유하고 김수영의 시로 대변되는 급진적인 자유주의를 밑바탕으로 하여 싸르트르, 브레히트, 루카치, 또 마르쿠제, 프롬, 그리고 파농, 프랑크, 아민, 스위지 같은 사상가들의 책과 사상이 흘러 들어오고, 그 후에 다시 거꾸로 거슬러 모택동과 레닌과 맑스, 엥겔스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모색은 우리 나라의 전통 좌파와는 무관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연대를 정확히 명기하거나 그 전후 사정과 맥락을 말할 수는 없지만 70년대 들어와서 과거 60년대의 전통 좌파의 힘은 많이 약화되고 새로이, 북한에 대해 별로 정서적 유대나 심리적 부채나 콤플렉스를 가지지 않은 새로운 세대의 좌파, 북한에 대해서 냉정하고 비판적일 수 있는 ‘독립파’ 사회주의의 흐름이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1954년 6월 1일생이다. 그러니까 전쟁이 끝난 1953년 7월 27일 직후에 만들어진 순수 전후 세대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전쟁은 역사가 되고 전후라는 새로운 역사적 시대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나의 대학 생활 중에 어떤 전전 세대의 그림자도 감지하지 못했다. 4.19 직후에 쓰여진 최인훈의 소설 『광장』이나 김수영의 시들은 매우 서구적이었고 합리적이었으며 개인주의적이었고 우리 세대의 취향에 딱 맞았다. 최인훈과 김수영이 새로운 전후 세대를 길러내었다. 특히 김수영은 어쩌면 좌우를 떠나 우리 세대 인텔리겐챠들 공동의 정신적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치열한 자기 반성을 따라 가면 결국 어디론가 하나의 극단으로 가게 되어 있다. 나 역시 김수영과의 만남을 잊지 못한다. 1학년이 지나갈 때쯤 나의 친구, 정은교가 김수영의 시집, 산문집과 그에 대한 김윤식이나 백낙청 같은 평론가들의 글이 실린 잡지들을 한 보따리 주었다. 그리고 곧 나도 김수영의 신도(信徒), 아니 김수영의 아들이 되었다. 당시가 김수영 바람이 아마도 가장 거셀 때였는지도 모른다. 나의 기억으로는 김수영은 1968년, 48세의 나이에 (지금 내가 그 나이에 이르렀다)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 후 백낙청이 유명한 평론 「시민문학론」에서 그를 한국 문학사의 거봉으로 평가하고, 김윤식이 그를 당대에 ‘정신의 높이’가 가장 높은 사람으로 인정하면서 아마도 김수영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가 그 때 거의 완료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우리 세대의 스승이신 리영희 선생님이 있었다. 바로 리영희 선생님의 지적 모색이 남한 좌파의 본질이다. 그의 철저한 합리주의, 그의 인간 이성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남한 좌파의 철학적 기초였다. 진보적 인식의 모든 것은 그로부터 나왔다. 그것은 장준하나 문익환 같은 민족주의자들의 정신과는 분명히 류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1989년 동유럽사태, 1990년 소련 사태를 맞이하여 그는 사회주의자들의 철학, 특히 그 중에서 인간관의 재검토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성선설에 치우친 인간관을 재검토하고 공산주의 실현의 가능성을 회의하였다. 그리고 세계사적 대변화를 감당할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즉 여전히 우리는 그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불꺼라!” - 79년 부산·마산 항쟁
나는 1979년 여름에 출소하여 고향인 마산에 내려가 있었다. 참으로 답답한 하루하루였지만 <창작과 비평> 같은 잡지나 읽으면서 아파트 공사장 같은 데서 일이나 하면서 보내고 있었다. 부모님은 서울에는 결코 보내주지 않았다. 그런데 10월 18일 오후 6시 30분쯤, 동네 사람들이 시내에 난리가 났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운동화를 신고 윗도리는 추리닝을 입은 채로 바로 시내로 내려갔다. 시내라고 해봐야 우리 집에서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있었다. 창동 네 거리 마산의 중심가에 이미 경남대학교 학생들이 모여들고 있었다(창동은 조선시대 조창이 있던 곳으로 이른바 구마산의 중심지이다). 그들은 낮에 학교 내에서 시위를 하고서는 삼삼오오 흩어져서 시내로 나온 참이었다. 그 중에는 내가 아는 얼굴도 여럿 끼어 있었다. 그리고 특히 김종철이라는, 지금은 작고하신 나의 후배는 당시 고려대학교 정외과 4학년 학생(75학번)이었는데 부산 병무청에 볼일이 있어서 갔다가 16, 17일 이틀 동안 부산에서 시위에 참여하고 마산으로 넘어 왔다는 것이다.
