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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등장하는
중국 청나라 왕실의 행궁이자
여름별장 피서산장..
한번 가보고 싶었으나 기회를 갖지 못하다 이번 방송대 동문들과..
더 꼼꼼하게 돌아보고 싶었으나 방대한 면적..
그리고 나이든 동문들이 되다보니 오래
걷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해서..
각자 능력만큼 구경..
여행은 관심과 체력이 필요 충분 조건..
피서산장 구경전에 청더 시내 달리기..
열하를 중심으로 시내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Chengde, 承德(승덕)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북부 롼허강의 지류인 러허강[熱河] 연안에 있는 도시입니다..
베이징[北京]과 250km 거리에 떨어져 있는 역사, 문화의 명성을 가진 도시로 허베이성[河北省] 동북부 지역이다.
옛 이름은 러허[熱河]로 러허성[熱河省]의 성도(省都)였다.
징청철도[京承鐵道]로 베이징과 연락되고 진청철도[錦承鐵道]로 진저우[錦州]와 연결된다.
부근은 농목업이 활발하여 모피·곡물·차·펠트 등의 거래가 활발하다.
철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고속철은 만들어져 있지 않네요!!
시의 북서부에 둘레 8km에 이르는 부지를 차지한 장려한 청(淸)의 피서산장이 있는데 여름철에는 이궁(離宮)이 되었으며,
1994년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부근에 라마교의 대사원인 주원사(珠元寺)가 있다.
관광지에 피서산장, 러허행궁[熱河行宮] 등이 있다.
피서산장의 외곽 지역을 외팔묘로 부르기도 합니다!!
여러가지 다양한 볼 거리가 있는 도시이기는 합니다만 시간 없는 여행자가 되다보니 피서산장과 외팔묘 일부만을 보고
진황도의 산해관으로 이동합니다!!
열하변의 풍경을 달리면서 남겨봅니다..
새키우기를 좋아하는 중국인들..
아침 열하변의 구경이었습니다..
아침 식사후에 피서산장으로 이동..
건물들이 밀집한 박물관 구역과 정원 구역을 돌아보기로!!
避暑山庄, Qing Dynasty's Summer Palace
1994년 유네스코 문화 유산에 지정..
허베이성(河北省) 청더시(承德市, 승덕시) 솽차오구(双桥区, 쌍교구)에 소재하는 현존 중국의 최대 황가 정원으로
청(清) 황제의 여름 궁전이었으며 쑤저우(苏州, 소주)의 줘정위안(拙政园, 졸정원) 및 류원(留园, 유원)과
베이징 이화원(颐和园)과 더불어 사대명원(四大名园)의 하나이며 러허행궁(热河行宫, 열하행궁)
또는 청더이궁(承德离宫, 승덕이궁)으로 불린다.
피서산장은 120여 채의 건축물로 구성되었으며 총면적은 5.6㎢, 주위의 담장 둘레는 10㎞에 달한다.
피서산장은 강희(康熙) 42년(1703) 건축을 시작하여 강희, 옹정(雍正), 건륭(乾隆) 3대 황제를 거쳐 89년 만인
1792년 비로소 완공을 보게 되었으며 또한 궁 주위에 시짱, 신장, 몽고 라마교(喇嘛教) 사원의 형식으로 건축한
12개의 사묘군(寺庙群)인 외팔묘(外八庙)도 건축하였다.
피서산장은 청(清) 전반기의 많은 정치, 군사, 민족 및 외교 등 국가대사를 이곳에서 처리하여
베이징의 제2 정치 중심지가 되어왔다.
피서산장은 베이징의 쯔진청(紫禁城, 자금성)과 유사하게 설계되었으며 이름에 걸맞게 약 3℃ 정도 낮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61년 피선산장과 외팔묘는 제1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으며,
1994년 UNESCO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2007.5 국가 66개 5A급 여유경구의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름으로 알수 있듯이 여름이 비교적 시원한 만주에서 시작한 청나라가 북경의 무더위를 견디지 못하여
여름 행궁으로 건립한 곳..
