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의 작곡가 그리그는 자신의 음악이 서정적이어서 극음악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입센의 환상시극 [페르 귄트]를 작곡함에 있어서도 사실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입센의 위촉을 받아 무대 음악으로 이 곡을 작곡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31세 때 이 곡을 쓰기 시작하여 다음해 여름에 완성하였는데 그의 명작이 되었다. 이것은 처음에 피아노 2중주의 형식으로 출판되었다가 후에 오케스트라로 편곡되었다. 이 극음악은 5곡의 전주곡을 비롯하여 행진곡, 무곡, 독창곡, 합창곡 등 모두 23곡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그리그는 후에 이 극음악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4곡을 뽑아 제1모음곡으로 하였으며, 그 후에 다시 4곡을 선정하여 제2모음곡으로 만들었다
Allegretto pastorale E장조 6/8박자
이 곡은 제4막의 전주곡인데 클라리넷과 바순의 하모니에 실려 풀륫이 조용한 새벽빛이 떠오르는 모로코 해안의 아침 기분을 목가풍으로 노래한다. 이 아침의 정경은 한 폭의 그림으로 보아도 좋을 정도로 전개된다.
Andante doloroso b단조 3/4박자
제3막에서 페르 귄트가 지켜보는 가운에 그의 어머니 오제가 죽는 장면이다. 이 음악은 고금의 장송음악 가운데 걸작의 하나로서, 약음기를 단 현악기가 거듭 반복되는 주제로 어둡고 쓸쓸한 기분을 잘 나타내고 있다.
Tempo di Mazurka a단조 3/4박자
제4막에 나오는 아라비아 추장의 천막에서 추장의 딸 아니트라가 추는 무곡인데, 전곡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며 깨끗한 작품으로 현악기와 트라이앵글로 연주하는 동양풍의 요염한 춤곡이다.
Alla marcia e molto marcato b단조 4/4박자
제2막 산왕의 궁전의 장면인데 막이 오르기 전부터 연주되는 행진곡이다. 동굴에 사는 마왕의 부하들인 요괴들에게 뒤쫒기는 페르 귄트의 절박한 장면을 묘사한 음악이다. 이것이 클라이막스에 이르자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에 큰 폭음이 일어나면서 요괴들이 뿔뿔이 사라져버리는 광경을 잘 묘사하였다.
극의 줄거리
제 1 막 어려서 부친을 잃은 페르귄트는 편모 슬하에서 자랐는데,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게으름이 몸에 밴 데다가 허황된 꿈만 좇고 있기 때문에 모친 오제의 살림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솔베이그라는 연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 마을 결혼식에 나가서 다른 남자의 신부 잉그리드를 빼앗아 산속으로 달아난다.
제 2 막 페르귄트는 얼마되지 않아 곧 잉그리드를 버리고 산중을 방황하다가 푸른 옷을 입은 아가씨를 만난다. 곧 뜻이 맞아서 그녀 부친 있는데로 간다. 그곳은 산에서 사는 마왕의 궁전인데, 그녀는 그 마왕의 딸이었다. 마왕이 페르 귄트에게 그의 딸과의 결혼을 강요하므로 그는 깜짝 놀라서 그곳을 빠져나오려 한다. 마왕은 화가나서 부하인 요괴를 시켜서 그를 죽이려 들지만, 그때 마침 아침을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가 들리고 마왕의 궁전은 순식간에 무너져, 페르귄트는 간신히 살아 남는다.
제 3 막 산에서 돌아 온 페르귄트는 잠깐 솔베이그와 같이 산다. 어느날 모친 생각이 나서 어머니가 살고 있는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모친은 중병으로 신음하다가, 아들의 얼굴을 보고 안심이 되었는지 페르 귄트의 곁에서 운명하고 만다. 모친을 잃은 페르 귄트는 다시 모험을 찾아 해외로 나간다.
제 4 막 각지를 돌아다니는 동안에 큰 부자가 된 페르 귄트는 어느날 아침 일찍 모로코의 해안에 닿는다. 그러나 사기꾼에게 걸려서 다시 빈털털이가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예언자 행세를 하여 순식간에 거부가 되어 아라비아로 들어간다. 거기서 베드윈족 추장의 주연에 초대된다. 아라비아 아가씨들과 추장의 딸 아니트라의 관능적인 춤으로 대접받은 페르 귄트는 아니트라의 미모에 빠져 또다시 전재산을 탕진하고 만다.
제 5 막 그 뒤 페르 귄트의 생활은 여전히 파란만장. 마지막에는 신대륙 미국으로 건너가 캘리포니아에서 금광으로 큰 부자가 된다. 이제 늙어버린 페르 귄트는 고국의 산천이 그리워서 그 동안에 번 제물을 싣고 귀국길에 오른다. 그러나 노르웨이의 육지를 눈앞에 두고 풍파를 만나 그의 배는 재물을 실은채로 물에 갈아앉아 버린다. 다시 무일푼이 된 페르 귄트는 거지나 다름없는 꼴로 산중 오두막에 다다른다. 그곳에는 이미 백발이 된 솔베이그가 페르 귄트를 기다리고 있다. 페르 귄트는 그녀를 껴안고 <그대의 사랑이 나를 구해주었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 쓰러진다. 늙고 인생에 지친 페르 귄트는 이윽고 솔베이그의 무릎을 베고, 그녀가 노래하는 상냥한 자장가를 들으면서 그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다.
