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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박혁거세거서간 승하
기사의 은유와 상징에 대한 현대적 해석
69세손 박 희 용
삼국사기 박혁거세 승하 반년 전 기사는 다음과 같다.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60년(서기 3년) 가을 9월에 용 두 마리가 금성(金城)의 우물 안에서 나타났다. 갑작스럽게 천둥이 치면서 비가 쏟아졌다. 성의 남쪽 문에 벼락이 쳤다>
그러나 삼국사기 박혁거세 승하 기사는 두 문장으로 간단하다.
<六十一年 春三月 居西干升遐 葬虵陵 在曇巖寺北
61년(4) 봄 3월에 거서간이 승하(升遐)하였다. 사릉(蛇陵)에 장사 지내니, 담암사(曇巖寺)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승하 기사는 일곱 문장으로 상세하다.
<理國六十一年王升于天 七日後遺體散落于地 后亦云亡 國人欲合而葬之有大虵(蛇)逐禁 各葬五體爲五陵亦名虵陵 曇嚴寺北陵是也 太子南解王継位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다.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다.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국인들이 합장을 하려고 했더니 큰 뱀이 나와서 내쫓아 못하게 했다. 5체(五體)를 5릉(五陵)에 각각 장사지내고 역시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도 했다. 담엄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박혁거세의 무덤인 사릉(蛇陵)은 경주시 탑동 67-1번지에 소재한 오릉(五陵)을 가리킨다.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와 그의 아들 제2대 남해차차웅, 그의 아들인 제3대 유리이사금, 그의 아들로 탈해의 뒤를 이어 다시 박씨 왕실의 시대를 연 제5대 파사이사금 등이 묻힌 무덤으로 본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전한다. 이들 네 명에 시조 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을 더해 도합 5명이 묻혔다고 해서 ‘오릉’이라고 불려왔다.
한편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1 신라시조 혁거세왕조에서는 오릉을 혁거세의 다섯 유체를 각각 묻은 것으로 전한다.
정사인 삼국사기의 기록이 합리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정사는 실제보다 형식 위주이므로, 삼국유사의 기록이 터무니없다고 할 수도 없다. 역사의 진실이 정사보다 야사와 구전 민담에 담겨있는 경우가 많다.
일연 김견명이 삼국유사를 지은 때는 1281년으로 박혁거세 사후 1277년 후이다. 일연이 알 수 없는 한참 아득한 과거이다. 그러므로 일연이 전해오는 사서나 민담, 구전을 취합하여 기사를 만들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사가 워낙 간단하기 때문에 상세하게 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불교학자인 일연이 무단히 없는 이야기를 소설로 만들어서 싣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1145년에 삼국사기를 지을 때 김부식은 무엇을 근거로 하였을까. 아마 전해오는 최치원 등 학자들의 삼국사나 신라사를 자료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삼국유사에서 언급하는 이야기는 황당하다고 해서 뺐을 것이다. 하늘로 올라간 왕이 여러 토막이 되어 흩어져 땅에 떨어지고, 큰 뱀이 나타나 방해하는 것 등은 유학자로서 싣기 어려운 황당한 이야기다. 김부식은 박혁거세와 알영, 고주몽 등 신화를 전해 오는 이야기 차원에서 할 수 없이 실었지만, 이후에는 합리적인 기사만 실었다.
일연 역시 박혁거세와 알영 등의 신화가 황당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불교학자였다. 그러나 전해오는 이야기 자체가 그러하니 그대로 실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지을 적에는 불법 홍보의 목적도 있었지만,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왕조사와 정치사에 편중하면서 놓친 민간에 떠돌고 있는 신화, 민담, 전설, 설화 등을 수집하여 민족문화를 보전한다는 목적이 더 컸다. 그러면서 선택한 기이, 흥법, 탑상, 의해, 신주, 감통, 피은, 효선 등의 편목과 내용들은 삼국유사의 기사들이 당시의 역사적 실체를 은유와 상징의 기법으로 나타내려는 일연 등 민간 사가들의 작문 방법이므로 은유와 상징을 해제함으로써 당시의 역사적 실체의 일단을 재구성해 볼 수 있다.
