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월 7일 10시20분 청주행 우등 버스에 몸을 실었다. 동서울 터미널에 괴산행 직행버스가 있으나, 서울 괴산간 직행은 귀로에 선택하기로 하고, 갈 때는 청주를 경우하기로 일정을 잡았다. 목적지인 괴산은 청주와 충주 중간 지점에 있었다.
늦은 아침 날씨는 흐리고, 하늘은 우중충했다.
구름 사이에 숨은 해가 마치 달처럼 보인다. 도로변을 비켜 지나가는 2월의 비인 들과 산맥은 온통 무채색이었다. 겨울, 이태준의 철원 생가터에서 시작된 생가 기행도 그렇게 무채색으로 시작되었다는 느낌이다. ‘생가찾기’의 발걸음이, 그 역정이 순탄치 못했던 ‘실종문인’들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에 그 신산스러운 느낌이 더했는지 모른다.
첨단 산업과 영화와 컴퓨터에 밀려 한없이 뒷전으로만 밀려났던 작가들의 초라한 고향을 돌아보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어렴풋이 솟아올랐던 실낱같은 희망이 있었다. 그것은 해방 이후 50년대에서 80년대에 이르는 가파른 역사의 한 고개를 넘기고, 우리 앞에 펼쳐진 90년대라는 새로운 지형도 속에서 꿈꾸어 볼 만한 어떤‘문화적 희망’이다. 향토고분을 발굴하는 것과 이렇게 작가의 생가를 찾아다니는 것은 다르면서도 같은 작업이다. 현재적 조명을 통해서 옛 유적은 과거의 무덤 속에서 살아 있는 오늘의 문화로 부활한다. 폐가처럼 스러져가던 ‘생가’에 도와 군청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잘 살아 보세’식의 경제바람을 넘어선 뒤 바야흐로 ‘문화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작가의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토착민들이 자신의 고장이 배출해낸 ‘지적 영혼’들을 돌아보기 시작한 것은 어느 정도의 물적 토대 위에서 가능했던 것. 그러한 새로운 바람 속에서‘문화의 봄’이라고 일컬을 모종의 싹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지. 겨울 지나가고 봄이 와, 무채색의 들판에 조금씩 채색이 돌기 시작하면, 바야흐로 필자의 여정에도 색다른 화색이 돌고, 신록이 무르익으면서 조금씩 화려(?)해지리라는 희망을 품어본다.
청주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괴산에 도착한 것이 12시 반. 시외버스 정류장 주변의 괴산 거리는 도로가 넓고 한적했으며, 납작하게 늘어선 건물들은 별 특징이 없이 밋밋하게 다가왔다. 괴산읍 제월리는 여기서 택시로 10분 거리라고 정류장 근처 풀빵장수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일러준다. 정류장 부근에 서울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중형 택시가 4∼5대 연속으로 줄지어 하릴없이 과객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 중 맨 끄트머리에 놓인 택시에 올라탔다.
“제월리의 홍면씨 집을 찾아가려고 하는데.....”
홍면씨는 벽초 홍명희의 혈족으로, 현재 홍명희의 생가를 관리하는 줄 알기에 그의 이름을 댔다. 뜻밖에도 선량하고 점잖게 생긴 충청도 기사 양반, “아, 홍명희씨의 생가 찾아가려고 하는 거군요. ”대뜸 고개를 시원스레 끄덕이는 것이다. 차를 타고 가면서 들은 말로는 근래에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필자 말고도 기자를 태우고 제월리를 순회한 적이 있으며, 충북에서 발행되는 동양신문의 그 날짜 특집면에‘충북 괴산 출신의 벽초 홍명희’가 대문짝 만하게 실려 있다고, 생각지도 않은 말까지 친절하게 귀뜸해 준다. 이 마음씨 좋은 기사 아저씨는 나중에 자기 돈으로 그 신문을 직접 사서 필자에게 건네주는 인심을 베풀기까지 했다.
택시는 시내도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져 들어가더니 강줄기를 하염없이 따라갔다. 남한강의 지류, 바로 괴강이다. 벽초가 마을 앞 괴강에서 낚시를 할 때면 곧은 낚시를 사용해도 고기가 끊이지 않고 물렸다던 그 전설의 강이다.
