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위의 멸망을 가져온 고구려계 사람들
(서기 515년) 1월 북위의 선무제가 죽었다. 문소황태후의 오빠인 고언의 딸이 고영이었다. 이가 선무황후이다. 선무제가 죽었을 때, 선무황후가 호귀빈(영태후)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우황후의 사촌 우충이 빼돌려서 실패한다. 앞서 우황후를 선무황후 집안에서 죽였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우충이 그런 일을 벌린 것이다. 그리고 2월 서쪽 촉(蜀) 지방을 정벌하기 위해 익주로 떠났던 고조(高肇)를 불러들여 궁궐에서 죽인다. 그달 26일에 호귀빈이 황태비가 되고, 3월 선무황후를 비구니가 되게 하여 금융의 요광사로 옮겨 거주하도록 한다. (서기 518년) 9월 천문에 변고가 있자 이를 핑계로 삼은 영태후에 의하여 선무황후는 죽음을 당한다. 이로써 그동안 북위 정권을 좌지우지 하였던 고구려계 고씨가문은 끝이나고 말았다.
고구려계 고씨가문을 멸하고 권력을 차지한 영태후는 (서기 520년) 효명제의 나이가 11살이 되었는데도 권력을 내놓지 않자 신하들에 의해 감금되었다. (서기 525년) 6진의 난이 확대되는 틈을 이용하여 감금 상태에서 탈출하여 다시 권력을 잡고, 자기를 감금하였던 자들을 죽인다. (서기 528년) 효명제의 나이 19살이 되자, 영태후는 황제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죄를 씌워 죽이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효명제를 죽이며 3살짜리 어린 아기를 황제로 세운다. 자기의 권력유지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이고 어린 아기를 세운 것이다. 그해 4월 흉노족 출신 이주영이 낙양으로 쳐들어와 영태후와 어린 황제를 사로잡아 황하에 빠뜨려 죽임으로써, 북위는 멸망의 길로 접어 들었다. 이에 북위를 멸망의 길로 이끌었던 영태후와 권력을 두고 대립각을 세웠던 고구려계 고씨가문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위서 고조열전>
고조는 자가 수문(首文)이며, 문소황후의 오빠이다. 스스로 이르기를 발해의 수(蓚) 사람이라고 하였다. 5대조인 고고(高顧)가 진(晉)나라 영가(永嘉) 연간에 난리를 피하여 고구려로 들어갔다. 아버지인 고양(高颺)은 자가 법수(法修)인데, 고조 초에 동생인 고승신 및 마을 사람 한내ㆍ기부 등과 입국하여 여위장군에 제수되었고, 하간자와 고승신은 명위장군에 제수되었다. 모두 객례(客禮)로써 대우를 받아 노비, 우마, 채백(綵帛)을 하사받았다.
고조는 발해의 수(蓚) 사람이라고 한다. 북위서에 “발해군은 옛 임치땅이다. 중합, 수(脩), 장락현이 있다.”라고 하였으며, 후한서에 “발해군은 성이 8개인데 남피, 고성, 중합, 부양, 동광, 장무, 양신, 수현등이다.”라 하였다. 여기서 수(脩)는 현재 수(蓨)라고 적는데, 음은 조(條)이다. 따라서 고조는 발해군은 수현 사람이라는 것이다. 고조의 5대조인 고고가 영가의 난을 피해 고구려로 들어갔다고 하였다. 영가의 난이라면 (서기 307년)부터 (서기 312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영가의 난이 일어나기전 진나라 왕조 내부에서 팔왕(八王)의 난이 있었다. 여덟 사람의 황족이 (서기 291년)부터 (서기 306년)까지 16년 동안 밀고 당기는 싸움을 벌였고, 이 싸움에 이기기 위하여 제각기 흉노나 선비족 등 외부 세력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16년 동안 지속된 팔왕의 난은 화북 을 대혼란에 빠뜨려 진나라의 통치 하에서 압박을 받고 있던 이민족에게 독립의 기회를 주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일찍이 활동을 시작했던 것은 흉노족으로 성도왕 사마영 밑에 있던 남흉노의 유연을 대선우로 추대하니, 잠깐 사이에 유연의 휘하에는 5만의 군사가 집결하였다. 유연이 황제를 칭한 것은 이로부터 4년 후인 영가 2년 (서기 308년)이었다. (서기 310년) 유연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유총은 낙양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진나라의 실권자 사마월은 대항 한번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울화병으로 죽고, 뒷일을 부탁받은 왕연은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황제를 낙양에 둔 채 10만의 군중을 이끌고 빠져나가다가 석륵군에게 전멸 당한다. 흉노 군대는 손쉽게 낙양을 장악하였고 석륵은 회제를 처형했다. 이것이 바로 영가의 난이다.
