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윤헌주(尹憲柱)
1661년(현종 2)∼1729년(영조 5) / 68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영조(英祖) 때의 문신. 형조 판서(判書)를 지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익헌(翼獻)이고, 자는 길보(吉甫)이며, 호는 이지(二知) 또는 이지당(二知堂)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양주(楊州)이다.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를 지낸 윤택(尹澤)이고,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안영달(安穎達)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제용감(濟用監) 봉사(奉事)를 지낸 윤수열(尹受說)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병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윤종복(尹宗福)이다.
세종(世宗)의 부마 충경공(忠景公)윤사로(尹師路)의 9대손이기도 하다.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이며,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고, 영의정이의현(李宜顯)과 절친한 사이였다.
위키실록사잔 참조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역문첨록
형조 판서 윤공 신도비명 병서(刑曹判書尹公神道碑銘 幷序) - 이의현(李宜顯)
세상에서 우리 동방의 성족(盛族)을 헤아릴 때 반드시 파평 윤씨(坡平尹氏)를 으뜸으로 꼽는다. 먼 선조인 태사(太師) 신달(莘達)은 고려(高麗) 태조(太祖)를 보좌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하고 그 공렬(功烈)이 책에 기록되었는데, 그 음덕이 후손에게 미쳐 고려가 마치도록 10여 대 동안 가문이 더 빛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문숙공(文肅公) 관(瓘)이 가장 유명하여 사적(事蹟)이 역사책에 기재되니, 윤씨는 이로 말미암아 더욱더 큰 가문이 되었다.
본조에 들어와서는 충경공(忠景公) 사로(師路)가 세종(世宗)의 딸에게 장가들고 부원군으로 훈봉(勳封)되었다. 6대를 내려와 종복(宗福)은 벼슬하지 않았으나 아들 득렬(得說)이 귀해짐에 따라 병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니 곧 공의 증조이다. 조고 수열(受說)은 제용감 봉사이고 선고 택(澤)은 동지중추부사이니, 두 대는 모두 현달하지 못했으나 또한 공이 귀해짐에 따라 관작이 추증되었다.
선비(先妣) 안씨(安氏)는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의 후손이다. 공의 가벌(家閥)이 이미 이와 같은데 공이 또 길몽(吉夢)에 감응하여 태어나서 타고난 자품이 빼어나고 이른 나이에 학문을 이해하고 성취하니 사람들이 신동이라 일컬었다.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처음에는 대과에 오르지 못하고 음보(蔭補)로 출사하여 참봉을 거쳐 봉사에 올랐다. 성상이 태학에 거둥하여 문묘(文廟)에 배알하고 과거를 설행하여 선비들을 뽑을 때에 나의 선군 충정공[忠正公 이세백(李世白)]이 바로 이 시험을 관장했는데 공의 글을 보고 장원으로 선발하였다.
공은 오래전부터 과문(科文)을 잘 한다는 명성을 얻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제대로 된 사람을 얻었다는 칭송이 온 세상에 자자하였다. 이보다 앞서 어떤 사람의 꿈에 문숙공이 궐에 나아가 계수나무 가지를 얻어 공에게 주면서 권계(勸戒)하기를, “네가 틀림없이 인년(寅年)에 이 꽃을 꽂을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바로 이해가 무인년(戊寅年, 1698, 숙종 24)이었고 시제(試題)는 바로 국토를 개척하고 육진(六鎭)을 설치한 일에 관한 것이었으니, 곧 문숙공이 북로(北路)를 개척한 일을 물은 것이다. 이에 듣는 자들이 감탄하며 기이하게 여겼다.
전적, 예조와 병조의 낭관, 황해도 도사(黃海道都事)를 역임하였다. 정언, 헌납, 지평, 장령이 되어서 궁장토(宮庄土)를 마땅히 혁파해야 함과 하찮은 오락을 마땅히 경계해야 함을 지적하였는데, 언사가 매우 간절하고 정직하니 성상이 모두 가납하였다.
춘방(春坊)으로 들어가 보덕에 이르고 삼자함(三字銜 지제교)을 겸대(兼帶)하였으며, 중간에 장악원과 군자감의 정이 되었다. 부모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청해 남양(南陽)과 양주(楊州)를 맡게 되었으나 양주는 일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였다.