어두워질 무렵, 7시쯤 2백명 가량 되는 학생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정희 물러가라’고 간간이 소리치면서 간간이 애국가도 부르면서 수출자유지역 방향으로 2킬로미터쯤 행진을 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경찰의 별다른 제지가 없었다. 다시 중심지, 창동 불종거리로 돌아왔을 때에는 일반 시민들이 많이 가세하여 수천명이 되었다. 그리고서는 누군가 공화당사로 가자고 외쳤다. 모두들 오동동 공화당사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외치기 시작했다. “불꺼라!” 전등을 끄지 않은 길가 집으로는 돌멩이가 날아갔다. 불을 끄지 않은 차는, 특히 자가용 차는 바로 헤드라이트를 발로 차서 깨버렸다. 곧 마산 시내는 암흑 천지로 변했다. 그리고 누구도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비로소 마산은 독재의 공권력이 맥을 추지 못하는 자유의 해방 공간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더 이상 독재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공화당사 앞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았지만 이미 1만 명쯤 되는 군중에게 경찰 1, 2백명은 두려워 할 상대가 아니었다. 공화당 사무실은 상가 2층에 있었는데, 청년들 여럿이 올라가서 책상을 뒤집고 서류를 팽개쳐서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리고는 다시 더 외곽에 있는 양덕 파출소로 나아갔다. 파출소를 지키던 경찰 몇 명은 놀라서 도망을 가버리고 또 10대 청년들 몇 명이 파출소로 들어가서 박정희의 사진 액자를 떼어내어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태극기 액자를 떼어내서는 두 손으로 높이 치켜들고 나오니 수천명이 좋아라고 박수치고 환호성을 지른다.
그 후부터 시위 군중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오동동 파출소, 산호동 파출소, 북마산 파출소, 남성동 파출소 등을 닥치는 대로 두드려 부수고 불을 질렀다. 나는 한 떼의 시위대를 따라 다니면서 그들의 행동을 유심히, 정말 분명하게 관찰하였다. 그 때의 시위대를 이끈 사람들은 학생들이 아니었다. 어디서 구했는지 몽둥이를 휘두르면서 괴성을 지르고 파출소 유리창을 다 두드려 부수고 불을 질러버리는 사람들은 깡패들이었으며, 10대의 인쇄소와 철공소와 자동차 정비공장의 견습공들이었으며, 구두닦이, 술집 웨이터들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내가 책에서 읽은 ‘대중의 혁명적 본능’을 현실에서 실제로 보았다. 그날 저녁 남성동 파출소 앞에서 잡혀 들어갈 때까지 불과 서너 시간 내가 본 것들은 실로 엄청나고 생생한 실체였으며 나의 사상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재작년 마산에서 열린 ‘부마항쟁 2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요컨대 부마항쟁은 학생 시위에 의해 촉발된 민중의 봉기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민중의 봉기를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시민 가운데 가난한 하층 시민들의 봉기, 룸펜 프롤레타리아적인 부분에 의해 이끌려진 근로대중의 봉기였다. 깡패와 구두닦이, 술집 웨이터 등의 부류를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특히 깡패들을 부를 좀더 점잖은 말이 없을까? 그리고 인쇄소와 철공소와 자동차 정비공장의 견습공들, 그들을 무어라고 불러야 할까? 그들이 항쟁을 이끈 지도자였으며 선봉대였다. 이들 항쟁의 지도자들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가 민중의 바다 속으로 사라졌다.” 광주민중항쟁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보아야만 부마항쟁과 광주민중항쟁의 본질과 한계를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영향하에 혁명화된 80년대 학생운동의 본질과 한계도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이라기보다는 룸펜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이다.
