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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지름길로 갔으며) 하나님의 영광
에 이르지 못하더니" (롬 3:23).
괄호 안의 내용은 내 해설이다. 성경에는 '죄'라는 단어만 나오지만, 죄가 바로 지름길 아닌가? 열매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는 지름길로 가고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가 약속을 이루어주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해보면 어떨까?
그래서 열매를 잡았다.
나는 전화기를 잡았다.
당신은 어떤가?
“꼭 대답해야 하나요?"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대답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때로는 쉽고 빠른 길을 선택했다는 데 동의하지 않는가? 기다리기 싫은 마음, 신뢰하지 않으려는 마음,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기를 꺼리는 마음이 바로 그 죄의 근본이지 않은가? 우리는 종종 우리 손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야곱이 그랬다.
* 이 가족에게 인도가 필요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상황을 그대로 내버려두셨다.
혹시 당신이 놓쳤을지도 모르니, 다시 한번 확실히 해두자. 방금 은혜가 무대에 올랐다. 이 가족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씨나 마찬가지다. 형제들은 서로 다투고 부모는 편애한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다.
은혜, 하나님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되심. 우리가 약속을 어겨도 하나님은 용서하신다. 우리가 헌신을 잊어도 하나님은 나타나신다. 우리가 그분을 등져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신다. 우리가 제멋대로 한 행동에 아무런 결과가 따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쌍둥이 형제의 관계는 태풍을 맞은 야외 의자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창27:41).
리브가는 동생에게 속은 형이 맹세하는 내용을 듣고는 야곱에게 도망칠 수 있을 때 도망치라고 경고해주었고, 야곱은 줄행랑을 쳤다. 리브가와 야곱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지만,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했는가!
야곱은 축복을 훔쳤지만.…
그는 장자의 권리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모든 부귀영화를 박탈당했다. 가축도, 재산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삶은 비극뿐이었다. 그가 등장하는 다음 장면에서, 그는 돌을 베개 삼고 있을 것이다. 야곱은 하루 만에 왕자에서 얼간이 신세로 전락했다.
이게 다 그가 지름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살면서 어떤 지름길로 가고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가 부탁하기만 하면, 기쁨과 소망, 생명과 사랑이 넘치는 에덴동산이 우리의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분은 너무 느리신 것 같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우리와 맞지 않는다.
*하나님께 지름길이란 없다. 단 하나도 하나님의 액셀에 당신 발은 필요 없다. 하나님의 계획에 우리 도움은 필요 없다. 하나님이 야곱을 축복하기 원하셨다면, 야곱은 틀림없이 그 복을 받았을 것이다. 리브가가 일을 꾸밀 필요가 없었다. 야곱이 그들을 속일 필요도 없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그 역할을 맡기기 원하셨다면, 이미 끝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리브가와 야곱이 할 일은 단 하나,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는데, 그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배우자? 여호와를 기다리라.
새 일자리? 여호와를 기다리라.
남편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는가? 행운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가? 경력이 쌓이고 사업이 번창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이 알아야 할 게 있다. 하나님의 타이밍은 언제나 옳다. 하나님의 계획은 언제나 최선이다. 그분의 계획에 속임수나 조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분의 전략은 사람들을 망가뜨리거나 타협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못살게 굴거나 사람들과 싸우거나 사람들을 업신여기거나 사람들에게 상처 주지 않으신다. 그렇게 하고 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이 너무 느린 것 같다고 생각 할 수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그분을 믿고, 기다리자. 고개를 들고 무릎을 꿇고 눈을 똑바로 뜨자. 여호와를 기다리자. 좁은 길과 오르막길을 택하자. 직장인이라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학생이라면 시험공부를 열심히 하자.
*하나님은 야곱에게 그와 그의 후손을 온 땅을 다 덮을 정도의 큰 민족으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셨다. 야곱의 속임수와 지름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축복을 반복해서 약속하셨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하나님은 이 도망자를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 사기꾼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전력을 다해 야곱을 평생토록 돌보실 것이다.
