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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간단하게 통화한 어떤 동기 친구는 주말 밤에 고향에 가서 새로 지을 집을 설계하면서 늙으면 귀향하겠다고 했고 또 어떤 친구도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했으니 아마 나의 말년도 그다지 심심하지 않을 것 같다.
벌어먹기 위해, 또는 이런 저런 이유로 콘크리트로 덮힌 도시에 비집고 들어와 아등바등 살아 온지가 벌써 30년 가까워 오고 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가는 만큼 이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은 홀가분한 마음도 조금씩 가까워 온다. 혼자 드러누워 책을 읽다 낮잠이 들어도 좋고 그러다가 봄비의 후두득 거리는 소리에 부스스 일어나도 좋을 토담집을 한 채 지어 놓고, 마당가에 철따라 피는 꽃이 있고, 여름이면 평상을 펼 수 있고 손주들 오면 그네를 매어 줄 수 있는 시원한 느티나무가 두어 그루쯤 있으면 좋을 테고, 한 구석에 조그만 연못을 파서 거랑에서 잡아온 이런 저런 고기들을 키우다가 마음 내키면 낚시대를 드리울 수 있으면 좋을 테고, 희끗한 귀밑머리를 하고 찾아오는 친구를 위해 둘러앉을 수 있는 바비큐 시설을 갖추면 좋을 테고 마지막으로 나와 아침 저녁으로 함께 흙길과 들꽃을 감상할 개가 한 마리 꾸벅 꾸벅 졸음에 겨워하면 더 바랄 바가 없을 것 같다.
산나물은 상송에 귀향하려는 그 친구집 뒷산에 많을 테고 물고기는 지금도 자천 떡방앗간 친구의 어른이 산속 웅덩이에 가득 잡아다 키운다고 하고 바비큐는 공덕이 고향인 친구가 잘 해결 할 테니 별 수고로움 없이도 즐거울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어디에서 똘똘하고 귀염이 넘치는 개를 한 마리 구해야 할 것이다.
섬 생활이 워낙 단조롭다 보니 어울려 운동하는 것도, 술 마시는 것도, 텔레비전 보는 것도 다 심드렁할 때가 많고 귀찮기도 하다. 그럴 때면 학교 아저씨 집에 가서 진돌이를 끌고 뒷산으로 올라간다. 족보있는 개라고 누누이 이야기 하던데 그래서 그런지 무척이나 똑똑한 놈이다. 다만 워낙에 힘에 쎈 놈이라 항상 내가 끌려가서 부대낄 때가 많고 영역을 표시한다고 그런지 길가에 오줌과 똥을 군데군데 갈기는 바람에 동네 사람들의 원성을 사기 쉽다. 지난해에는 두어 번이나 주인이 육지 출타하는 바람에 일주일이나 내가 아침저녁으로 데리고 다니며 똥오줌을 뉘여야만 했고 요즘도 출퇴근때 자기 집 앞을 지나며 이름을 부르면 나를 멍하니 쳐다 보는게 간절한 여인의 눈길과 흡사하다. 다만 진돌이는 수놈이라 요즘 같은 봄이 오면 장가를 가고 싶어 미칠 지경인 것 같다. 작년에는 얼마나 날뛰었는지 주인이 없을 때 줄을 끊고 학교 운동장을 휘젓는 바람에 아이들이 난리가 나서 교무실의 나에게 찾아왔었다. 아구통을 한방 날리고 그야말로 복날 개장수처럼 끌고 들어가서 단단히 묶을 수밖에 없었다.
-아침 저녁으로 나를 쳐다보는 진돌이-
몇 해 전 자꾸 강아지를 사 달라는 딸뇬 땜에 안강장으로, 기계장으로 가봤지만 적당한 놈을 구할 수가 없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내 딸뇬의 성격상 아무리 좋은 강아지를 애견점에서 사 준다고 해도 이틀만에 내다버리라고 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수십만원하는 혈통 있는 놈을 사줄 수가 없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다가 지금은 대통령에서 물러 나와 쭈그렁 할배로 살아가는, 온 나라의 강바닥을 휘져은 어느 대통령의 고향마을 쪽 산속에 유기견 센터에 가보기로 했다. 구불 구불 산길을 따라 들어간 그곳에는 판넬로 지었지만 상당한 규모의 건물이 있었고 안내인을 따라 실내에 가보니 족히 500마리는 넘을 것 같은 오만가지 개들이 있었다. 한겨울이었음에도 무척 따뜻하게 난방이 되고 있었고 우리집 안방보다 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어 냄새는 전혀 나지 않았다. 놈들 중에 아무거라도 골라 선택하라는 안내인의 말을 들으며 세퍼드부터 이름 모를 쥐만한 놈들까지 구석 구석 살피다가 드디어 한 놈을 골라 나왔다. 하얀색 털이 곱게 정리되어 눈을 덮고 있던 놈은 딸뇬의 품에 안기자마자 조용해 졌다.
