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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사랑] 01
S#1. 꽃
미속 촬영으로 보여지는 꽃의 개화.
아주 작은 꽃봉오리가 열리기 시작하면서, 화려한 색의 꽃잎이 활짝 펼쳐진다.
그렇게 터지듯이 피어나는 원색의 꽃들이 하나, 둘, 수없이 되풀이 되면서 화면 가득 꽉 찬다.
S#2. 동대문 종합상가 안
화면 가득 꽉 차는 꽃-
사실은 꽃 문양이 프린트된 원단을 좌르륵 펼치는 중이다.
원단시장의 미남 청년 김대박과 원단을 황홀하게 바라보는 병아리 디자이너, 조은미.
대박 : 자아 동대문 대박 상회 김대박 사장이 권하는 올해의 대박원 단. 이태리 페라가모도 울고 가는 신토불이 원단! 짱이죠?
조은미 : ... 이거 누구 작품인지 아세요?
대박 : 원단에 디자이너 이름 새기는 거 봤어요? (보고) 아아, 시장 조사 나왔구나? 그럼 신고식부터 해야지?
조은미 : 잘 부탁합니다. (명함 준다)
대박 : (명함 읽고) 하하... 암만 병아리래두 어떻게 자기네 회사 물건을 모르냐?
조은미 : 네?
대박 : 유비 텍스타일 서경주과장, 이거 그 누나 그림이잖아요?
S#3. 유비텍스타일 디자인실
그림을 그리는 경주, 낡은 에이프런을 두르고, 물감 묻은 손으로 팔레트에 물감들을 짜서 색을 만들어,
세필로 꼼꼼하게 채워나간다.
캐드 앞의 원희, 고급스럽고 단정한 옷차림으로 컴퓨터의 모니터를 보며 다양한 문양과 칼라를 만들어낸다.
허장 : 그림 덮어라, 덮어... 허리 휘어지게 그려봤자, 이꼴이나 당하는 걸. (블라우스 들고 와서 내팽개치고)
원희 : 이 인간들을 진짜... (블라우스를 들고 본다) 베끼려면 제대루 나 베끼지.
경주, 무표정하게 다시 그림을 그리지만, 붓 칠이 어긋나고.
물통에 신경질적으로 붓을 흔들어버린다.
조은미, 다녀왔습니다 하며 보따리를 들고 와 샘플들을 꺼낸다.
조은미 : 서과장님, 유과장님. 내 그림이 시장에 나온 거 보면 기분이 어떠세요? (블라우스 보고) 어, 이것두 우리 그림이다.
원희 : 허우, 저렇게 눈썰미가 없어서 어떻게 디자인을 하겠다고..
허장 : (그 사이에 오리지널 샘플을 찾아내 들이민다) 미스 조 눈에 는 이거하고 이게 같아 보여?
조은미 : 어...
원희 : 잘 봐! 이건 칼라 이십도 짜리고, 이건 열 두개. 이건 일일이 수작업으로 프린트한 거고 이건 자동으로 찍어낸 거잖아.
여기, 뭉개진 거 안보여?
허장 : 쉽게 말해서 이건 야드당 단가 만오천원, 이렇게 대충 베껴서 싸구려 원단에 팍팍 찍으면, 일금 삼천원. 알겠어?
경주 : (그 사이에 작업 정리하고) 외근 나갑니다.
은미 : 그런데 이렇게 비싼 걸 누가 사요?... 차라리 수입 원단을 사겠다.
경주 : (잠깐 돌아보다가 그대로 나간다)
원희 : (무섭게 쏘아보고)
은미 : ... (기가 질리는데)
허장 : 쯔쯔....(나가며 은미 귀에 대고) 죽었다 인제.
은미 : ... (떨며 자리에 앉다가, 뭔가 보고) 아!
S#4. 회사 근처 화원 앞 (동 낮)
조은미, 휴대폰을 들고 뛰어나온다. 저만치 경주가 가고 있다.
조은미 : 과장님! 서과장님! ... (경주, 돌아보면. 휴대폰을 내밀며) 맨날 놓고 다니시더라. 저는 화장실 갈 때도 들고 가는데...
경주 : (픽 웃고) 들어가 봐...
조은미 : 이왕 나온 거, 꽃이나 좀 보다 갈래요.
바로 앞에 화원이 있다.
조은미, 밖에 내놓은 꽃 한송이 들어서 자세히 들여다 보고.
그런, 조은미를 바라보는 경주의 시선에.
칠년 전의 경주가 똑같이 꽃을 들여다보는 모습, 스친다.
경주 : ...
조은미 : (한숨 쉬고) 꽃 그림은 정말 너무 어려워요. 저두 칠년 쯤 그리면 과장님만큼... 어머, 칠 년이면 내가 몇 살이야? 허우!
경주 : (웃고) 칠 년 잠깐이야.
S#5. 지하철 안
지하의 공간을 달리는 전철.
경주, 망연히 서서 어두운 창을 응시한다.
지하의 공간을 달리는 전철. 반대편에서 또 한 대의 전철이 달려온다.
굉음을 지르며 달려와 서로 부딪칠 듯 스친다.
시간의 흐름도 거꾸로 흐르는 듯한 느낌으로.
S#6. 전철역 플랫폼 (칠년 전, 아침)
반대편으로 달리던 전철, 어두운 터널을 빠져 나온다.
아침 햇살이 눈부신 플랫폼.
전철의 문이 열리고, 스물 넷의 경주가 튕겨지듯 나온다.
목에 걸었던 호출기를 꺼내보고는 활짝 웃고, 인파를 뚫고 간다.
S#7. 버스정류장 앞 (동 아침)
만원 버스가 멈추고. 내려요 내려 악을 쓰며 내리는 원희.
요란한 프린트 원단으로 손수 만들어 입은 미니스커트, 같은 천의 헤어밴드와 가방에 묶은 스카프.
튀는 배색의 티셔츠와 재킷.
경주는 바로 앞의 공중전화 부스에서 호출기에 녹음하는 중이다.
경주 : 최민우! 암만 산 속에 있다고 삐삐두 못치니? 너, 나 취직 한 것두 모르지? 나도 인제 바쁜 몸이라구.
원희, 쇼윈도우 앞에서 옷매무새를 바로잡다가, 경주와 눈이 마주 치면 무안하고.
경주가 손을 흔들지만 목례만 까딱하고 간다.
경주 : 방금 전에 고참 선배 지나갔거든? 무지 살벌한 거 있지? (웃고) 근데 옷 입는 거는 마음에 들어.
S#8. 유비 디자인실
원희, 작업대를 닦고 있다.
경주, 꽃다발을 들고 들어오다가.
경주 : 어머, 제가 할게요.
원희 : 다 했어요. (캐비닛으로 움직이고)
경주 : ... 내일 부턴 일찍 오겠습니다... 저 화병 어디? (이미 원희가 꺼내 들었다)
원희 : (화병을 경주 앞에 탁 놓으며) 꽃이 그렇게 그리고 싶어요? 세상에 널린 게 꽃무늬니까 그냥 그리면 될 거 같죠?
경주 : (보며)
원희 : (경주의 스케치북 펴며) 지금 장난하나? 칼라만 많이 쓰면 그림이 되는 줄 아나부지?... 미대 나온 거 맞아요?
(허장 들어오 면, 싹 변하며) 굿모닝? 과장님, 또 술 드셨구나?
허장 : 미스 유, 나 좀 어떻게 해주라. 속 뒤집혀 죽겠다 응?
원희 : 인삼에 꿀 팍팍 넣어 드릴께요. 경주씨는 커피지? (나가고)
허장 : 그대 없는 세상은 앙꼬 없는 찐빵, 단무지 빠진 김밥. (원희가 나가고 나면) 저러구 싶을까?