“괴산에는 홍명희, 제월대, 충민사 등이 유명하지요. ”
기사의 말이 아니더라도 수백 년이나 묵은 느티나무가 도처에 숲을 이루고 있어 괴산이라 불리게 된 이곳은 워낙 산수가 빼어나 우암 송시열이 만년에 은거했다는 화양동도 이 경내에 있고, 인물 많이 나기로 손꼽히는 고장이라는 얘기를 듣고 온 터다.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 외에도 진주성 싸움으로 유명한 김시민 장군의 고향이 이곳이며(충민사는 김시민 장군의 사당이 모셔진 곳이다). 기미선언의 33인 중의 하나인 권동진 선생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일제 말기 벽초가 은둔생활을 할 때 낚시대를 드리우곤 했다는 제월대를 먼저 들르기로 했다. 제월대는 벽초가 자란 마을에서 동북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충주 탄금대, 속리산의 학소대와 더불어 충북의 삼대중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곳이다. 제월대란 이름은 괴산팔경의 하나인 고산구경(孤山九景)의 속칭인데, 여기서 고산구경이란 서경 유근이 고산정 주변에 구경을 정하여 제1경을 만송정, 제2경을 황이판 식으로 이름을 지어, 관어대, 은병, 제월대, 창벽, 영객령, 영화담, 고산정사 등 아홉 군데를 통틀어 칭하는 것이었다.
눈이 덮인 숲길 언덕바지를 돌아 올라가니, 층층이 꾸며 놓은 계단이 나타나고 그 계단 끝머리 절벽 위에 다소곳이 들어앉은 정자의 모습이 홀연히 그 자태를 드러냈다. 이름하여 고산정. 이조 선조 때 서경 유근이 충청 관찰사로 있을 때 창건하여 만송정이라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고산정으로 개칭하였다는 곳이다. 고산정을 가운데 두고 괴강의 맑은 물이 양안으로 굽이돌아 태극형을 이루니, 그 산수풍광이 명미하기 이를 데 없어 이를 구경하기 위한 옛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제월대, 관어대, 영화담은 봄을 맞으면 그 모습이 한 폭의 동양화를 펴놓은 듯 장관을 이루었다 하니, 춘삼월이 아니라 삭풍 부는 겨울에 이곳을 찾아 그 장관을 놓친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었다. 이러한 절경을 벽초는 아침 저녁으로 보고 자랐을 것이니, 그의 기개, 문사로서의 타고난 기질, 민족주의자적인 심성의 발원이 어쩌면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을까.
고산정을 내려와 괴강 줄기를 옆으로 바라보며 바로 인근 서남쪽에 자리한 마을길로 접어든다. 마을을 에돌아 괴강이 흐르고 제월대가 훤히 보이는 저 강변에 앉아 종종 낚시질을 하곤 했다던 벽초의 생전 모습이 가물가물하다.
그 일대 16만 평의 임야는 아직까지도 벽초의 소유로 되어 있다. 땅주인의 허락이 없이는 개축이 안된다고 해서, 새마을운동 바람도 비껴가야 했던 낡은 촌락 속에서 가끔 ‘꼬끼오’하는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 오나 인적 드문 마을은 괴괴하기까지 했다.
고샅길을 따라 얼마쯤 올라갔을까. 선영 뒷산을 배경으로 산자락 밑에 이제는 사랑채만 남은 벽초의 고택이 과연 있었다.
대문간 쪽에 가지런히 놓인 비석이 과객의 시선을 끈다. ‘작가 홍명희(1888∼1968)의 고향-이곳은 민족의 선각자로서 겨레의 수난기에 연전교수와 시대일보 사장 등을 역임하고 대하소설「임꺽정」을 쓴 벽초께서 태어나 자란 옛집이다’라고 쓰인 비석의 비문은 1993년에 우리문학 기림회가 그것을 세웠음을 알리고 있다. 아하, 이곳이 그냥 버려져 있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는 한 증거를 현장에서 목격하는 순간이다.
40여년 동안 버려져 있었다던 고가는 그나마 사랑채라도 남아 있는 것이 다행이고, 안채 자리는 야채밭으로 변해 있고, 별채도 흔적이 없었다. 채소밭 한구석에, 내려앉은 서까래가 덤불 속에서 그 잔해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현재 사랑채만 남아 있는, 제월리 365번지 고택은 지금까지 홍명희씨의 생가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실제로 태어난 집은 괴산읍 동부리 450-1번지로 되어 있는 인산리 고가이고, 이 집은 1919년 홍명희 일가가 인산리 대저택을 처분하고, 그 전부터 소유하고 있던 제월리 선산 밑으로 이사해 오게 되면서부터 알려진 집이라는 것이다. 풍산 홍씨 일가가 권세를 누리며 살았던 인산리의 대저택은 현장을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그 역시 세월의 풍화를 이기지 못하고 헐리워졌다는 후문만 들려 오고 있다.
