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비가 온다. ‘쏴아’ 내지르던 아우성이 ‘추적추적’거리는 소리로 바뀐다. 거리의 소음이 빗속에 묻히고 주위가 고요하다. 물속의 고요랄까. 고요는 빗방울이 만드는 화음을 더욱 선명하고 명랑하게 만든다. 그 소리가 좋다. 마치 자그마한 정원에 앉아 나만의 공간에서 보호받는 기분이다.
고요 속에 있으면 내면 깊은 곳에 있던 상념이 ‘똑똑똑’ 문을 두드린다. 나는 문을 열어주고 그냥 그것을 따라가면 된다. 높낮이 없던 생각들이 낡고 오래된 기억 속으로 먼저 달려간다. 머루빛 밤하늘에 흐르던 고향마을의 별들, 개울가에 심어진 코스모스, 자동차가 지나가면 손을 흔들던 어린 날의 나, 고향집 마구간 그리고 누렁이의 느린 울음 ······. 지워진 줄 알았던 기억이 심장을 따듯하게 만든다.
때로는 지난날의 과오가 명치를 찌릿하게 건드리기도 한다. 동네에 찾아든 거지를 놀리며 쫓아다니던 나와 친구들······. 우리는 무리를 이루어 돌을 던지고 소리를 지르며 거지를 따라다녔다. 왜 그랬을까. 어렸다는 말로 변명이 되지 않는다. 무심코 했던 행동들이 오랜 후에 곱씹으며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다. 마음이 부끄럽고 아프고 또 슬퍼진다. 어리석은 짓을 하고 나면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그것을 회복할 수 없는 법이다.
또 어느 순간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열심히 산다.’말이 우습다. ‘열심히 글을 써야지’도 아니고 ‘열심히 운동을 해야지’도 아니다. 모든 일을 열심히 해야 한다는 뜻일까. 쉬지 않고 부지런히 사는 것이 정말 잘사는 것일까. 말이 꼬리를 물고 늘어진다.
한차례 말장난이 끝나면 아무런 이유 없이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그것은 혼자 있을 때 가장 강하게 다가온다. 나는 밖에서 즐거움을 찾기보다 조용한 곳에 혼자 있을 때가 더 즐겁다. 이상한 성격이다. 특히 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은 아무것도 하기 싫다. 외출도 피하고 전화 벨소리도 죽이고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지낸다.
가끔 스스로 질문을 던져본다. ‘혼자 있는 것이 외로운가?’ 외로운지 그렇지 않은지 잘 모르겠다. 허나 일반적이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또한 남들 눈에는 외롭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십대 후반, 산골 작은 암자의 단청 공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때 주지스님이 사주팔자를 봐주겠다고 했다. 누구나 미래가 궁금하기 마련이다. ‘얼씨구나’ 하고 태어난 날과 시간을 알려주었다. 스님은 책을 뒤적거리고 나서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니 팔자에는 고(孤)가 많구나.” 짧은 문장이 다였다. 외로울 고! 고가 많다? 스님은 심각한 표정을 하고 애처로운 눈길을 보냈다. 고가 많다는 것이 불행한 삶을 산다는 뜻일까 아니면 단지 외롭다는 뜻일까. 스님은 딱히 정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외로울‘고(孤)’와 홀로‘독(獨)’은 항상 같이 다닌다. 사주에 고가 많다는 것은 결국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사람은 대부분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 속에서 찌지고 볶으며 살아야 사람답게 산다고 말한다. 가끔 세상이 싫어 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가 혼자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극히 일부분이다. 그러니 외롭다는 것은 아무도 곁에 없다는 뜻이 숨어 있다.
톡 던져진 문장을 심각하게 줍지 않았다. 그때는 몸담은 분야에서 배우고 경력 쌓기에 바빴다. 주위에 사람이 많았고 무엇을 해도 즐거운 젊음이 있었다. 그 문장은 내 삶 어디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한번 듣기 시작한 문장은 그 후로 불쑥불쑥 귓속에서 서걱서걱 거렸다. ‘니 팔자에는 고가 많다, 니 팔자에는 고가 많다.’말 속에 주문이 있었던 것일까. 가끔 ‘고’가 많은 삶은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외로울 것이라 생각한다. 허나 사람 속에 있다고 해서 즐거운 것도 아니고 혼자라고 해서 외로운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혼자가 되면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법이다.