삼국사기 기사대로라면 죽음과 장례는 쉽게 끝났다. 그런데 삼국유사는 거기에 은유와 상징으로 이야기를 보탰다. 더구나 승하 반년 전의 『삼국사기』 기사는 합리성을 잠시 접고 용 두 마리를 등장시키는 파격으로서 이미 반년 전에 궁궐 내부에 무슨 큰일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서기 4년 박혁거세의 죽음과 장례가 원만하게 무사히 마쳤다면 당대든 후세든 사람들이 구태여 토 달아 이야기를 만들어 낼 이유가 없다. 호사가들이 만든 이야기였다면 세월이 흐르면 흐지부지 사라진다. 그러나 무언가 큰일이 있었기 때문에 은유와 상징의 이야기는 꾸준히 이어지고 기록으로 남아서 1280년 세월이 지나서도 일연의 눈에 띄었다.
그러므로 박혁거세거서간의 승하와 장례 기사에 표현된 은유와 상징을 통해 나타난 사실인 죽음과 장례가 결코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을까. ‘아무 일도 없었다’가 아니고 ‘ 무슨 일이 있었다’라는 후세인들의 억측과 상상, 가설과 학설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먼저 승하 반년 전의 기사를 살펴보자.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9월에 용 두 마리가 금성(金城)의 우물 안에서 나타났다>
용이 한 마리가 아니고 두 마리가 나타난 곳은 다른 데가 아니고 금성, 즉 궁궐이고 우물 안이다. 용은 왕과 왕비나 왕자, 공주를 상징한다. 우물 안에 나타난 용은 알영이 태어난 계룡과 연결된다. 그런데 우물은 원래 한 마리 용의 영역이다. 두 마리니까 서로 싸울 수밖에 없다.
<暴雷雨 震城南門 갑작스럽게 천둥이 치면서 비가 쏟아졌다. 성의 남쪽 문에 벼락이 쳤다>
용 두 마리, 천둥, 비, 남문, 벼락은 갑자기 어떤 돌발적인 사건이 벌어져서 소란스러웠다가 남문에서 승부가 난 상황을 상징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을 왕위 계승과 연계하여 보면, 우물이라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왕자들이 싸우거나, 왕자와 공주의 남편, 즉 부마가 싸운 상황을 예상할 수 있다. 또한 알영 왕후도 계룡 신화의 후광이 있으므로 왕위 계승권이 있다. 박혁거세 승하 6개월 전이니 아마 박혁거세거서간이 중병에 들어 후계자를 다투는 상황이 발생했을 것이다. 남해가 태자였겠지만 무사히 왕위를 계승한다는 보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왕자와 공주가 왕위를 탐낼 개연성이 충분하다. 그러나 박혁거세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큰 탈 없이 수습됐을 것이다.
그날 아무 일이 없었다면 유학자로서 신화와 설화를 무시하는 김부식이 이런 기사를 삽입할 까닭이 없다. 사건이 벌어진 후의 신라 사가들도 시조왕가의 치부를 함부로 거론하거나 기록으로 남길 수 없었으므로 은유와 상징으로 처리하여 기록을 남겼을 테고, 김부식 역시 경주김씨 왕가의 후예로서 신라 시조왕가의 치부를 사서에 직설하여 올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이 기사를 마중물로 하여 『삼국사기』의 다음 기사를 살펴보면 당시의 상황이 그림으로 그려진다.
<理國六十一年王升于天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74세면 당시로는 장수로서 자연사라 할 수 있다. 20위 8년 만인 기원전 50년경에 이미 倭가 변경을 침범하려고 했다. 신라가 6부의 부족국가 형태를 벗고 고대국가형태를 갖추면서 남한 지역의 여러 소국들과 경쟁, 견제. 충돌, 외교 등의 관계를 맺으며 왕권이 강해지고 발전하기 시작했다.