일자로 된 사랑채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 주인장을 불러보나 응답이 없는 것이 아무도 없는 듯했다. 좁은 마당 한 구석에 수도가 덜렁하니 놓여 있을 뿐, 곳간이며, 뒤간이며, 움막을 개조한 듯한 계사(鷄舍)에 이르기까지 전혀 개수의 흔적이 없다. 1948년 벽초가 남북연석 회의 참가차 백범 김구와 함께 민주독립당을 이끌고 월북한 이후, 그의 직계 자손도 모두 월북, 그의 고향에는 피붙이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40여 년간 그냥 내버려둔 집이었으니, 그 피폐함이 말로 다할 수 없는 지경인 것이다. 생전 벽초의 부친 홍범식은 장남 홍명희를 비롯 6남매를 두었으나 대부분 죽어, 유일한 형제인 홍숙희씨가 벽초 소유의 땅을 관리해 오다가 최근에는 홍면씨가 그것을 맡아 해오고 있다. 벽초가 그나마 이곳에 인심을 얻고 살았기에 그 흔적이나마 남아 있지, 그렇지 않았다면 흔적조차 사라졌을 것이다.
2.
홍명희 연구자, 강영주 교수에 의하면 홍의 집안은 풍산 홍씨 추만공파 주원계로서 명문 사대부가이며 19세기 중반에 당상관 이상의 고위직 관리를 가장 많이 배출한 10대 성관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홍명희의 증조부는 이조판서, 조부는 참판이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숙종 때 재상을 지낸 홍국영이 있다. 직계 조상들은 관직을 수행하기 위해 주로 서울 북촌에 거주했으나, 19세기 중엽경 충청도 괴산에 선산과 아울러 가족들을 위한 근거지를 마련하여, 2백년 이상 이곳에 터를 닦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홍명희 일가 또한 1920년 이후 서울에 살았다고 하나, 계모 조씨 등 일부 가족이 계속 이곳에 남아 있었으며, 홍명희 자신도 서울생활에 지칠 때면 가끔 내려와 이 고택에 머물렀다 한다.
벽초의 부친인 홍범식은 1910년 당시 금산 군수였는데 한일합방을 당하자 비분 끝에 자결한 애국지사로 유명한 인물이다. 홍명희는 이러한 아버지 홍범식과 어머니 은진 송씨 사이에서 조선사회가 대내외적으로 위기에 처해 있었던 구한말(1888년) 장남으로 태어났던 것이니, 한국 근대 작가들 중 벽초만큼 화려한 가문을 가진 이도 드물 것이다.
그는 종손인데다가 “어려서 클 때 어떻게 셈이 바르고 영악했는지 모른다”고 할만큼 영특함을 보여, 집안 어른들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5세 때부터 한학을 수학했는데 8세에 한시를 지었고 난삽하기 짝이 없는「서경」「우공」편을 술술 암송할 정도로 비상한 기억력과 문제를 일찌감치 드러내어 주위를 놀라게 하곤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전통적인 사대부가의 분위기 속에서 한학을 익히던 그가 신학문을 처음 접한 것은 1902년 사립학교 중교의숙에 입학하면서부터이다. 이후 1906년 일본에 건너가 대성중학을 다녔는데 일본 신문에 우등생으로 보도가 될 정도로 학업성적이 월등했다고 한다. 벽초와 함께 조선의 삼재로 꼽혔던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와도 이 동경 유학시절에 교우했음은 물론이다.