여하튼 나는 부마항쟁의 그 날에 우연히 마산시민들과 함께 하게 되었다. 부산에서 1000명, 마산에서 500명이 잡혀 들어갔다. 대부분은 1주일에서부터 4주일까지 구류를 살렸지만 부산 마산 각각 50여명씩 군법회의 재판에 넘겼는데 나도 그들과 함께 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마산의 경남대학교 학생운동, 마산 지역의 여러 진보적인 사람들과도 동지적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리하여 80년대 초반, 전두환이 집권하여 다시 모두들 제적당하고 학교로부터 쫓겨났을 때, 이미 전과가 누적되어 대기업 노동자로 취업하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다른 직장을 얻기도 힘든 나는 1981년 초부터 1985년 말까지 5년간을 마산, 창원, 부산 일대에 살면서 마산의 동지들과 더불어 <마산문화>라는 잡지도 내고 사회주의적 학습도 하고 소그룹도 조직하면서, 아니 여러 가지 생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살게 되었다. 그것은 당시에 나와 비슷한 입장에 있던 사람으로서는 드문 선택이었고, ‘운동권’ 바깥에서 대중과 더불어 살면서 무언가를 모색하며 다양한 경험을 하는 내 나름의 독특한 길이 되었다. 그리고 나는 1986년 초 서울로 보따리를 싸들고 왔을 때 나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운동권’ 안에서만 살아온 나의 학생운동 시절의 동지들은 현실을 주관적으로 보고 있었으며, 그들의 언어는 ‘운동권 사투리’에 오염되어 있었고 그들의 사고는 틀에 박혀 있었던 것이다.
레닌주의를 재검토하라 - 한국노동당
나는 1986년 초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그 해 봄에 서울대학교에서 2백명쯤되는 학생들이 뜬금없이 ‘반전반핵’ 데모를 했을 때, 그리고 「강철 서신」이라는 문건이 나왔을 때 그것이 가진 의미를 바로 알아차렸다. 그리고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때맞추어 정태윤 선배가 나를 찾아왔다. 인천에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거기서 나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운동권’의 상투적 언어와 틀에 박힌 사고방식을 깨뜨리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주어진 문제를 레닌처럼 생각하는 냉정한 이론가인 권우철 동지와 함께 경제학자 양우진의 논문(「한국자본주의 성격규명을 위한 일시론」)을 들고 들어가, 그 당시의 사회구성체 논쟁을 정리하고서 이른바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의 강령을 작성하니 나름대로는 독립파 사회주의 운동의 지향과 사고 방식을 드러내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 몇 년 동안 황광우 동지 등과 더불어 <노동자의 길>과 <사회주의자>를 내어 한 유파를 형성하였다. 그 잡지들은 말하자면 전국적 정치신문, ‘이스크라’였다. 그것은 안산과 인천과 대구와 광주와 대전과 울산과 창원과 부산과 원주와 구미에서 활동하고 있던 혁명적 노동운동 그룹들을 하나의 철학으로, 하나의 사고방식으로 연결했다. 그 대부분의 도시에서 인텔리겐챠와 노동자로 이루어진 사회주의자 그룹이 독자적으로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 잡지를 통한 사상적 교류 끝에 하나가 되어갔던 것이다. 특히 유인렬, 노회찬, 황광우 등이 함께 기사를 쓰고 내가 편집했던 <사회주의자>는 제호부터 깊은 뜻을 담은 회심의 작품이었는데, 제 4호를 내자마자 동유럽 사태가 발생하고 또 경찰이 인쇄소를 덮쳐 인쇄 책임자와 배포 책임자를 잡아가고 말았다. 그 때 잡혀들어간 윤철호, 오동렬 동지는 재판의 진술과 항소이유서에서 참으로 용기있게 “그렇소, 나는 사회주의자요!”라고 선언하였다. 