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편]2015년7월1~2일
제주도 서귀포를 다녀와서!
한라산5(漢拏山五)
그래서 문인들은 이 산을 ‘고향’·‘젊음’·‘순결’·‘침묵’의 산으로 칭송하였다. 이 섬의
선인들이 바람 많고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높은 긍지와 탐라인으로서의 숭고한
얼을 지닐 수 있었던 것도 한라산의 고고한 기상을 지녔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
느 작가는 한라산은 식물의 보고(寶庫)로서 신의 은총에 의하여 탄생된 것이 분명
하다고 말하였다. 이 밖에도 한라산은 산이 높고 넓으며, 초지가 광활하고, 기상변
화가 심한 산으로 기술되고 있다. 또한 갑자기 날씨가 흐려지면 한라산신의 노여움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시인 고은의 제주 체험기인 「제주도」는 한라산을
가장 깊이 있게 기술한 작품 중의 하나이다. 그는 “우미절대(優美絶對)한 산의 모
습에 대해 어떤 감동도 그 아름다움에 버금하지 못한다.”고 찬탄하였다. 또, 소설가
박태순(朴泰洵)은 기행문 「국토와 민중」에서 “한라산은 신비하면서 자상하고 푸근
하면서 자랑스럽다. 때문에 제주도를 밟는 것은 감미롭게 실종 당하고 있는 것과 흡사
하다.”고 하였다. 그는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포근하여 마치 꿈속을 걷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또, 어떤 시인은 한라산을 ‘이 산하(山河)의 어버이’라고 찬양
하기도 하였다. 제주도민의 삶의 터전이요 민족 의지의 상징인 한라산, 풍부한 식물과
4계가 뚜렷한 자연경관을 지닌 한라산의 참모습은 앞으로도 많은 문인들에 의하여
찬미되고 사랑받을 것이다. 한라산은 그 자체가 한 폭의 걸작이다. 특히, 녹담만설·
영실기암(靈室奇巖)·탐라계곡(耽羅溪谷)·구구곡(九九谷)·어리목계곡 등은 경승이
빼어나 문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화가들의 작품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로
현대 화가들에 의한 것으로서, 옛 사람들에 의하여 표출된
한라산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구태여 제주 미술의 근원을 찾는다면, 1702년(숙종 28)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
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를 들 수 있다. 「탐라순력도」는 제주도의 역사적 사실
과 한라산 등의 지리적 현상을 28폭에 수록한 원색도(原色圖)로서 가장 오래된 제
주도 지도이다. 더욱이 그 중 호연금서(浩然琴書)는 바다 위에서 한라산을 바라보며
그린 그림으로 당시의 한라산 모습과 제주의 정취가 잘 묘사되어 있다. 한라장촉
(漢拏壯囑) 또한 산악 지명 등을 소상하게 담고 있다. 한편 김정희(金正喜)의 「세한
도(歲寒圖)」를 제주 미술의 근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세한도」는 직접 한라산을
소재로 한 그림은 아니지만 당시 제주의 풍물을 담은 불후의 명작으로서, 후세에
많은 예술인을 배출하는 모체가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김정희는 1840년
(헌종 6)에 제주에 유배되어 대정현(大靜縣)을 적거지(謫居地)로 삼고 9년여
동안 서화(書畵)뿐만 아니라 한시 등 문학에도 정진하여 독특한 서체의 경지를
개척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라산의 풍물을 그린 정통 산수 화가는 없었고, 오직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린 민화만이 있었을 뿐이다. 따라서 현대 제주 미술의 발단은
6·25 이후로 보는 견해가 많다.