경주 : (꽃 꽂다가 보면)
허장 : 저 치마 말야, 옆방 사장한테 아양떨어서 쪼가리 원단 얻어서 만든 거 아냐. 쟤 입구 다니는 거 다 이 동네 물건이야.
경주 : 직접 만든 거예요? 와 대단하다.
허장 : 대단하지 그럼. 쟤, 처음엔 경리로 들어왔잖아. 내 밑에서 장부 정리하던 애라구? 몰랐지?
이방 들락거리면서 어깨 너머로 몇 년 보더니, 어느 날 갑자기 디자이너래. 무서운 애야 정말.
경주 : ...
S#9. 동 탕비실
원희, 차 두 잔을 타고 있다.
경주, 들어와 손을 씻고.
경주 : 선배님은 설탕 한 개죠? (설탕 통 여는데)
원희 : 선배님 소리 듣기 민망하네, 나이도 같은데... 자기가 나보다 월급도 더 많은 거 알아요?
경주 : ... (커피 계속 타며)
원희 : 서경주씨 대학 다니고 해외 연수 다녀올 동안, 나두 하루에 네 시간 씩, 방학도 없이 온갖 학원 다 다녔어요.
서울 살이 오년인데, 고향집에 돈 한번 못 부쳐주고, 데이트 라는 것도 못해보고...
우리방 원단, 그거 다 내가 자른 거 알아요? (손을 펴며) 이게 어디 여자 손이야?
꽥 지르며 흥분하다가 경주의 웃는 눈과 마주치면 민망해진다.
경주 : 나도 대학 거저 다닌 거 아니예요.
원희 : (어쭈하며 본다)
경주 : 나염 공장에서 제도사 아르바이트했거든요? (똑같이 손을 펴며) 이게 여자 손이야?
(원희는 웃지 않고) 게다가 저는 소녀 가장 이잖아요?
경주, 머리의 하얀 핀(상주용)을 들이밀며 보여주면, 원희 당황해서 피하다가 풀썩 웃고 만다.
경주 : 학교에서 배운 거하고 현장은 정말 다른 거 같아요. 많이 가르쳐주세요. (전기 포트의 물 부으려면)
원희 : ... (포트 뺏고) 커피는, 물을 오래 끓여야 맛있어요.
경주 : 아! 그렇구나... 하나 배웠네요? (미소)
S#10. 옥상 (동 낮)
원희, 작은 지갑에서 담배 꺼내 물고, 불 부치고 길게 연기를 날린다.
원희 : 흥, 그래도 싸가지는 있어서 자기 자랑은 안하네... 실무 경험을 쌓은 다음에 해외로 진출하겠다 이거지?
(헤어밴드 풀지만, 갑갑하다) 유원희, 너는 암만 뛰어봐야, 여기가 끝이다 응?
S#11. 디자인실
칸막이 안쪽의 강실장과 허장은 염색 샘플을 들고 다툰다.
경주, 스와치를 만들기 위해 가위질을 하고 있다. 손가락이 아프다.
원희는 스케치에다가 칼라칩 골라 붙여보며.
원희 : 언제나 염색이 말썽이라니까. (경주를 슬쩍 보고) 어느 공장에서 일 했어요?
경주 : (웃고) 사실은 친구네 공장이예요. 아버지는 공장장, 엄마는 총무부장, 아들은 직공. 거의 가내수공업이죠 뭐.
원희 : 남자친구, 있어요?
경주 : 남자는 무슨...
강실장 : (나오며) 공장 명단 좀 줘봐.
원희 : (건네며) 샘플 다시 뽑아요?
허장 : 아아참... 그 색깔 제대로 뽑기 힘들다구요.
강실장 : (명단 뒤지며, 혼잣말) 웬수같은 영감탱이...
허장 : (원희 귀에 대고) 그러게 일 잘하는 거래처하구 누가 싸우래? 번번이 고생 아냐.
원희 : (빙긋 웃고) 서경주씨가 잘 아는 공장 있데요. 제도사 있다니까 프린트도 하겠네?
경주 : 그럼요, 겉보기는 허술해도 실력은 최고예요. 이름도 최고고.
허장, 원희 : (동시에 정말이야, 어머 하며 놀라며 보고)
강실장 : 뭐! 최고, 그... 영감탱이를 알아?
경주 : 왜요? (어리둥절 하다가) 아아, 출입금지?
S#12. 최고 나염
'최고 나염' 이라는 간판 옆에 커다란 경고문이 붙어있다.
'아래와 같은 자들은 출입을 엄금함.
1.남의 디자인을 훔치는 자. 2. 새치기하는 자. 3.불평불만 하는 자. 4. 어음을 남발하는 자.'
민우부 : (소리) 느그 사장은 3번이야. 불평불만 하는 자.
S#13. 공장 사무실과 마당
민우의 부모는 막상막하 목청 좋고, 다혈질에 고집 세다.
경주는 두분 사이에서 늘 그래왔듯이 다소곳이 참고 기다린다.
민우부 : 누 앞에서 감히 색깔을 따지노 말이다! 건방진 눔.
민우모 : 고만 하소. 몇 년 전 일을 가지고... 돈 떼먹은 것도 아이고 일 좀 잘하자꼬
민우부 : (O.L) 시끄럽다! 쎄고 쎈게 염색공장 이라며! 흥! 내랑 거래 끊어지고 욕 좀 봤을기다 아마.
민우모 : (O.L) 됐십니다. 어디 보자. 내일까지 해달라꼬? (아트웍 받아 보며) 그림 좋네...
민우부 : 이 할망구가, 안된다면 안되는 줄
민우모 : (O.L, 책상을 쾅 치고) 우리 갱주 취직해서 맨 처음 맡은 일이라 안하요!
(민우부, 조용해지고) 그래, 직장은 맘에 들더나?
경주 : 네...
세 사람, 나와서 공장 쪽으로 움직이며.
민우모 : 민우 자석, 니한테는 삐삐 가끔 치더나?
경주 : (민우부의 눈치보며) 곧 올 거 같아요.
민우부 : 올 필요 없다 캐라! 아주 산 속에 팍 처박혀서 살라캐라 고마! (누군가를 보고, 쫒아가며) 야아! 니 똑바로 몬하나!
그 따우로 할기면 짐 싸들고 고향 내리가삐라, 그마.
민우모 : 흐이구, 딱한 영감... 하나있는 아들을 지 맘대로 몬해 저리 앙 앙불락이다 고마.
경주 : (안됐지만 미소로)
S#14. 유비 사무실
원희, 커다란 원단 보퉁이를 들고 들어오다가 깜짝 놀란다.
텅 빈 사무실에 낯선 남자(민우)가 서있다.
민우는 신문지에 둘둘 만 이상한 것이 꽂혀있는 등산용 색을 옆에 놓고. 스와치를 꼼꼼히 살피고 있다.
원희 : 누구세요! 어디서 오셨어요?
원희, 둘러보다가 디자인 실이 비어있다는 것을 알자 히스테리를 일으킨다.
민우 : 저기요, (원희 때문에 정신없다, 우습기도 하고) 저는요.
원희 : 여기 관계자 외 출입금진 거 몰라요! 그거 내놔! 어서요!
원희, 스와치를 뺏고, 디자인용 빗자루를 꽉 움켜쥔다. 민우 옆의 신문 뭉치를 보고는.
원희 : 그 그거 뭐예요! 꺼내봐, 빨리이! 뭐냐니까! (빗자루로 탁 밀치 고)
민우, 악 조심해요 소리지르며 신문뭉치를 펴보면 야생화 몇 송이 가 뿌리 채 캐느라고 흙덩어리와 함께.
민우 : (조심스럽게 망가진 잎사귀를 살펴보고)
원희 : ... 죄 죄송해요... 실은, 지난달에 디자인이랑 샘플을 도둑 맞아서.