개도 입양하려면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면서 놈을 우리집 막내로 데려오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었다. 서류에 기록된 놈의 종류가 ‘Mixed’인 것을 발견하고 이런 종(種)도 있구나 싶었는데 안내인은 자랑스럽게 ‘짬뽕입니다. 즉, 잡종이라는 뜻이지요.’라고 했다. 담뱃값만 달라는 안내인에게 거금 3만원을 주고 데려온 놈의 이름을 아이들과 함께 고민하다가 ‘몽실이’로 지었다. 암놈이고 또 순해보였으니 그즈음 아이들이 읽고 있던 책의 주인공 이름을 붙여 주는게 적당한 듯 싶었다.
졸지에 ‘정몽실이’로 변한 그 개를 집안에 절대로 들일 수 없다는 맹세를 아이들로부터 문서로 받아 놓고도 키울 일이 난감했다. 그때는 학교 안에 있는 사택에 살아서 비교적 운동장도 있고 화단도 넓었지만 다른 직원들도 있고 짖거나 똥을 싼다면 어떻게 처리할지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하룻밤을 넘겨 몽실이를 시골집으로 전출보내기로 했다.
냄새난다고 질겁을 하는 노모를 간신히 설득해서 키우도록 하는데 성공했고 삼창에서 2만 5천원에 사간 최신형 플라스특 러브하우스를 대문앞에 설치하자 그때부터 몽실이의 전원 인생이 시작되었다. 어쩌다 내가 가면 차 소리부터 감지하고 어쩔 줄 몰라며 좋아했다. 물론 갈 때 마다 아이들은 나한테 울궈낸 돈으로 천하장사 쏘세지를 사다 줬고 하루 종일 묶여져 강진에 유배당한 정약용선생 같은 삶을 살던 자기를 풀어줘서 온 산을 뛰어 다닐 수 있게 해줬었다.
가끔 빗자루로 두들겨 맞으며 구박을 받긴 했지만 몽실이는 어엿한 밥값을 해내기 시작했다. 앞, 뒷집 할매들이 마실 올 때는 비교적 조용히 꼬랑지를 흔들 다가고 우체부나 고물장수가 오면 잡아먹을 듯 짖어대었으니 고양이 정도의 등치를 지녔던 순한 몽실이에게서 그런 투지가 있었다는 것이 놀라워 보였다.
그런데 무럭 무럭 잘 지내던 몽실이가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몽실이의 안부를 묻기도 전에 노모는 먼저 ‘며칠 시름 시름 앓더니 죽어 버렸다’고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다. 뭔가 사연이 있는 듯 했지만 아이들이 알게되면 지들 할매를 북한 김정은보다 더 악날한 사람으로 볼까봐 덮기로 했다. 한참이 지나 애들이 없을 때 물어보니 항상 대문앞에 매어둔 몽실이를 어떤 수놈이 덮쳐 새끼를 배게 했다고 한다. 한 놈도 키우기 벅찬데 새끼까지 생기면 어쩌나 싶어 같은 동네 다른 할매한테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영창 보내버렸다고 한다. 벌써 몇 년이나 지났으니 몽실이도 이제 할매가 되어 쪼그랑 바가지가 되어가며 손자의 손자의 손자를 돌보며 말년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래본다.
20년도 훌쩍 더 전 군생활 중에 해안경계 근무를 6개월 한 적이 있었다. 원래 내가 소속된 사단은 전략 기동부대여서 훈련으로만 편성되었지만 해안을 끼고 있다 보니 3년에 한번쯤 6개월간 경계임무를 맡아야 했다. 지금과 같이 참꽃이 막 피어나는 봄날에 지금은 신항으로 변해버린 곳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나는 중대의 오만 꼴통들만 모아 놓은 중본의 기동타격대 소속이었다. 원래는 소초 소속으로 2킬로쯤 떨어진 소대에 가야했지만 중대행정병을 맡으라는 것을 개기는 바람에 월남전 출신의 선임하사한테 단단히 찍혀서 소위 사고자 혹은 문제사병들만 특별 관리하는 5분대기조의 막내로 생활해야 했다.