그래서 나는 여러 동지들이 그동안 쓴 글들을 모아 출판하면서 좬사회주의자의 실천좭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러한 문필 활동은 우여곡절을 거쳐 1992년 1월 19일, 한국노동당으로 이어진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정도로 이론적으로 명쾌하게 정리하지 못한 문제도 많았고, 그렇다고 실천적으로 모두가 수긍할 권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미 <노동자의 길>이나 <사회주의자>로 연결되지 아니했던 노동계급 그룹, 삼민 그룹, 여명 그룹 등 많은 동지들이 함께 참여해 주었다. 그리고 소박한 노동자들도 많이 참여해 주었다. 나는 당시에 한국노동당에 참여해 주었던 동지들에게 평생 갚아야 할 빚을 지고 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예언은 아직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레닌을 읽고 그 가르침에 따라 전위 정당을 만들겠다는 커다란 포부로 활동하던 지하 조직들, 지하 써클들을 규합하는 과정이 좀더 빨리, 좀더 광범하게 이루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랬다면 궁지에 몰린 사회주의자들이 그나마 힘을 합쳐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1989년 동유럽 사태와 1990년 여름 소련 공산당이 정권을 잃고 야당이 되는 엄청난 사태 앞에 나의 문필 활동의 밑천은 동이 났다. 나는 당시에 그 사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몰랐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 그 사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론가로서 궁지에 몰린 것이다. 그 혼란 가운데 권우철 동지가 나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주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디어를 글로 만들어 새로운 제안을 하면서 ‘신노선’이라고 하였다. 그 핵심은 한국 사회에서, 그것도 이러한 시대적 조건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대중운동으로서 자립하기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여러 급진적 흐름과 연합하고 조합주의자들과도 연대하자는 것이었다.
누구나 직감적으로 느끼듯이 한국노동당이라는 이름은 조선로동당으로부터의 독립의 의지, 또는 조선로동당에 대한 조용하면서도 근본적인 부정의 뜻을 담고 있다. 한국이라는 이름은 전후 체제, 븐단체제를 인정한다는 의미이며 남한이라는 한 나라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한국노동당이라는 이름은 무엇보다도 조합주의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손을 내미는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손은 전노협으로부터 일단 거절당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진보 세력의 대표적인 결집체라고 할 수 있는 민중당으로부터는 배신당했다. 합당을 해서 총선을 치렀지만, 장기표 선배 등이 총선 후에 아무 명분없이 당을 해체해버렸다. 우리와 함께 해서 득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92년 4월 총선이라는 큰 전쟁을 치른 후에 내부에서 ‘우회의 우회’를 주창하며 전성 동지를 비롯한 많은 동지들이 경실련으로 대거 이탈해버렸다. 이러한 고립과 내부 분열의 어려움에 처하여 그나마 한국노동당 창당 당시에 같이 하지 못했던 사노맹을 비롯한 좌익 분파들이라도 규합해보려고 백기완 선생을 후보로 92년의 대선을 치렀지만 선거의 결과가 좋지 않아, ‘대선 후 창당’의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 우리가 가졌던 생각과 의도에 비하면 너무나 무시당하고 오해되었다고 느낀다. 