을유년(乙酉年, 1705, 숙종 31)에 사간으로 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어 제수되었는데, 성상이 갑자기 전위(傳位)한다는 명을 내렸다. 공은 근밀(近密)한 자리에 있으면서 변고에 잘 대처하여 마침내 성상의 마음을 감동시켜 명을 거두게 하니 당시 여론이 공을 훌륭하다고 여겼다.
병술년(丙戌年, 1706, 숙종 32)에 여주 목사(驪州牧使)에 제수되었는데 미처 부임하기 전에 흉도들이 어떤 사람을 사주하여 투서를 올려 조정의 벼슬아치들을 무함하였다. 이때 공 또한 체포되었으나 사실이 밝혀져 곧 석방되었다. 다시 승지가 되었다가 또 파주 목사(坡州牧使)에 제수되었다. 이때에 연이어 양친의 상을 당하였다.
상기를 마친 다음 다시 은대(銀臺 승정원)로 들어가서 차례로 승진하여 좌부승지에 이르렀으며, 체직하고 병조 참의가 되었다. 또 성주 목사(星州牧使)로 나가 치적을 세운 것이 으뜸이 되니 성상이 친서로 품계를 더해주고 동지의금부사로 불러들였다. 숙종(肅宗)이 병환이 들자 온천에서 목욕을 하기 위해 온양군(溫陽郡)에 행차하게 되었다.
이에 의정부에서는 도백(道伯)을 신중히 선발하여 마침내 공을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삼았다. 공은 책응(策應)하는 것이 법도에 잘 맞아 지체되는 일이 없었다. 임기를 마치고 조정에 들어와 한성부 좌ㆍ우윤, 형조ㆍ병조ㆍ호조의 참판이 되었으며 여러 번 도승지가 되었다.
다시 약원(藥院 내의원)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두 품계 승진하고 함경 감사(咸鏡監司)로 나갔다. 공은 북쪽 지방의 풍속이 투박함을 걱정하여 관례와 혼례에 대한 의제(儀制)를 정비하여 여러 읍에 반포하였고, 사서삼경(四書三經)을 간행하여 선비들을 권면하였다.
특히 국방에 유념하여 진보(鎭堡)를 추가로 설치하고 창과 방패의 사용법을 익히도록 하였는데, 법령이 갖추어져 있어 볼 만하였다. 문숙공의 사당을 개수하고 위전(位田)을 설치한 다음 몸소 제향을 올렸다. 그리고 원수대(元帥臺)와 시중대(侍中臺)에 문숙공의 자취가 남아 있다고 하여 모두 비석을 세워 사적을 기록하였다.
조정에 들어와 한성부 판윤이 되었는데, 신축사화(辛丑士禍)가 일어나자 물러나 양산(楊山)의 선영 아래에 은거하였다. 이때 세신(世臣)과 대신(大臣)들이 모두 도륙을 당하였다. 특히 당시 인망을 받고 있던 공을 더욱 싫어하여 북로(北路 함경도)의 일로 무고하여 옥사에 밀어 넣었다.
본도(本道)를 조사해보니 털끝만큼도 그런 사실이 없었지만 억지로 법을 적용해 용천(龍川)으로 유배 보냈다. 금상(今上)이 즉위하여 다시 새로운 교화를 펴자 공은 다시 한성부 판윤에 제수되고, 동궁의 죽책(竹冊)을 쓴 공로로 정헌대부(正憲大夫)에 올랐다.
평안 감사(平安監司)에 제수되어 제도를 정비하여 시행하고 과업(課業)에 힘쓰도록 권장하기를 북관에서 이전에 시행한 법과 거의 같이 하였다. 그러나 공은 기름지고 부유한 지역을 오래 맡는 것을 원치 않아 사직하고 돌아와 판윤이 되었다. 형조 판서로 전직하여 옥사를 명확히 판결하니 도성의 백성들이 흡족해하였다. 또 다시 공조 판서에 제수되었다.
공은 어려서 책을 읽다가 소광(疏廣)과 소수(疏受)의 일에 이르러서 개연히 감회가 일어 책 전면에 글을 써서 스스로 맹세하였다. 그런데 서쪽 귀양지에서 돌아오게 되자 더욱 세상에 이바지할 뜻이 없었다. 그래서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양산(楊山)으로 돌아가, 거처하는 집을 이지(二知)라고 이름 붙였다.