민우 : 아, 산업 스파이! (웃고) 인제 내 소개해도 되지요? 일, 내 이름은 최민웁니다. (비로소 모자를 벗으면 드러나는 얼굴)
이, 서경주를 만나러 왔고요. 삼, 방금 나간 어떤 분에게서 여기 있으라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아, 사, 흙이 자꾸 떨어지네요.
원희, 얼른 테이블 밑의 빈 화분을 꺼내고, 함께 옮겨 심는다.
원희 : ... (어색해서) 뿌리 안 상하게 잘 캤네요.
민우 : 못된 이기심이죠 ...자기 땅에서 잘 자라고 있는 애를...
원희 : 사랑 받고 사는 게 더 행복할지도 몰라요, 들꽃도 꽃이니까...
민우 : (비로소 원희를 본다) ...
원희 : 근데, 이건 따로 심어야돼요. 그늘에서 자라는 거니까. 우리 집 뒷산에 맨 천지사방으로 (민우의 시선에 부끄러워지며)
저도, 산골에서 자랐어요. (뺨에 흙이 묻는 것도 모르고 입을 가리며 웃는다)
민우 : 저... (원희의 흙묻은 뺨으로 손을 뻗다가 주춤하며) ...
원희 : (가슴이 뛴다) ...
S#15. 유비 빌딩 앞 (동 오후)
경주, 오다가 먼지투성이의 낡은 소형차를 보고는 반색을 하고 다 가가 들여다본다.
차안에는 커다란 배낭과 카메라 가방, 중형 카메라, 필름 통 들이 널려있다.
경주, 활짝 웃으며 뛰어들어간다.
S#16. 유비 사무실
원희, 수건으로 뺨과 손을 대충 닦고. 민우에게 어색하게 내민다.
민우 : (수건 받아들고) ... 혹시, 이 꽃들 이름 알아요?
원희 : (보면)
민우 : 전부 다 알아 맞추면 상품으로 드릴께요.
원희 : ... 서경주씨 주려고 가져온 거 아닌가요?
민우 : (으쓱하고) 마음이 변했어요.
원희 : ... (하나씩 가리키며) 기린초, 양지꽃, 하늘매발톱... (하나는 모르겠다)
민우 : (보면)
원희 : 복수초... 맞나요? (고개 들어, 보면)
민우 : (아주 짧게 흔들린다) ... 축하합니다. (꽃을 내밀면)
원희 : ... (손을 뻗어 받는다)
그때 열린 문을 밀고 들어오던 경주, 그런 두 사람을 목격한다.
경주가 들어온 것도 모르고 마주 선 원희와 민우.
그들을 바라보는 경주에게서 스톱되며.
S#17. 충무로 현상소
커다란 라이트박스에 찰칵 불이 들어오고. 빅 사이즈의 네가 필름 들이 가득 놓여있다. 옆에도 잔뜩 쌓여있고.
민우 : 음... 제발 제발
민우, 심호흡을 하고 루뻬를 들이대고 하나씩 본다. 날씨 운운 투 덜거리면서 한 장씩 밀쳐낸다.
경주 : (그 중의 하나 건성으로 보고) 어우, 잘 나왔는데?
민우 : 괜찮지? 이 초록색 빗자루, 내가 갖다놓은 거야. 덕분에 이쪽 벽이 살았지?
경주 : 그래, 핏줄에 흐르는 무서운 칼라 감각...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야.
민우 : 욕을 해라 응?
경주 : 염색공장 물려받을 애가 사진은 왜 찍냐?
민우 : 너, 지금 나한테 심통부리는 거니? ... 그 여자한테 꽃 준 거 땜에?
경주 : 그 여자? (허, 웃고)
S#18. 근처 거리 (동 저녁)
민우 : 데려다줄게.
경주 : 지하철이 빨러.
민우 : 너, 정말 삐졌구나? (경주, 흘겨보면) 취직했다면서 밥 한끼 살 줄도 모르냐?
경주 : 하이고 참, 너 집 떠난지 보름이야. 엄마 안보고 싶니? 나두 일찍 가야돼.
민우 : 경철이 아직도 속 썪여?
경주 : 엄마까지 이상해졌어... 으이그 웬수들... 정말 집에 가기 싫은 거 있지?
민우 : 경주야.
경주 : (돌아보면)
민우 : 우리, 결혼하자.
경주 : (쿵하며 보고)
민우 : 생각해봤는데, 결혼이라는 게 말야, 흥행에만 성공하면 아주 짭짤하더라구. 일단, 아파트 생겨, 차 바꿔, 아, 오디오!
경주 : ... 니 차 저쪽에 있지? 잘 가? (길을 건너려면)
민우 : (잡고) 우리, 잘 어울리는 한쌍 아니냐? ... 안되는 이유 세 개 만 대봐... 우선 세 개만 응?
경주 : 너랑 나랑은! ... 넌 아직 나한테 장미꽃 한 송이도 안줬어.
민우 : 정말 서운했구나? (웃고) 서경주도 샘낼 줄 아네?
경주 : 아니라니까!
민우 : 그래, 그래. 꽃 주고, 반지 주고, 세 번째는 뭐지? 아! 그거! 야, 우리는 우째 뽀뽀도 한번 안해봤을까?
경주 : (핸드백으로 탕탕 후려치고)
민우 : (처음에는 웃다가) 어어! 미안 미안... (경주의 표정을 보고) ... 정말 화났구나? 농담이었어...
경주 : ... (돌아서서 길을 건너는데, 약 오르고 서운해서 눈물까지 글 썽해진다)
민우 : 넌, 화내는 거 안 어울려! 알지? 잘 가라!
경주 : ...
S#19. 원희의 방 (동 밤)
아주 작은 골방.
커다란 종이 박스들이 쌓여있고, 원단들과 재봉틀. 벽에는 그림들.
원희, 창가에 민우가 준 꽃을 놓는다.
원희 : ...
S#20. 최고 나염 (아침)
차에서 내리는 원희, 어제 못지 않은 옷차림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민우부 : (지나가다가 보고) 누가 다방에다 커피 배달 시켰드노! (핸드 백을 보고) 아인가?
원희 : 커피요? 허우 참. 사무실이 어디죠?
민우부 : 저쪽으로 가보소.
S#21. 동 사무실
민우모 : (창문으로 원희의 옷차림을 보고) 저거는 또 무슨 패션이고?
원희 : (들어오며) 안녕하세요? 유비텍에서 왔는데요?
민우모 : 와, 갱주가 안 오고?
원희 : 제가 담당이예요. 청구서 주세요.
민우모 : (청구서 쓰며, 힐끗 보고) 염색한 거 보이까 불량품이네... 공짜가 암만 좋아도... 디자이너 자존심이 있는 긴데...
원희 : 아줌마!
S#22. 공장 안과 마당
공장 안은 작업의 열기와 소음으로 후끈하고.
민우부는 직공들과 함께 손수 고마질을 한다.
원희, 문 근처에서 건성으로 구경하는데. 누군가 어깨를 쳐서 돌아 보다가 깜짝 놀란다.
민우, 염색한 천을 롤에 말아들고 서있다.
민우 : 왔어요?
원희 : 어머... 그럼 ... 어머...(민우부에게 굽신 절하며 쩔쩔매고)
민우부 : (민우에게) 뭐 하노! 일하다가 팽개치구! 퍼뜩 안오나!
민우 : (팽팽하게) 손님 배웅하구요.
원희 : 아니 저, 저 괜찮아요. 그냥 일하세요
민우 : (가볍게 에스코트하며) 날씨 덥죠? 길, 안 막혔어요?