도무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 야곱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있었던가? 그럴 리가 없다. 지금까지 야곱이 한 일들은 하나같이 형편없었다. 그는 체질하듯이 신실함을 흘리고 다녔다. 속임수로 형을 쥐락펴락했다. 도박판 타짜처럼 시스템을 악용했다. 지금까지 야곱이 기도했다거나 믿음이 있다거나 하나님을 열심히 찾았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 자격 없는 도망자에게 예상치 못한 자비를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흠뻑 부어주셨다. 하나님은 그분을 등진 야곱에게 등을 돌리시지 않았다. 그분은 신실하셨고, 지금도 신실하시다.
"우리는 신실하지 못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신실하십니다.”
*은혜가 그렇다. 은혜는 끈질기게 좇고, 나타나서 크게 말한다. 우리 꿈속에서 절망 가운데서 죄책감 속에서, 은혜는 이렇게 말씀하며 분주하게 움직이시는 하나님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창 28:15).
놀랍지 않은가? 야곱은 분명히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창28:16).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렇게 말하겠는가? 여호와께서 여기 계시는데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했다.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믿지만, 지금도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모른다.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은 믿지만, 날마다 세상을 바꾸고 계신 하나님은 모른다. 태초에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은 믿지만, 그 만물 가운데 걷고 계신 하나님은 모른다. 그들은 무신론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지 못하기에 그들의 믿음은 '저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을 바라보고 의지하라고 초대하고 계신다. 저기 그분이 계신다! 사다리 꼭대기에서 천사들을 보내 당신을 도우시고 천사들이 전달하는 당신의 기도를 받으신다.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지 못하기에 그들의 믿음은 '저는 믿음'이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말씀하셨고, 지금도 말씀하고 계신다 그분을 바라보고 의지하라고 초대하고 계신다. 저기 그분이 계신다! 사다리 꼭대기에서 천사들을 보내 당신을 도우시고 천사들이 전달하는 당신의 기도를 받으신다.
*야곱은 감격하여 이렇게 반응했다.
"야곱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베개로 삼았던 돌을 가져다가 기념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그러고 나서 그곳의 이름을 베델(하나님의 집)이라고 했다" (창 28:18-19, 메시지). 야곱은 베개를 기둥으로 세우고 고통의 장소에 다른 이름을 붙였다. 그가 잃어버린 모든 것을 상징했던 돌 베개가 이제는 그가 발견한 모든 것을 기념하는 거룩한 기둥이 되었다. 그 땅은 더 이상 비바람에 망가진 불모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곳이었다.
당신의 돌 베개는 무엇인가? 당신의 실수와 상실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은 무엇인가? 이혼 증서? 묘비? 당신을 잊고 사는 자녀들 사진?
당신의 광야는 어디인가? 텅 빈 집 병실? 책상에 쌓인 미납 청구서들?
야곱과 벧엘의 약속은 이것이다. 여호와께서 광야에 계신다. 절망 가운데, 슬픔 가운데, 엉망진창과 난장판 가운데, 무너진 마음 가운데 그분이 계신다. 원치 않았고 반갑지도 않은 이 중간 지점에서 하나님이 당신을 만나실 것이다. 그분이 도우셔서 당신의 베개가 기둥이 될 것이다. 메마른 땅이 예배 장소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천사가 내려오며 당신은 곧 이렇게 고백할 것이다.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
*토저(A. W. Tozer)는 이렇게 썼다.
"인간을 그냥 내버려두면 우리는 그 즉시 하나님을 관리가 능한 용어로 축소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그분을 사용할 수 있는 곳으로 그분을 데려가기 원하거나, 적어도 우리가 그분을 필요로 할 때 그분이 어디에 계시는지 알기 원한다. 우리는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 신을 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 배당금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 하나님이 램프를 문지르면 나타나는 지니라는 생각, 하나님이 비밀번호만 정확하게 치면 좋은 것을 내주는 현금 인출기라는 생각, 우리가 하나님과 거래했기 때문에 그분은 원하는 대로 움직여야 하는 하늘의 요정이라는 생각은 거의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책임지시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의존적인 하나님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런 거래 신학은 어떤 결과를 낳는가? 환멸이다. 당신은 이렇게 말하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만이 보았는가?