페르귄트 (Peer Gynt)
노르웨이 극작가 H. 입센의 5막 극시. 1867년 P.C. 아스비외른센의 민화에서 취재하여 극화하였다. 페르는 타고난 몽상가이며 허풍장이·난봉꾼이고 무법자이다. 사랑하는 처녀 솔베지의 애원과 어머니의 죽음도 페르귄트의 이러한 생활방식을 고치지 못하였고 미국·중국·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노르웨이 극작가 H. 입센의 5막 극시. 1867년 P.C. 아스비외른센의 민화에서 취재하여 극화하였다. 페르는 타고난 몽상가이며 허풍장이·난봉꾼이고 무법자이다. 사랑하는 처녀 솔베지의 애원과 어머니의 죽음도 페르귄트의 이러한 생활방식을 고치지 못하였고 미국·중국·아프리카로 여행을 떠난다. 그가 여러 가지 모험을 치르고 난 뒤 얻은 것은 헛되이 버린 세월과 인생에 대한 환멸이었고, 패배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향에는 솔베지가 처녀로 늙으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으며, 페르귄트는 그녀의 순수한 사랑으로 영혼의 구제를 받는다. J.W. 괴테의 《파우스트》처럼 영혼의 순례극이라 할 수 있다. E. 그리그는 이 작품을 토대로 관현악곡 《페르귄트모음곡(제 1 모음곡 op. 46 제 2 모음곡·op. 55, 1888∼91년)》을 작곡하여 노르웨이적 정서를 아름답게 그렸다.
에드바르트 그리그 (Edvard Grieg, 1843~1907, 노르웨이)
노르웨이의 항구도시 베르겐에서 태어난 국민주의 음악가, 그리그는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적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같은 베르겐 출신의 유명한 피아니스트 올레 불의 인정을 받아, 그의 권유로 15세때(1858년) 라이프치히 음악원에 유학하여 4년간 작곡과 피아노 주법을 배웠다.
1862년 졸업 후 베르겐으로 돌아온 그는 거기서 작곡가와 피아니스트로 정식 데뷔했다, 귀국 후 21세 때, 같은 노르웨이 출신의 젊은 작곡가였던 노르드라크와 깊은 우정을 맺고, 그의 영향을 받아 그리그는 완전히 국민주의의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듬해 코펜하겐으로 옮긴 그리그는 덴마크 작곡계의 대가인 닐스 가데와 리하르트 노르트라크를 만나 <오이테르페 협회>를 발족, 노르웨이 작곡가들의 작품 연구와 연주활동에 주력했다. 1865년에 로마로 여행했고, 1870년에 리스트의 초대로 재차 로마를 방문하게 되는데, 이때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1868)을 연주한 리스트는 그를 매우 극찬하였다.
유명한 그의 《장송 행진곡》은 잠시 로마에 있던 시절에 노르트라크의 사망 소식을 듣고 작곡한 곡이다. 다시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리그는 오슬로 음악원 부원장, 필하모니아 협회의 지휘자 등을 겸하면서 작곡가에 몰두했으며, 여류 성악가 니나 하게루프를 사랑하게 되어, 안데르센의 시에곡을 붙인 가곡 《나 그대를 사랑해》를 작곡하여 유명해졌고, 그들은 결혼해서 오슬로에서 생활했다.
또 1867년에 오슬로 음악 협회를 조직하여 7년간 지휘자로 활약했고, 1874년 31세 때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국가의 종신 연금을 얻어 작곡에 전념했다. 그 후 고향인 베르겐이나 오슬로에서 주로 생활했다. 1885년부터는 베르겐에서 조금 떨어진 트롤드하우겐에 집을 짓고 쇠약해진 몸을 요양하면서 전원 생활을 즐겼다. 이 사이에 가끔 라이프찌히, 로마, 파리, 런던 등지를 여행하여 자신의 작품을 연주하기도 하였다. 그의 아내 니나는 그리그의 가곡을 직접 불러 보급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그리그는 1907년에 영국으로 연주 여행을 떠날 때, 배를 타기도 전에 병이 무거워져 베르겐의 병원에서 9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그리그는, 1877년부터는 로프트휘스에 틀어박혀 작품 창작에만 몰두하며, 세상을 떠나는 1907년까지 피아니스트로서의 발표회도 쉬지 않았다.
그가 남긴 《교향적 무곡》《서정 모음곡》《제3바이올린소나타》(1885∼1887), 피아노곡인 《노르웨이의 농민무용》(1902) 등은 견고한 하모니와 감수성이 노르웨이 민속정서와 잘 어우러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사랑받고 있다. 특히 입센의 부수음악으로 작곡한 《페르귄트》(1876 초연)는 가장 유명한 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