원희 : 네에... (돌아보며 민우부에게 다시 인사하고)
민우부 : (혀를 차며 돌아서고)
두 사람, 나오다가.
창 앞의 민우모에게 다시 절하는 원희.
원희 : ... 저는 부모님이신줄 모르고...
민우 : 신경쓸 거 없어요... 우리 꽃, 잘 있죠? (차에 샘플을 실어주며)
원희 : (보며) ...
S#23. 식당 (동 저녁)
유비텍의 회식 자리. 강과 허, 원희, 경주, 맥주잔을 들고.
허장 : 우리의 구세주, 서경주를 위하여! (부딪치고)
경주 : 그냥 아는 공장 소개한 건데요 뭐.
원희 : ... 그 공장이 그렇게 대단해요?
강 : 그 영감 눈썰미는 컴퓨터도 못 당한다는 거 아냐.
허장 : 일본에까지 소문 쫙 났잖아요... 하이고, 인제 경주씨 덕에 프린트 걱정은 안해두 되는 거네?
원희 : ... 경주씨는 좋겠네요. 백이 든든해서.
경주 : 아우, 뭘요.
허장 : 둘이 나이도 같다며? 그냥 확 말 터라, 응?
경주와 원희, 서로를 쓱 쳐다보며.
S#24. 포장마차 (동 밤)
소주잔을 딱 부딪치는 원희와 경주.
경주, 한 모금 마시다가 보면.
원희, 한번에 주욱 마시고는 다시 술을 따른다.
경주, 탁 털어 마시고, 똑 같이 자작한다. 둘 다 무표정하게.
옆자리의 남자들, 오메 기죽어, 무섭다 야 하며 작게 키득거리고.
원희 : 어른 막 따라하다가 다친다 응?
경주 : 나는 술 주정하는 애, 용서 못한다 응?
두 여자, 웃고.
S#25. 버스정류장 앞 (동 밤)
인적 끊긴 깊은 밤, 경주와 원희 나란히 걸어온다.
경주 : 너, 여기서 버스 타지? 막차 안 끊겼나 모르겠네.
원희 : ... 그 사람하고, 어떤 사이야?
경주 : 그 사람? (픽 웃고) 나한테는 그 녀석이야. 고2때 미술학원에서 만났으니 몇 년이야 벌써? ... 걔 술도 잘 못 마시거든?
으이그... 그 자식 등 쳐주면서 내 청춘 다 갔다는 거 아니니?
원희 : 말 돌리지 말자.
경주 : ... (보면)
원희 : 나, 너랑 잘 지내고 싶어. 근데 친구 남자 가로챌 수는 없잖아.
저만치에서 원희의 버스가 온다.
원희, 발을 내딛다가 돌아서서.
원희 : 그 사람, 니 남자야? 아니야?
경주 : ...
원희 : ... 먼저 갈께. (버스에 오르고)
S#26. 달리는 버스와 정류장 (동 밤)
버스의 창가에 앉는 원희, 힘든 말을 쏟아놓고는 감당키 어려워 고개를 숙인다.
시선을 돌리면. 경주가 걸어가다가 멈추어서 고개를 숙인다.
원희, 이를 앙다물며 외면하고.
버스는 경주를 스쳐간다.
경주, 돌아서서 다시 버스 정류장 쪽으로 간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이 뛰어와서 공중전화 부스 앞에 멈추지만, 막상 부스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바라만 본다.
그렇게 전화기를 바라보며 통화하듯이 혼자 말한다.
경주 : ... 여보세요? 민우니?... 내가 뭐 좀 물어볼 게 있는데... 너, 뭐냐? 나한테 뭐냐구우! ...
S#27. 경주네 아파트 (동 밤)
서른평 정도의 평범한 아파트 실내.
경주 : (들어오며, 밝게) 나 오늘 회사에서 칭찬 들었다?
경주모 : (문 열어주고 돌아서는데 비틀거린다) ...
경주 : (요즘 늘 그렇다) 엄마...
경주모 : 내가 왜 니 엄마야, 똑바루 불러. 새엄마! 계모!
텔레비전 앞의 경철, 무표정하게 리모콘만 이리저리 돌리고.
경주 : (다가가서 툭 치고, 작게) 술 못 마시게 하랬지.
경철 : 몰라!
경주모 : 우리 갈라서자, 인제. 아빠도 안계시니까 너네랑 나는 아무 상관없잖아. 피 한방울 안 섞인 남남이잖아.
경철 : 어후, (벌떡 일어나며) 누가 뭐래? 십 오년을 같이 살았어도 우리는 서로 남남이고, 엄마는 진짜 엄마두 아니야, 됐어요!
경주 : 경철아! (짜증난다)
경주모 : (주저앉으며 운다) 아이유 경주 아부지... 나두 좀 데려가지...
경철 : (방으로 들어가며 탕 닫고) ...
경주 : ...
S#28. 원희의 아파트 (동 밤)
원희는 낡고 좁은 아파트에 세 들어 살고 있다. 거실은 휑하게 삭막하고 몹시 지저분하다.
원희, 들어오다가 보면.
집주인인 20대 후반의 날라리 아가씨들, 여행 가방을 챙기고, 모자를 썼다 벗었다 정신없다.
여자1 : 어서 와 어서 와. 우리 바다 보러 간다?
원희 : 좋겠다... 재미있게 놀다 오세요. (들어가려는데)
여자1 : 그 코딱지만한 방, 답답하지도 않아? 우리 없는 동안은 안방 써라. 괜찮지? (친구를 보면)
원희 : (돌아보고) ...
여자2 : 그러엄... 니 월세 덕분에 관리비 내고 살잖아, 얼마든지 써.
원희 : ...
S#29. 원희의 방 (동 밤)
빠른 속도로 박히는 재봉틀의 바늘.
원희, 꽃무늬의 프린트 천을 박는 중이다.
바늘을 노려보듯, 치열하게 생각한다. 바늘땀이 지나쳐갔다.
쪽가위를 들어서 뜯어내며
원희 : 유원희... 너 지금 뭐하는 거니? 뭐 하자는 거냐구...그래, 별 거 아니야, 그냥 전화 한번 거는 건데 뭐.
지난번에 니가 준 꽃 활짝 피었거든. 우리 집에 놀러 올래?
창가의 꽃을 보다가 그만, 쪽가위에 손가락을 베인다. 아, 비명 삼키고
원희 : (천에 뚝뚝 떨어지는 피를 보며) ...
S#30. 원희네 아파트 앞 (동 낮)
달동네의 서민아파트
민우, 차에서 와인을 꺼내며 아파트를 올려다보면. 이층의 어느 창가에 자기가 주었던 꽃이 피어있다.
민우 : (긴장된다) ...
S#31. 원희네 아파트 실내
소박한 실내복을 입은 원희, 문을 열어준다.
거실은, 아주 깨끗하고 로맨틱하게 변해있다.
꽃무늬 레이스의 커튼과 쿠션, 방석들.
벽에는 원희의 작품으로 보이는 스카프 그림이 걸려있고.
민우 : 와! ... 여기서 혼자 살아요?
원희 : 아니, 저... 아는 언니랑 같이 살아요.
민우 : (커텐) 원희씨가 그린 거예요?
원희 : 네...
민우 : (웃고) 정말 천지사방에 꽃이네요? (쿠션과 스카프를 보고, 성큼성큼 안방으로) 봐도 돼죠?
열어보면, 화사한 침대 이불.
민우 : (얼른 닫는다, 조금 어색하고)
원희 : ... 이리 앉으세요.
S#32. 민우네 공장 (낮)
경주, 과일을 사들고 와서 인사하면.
민우모 : 이게 누고? 우리 민우, 니 보러 나간 게 아인가배?
경주 : 어.. 아저씨는 계시죠?