일병을 간신히 달기는 했지만 스무명 가까운 꼴통 중본 대원들 중에 나보다 후임은 4기 아래였던 주계병 한놈과 연대본부에서 파견 나온 1기 아래 통신반원 뿐이었다. 그러나 놈들은 각각 자기 특기분야가 있었으니 날 새기가 무섭게 밥주걱과 무전기를 만지러 가버렸고 경계근무에서 아예 열외 되었다. 그러다 보니 내무실의 모든 뒤치다꺼리며 땜빵 근무는 온통 내 차지였다. 하루에도 ‘막내야!’ 혹은 ‘야!’ 소리를 수백번 들으며 뛰어다니며 가끔은 아구통과 호박통을 선임들에게 무상 상납해야 했다. 그 시절의 내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도 언제가 인기를 끌었던 ‘왕초’라는 드라마의 거지들보다 나을게 없었고 드넓은 돌자갈 밭을 혼자 메야 했던 콩쥐 신세보다 못했다. 더구나 6개월의 시간이 흘러 이제 본대로 복귀 할때가 되어 상병계급장을 달 때 까지도 나의 후임은 충원되지 않았다. 꼴통 선임이 한명 제대해서 집으로 가면 예하 소대에서 그에 못지않은 사고뭉치를 데려와 아귀를 맞추었으니 기동타격대는 언제나 조양은의 행동대장 똘마니 같은 놈들로 득실했다. 그들로 말하자면 ‘공포의 외인구단’이나 혹은 ‘인간 도살자 무리’나 임꺽정의 ‘구월산패’ 쯤 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씨 좋던 일요일 오전에 지금은 폐교가 된 초등학교의 운동장에서 인접 육군 50사단 소초와 벌였던 10만원빵 축구에서 공차기 보다는 격투기를 선보였던 그들은 육군 전우들이 도저히 이대로는 경기를 치를 수 없다고 포기한 사례를 보더라도 가공할만한 흡혈귀무리였음이 분명했다.
그런 그들 아래에서 죽지 못해 시간을 보내며 하루 하루 내 군생활을 저주하며 겨우 정을 붙이는데 나름대로 일조한 것은 기동타격대 뒤편 소나무 아래에 메여 있던 ‘카네라’였다.
카네라는 경계 소초마다 한 마리씩 있던 군견이었는데 작은 송아지만한 수컷 세퍼드였다. 원래는 군견교육대를 우수한 성적으로 수료한 경계견 이었다지만 어쩐 일인지 바닷가 구석에서 노상 우리가 차고 놀던 족구공만 물고 뜯다보니 내가 놈을 만났을 즈음엔 멍청한 똥개로 전락해 있었다.
밤새 근무지에 투입되어 오지도 않을 북괴 공작원을 경계하는 것보다 잠이 드신 선임의 단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순찰자에 신경쓰며 밤을 하얗게 새우거나 낮잠을 너무 많이 자서 정신이 말똥 말똥해진 선임을 위해 선데이서울에나 나올 오만가지 야설들을 지어야 하는 내 생활은 낮이 되어도 다를 바가 없었다. 원래 규정에 따르면 야간 경계근무를 하는 경우 새벽 전원투입 후 아침을 먹고 나면 오전에는 오침을 하도록 보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막내였으니 그런 규정의 적용대상이 아니었다.