중국에서는 유명한 곳이지만 이곳이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주입식 교육의 영향으로 정작 읽어본 분은 거의 없지만 한국의 고등 교육을 받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연암 박지원 그리고 열하일기..
열하일기는 "조선 정조 때에 박지원(朴趾源)이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燕行日記)."입니다..
저도 사실 요약만 보았을 뿐 정작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습니다..ㅠㅠ
그래도 네이버를 통해서 책의 내용 소개..
사자상이 대단하네요!!
26권 10책. 필사본.
간본(刊本)으로는 1901년 김택영(金澤榮)이 ≪연암집 燕巖集≫ 원집에 이어 간행한 동 속집 권1·2(고활자본)에 들어 있고,
1911년 광문회(光文會)에서 A5판 286면의 활판본으로 간행하였다.
1932년 박영철(朴榮喆)이 간행한 신활자본 ≪연암집≫ 별집 권11∼15에도 전편이 수록되어 있다.
보유편도 있고 1956년 자유중국의 대만대학(臺灣大學)에서 동 대학 소장본을 영인한 것도 있다.
1780년(정조 4) 저자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청조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일대를 견문하고
그 곳 문인·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일기이다.
각 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강록>은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으로 성제(城制)와 벽돌 사용 등의 이용후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잡지>는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을 필담(筆談) 중심으로 엮고 있다.
<일신수필>은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병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관내정사>는 산하이관에서 연경(燕京)에 이르는 기록이다.
특히 백이(伯夷)·숙제(叔齊)에 대한 이야기와 <호질 虎叱>이 실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막북행정록>은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이다.
<태학유관록>은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머무르며 중국학자들과 지전설(地轉說)에 관하여 토론한 내용이 들어 있다.
<구외이문>은 고북구(古北口) 밖에서 들은 60여 종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환연도중록>은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으로 교통제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금료소초>는 의술(醫術)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옥갑야화>는 역관들의 신용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허생(許生)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뒷날에 이 이야기를
<허생전>이라 하여 독립적인 작품으로 거론하였다.
<황도기략>은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약 38종을 기록한 것이다.
<알성퇴술>은 순천부학(順天府學)에서 조선관(朝鮮館)에 이르는 동안의 견문을 기록하고 있다.
<앙엽기>는 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주요명소 20군데를 기술한 것이다.
<경개록>은 열하의 태학에서 6일간 있으면서 중국학자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황교문답>은 당시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놓은 기록이다.
<행재잡록>은 당시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견문한 바를 적은 것이다.
그 중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취한 정책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반선시말>은 청나라 고종이 반선(班禪)에게 취한 정책을 논한 글이다.
<희본명목>은 다른 본에서는 <산장잡기> 끝부분에 있는 것으로 청나라 고종의 만수절(萬壽節)에 행하는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한 것이다.
<찰십륜포>는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망양록>과 <심세편>은 각각 중국학자와의 음악에 대한 토론내용과 조선의 오망(五妄), 중국의 삼난(三難)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곡정필담>은 주로 천문에 대한 기록이다.
<동란섭필>은 가악(歌樂)에 대한 잡록이며, <산장잡기>는 열하산장에서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환희기>와 <피서록>은 각각 중국 요술과 열하산장에서 주로 시문비평을 가한 것이 주요내용이다.
≪열하일기≫는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 北學議≫와 함께 “한 솜씨에서 나온 것 같다(如出一手).”고 한 평을 들었다.
주로 북학을 주장하는 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고, 당시에 정조로부터 이 책의 문체가 순정(醇正)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으나 많은 지식층에게 회자된 듯하다.
국문학 시간에 배웠던 호질과 허생전이 열하일기에 수록된 내용이었군요!!