민우모 : 전화를 미리 했시모 안 나갔을 기 아이가. 퍼뜩 들어가서 삐삐 부터 쳐보자.
S#33. 같은 장소 (동 저녁)
두 사람, 원희의 포트폴리오를 보며 포도주를 마시고 있다.
예절바르게 묻고 대답하지만 긴장이 풀리지 않는다.
민우, 호출기 울리면, 들어서 보고는 그대로 끄고.
민우 : 집이네요. 별 일 아닐 거예요.
원희 : ... 과일 깎을까요? (일어나고)
민우 : 아뇨, 됐어요... 좀 심심하긴 하다 그죠? 아, 음악이 없구나?
원희 : (당황)... 잠깐만요. (민우가 말릴 틈도 없이 자기 방으로)
민우, 조금 불편하고 긴장되지만, 싫지는 않다.
방에서 나오는 원희, 땀을 닦으며 오는데 뒤에 감춘 손에 워크맨과 테이프 몇 개가 들려있다.
민우 : (그런 원희가 안타깝고 가엽고, 떨리는 기분) ...
원희 : 이거라두...
민우 : ...
민우, 음악을 틀고, 어색하게 이어폰 하나를 건네준다.
원희, 민우와 이어폰을 함께 꽂으려면 다가가 앉을 수밖에 없다.
민우 : ...
원희 : ... (땀이 흐른다)
민우 : 더워요? (땀을 닦아주며) 손님은 난데 왜 집주인이 이렇게 긴장을 해요?
원희 : ... 포도주 때문인가... (시선 피하는데)
민우, 손을 들어 원희의 얼굴을 잡고... 이윽고, 입 맞춘다.
원희, 손을 떨며 천천히 민우의 어깨에 매달리고.
두 사람의 키스, 뜨거워진다.
S#34. 민우의 방 (동 밤)
공장과는 대조적으로 고급 취향이다. 천장까지 들어찬 서가와 오디오, 음반과 씨디들, 컴퓨터, 카메라 장비와 포스터들.
경주, 민우의 침대에 앉아서 앨범을 보고 있다.
경주와 민우가 장 난끼 가득한 표정으로 찍은 사진들 보며 픽 웃고, 덮는다.
시계를 보면 11시가 넘었다. 일어나서 가방을 들고.
아쉽게 돌아서 보다가 스위치를 눌러 불을 끄고.
S#35. 원희의 아파트 앞 (밤)
민우, 겉옷을 든 채로 나온다.
이층의 원희 아파트를 올려다보면. 커텐, 여며져 있다.
민우, 차에 타고 시동을 건다.
민우 : ....
S#36. 원희의 아파트 거실 (동 밤)
열려진 안방에서만 불빛이 새나올 뿐, 거실은 깜깜하다.
벗은 어깨에 시트로 몸을 감싼 원희, 살짝 커텐을 들추고, 민우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본다.
S#37. 유비 탕비실 (아침)
원희, 커피를 끓인다.
경주 : (들어오며) 좋은 아침, 일찍 왔네?
원희 : 응...
경주 : 우리두 사무실에 커피메이커 하나 들여놓자, 응? (표정보고) 어디 아퍼?
원희 : ... 나, 그 사람하고, 잤어.
경주 : (보면)
원희 : ... (쟁반 들고 나간다)
경주 : ...
S#38. 지하철 역
계단을 달려 내려오는 경주.
전철에서 쏟아져 나온 인파에 부딪치지만 기를 쓰고 속도를 안 늦춘다. 이리저리 마구 부딪치고.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도 잊은 사람처럼 벽에 붙어서고.
S#39. 동대문 원단 시장
걸어가는 경주, 지게꾼의 진로를 막고 서 있다가 사납게 밀쳐지고.
행인들에게 떠밀리다가 넘어지고....
S#40. 민우의 공장 일각
민우, 웃통을 벗은 채로 고된 노동을 한다.
비오듯이 땀을 흘리며 일하다가 지쳐 주저앉고.
민우 : ...
S#41. 어느 까페 안과 앞(동 밤)
창 밖으로 거리가 보인다. 경주의 앞에 호출기 놓여 있고.
경주는 테이블의 전화기 단추를 눌러서, 호출 녹음을 듣고 있다.
민우모 : (F) 갱주 삐삐맞재? 갱주야, 이기 뭔 소리고, 대체? 니두 아나?
민우가 니 말고 다른 가스나랑 결혼 날짜를 잡는다카이. (저만 치에서 오는 민우가 보인다) 참말로 뭔 일이고 이기?
경주 : (민우를 보며) ...
민우 : (시선 들다가 창가의 경주를 본다)...
S#42. 같은 장소
경주와 민우 앞에 커피 두 잔 놓여있다. 둘 다 마시지 않은 채.
경주 : ... 그렇게 결혼이 하고 싶니? 장가 못 가서 아주 환장을 했구나?
민우 : 그렇게 말하지 마.
경주 : 뭐라구 그러면서 청혼할 건데? 겨우 세 번 만난 여자한테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럴 거야?
민우 : ...
경주 : 그럼... 너랑 같이 잤으니까 내가 책임질게? 그거야?
민우 : 그렇게 말하지 말라니까. 사랑? ... 뭐가 사랑인데?
경주 : 그걸 나한테 묻니? 알지도 못하는 여자랑 결혼하는 건 내가 아니고 너란 말야.
너는 도대체 유원희를 왜 사랑하는데? 너, 정리 잘하잖아. 이것이 사랑이라는 증거, 세 개만 대봐.
민우 : ...
경주 : 최민우가 유원희를 사랑하는 증거. 일,
민우 : 가자. (일어서려는데)
경주 : 너! 같이 잔 애가 한둘이니? 걔네들하고 다 진짜 연애한 거도 아니잖아.
민우 : (대꾸도 없이 가고)
경주 : ... (너무나 무참해진다)
S#43. 거리와 경주네 아파트 앞 (동 밤)
도시의 야경 속에 적막하게 달리는 민우의 차.
민우, 굳은 얼굴로 침묵하며 운전만 한다.
그런 민우를 보는 경주, 이별을 예감한다.
아파트 앞에 멈추는 차.
경주의 호출기 울리면 경주 끈다. 민우는 그대로 앞만 보고.
시간이 흐르는 느낌으로. 두 사람 미동도 없이 그대로.
경주의 호출기 또 울린다.
경주 : ... 집에 또 무슨 일 있나봐... 들어가야겠다. 아까 미안했어.
민우 : 이게 사랑인지 뭔지 모르겠어. 니 말처럼 겨우 세 번 만나놓고 사랑한다면, 그거 거짓말 아니니?... 그냥...
경주 : (보면)
민우 : ... 꽃을 주고 싶었어... 그 꽃, 너 주려고 힘들게 캐온 거였는데... 그 여자한테 주고 싶더라고.
경주 : ....
민우 : 꽃 이름 알아맞히면 주겠다고, 장난처럼 말했지... 그 여자가 틀렸어... 근데도 줬어....
나, 그 여자 처음부터 안고 싶었어... 다른 여자한테 그런 충동 느낀 적 없어... (경주의 위로) 너 한테서두.
경주 : ...
S#44. 청담동 거리 (동 밤)
고개를 꺾고 걸어가는 원희.
고품격 매장의 쇼윈도우와 화려한 조명이 원희를 스치듯 흐른다.
어느 웨딩샵의 매장 앞을 걸어가는 원희.
잠깐 웨딩드레스를 보지만, 일부러 외면하듯 이를 앙다물며 걷고.
S#45. 원희의 아파트
민우, 서있고.
문이 열리고 여자1과 2 수박을 든 채로 나온다.
여자1 : 누구세요?
민우 : 저... 원희씨.
여자2 : (뒤에서 웃으며) 어머! 내가 뭐랬니? 걔 내숭 맞다니까?