곱씹어 보면 삼십대가 되면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처녀시절이 남들보다 유난히 길었다. 친구들은 적당한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기를 기르고 남편을 돌보느라 만날 시간이 부족했다. 혼자서 공원을 산책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 그것이 노처녀의 일상이었다. 공원길과 스쳐가는 타인과 나무와 들꽃 그리고 도서관의 책들이 친구였다. 아무 때나 갈수 있었고 가면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 혼자였지만 외로울 시간이 없었다.
혼자서 뭔가를 하는 것에 익숙해져 갔다. 어릴 때 배워보고 싶었던 악기를 배우고 운동을 했다. 무언가를 적어보는 것에 시간을 보냈다. 어딘가에 집중하는 시간이 마치 명상을 하는 것처럼 즐거웠다. 가랑비 옷 젖듯 시나브로 고독에 중독되어 갔던 것인지 모른다.
결혼을 하고 사십대를 시작하며 귀촌을 선택했다. 시골에 가면 나무 그늘 밑에서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꿈꾸던 전원생활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나무냄새를 맡으며 풀이라도 뽑고 있으면 지나가던 누군가가 꼭 아는 체하며 햇살에 나를 세워놓았다.
수다는 관계의 시작이다. 한차례 의식을 끝내고 나면 처음에는 울타리 밖이지만 다음에는 쉽게 현관을 들어선다. 한번 현관을 들어서면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흔하게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는 일의 연속이다. 사람을 만나 관계하며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는 것이 삶이다. 그러니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가까우면 서로의 열기로 상처 받기 마련이다. 나는 적당히 거리 두는 방법을 몰랐다.
신중하지 못한 한 번의 친절이 고통으로 다가왔다. 수다에 의해 여기가 어딘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라는 존재가 조금씩 희미해져 갔고 일상이 늪처럼 변해버렸다. 허우적거릴수록 사지가 매몰되고 사람에 지쳐갔다. 허물없이 지내는 것이 무서웠다.
혼자만의 하루가 지워지고 지워졌다. 해가 뜨면 또 하루를 어떻게 보낼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사람 속에서 불행했다. 사람 속에서 외로웠다. 어쩌면 저 깊은 내면에 있던 ‘고’라는 것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세상으로부터 나를 소외 시키고 있었던 것인지 몰랐다. 스님의 말이 저주처럼 맞아 떨어졌다. ‘고’가 많다는 것은 남들처럼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뜻했다.
버티다, 버티다 떠나왔던 도시로 돌아왔다. 도시 생활은 오히려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남편을 출근 시키고 현관문을 잠그면 혼자가 된다. 그리고 주위는 오르지 적요뿐이다. 혼자 있으면 아무런 말이 필요 없다.
적요 속에서 차 한 잔을 손에 쥐고 깊은 고독 속에 빠진다. 고독은 사유를 불러온다. 그것은 온전한 자아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이다. 혼자 있을 때 삶에 대한 애착은 깊어진다. 그러니 사람은 누구나 고독하기 마련이다. 피카소는 “고독 없이 무엇 하나 쟁취할 수 없다”했다. 만약 고독이 없었다면 세상은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추적거리던 빗소리가 다시 거칠게 쏟아진다. 멀리서 “우르르 꽝꽝”하는 뇌성도 들린다. 적요와 빗소리 그리고 나는 서로 밀고 당기기를 반복하며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다. 거친 폭우가 내리는 순간 나는 적요롭다. 그리고 고독하다.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는 독특한 방법이 있다. 혼자 있음에 편안함을 느끼는 것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첫댓글 그대홀로
하얀이슬 곱게 머금고
서리꽃 혼을 심으며
달빛 냉기 머금은 이 긴 겨울밤에
너플너플 춤추며
달빛사랑하겠지 ㅎ
고독만 남은 수필
감사히 읽었습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
별님 댓글에 쓰인 시가 참 좋습니다. 퇴근길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람은 다 외로워요. ^^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셈~잘지내시죠? 코로나 때문에 얼굴 잊어버리겠습니다.^^
두번째 문단에 상렴이 문을 똑똑 두드린다. 라는 문장 중 상렴이 상념想念의 오자 같습니다.
오자가 맞습니다. 퇴고를 할때는 왜 보이지 않았을까요? 감사합니다^^