열하일기는 종래의 연행록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열하일기≫는 박지원의 기묘한 문장력으로 여러 방면에 걸쳐
당시의 사회문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조선 후기 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걸작이라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네이버를 이용하여 소개를 적기는 하였습니다만 별로 친견하고 싶은 생각은 없군요!!
사실 최근에는 노안을 핑계로 여행을 위한 가이드북을 제외하고는 직접 접하는 책이 거의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많은 책을 밤을 새워서 다독하기도 하였는데..ㅠㅠ
독서에도 시기와 장소가 있는 모양입니다!! 가장 최근에 접한 책으로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로마인 이야기" 카이사르 편..
피서 산장 현판을 배경으로..
이번에 집 이사 준비를 하면서 또 포터 한 트럭분의 책을 버렸습니다..
가정을 이루고 살면서 모두 6번의 이사를 하였는데 부산 2번은 간소한 살림..
울산 와서 2번도 간소하게 ..
그리고 생애 처음 집 장만..
모친도 돌아가시고 모든 짐을 보관..
그리고 이사를 하면서 5톤 트럭 한대분의 묵은 짐을 버렸는데 대부분 책..
이번에도 처분..
이제 가이드북을 제외한 책은 거의 가지고 있지를 않네요..
읽지 않은 책은 없었지만 두번 읽어지는 책도 잘 없더군요!!ㅠㅠ
문헌상에는 자금성과 유사하다고 표현이 되어 있는데 느낌은 전혀 다릅니다..
전원속에 있는 별장같은 느낌..
웅장하다고 하기 보다는 소박한 느낌입니다..
청나라..
피서 산장의 이해를 위해서는 청나라도 알아야 하겠죠!!
중국 대륙의 마지막 왕조로, 기간은 1616년부터 1912년까지이다.
1616년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국을 세우고, 1636년 태종 때 국호를 대청으로 개칭하였다.
명나라가 망하는 틈을 타서 중국에 침입, 순치~강희 연간에는 명나라의 유족, 삼번(三蕃)의 난, 대만의 정씨(鄭氏) 등을
평정하고 전국 지배에 성공하였다.
강희 · 옹정 · 건륭의 3대 130여 년 간의 전성기에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여러 제도의 정비, 대규모의 편찬 사업을 추진하여
학술을 장려하는 한편 사상 통제에 의한 '문자의 옥'을 치르고 변발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건륭 말기부터 정치가 부패하고 군사력의 근간인 팔기병의 실력이 저하되었다.
또한 사회 모순도 깊어져 백련교의 난 등이 발발하고, 아편 전쟁을 기화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아
반(半) 식민지화가 진행되었다.
이로써 점차 혁명 운동이 고양되어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이듬해 선통제(宣統帝)의 퇴위로 멸망하였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5천년의 중국 역사동안 단 한번도 중국의 영토에 복속이 되지 않았던 만주..
1616년 누루하치가 청나라를 건국하면서 역사상 최초로 중국에 편입되었습니다!!
그리고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 멸망..
일본 제국주의에 의하여 마지막 황제 푸이가 만주 괴뢰 정부의 수반이 되기는 하였으나 이후 만주에 독립국가는 없어졌습니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중에 다수를 차지하는 만주족..
그러나 만주족은 명칭만 있을뿐 거의 한족에 동화되어 그들만의 정체성이 거의 희박해진 실정입니다!!
1616년 누루하치에 의한 청나라의 건립이 만주족이라는 근간을 희석시켜버린 것입니다..
유물이나 문화 사회등도 한족에 동화되어 만주만의 특색이 사라져버리고..
변발등 몇가지 만주의 고유 문화를 정립하였으나 그 마저도 역사에 뒤안길로!!
중국 여행은 중국의 문화 사회 역사를 이해하는 기회..
중국의 소수민족에 대해서도 네이버를 잠깐 옮겨 봅니다!!
중국은 다수민족인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
한족이 중국 전체 인구(2011년 7월 기준 13억 4324만 명) 가운데 약 91.5%를 구성하고 있고 나머지 55개 소수민족이 약 8.5%를 차지.