민우 : ... 집에 없습니까?
여자1 : 금새 올 거에요. 들어와서 기다리세요. (문을 활짝 여는데)
황폐하고 더러운 거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민우 : ...
S#46. 원희네 동네 (동 밤)
가파른 계단이나 오르막길.
민우, 표정 없이 서 있다.
이윽고 저만치 아래에서 지친 원희가 올라온다.
원희는 민우가 보고있는 것도 모르고, 지친 발걸음으로 힘겹게 올라오며, 자기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쉰다.
민우, 원희를 바라보다가, 내려간다.
민우 : 걸음걸이가 왜 그래요? 할머니가 올라오는 줄 알았어.
원희 : (보며)
민우 : (팔을 잡으며, 간다) 저 위에 라일락 피어있는 거 알아요?
원희 : ...
S#47. 근처, 공터 (동 저녁)
꽃나무 아래 그늘에 나란히 앉아 있는 원희와 민우.
원희 : ...
민우 : ... 할 말이 없네... 가족은 어떻게 되요?
원희 : 부모님이랑, 오빠 둘하고 남동생. 다 부모님 곁에서 농사짓고 살아요. 저만... 애물단지죠.
민우 : 나는, 어머니가 마흔 넘어 얻은 자식이라, 버릇없이 응석받이로 자랐어요...
우리 아버지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분이에요. 중간에서 마음 고생 많이 할겁니다.
원희 : (보면)
민우 : 뭘 그렇게 멍하니 봐요? 나, 지금 프로포즈하는 거예요. (보면)
원희 : (당황해서 고개를 돌린다, 멍하다)
민우 : (보며) 고개 돌리지 말아요. 얼굴 안보여.
원희 : ... 담배 있어요? 나 담배 잘 피워요. 몰랐죠?
민우 : 어, 몰랐네. (담배 꺼내면)
원희 : (받지 않고, 피식 웃는다) 정말 웃긴다.... 이럴 때, 다른 사람들 은 보통 사랑한다는 말부터 하지 않나요?
방금 그게 청혼이라면 거절할래요.
민우 : (보면)
원희 : 나는, 서경주랑 달라요.
민우 : 경주는 내가 잘 알아요. 여기서 걔 얘기 할 필요 없어요.
원희 : 우리 집 봤죠? 나, 그렇게 살아요. 어젯밤에 보여준 거, 다 거 짓말이예요. 전부 다... 정 떨어지지 않아요?
민우 : ...
원희 : 나도 서경주처럼 맑고 투명하면 좋겠어요, 다들 저더러 독하고 질긴 년이래요.
그러니까... 책임감 느낄 필요 없다 그 얘기예요... 언제 술이나 한 잔 하죠, 그것두 모르죠? 나 술고래예요.
원희, 돌아서 가는데. 민우가 팔을 뻗어 잡는다.
민우 : 내가 싫어요?
원희 : (멈추고) ...
민우 : 난 원희씨랑 같이 살고 싶은데... 예쁜 집 꾸미고 사는 거 보고 싶어요... 내가 그렇게 해줄께요.
원희 : ... (고개 숙이는데, 눈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
S#48. 아파트 계단 (동 밤)
복도식 아파트의 인적 없고 어두운 계단(10층쯤).
경주, 깜깜한 계단에 넋 놓고 주저앉아 있다. 호출기의 불빛은 자꾸만 반짝거리고.
경주, 이윽고 일어나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오른다. 아무런 감각도, 감정조차 없이 그저 호출기를 손에 들고 걸어 올라간다.
S#49. 경주네 아파트 (동 밤)
경주, 키로 문을 열고 들어온다.
구두를 벗을 때 집어던진 옷가지를 밟지만 공황상태에 빠져서 아무 것도 못 느낀다. 그저 방으로.
거실은 빚쟁이들이 몰려와 난리를 치고 가서 난장판이 되었다.
경철 : (전화 걸다가, 문 밖까지 뛰어가 보고) 누나, 왜 인제 와! 엄마는! 엄마는 안 왔어? 엄마아...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린다)
경주 : (그제서야 돌아보고) 응?
경철 : 누나아! 엄마 찾아와 응?
경주 : ? (둘러보고) 이게 다 뭐니? (발치의 서류를 들어본다) ... 이게 뭐야?
경철 : (눈물 닦으며, 진정하고) 이 아파트 인제 우리 집 아니래. 벌써 한달 전에 경매 넘어갔데. 한 달이나 됐데.
경주 : 이모네 보증선 거땜에? 그거 다 해결됐잖아... 아니야? 이모는 뭐래?
경철 : 연락 안돼... 우리 엄마, 불쌍해서 어떡해? 우리한테 말도 못하고, 혼자서...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허우우, 누나! 엄마 좀 찾아봐 응? 우리 엄마 갈 데도 없잖아?
경주 : ... (주저앉고)
S#50. 어느 산, 경주부의 산소 앞 (새벽)
경주와 경철, 올라온다.
저만치 보이는 아직 뗏장도 안 돋아난 무덤 앞에 혼절해서 쓰러진 경주모가 보인다. 그 옆에 소주병들 보이고.
경주, 막막한 기분으로 멈춰서고.
경철 : 엄마아! (달려가 부둥켜안고) 엄마! 눈 떠봐! 괜찮아?
경주모 : (외면하는데 눈물이 흐르고)
경주 : (미운 마음에 고개 돌리고)
경철 : 엄마, 괜찮은 거지, 응? (어깨를 팍팍 치며) 으유 바보! 겨우 여기 밖에 올데 없으면서 집은 왜 나와!
이러다 죽으면 어떡 하려구!
경주모 : ... 나 같은 건 죽어야 돼.
경철 : 죽어? 어후 그래! 나는, 누나랑 나는 어떻게 상관없지?
경주모 : 정말 면목이 없다... 내가 진작에 떠났으면 되는 건데... 갈데가 있어야 말이지...
경주야, 우리 지금이라두 갈라서자. 그럼 재판 걸어서 집 찾을 수도 있데. 너네랑 나랑은 사실적으로 남남이니까
경주 : (숨도 제대로 쉬어지지 않는다 하아우 하며 심장을 툭툭 두드 리며) ...
경철 : 그래! 그래, 엄마 가고싶은 대로 가!
경주모 : 경주 아버지... (흐느끼고)
경주 : 엄마, 경철아... (두 사람, 돌아보면)... 나 배고파. (간다)
경주모 : ... 경주야.
경주 : 집에 가자, 엄마... 우선 밥부터 먹구 그 다음에 생각하자, 응?
S#51. 민우네 집 마당 (낮)
공장 옆의 오래된 2층집.
민우를 따라 들어오는 원희(얌전한 정장에 한과를 들고).
민우 : 덩치만 크지 낡았어요. (민우모 나오면) 저희 왔어요.
민우모 : ... 그렇게 차려입으니 딴 사람 겉네?
원희 : ... (인사하고)
민우 : 아버지는요? (굳는다) 모시고 올게요, 들어가 있어요. (모친을 보면)
민우모 : 니 없는 동안에 각시 잡아 묵을까봐 겁나나? (들어가고)
원희 : ... (겨우 웃고) 다녀오세요.
S#52. 동 안 거실
거실 한 켠에도 원단들이 마구 쌓여져 있다.
민우모 : 우리는 이렇게 산다. 앉그라. 그건 뭐꼬?
원희 : 예... 한과가 맛있어 보여서.
민우모 : 한과? 흥! 이바지 음석을 벌써 해오는 것도 아일기고... 다음부터는 고기나 댓근 끊어오면 된다. 앉으라는데 뭐하노?
원희 : ... (앉는다)
민우모 : 우선 아파트부터 정하고, 나머지도 니 둘이 다 알아서 해라.