"나는 오래전에 하나님을 버렸어요. 아이가 아팠거든요. '하나님, 거기 계신다면 우리 아이 좀 낫게 해주세요'라고 기도 했는데 아무 소용이 없었어요. 내가 아는 한, 하나님은 없어요. 자기만의 서부 텍사스 유전 지대를 경험한 사람, 칠흑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왜 약속을 안 지키십니까?"라고 외친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주머니 크기의 신으로 축소해버렸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과소한 관점과 자신에 대한 과장된 관점 때문에 우리의 크신 아버지와 맺는 능력과 생명의 관계를 잃어버렸는가?
분명히 말하고 제대로 이해하자.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가성은 없다. 그분은 벼룩시장 행상인이 아니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주고받기나 맞교환은 없다. 우리 몫과 하나님 몫을 거래한다는 개념은 없다.
성경은 다음 말씀으로 거래 신학을 반박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9).
'거룩히 여김을 받다'라는 단어의 어근은 '하기오스'(hagios)인데, '거룩한', '거룩함' 같은 단어가 거기에서 나왔다. '하기오스'에는 '독특한 남다른 구별된'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지만, 당신과 같지는 않다.
중력이 하나님을 끌어당기지 못한다.
고통이 하나님을 괴롭히지 못한다.
경제가 하나님을 당황하게 하지 못한다.
날씨가 하나님을 방해하지 못한다.
선거가 하나님을 결정하지 않는다.
질병이 하나님을 감염시키지 못한다.
죽음이 하나님을 주장할 수 없다.
하나님은 이 모두를 초월하신다!"
하나님은 "온 세계의 지존자 "(시 83:18) 시다. 땅은 하나님의 발판이다(사 66:1 참조). 이 세상은 하나님의 주머니에 들어가고 온 우주가 그분의 손바닥에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바닷물이 그 속에 잠긴 양동이를 가득 채우듯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채우신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담기지 않으시고 그분이 만물을 담으신다.
*그분은 하늘이나 땅에 있는 어떤 피조물 혹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인 어떤 형상과도 바꿀 수 없다. 그분은 주권자시며 그분의 이름은 다른 모든 이름보다 거룩하며 다른 어떤 이름과도 같이 지칭할 수 없다.
하나님을 벼룩시장 장사꾼으로 보는 관점만큼 영적 성장에 방해가 되는 것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인간의 도움이 필요한 하찮은 존재로 생각한다면, 얼마 안 가 하나님 찾기를 그만둘 것이다. 반대로, 그분을 있는 모습 그대로, 곧 거룩하고 높으신 분, 초월적이고 찬란하신 분으로 본다면 우리는 영원토록 할 일을 이 땅에서도 평생 하게 될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일 말이다.
사실은 이렇다. 하나님께 화를 내는 사람은 대부분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이유로 화를 낸다. 그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지 못했다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갈망하거나 기대하거나 요구한 것을 그분이 주시지 않았기에 화를 낸다. 자신에 대한 경외심이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대체할 때 하나님은 더 이상 당신의 주님이 아니라 당신과 계약한 종으로 전락하고 만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 맥스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맥스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둔다면,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그분께는 없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시는지 찬양할 수 있지 않을까? 야곱은 자신의 충성이 대단해서 하나님이 그 충성을 받으시려고 그의 조건을 들어주시리라 생각했다. 나는 선교사로 섬기는 일이 초자연적인 치유와 맞교환할 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시무시한 자만이다.
*기도는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일을 하실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우리와 같이 되셨다. 인간의 손과 발과 눈을 취하셨다. 심지어 피조물의 손에 죽임을 당하기까지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요구를 외면하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분은 절대 대가성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너무 크시고,
우리는 너무 작다.
*“내가 이 비참한 세상의 죽음과 깨어짐을 해결할 텐데 너와 네 후손을 통해 그 일을 이룰 것이다."
그 후손 중 하나가 야곱이었다. 야곱의 사다리 꼭대기에서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창28:14).
그러나 야곱의 전과 기록에는 '사기꾼', '협잡꾼', '도둑', '거짓말쟁이' 같은 단어가 등장했다. 그의 영적인 삶은 로키산맥보다 더 곡절이 심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를 내치지 않으셨다. 그의 사람됨에도 불구하고 그를 사용하셨다. 희한한 일이다. 야곱은 교회보다 도박 카지노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삶은 엉망진창이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은가? 야곱처럼 우리의 영적 행보도 굽은 길을 걷는다. 번번이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행동하고, 나쁜 습관이 좋은 의도를 망친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도 받아주실까?"