<七日後遺體散落于地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으며>
이레 뒤에 하늘에서 유체가 흩어져 떨어진 게 아니라 박혁거세거서간의 죽음이 결코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처음부터 시신이 여러 부분으로 흩어질 정도로 무참하게 살해될 정도로 무슨 변고가 있었다는 말이 된다. 왕을 무참하게 죽일 정도로 왕위를 둘러싼 권력 투쟁이 7일 동안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권력 투쟁이 누구와 누구 사이에서 벌어졌겠는가. 한쪽은 분명히 태자 남해이다. 다른 쪽은 박혁거세거서간 사망 반년 전에 벌어진 두 마리 용의 싸움, 즉 내전에서 남해에 맞섰던 사람이다. 둘 중 한쪽에서 박혁거세거서간을 무참하게 죽였고, 그에 복수하는 쪽에서 결국 승리하고 왕위를 계승했다. 즉 태자 남해가 승리하여 왕위를 이었다.
<后亦云亡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왕후가 애도가 지나쳐서 과로사한 게 아니라 7일 동안에 벌어진 왕위 계승 투쟁 끝에 죽었다. 혁거세가 살해된 후 7일 동안 치열한 내전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서 알영 왕후는 어떤 이유에선지 죽음을 맞았다.
<國人欲合而葬之 국인들이 합장을 하려고 했더니>
내전이 끝나고 왕위가 확정된 후에 국인들이 합장하려고 한 대상이 박혁거세의 흩어진 시신을 모아 한곳에 묻으려 한 것인지, 죽은 알영 왕후의 시신을 박혁거세거서간과 함께 묻으려 한 것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有大虵逐禁 큰 뱀이 나와서 내쫓아 못하게 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합장에 찬성했지만, 오직 큰 뱀, 즉 거대한 권력을 가진 한 사람만이 반대해서 합장하지 못했다. 큰 뱀은 장차 용이 될 태자인 남해이다. 그런데 태자 남해는 왜 합장을 반대했을까.
<各葬五體爲五陵亦名虵陵 5체(五體)를 5릉(五陵)에 각각 장사지내고 역시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니>
그래서 할 수 없이 유해를 다섯으로 수습해서 다섯 개의 능을 만들어 각각 장사지내고, 그 이름을 큰 뱀이 나타나 따로 묻게 했으므로 사릉이라고 하였다.
남해가 국인들의 뜻을 거슬러 합장을 반대한 까닭은 부왕이 자연사가 아니라 무참하게 시해당했고, 치열한 내전에서 승리하여 왕위를 이었음을 세상과 후세에 널리 알리려는 목적을 가졌을 수 있다. 그것이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또, 국인들이 알영 왕후를 박혁거세거서간과 합장하려고 했지만 태자 남해 홀로 반대했다는 관점에서 보면, 남해가 알영 왕후에 대해 섭섭한 마음이 많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왕위 계승전 1차전과 2차전에서 알영 왕후가 남해 편을 들지 않고 다른 왕자나 공주의 편을 들었을 수가 있다.
조선조와 달리 초기 신라는 왕위를 장남이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이 희박했다. 그러니 왕비도 이을 수 있고 차남들과 공주도 이을 수 있다. 탈해이사금과 미추이이사금처럼 사위도 왕위를 계승했다. 탈해와 미추의 경우를 보면, 1차전과 2차전의 대상이 박혁거세거서간과 알영 왕후의 사위이자 나로공주의 남편인 이알평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니 태자 남해는 어머니지만 알영 왕후를 아버지와 합장하는 것을 극력 반대할 수밖에 없다.
<太子南解王継位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7일 동안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태자 남해왕이 왕위를 이었다.
지금까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사를 살펴보니 박혁거세거서간 승하 반년 전부터 승하 후 7일 동안 치열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승자는 남해왕이 확실하지만 패자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패자는 박특과 박민 두 왕자와 나로공주와 이알평 중에 있다. 그런데 이들은 알영 왕후와 연결되어 있으며, 알영 왕후가 당사자일 수도 있다.