원희 : 네? 아니, 저는... 여기서
민우모 : 니 편하라꼬 그라는 거 아이다. 우리 아들 소원이 식구끼리만 오붓하게 깔끔하게 차려놓고 밥 묵는 거 아이가...
유난스럽은 아비 덕에 공장 직공들하고 식당에서 밥 먹고, 일도 똑같이 하고... 내도 그 꼴 더는 못 보겠다.
원희 : 네...
탁자에 민우모의 생일에 경주 민우와 함께 찍은 사진이 보이고.
민우모 : 섭섭하게 듣지 말그라. 우리는 갱주를 한 식구로 여긴다.
앞으로 혹시라도 갱주헌테 시샘하고 그러지는 말그라, 알아듣겄나?
원희 : 네...
S#53. 민우네 공장 사무실
민우, 지켜서있고. 민우부는 아랑곳 않고 자기 일을 다한다.
민우부 : 기어이 하겠다 이말이가.
민우 : 네, 반대하실 이유가 없잖아요. 빨리 장가들어서 아들 낳아야 된다고, 대학 재수도 못하게 하셨어요.
민우부 : 니, (쏘아보며) 사고 쳤드나?
민우 : ... 네.
민우부 : (서류뭉치로 아들을 툭 치고)
민우 : ...
민우부 : (가며) 절이나 제대로 하는지 가 보자 어데.
S#54. 민우네 안방
원희, 떨며 절을 한다.
민우 부모, 표정 없이 절을 받고.
민우는 조용히 지켜 서 있다가 함께 앉고.
민우모 : 드셔보소. (차와 한과가 놓인 탁자를 끌어놓고) 쟈가 사왔네예.
민우부 : 쯔, 겉치장만 번지르한 거.
원희 : ...
민우모 : (먹고) 그래도 비싼 값을 허네... 앞으로 우리헌테는 신경쓸 거 없다. 그저 느그 둘만
민우부 : (O.L) 서방 비위 맞추는 것도 쉽지는 않을 기다. (민우를 척 보고)
민우 : ...
민우모 : 그 말은 맞다. 무식한 부모 밑에서 우째 저런 귀족이 나왔노 싶게 고급 취향아이가.
니도 촌에서 자랐으니 보고 배운 것도 없을긴데, 우째 맞추겄노?
민우 : 보고 배운 게 왜 없어요, 직업이 디자이넌데.
원희 : ... 가르쳐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민우부 : 참, 고생문이 훤하다.
민우 : (웃어주며) 겁먹지 말아요. 우리식구 괴물 아니니까.
민우모 : (웃고) 그래, 내 봐라, 이 영감한테 큰소리 떵떵치고 안사나? 니도 아들만 낳으면 게임 끝이다...
이 최씨네 가문은 아들 못 낳은 여자는 사람 축에도 안 끼와준다. 알겄나?
원희 : ...
S#55. 화원
줄기가 길고 탐스럽게 핀 빨간 장미 한다발을 골라드는 경주.
경주 : 예쁘게 포장해주세요.
여주인 : 요새는 여자들도 꽃 선물 많이 하네.. 애인 주려고?
경주 : ... 네.
S#56. 디자인실 (동 밤)
불이 켜지고. 꽃다발을 들고 들어오는 경주.
자기 작업대에 놓고 바라본다.
S#57. 같은 장소 (아침)
원희, 출근해서 청소를 하려다 보면. 유리병에 꽂혀져있는 꽃.
작업대 아래, 많은 스케치와 그림들이 버려져있다.
원희 : ...
경주 : (소리) 좋은 아침?
돌아보면, 말갛게 세수를 한 경주, 수건을 들고 들어온다.
경주 : 꽃 그림이 정말 쉬운 게 아니네. 선배님, 이것 좀 평가해주실래요? (아트웍을 보여준다)
원희 : (받아본다) ... 잘 그렸네.
경주 : 팔리겠어? 상품이 되겠냐구?
강실장, 굿모닝하며 들어온다.
경주 : 실장님, 저 대출 좀 해주세요.
강실장 : (보면)
경주 : 대출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구요. 상환기일은 길면 길수록 좋구요.
강실장 : 알아보자. 근데 경주씨, 일년 안에 독립한다구 그러지 않았어?
경주 : 독립 안해요... 아니, 못해요.
강실장 원희 : (보면)
경주 : 독립해서 대박만 치라는 법 없잖아요. 망하면 안돼요, 저는
강실장 : 그럼, 그래서 너두 나두 월급에 목숨 걸고 사는 거지...(방으로)
경주 : 커피 마실 거지? (나가려는데)
원희 : 경주야... (잡고) 무슨 일 있니?
경주 : 별 일 아냐... 너, 결혼하고도 계속 근무할 거지? 혹시 내가 불편하니?
원희 : ...아니, 괜찮아... 불편해도 할 수 없잖아....
경주 : (조금 웃어주고) 그래, 불편해도 할 수 없지 뭐.
S#58. 예식장
민우, 돌아서고.
사회자가 신부 입장 외치면.
늙은 농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걸어 들어가는 원희.
뒤에 서 있다가 지나가는 원희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는 경주.
허장 : 카아! 신부 죽이게 이쁘다.
경주 : 네, 이쁘네요.. (뒤늦게 온 강에게 손짓하고) 저 대기실에 갔다 올께요. (간다)
허장 : 그래, 수고- (강에게) 쟤 진짜 바보 아녜요? 지 남자 뺏기구 뭐가 좋아서 심부름까지 해줘?
강실장 : 거 참.
허장 : 근데 왜 늦었어요?
강실장 : 어, 오다보니까 아래층에서 후배 녀석이 결혼을 하네?
S#59. 동 예식장 다른 방 앞
정환과 정환모 나란히 서서 하객들과 인사한다.
정환모 : (넥타이, 꽃을 만져주며) 안 떨리니?
정환 : (일부러 와들와들 떠는 시늉해서 어머니를 웃기고) 우리 어머니 외아들 미국 보내놓고, 외로워서 어쩌누?
정환모 : 응, 멋쟁이 친구 사귀려고 영어 회화 학원 끊었다.
정환 : 음... 그래야 우리 엄마지 그럼.
그때, 신부의 친구가 달려와서 정환에게 귀엣말을 한다.
S#60. 동 예식장 신부 대기실
넓은 공간. 정환이 들어오면.
화관, 신혼 여행 복, 피로연 드레스, 전부 내던져져서 뒹굴고.
웨딩드레스의 레이스를 부욱 뜯어내는 채옥, 차분하고 냉정하다.
도우미와 친구들 속수무책으로 있다가 정환이 신호 보내면 모두 나가고.
정환 : ... 그거 자기네 학교 교수님 작품 아니야?
채옥 : 난 맘에 안드는 옷, 절대 못 입어요.
정환 : 어제까지는 최고라며? ... 아침 내내 화장 가지고 난리 치고, 머리 고치고, 드레스 바꾸고...
진짜 니 마음에 안드는 게 뭐야, 대체?
채옥 : 전부 다 싫어요. 이 예식장도 싫고, 부케도 싫어! (발을 쭉 뻗으면 굽이 전혀 없는 단화)
내가 왜 드레스 밑에 이런 걸 신 고 나가야 돼!
정환 : ... 나랑 결혼하는 게 싫은 거니?
채옥 : (고개 들어본다) 네... 아저씨랑 결혼하기 싫어요.
정환 : (기가 차서 픽 웃고) 다른 남자라도 있어?
채옥 : 사람을 뭘로 보고 그따위 더러운 말을 하는 거야! 나, 윤채옥이가 한정환하고 결혼 못하겠다는데!
채옥, 정환의 뒤쪽 벽을 향하여 부케를 던진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부케.