도연명(陶淵明)이 스스로 만시(挽詩)를 지은 것을 모방해 묘지명을 짓고는 자제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른 나이에 이렇게 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라고 하였다. 이해 가을에 시사(時事)가 또 변하여 흉당이 공을 사건에 연루시켜 모함하고자 하여 더욱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지어내다가 중지하였다.
역적 박필현(朴弼顯) 등이 군사를 움직여 반란을 일으키자 여러 고을이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이때에 재신(宰臣)들을 나누어 보내 안무하도록 하면서, 공이 북관(北關)의 민심을 얻었다 하여 특별히 공에게 가도록 명하였다.
당시 역신 권익관(權益寬)이 함경 감사가 되어 역적인 박창제(朴昌悌), 한성흠(韓聖欽), 황부(黃溥), 유호(柳灝)와 서로 결탁하여 역모를 꾸민 흔적이 낭자하였는데, 공이 이를 조사하여 알아내고 계책을 세워 그들의 기세를 꺾어 감히 준동하지 못하게 하고는, 불궤(不軌)한 내용 10여 조항을 장계(狀啓)로 보고하였다.
권익관 등은 역모의 실정이 탄로나 일이 실패하자 북인(北人) 우관(郵官)을 시켜 곧바로 장계를 올려 공을 모함하였다. 그리고 안에서는 권력을 쥔 자가 위관(委官)이 되어 지나친 형벌을 써서 황부와 박창제를 때려 죽여 그 입을 다물게 하고, 나머지 일을 모두 불문에 부쳤다. 공에게 권익관의 직임을 대신하게 하였으나 또한 그 위관에게 저지당하였다.
공은 안무하는 일을 마치고 곧바로 고향집에 돌아와 별세하니 기유년(己酉年, 1729, 영조 5) 4월 16일로 향년이 69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조정에서는 이틀 동안 조회를 중지하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수를 하사하였다. 성상은 경연자리에서 여러 번 애도하고 애석히 여기는 하교를 내렸으며 분무 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하고 좌찬성을 추증하였다.
공은 휘가 헌주(憲柱)이고, 자가 길보(吉甫)이다. 명현(名賢)인 용문(龍門) 조욱(趙昱)의 후손에게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인 경일(慶一)은 부사이고, 경운(慶運)은 아직 출사하지 않았으며 딸은 진사 이악진(李岳鎭)에게 출가하였다. 경일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모두 어리다.
경운은 아들 광보(光輔)를 낳았고, 딸은 박지원(朴志源)에게 출가하였다. 이악진은 양자 연(演)이 있다. 나와 공은 30년 동안 지기(知己)로 지내왔다. 나는 어리석고 공은 지혜로워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이를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긴 하였으나, 교분을 맺어 함께 교유한 것은 매우 오래되었다. 공은 기개와 풍도가 매우 뛰어나고 풍격과 의표가 사람을 감동시켰으며 마음이 넓고 소탈하고 간략하여 겉과 속이 한결같았다.
가정에서의 행실이 돈독하고 지극하여 부모를 섬길 적에 항상 어린아이처럼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 좋은 때와 좋은 절기에는 반드시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손님과 벗을 초청하여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렸다. 동성(同姓)간에 화목하고 이성(異姓)간에 화목하며 이웃들과 신뢰하고 어려운 이를 구휼하는 일에 이르러서도 각각 알맞은 법도가 있었다.
조정에 있을 때에는 언의(言議)가 바르고 공평하였으나 꼬투리를 잡아 꼬치꼬치 따지거나 가혹하고 엄격하게 행동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직 큰 의리와 관련된 문제에 있어서는 확고하게 지조를 지켜서 남의 말에 흔들리거나 꺾이지 않았다.
재주가 숙련되고 통달하여 어려운 일을 만나더라도 막히거나 거리끼는 것이 없었다. 새로 관직에 진출한 젊은이들은 더러 공을 깊이 알지는 못하였으나 노성한 선배들은 모두 기대하고 인정하여 중요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공이 별세하자 거리의 선비와 백성들이 한목소리로 슬퍼하였으니, 여기에서 공의 됨됨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건대, 공이 가정에서 보인 행실은 진실로 온 세상이 함께 들었고 언의와 재주는 조정에서 이미 드러났으니 또한 굳이 끝까지 논할 필요는 없다. 오직 공은 벼슬을 버리고 전야로 귀향한 사람으로서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며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백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난을 일으킨 자들을 토벌하고자 하였다.