영가의 난때, 고조의 5대조인 고고가 발해군 수현을 떠나 고구려로 들어갔다고 한다. 이때 고조의 5대조인 고고뿐만 아니라, 동생인 고숭의 4대조인 고무도 함께 고구려로 들어 갔다고 한다. 허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고구려로 바로 들어갔는지가 의심스럽다.
화북이 팔왕의 난으로 혼란스러울 때, 고구려 미천왕은 모용외가 자신의 할아버지인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친 것에 대해 격분하여, (서기 302년) 우문막규와 결탁하고 평주 현도군을 공격하였다. 우문막규 또한 동생 굴운을 보내 모용외의 여러 군을 공략하였다. 그러나 굴운은 모용외에게 크게 패하고 물러났다. 이때 유주자사 왕준도 선비오환족 등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독자세력화를 모색하였다. (서기 309년) 동이교위 이진은 유주자사 왕준이 진나라 왕조를 함께 도모하자는 약속을 어겼다면서 아들 이성을 보내 토벌에 나섰다. 동이교위부의 병력이 비게 되자, 평소 이진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요동태수 방본이 이진을 주살하였다. 방본은 신임 동이교위 봉석까지 살해하려다가 오히려 피살되었다. 이로 인해 동이교위부의 지배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더욱이 우문선비의 별부인 소희련과 목환진이 이진의 원수를 갚는다면서 요동군 지역을 초략하였다. 요동태수 원겸이 이들과 여러번 싸웠으나 패배하니, 동이교위 봉석이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했다. 모용외가 (서기 310년) 우문선비 소희련⋅목환진을 격파하고 요동군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였다. 신임 동이교위 봉석은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하다가 (서기 311년) 병사하였다. 동이교위 봉석이 죽은후 유주자사 왕준은 공석인 동이교위에 장인인 최비를 임명하였지만, 동이교위부의 지배력은 거의 붕괴된 상태였다.
석륵에 의해 유주까지 위험에 노출되자, 하북 일대의 유망민들이 대거 모용외에게 귀부하였다. 이때까지 모용외와 유주자사 왕준은 협력관계 이었기 때문이다. 모용외는 여러 군(郡)을 세워 유망민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또한 많은 사족들이 귀의 하였는데, 하동의 배억, 배개 북평의 양탐, 발해의 봉추, 봉혁 등이다. 이때 진나라 기주 안평 사람인 한항도 요동군으로 대피하였다가 모용외에게 귀의하였다. 이를보면 당시 하북의 많은 사족들은 신흥강자인 모용외에게 귀부한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고조의 5대조인 고고와 동생인 고무가 고구려로 바로 들어갔다기 보다는 발해의 봉추나 봉혁처럼 모용외에게 귀부한 것이 아닌가 싶다.
북제를 건국한 고환도 발해 수현 사람이라고 한다. 고환의 6대조인 고은은 진나라때 현도태수를 지냈다. 고은은 고경을 낳고, 고경은 고태를 낳았으며, 고태는 고호를 낳았다고 한다. 고은, 고경, 고태는 모용씨를 섬겼다고 하니, 영가의 난 당시 이들도 모용외에게 귀부한 것이다. 고조의 5대조인 고고와 동생인 고무가 고구려로 바로 들어갔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이들은 당시 하북의 많은 사족들처럼 모용외에게 귀부한 것이 사실에 가깝다. 고고와 고무가 모용씨에게 귀부한 후 언제 고구려로 들어갔는지 자세하지 않지만, 후연 건국 전후로 추정된다. 전연 멸망시기로도 볼수 있겠으나, (서기 370년) 연나라 태부 모용평이 고구려로 도망쳐 왔을 때, 고국원왕이 그를 붙잡아 전진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는 고국원왕이 전연에 대해 얼마나 분노심이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고고와 고무가 고구려로 들어간 시기를 가늠할수 있는 사건이 있다. 후연이 건국한 이듬해인 (서기 385년) 고국양왕이 군사 4만명으로 요동군과 현도군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 한다. 아마도 이때 고구려로 들어갔을 개연성이 크다.
