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에른 여공작, 오스트리아 황후, 헝가리 왕비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파흐](1837-1898)
스위스에서 시작된 왕가의 시작은 15세기에 이르러 확실한 기반과 함께 세력을 확장시켜나가 오스트리아, 독일, 동유럽을 본 무대로 하는 막강한 왕가로 성장하게 된다. 그 뒤로 스페인과 정략결혼을 통해 긴밀한 관계를 맺는 등 서유럽으로의 확장 또한 꾀하게 되지만 프랑스와 적대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면서 서유럽으로의 확장은 사실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헝가리, 체코를 비롯한 동유럽에서의 세력은 확실하게 다져져 동유럽 지역의 왕을 한꺼번에 겸하기도 했다.
15세기에 기반이 확실해진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력은 부침을 거듭하며 세계 1차 대전까지 근 500년 간 중부, 동부 유럽의 확실한 세력으로 그 이름을 떨쳐왔다.
이렇게 역사 속에서 분주했던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사람으로 누가 가장 유명할까 단연 1위는 프랑스 혁명 중 단두대의 이슬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 있고, 그 다음이 시씨(Sissi)가 아닐까싶다. 두 여자 모두 오스트리아의 역사에 큰 영향을 준 인물은 아니라는 점이 참 아이러니컬하다.
시씨(Sissi)라는 여인의 등장은 왕가가 서서히 쇄락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한 19세기 중반에 나타난다. 시씨는 애칭이고 본명은 캐롤린 엘리자베트(Karolin Elizabeth)...오스트리아를 여행하면서 엽서나 간판에서 쉽게 초상화를 보게 되는데, 긴 검은머리에 유난히 가는 허리를 가진 미인이 바로 시씨다.
현재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영국사람들이 다이애나 비를 사랑하듯이 오래 전의 황후인 시씨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아마 굉장히 로맨틱했던 시씨와 왕의 결혼 때문인 듯하다.
시씨와 프란츠요제프와의 결혼
시씨는 1837년 막시밀리안 공작과 바이에른 왕의 딸인 마리아 루도비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대부분 시골 마을에서 보냈기 때문에 궁정 생활의 엄격함과는 거리가 먼, 자유분방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으로 성장하였다. 그런 그녀의 운명을 바꿔놓은 사건이 바트 이슐(Bad Ischl)이라는 잘츠캄머구트 지방의 작은 휴양도시에서 생겼다.
시씨가 15세 되던 해, 당시 오스트리아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Franz Joseph I, 재위 1830-1916년)는 온천 휴양차 이 도시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파티장에서 우연히 시씨를 보게되고 그녀에게 한눈에 반해 버렸다. 첫 만남이 있었던 바로 그 날, 황제는 시씨에게 청혼을 하였고, 다음날 부랴부랴 약혼식을 치뤘다.
요제프 황제는 시씨의 언니인 엘레나와 결혼하도록 이미 예정되어있던 몸인지라 이 사건은 오스트리아 전역에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의 드라마틱하고 로맨틱한 만남은 곧바로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나갔고, 이때부터 사람들은 시씨를 동화 속의 공주처럼 추앙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54년, 방년 17세의 시씨, 엘리자베트는 요제프 황제와 결혼하여 황후가 되었다
하지만 궁정의 엄격한 예절과는 거리가 멀었던 성격인지라 궁정에서의 생활이 그녀에게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고 그래서 시어머니와의 잦은 불화를 일으켰다.