이에 기회를 타고 지혜를 운용하여 의롭게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마침내 음모(陰謀)가 절로 그치게 되고 강토가 깨끗해질 수 있었다. 그 공로를 논하건대, 누가 공과 고하를 다툴 수 있겠는가. 문숙공이 변경의 국토를 개척한 것에 비교한다면, 길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고 견주어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이를 만하다. 《주시(周詩)》의 “너의 조고의 뒤를 잇게 한다.〔纉戎祖考〕”라는 말이 어찌 공과 가깝지 않겠는가. 명(銘)은 다음과 같다.
문숙공이 황폐한 북쪽 땅을 개척하여 / 文肅于北開荒屯
강토를 넓히고 멀리 오랑캐를 복종시켜 티끌을 쓸어버렸네 / 辟土服遠掃胡塵
지나간 자취가 역사에 찬란하게 빛나니 / 往蹟照耀靑簡紀
후손이 그 남겨주신 덕을 받들어 영원히 후세에 전하네 / 胄胤承貽垂永禩
나라의 인걸 중에 이지로 호를 삼은 이가 있으니 / 有號二知邦之傑
태산북두와 같은 명성 참으로 높도다 / 斗魁聲望正鬱律
도적이 그윽하고 깊은 곳에 숨어있고 요망한 무리들 날뛰자 / 寇伏幽奧妖孽逞
흉적을 한칼에 주벌하라는 명을 받았네 / 一劍誅鯨公受命
강유 두 가지 방법을 소용에 따라 적용하니 / 剛柔兩塗隨所用
역적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준동하지 못했네 / 賊情慌㥘不敢動
앉아서 관북지방을 견고히 하여 난리를 진압하니 / 坐牢關北戢亂略
천리의 나쁜 기운이 단번에 씻겨졌네 / 千里陰氛一洗滌
선대의 성대한 사업을 잘 계승하였으니 / 先春盛業曰善繼
위대하구나, 공의 가문의 전후 세대여 / 偉哉上下公之世
내가 시가를 지으며 마음이 격해지고 슬퍼지니 / 我作歌詩激以哀
공의 영령이 문득 와서 바람과 우레가 이는 듯하네 / 公靈歘吸生風雷
-----------------------------------------------------------------------------------------------------------------------------------------------------
[脚註]
[주01] 관(瓘) :
윤관[尹瓘, 1040년(고려 정종 6)~1111년(고려 예종 6)]으로, 자는 동현(同玄),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여진 토벌을 위해 별무반
을 창설하고 여진을 정벌하였으며 9성을 쌓았다. 그러나 여진족은 길이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친다는 조건 아래 평화적으로 성을
돌려주기를 원하였고, 이에 고려(高麗) 조정이 응하면서 여진정벌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를 이유로 그는 패장의 모함을 받고 문신들의 시기 속에 관직과 공신호가 삭탈되었으며, 회군해서는 왕에게 복명도 못한 채 사제
(私第)로 돌아갔다. 그러나 처벌을 하여야 한다는 재상이나 대간들의 주장을 물리치며 그를 비호한 예종(睿宗)의 덕으로 다시 수태
보 문하시중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의를 표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에 있다. 시호는 처음에 문경(文景)이라고 정하였다가 뒤에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주02] 회헌(晦軒) 문성공(文成公) :
안향(安珦, 1243~1306)으로,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처음으로 중국
에서 주자학(朱子學)을 고려(高麗)에 가지고 들어왔으며, 학교 재건과 인재양성을 통해 주자학을 적극 수용하였다.
[주03] 성상이 …… 선발하였다 :
1698년(숙종 24)에 숙종(肅宗)이 문묘(文廟)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 집춘문(集春門)을 거쳐 춘당대(春塘臺)로 돌아
와 과거를 실시하였는데, 이때에 문과(文科)에서 윤헌주(尹憲柱) 등 6인을 선발하였다.《肅宗實錄 24年 9月 11日》
[주04] 궁장토(宮庄土) :
조선 시대에 궁실과 왕실에서 분가한 궁가에 지급한 전토인 궁방전(宮房田)을 말한다.