선임들이 잠이 들면 나는 세무워커의 먼지를 탈탈 털고 밤이슬과 소금기에 노출되었던 병기를 닦아야 했고 아무렇게나 벗어 놓았던 군복을 빨아 널어야 했다. 무적해병이 되기 위해 입대했던 나는 밤새 있지도 않은 애인과 정사를 선임의 귀에 속사여 그의 성적 환타지를 자극해 드려야 했고 잘 나오지도 않는 물을 받아 군용 목련 빤스며 전투복이며 양말을 빨아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세탁기가 세대나 있어 좀 수월했다는 점이다. 이 세탁기는 심심하면 나를 갈구던 선임하사의 작품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밥을 뜨는 둥 마는 둥 한 후 자신의 전용 닷지차에 시동을 걸게 해서 예하 소대를 돌며 같은 하사관 후임을 갈구거나 중본 기동타격대의 아귀를 맞출 무적 꼴통을 물색하거나 그것도 지치면 시내 다방마담을 만나러 다녔다. 그러다가 늦은 오후쯤에 귀대하다가 눈을 번득이며 헌터의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분리수거나 환경의 개념이 희박할 때라서 텔레비전이나 세탁기, 냉장고 등 전자제품이 고장 나면 대충 차에 싣고 바닷가 한적한 길섶에 갖다버리는 경우가 아주 빈번했다. 더구나 우리가 주둔해 있던 그곳은 인적이 뜸한 곳이라 하루에 볼 수 있는 민간인이라고는 가뭄에 콩나듯 했고 그나마 주로 밤늦게 연애질하러 오는 불륜족이거나 마누라에게 운전을 가르치며 동시에 못쓰게 된 가전제품을 버리러 오는 철없는 중년들이 대부분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선임하사는 그런 가전제품을 잘도 발견했다. 그러면 차를 세우고 경주 양남이 고향이라던 운짱 선임에게 닷찌차 적재함에 싣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기동타격대에서 유일하게 사고뭉치가 아니었던 제주 한림 출신의 선임을 시켜 그걸 사용가능한 상태로 만들어 놓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 선임의 정식 편제상 임무는 중대 목공병 이었는데 공고를 나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드라이버 하나만으로도 한 나절만에 씽씽하게 돌아가는 신제품으로 만들어 놓았다. 물론 나는 그 옆에서 걸레에 휘발류를 묻혀 처음 공장에서 출고될 때 보다 더 하얀색이 나도록 박박 닦아야 했다. 다른 소초에는 세탁기는커녕 텔레비전이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우리 중본에는 처치 곤란인 텔레비전과 세탁기가 쌓여만 갔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바닷가 앉은뱅이 소나무 끝에도 물이 오르던 그날도 뒷늦은 빨레를 널기 위해 병사 뒤편 양지바른 곳으로 갔었다. 사고치는 선임들을 철사로 나무에 묶어놓거나 스스로 모래땅을 파게 한 뒤 목만 남기고 묻어 놓고 한나절 동안 내버려 두기를 즐겨하는 등 기이한 행동을 자주 하던 그 선임하사가 어느 날 갑자기 산속에 버려진 콘크리트 전봇대를 두 개 뽑아오게 해서 만들어 놓은 줄에 빨레를 다 널고 나자 나도 잠시나마 쉬고 싶어졌다. 진지구축을 위해 트럭으로 가져다 놓은 폐타이어에 앉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일어서려니 카네라가 나를 멀끄러미 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멍청하게 있어야 했던 자기 신세나 날마다 쥐어 박히며 구박받아야 하는 쫄병 내 신세나 별다를 게 없었던지 나는 곧 동료의식을 느꼈다. 하지만 매월 월급을 타고 거기다 특수수당까지 받아도 쓸 기회가 없어 뭔가 맛있는 걸 줄 수도 없었고 군견에게는 지정된 사료 외에는 먹여서도 안 되었기에 우리는 그저 견우와 직녀처럼 서로를 쳐다 볼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다가가서 놈의 머리통과 모가지를 슬슬 문질러 주었더니 애잖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 보았다. 어떻게 보면 놈은 나보다 팔자가 좋을 지도 몰랐다. 당시 나의 하루 세끼 부식비가 1500원 남짓할 때 놈에게는 1200원짜리 사료가 아침 저녁으로 두 봉지씩 배급되었고 사단 보안대에서 보안점검을 나오더라도 나 같은 쫄병에게는 관심도 없이 놈에게 다가가서 혹시나 민간 암캐와 흘레를 붙여 씨를 뿌리지나 않았는지 군견병과 기동타격대장을 족치기만 했다.
나중에 나보다 몇 기 빠르고 대구 산격동 출신이던 군경병과 친해져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도 군견병으로 빠지고 싶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날마다 개보다 못한 이런 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개를 돌보는 군견병이 되면 더 낫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긴 군견병은 야간근무도 배정되지 않았고 매일 오후에 진행되던 이상 야릇한 작업과 훈련에도 열외 되어 하는 것이라고는 군견 훈련을 핑계로 해안가로 어슬렁거리고 나가서 어느 경치 좋고 그늘진 곳에 앉아 소설책이나 읽으며 산너머 허름한 가게에서 사온 삼양라면을 생으로 부셔 개와 함께 나눠먹다 마실 다녀오듯 해질녁 전원투입만 휘딱 갔다 오면 그날의 과업이 끝이었으니 부럽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미 친구같은 사이가 되어 나의 진심어린 이야기를 듣던 나보다 한 살 어렸던 그 군견병은 한숨을 푹 쉬며 대답했었다. 자기도 군견병으로 오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고 지금이라도 다른 곳으로 가서 새로운 보직을 새로이 시작하고 싶다고.