S#61. 원희의 결혼식장
부케를 던지는 원희. 하객들, 박수 쳐주고.
경주, 손을 뻗쳐서 받아든다. 행복한 듯이 활짝 웃는 경주.
S#62. 신부 대기실
정환, 바닥에 떨어진 부케를 주워든다.
정환 : 진정해... (꽃을 건네는데)
채옥, 다시 던진다. 벽에 부딪쳐 떨어지며 꽃잎이 흩어지고.
정환 : 그렇게 해서 망가지냐? 아주 밟아라 자. (발치로 던져준다)
채옥 : (일어서며 정환을 쏘아본다)
정환 : (지지 않고 마주 쏘아보며)
채옥 : (이를 앙 다물더니, 발로 부케를 쾅쾅 밟는다)
정환 : (질려서 두 손을 들어보이고 나간다)
채옥 : (그제서야 멈추며, 괴롭다) ...
S#63. 계단
정환, 계단을 올라와 옥상으로 통하는 문을 밀지만 막혀있다... 주먹으로 쾅 치고... 돌아서서 담배를 피며 내려온다.
부케를 든 경주가 올라오고 있다.
무표정하게 스치는 경주와 정환.
정환 : (재떨이에 재를 떨다가 돌아보면)
경주 : (옥상 문까지 올라가고)
정환 : 거기 잠겼어요.
경주 : (반응 없이 문을 민다)
정환 : 아!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아요! 문 잠겨서 옥상에 못 간다잖아요!
경주 : (그 소리를 신호 삼듯, 발작적으로 울음을 터뜨린다)
정환 : (놀라서 힐끗 보고는) 미치겠네... 오늘 만나는 여자들 전부 왜 이러냐. (계단을 내려간다)
S#64. 채옥의 대기실
정환, 들어오면.
채옥, 그대로 멍하니 있고.
정환 : ... 인제 속이 시원해?
채옥 : (풀썩 앉더니) 나 한 대만 팍 때려볼래요? 주먹으로 진짜 아프게 한대 치고... 깨끗이 잊어주세요.
만난지 한달도 안됐으니까 금새 잊혀질 거예요, 네?
정환 : ...
채옥 : 너무 미안해요... (눈물이 터지지만 우는 것도 미안해서 꽉 누 르며) 나, 아저씨 이용했어요.
정환 : ... 내가 뉴욕에 발령난 거 알고, 맞선 본 거잖아. 누가 모르니?
채옥 : 나, 정말 우리 엄마처럼 살기 싫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일 하면서 살 거예요... 나, 정말 유학 가고 싶어요...
그래서 결혼하는 거예요. 아저씨한테 반해서 하는 거 아니에요.
정환 : ...
채옥 : 미안해요... (울음 터뜨리는데)
정환 : (그런 채옥의 앞에 턱, 무릎을 꿇는다)
채옥 : (어어, 깜짝 놀라다가 얼른 같이 끓는다)
정환 : (채옥의 두 손을 잡아주고) ... 나, 못된 구석 많아... 너두 별로 밀리지는 않을 거 같네...
못 되먹은 사람들은 상처가 많아서 그런 거래잖아... 사는 게 뭐 별거겠어? 우리 둘, 너네 부모님, 우리 어머니...
서로 불쌍히 여기면서, 그렇게 살자, 응?
채옥 : ...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정환 : (채옥을 일으키며 시계를 본다) 인제 들어가자.
채옥 : (끄덕이고 거울 보며 눈가를 정리하다가) 아! 부케!
정환 : (짓밟힌 부케를 들어보고) 그냥 들어가면.. 안돼?
채옥 : 부케 없이 어떻게 결혼을 해요! 정환씨이... 어떡해, 응? 응?
정환 : (허우우 하며 무조건 뛰쳐나간다)
S#65. 동 계단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에 경주, 울음을 멈추고.
경주, 일어나 눈물 닦으며 계단을 내려오는데. 정환이 막아선다.
정환 : 실례합니다. 저... 이거 내 명함, 다음에 만나면... (명함을 꺼내는 것도 우습다, 무작정 부케를 뺏어든다)
경주 : (얼이 빠져서 눈물 젖은 눈으로 보고)
정환 :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줄행랑 치듯이 부케를 들고 뛰어가는 정환.
그런 정환을 멍하니 보는 경주에게서. 스톱.
S#66. 지하철 역
빠른 속도로 달리는 지하철. 반대편에서 같은 속도로 또 한 대가 달려와 굉음을 내며 엇갈려 달려가고.
반대편에서 오던 지하철 이윽고 플랫폼에 멎고, 문이 열리며.
고단하고 권태로운 일상에 함몰된 서른 한 살의 경주, 내린다.
S#67. 백화점 여성의류매장 (낮)
경주, 옷들을 예리하게 살피며 걷는다.
어떤 원단은 손가락으로 만져보고, 슬쩍 제조상표를 보고, 점원에게 이거 많이 나가나요 묻고,
카탈로그를 받아서 가방에 넣는다.
수첩에 메모하면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경주.
그런 경주와 엇갈리며 올라오는 정환, 매장 안으로 들어간다.
경주처럼 원단을 만져보고, 제조 상표를 확인하고, 목에 건 소형 디지털카메라로 찍는다.
점원에게 이거 많이 나갑니까 물으며 카다로그를 받고, 매너좋게 인사하고 나오며 소형녹음기를 켠다.
정환 : 찬우 실업, 솔리드는 좋으나, 니트에 문제 있음. 구매담당 접촉 타진. (다른 코너를 일별하며 빠르게 걷는다)
미린은 디자인 개발이 전혀 되지 않고 있음. (녹음기 끄며) 다시 말하면, 망하기 전에 외상값 받아내고 쫑내자, 이 말씀.
S#68. 동 침장류 매장
경주, 침대 시트에 칼라칩을 대조해서 같은 색을 찾아낸다.
걸어가면서 카다로그를 넣고 수첩을 꺼내는 와중에 원단 샘플들을 떨어뜨린다.
그것을 주워주는 작은 손, 재동(6세, 정환의 아들)이다.
경주 : 고마워. (받고, 수첩에 적는데)
재동 : 아줌마도 걸레장사예요?
경주 : 뭐? (돌아보고)
재동 : 지금 시장 조사하는 거죠? 우리 아빠두 원단 컨버턴데.
경주 : 원단 컨버터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아니?
재동 : 네! 우리 아빠는 좋은 원단을 찾아내서 저런 거 만드는 데다 팔아요, 수출도 많이 하구요.
경주 : 그럼, 우리 나라가 섬유 강대국인 것도 알겠구나? 수출의 역군 아드님이 걸레가 뭐야 걸레가!
도대체 너의 아빠는, 애한테
정환 : (소리) 재동아, 왜 그래?
재동 : (아빠! 부르며 다리에 매달리고)
경주, 돌아보면. 정환이 서있다.
두 사람, 전혀 못 알아본다.
정환 : (경주를 보며) 우리 애가 뭐 잘못했습니까?
경주 : 아니예요. (가려다가) 제가 나설 일은 아니지만, 어린애한테 부모 직업을 비하하는 건
정환 : (O.L) 걸레 장사라고요? (웃고) 그만한 일로 뭘...너, 이 아줌마한테 뭐 잘못한 거 또 있냐?
재동 : 저기 아빠... (작게) 아직 결혼 안 하셨나봐.
경주 : (보면)
정환 : 하하. 그럼 아줌마라구 부르면 안돼지이? 화 내실만 하네!
경주 : (기가 막혀서 말도 안나온다, 멍한 사이에)
정환 : (경주의 머리에 붙은 실밥을 떼 주며) 동대문에서 일하시나? 낯이 많이 익네요, 그럼 또.
또다시 어처구니없이 당하는 경주와 스쳐 지나가는 정환에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