인구로는 10%가 채 안되지만 소수민족이 자치하는 면적은 중국 전체 영토의 60%에 달한다.
중국 정부는 5개 구와 30개 주, 120개 현에서 이들 소수민족의 자치를 허용하고 있다.
55개 소수민족으로는 좡족, 만주족, 후이족, 먀오족, 위구르족, 몽골족, 조선족 등이 있다.
이 중 1000만 명 이상의 인구를 가진 민족은 중국 남부 광서족 자치구의 좡족, 중국 동북부 지역의 만주족, 중국 서부에
삶의 터전이 있는 후이족이다.
좡족(壯族)이 1800만 명 이상으로 인구가 많은 편에 속하며 원래 퉁족으로 불렸다.
만주족은 요녕성, 길림성, 흑룡가성 등 중국 동북부 지역에 터전을 잡고 살아온 퉁구스계 민족이다.
후이족은 언어와 생활습관 등은 한족과 거의 똑같지만 이슬람교를 믿는다.
소수민족들이 사는 대부분의 지역은 가스와 석탄 등 천연자원과 삼림, 수력자원이 풍부한 경제자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이 산업화와 현대화정책을 추진해감에 따라 중국 경제에 없어서는 안될 핵심적인 지역이다.
또한, 이 지역들은 대부분 러시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인도, 베트남, 북한 등 많은 국가들과 접경하고 있는 특수성 때문에
특히 전략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 정책으로 강경책과 유화책을 병행한다.
그러나 일관되게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소수민족들의 일방적인 동화를 요구하였다.
중국 정부는 1949년 소수민족에 폭넓은 자치권을 부여해 이를 포용하기도 하였는데, 한족과는 달리 두 자녀 출산을 허용하고,
대학입학 시 우대점수 부여, 범죄에 있어서도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처벌하였다.
중국 정부와 소수민족 사이에는 끊임없는 분쟁이 일어나고 있다.
2008년 3월과 2009년 7월 티베트와 신장위구르 지역에서는 독립을 주장하는 대규모 민족시위가 있었다.
2009년 한족이 서부 개발붐과 관련하여 상권과 취업기회를 독차지 한데서 위구르족의 봉기가 일어났으며 2011년 네이멍구 봉기는
광산 개발권을 쥔 한족과 유목으로 생계를 꾸리는 몽골족의 갈등으로 촉발되었다.
소수민족중에서도 다수를 차지하는 만주족..
그들이 주로 거주하는 곳은 동북3성.. 요령성, 길림성, 흑룡강성..
내몽고 지역에도 제법 거주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만주족의 구별은 쉽지 않을 정도로 한족에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중원을 지배하였으나 한족에 동화되어 버린 만주족..ㅠㅠ
그러나 그들의 화려한 문화는 여전히 중국 곳곳에 남아 있네요!!
여름의 왕의 주거지이자 집무실이었던 피서산장 박물관 지역..
자금성 같은 화려함은 없지만 황제의 기품은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연암 박지원은 황제를 배알하는 연경사의 일원으로 북경을 방문하였다가 황제가 피서산장에 가 있어
이곳까지 왔고 국문학의 걸작으로 남겨져 있는 "열하일기"를 집필..
당시 피서 산장이 있던 이곳의 지명이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열하"!!
박지원의 삶도 한번 조망하여 봅니다..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소설가. 배청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던 시기에 홍대용, 박제가 등과 함께 북학론을 전개하였으며,
중상주의를 주장하기도 함. 저서로는 <열하일기>, <허생전>, <연암집> 등이 있음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1737년(영조 13)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돈령부지사(敦寧府知事)를 지낸 조부 슬하에서 자랐으며, 1752년 16세 때 이보천(李輔天)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 후 장인과 처삼촌에게 <맹자>와 <사기(史記)>를 배웠다.