이들 중에서 가장 유력한 사람은 알영 왕후와 이알평이다. 이 두 사람은 양산촌 이씨족이라는 혈연 관계가 있다.
박혁거세 승하 기사에 감춰진 사실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알영 왕후의 탄생 신화와 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알영의 출생 년도에 대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선도산성모>가 각기 다르다. 『삼국유사 기이』의 <박혁거세조>와 『삼국유사 감통』의 <선도산성모>는 알영이 박혁거세와 동시에 태어났다고 하면서도 전자는 장소가 다르고 후자는 년차를 두고 태어난 남매라고 한다. 둘은 같은 책인데도 생시에 동일성이 없다. 이에 비해 『삼국사기』는 <五年 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5년(B.C. 53) 봄 정월에 용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났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는데>라며 알영의 탄생 년월을 정확히 제시한다.
그러므로 알영은 박혁거세와 16세의 나이 차가 있고, 『삼국사기』의 <及長有德容. 始祖聞之, 納以爲妃. 有賢行, 能内輔, 時人謂之二聖 성장하면서 덕행과 용모가 빼어나니, 시조가 그 소식을 듣고 맞아들여 왕비로 삼았다. 행실이 어질고 내조를 잘하여 이때 사람들이 그들을 두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다>에 나타났듯이 성장한 후인, 13세 정도 이후에 왕비가 되었을 것이다.
이때 박혁거세는 29세다. 당시로는 장가들기 매우 늦은 나이다. 그래서 알영이 후비라는 학설을 내놓는 학자들도 있다. 이 학자들은 先妃가 낳은 태자 남해와 後妃가 낳은 박특 간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고, 이것을 박혁거세 사망 반년 전에 있는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기사와 연관 짓는다. 가설 수준을 넘는 학설이다. 그러나 이 학설은 두 성인이 언제 결혼을 하였는지 불명확한 상태에서 두 사람의 연차만을 근거로 하는 약점이 있다. 계룡과 알영정이 허구이므로 세력이 강한 양산촌에서 일찍 왕비족을 차지하기 위해 알영을 내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다시 <선도성모> 설화를 살펴보자.
<선도산성모>가 아이를 둘이나 낳았는데, 나정 가나 알영정 가에 가서 낳앗다는 말은 없다. 그냥 선도산에서 낳았다.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남편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 성모가 자기 영역인 선도산을 떠나 시오리나 떨어진 양산촌 나정 가에 가서 아들을 낳았다고 『밀양박씨세보』에만 쓰여 있는 것은 논리가 성립되지 않는다.
갈 수는 있다. 왜냐하면 <선도성모>가 무당이므로 양산촌의 남자와 관계하여 밴 아이이기 때문에 남자의 집 가까이에 가서 낳았을 수도 있다. 인간사 복잡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하더라도, 그럼 알영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알영 역시 양산촌의 알영정 가에 가서 낳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양산촌 남자가 된다. 『삼국유사』에 쓰인 대로 보면 박혁거세는 양산촌 남자의 아들이고 성장한 후에 6촌을 대표하는 왕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에 양산촌이 가장 강력했으니 <선도산성모>를 어머니로 하여 태어난 박혁거세가 신성성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가능성은 있지만 그다지 높지 않다. 이미 6촌이 영역을 갖고 경쟁과 견제를 하며 평온하게 살아가는 상태에서 양산촌에서 내세운 사람이 왕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평형 상태를 초월하는 어떤 강력한 힘이 외부에서 작용했을 것이고, 그 힘의 주체가 왕권을 장악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도산성모>설은 <박혁거세 알영 신화>와 함께 후세인 서기 500년대 김씨왕조 확립과 함께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선도산성모>설을 『밀양박씨세보』 제1세 <박혁거세조>의 모두에 인용했는데, 그것은 시조가 아버지 모르는 자식이란 말이 되어 별로 안 좋다. <선도산성모>가 하늘의 기운을 받아 잉태했거나 단성생식을 했을 수도 있다. BC 69년보다 65년 후인 BC 4년에 문명이 훨씬 발달하고 복잡한 사회인 유대 나사렛 마을에서 마리아란 여인이 성령으로 잉태했다고 하니 충분히 변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이야기는 신화요 성경 속 이야기이다. 족보에 올릴 내용이 될 수 없다.