그의 말에 따르면 그도 처음엔 기습특공대대에 실무생활을 시작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느 날 IBS 창고에 집합당해서 두들겨 맞다가 앞니가 다 부러졌다고 한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 싶어서 옆에 있던 야삽을 휘둘렀는데 아마 거기에 맞아 자기를 패던 선임의 면상이 엉망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었나 보았다. 결국 서로 타협을 하고 그는 사단헌병대에 근무했다는 친척의 도움으로 영창을 겨우 면하고 대신 군견병으로 전출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그 군견병의 앞니가 유난히 가지런하고 하앴던게 눈에 들어왔다. 하루 종일, 제대하는 날까지 개를 관리해야 했던 그 군견병은 제대할 무렵에 어느 공항에서인가 근무할 경비견 핸들러를 구한다는 구직의뢰가 들어왔지만 과감히 거절하고 사회로 돌아갔었다. 그는 경남 함안출신으로 당시 한달 봉급으로 300만원씩 벌 수 있었지만 여자 친구가 닭똥냄새가 난다는 말에 충격 받아 병아리 감별사라는 안정된 직업을 때려 치운 옆 소대 후임과 가장 특이한 직업으로 빠질 뻔한 경우였다.
장마가 시작되고 구월이 될 때까지 단 하루도 비가 오지 않는 날이 없던 그 해 여름이 되었을 때 군견병 선임은 휴가를 가면서 나에게 자신의 카네라를 맡겼다. 생명이 있고 또 중요한 대간(對諜) 장비였으니 하루라도 군견을 아무렇게나 방치할 수 없었던지 그는 사료를 주는 방법과 관리법까지 세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특이한 것은 여름보양식을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요즘 복날이면 우리가 삼계탕을 먹듯 그때 군견에게도 여름에 특별식을 주도록 되어 있었는데 나는 전투수영이나 IBS훈련을 하느라 해양훈련을 나갈 때 만 겨우 반쪽씩 지급받았던 통통하게 살찐 닭을 통째로 삶아 주는 것이 그것이었다. 하긴 복날을 영어로 개날(Dog Days)이라고 하는 걸 보면 더운날엔 개도 뭔가를 특별히 먹긴 먹어야 하는 모양이다. 성질이 불같았으며 심심하면 츄라이로 호박통을 잘 내려치던, 전라도 출신의 주씨 성을 가진 선임이 없을 때를 골라 주계로 가서 유일한 나의 후임과 특식을 준비해야 했다.
닭을 푹 고아 흐물흐물해 질 때쯤 건져 뼈와 껍질과 기름기를 제거하고 알코기만 따로 분리해서 먹기 적당하게 찢은 다음 뽀얀 국물에 사료와 함께 넣어 먹음직하게 카네라에게 대령해 주었다. 날마다 이면수어 튀김과 꽁치찌게와 양배추김치를 먹어야 했던 나보다 훨씬 나은 밥상을 받은 놈을 보면서 삶의 회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긴 믿거나 말거나 군견병 말에 따르면 군견에게 탈이 나면 헬기로 신속히 이송해야 한다고 그랬다. 통신반에 있던 후임이 옥상에 안테나를 설치하고 내려오다가 떨어졌을 때 오만 욕을 다 들어먹고 자기 손으로 짐을 꾸려 사단 의무대에 털래 털래 가던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내가 철수하기 전, 그러니까 가을이 막 시작되던 무렵에 군견병 선임과 함께 해안에 나갔던 카네라가 갑자기 미쳤던지 조개를 주으러 작전지역에 들어온 어떤 아줌마의 허벅지를 물어 치료비를 물어주고 영창을 보내네 마네 할 때 기가 푹 죽어있었던 놈도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개의 평균 수명이 11-2년이고 군견처럼 육체적 훈련을 심하게 하면 더 빨리 죽는다고 그랬는데 나하고 같이 있을 때 이미 여섯 살쯤이라던 놈은 내가 떠나고 얼마 못가 안락사 당했는지도 모르겠다.
개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너무 길게 옆으로 샜다.
-산길을 함께 한 진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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