야곱을 보면 그 답은 "그렇다"이다. 우리는 크게 실패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보다 더 크다. 그분은 흠 있는 사람들을 쓰신다. 우리를 내치셔야 마땅할 때도 내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신다.
성경은 이 경고의 깃발을 자주 그것도 숨김없이 노골적으로 흔들곤 한다.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 (창 11:17)
“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창 11:3)
*당신은 오늘 어떤 씨앗을 심고 있는가? 속임수라는 씨앗이 속임수의 열매를 맺듯이, 진실이라는 씨앗은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 결과에는 복리 이자가 붙는다.
오늘 당신이 뿌리는 씨앗이 미래의 성격을 결정한다. 야곱 이야기는 굳이 하란을 통과할 필요가 없었다. 엉뚱한 언니와 결혼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족장이 되기 위해 십사년간 중노동을 할 필요도 없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드리면서도 더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람을 심으면 광풍을 거둘 것"(호 8:7)이다. 혹은 지혜자가 말했듯이, "남을 친절히 대하면 자기도 잘되지만 남을 모질게 대하면 자기도 다친다. 악행의 대가는 부도수표지만 선행에는 확실한 보상이 따른다" (잠 11:17-18 메시지).
야곱은 교훈을 얻었을까? 정확한 답을 알려면 계속해서 그의 인생 이야기를 읽어보아야 할 것이다.
그 전에 우리는 이 신행 강탈 소동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한가지 희망적인 요소가 있다. 라헬의 언니 레아를 기억하는가? 야곱이 원치 않았던 아내, 눈빛이 약하고 불행한 이름을 지녔던 소녀 말이다.
레아는 유다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 그녀의 후손 중에 베들레헴 목동 다윗과 나사렛 목수 예수가 있었다. 그렇다. 야곱에게 선택받지 못했던 레아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서 왕중의 왕의 혈통을 잇는 어미가 되었다.
아, 이렇게 은혜는 계속 흐른다.
*야곱은 자신에게 주어진 십사 년을 채웠다. 손실을 감수했고 궂은 날씨를 견뎠으며 힘든 시간을 헤쳐나갔다. 라반은 반대하지 않았다. 아니, 반대할 수 없었다. 야곱은 라반과 함께한 시간을 견뎌냈을 뿐만 아니라 번창했다. 야곱의 믿음도 더 깊어졌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이 듣도록 선언했다.
"하나님이 내 고난을 보셨다."
하나님은 라반을 사용하여 야곱을 준비시키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라반을 사용하여 당신을 준비시키고 계시는가? 당신은 라반 없는 삶을 원할 것이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하지만 라반이 없는 인생은 없다. 요즘 수조(대구를 넣은 수조에 메게를 넣어 대구를 싱싱하게 옮김)를 누비며 당신을 쫓는 누군가가 있다면 기억하라. 하나님은 이상한 사람들을 이용해 자기 백성에게서 최선을 끌어내신다.
이렇게 해보자. 하나님께 당신의 라반에 대해 말씀드리자. 하나님께 여쭈어보자.
"주님, 이 메기를 통해 제게 어떤 교훈을 가르치고 계십니까?"
이렇게도 해보자. 하나님께 당신의 라반에 대해 감사하자.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2-3).
라반들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 때문에 하나님을 더 간절히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매우 귀중한 축복이다. 그러니 살다가 또다시 라반을 만나게 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이다!
당신의 라반은 영원히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야곱처럼 당신이 자유로워지는 날도 금세 올 것이다. 그때까지 하나님의 목적과 약속을 신뢰하자. 그 덕에 당신은 더 나은 사람이 될 테니까.