미술의 불모지였던 제주도에 국내 저명 화가들이 전란을 피하여 속속 들어오게
되었다. 홍종명(洪鍾鳴)·장이석(張利錫)·최영림(崔榮林)·이중섭(李仲燮) 등 중앙
화단의 화가들이 이곳을 피난지로 잡아, 불과 1, 2년에 지나지 않는 체재 기간 속에
서도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고, 그들 자신이 한라산의 수려한 경관을 화폭에 많이 담
았다. 이에 앞서 일제 강점기에는 제주 출신의 김광추(金光秋)·변시지(邊時志)·
양인옥(梁寅玉)·박태준(朴泰俊)·조영호(趙英豪)·장희옥(張喜玉) 등이 일본에 유학
하여 미술을 수학하였다. 1950년대에 들어 조영호·장희옥·박태준·김일근(金一根)·
고성진(高成珍) 등은 중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이 밖에
1935년 선전(鮮展)에 입선한 김인지(金仁志)를 비롯한 현승배(玄承北)·김보윤
(金寶潤)·김창해(金昌海) 등도 이 고장의 미술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이후 1960년
대에 들어 도외(道外) 화단과의 교류가 활발해지고 서울 등지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신진 화가들이 대거 귀향하게 되어 활기를 띠게 된다. 특히, 1970년대에 들어 제주도
미술계는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제주신문사가 1975년부터 해마다 미술전람회를 개최하여 작품 제작의 의욕을 고취
하였으며, 이로써 지방 미술인을 대거 배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 많은 화가들은 한라
산 곳곳의 4계를 화폭에 담았다. 제주도는 거친 바다와 박토를 유산으로 물려받아야 하였
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힘든 노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노동요는 생활의 일부
가 되어 풍성하게 전하여 내려온다. “하루 종일 부르다봐도/부를 노래 수없이 있다/한라
산이 내집이 되면/부를 노래 다 불러볼까.” 많은 제주민들은 한라산이 닳고닳아서 한 칸
의 집이 될 때쯤에야 노래를 다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한라산이 담겨 있는
민요로는 「산천초목」·「오돌또기」·「이야홍타령」 등이 있다. 「오돌또기」는 제주도의
대표적인 창민요(唱民謠)로 경쾌하고 구성지다. “오돌또기·저기 춘향 논다/달도 밝고
/내가 머리로 갈꺼나·……·한로산 허리엔/시러미 익은숭 만숭/서귀포 해녀는/바당에
든숭 만숭(후렴).”오돌또기는 예쁜 여인이 노는 모습을, ‘저기 춘향 논다’는 저기 예쁜
여인이 나타났다라는 뜻으로, 이렇게 달도 밝은데 내가 앞장서서 놀러나 갈까 하는 내용
을 담고 있다. 「이야홍타령」도 「오돌또기」와 함께 제주민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이다.
이는 주로 여인들이 부르던 건전한 노동요이어서 리듬이 자유롭다. 「이야홍타령」은
한라산을 신선의 나라로, 또 말들이 살찌는 따뜻한 나라로 찬미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산천초목」은 경복궁 중수 때 부역으로 간 제주도민들이 불렀던 노래로, “흰 눈은 왜
내리나/한라산 선녀들이/춤을 추며 내려온다.”고 눈을 한라산 선녀로 미화하였다.
이렇듯 제주도 음악은 광복 전까지 민요 위주였으며 6·25까지도 현대 음악이 없었다.
6·25로 피난 온 바이올린의 계정식(桂貞植)과 성악의 김금환(金金煥) 등이 학교
교육을 통하여 후진 양성에 힘썼으며, 미군소령 길버트(Gilbert,C.E.)가 여러 학교
에 악기를 기증함으로써 비로소 현대 음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라산을
소재로 한 노래는 없는 형편이고, 다만 각급 학교와 지방자치단체 등이 그 정기와
기상을 우러르는 내용을 교가와 시가 등에 포함하여 부르는 정도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오돌또기
김주옥과 그일행
오돌또기 저기 춘향 나온다
달도 밝고 냇가머리로 갈까나
둥그대당실 둥그대당실 여도당실
연자 버리고 달도 밝고 냇가머리로 갈까나
한라산 중허리엔 시르미 익은숭 만숭
서귀포 해녀가 바당에 든숭 만숭
둥그대당실 둥그대당실 여도당실
연자 버리고 달도 밝고 냇가머리로 갈까나
청촐왓데 몽생이 뛰고야 논다
둥그대당실 둥그대당실 여도당실
연자 버리고 달도 밝고 냇가머리로 갈까나
제주야 한라산 고사리 맛도 좋고 좋고
산지야 축항 끝에 뱃고동 소리도 좋고 좋다
둥그대당실 둥그대당실 여도당실
연자 버리고 달도 밝고 냇가머리로 갈까나
청사 초롱에 불 밝혀 들고
춘향이 방으로 감아돌아 드는구나
둥그대당실 둥그대당실 여도당실
연자 버리고 달도 밝고 냇가머리로 갈까나
말을 타고서 꽃밭에 갔더니
말발짝마다 향내만 나는구나
둥그대당실 둥그대당실 여도당실
연자 버리고 달도 밝고 냇가머리로 갈까나
2019-08-00 작성자 명사십리
첫댓글 제주도 탐라국 탐나게 서귀포 아름다운 전경 기행
유익한 관람정보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기쁨과 즐거운 시간 감사와 축복의 날
되시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