<삼국사기>
(서기 466년) 봄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위나라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의 육궁(六宮)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므로 왕에게 교서를 내려 왕녀를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표를 올려 “딸이 이미 출가하였으니 아우의 딸로써 응하겠습니다.”고 하였다. [태후가] 허락하고 이에 안락왕(安樂王) 진(眞), 상서 이부(李敷) 등을 보내 국경에까지 폐백을 보내왔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권하여 말하였다. “위(魏)나라는 예전에 연나라와 혼인하고도 얼마 안 되어 [연나라를] 정벌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신을 통해서 그 나라 지형의 평탄하고 험함을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전례가 멀지 않으니, 적당한 구실로 거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왕은 마침내 글을 올려 [아우의] 딸이 죽었다고 핑계하였다. 위나라는 그 말이 거짓이라고 의심하고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심히 꾸짖으며 “[아우의] 딸이 참으로 죽었다면, 종실의 딸을 다시 뽑아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만약 천자께서 이전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명령을 받들어 따르겠습니다.”고 하였으나, 마침 현조가 죽자 중지하였다.
장수왕은 (서기 435년) 느닷없이 북위에 사신을 보내 황실의 계보와 휘를 알려줄 것을 요청한다. 북위는 고구려의 요청에 따라 왕실의 계보와 휘를 사신편을 통해 보낸다. 일반적 외교관계로 보면 왕실의 계보를 요청한 것은 매우 드문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위는 순수히 고구려의 요청을 들어준다. 북위를 건국한 탁발씨의 조상들은 원래 고구려 서북쪽에 정착하고 있었던 비주류 선비족이다. 그동안 고구려의 영향력하에 있었던 북연에서 풍홍이 집권하여 많은 폐악을 저질러 민심을 잃었고, 은밀히 남방의 유송에게 접근하는 등 고구려가 더 이상 북연 정권을 옹호할 근거를 잃어 버렸다. 이에 그동안 북연을 선비족의 정통성을 계승한 국가로 인정한 사실을 뒤업고 북위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더하여 북위가 북연을 접수하는 것에 대하여 중립을 지킬것을 약조 하였다.
이해 북연은 북위에게 멸망하였다. (서기 465년) 탁발준이 병사하자, 탁발홍이 황제에 등극한다. 이가 바로 현조(顯祖)이다. 그러나 탁발홍의 나이가 12살에 불과하여 문명태후가 1차 섭정을 하게 되었다. 섭정을 시작한 문명태후는 이때까지 조정을 쥐고 흔들던 을혼을 제거하고, 북위의 권력을 차지한다. 이때 고구려는 사신을 북위로 보냈는데, 문명태후가 갑자기 국혼을 요구한다. 원래 문명태후는 북연의 왕족인 풍씨이다. 문명태후가 고구려에 국혼을 요청한 이유로 현조의 왕권강화를 위해서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문명태후는 단지 북위의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서이다.
위서 고구려전과 정준전에서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국혼이 파기된 것에 주안점을 두고 기술하였다. 국혼은 파기 되었으나, 북연 출신이라는 한계를 벗어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문명태후의 입장에서 고구려와의 연결고리를 만들려는 노력은 계속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가 고조가문이 북위로 들어오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먼저 고숭의 아버지 고잠이 들어왔는데, 북위는 개양남의 작위를 하사하고 요동에 살게 하였다. 이후 시기는 자세하지 않지만, 고조의 아버지 고양이 동생인 고승신 및 한내, 기부 등과 함께 북위로 들어왔다.
삼국사기에 이때의 사건을 “(서기 471년)에 백성 노구(奴久) 등이 위나라로 달아나 항복하였다. [위나라가] 이들에게 각각 전택(田宅)을 주었다. (서기 472년) 가을 7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 이후로 공물 바치는 것이 이전의 배가 되었고, 그 보답으로 [위나라가] 주는 것도 또한 조금 늘어났다.”라고 묘사하였다. 북위는 고양을 여위장군, 고승신에게 명위장군으로 제수하였다. 또한 모두 객례(客禮)로써 대우를 받아 노비, 우마, 채백을 하사받았다고 한다. 고씨가문이 이런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것은 전례에 없는 경우이었다. 이러한 대우는 보통 귀족이나 왕족 등이 수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망명하는 경우에 해당된다. 실례를 들면 고구려 고자 아버지인 고문이 친족을 거느리고 당나라에 투항하였을 때, 명위장군을 제수받았고, 유비가 항복해왔을 때 태조가 그를 객례(客禮)로 대우하고 예주목으로 임명하였다.