*성경에 나오는 영웅 가운데 야곱 일대기에만 불미스러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을 죽여서 손에 피를 묻혔다(출 2:12 참조). 아브라함은 아내에 대해 거짓말을 했는데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고 아내가 여동생인 척했다(창 12:12-13 참조). 엘리야 선지자는 어느 날은 불을 내릴 만큼 믿음이 있었지만, 다음날엔 스스로 몸을 숨길 만큼 두려움에 떨었다(왕상 18-19장 참조). 에스더는 용기 있는 태도를 보였지만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에스더는 왕에게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숨겼다(2:20 참조).
당신의 과거에 오점이 있는가? 베드로도 공감할 것이다. 그리스도께 베드로가 가장 필요했던 그날 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저주했다(마 26:69-75 참조). 바울에게도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었다. 우리가 사모하고 공부하고 암송하는 많은 말씀을 쓴 사도에게 비밀이 있다고? 그는 직접 이렇게 고백했다.
"나는 이 '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여 죽이기까지 하였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묶어서 감옥에 넣었습니다" (행 22:4, 새번역).
바울은 적극적으로 "교회를 없애려고 했다. ‘없애다'라는 뜻의 헬라어는 잔인하고 가학적인 학대를 의미한다. 바울의 공격성은 단순한 판단 실수나 젊은 날의 무분별한 행동이 아니었다.
모세는 손에 피를 묻혔다.
아브라함은 뻔뻔한 거짓말쟁이었다.
엘리야는 겁쟁이였다.
야곱은 거짓말쟁이에 사기꾼이었다.
에스더는 자신의 신앙을 비밀로 했다.
베드로는 배신자였다.
바울은 살인자였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들 모두를 사용하셨다.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고, 그렇기에 그들의 과거가 더는 그들을 지배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우리의 추악한 시절(들)에 진저리를 내지 않으신다. 하나님이 도우신다면 우리도 바울이 한 말을 할 수 있다.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 3:13-14).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바울의 말에 공감할 수 있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18-19,24).
바울의 과거는 헤어나기 힘든 늪이었다.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가라앉았다. 그가 곧 가라앉을 것 같다고 우리가 생각하던 바로 그때,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7:25: 8:1).
바울은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을 발견했다. 예수님을 통하자 모든 사슬과 족쇄가 벗겨져 땅에 떨어졌다.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넘어섰다. 살인자, 교회 분열자, 자칭 위선자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미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당신도 그렇게 하라.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 죄의 해결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당신이 한 일을 그리스도께 자백하라. 구체적으로, 아무것도 숨기지 말라. 너무 오래되었거나 사악하거나 사소한 죄는 없다. 당신이 그 무게를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만이 그 죄를 없애실 수 있다. 그렇게 해달라고 간구하라. 당신의 죄책감이 마치 돌덩이인 듯 그것을 손에 들고 예수님께 건네라.
"예수님, 이걸 받아주시겠어요?"
예수님이 어떤 대답을 하실지 당신도 알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내 설명이 분명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므로, 에서 사건이 주는 메시지를 다시 이야기하겠다.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으면 당신은 당신의 과거를 넘어설 수 없다. 하나님이 없다면 당신은 과거를 정당화하거나 부정하거나 피하거나 억압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도우시면 당신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이제 그렇게 할 시간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가장 큰 복을 허락하실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후 5:1).
당신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다. 이스라엘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싸우신다. 당신은 더 이상 가짜 힘으로 뽐내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절뚝거릴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에서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당신보다 앞서가셨다. 하나님이 길을 예비하시고 그 길을 잘 닦아놓으셨다.
당신의 에서, 당신의 과거는 이제 당신의 형제다. 그를 끌어 안으라. 그리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라.
*세겜은 벧엘에서 고작 30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었다. "야곱은 라반에게서 도망친 이후로 거의 800킬로미터를 이동했다. 눈앞에 목적지가 있었다. 그런데 야곱은 갑자기 멈췄다. 그는 왜 세겜 그늘에 장막을 쳤을까? 고고학 발굴에 따르면, 그 당시 세겜은 "눈에 띄는 요새 도시였다. (세겜) 성벽이 약 2만 4천 제곱미터 크기 도시를 둘러싸고 있었기에 아마도 500~1,000명 정도의 인구가 거주했을 것이다. "21 세겜은 무역로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한 고대 상업의 중심지였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여행에 지친 야곱과 그의 유목민 무리가 장막을 치기로 결정하는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물이 아닌 다른 것을 마시고 싶고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가 간절했다. 그들은 요단강 동쪽 가나안 고원에 멈춰섰고 세겜 사람들을 만났다. 몇 가지 사업을 했고 친구도 사귀었다. 그리고 그들은 땅을 구입했다.
