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암집 제24권 / 묘갈(墓碣)
용재(慵齋) 선생 이공(李公) 묘갈명
공은 휘가 종준(宗準)이고 자는 중균(仲勻)이며, 일찍이 자호를 용재(慵齋)라 하였다. 그 선조(先祖)는 월성(月城) 사람인데 후에 영가(永嘉)의 금계리(金溪里)로 이주하였다. 성화(成化) 정유년(1477, 성종 8)에 진사(進士)에 급제하고 병오년(1486)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홍문관 교리에 이르렀다.
공은 젊어서 우뚝한 기개가 있었고, 시문은 청건(淸健)하여 격력(格力)이 있었으며, 또 서화(書畫)에 능하여 중국 사람이 칭찬할 정도였다. 일찍이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김 선생(金先生)』을 사사(師事)하였고, 또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정 선생(鄭先生) 』 , 한훤당 『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김 선생』 및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 김공(金公)』,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남공(南公)』과 도의(道義)의 벗이 되었다. 그리하여 경연(經筵)에서 학문으로 임금을 보필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연산군(燕山君)에게 죄를 받아서 죽으니, 홍치(弘治) 무오년(1498, 연산군4)이었다.
중묘(中廟) 때 화를 당했던 이들이 모두 복관(復官)되었는데 유독 공만은 후사(後嗣)가 없어 복관을 청하는 사람이 없었다. 인조(仁祖) 무자년(1648, 인조26)에 영가의 인사들이 비로소 사당을 세워 제향하였으며, 금상(今上) 기사년(1689, 숙종15)에 또 조정에 복관을 청하여 부제학의 증직이 내렸다. 장차 묘비를 세우고자 현일(玄逸)에게 명을 짓게 하였다.
명은 다음과 같다.
빼어난 자질에 문장을 갖춰 백설처럼 환한 풍모 / 質秀而文皎白雪
좋은 사우의 도움을 얻어 학식이 나날이 향상됐지 / 獲師友資邁厥識
경연에서 논사하여 임금을 잘 보필하였으며 / 經幄論思補袞闕
한 번 중국에 사행 가자 삼절의 명성 자자했네 / 一行觀周籍三絶
좋지 못한 시운을 만나 큰 화란이 일어났으나 / 逢時不祥禍熸烈
밝은 세상이 다시 와서 누명을 벗을 수 있었지 / 皓天有復事著白
저 우뚝한 외루에 사당을 세워 제향하고 / 鬱彼畏壘載尸祝
성상께서 감동하여 또 증직을 내리셨으니 / 有感宸衷又追秩
내 그 사적을 모아서 비석에 새기노라 / 我最其蹟鑱墓石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하 (역) |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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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公諱宗準。字仲匀。嘗自號慵齋。其先月城人。後徙居永嘉之金溪里。成化丁酉。擧進士。丙午登第。官至弘文館校理。公少倜儻負氣。爲詩文。淸健有格力。又能工書畫。中國人稱之。嘗師事佔畢齋金先生。又與一蠹鄭先生,寒暄金先生及濯纓金公,秋江南公。結道義交。其在經幄。補益弘多。得罪燕山死。弘治戊午中廟時。諸被禍者。皆得復官。獨公無嗣。未有爲之請者。仁祖戊子。永嘉人士始立廟享之。今上己巳。又請於朝。贈副提學。且將立石表其墓。俾玄逸爲之銘。銘曰。
質秀而文。皎白雪。獲師友資邁厥識。經幄論思補衮闕。一行觀周籍三絶。逢時不祥禍熸烈。皓天有復事著白。鬱彼畏壘載尸祝。
有感宸衷又追秩。我最其蹟鑱墓石。
慵齋先生遺稿 附訥齋遺稿 / 附錄
葛庵先生文集卷之二十四 / 墓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