22세 때 부터 박제가, 유득공 등 당대 실학을 공부하던 이들과 교우하여 영향을 받았으며, 30세 때는 실학자 홍대용(洪大容)과
교우하여 서양의 신학문 등을 배울 수 있었다.
1777년(정조 1)에는 벽파(僻派)로 몰리면서 정치적 위협을 느낀 박지원은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에 은거하였다.
그의 호인 연암은 바로 이곳의 지명에서 얻은 것이다.
그 곳에서 학문에 전념하다가 1780년(정조 4) 친족형 박명원(朴明源)이 진하사 겸 사은사(進賀使兼謝恩使)가 되어
청나라에 갈 때 동행했다.
요동(遼東)ㆍ요하(遼河)ㆍ북경(北京) 등지를 여행하면서 청나라의 문물과 생활 기술 전반을 자세히 살피고,
그의 기행문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생기있는 필치로 기록하였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와 신문물을 소개하는 동시에 배워야 할 점을 논하였고 조선의 전반적인 문제에 대해
진보적인 시각으로 비판하였기 때문에 그의 책은 매우 큰 논란이 되었다.
특히 당시 조정에서는 배청론이 주류였기 때문에 그의 책에 대한 반발이 매우 컸다.
그러나 재야에서는 그의 생생하고 자세한 여행기록과 재치있는 문체, 참신한 의견 등으로 인해서 즐겨 읽혀졌다고 한다.
1786년 정조의 특명으로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이 되었고 이후 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ㆍ
제릉령(齊陵令), 한성부판관을 거쳐 안의현감(安義縣監)을 역임한 뒤에 사퇴했다가
1797년 다시 면천 군수(沔川 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왕명을 받아 농서(農書) 2권을 지어 바쳤다.
1800년 양양부사(襄陽府使)에 승진하였으나 다음 해에 벼슬에서 물러났다.
박지원은 당시 홍대용ㆍ박제가(朴齊家) 등과 함께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배워야 한다는 북학파(北學派)의 중심에 있었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자유롭고 재치있는 문체로 당시의 사회상을 포착,
여러 편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을 썼다. 그는 문체반정 때 정조에게 문체를 타락시켰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저서에 <연암집(燕巖集)>, <과농소초(課農小抄)>, <한민명전의(限民名田義)> 등이 있고,
작품에 <허생전(許生傳)>, <호질(虎叱)>, <마장전(馬駔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민옹전(閔翁傳)>,
,<양반전(兩班傳)> 등이 있다.
말년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가 않네요!!
왕의 별장답게 진귀한 유물도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뭐 문회한이니 그냥 사진으로만 구경!!
활자가 귀하던 시절에 만들어진 자료가 되다보니 지금까지 인구에 회자되고, 교과서에도 등장합니다만
지금처럼 정보 홍수 시절에 만들어진 기행문이면 지금과 같은 영광을 누리기는 힘들겠죠..
역시 역사는 진귀성과 희귀성이 있어야 주목을 받는 모양입니다!!
우리 나라 유물들은 대단히 고귀한 평가를 받고 있는데, 우리보다는 많은 인구와 땅덩이로 수도 없는 골동품이 산재했을
중국.. 골동품들이 대부분 한국처럼 고귀한 평가를 받고 있을까요??
진귀성과 희귀성이 떨어지고 보편성이 강조됨으로 대부분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할 것 같네요!!
예를 들어서 도자기도 동시대 것으로 볼때 한국에서 만들어진 것과 중국것은 국내에서도 격이나 값어치가 현격하게 차이가 있죠!!
문외한인 제가 볼때는 중국 제품이 훨씬 더 정교하고 예술성이 있는 것으로 느껴지던데..
어떻게 보면 골동품에도 민족주의 그리고 수구주의가 팽배한 듯..
서양넘들은 골동품이나 미술품등도 사조 운운하며 체계적으로 정비를 하는데 월등한 예술성이나 희소성이 있고, 또 기술적으로
우수성도 입증되는 동양의 것을 무조건 배제..