신화에 보면 박혁거세는 나정 옆의 알에서 탄생하고 알영은 알영정의 계룡에서 태어났다. 우물은 동북아시아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정천신앙의 대상이다. 나정 우물 옆에 놓인 알에서 태어난 박혁거세보다 알영정에서 직접 솟아난 계룡에게서 태어난 알영이 더 신성하다. 즉 변방에 사는 외래족 출신인 혁거세보다 중심지에 사는 선주족이자 강력한 양산촌 이씨족 출신인 알영이 혁거세 치세 61년 동안 실세였다. 신라는 이후에도 세 명의 여왕이 있을 정도로 여권이 강했으니, 초기엔 비록 남자를 왕으로 세웠지만 모계사회 풍습이 그대로여서 여권이 남권보다 강했을 것이다. 그러니 알영이 남편이 죽자 여왕이 되려고 했을 수도 있다.
용은 신성한 존재로 왕을 상징한다. 알영은 이미 용의 여식이고, 남해는 태자이니 작은 용이다. 박혁거세거서간이 중병에 들자, 어머니와 아들이 후계 왕위를 두고 심한 다툼을 벌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금성은 대궐이다. 대궐 우물에 용이 두 마리나 나타났다는 말은 대궐에 있는 두 마리 용, 즉 왕비와 태자를 상징한다. 남쪽 문에 벼락이 친 것은 박혁거세거서간이 이 사실을 알고 진노하여 왕비와 태자를 크게 꾸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은 비정한 것, 부자간에도 권력은 안 나눈다고 한다. 어버지가 왕위에 있을 때 이미 태자가 된 남해는 어머니의 왕위 계승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모자지간이라 할지라도 권력 투쟁이 치열하게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알영 왕후가 왕위를 계승하고자 한 욕심 뒤에는 양산촌 이씨족의 세력이 버티고 있었다. 남해가 박씨족만의 힘으로는 어머니 알영의 뜻과 세력을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연합한 세력이 동부의 신흥 세력인 석탈해와 부인 김씨의 친정 세력인 김씨족이다.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여 왕이 되고서 석탈해를 사위로 삼았고, 김씨족 여자를 취해 태자 유리의 비로 삼았다.
다음으로 권력 투쟁의 대상을 이알평으로 설정해놓고 살퍼보자.
어느 가설이 사실에 근접하든지 간에, 박혁거세의 죽음이 결코 아름답지 못했으며 그의 장례 기간 동안에 뭔가 권력 투쟁이 벌어진 것은 분명하고, 그 중심에 알영 왕후가 놓여있음이 확실하다. 알영이 직접 왕위를 계승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둘째 아들 특이나 세째 아들 민을 내세웠을 수도 있고, 이알평에게 시집간 공주나 사위를 내세웠을 수도 있다.
알영-공주 아로-이알평은 양산촌이라는 지연과 혈연을 함께 한다. 알영은 독자적인 신화를 가진 데서 보듯이 박혁거세보다 오히려 더 신성한 이미지를 갖는다. 또한 이알평은 양산촌을 이어 양부로 확대 개편된 이씨족의 수장이었다. 연약한 왕권을 보장받고, 강력한 이씨족의 기득권을 보장하기 위해 박혁거세는 공주 아로를 양산촌-양부의 수장인 이알평에게 시집보냈다. 외래족인 박씨에게 양보한, 아니 빼앗긴 왕위를 되찾을 충분한 명분과 실력을 갖췄다. 또한 부인이 공주로서 왕위 계승권을 가졌다. 그러므로 이알평은 충분히 왕위 계승권을 주장할 수 잇었다.