[주05] 성상이 …… 내렸다 :
1705년(숙종 31) 10월에 숙종(肅宗)이 병 때문에 왕세자에게 선위(禪位)하겠다고 명을 내린 것을 이른다. 왕세자와 백관들이 계
속하여 명을 거둘 것을 간청하자 숙종은 얼마 뒤에 이 명을 철회하였다.
[주06] 위전(位田) :
직역(職役)을 맡은 자에 대한 대가 또는 관청의 경비나 관청에 소속된 사람들의 생활보장을 목적으로 지급된 토지를 말한다.
[주07] 원수대(元帥臺)와 …… 기록하였다 :
원수대는 함경북도(咸鏡北道) 경성군(鏡城郡)에 있으며, 시중대(侍中臺)는 함경북도 북청(北靑)에 있다. 원수대에는 윤관(尹瓘)이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가 되어 여진(女眞)을 토벌하고 개선(凱旋)한 것을 기념하여 비석을 세웠고 시중대에는 윤관이 문하시중으
로서 행영대원수가 되어 말갈(靺鞨)을 정벌하고 돌아온 것을 기념하여 비석을 세웠는데, 이 두 비석의 비문은 윤관의 후손 윤헌섭(尹
憲燮)이 지은〈윤문숙공전(尹文肅公傳)〉에 실려 있다.
[주08] 신축사화(辛丑士禍) :
신축년(辛丑年, 1721, 경종 1)에 경종(景宗)의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사이에 일어난 옥사로, 신축년에
시작하여 이듬해인 임인년(壬寅年, 1722)까지 이어졌다 하여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도 한다.
경종이 후사가 없고 병약하므로 김창집(金昌集), 이건명(李健命), 이이명(李頤命), 조태채(趙泰采) 등 노론 사대신(四大臣)이 주
장하여 연잉군(延礽君)을 왕세제로 책봉하였는데 소론의 조태구(趙泰耈), 유봉휘(柳鳳輝) 등이 반대하고 목호룡(睦虎龍)이 사대
신을 역모로 무고하여 사대신 이하 노론 일파들을 대거 실각하게 만든 사건이다.
[주09] 소광(疏廣)과 소수(疏受)의 일 :
소광과 소수는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의 명신(名臣)이다. 소광은 태부(太傅)가 되고 소수는 소부(少傅)가 되었는데, 소광이 소
수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아는 사람은 험난한 지경에 처하지 않는다. 공을 이룬 뒤에는 떠나가는 것
이 천도에 합당하다.” 하고, 두 사람이 동시에 치사(致仕)를 청하였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모두 어질게 여겨 그들이 시골로 돌아가는 날 전송하러 온 자들의 수레가 수백 대나 되었으며, 황제가 많은 황
금을 하사해 주었다. 이들 두 사람은 그 뒤에 고향으로 내려가서 황제에게서 받은 황금을 다 나눠 주었다. 《漢書 卷71 疏廣傳》
[주10] 이지(二知) :
이는 노자(老子)의《도덕경(道德經)》제44장의 “만족할 줄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으니, 한없이 장구할
수 있다.[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라는 구절에서 ‘만족할 줄 안다. [知足]’와 ‘그칠 줄 안다. [知止]’의 두 ‘지(知)’ 자를 취
하여 지은 것이다.
[주11] 만시(挽詩) :
이는《도연명집(陶淵明集)》권4에 실려 있는〈만가시(挽歌詩)〉3수를 가리킨다.
[주12] 역적 …… 소란스러워졌다 :
박필현(朴弼顯) 등이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에 가담한 일을 말한다. 박필현은 1728년(영조 4) 3월에 이인좌가 청주(淸州)에서 난
을 일으키자 곧이어 반란에 가담하였는데,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태인(泰仁)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금구(金
溝)를 거쳐 전주(全州)에 도착하였으나, 전주성에서 반란에 가담하기로 약속하였던 전라 감사 정사효(鄭思孝)가 성문을 열어주지
않으면서 반란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후 아들 박사제(朴師濟)와 함께 상주에 숨어 있다가 참수(斬首)되었다.