고씨가문이 이러한 대우를 북위로부터 받았다는 것은, 고구려 조정과 어느정도 밀약이 없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고씨가문이 북위로 입성하기 전 (서기 467년) 문명태후가 섭정한지 2년만에 효문제가 태어난다. 문명태후는 효문제의 양육을 이유로 일선에서 물러난다. 사서에도 이 기간동안 문명태후에 대해서 언급이 없다. 학자들 가운데에는 효문제가, 문명태후의 손자가 아니라 직접 낳은 아들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그래서 출산을 겸해서 잠시 전면에서 퇴장했다는 설이다. 이후 현조와 문명태후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 사건이 터진다. 현조의 아버지 탁발준이 병사 할 당시 문명태후의 나이가 24살 이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문명태후의 남자중에 이혁이란 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혁이란 자에 대해 투서가 올라오자 현조는 그 형제들을 주살시켜 버린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문명태후와 현조의 치열한 권력다툼이 시작 되었다. 그러나 문명태후의 정치력과 권력이 더 강력하였다. 결국 문명태후는 갖가지 방법으로 현조를 핍박해서 (서기 471년)에 그를 태상황으로 퇴위 시키고 나이어린 효문제를 즉위 시킨다. 이 시기에 바로 문소황후의 아버지인 고양 가문이 등장하게 된다.
고양 가문이 북위에 자리는 잡았지만, 이때까지는 조정에 그 세력이 미비하였다. 현조 태상황은 비록 황제 자리에서 물러났지만, 권력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태상황의 자격으로 조정에 조서를 내리고, 군대를 지휘하는 등 오히려 황제 때보다 더 활발하게 일을 하였다. 그러나 문명태후도 그리 만만하게 물러날 인물이 아니었다. 결국 (서기 476년)에 문명태후가 현조 태상황을 독살시켜 버린다.
여기서 잠깐 문명태후 가문에 대해 살펴본 후에나 고조의 여동생이 효문제의 황후가 된 사실을 이해 할 수가 있다.
(서기 430년) 북연왕 풍발이 병사하자 아우인 풍홍이 북연의 왕위를 이었다. 풍홍은 부인 왕씨를 내쫒고 모용씨를 아내로 맞아들인다. 또한 왕씨의 아들인 풍숭과 풍랑을 지방으로 내쫒는다. (서기 432년) 풍랑과 풍막이 풍숭에게 유세하여 북위에게 망명하였다. 북연의 마지막 황제 풍홍의 둘째 아들이 문명태후의 아버지 풍랑이다. 풍랑은 북위에서 진주와 옹주 자사를 지냈다. 풍랑은 아들인 풍희가 있었고, 이곳에서 문명태후를 낳았다. 문명태후가 출생하고 얼마후에 풍랑의 동생인 풍막이 유연에 투항하자, 이에 연루되어 풍랑은 죽음을 당한다. 이로 말미암아 문명태후는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다. 이때 궁에는 문명태후의 고모가 태무제의 제1서열 후궁인 좌소의로 있었는데, 고모가 정성들여 길러 귀인(후궁)에 선택되었고 그 뒤에 문성제의 황후가 되었다.
그후 (서기 465년) 현조가 즉위하면서 문명태후가 되었다. 문명태후가 비록 섭정을 하였지만, 그에게는 이렇다할 정치 세력이 없었다. 물론 풍씨 일족이 있었으나, 탁발계 황족들이 조정을 장악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풍시 일족에외 왕궁을 장악할 새로운 세력이 필요 했을 것이다. 그래서 독살 사건 이후 고조의 여동생인 고영이 문명태후에 의해 효문제의 황후가 되었다. 위서 고씨열전에 “문소황후가 어릴 때 집안에 서 있는데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와서 뜨겁게 비췄다. 이를 피해 동서로 옮겼으나 햇빛은 따라와 비췄다. 같은 일이 수차례 반복되자 부친 고양은 요동사람 민종에게 그 뜻을 물었다.”라고 하였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상황이다. 바로 유화가 추모왕을 임신 하였을 때, 상황이다.