벽초의「자서전」에 의하면 그는 이 시기에‘특별한 사고가 없는 한, 책 한 권을 하루나 이틀에 끝내는’광범한 독서에 빠져 들어갔는데, 그의 그러한 광적인 독서열은 백화 양건식이‘조선문단 제일의 다독가는 홍명희’라고 꼽을 정도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1926년 단행본으로 간행된「학창산화」에서 문학, 역사, 철학, 사회과학 등 다방면에 걸쳐 동서고금의 지식을 소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폭넓은 독서에 기인한 것이다. 아무튼 전통적인 대가족제도 속에서 생활하며 한학 수업과 초보적인 신교육을 받았을 뿐인 벽초에게 5년간의 일본 유학 경험은 생활과 의식을 바꿔 놓는 충격적인 체험의 기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을사조약 이후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1910년 봄에 벽초는 나라의 장래를 근심하며 중도 귀국한다. 그리고 8월에 경술국치를 맞게 되었으며, 곧이어 아버지의 충격적인 ‘순국’을 목도하게 된다.‘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말라’는 아버지 홍범식의 유서는 그 이후 벽초의 일생을 지배하는 좌우명이 되었다. 그가 후대의 평가처럼, ‘민족주의자’,‘봉건 선비의 미덕과 진보적 의식을 두루 갖춘 애국지사’의 길을 걸어갔던 이면에는 늘 이러한 아버지의 충절이 바탕에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염무웅 교수의 말대로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산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그가 민족해방을 이룩하는 편에서 있었느냐, 식민지 체제에 타협해 민족을 배신하는 편에서 있었느냐 하는 데 둔다면, 친일과 훼절의 개인사를 가졌던 일부 작가들과 벽초는 뚜렷이 구별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친 벽초는 출국하여 만주·북경·상해 등지를 방랑하게 된다. 단재 신채호, 위당 정인보 등을 이 시절에 만난다. 1918년 귀국하였으나, 1년후 3·1운동 당시 괴산 만세운동을 주동하여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때 그의 나이가 31세, 그의 본격적인 사회활동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923년에는 화요회의 전신인 신사상연구회를 발족하여 주요 멤버로 활약하다 1925년 시대일보 논설위원을 시발로 언론기관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1927년에는 민세 안세홍와 함께 민족운동의 대표적 단체인 신간회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렇게 두드러진 사회활동을 펼쳐 나갔기에 그는 작가이기보다 언론인, 사회운동가로서 당대에 더 많이 알려졌다. 그렇지만 이런 다양한 체험을 바탕으로 벽초는 대하소설「임꺽정」을 쓸 수 있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인으로서도 최고의 평가를 받게 된다.
3.
홍명희 생애의 단 하나의 소설인「임꺽정」은 1928년부터 1940년에 걸쳐「조선일보」와「조광」에 연재된 역사소설이다.
발표 당시의 반향은 대단했다고 한다. 연재되는 동안 하루라도 거르는 날이면 신문사에 문의전화가 빗발쳤다고 하며, 벽초가 29년 신간회 관계로 검거된 뒤에도 유치장에서 집필이 허용되었을 만큼 인기와 화제가 만발한 소설이었다. 또 당시 문단이 좌와 우로 갈려 이었는데도「임꺽정」에 대해서만은 모두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문단 초유의 대작’, ‘구상의 광대함과 어휘의 풍부함, 문학의 유려함이 전무한 대작, 조선문학의 보고(寶庫)’라는 칭송은 모두 이렇게 해서 나온 평가들이다. 좌파 문학을 이끌었던 한설야는‘천권의 어학서를 읽는 것보다「임꺽정」을 읽는 것이 오히려 나을 것이니, 문필을 업하는 사람이고 아니하는 사람을 막론하고 이것은 꼭 읽어야 하리라’라고 까지 이야기할 정도였으니 작품의 우수성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당시 벽초는 어떤 동기로 이런 불후의 대작을 구상하였던가. 「임꺽정」을 설명하는 자리에서(「임꺽정에 대하여」) 벽초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적이 있다.
‘내가 임꺽정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흥미를 느껴온 지는 이미 오래였습니다. 임꺽정이란 옛날 봉건사회에서 가장 학대받던 백정계급의 한 인물이 아니었습니까. 백정들의 단합을 꾀한 뒤 자기가 앞장서서 통쾌하게 의적 모양으로 활약한 것이 임꺽정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인물은 현대에 재현시켜도 용납할 사람이 아니었으리까. ’
기존의 역사소설들이 왕조사 중심의 소설들로, 봉건 지배층을 중심으로 역사를 파악하는 시각을 지녔다면, 벽초의 소설은 이렇게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내세웠다는 점에서 특이할 만한 것이었다. 벽초는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민중이며, 그들의 강인한 생명력과 활기가 왜곡된 현실을 바로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고, 또 민중을 계몽하기에는 소설을 통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점,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들의 생활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우선 ‘임꺽정’에는 궁중에서 천민생활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삶이 살아 움직이는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풍습사를 연상하게 하는 세밀한 풍속묘사와 생동하는 인물묘사는 조선 명종 시절의 기록화를 보는 듯한 생생한 실감을 전달한다. 임꺽정의 호방하고 괄괄한 성격이나, 서림의 간교한 모습, 곽오주의 불같은 격정, 그리고 운총의 티없는 눈동자가 책을 덮고도 오랫동안 기억되는 것은 벽초의 문장과 묘사력이 얼마나 실감나는 것인가를 알게 해준다. 이런 묘사력을 바탕으로 작가는 당대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도둑이 횡행하게 된 근본 원인을 추적하는 것이다.