[주13] 역신 …… 낭자하였는데 :
권익관(權益寬)은 1728년(영조 4)에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발생하기 직전에 함경 감사(咸鏡監司)가 되었는데, 박창제(朴昌悌),
한성흠(韓聖欽), 황부(黃溥) 등의 역적들과 연락을 취하여 비밀 모의를 한 후 섬에 들어가서 배를 제조하고 영하(營下)에서 군졸을
훈련시켰으며 간장으로 무명을 물들이고 군량미로 마른 식량을 만들었다.
이런 사실이 안무사인 윤헌주(尹憲柱)에 의해 발각되었다.《英祖實錄 5年 1月 20日, 2月 29日, 10月 16日, 6年 6月 10日》
[주14] 조욱(趙昱) :
1498~1557. 자는 경양(景陽), 호는 용문(龍門)ㆍ보진재(葆眞齋), 본관은 평양(平壤)이다. 1516년(중종 11) 생원과 진사 양시에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조광조(趙光祖), 김식(金湜)을 사사(師事)하면서 학문 연마에 힘썼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두 스승으로 인해 계루되었으나 연소하다고 하여 화를 면하였다. 그 뒤 형인 조성(趙晟)과 함께 삭녕(朔寧)
에 집을 짓고 학문을 강론하며 지냈는데, 세상 사람들이 이들을 정호(程顥)ㆍ정이(程頤) 형제에 비겨 칭송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3년상을 마치고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는데, 학문이 알려져 용문선생이라 일컬어졌다. 이조 참의
에 추증되었고, 용문서원(龍門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용문집(龍門集)》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주15] 주시(周詩)의 …… 말 :
《주시》는《시경(詩經)》을 가리킨다.《시경》〈대아(大雅) 한혁(韓奕)〉에 “왕이 친히 명하시되, 너의 조고의 뒤를 잇게 하노니,
나의 명을 폐하지 말 것이요, 밤낮으로 나태하지 말아서, 너의 자리를 공경히 지킬지어다.〔王親命之, 纘戎祖考, 無廢朕命, 夙夜匪
解, 虔共爾位.〕”라고 하였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사경화 (공역) | 2014
--------------------------------------------------------------------------------------------------------------------------------------------------------
[原文]
世數我東盛族, 必以坡平之尹爲稱首。 蓋其遠祖太師莘達佐麗祖, 統合三韓銘功紀烈, 蔭及後代。 訖勝國十餘世, 愈益赫舃, 而文肅公瓘最著, 事載之史, 尹氏由此益大。 入我朝, 忠景公師路尙世宗女, 勳封府院君。 六世而宗福, 不仕, 用子得說貴, 贈兵曹參判, 卽公曾祖也。 祖受說, 濟用奉事: 考澤, 同知中樞, 兩世不顯, 亦以公貴贈爵。 妣安氏, 晦軒文成公之裔也。 公之家閥旣如此, 而公又感應吉夢, 稟姿殊特, 蚤悟夙就, 人稱神童。 年二十三, 中司馬試。 始屈蔭仕, 由參奉陞奉事。 上幸學謁聖, 設科取士, 我先君忠正公實掌試事, 得公文爲壯元。 公久負公車聲, 一世籍籍稱得人。 先是, 人有夢文肅公詣闕, 得桂枝以授公, 且戒之曰: “汝當以寅年揷此花。” 