문명태후가 고구려 출신 왕후를 맞이하였지만, 이것은 단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 하였다. 북위에는 자귀모사라는 제도가 있다. 자귀모사 제도는 태자를 세우기 전에, 먼저 그 생모를 죽이는 것이다. 외척의 국정개입을 막기 위해 탁발규때부터 시행 되었다. 따라서 문소황후가 아들을 낳아서 그가 태자가 되면 문소황후는 죽임을 당하게 되어 문명태후가 계속 권력을 행사 할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이도 문소황후가 아들을 낳기전에 (서기 483년) 후궁 임씨가 아들 탁발순을 낳았다. 문명태후는 탁발순을 태자로 삼고, 그 어머니인 임씨는 자귀모사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문명태후가 탁발순을 기른 다는 것은 또 한번 권력을 연장시키겠다는 뜻이었다. 이때 문소황후도 선무제를 낳았다. 그런데 뜻밖에 (서기 490년) 문명태후가 49세의 나이로 죽는다.
(서기 491년) 고구려에서 장수왕이 98세로 붕어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효문제는 흰 위모관과 베 심의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를 표했다. 이는 북위 역사상 유래가 없는 파격적인 행보라는 점에서 효문제의 기반 세력은 고구려계 세력 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문소황후와 고씨가문이 북위 조정을 장악한 상황이 아니었다. (서기 493년) 종친과 대신 등이 황태자의 보호를 위해 문소황후가 있었음에도 풍청을 황후로 세웠다. 효문제는 그해 9월에 낙양 천도를 선언한다. 낙양 천도가 완성된 것은 (서기 495년)이다.
그런데 (서기 496년) 황후 풍청 폐출 사건이 벌어진다. 배다른 자매인 풍윤이 그녀를 참소하여 그녀를 쫒아낸 것이다. 그리고 그해 태자 폐출 사건이 터진다. 태자 탁발순은 몸이 원래 비대하여 낙양의 더위를 고생스럽게 생각하여 항상 북방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효문제가 숭산으로 가자 탁발순은 좌우의 시종들과 함께 옛 수도인 평성으로 달아났는데, 궁궐 안에서 고구려 출신인 고도열을 직접 죽였다. 이 사건으로 탁발순을 태자에서 폐출하였다.
이래서 (서기 497년) 문소황후가 낳은 아들, 원각(선무제)이 태자가 된다. 그렇지만 그해 7월에 효문제는 풍씨 가문의 여자 풍윤을 황후로 삼는다. 효문제는 태자 원각의 어머니인 문소황후가 있었음에도 양육을 위해 풍윤을 황후로 맞이 하였나? 그 이유로 북위 조정의 실권은 탁발계 황족과 풍씨 일족이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해 7월 원각의 어머니 문소황후가 평성에서 낙양으로 오다가 하남성 위현시에서 갑자기 죽었다. 풍씨 가문이 암살했을 가능성이 있다. 어째든 상황은 풍씨 가문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그러나 (서기 499년) 풍윤 황후가 환자 고보살과 사사롭게 통정하였다. 이 일로 효문제는 풍윤을 후궁으로 퇴출시킨다. 그해 4월 남쪽으로 정벌 나갔던 효문제가 병 때문에 돌아오는 도중 죽자, 문소황후의 아들인 선무제가 등극하였다. 그날 선무제는 효문제의 유조(遺詔)로서 풍윤를 사사함으로써 풍씨 가문은 막을 내린다. 선무제는 그해 자기 어머니를 문소황태후로 추존하고 처음으로 외삼촌인 고조와 고현, 외사촌인 고맹을 만난 것이다.
드디어 고씨 가문이 정치 일선에 등장하게 된다. 선무제 초기 중앙조정 내부에는 함양왕 희, 북해왕 상, 팽성왕 사, 고양왕 옹, 청하왕 역, 외척 고조 등 치열한 정권쟁탈전이 벌어졌다. 이때 함양왕 희를 위수로 한 세력은 기타 세력을 소멸하고 권력을 쥐려고 꾀하였다. 이를 눈치챈 선무제는 고조에게 의탁하여 함양왕 희의 세력을 누르는 동시에 황제의 권위를 보존하려고 하였다.