…야곱 딸 디나의 강간당함…
야곱은 딸의 안전보다 자신의 안위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결국 그는 세겜만큼이나 떳떳하지 못했다. 디나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디나는 최상위 포식자들의 싸움에서 졸(卒)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어떠하셨는가? 아무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았고 아무도 힘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야곱은 이스라엘로 불리지 않는다. 그는 새 이름을 얻었지만, 과거의 본성에 따라 행동한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난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처참한 내용이다. 영웅도 없고 감동도 없다. 기분 좋은 설교를 위한 본문으로는 부적절하다. 시편23편, 산상수훈, 부활절이나 오순절, 우리는 이런 사건들에서 영감을 받는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타락을 본다. 왜 이런 이야기가 성경에 들어 있는가?
간단하다. 우리에게 경각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우리는 완전한 실패자들이다. 인간의 마음은 음침한 곳이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시 361)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
세겜에서 살해당한 사람들, 무자비한 형제들, 그들의 살생의 피, 무력한 아버지.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메시지를 상기시켜준다. 하나님을 찾지 않을 때, 새로운 본성을 억압할 때, 사회가 자기보다 높은 그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을 때, 그 결과는 혼돈이다. 우리는 야만인이 되어 약한 사람들을 희생자로 만든다. 마음과 가정과 언약과 약속을 깨뜨린다.
우리는 독이 든 시스템을 만든다.
독이 든 시스템은 사람들이 더 나은 자아를 억압하고 다른 사람들의 등을 밟고 일어서는 시스템이다. 권력과 힘에 보상하고 친절과 은혜를 경시하는 시스템이다. 문화는 부를 기반으로 번창한다. 세겜 같은 사회는 인간보다 못하고, 바람직하지 않으며, 가치 없고, 무시무시한 하부 조직을 만든다.
세겜은 독이 든 문화였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독소를 들이마셨다. 바로 한 장 전에 야곱이 천사들을 보고 하나님과 씨름하고 새 이름을 얻고 에서와 관계를 회복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지금은 이렇다. 책장 한 장 넘겼더니 산꼭대기에서 구덩이로 굴러떨어졌다.
사람의 마음이 어찌나 빨리 사악해지는지. 분명히 말하지만, 기독교적 관점에서 인류는 귀중하고 값진 존재이며, 영광의 운명을 타고났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존재이며 영원한 안식으로 초대받았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되려고 애쓰느라 우리의 유산을 낭비했다.
우리는 세겜의 그늘에 장막을 쳤다. 세상의 타락을 달리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의과학의 발전, 기술과 의술의 획기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청동기 시대 조상들과 똑같은 습성을 가지고 싸우고 있지 않은가? 여성들은 여전히 대상화되어 있다. 전 세계 15세에서 49세 사이 여성 세명중 한 명은 신체적·성적 폭력의 피해자다.
…
분명히 말하지만 그리스도라는 선물을 마음에 품으면 당신의 삶은 보장된다. 죄는 당신을 파괴할 수 없다. 하지만 죄는 당신을 넘어뜨리고 함정에 빠뜨리고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다. 죄가 당신의 구원을 빼앗을 수는 없지만, 당신의 기쁨과 마음의 평화, 안식을 빼앗을 수는 있다.
야곱의 전철을 밟지 말라. 당신이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서 사업을 하지 말라 과감하게 행동하라. 넓은 원을 그리며 도시 주변을 걸어보라, 인터넷을 끊고 신용카드를 버려라. 라스베이거스 뉴욕 등 당신이 젊음을 즐기려고 계획했던 여행을 취소하라. 전화번호를 바꾸라. 여자친구와 헤어져라. 그 남자를 만나지 말라. 세겜의 그늘에 장막을 치지 말라.