결혼생활 초기부터 그녀는 외로움과 각종 병으로 시달렸고, 이를 달래기 위해 과격한 운동과 승마에 몰두하였다(그녀의 승마실력은 웬만한 선수들 뺨치는 수준이었다고 전해진다.).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녀에게 심각한 병이 있다는 진단과 함께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빼앗겼고,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궁정을 떠나 그녀가 그렇게 그리던 전원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황제는 그녀를 매우 사랑했지만, 과도한 집무와 당시에 복잡하게 퍼져가던 전쟁으로 그녀에게 충분한 관심을 주지 못했다. 이런 와중에 1857년엔 딸 소피를 잃었고, 1889년엔 아들 루돌프가 자살로 삶을 마감하면서 그녀의 불행은 더욱 커졌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남편 요제프 황제마저 딴 여자와 바람이 나면서 시씨는 빈의 화려한 궁정 생활을 영원히 등지고 이탈리아와 그리스로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후 시씨는 검은색 옷만 걸치고 다닌 것으로 전해지며, 말년에는 지나친 다이어트와 운동으로 영양실조와 우울증에 시달렸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녀는 서른 살이 넘으면서부터 초상화를 단 한 점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젊고 아름다웠던 그녀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을는지 상상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시씨와 관한 재미있는 일화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의 시씨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많이 전해지고 있는데 소개하자면, 시씨는 유난히 가는 허리를 좋아해서 무리하게 허리를 조이는 페티코트를 착용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심하게 허리를 조인 나머지 페티코트에 있던 철심이 배를 찔러 피가 드레스에까지 젖어 나왔으나 너무 오랜 동안 허리를 조이고 있었기 때문에 피부에 감각을 잃은 시씨 자신은 정작 아무런 아픔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드레스 밖으로 피가 묻어난 모습을 본 주위의 사람들이 놀라서 시씨에게 다가갔으나 정작 자신은 배에서 피가 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위한 치장을 하는데 드는 시간이 보통 반나절을 다 소모했다고 하며, 머리가 긴 것을 좋아해서 검은머리를 발끝까지 길러 늘어뜨리고 다녔다고 한다. 굉장히 외모를 가꾸는 것에 관심이 많았나보다.
자신의 자리에서 벗어나 외국으로만 떠돌던 시씨의 마지막은 역시 오스트리아는 아니었다.
1898년, 스위스 제네바 호에서 몽트뢰로 가는 증기선으로 올라타던 시씨는 24세의 한 무정부주의자가 휘두른 칼에 찔려 숨지고 만다. 이때도 무리하게 조인 허리의 페티코트 때문에 배의 감각을 잃어 자신이 칼에 찔린지도 모른 채 사람들이 놀라서 자신의 주위로 오는 것을 보고 “나에게 무슨 일이 있나요?”라고 되물으며 앞으로 걸어나갔다고 한다. 당시 그녀의 나이 60세! 궁정을 떠나 자유인으로 남고자 한 그녀였지만, 당시의 사회 정황에서 시씨는 퇴폐적인 군주제의 잔재로 여겨질 뿐이었다.
현재 시씨의 무덤은 빈, 카푸친 성당(Kapuzinerkirche, 오페라 극장 뒤에 있는 관광안내소 바로 뒤에 있는 성당)에 자리해있다.
비록 허망하게 삶을 마감했으나, 살아 생전에 이미 전설이 된 시씨의 흔적은 합스부르크가가 지배한 곳이라면 어디서든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녀의 이름을 붙인 건축물들도 수없이 많으며(특히 부다페스트), 그녀의 일생을 다룬 영화와 뮤지컬도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호프부르크 왕궁, 쇤브룬 궁전 등 그녀가 머물다 간 곳이라면 어디든지 ‘시씨’가 최고의 화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엘리자베트(시시) 다리]
시씨는 아름다운 용모뿐 아니라 그리스 고전에도 능통하였다고 하며, 뿐만 아니라 헝가리의 왕이라는 자신의 직분(당시 합스부르크 왕가는 헝가리를 통치하며 왕위도 함께 겸했는데, 시씨가 당시 헝가리의 왕이었다)에 걸맞게 헝가리어도 유창하게 구사하는 등 매우 지적인 여인이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왜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그녀를 그렇게 그리워하는지...이 정도면 알 것 같다.
자료출처:네이버검색, 유럽여행책자(동유럽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