고조는 고구려 출신인데다가 궁정에 들어간지 오래지 않아 명망이 높지 못하고 세력도 크지 못하였으며 사람들은 그를 경시하였다. 고조는 친족이 없었으므로 자못 붕당을 결성하여 자신에게 붙는 자들은 한 달도 못 되는 사이에 승진시키고, 자신을 거역하는 자는 대죄에 빠뜨렸다. 한편 함양왕 원희의 전횡이 심해지자, 보다 못한 선무제를 모시는 측근인 우열이 그의 아들 우충으로 하여금 선무제에게 주청하게 하고, 북해왕 원상도 비밀리에 원희의 허물과 악행을 황제에게 말함과 동시에 팽성왕 원협도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어서 오랫동안 정치를 보좌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고 말하자, 선무제는 숙부들의 명목상 지위를 올리고 보좌할 신하들을 임명한 다음에 친정(親政)을 선언한다. 이렇게 되자 함양왕 원희는 반란을 일으켜 선무제를 죽이려고 하였으나, 일이 여의치 않아 발각이 되어 체포되고 자살이라는 형식으로 죽는다. 여기서 결정적인 공을 세운 우열은 최측근이 되었고, 선무제는 우열의 동생인 우경의 딸을 첫 황후로 삼는다. 또한 선무제는 모든 정사는 오로지 고조에게 맡겼다. 이렇게 되자 고조는 기존의 여러 세력과 부딪치게 된다.
이후 고조는 여러 세력들을 숙청 하였다. 북해왕 상이 고조보다 상위에 있기 때문에 죄를 씌워 죽였다. 또 선무제에게 유세하여 여러 왕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거의 유폐시켜 가두는 것 이었다. (서기 507년) 황후 우씨가 갑자기 죽었을 때, 세간의 여론은 고조가 한 일이라고 말했으며, 이듬해 황자 창이 죽은 것도 고조의 의중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해 7월 고귀빈(高貴賓)을 세워서 황후로 삼았다. 고조는 상서령이 되어 더욱 세도를 부렸다. 이렇게 되니 여러 신하들과 종실(황족, 친왕)에서는 모두 몸을 낮추어 그의 밑에 있었다고 한다. 이 무렵에 고조의 아들 고식이 제주자사가 되었다. 고조의 세력이 얼마나 강대했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때 북위의 황족인 친왕들이나 권문세가들이 너나없이 고조 가문과 넓게는 고구려 여인들과 혼인을 맺으려고 하였다. 고조 또한 이러한 혼맥을 이용하여 세력 강화를 꾀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고조가 정권을 잡게 되자 조정의 옛 제도를 많이 바꾸고 봉지와 녹질을 줄이며 공신들을 억누르고 쫒아내었다. 고조는 서서히 황제의 최측근 인사들과도 척을 지며, 공신들도 적대세력이 되어버렸다. 이러는 와중에 (서기 510년) 선무제의 아들 원후가 태어났다. 원후의 어머니는 호충화인데 후에 영태후가 되는 사람이다. 관료 가문 출신의 호씨는 북위의 황실에 드나들던 여승의 조카로, 고모의 추천으로 세부(世婦)가 되어 입궁했다. (서기 512년) 원후가 태자로 책봉될 무렵 유등, 우충, 최광 등의 간언으로 생모를 자결하게 하는 악습도 폐지되어 호충화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고, 귀빈으로 봉해졌다. 당시 호충화를 죽이면 황후였던 선무황후가 황태자의 어머니가 되어, 고조 일가는 대를 이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다. 생모인 호충화를 죽이지 않은 단 하나의 예외가 생긴 것은 고조 일가에 대한 적대세력들의 반감 때문이며 견제도 있었을 것이다.