*야곱은 구약성경판 회심의 순간을 경험했다. 그는 가문의 연장자로, 가장 역할을 다시 맡았다. 더 이상 거짓 신은 없다. 더 이상 세겜 사람들과 시시덕거리지 않는다. 더 이상 신념 사이에서 흔들리거나 미적거리지 않는다. 야곱은 다시 고향으로 향했다.
하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야곱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주인공이셨다. 하나님이 야곱을 자극하신 것이지 야곱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야곱을 움직이신 것이지 야곱이 하나님을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개입하신 것이지 야곱이 도움을 구한 것이 아니었다. 야곱은 회개했다.
그랬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부르시고 나서야 그렇게 했다. 하나님은 야곱을 자극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그의 새이름과 그에게 하신 약속을 상기시켜주셨다.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지마는 야곱은 연거푸 하나님을 잊었지만,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야곱을 잊지 않으셨다. 축복을 약속하셨던 하나님이 축복하셨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셨다.
은혜로다. 모든 것이 은혜로다.
당신도 그 은혜를 누려보지 않겠는가?
우리는 날마다 새로운 방식으로 헤매고 방황하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직에 관한 책을 읽어봐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이다. 증거가 있냐고? 산상수훈에 담긴 에베레스트산만큼 높은 기준을 생각해보라.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마5:22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마 5:39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나는 4점 만점에 0점이다! 이 명령들을 어떻게 어김없이 지킬 수 있단 말인가? 누가 가망이 있을까? 우리에게 어떤 희망이 있는가? 야곱이 가졌던 것과 같은 희망, 바로 은혜다.
"그러나 죄가 넓고 깊어 보여도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은혜는 한층 더 넓고 깊습니다"(롬 5:20, 필립스성경).
엄청난 발견이 아닌가?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하나님은 당신을 가족으로 맞으셨다. 당신의 이름과 주소를 바꾸셨고 저녁 식탁에 당신 자리를 마련하셨다.
*은혜는 하나님의 가장 크신 뜻이다. 우리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 마음에 따라 우리를 대하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그 아들을 보시겠다는 뜻이다. 그 어떤 죄도 끊어낼 수 없는 사랑으로 끊임없이 우리 곁에 함께하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잘 보이려 하지 않고 그저 그분을 신뢰하는 사람 누구에게든 하늘 문을 활짝 여시겠다는 뜻이다.
놀라운 은혜 아닌가!
하나님은 사다리 위에 서셔서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그분을 찾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광야에 사다리를 내리고 우리를 찾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착하게 굴어야만 우리를 사용하겠다고 제안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항상 잘못된 행동을 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우리를 사용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은혜는 세겜의 그늘을 피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선물이 아니다. 우리 중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은혜가 존재하는 것이다.
사랑하시는 하나님, 굽어보시는 하나님,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
당신은 이 은혜를 아는가?
*당신의 보물은? 장자의 권리다. 영적 유산이자 운명.
하지만 이런 수수한 질그릇은 우리의 보물과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방황하는 마음, 늙어가는 육체, 의심하는 마음, 욕망하는 눈, 허물어지는 신념을 가졌다. 우리는 압력을 받으면 깨진다. 우리 도자기에는 균열이 생겼다. 누가 깨진 그릇을 사용하고 싶겠는가? 하나님이 그렇다. 하나님은 깨어짐을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신다. 땅이 갈라져야 농작물이 나온다. 달걀이 깨져야 생명이 나온다. 하늘이 갈라져야 비가 내린다. 부러진 크레파스로도 얼마든지 색칠할 수 있다. 고치가 찢어져야 곤충이 날아오른다. 옥합이 깨져야 향유 냄새가 풍긴다. 성찬식 빵을 잘라야 소망이 생긴다. 십자가에서 찢긴 그리스도의 몸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된다.
이것이 바로 요점이다. 하나님은 심하게 망가진 사람들을 통해 위대한 일을 하신다. 중요한 것은 질그릇의 힘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하나님의 힘이다.
당신이 지은 죄가 모여 당신이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 무덤, 부활이 모여 당신이 이루어졌다(고후 5:21 참조).
"그리스도로 인해, 당신에 하나님께 달콤한 향기를 피워 올리면, 구원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그 향기를 맡고 알아봅니다. 그 향기는 생명을 드러내는 향기입니다"(고후 2:15,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