至是年適戊寅, 而所試之題, 乃是開拓土彊, 設置六鎭, 卽文肅公北路事也。 聞者嗟異之。 歷典籍、禮・兵郞、黃海都事, 爲正言、獻納、持平、掌令, 論宮莊當罷, 細娛宜戒, 言甚切直, 上竝嘉納。 入春坊至輔德, 帶三字銜, 間爲掌樂、軍資正。 爲養求外, 得南陽、楊州, 楊以事不赴。 乙酉, 以司諫擢拜承政院同副承旨, 上猝下傳位之命。 公在近密, 處變得宜, 終底感回, 時議多之。 丙戌, 除驪州, 未赴, 凶徒嗾人投匭, 誣陷朝紳。 公亦被逮, 事白卽釋, 還承旨, 又除坡州。 荐丁內外艱, 制終, 復入銀臺, 序遷至左副, 遞貳兵曹。 又出牧星州, 治爲一道最, 璽書增秩, 以同知義禁召。 肅廟寢疾, 爲浴溫泉, 駕幸溫陽郡。 廟堂極遴道伯, 遂以公爲忠淸監司, 策應中窾, 事無惉懘。 秩滿入爲左・右尹、刑・兵・戶曹參判, 屢爲都承旨。 再以藥院勞, 進二階, 出咸鏡監司。 公患北俗椎鄙, 備冠婚儀制頒列邑, 刊《四書》、《三經》, 以勸逢掖。 尤留心桑土, 增設鎭堡, 鍊習戈矛, 具有條敎可觀。 改修文肅公祠, 置位田, 躬薦芬苾, 以元帥、侍中二臺爲文肅遺跡所曁, 俱立石紀績。 入爲判尹。 辛丑, 士禍作, 退居楊山先墓下。 時世臣大僚悉被屠戮。 尤忌公負時望, 誣以北路事傅致獄。 査問本道, 無絲毫實, 以枉法配龍川。 今上更新化, 復拜判尹, 書春宮竹冊, 加正憲。 拜平安監司, 設施課勸, 大抵倣北關餘規, 而不欲久處脂膏, 辭遞還判尹。 轉刑曹判書, 剖決明允, 都民翕然。 又拜工曹判書。 公少讀書, 至疏廣、受事, 慨然興懷, 題卷面以自矢。 及自西竄還, 益無供世意。 至是遂歸楊山, 名其菴曰二知, 擬淵明自挽作墓銘, 語子弟曰: “恨不早歲辦此也。” 是年秋, 時事又變, 凶黨欲擠陷公以事, 尤架虛而止。 逆賊弼顯等擧兵反, 諸路大騷。 分命宰臣安撫, 以公得北關心, 特命公往。 時賊臣益寬爲北伯, 與賊昌悌、賊聖欽、賊溥、賊灝締謀, 逆節狼藉。 公詗知之, 以計落其角距, 使不敢動, 狀列不軌狀十數條。 益寬等情現事敗, 使北人爲郵官者直上啓扼公, 而內則柄人爲委官, 以淫刑撲殺溥、悌, 滅其口, 餘皆不問。 以公代益寬, 亦爲其所遏。 公了安撫事, 直歸鄕舍以卒, 己酉四月十六日也。 享年六十九。 訃聞, 輟視朝二日, 遣禮官賜祭。 臨筵累下悼惜之敎, 錄奮武原從勳, 贈左贊成。
公諱憲柱, 字吉甫。 娶名賢趙龍門昱之後, 生二男一女: 男慶一, 府使: 慶運, 未仕。 女適進士李岳鎭。 慶一生二子一女, 皆幼。 慶運生子光輔, 女適朴志源。 李岳鎭有繼子演。 余於公三十年素交也。 雖自愧愚智之相懸, 而托契周旋則固久矣。 公氣度俊偉, 風標動人, 恢疎簡易, 裏襮如一。 內行篤至, 事二尊人, 恒有孺子慕。 嘉辰令節, 必盛供具, 速賓友以佐歡笑, 以至於睦姻任恤, 各有矩則。 立朝言議正平, 不喜鉤摘刻深, 惟於大義理確然自守, 不以人言撓奪。 才猷練達, 遇事無滯礙。 新進少年, 或不深知, 而先輩老成, 無不期許引重。 及卒, 閭巷士庶, 一辭齎咨, 此可以見公矣。
然余惟公家庭之行, 固擧世所共聞, 言議才猷, 著在公朝, 亦不必究論也。 惟是公以掛冠歸田之人, 聞變雪涕, 奮袂而起, 思以白首之年, 爲國誅難。 乘機運智, 不畏義死, 卒使陰謀自戢, 疆埸載淸。 論其勞伐, 孰與高下其視文肅公拓土開邊, 可謂殊塗而同歸, 克對而無羞矣。 《周詩》所謂“纘戎祖考”者, 豈亦於公近之歟! 銘曰:
文肅于北開荒屯, 辟土服遠掃胡塵。 往蹟照耀靑簡紀, 胄胤承貽垂永祀。 有號二知邦之傑, 斗魁聲望正鬱律。 寇伏幽奧妖孼逞, 一釰誅鯨公受命。 剛柔兩塗隨所用, 賊情慌㥘不敢動。 坐牢關北戢亂略, 千里陰氛一洗滌。 先春盛業曰善繼, 偉哉上下公之世。 我作歌詩激以哀, 公靈欻吸生風雷。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