이장곤을 통한 갑자사화에 대한 서술이나 중종반정, 인종의 의문사, 윤원형 일파의 전횡, 중 보우로 대변되는 불교계의 타락 등은 모두 당대의 부조리한 현실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들이다.
또 임꺽정이 갖바치와 전국을 유람하는 도중에 만나는 덕망있는 선비들의 몰락상, 예컨대 서화담, 이황, 이지함, 이이 등 쟁쟁한 유학자들이 능력을 인정받지 못한 채 산림에 묻혀 소일하는 모습은 지배 이념이 더 이상 발전하는 현실을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이렇듯 혼탁한 시대를 배경으로, 작가는 반항적이고 격정적인 성격의 임꺽정을 빚어내고 사회 발전의 가능성을 모색하며, 양반을 미워하고 그들 중심의 세상을 저주하는 반봉건의 이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임꺽정」의 또 다른 장점은 이순신이라는‘담대한 아희’를 통해서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을 표출했다는 점이다. 일제치하의 혹독한 검열 속에서 이순신에 주목했다는 자체가 벽초의 남다른 민족의식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이순신은‘범안으로 보기에도 장래 큰 그릇’이 될 인물로 묘사되고, ‘평지돌출(平地突出)로 병수사 할 인물’로 제시되어, 임꺽정의 성질을 그대로 이어받은 아들 백손과 호응된다. 「임꺽정」이 비록 임진왜란까지를 대상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작가는 이처럼 임꺽정의 기질과 기개를 백손과 이순신에게 이어주는 탁월한 역사 재구력을 통해서 식민 현실을 우회적으로 문제삼고 있다. 그리하여 기개있고‘담대한’성격으로 점차 위축되는 민족정신과 혼을 불러일으켜 식민 현실에 맞서려는 의도를 내보이는 것이다. 임형택을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이「임꺽정」을 두고‘일제 식민지 억압하에 우리 민족문학이 이룬 최대의 성과’라는 극찬을 서슴지 않는 것은 이같이 작가의 투철한 민족의식이 작품의 전면에 스며 있기 때문이다.
「임꺽정」에는 또한 전편에 걸쳐 ‘조선어의 보고’라고 불려도 좋을 만큼 풍부한 토속어, 민간풍속의 묘사, 전래설화, 고유의 인명과 지명, 속담 등이 산재하여 읽는 이를 감탄시킨다. 양반 사대부가의 전통 예법, 천민들의 질박한 생활상, 혼례 풍습, 무당의 굿하는 모습 등이 다채롭게 묘사되며, 특히 청석골 배두령이 혼례를 치른 뒤 다음날 자리보는 남침(覽寢) 장면, 최영 장군 사당에서 무당들이 부정풀이로 시작하여 신을 청하는 가망청배거리, 산마누라거리 등 큰굿을 벌이는 장면은 민족의 고유의 생활과 정조의 보고서나 다름없다. 이런 점에서도「임꺽정」은 당대뿐 아니라 현시대에 이르러서도 우리 민족문학이 거둔 최대 성과의 하나로 꼽기에 손색이 없으며,‘한 시대 생활의 세밀한 기록이요 민속적 재료의 집대성이요 조선 어휘의 일대 어해(魚海)’라는 이효석의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48년 이후 이 탁월한 작품은 40여년 동안 지하에 묻혀 버려야 했다. 이후 소설은 전설과 소문으로만 인구에 회자되었을 뿐이다. 다시 빛을 보게 된 것은 1985년 사계절 출판사에서 전 9권을 출간하면서부터다. 「임꺽정」이 근대문학의 최대 성과라는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되찾은 것이 그리 오래지 않은 셈이다. 무릇 좋은 작품은 독자의 외면을 받지 않는 법, 이제「임꺽정」은 대학 교양과정의 필독서가 될 정도로 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걸로 안다.