그냥 싸잡아서 "오리엔탈리즘" 운운하는 선에서 끝나고 맙니다..
예술품도 역사 그리고 힘의 헤게모니를 가진 넘의 시각에서 좌지 우지..ㅠㅠ
저 혼자 적는 여행기가 되다보니 이런 저런 사설이 많네요..ㅠㅠ
사진은 자유로 남기게 하지만 조명이 부실하고 또 유리로 보호가 되어 있어서
그림이 선명하지 못하네요!!
중국의 역사는 복잡하지만 간단하게 요약..
중국은 세계문명 발상지 중 의 한 곳..
역사를 등재된 시기는 5천년이 넘으며 4천년 전에 이미 고유 문자를 발명해냈고, 나침반, 화약, 인쇄술, 제지술 등의
4대 발명품으로 유명..
중국의 첫 통일 국가는 진시황이 세운 진(秦)나라이다.
한(漢), 수(隋),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淸)나라로 이어지는 통일 제국과 통일 제국을 만들기 위한 진통을 겪었던
4천여년의 시간 동안 북쪽 오랑캐와의 전쟁을 거치면서도 한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역사는 지속..
수당의 건축, 인쇄, 천문, 의학 등은 당시에 세계에서 선도적인 위치를 차지했으며 특히 당의 문화는
서기 7~9세기에 가장 위대한 문화로서 주변의 아시아와 서방국가에 까지 영향을 끼쳤다.
이후 명나라때는 중국의 번성기를 계속 누리면서 지금까지도 가장 위대한 건축물이라 불리는 만리장성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결국 중국은 로마처럼 확대를 꿈꾼 제국이 아니라 그들만의 왕국을 꿈꾸던 소박한 나라..
그러나 그들만의 왕국은 청 말엽에 일어나기 시작한 근대화 운동과 서구 열강의 침략이 시작되는 아편전쟁은
중국 역사에 일대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특히 중국 근대화 시기를 좌우한 국민당과 공산당간의 내전은 현대 중국의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사건이다.
1912년 손문(孫文)이 세운 중화민국 성립 시점을 시작으로 30여년간 국공 내전의 결과 공산당이 승리하게 되고,
패배한 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나 새로이 터전을 잡고, 승리한 공산당은 대륙의 세력을 장악하여 마침내
1949년 10월 1일 천안문 광장에서 모택동의 선언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이후 국가 주석인 모택동은 1970년대 문화대혁명 시기에 반대 세력과 지식인들을 숙청시키는 등의
대대적인 사회주의 사상 정립에 힘썼다.
그러나 줄곧 보수주의적 공산주의를 고수하던 중국은 경제 악화, 대외 관계 불화 등을 계기로 하여 부분적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현재는 수정주의에 입각한 정치, 행정을 행사하고 있다.
간략하게 요약해 본 중국의 역사입니다!!
중국 청나라의 황제는 12대로 마감..
가장 강성했던 시기는 4대 강희 5대 옹정 6대 건륭제 시절..
이후 쇠락하기 시작하여 영화 마지막 황제로 알려진 선통제 푸이..
3세에 즉위하여 7세에 청나라가 멸망..
일본에 의하여 괴뢰 정부의 수반이 되고, 문화혁명에서 숙청되는등 불우한 삶을 살았고 5번의 결혼에도 후사가 없던
어벙한 남자!!
청나라 황제에 대한 자료를 링크하여 봅니다..
http://simil_lim.blog.me/130038693057
청나라 황실은 동화에 의한 만주족의 소멸을 우려하여 황제의 후와 비는 반드시 만주족이나 몽골족이 되도록 결정..
그중에서도 귀족 집안과의 혼인을 하다보니 근친혼이 대부분..
뒤쪽의 왕들이 빌빌한 것도 우생학적인 근친혼에 따는 부작용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이제 정원이 있는 호수 지역으로 이동..
피서 산장 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