권력 투쟁이 벌어지자 알영 왕후가 누가 편을 들었겠는가. <后亦云亡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를 보면 남해왕을 편들지 않고 사위 이알평을 편들었는 것 같다. 안 그랬으면 무단히 죽을 리가 없다.
태자 남해가 같은 외래족인 석씨족과 김씨족의 도움과 이씨족 이외 씨족들의 협력을 받아 이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승리하고 왕위를 계승했다. 공주 아로가 제사장이었다는 걸 보면, 이겼다고 해서 이알평 등 반대파를 무참하게 죽이진 않은 것 같다. 어머니 알평의 죽음으로 이씨족이 대량 살육을 면한 것 같다. 그 대신 다시는 왕권을 넘볼 수 없도록 남해왕은 석씨족, 김씨족의 수장들과 함께 성골 체제를 다져 나갔다.
이 시기의 권력 투쟁의 판도는 박석김씨의 후래 세력과 양산촌 이씨족을 중심으로 한 6부 선주 세력과의 팽팽한 긴장의 연합 관계였다. 이 연합 관계가 박혁거세거서간 사후에 후계 왕 자리를 두고 태자 남해와 이씨족 알영 왕후의 권력 투쟁에서 남해왕이 승리함으로써 군신 관계로 변하기 시작했다. 곧 석탈해 세력과 김알지 세력이 강성해지면서 지배층인 박석김 삼성은 성골이 되어 왕위 상속권을 보장받고, 피지배층인 6부 촌장족들은 1품에서 17품까지의 관직을 보장받아 국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417년 눌지왕이 석씨족을 도륙하여 숙청하고 박씨족을 복종시키면서 김씨왕조만의 성골 체제를 완성하였다.
알영 왕후가 죽고 세력이 꺾인 양산촌 이씨족은 죽은 용이다. 이것이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나타났다.
<是日沙梁里閼英井一作娥利英井邉有雞龍現, 而左脇誕生童女一云龍現死, 而剖其腹得之.姿容殊麗. 然而唇似雞觜將浴於月城北川其觜撥落, <알영>
이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또는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도 한다)에서 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옆구리로부터 동녀(童女)(혹은 용이 나타나 죽으매 그 배를 가르고 얻었다고도 한다)를 낳으니 자색이 뛰어나게 고왔다. 그러나 입술이 닭의 부리 같은지라 월성(月城) 북천(北川)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퉁겨져 떨어졌으므로>
이 가사에서 눈여겨볼 구절은 <一云龍現死, 而剖其腹得之.(혹은 용이 나타나 죽으매 그 배를 가르고 얻었다고도 한다)와 <然而唇似雞觜 그러나 입술이 닭의 부리 같은지라>이다.
산 용이 아니라 죽은 용에서 배를 갈라 얻은 아이이니 끝이 좋지 않을 것이란 예시일 수 있으며, 입술이 닭의 부리와 같다는 말은 욕심이 많았다는 상징일 수 있다. 속담에 ‘자기 마음에 안 들면 입술이 한발이나 나온다’라는 말이 있다.
후손이 억측에 상상에 헛된 가설을 세우며 알영 할머니와 양산촌 이씨족의 흑역사를 들추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그렇게 기사화되어 있으니 후손이지만 어찌 달리 꾸밀 방법이 없다. 신화와 설화의 문맥과 행간을 더듬으며 헛된 가설들만 여럿 세워볼 뿐이다.
혁거세 할아버지의 죽음이 편안하고 장례가 잘 치뤄졌더라면 어디 남의 말 하기 좋아하는 자가 있어 함부로 저런 망언을 삼국유사에 남기겠는가. 김부식도 저런 이야기를 읽거나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주 간명하게 한 줄로 쓴 것을 보면 참담함을 느꼈을 것이다. 흑역사를 은유와 상징의 기사로 남길 수밖에 없는 일연 김견명 스님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 더 합리적인 자료들이 발굴되어 신화와 설화의 포장을 걷어내고 내용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2025년 2월 18일 안동에서
개산팔경 박희용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