그리고 모든 버스가 지나간 뒤에 너무나 늦게 1995년에 ‘민중정치연합’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사노맹 계열의 동지들과 통합을 하여 ‘진보정치연합’을 만들지만 그것은 ‘정치적 설거지’라고나 할 것이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보정치연합은 실로 고난의 천리행군을 했으며 노회찬 동지라는 끈기있는 지도자가 없었으면 권영길 대표님의 1997년 대통령 선거 출마라는 진보정당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기까지 간판조차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1994년, 나는 이미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이미 바닥이 난 지식과 식견으로 더 이상 글을 쓴다는 것도 할 짓이 아니었다. 모든 정신적·육체적 에너지가 고갈되어 일년에 열 달은 기침을 하는 기관지염을 앓고 있던 1994년 여름, 마침내 나는 살기 위해서, 생존하기 위해서 창원으로 내려갔다. 우선 내가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등산을 했고 능선을 뛰고 병을 이겨냈으며, 그리고 1997년 권영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님의 대선 출마라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국민승리 21 마창지부 공동대표, 진보정당경남추진위원회 공동대표를 맡고 서울로 회의를 다니기 시작했다. 또한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지방에서 보낸 몇 년의 시간들이, 여기서 고등학교 동창회 회보 편집장도 하고, 초등학교 동창회 회장도 하고, 산악회 회원으로 등산도 다니고, 개혁신당 지구당 위원장도 하고, 학원 원장도 하고 강사도 하고, 학원 연합회 회원도 하고, 동네 초등학교 체육진흥회 총무도 하고 여러 가지 경험을 한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한국의 정치 문화를 안다. 나는 한국 사람들의 정치에 대한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을 안다. 그리고 진보정당을 만든다는 것은 바로 그러한 문화와 전혀 다른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너무나 힘든 일임을 안다. 나는 창원에서 6년 동안 살면서 그것을 알았다.
나는 한국 사회에 진보정당이 뿌리내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나는 한국 사회에 진보정당이 뿌리를 내리는 일이 기적임을 안다. 그리고 그 기적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누군가 순교자가 있어야 한다. 이차돈이 있어야 저 서역 만리 외국에서 들어온, 전혀 이질적이고 이해할 수 없는 불교가 신라 사회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첫댓글 주대환씨에 대한 글을 보니 기억이 새롭습니다..유인렬씨도 그렇고..민중당 시절의 총선때 유인렬씨 사무실에서 전력투구를 했었습니다. 참 좋은 분이었는데..유인렬씨..요즘 머하시나 궁금합니다..
그리고 92년이던가..노동당이 만들어지고 진학련이 건설되고, 그전에 민중당 청학위에 있던 저희 학교와 진학련이 연대해서, 연대라기 보다는 저희가 그냥 가입을 한거로군요..
서울시 진학련 모임에 학교대표로 계속 참가했었는데..그때 동국대 경주에 연수를 갔던 기억이..마지막날 주대환씨가 나와서 말씀을 하시는데 무지 졸렸던 기억이..ㅎㅎㅎ
그떄 연수도 생각이 많이 납니다. 주최측에서 밤에는 조별 장기자랑인가 하고 낮에는 무슨 극기훈련이니 같은걸 한다고 해서 그런거 할 시간에 토론이나 더 하자라고 하면서 주최측과 싸웠던 기억도 나고..ㅎ
당시 노동당쪽 진정련의 주장을 내세우는 진학련 중앙위와 참 많이 싸웠었는데..ㅎㅎㅎ그때는 우리는 이미 선거판에서 2년을 뒹굴었는데..아직 초짜인 사람들이 말만 가지고 떠드는게 참 맘에 안들어서..많이 싸웠었지요..유치하게시리ㅎㅎ지금은 어디서들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사회주의자의 실천이란 책도 기억이 나는군요..특별한 느낌은 별로 없었지만..당시엔 '역사가 판단하게 하라'라는 책에 빠져있을때여서..ㅎㅎ..벌써 추억에 젖을 나이인가 봅니다..ㅡㅡ;;(죄송)
자바/저는 학교때 이 분의 노선과 반대되는 조직에 있었는데, 지금은 지지하게 되었네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 감정적으로까지 타 조직의 사람들과 논쟁을 벌였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