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에 와서 살아보니 소나무가 지천인 반면 단풍 구경이 어렵다.
어쩌다 활엽수가 보이기는 해도 일교차가 크지 않아서인지 단풍이 곱지 않고 푸르댕댕한 채 시들고 만다.
지세도 비산비야 밋밋한대다가 무엇보다 단풍이 없으니 계절의 변화에 둔감하게 된다.
단풍을 보기 위해 대둔산을 찾았다.
단풍은 물이 덜 들기는 했어도 가을임을 일깨우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호남의 금강이라는 이름다운 기암괴석의 산세에서 뼛속까지 사무치는 강한 기운이 넘쳐난다.
누가 심었는지 모르는 개울가 감나무 군락이 하늘 높이 솟아올라 파란 창공에 분홍빛 홍시들이
별처럼 총총했다.
점심은 더덕 정식, 저녁은 돌솥비빔밥
그 밥에 그 반찬을 먹다가 여행 중에 먹는 그 고장 계절 음식이 좋았고
아침의 우거지 된장국도 깔끔 담백했다.
아침을 먹고 귀로에 불명산 화암사로 향했다.
깊은 골자기를 따라 난 구불구불한 국도는 느리기는 해도 옛 정취를 만끽했다.
대둔산에서 한 시간 남짓 길은 이내 차 한대가 지날 정도의 외줄기 실낱같았다.
주차장은 널찍했지만 차는 몇 대 되지 않았다.
안내 판 지도를 보고 불명산 들머리에 들어섰다.
한글로 화암사라 쓴 판각 글씨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늙어가고 있었다.
겨우 사람 하나 지날 좁은 길에 낙엽이 쌓이고 잡초가 무성해서
사람들이 그리 많이 찾는 곳이 아님을 짐작케 한다. 길은 계곡을 따라 오르내림이 심한데
목조 계단 길이 이어져 그런대로 무릎이 성치 못한 늙은 탐방객을 안도케 한다.
날이 흐려지는가 했더니 빗방울이 후두득 떨어진다.
가을비에 낙엽 내음이 퍼지면서 또 다른 가을의 정취를 더해준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얼마나 올랐을까 저만치 산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다른 거찰에서 보이는 일주문도 없이 쇠락한 오래된 절집이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봄이면 계곡에 비처럼 내리는 꽃잎을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을 지닌 듯 우화루(雨花樓)가
옛 절의 위용이 어떠했는지를 말해 주고 있었다.
화암사(花巖寺)라는 절 이름에도 화(花)자가 들어있다.
그 연유가 신라 연화공주 설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지만 난 그냥
봄이면 온갖 꽃들이 피어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화암사가 자리한 불명산(佛明山)에 불(佛)자가 든 것도 산이 먼저인지 절이 먼저인지 모르되
밝은 부처의 빛이 빛나는 산에 있는 절이니 산과 절이 그만큼 맞춤인 곳도 흔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화루 옆으로 난 절문 왼쪽으로는 요사가 있고 절문을 지나면 적묵당과 극락전이 눈에 들어온다.
앞면 세 칸 옆면 세 칸의 맞배지붕인 극락전은 1981년 해체 수리 때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선조 38년(1605)에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화암사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단 하나 뿐인 하앙식(下昻式) 구조이다. 하앙은 밑으로 처지기
쉬운 긴 처마를 받치는 부재인데 일본 중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양식이라는 점에서 국보로 지정되었다.
우중에도 전문 사진작가들이 사진을 찍는다.
산사에 내리는 가을비가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냈다.
하산을 하면서 안 도현 시인의 '잘 늙은 화암사'라는 표현이 절묘하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