이해 선무제는 고조를 사도(司徒)로 삼고 청하왕 원역을 사공으로 삼으며 광평왕 원희를 표기대장군으로 승진시키는 인사를 단행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황제의 친족인 친왕들과 동일한 대우를 하며 승진시켜 준 것이지만 사실은 권력의 핵심인 상서령에서 배제시킨 것이다. 이로부터 고조는 권력의 핵심에서부터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선무제는 고조의 아버지와 형의 봉작과 추증을 비록 오래기는 하나 무덤을 고치지 않고 마쳤다. (서기 514년) 고조는 스스로 나아가 장례에 참여하여 곡을 하지 않고, 다만 그 형의 아들 고맹을 보내 상복으로 갈아입고 장례에 참석하는 것을 대신하게 하여, 향(鄉)으로 무덤을 옯겼다. 그해 선무제는 촉(蜀)을 정벌하면서 고조를 대장군으로 삼아 제군(諸軍)을 통솔하게 하였다. 고조를 촉 정벌에 보낸 것은 호충화의 목숨을 살린 고조 반대파들일 것이다.
(서기 515년) 정월 선무제가 병이 나서 식건전에서 죽었다. 즉시 호충화의 아들인 원후가 즉위하였다. 이때에 선무황후는 태자의 생모인 호충화를 죽이려고 하였는데, 우충이 호충화를 다른 곳에 빼돌려서 살았다. 고씨 일가가 두 번째 기회를 놓치는 안타까운 순간이다. 선무황후가 우황후의 죽음에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우충이 앞서 죽은 우황후의 원수를 갚고, 고조 가문에 대한 반감으로 선무황후의 집권을 가로막고자 호충화를 빼돌린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효명제는 호귀빈을 높여 황태비로 삼았다. 호태후 즉 영태후에게 권력이 넘어가고 있는 순간이다.
영태후와 우충 등은 고조를 척살하고자 하였다. 이해 2월 고조 및 정남장군 원요 등에게 이름을 부르며 편지를 써서 흉사를 알렸다. 고조는 돌아오는 도중에 유간 역정(驛停)에 머무르니 집안 사람들이 그를 맞이 하였으나 그들과 서로 보지 않고, 곧바로 대궐에 도착하여 상복을 입고 태극전에 올라가 애도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조가 집안 사람들과 중간에 만났다고 했으니, 분명 영태후와 우충 등이 고조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고조는 대세가 이미 기우러 졌음을 알고 당당히 대궐로 들어갔다. 태위 고양왕이 먼저 서백당에 거주하면서 사무를 전결하고 영군 우충과 함께 기밀을 다스리고자 하였다. 이들은 형표, 이섭생 등 10여 인을 사인성 밑에 몰래 숨겨 놓았다. 고조가 서인성에 들어가자 형표가 목졸라 죽였다. 조서를 내려 고조의 죄악을 폭로하였으나 죄명은 언급하지 않고 자진하였다고 말하는 한편, 나머지 친척에게는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고 그들의 관직과 작위를 삭탈하였다. 3월에 영태후는 선무황후를 비구니가 되게 하여 금융의 요광사로 옮겨 거주하도록 한다. (서기 518년) 9월 천문에 변고가 있자 이를 핑계로 삼은 영태후에 의하여 선무황후는 죽음을 당한다. 이로써 고조 일가는 파란만장한 막을 내린다.
고조를 몰아내는데 앞장섰던 영태후 또한 (서기 520년) 신하들에 의해 감금되면서 잠시 권력을 빼앗겼다. (서기 525년) 북방에서 6진의 난이 일어났는데, 이를 틈타 감금 상태에서 탈출 다시 권력을 잡고 자기를 감금하였던 자들을 죽이며 음행을 저지른다.
(서기 528년) 효명제가 나이 19살이 되자 영태후는 자기가 한 짓이 불안하여, 황제와 가까운 사람들은 죄를 씌워 죽이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효명제를 죽이고 3살짜리 어린 아기를 황제로 세운다. 자기의 권력유지를 위해 자기 아들을 죽이고 어린 아기를 세운 것이다. 같은해 드디어 이주영이 낙양으로 쳐들어와 영태후와 어린 황제를 사로잡고 황하에 빠뜨려 죽임으로써 북위는 멸망의 길로 접어 들었다. 고씨 가문이 자신들의 영달과 권력만을 취하였기에 북위가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고구려 출신인 고씨 가문이 북위 사람들의 마음을 잡았다면은 북위는 더 오랜기간 왕조를 유지 하였을 것이고, 고구려 또한 흉노족의 후손들로부터 침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첫댓글 아니 이런 글을 다 쓰는 사람이 있다니..
역사계는 꼴통들 집합소가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