4.
괴산에는 임꺽정과 홍명희에 대한 전설이 아직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괴산에서 40여 리 떨어진 초평리에 임꺽정이 살았다는‘임꺽정 굴’이 있다는 소문도 그중 하나인데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필자는 임꺽정이 한때 자연동굴에 은거하며 활동했다던 철원의 고석정을 가보았을 뿐이다. 임꺽정의 주된 활동무대가 황해도 경기도 일대였고, 바위굴이 많은 한탄강 상류 고석정 주변은 그가 은거하기에 적합한 장소였던 모양이다. 우연의 일치인지 괴산의 고산정은 철원의 고석정과 많이 닮아 있었다. 굽어도는 강을 끼고 우뚝 솟은 바위라든지, 그 위에 정자를 세워 놓은 모습이라든지, 아직도 임꺽정의 전설이 떠도는 신비로운 분위기 등이 그렇다.
그런데 벽초는 후세에「임꺽정」의 작자로보다는‘애국자’로 기억되기를 더 원했던 모양이다. 말년에 벽초는 자식들을 앞에 놓고“나는「임꺽정」을 쓴 작가도 학자도 아니며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다. 일생동안 애국자라는 그 명예를 잃을까봐 그 명예에 티끌조차 묻을까봐 마음을 쓰며 살아왔다”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생전에 벽초를 가까이서 지켜 본 작가 현승걸에 의하면 벽초는 평소에도 부친이 남긴 유서를 액자에 정하게 넣어 놓고 아침저녁으로 올려다보며 자신의 언행을 추스리곤 했다는 것이다. 벽초가 일생 동안 애국의 지조를 지켜 순국한 부친을 자랑으로 여겨왔고 조선민족으로서의 도리와 의무를 다하라는 부친의 유언에 충직하려고 애써 왔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벽초의 집 사랑채 뒤편을 돌아 오르니 세 개의 봉분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가운데와 오른쪽 위편에 자리한 산소가 벽초의 증조부 홍우길과 고조부 홍정주의 묘이고 비석과 방두석이 놓여 있는 것이 벽초의 아버지 홍범식의 묘였다. 선영은 벌초가 되어 있어, 잡초 우거진 민망스런 몰골은 아니었다. 겨울눈이 쌀랑하게 내려않은, 쓰러질 듯한 고가의 풍경이 저 밑으로 내려다보인다. 건국 공로 훈장까지 받은 순국열사의 집이었으나, 그 집의 증손인 벽초가 북으로 넘어간 이후, 부수상까지 지냈다는 전력이 있는 까닭에 당국에서도 어떻게 손을 대보지 못하고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그래도 이곳 제월리 사람들은 벽초의 전설을 아직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고.
마을을 빠져 나와 김시민 장군의 사당이 모셔져 있다는 충민사로 발길을 돌렸다.
제월대에서 10 여 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당은 강 너머 산비탈에 층층이 4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푸른색 기와가 깔끔하고 인상깊었다. 예전에는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가야 했는데 작년에 강을 잇는 다리를 완공, 배를 타고 건너야 하는 수고로움을 덜어 주었다.
문득 제월대와 괴강을 이어주는 잘 닦여진 자동차 길과 충민사가 하나의 그림이 되어 머리 속에 떠오른다. 이곳은 하나의 훌륭한 문화유산 답사 코스이다. 바로 그 인근에 있는 산수동 벽초의 생가 마을이 잘 조성된다면 하나의 훌륭한 역사교육, 문학교육의 현장으로 되살아나지 않겠는가. 아이의 손을 잡고 이곳에 들러 임꺽정과 홍명희와 제월대와 충민사를 함께 둘러본다면, 그만한 산교육이 없을 것이다.
온갖 규제에 묶여 있는 산수동 마을이 이 나라가 통일되어 벽초의 직계 가족이 다시 이곳을 찾게 될 그날이나 돼야 다시 빛을 볼만큼 요원한 상태라 해도 벽초와‘임꺽정’을 사랑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이곳 제월리는 근대문학사에 잊어서는 안 될‘고향’으로 기억될 것이다.
첫댓글 그 시절 정보를 얻기도 어려웠을텐데 그 많은 인물,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은 민족사에 영원히 기억될 금자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